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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징 1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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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징 10년 시기 중국 산업별 통계

파일:1930s_shanghai_city.jpg
1930년대 상하이 풍경

중국어: 南京十年(난징 10년), 黃金十年(황금 10년)
영어: The Nanjing decade

1. 개요2. 상세
2.1. 정치 방면
2.1.1. 정부 체제2.1.2. 훈정 시대2.1.3. 법제 헌정2.1.4. 내전 시대2.1.5. 반공주의
2.2. 경제 방면
2.2.1. 경공업 및 중공업2.2.2. 농업
2.2.2.1. 토지개혁2.2.2.2. 농촌 부흥운동2.2.2.3. 농업기술 개발
2.2.3. 화폐 정책2.2.4. 재정 및 세금제도
2.3. 외교 방면
2.3.1. 성과2.3.2. 중독관계2.3.3. 중소관계2.3.4. 중일관계
2.4. 문화 방면
2.4.1. 교육 투자2.4.2. 문화, 학술2.4.3. 방송, 신문. 출판
2.5. 사회 방면
2.5.1. 교통 건설2.5.2. 변경 개발2.5.3. 도시 행정 건설2.5.4. 신생활운동
2.6. 국방 방면
3. 종말4. 평가5. 참고 문헌
5.1. 저서5.2. 링크

1. 개요

1927년 4월 18일 국민정부가 수도를 난징으로 정한 후 중일전쟁 시기인 1937년 11월 20일 충칭으로 천도할 때까지 10년에 걸친 국민정부의 통치 시기. 장제스는 1928년 북벌을 완수한 후 중국이 통일되었음을 선포하고 중국을 강대국으로 육성하기 위해 전 분야에 걸쳐 개혁을 실시했다. 그 결과 중화민국은 10년간 발전했고, 훗날 중국인들은 이 시기를 '황금 10년'이라 일컬으며 그리워했다. 그러나 1937년 중일전쟁 발발 후 중국의 짧았던 번영기는 막을 내렸다.

2. 상세

2.1. 정치 방면

2.1.1. 정부 체제

1930년대 중국은 여러 군벌들이 난립하고 있었지만 공식적으로는 국민정부를 주체로 하는 중화민국이 주권을 행사하고 있었다. 국민정부는 쑨원이 설립한 호법정부에서 출발했지만, 당시엔 광둥성 일대에서만 주권을 행사했고 대부분의 중국 영토에선 군벌들이 자신들의 뜻대로 권력을 행사했다. 그러다가 국민혁명군이 북벌을 완수하고 펑위샹, 옌시산 등 여러 거대 군벌들을 끌어들이고 봉천군벌 장쉐량동북역치를 통해 국민정부에게 복종을 선언한 후에야 전국적인 통치권을 행사하게 되었다. 국민정부가 1928년 선포한 수약외교에 대해서 열강이 차례로 교섭의 의사를 드러내면서 관세자주권을 반환함으로 국민정부는 국제적인 인정을 받아 세계 각국과 외교관계를 수립하게 되었고 북양정부의 주요 외교관인 구웨이쥔, 옌후이칭, 뤄원간 등도 모두 국민정부에 합류했다.

1930년대 초반 국민정부는 '위원제'라는 독특한 방식으로 운영되었다. 정부 운영의 주요 의사결정 기관은 중국 국민당 조직이 선출한 국가 원로로 구성된 국가 정부위원회이며, 국민정부는 국가위원회 이외에도 다수의 행정기구에 위원제를 채택했다. 위원제는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한 후에도 지속되었다. 중화민국 국민정부 조직법에 따르면, 국민정부위원 정원은 초기엔 12~16명이었으나 1930년대 이후 정무직으로서 24~36명으로 늘었으며, 정부위원회 위원장, 행정원장, 입법원장, 감찰원장, 사법원장 및 부원장 등은 모두 위원회에서 선출되었다. 하지만 실질적인 권력의 중핵은 국민정부 주석과 행정원장에게 있었고 각 위원들은 지방의 실력자들을 달래기 위한 명예직처럼 뿌려진 감이 있다. 일례로 운남군벌 룽윈의 경우 운남성 밖을 나가지 않던 인물이지만 국민정부 위원에 초빙되었다.

