옥관문화훈장 수훈자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5px -13px" | 1984 이매방 중요무형문화재 승무, 살풀이춤 보유자 | 1987 강수연† 배우 | 1988 김송† 소설가 | 1988 유현목 영화감독 | 1991 김희조 작곡가 | ||||
1992 구봉서 희극인 | 1992 금수현† 작곡가 | 1992 김길봉 향토문화인 | 1992 김학수 화가 | 1992 도동환† 영화인 | |||||
1992 오승우† 화가 | 1992 윤장섭 건축가 | 1992 이인표 기업인 | 1992 천혜봉 서지학자 | 1992 황금심 가수 | |||||
1995 금난새 지휘자 | 1995 박춘석 작곡가 | 1995 고성현 성악가 | 1998 고운봉 가수 | 1999 안숙선 국악인 | |||||
2000 최민식 사진작가 | 2001 권성덕 연극인 | 2001 마에다 켄지 영화감독 | 2001 박형진 문화원장 | 2001 송대관 가수 | |||||
2001 유광열 도예인 | 2001 장석웅 건축가 | 2001 주남철 건축가 | 2001 하춘화 가수 | 2002 김민태 국악인 | |||||
2002 김혜식 예술종합학교 무용원장 | 2002 명계남 배우 겸 제작자 | 2002 문소리 배우 | 2002 문장호 2002 | 2002 서경선 작곡가 | |||||
2002 신응수 대목장 | 2002 이명동 사진작가 | 2002 이배구 출판가 | 2002 이성강 애니메이션 감독 | 2002 임동진 배우 | |||||
2002 장세건† 만담가 | 2002 최완귀[1] 시나리오 작가 | 2002 조방헌[2] 가수 | 2002 황일인 건축가 | 2003 구희서[3] 연극평론가 | |||||
2003 김기덕 영화감독 | 2003 김숙자† 중요무형문화재 살풀이춤 보유자 | 2003 김춘옥 화가 | 2003 박노을 온양문화원장 | 2003 박행보 화가 | |||||
2003 배만금†[4] 가수 | 2003 안종만 출판가 | 2003 윤승중 건축가 | 2003 이장호 영화감독 | 2003 이토 아비토 문화인류학자 | |||||
2003 진성기 제주민속박물관장 | 2003 최은순 중요무형문화재 매듭장 보유자 | 2004 강영중 기업인 | 2004 김기찬 사진작가 | 2004 김정동 고건축학자 | |||||
2004 성백엽 애니메이션 감독 | 2004 우제길 추상화가 | 2004 이정호 애니메이션 제작자 | 2004 정석진 문화원장 | 2004 최기영 대목장 | |||||
2004 최민식 배우 | 2004 태덕수 탈춤연구자 | 2004 한용희 작곡가 | 2005 권창륜 서예가 | 2005 김규원[5] 무용가 | |||||
2005 김태원 문화원장 | 2005 박기정 만화가 | 2005 오윤† 판화가 | 2005 조남식 문화원장 | 2006 강상수[6]† 가수 | |||||
2006 김준섭 서예가 | 2006 김태근 연극연출가 | 2006 백락구 문화원장 | 2006 이병훈 PD | 2006 이정일 출판가 | |||||
2006 임남곤 문화원장 | 2007 고두심 배우 | 2007 김상옥[7] 불교인 | 2007 오기수 건축가 | 2007 위황량 장흥문화원 이사 | |||||
2007 전도연 배우 | 2007 정재만 전통무용가 | 2007 정재욱 문화원장 | 2007 카네코 카즈시게 일본 아시아민족조형문화연구소장 | 2007 파트리스 드 라 페이에 미술평론가 | |||||
2007 한창조 조각가 | 2008 김산호 만화가 | 2008 김윤철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 2008 김준식 문화원장 | 2008 박만식[8] 불교인 | |||||
