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2-15 22:02:39

김홍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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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colcolor=#fff> 김홍량
金鴻亮
파일:홍량이.jpg
포우(抱宇)
출생 1885년 9월 20일
황해도 안악군 판교면 팔리
(현 황해남도 안악군 안악읍)
사망 1950년 7월 3일
서울특별시
본관 김해 김씨

1. 개요2. 생애
2.1. 초년기

[clearfix]

1. 개요

한국독립운동가였으나 1930년대 후반 이후 친일반민족행위자로 전락한 인물.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으나 2010년 서훈 취소되었다.

2. 생애

2.1. 초년기

1885년 9월 20일 황해도 안악군 판교면 팔리(현 황해남도 안악군 안악읍)에서 태어났다. 일찍이 부친을 여의고 조부 김효영(金孝英) 밑에서 자라게 된다. 김효영은 황해도에서 잘나가는 부자였기에 김홍량은 조부의 든든한 지원을 받으며 서당에서 학업을 닦아나갈 수 있었다.[1]

1904년, 조부의 권유로 일본에 유학하여 메이지가쿠인을 졸업한 뒤, 와세다대학 정치경제학부 예과에서 수학하며 최광옥, 홍명희, 최린, 조만식, 최남선, 오순형, 김낙영, 허헌, 장응진, 백남훈 등 수많은 유학생들과 인연을 맺었다. 그 중 백남훈은 김홍량이 유학비용을 지원해준 덕분에 일본 유학을 할 수 있었다.

1905년 9월, 관서지방 출신 일본 유학생들이 조직한 단체 '태극학회' 발기인으로 참여하였다. 이후 회무 확장을 위해 매진하던 중 최광옥에게 병환이 생기자 일시 귀국했고, 도쿄로 돌아온 뒤 태극학회의 재정을 지원하기 위해 2차례에 걸쳐 30원씩 의연금을 지불했다. 1905년 11월에는 국권회복을 위한 애국계몽운동에 참여한다. 1906년 10월 18일 태극학회 회원 이상근이 도쿄 병원에 입원하여 치료비가 부족한 상황에서 조부 김호영을 통해 큰 돈을 받고 병원비를 대신 지불해주었다.

1906년 7월에는 백남훈에게 "장차 노령 방면으로 가서 군관을 양성키 위해 귀국을 결심했다."라면서 최광옥과 같이 귀국했다. 그리고 고향인 안악에서 양산학교를 설립하고 교육구국운동에 투신하였다.


[1] 당시 안악군에서 양산학교 교사를 지내던 김구백범일지를 통해 김효영을 "구식 인물이나 두뇌가 명석하여 시세의 관찰력이 당시의 신진청년으로도 더불어 의논할 만한 자격이 희소하더라"라고 평가할 정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