국민정부의 국가원수는 국민정부 주석이었는데 초대 주석 탄옌카이와 3대 주석 린썬은 어디까지나 얼굴마담으로의 역할을 수행했으며 1931년 12월에서 1932년 2월까지의 한정적인 시기를 제외하면 국민정부의 권력은 장제스에게 있었다. 장제스가 일관되게 유지한 직책은 국민정부 군사위원회 위원장직이었으나 필요에 따라 행정원장직을 겸직하기도 하였고 이 과정에서 입법원장 후한민이나 행정원장 왕징웨이 등 정국 파트너에게도 어느 정도 힘을 실어주기도 하였으나 이들이 너무 큰 권력을 가지지 않게 제어하였다. 왕징웨이의 경우, 외교 분야 등 매우 한정적인 분야에서만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어 왕징웨이를 추종하는 개조동지회 파벌은 이에 대해 큰 불만을 터트리기도 하였다. 국민정부의 주요 내각으로는 1932년 성립된 왕징웨이 내각과 1935년 11월, 왕징웨이 저격 사건 이후 성립된 2차 장제스 내각이 있는데[1] 국민정부의 주요 발전은 군벌의 반란과 공산당 토벌이 어느 정도 정리된 2차 장제스 내각 시기에 본격적으로 이루어졌다. 그외에 눈여겨볼 내각은 1932년 1월부터 한달 동안 유지되었던 쑨커 내각이지만 장제스의 빈자리가 얼마나 큰자리만 확인하고 한달만에 붕괴되어 국민정부에서 광동파의 권위가 크게 실추되는 결과만을 낳았다.

앞서 보았듯이 국민정부 주석은 장제스가 아예 주석까지 겸임했던 1차 장제스 내각 시기를 제외하고는 실질적인 권력이 없었으며 1937년 중일전쟁 선포 후에는 1938년 전시정부로 전환하면서 군통수권을 국방최고회의 위원장 겸 군사위원회 위원장 장제스에게 양도하였다. 1943년, 린썬이 교통사고로 사망하면서 장제스가 다시 국민정부 주석을 겸하게 된다. 그외에 입법원장, 감찰원장, 사법원장 직위가 존재했으나 입법원장의 경우, 장호합작을 통해 장제스와 공동 정권을 구축하였던 후한민을 제외하고는 발언권이 제한되었으며 감찰원장과 사법원장은 안국합작을 통해 국민당과 합작한 아나키즘 세력 및 서산회의파에 대한 달래기 용 직책으로 활용되는 감이 컸다. 고시원장의 경우 국민정부 시절 내내 장제스의 맹우 다이지타오가 가지고 있었으나 다이지타오 역시 멘탈이 약한 인물이었는데다가 권력과는 거리가 먼 인물이라서 큰 영향력을 발휘하지는 못했다.

2.1.2. 훈정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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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회의 대표들 앞에서 '훈정시기 약법'을 발표하고 있는 장제스

1930년대 중국은 군벌 할거시대에서 실질적인 통일로 나아가는 단계를 밟고 있었다. 이와 동시에, 정부는 외국의 간섭에서 벗어나 국가를 재건하고자 정치 근대화를 실시해 상당한 성과를 이뤘다. 이로서 중국은 청나라의 쇠락 이후 처음으로 정치에서 일관성을 회복했다. 국민정부는 쑨원의 삼민주의와 건국 대강을 따라, 훈정과 헌법에 따른 통치를 실시했다. 1928년부터 1937년까지 기간 동안, 국무원은 중앙차원에서 단계적으로 훈정을 기반으로 한 통치 시스템을 세웠다. 1928년 10월4일 172차 당무회의에서 훈정강령이 채택되었고, 이후 국민정부는 '훈정망요'에 근거해 훈정을 실시하고 약법 문안을 기초했으며 1931년 6월 1일 국민회의에서 약법이 통과되면서 정식으로 공포되었다.