2008 박주환 한국화랑협회 회장 | 2008 안선재[9] 서강대 명예교수, 번역가 | 2010 김동학 중요무형문화재 전통장 | 2010 박춘석† 작곡가 | 2012 박재상[10] 가수 | |||||
2012 이무호 서예가 | 2012 이정진 배우 | 2012 조민수 배우 | 2015 정재도 한글학자 | 2019 송강호 배우 | |||||
2021 백영규 도예가 | 2024 이문세 가수 | ||||||||
금난새 Nanse Gum | |
출생 | 1947년 9월 25일 ([age(1947-09-25)]세) |
경상남도 부산부 | |
국적 | [[대한민국| ]][[틀:국기| ]][[틀:국기| ]] |
본관 | 김녕 김씨 (金寧 金氏) |
직업 | 지휘자 |
가족 | 아버지 금수현[1], 어머니[2] 형 금나라(1945년생), 동생 금내리, 금누리, 금노상 배우자 홍정희(1981년 결혼) 아들 금다다, 금드무니 외조모 김말봉 |
학력 | 경희대학교 병설 경희중학교 (졸업) 서울예술고등학교 (작곡과 / 졸업) 서울대학교 음악대학 (작곡과 / 학사) 베를린국립음악대학 지휘과(사사:라벤슈타인) 계명대학교 (철학 / 명예박사) |
데뷔 | 1977년 제 5회 카라얀국제콩쿠르 |
링크 |
[clearfix]
1. 개요
대한민국의 지휘자이다.2. 상세
아버지는 음악가인 금수현, 동생은 지휘자 금노상이다. '난새'는 '하늘을 나는 새'를 뜻하는 순우리말.[3] # 성이 김(金)씨인데 아버지 세대부터 성의 한자를 '금'으로 읽어서 사용하는 이름은 금난새이지만, 이전부터 주민등록증과 여권, 운전면허증 등의 신분증과 가족관계등록부상으로는 김난새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로 인해 재산 상속 과정에서 상속신청서와 가족관계증명서상의 성명이 달라 상속이 불가능하다는 문제를 낳게 됐고, 결국 2018년 소송을 걸게 됐다. 1, 2심에서는 금난새 측이 패소했으나 대법원에서는 광복 직후부터 금수현-금난새 집안이 성의 한자 독음을 '금'으로 사용해 왔고, 이를 사회적으로 사용해 왔기 때문에 가족관계등록부의 성씨의 한자 독음을 '금'으로 바꿀 수 있다고 판결했다. 이 판결로 금난새는 법적으로도 완전히 성씨의 한자 독음을 '금'으로 변경할 수 있게 됐다. 관련 기사[4] 또한 금난새의 집안은 김녕 김씨가 쓰는 항렬자를 쓰지 않고 한글 자음의 ㄱ,ㄴ,ㄷ 순으로 이어지는 독자적인 항렬자를 사용한다.서울예술고등학교, 서울대학교 음악대학 작곡과를 졸업했다. 청소년기부터 지휘자를 꿈꿔왔으나 당시 한국에서는 지휘를 체계적으로 배울 수 있는 기회가 없어 베를린 예술대학교 음악대학까지 무작정 가서 무일푼으로 어렵게 공부했다고 한다. 이후 한국인 최초로 1977년 카라얀 국제 음악 콩쿠르에서 입상해 데뷔했고, 귀국 후 KBS 교향악단의 지휘자를 맡아 최연소 지휘자란 기록을 남겼다.
1992년 수원시립교향악단의 지휘자를 맡았는데, 이에 대해 구설수가 많았다고 한다. 당시만 해도 수원시립교향악단과 KBS 교향악단의 규모나 유명세는 차이가 매우 심했고 따라서 금난새가 압력을 받아 KBS교향악단에서 쫒겨난 게 아니냐는 루머가 돌기도 했다. 이에 대해 금난새는 본인의 의지였으며 수원시향의 문제점을 고쳐보고자 하는 생각에 옮긴 것이라고 해명했다.
이후 1997년 한국 최초의 순수 민간 오케스트라인 "유라시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현 뉴월드 필하모닉 오케스트라)[5]를 창립, 활동하고 있다. 연주 장소의 선정이나 연주 내용에 있어서 개성 있는 일화가 많아 일반 대중들에게도 잘 알려져 있는 편이다.