국민정부는 약법이 더 많은 국민의 인정을 받기 위해 1931년 5월 5일부터 17일까지 국민회의를 개최했다. 국민회의 대표는 각 성, 각 시, 몽골, 티베트 및 화교 사회에서 파견되었으며, 주로 농회, 노동조합, 상회 및 실업단체, 교육회, 국립대, 교육부가 승인한 대학 및 자유 직업단체에서 선정되었다. 또한 1928년 10월 3일에 초안된 훈정강요'와 '국민정부조직법'을 모두 채택하여 오권 분립제도를 확립했고, 1931년 6월 "훈정기간 약법"에도 오권 분립제도가 채택되었다. 오권 분립제도와 서방의 삼권 분립제도의 차이점은 행정기관, 입법기관, 사법기관 외에 고시원과 감사원이 따로 존재한다는 것에 있다. 고시원은 국가를 위해 인재를 선발하여 공무원의 자질을 높이는 역할을 수행하고, 감사원은 전국의 공무원을 감독함으로써 정무 발전을 촉진하는 역할을 수행한다.

고시원은 1931년부터 1937년까지 운영되며 고등학력 합격자 589명, 일반 합격자 1,244명, 특수 시험 합격자 2,166명을 선발했다. 한편 감사원은 같은 기간 총 841건의 부정부패 사건과 공무원 1,443명을 적발했다.

2.1.3. 법제 헌정

국민정부는 난징 10년 동안 훈정시기 약법과 더불어 중화민국 헌법 초안을 작성했다. 1932년부터 국민정부의 법제가 세밀하게 조직되고 성, 시, 현이 잇달아 성립되었으며 참의원 선거 관련 조례가 나날이 완비되었다. 국민정부의 법규는 헌법, 민법, 형법, 상법, 소송법과 법원조직법의 6개 종류로 나눌 수 있으며, 이를 합쳐서 '6법전서'라고 하는데, 이는 국민정부 법률제도의 기본 골격이었다. 민법은 1929년 5월부터 1930년 12월까지 독일, 스위스, 일본 및 기타 국가의 민법 규정을 참고해 초안이 작성되었다. 민법은 일반 규칙, 부채, 재산권, 친척 및 상속제도를 포함한다. 상법은 주로 회사법, 법인법, 해상법 및 보험법으로 구성되었으며, 1929년 10월에서 12월 사이에 작성되었다.

국민정부는 1928년 3월에 임시 형법을 시행했다가 이를 개정하여 형법을 제정했다. 1935년에 공포된 형법은 일반적으로 '신형법'으로 알려져 있다. 신형법은 주관주의에 초점을 맞춰 범죄의 성격에 중점을 두고, 보전 및 교육 기능을 강조하여 보안처분 제도를 도입했다. 보안 처분은 조치는 청소년 범죄자와 범죄 혐의 및 사회 질서 혐의자에게 적용되는 신형법의 특수 처분이었다. 또한 1927년 산적 처벌에 관한 잠정규정, 1928년 임시 반혁명법, 1939년 공산당 문제 처리법 등 다양한 형사법이 공표되었다.

민사소송법은 1930년부터 1931년까지 공표되었고, 1935년 개정 후 다시 공표되었다.주요 특징은 불간섭 원칙을 실행하고 특정 안건을 조정하는 법원 조정 원칙이다. 형사소송법은 1928년에 공표되었고, 1935년에 개정하여 다시 공표되었다. 중일전쟁 발발 후, 국민정부는 <민간비상사태법 개정>, <국가 일반동원장애 임시조치>, <특별 형사사건 규정>과 같은 특별 규정을 공표했다. 형사소송법의 주요 특징은 자유심증의 원칙을 채택하고, 자소권을 엄격히 제한하며, 검사의 권한을 확대하는 것이다.

행정 법규방면에는 중화민국 국민정부조직법, 오원조직법, 군사상원조직법 등이 있다.봉급, 임용, 사용에 관한 법규로는 '문관등봉표' '공무원임용법' '관리 복무규정' '오원처무규정' 등이 있다. 고시법은 신6법 전서에 '헌법 및 관계법규'로 나열되어 있으나, 그 법규의 성질에 따라 행정법으로 남아 있었으며, 시험법, 시험법 실시 세칙, 공무원 진급 시험법 등이 규정되었다.

국민정부의 일반 법원은 지방 법원과 고등법원 및 최고법원의 3급으로 나누어 3급 3심제를 시행하고, 3심은 법률심으로, 공개재판제를 실시한다. 다만 공공질서를 저해하거나 선량한 풍속을 해칠 우려가 있는 사안에 대해서는 공개 재판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검사합서제를 실시하여 법원 내에 검찰을 두었고, 특수 형사재판소와 군법 법원이 있었으며 배심원 제도도 있었지만 배심원은 반드시 국민당원이어야 한다는 제약이 있었다.

1936년 5월 5일, 국민정부는 중화민국 헌법 초안을 공표했다. 이후 국무원은 1936년 11월 12일에 국민대회를 열어 헌법을 제정하려 했지만 정세가 급박하여 국민대표가 기일 내에 선거를 마치지 못하자 결국 훈정을 계속 실시했다. 하지만 헌정 건설사업은 여전히 중단되지 않았고 1938년 7월 우한 전투가 한창이던 시기에 전국 각 당의 주요 지도자와 전국의 저명한 명사들을 추청해 우한에서 국민 참정회를 조직했다. 국민참정회 구성 인원은 모두 200명으로, 국민당은 80명, 각 당수 50명, 무당파 70명 이상이었다. 국민참정회는 전시에 제헌국민대회를 준비하는 데 상당한 역할을 했다.

2.1.4. 내전 시대

북양정부 시기의 내전은 중화민국 내전 문서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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퉁관에서 장제스에게 반기를 일으킨 펑위샹 군대

1928년 10월, 국민정부 조직이 선포되고 오원과 내각이 구성되었지만 1928년 시점의 국민정부의 통치력은 어디까지나 강소, 절강 지역에만 한정적으로 미치고 있었으며 지방권력은 주요 도시들을 거점으로 성립된 정치분회에 있었다. 당연히 이러한 정치분회는 군벌들이 장악한 상태였으며 장제스후한민은 당과 정부로 권력을 집중하기 위해 3기 5중전회에서 정치분회 폐지를 결의하는 한편 편견회의를 개최하여 대대적인 군축을 실시하려 하였다. 국민정부 초기의 내전은 정치분회 폐지와 편견에서 발생하였으며 1929년 우한 정치분회 주임 겸 4집단군 총사령 리쭝런호남 사건을 일으키면서 1차 장계전쟁이 발생하였다. 이것이 반장전쟁의 시작이었는데 이어 산동성의 지배권을 놓고 펑위샹이 반란을 일으켜 1차 장풍전쟁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2차 장풍전쟁, 2차 장계전쟁, 장당전쟁을 거쳐 1930년 옌시산중원대전을 일으켰다. 중원대전은 서산회의파, 개조동지회 등 공산당을 제외한 모든 반장세력이 총집결한 초대형 반란이었으나 장제스에게 모두 진압당하면서 국민정부 1차 내전기는 종식되었다.