2013년부터 서울예술고등학교 교장으로 재직하던 중 2019년 교장직에 충실하지 못했다는 업무 소홀 논란이 빚어졌고, 결국 2019년 8월 교장직에서 해임됐다.[6][7]
3. 경력
연도 | 경력 | 비고 |
2015년 9월 ~ | 한경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예술감독 | |
2015년 1월 ~ | 성남시립예술단 예술총감독, 상임지휘자 | |
2013년 10월 ~ 2019년 8월 | 제8대 서울예술고등학교장 | 해임[8] |
2012년 7월 | 라움 아트센터 예술감독 | |
2012년 4월 | 경남메세나협의회 홍보대사 | |
2012년 3월 | 창원대학교 예술대학 음악과 석좌교수 | |
2012년 2월 | 한국스카우트연맹 명예홍보대사 | |
2011년 8월 | 청소년적십자 홍보대사 | |
2011년 2월 | 제주도 홍보대사 | |
2010년 3월 | 보건복지부 결핵홍보대사 인천시립예술단 예술감독, 상임지휘자 | |
2008년 2월 ~ 2011년 | S&T홀딩스 사외이사 | |
2006년 9월 ~ 2010년 | 경기도립오케스트라 예술감독 | |
2002년 | 한국기업메세나협의회 홍보대사 | |
2001년 | 청주시시립교향악단 상임지휘자 | |
1999년 | 경희대학교 음악대학 기악과 교수 | |
1998년 | 유라시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최고경영자 CED, 음악감독 대전시립교향악단 상임지휘자 경기필하모닉오케스트라 지휘자 | |
1992년 | 수원시립예술단 상임지휘자 | |
1981년 | KBS 교향악단 전임지휘자 | |
1980년 | 국립교향악단 전임지휘자 |
4. 수상
수상 연도 | 수상 | 비고 |
2011년 | 가장 문학적인 상 음악부문 | |
2011년 | 제 30회 세종문화상 예술부문 | |
2010년 | 제 13회 효령상 문화부문 | |
2009년 | 한국최고경영자회의 문화경영 문화인부문 대상 | |
1999년 | 제 15회 평론가협회 음악대상 | |
1995년 | 옥관문화훈장 | |
1977년 | 제 5회 카라얀국제콩쿠르 4위 | |
1965년 | 서울대학교 음악대학 주최 콩쿨 작곡부문 입상 |
5. 논란
5.1. 서울예술고등학교 직무태만
그가 2013년에 서울예술고등학교장직을 맡게 됐을 때, 계약 내용 중에서 1년에 3일만 출석을 해도 된다는 내용을 두시탈출 컬투쇼에서 본인이 직접 언급을 해 기사와 함께 논란이 됐었다. 그리고 실제로 학교에서 금 전 교장이 출근을 하는 날보다 출근을 안 하는 날이 월등히 많았다. 이마저도 학교 오케스트라와 관련돼서 출근한 것.그 후에 학교에서 교장직을 하며 가끔씩 실기에 우수한 학생들을 데리고 개인적인 연주에 데리고 다니며 보수를 주기는 하면서 연주를 시켰다.[9][10] 본론으로 돌아가자면, 학생들이 잘 모이지 않아서, 연주를 하겠다고 하는 학생들로 인원을 겨우겨우 맞추긴 했지만, 외부에 서울예고 학생들을 자랑하고 싶은 마음이 큰 금난새가 학생들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지, 교장직을 이어가던 중 2018년 재계약 후에 2019년 6월 17일에 "지휘자 금난새, 서울예고 교장 업무 소홀"이라는 기사와 함께 다시한번 논란이 빚어졌다.
그리고 마침내 2019년 8월 16일 기사와 함께 금 전 교장의 해임소식이 알려졌다.
그러나 그 다음날인 8월 17일에는 8월 21일에 있을 서울예술고등학교의 수요채플 시간에 금난새 전 교장의 퇴임예배 를 한다는 소식과 함께, 금 전 교장은 명예교장으로서 서울예술고등학교에 남아 교장이 되기 전부터 해왔던 지휘를 계속 이어간다는 소식이 퍼졌다.