하지만 중원대전의 여파는 계속 남아 있었는데 우선 옌시산펑위샹이 동반 몰락하면서 하북, 산동, 산서 일대의 지배권을 놓고 염계군벌이면서 친장파인 산서성 정부주석 상진, 산동군벌 유진년, 서북군벌의 패잔병이며 중원대전을 계기로 장제스에게 항복한 한푸쥐, 스여우싼, 그리고 중원대전에서 국민정부의 2인자로 등극한 장쉐량이 각축을 벌였던 것이다. 여기에 사천성에서는 류샹류원후이 사이의 이류지전이 발발하였으며 감숙, 섬서에서는 마씨 군벌들 간의 내전이 끊이지 않았다. 여기에 장제스가 1931년 2월, 탕산 사건을 일으켜 입법원장 후한민을 감금하면서 1차 양광사변이 발발한다. 1차 양광사변은 반장전쟁 기간 동안 장제스에게 복종하고 있던 천지탕의 월계군벌 및 구잉펀 등의 광동파, 왕징웨이, 천궁보의 개조동지회, 쩌우루 등 서산회의파의 잔여세력, 리쭝런, 바이충시의 광서파와 스여우싼 등 하북 일대의 반장군벌의 연합으로 이루어졌다. 이중에서 스여우싼은 장쉐량, 상진, 장제스의 공동 토벌로 몰락했고 만주사변이 발발하면서 광서파와 광동파는 서남정무위원회, 군사위원회 서남분회 등의 설치를 통한 자치권을 약속받고 내전을 중지했다. 서산회의파도 이 시기를 기점으로 반장을 중단하였으며 개조동지회는 아예 장왕합작을 결성하여 장제스와의 동맹을 체결한다. 이로서 국민정부의 2차 내전기도 종식되었다.

그뒤로 소소한 반란이나 군벌들 간의 내전은 있었지만 1933년 복건사변과 같이 대부분 별 볼일 없이 진압되었고 폐량개원, 법폐개혁 등의 일련의 금융개혁과 난징을 중심으로 한 공군력, 해군력의 통합, 중공업의 육성으로 국가의 힘과 정치력이 난징에 집중되면서 더 이상 지방 세력은 장제스에 대한 대항이 거의 불가능한 수준으로 전락했다. 또한 초공작전대장정 추격을 이유로 장제스가 직접 중앙군을 이끌고 각 지방을 순회하면서 군벌들을 복종시키고 주요 도시에 중앙군을 주둔시키면서 지방의 자율성은 차차 추락하였고 신생활운동이 시작되면서 산동성이나 산서성 등은 자발적으로 장제스 영향 아래에 들어가는 수준이었다. 1936년에 접어들면 더 이상 반장전쟁이나 1차 양광사변 같은 대규모 반란은 불가능해졌는데 단적으로 1936년 2차 양광사변의 경우 장제스가 광동에서 유통되는 화폐를 더 이상 정식화폐로 인정하지 않겠다고 뉘앙스를 비춘 순간 물가가 폭등하면서 1929년 이래로 7년이나 광동을 지배하며 '남천왕'으로 불렸던 천지탕의 정권이 한달도 버티지 못하고 공중분해되었고 리쭝런과 바이충시도 서남정무위원회를 해체하고 광서성 내부의 기반만 유지해준다는 기반으로 항복해야 했다. 이로서 장제스에 대항한 군벌들의 반란은 끝났으며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것이 입증되었다.

예외적으로 서안 사건이 발생하긴 했으나 어디까지나 공산당 토벌용 총알받이 신세로 전락한 봉천군벌과 서북군벌의 발악적인 쿠데타 성격에 가까웠으며 그 목적도 장제스를 타도하는게 아니라 장쉐량의 경우, 장제스를 중국의 히틀러나 무솔리니로 옹립하는데 그 목적을 두고 있었다. 오히려 장제스가 감금되었음에도 허잉친을 중심으로 한 군부와 쿵샹시, 쑹쯔원을 중심으로 한 재계가 혼란을 제어하는데 성공했으며 이 틈을 타서 회광반조했던 반장군벌들도 입 슥 닦고 이후 중일전쟁 때 장제스에게 군말없이 협조하게 된다. 결론적으로 국민정부는 차차 군벌들의 세력을 약화시키고 중앙에 대해 복속하는데 성공시켰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중앙에 대한 권력집중의 성과는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면서 정부가 군수품 확보를 위해 다시 군벌들에게 자율성을 부여하면서 상당히 후퇴하게 된다.

2.1.5. 반공주의

국민당과 공산당의 악연은 1924년 1차 국공합작 시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미 이 시기 국민당의 원로 세력들은 대부분 공산당에 대해 반대했으며 후한민, 다이지타오 등 마르크스주의를 공부한 이론가들이나 리스쩡, 차이위안페이, 우징헝 등 아나키스트 세력들도 계급투쟁에 대해서는 중국에 대해 맞지 않다고 반대하였다. 하지만 쑨원이 만약 공산당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자신이 국민당을 탈퇴하겠다고 공산당에 가입하겠다고 엄포를 놓는 초강수를 두어 1924년 국민당 제1차 전국대표대회를 통해서 국공합작이 이루어졌다. 하지만 국공갈등은 국공합작 직후부터 이어졌으며 쑨원이 죽은 후에는 통제가 불가능한 수준으로 불거졌다.

국민정부가 완성된 1928년 시점을 기준으로 할때 국민당에 몸담은 주요 파벌들 중에서는 이미 가족들에게까지 왕따당하던 쑹칭링 정도를 제외하면 모든 파벌이 철저한 반공주의를 외치고 있었으며 중원대전 중에서도 베이핑 국민정부는 공산당의 참여는 허락하지 않겠다고 못을 박았다. 1차 양광사변 중에서도 광저우 국민정부는 장제스가 제3차 초공작전에 집중하고 있다는 이유로 장제스에 대한 공격을 보류할 정도였다. 사실 1927년 국공결렬 이후 중국 공산당은 잘 해야 상하이에서 테러를 사주하는게 제일 점잖은 수준이고 마오쩌둥의 예를 볼때 각 지방의 농민들과 상인들을 학살하는 비적떼 수준의 막장집단에 불과했기 때문에 국민정부의 입장에서는 이미 토벌이라는 방식 외의 선택지는 없었다. 특히 중원대전의 혼란을 틈타 리리싼창사 폭동을 주도하자 국민정부는 항일보다도 공산당에 대한 무력 토벌이 시급하다는 판단을 가지게 되었다.

1930년부터 1931년까지 제1차 초공작전, 제2차 초공작전이 행해졌으며 앞서 말한 1차 양광사변 시점에서는 제3차 초공작전이 행해지고 있었다. 하지만 초기에 행해진 공산당에 대한 토벌작전은 강서나 호남군벌들을 중심으로 한 지방군을 투입하였으며 공산당을 산적떼로 경시하고 제대로 된 준비가 없이 행해진 작전이 대부분이라 성과를 보지 못했다. 3차 초공작전은 어느 정도 군사적 성과를 거두었으나 1차 양광사변만주사변이 겹치면서 실패로 돌아갔다. 하지만 공산당과 국민정부의 대결은 훗날 사람들이 착각하는 동등한 두 집단의 싸움이 아니라 정식 정부와 규모 큰 산적떼의 싸움 정도 밖에 되지 않았기 때문에 국민정부가 전열을 가다듬은 제4차 초공작전에서 장궈타오의 악예환 소비에트를 소멸시키는데 성공했으며 한스 폰 젝트의 감독을 받고 아예 소대장들 단위부터 레인저 훈련을 실시한 제5차 초공작전에서는 강서 소비에트를 박살내버리는데 성공했다. 또한 상하이의 임시 당중앙에 대한 색출도 실시하여 샹중파 등 여러 고위급 인물을 체포해 처형하였고 상하이 당중앙을 와해시키는데 성공했다. 상하이 당중앙은 강서 소비에트로 이동하여 마오쩌둥을 실각시키는데 제5차 초공작전에선 역으로 상하이 당중앙이 몰락하고 마오쩌둥이 재집권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1935년부터는 일본 제국화북분리공작이 행해졌는데 만주사변 이래로 항일기운이 가득했던 상황에서 기폭제로 작용하였다. 이 때문에 전국적으로 국민정부의 선안내 후양외 정책에 불만을 품은 항일대중이 12.9 운동을 비롯하여 항일을 촉구하는 운동을 벌이기 시작했고 대장정을 통해 섬서성에 숨어든 중국 공산당도 이에 호응하여 반장항일을 외쳤다. 코민테른은 중국 공산당에 장제스와 협력하라고 지시했으나 마오쩌둥은 이를 묵살하고 1936년 동정항일을 선포하여 다시 한번 군사력으로 장제스에게 대결하지만 개박살이 나는 결과로 끝났다. 이 시기부터 마오쩌둥은 장제스와 군사력으로 대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인정하고 핍장항일로 노선을 전환하여 장제스에게 항일을 위해 협력할 것을 촉구했다. 하지만 장제스는 공산당에게 홍군을 해체하고 소비에트 공화국을 섬서성의 지방정부로 격하하라는 가혹한 요구를 제시하였다. 공산당은 생존을 위해 장쉐량, 양후청 등 일선의 초공 담당 지휘관들과의 협상을 통해 이들의 초공을 중지시켰으나 장제스가 직접 제6차 초공작전을 준비하면서 다시 한번 위기에 처한다.