6. 기타
- 그가 지휘하는 것을 보면 아주 파워풀한 지휘가 눈에 띈다.
- 밴드 오브 브라더스 OST, 캐리비안의 해적 OST를 자주 연주한다.
- 송창식의 서울예고 동창으로, 그가 가난해서 수돗물로 배를 채웠다고 회상했다.
- 세간에 일반적으로 알려진 부드러운 이미지와는 다르게, 오케스트라에게는 꽤나 권위적인 면이 있다고 알려졌다. 수원시향에서 상임지휘자로 재직 당시 이런 문제로 단원들과의 불화가 있었다고 한다. 또한 교장으로 재직했지만 현재는 해임된 서울예술고등학교에서도 오케스트라 지휘를 맡으면 연주 연습에서 학생들을 꽤나 몰아붙이는 선생으로 유명하다고. 부산 내셔널 유스 오케스트라에서도 권위적인 태도는 그대로다.
7. 광고
- 삼성전자 오디오 '르네상스' - 그가 나온 CF 중 가장 유명한데, 1990년대 초반 인켈·에로이카 등으로 과점된 오디오 시장에 삼성과 롯데[11] 등 대기업이 뛰어들었기 때문. IMF로 중산층이 박살나기 전까지는 한국 대중 오디오 시장이 크게 융성했다. 현재도 삼성은 하만 카돈을 인수해 산하에 두고 있다.
- 한라비발디
- 한독약품 훼스탈
- 양지사 다이어리
- SK매직 매직쉐프
[1] 1992년 사망[2] 2017년 사망[3] 본인의 말에 따르면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공식 등록된 최초의 순우리말 이름이라고 했으나 JTBC 한名회에서 조사해 본 결과를 보면 최초는 '최참도'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이라고 한다. 관련 글 행정망전산화 및 호적전산화 이전에는 전국적 등록 상황을 파악할 길이 없으니 본인 주장은 신빙성이 낮으며 전산화가 완료된 현 시점의 JTBC 조사 결과가 맞다고 봐야 한다.[4] 1심과 2심에서는 이걸 함부로 허용해줬다가는 본관 제도에 문제가 생길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가족관계등록부에 등재된 자기 성씨의 한자 독음을 임의로 바꾸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취지에서 패소 판결했다. 그러나 대법원은 광복 직후부터 금수현-금난새 집안이 성의 한자 독음을 '금'으로 사용해왔다는 점을 고려하여 금난새 측의 손을 들어주었다.[5] #[6] 뉴스 기사에 따르면 4년동안 근무일의 40%에 가까운 396일을 학교가 아닌 성남시립예술단으로 출근했다고 전해진다. 서울시교육청은 서울예고에서 2014년부터 2018년 사이에 열린 학업성적관리위원회 49회, 입학전형관리위원회 28회, 교육과정위원회 7회 등 위원회 총 86회에서 금난새 전 교장이 참여한 사실을 확인하지 못했다. 이 위원회를 총괄하는 위원장은 금 전 교장이었다. 금 전 교장은 2014년부터 2019년까지 있었던 교무위원회 88회 가운데 10%에도 미치지 못하는 8회만 참석했다.[7] http://ilyo.co.kr/?ac=article_view&entry_id=344676[8] http://m.ilyo.co.kr/?ac=article_view&entry_id=337903[9] 항상 자신을 보수를 준다고 강조하며 말하지만 정작 줘야하는 보수의 절반도 안 됐다는 것이 현실.[10] 그리고 이 과정에서, 학교의 음악교사들이 학생들에게 심각한 압박을 주었다. ~애초에 고등학생인 만큼, 대입이 코앞이며, 내신에 실기까지 바쁜 학생들이, 학기 중 학교 수업을 빠져가며 연주를 하려는 학생들이 거의 없다보니, 금난새는 진행시키고 싶고, 학생들을 모으는 것은 음악과 선생님들에게 맡기니.[11] '롯데매니아' 브랜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