허나 1936년 12월에 발생한 서안 사건으로 거의 로또에 가까운 전환점을 맞게 되었고 초기에는 살장항일을 외쳤으나 중국 공산당에는 항일을 영도할 여력이 전혀 없다는 이오시프 스탈린의 차가운 지시로 인하여 옹장항일을 외치게 된다. 이로서 국민정부는 반공을 중단하였고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면서 2차 국공합작을 결성하게 된다.

2.2. 경제 방면

청나라 멸망 후 수립된 북양정부의 중화민국 시기, 국가 재정은 해외로부터 막대한 빚을 빌려 충당해야 할 정도로 열악했다. 게다가 위안스카이 사망 후 군벌 할거가 더욱 심해지자 중앙 재정은 일상적인 지출 조차 외채를 빌려야 할 정도로 초라해졌다. 난징 국민정부는 북양 정부가 남긴 모든 외채를 상속받았지만 1936년 말까지 중앙은행 창출 및 통화개혁 등을 성공적으로 추진해 북양정부 시기의 외채 70%를 정상적으로 갚았다. 또한 국민정부는 일련의 경제개발 정책을 추진해 중국의 경제 성장을 이끌어냈다.

2.2.1. 경공업 및 중공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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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4년 독일의 공업시설을 참관한 중국 학생 대표단

1930년에서 1936년 사이 공업 부문의 성장률은 8~9%에 달했다. 특히 전력 공업과 석탄 공업에서 현저한 성장세를 기록했다. 이 시기 중국 경제는 군벌의 난립, 세계 대공황 등 여러 악재를 겪었지만 국민정부의 일관적인 경제개발 정책에 힘입어 꾸준한 성장세를 기록했다. 1933년 중국의 공업, 수공업, 광업 및 공공사업의 생산량은 국내 순 생산액의 10.5%였다. 수공업 생산량은 산업 부문의 67.8%를 차지했고 공장은 20.9%, 광업은 7%, 공공사업은 4.3%의 비중을 차지했다. 비농업 근로 인구 4691만명 중 수공업자는 1213만명(25.9%), 공장 노동자 113만명(2.4%). 광산 근로자 77만 명(1.6%). 공공사업 근로자는 4만명(0.09%)이었다.

푸젠성 건출설계연구원 수석 건축가이자 푸젠성 토목 건축학회 부이사장이며 후저우대 교수를 역임한 황한민(黄汉民)은 1930년대의 공업생산 추이를 분석, 1930년대 초반 중국 경제는 세계 대공황으로 인해 어려움을 겪었지만 공업 발전의 전반적인 추세는 지속적으로 발전했고 1936년엔 중국 근대사 역사상 가장 좋았다고 평가했다. 예를 들어 1920년대에 시작된 니트, 견직, 염색, 날염, 모방직 등의 경공업은 모두 발전했으며 전기 기구 공업, 진기기구고업, 전기염기공업, 염료공업, 알코올 공업, 산성 및 알칼리성 산업 등 신흥 업종이 발생했다. 그밖에 중국 제품의 종류가 증가했고 일부 국산품은 외국 수입 상품을 대체했으며 공업 지역이 확대되었고 공업 생산 기술 수준과 관리수준도 향상되었다.

난징 10년 시기 중국 중공업 건설은 주로 국방 공업을 핵심으로 삼았다. 1932년 11월에 발족한 국방설계위원회 주최자는 전창조(钱昌照), 웡원하오가 맡았으며, 학자 후스, 딩원강(丁文江), 양진성(杨振声), 장기윤(张其昀), 우딩창(吴鼎昌), 장자야오(张嘉璈), 타오멍허(陶孟和), 판리에(范锐), 오온초(吴蕴初), 유홍생(刘鸿生), 만국정(万国鼎), 심종한(沈宗瀚), 왕세걸(王世杰), 주람(周览), 서숙희(徐淑希) 등이 위원을 맡았다. 1935년 4월, 국방설계위원회는 병공서 자원사와 합병하여 '자원위원회'로 명칭을 변경하고 군사위원회 예하 기관으로 편입되었다. 자원 위원회의 주요 임무는 국방과 관련 있는 광산 기업소를 설립하는 것이었다. .1936년 3월 자원위원회는 국방의 필요와 가능한 경제력에 따라 중공업 건설계획을 세웠으며, 3년 안에 중부의 샹어간 지역에 국방의 수요와 직결되는 중공업과 광업, 내실화가 건설될 예정이었다. 그러나 1937년 중일전쟁 발발로 이 모든 계획은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하지만 국민정부의 중공업 중시 정책에 따라 공장 건설 및 광산 개발은 나름대로 착실하게 진행되었다. 제금공업 방면에선 후난성 차링현 철공장, 허베이성 영항현 철광, 장시성 텅스텐 공장, 쓰촨성 팽현 동광, 허베이성 대야, 양신 동광, 중앙 연동광산, 후난 수구산 아연석 탄광, 운남 석광, 청해금광, 쓰촨 금광 등이 개발되었다. 연료공업 분야에서는 장시성 고갱 탄광, 천하탄광, 후난성 샹탄 탄광, 허난성 우현 탄광, 쓰촨 바현 및 다현 석유 광산 등이 개발되었고, 화학공업 분야에서는 암모니아 공장과 무수 알코올 공장 등이 개발되었다. 여기에 중앙 기계제조공장, 후난 상담현 항공기 엔진 공장, 중앙 전기 공자재 공장, 중앙 전기 기계제조 공장, 중앙 전기자기 제조 공장, 쓰촨성 장수현 수전기공장 등이 건설될 예정이었다.

1937년, 상술한 공장들의 원료 생산량은 철강 3만 톤, 전력 153만 3000도, 석탄 2만톤, 텅스텐 1만 2000톤, 안티몬 1만 4600톤, 징통(精铜) 9톤, 사철 0.63톤, 전신기 425구이다. 이 공장들은 광석을 채취하고 원료를 제조해 전시 국방공업의 기초를 다졌으며 철강공업, 항공기 제조업, 전기공업, 화학공업, 텅스텐, 안티몬 등의 광산업과 밀접한 관계를 맺었다. 중일전쟁 시기 자원위원회가 운영하던 각 중공업의 기계설비는 모조리 후방으로 이주하여 현지 공업 생산의 핵심 기지가 되어 중국이 장기간 전쟁을 치를 수 있는 발판을 마련했다.

2.2.2. 농업

2.2.2.1. 토지개혁
토지개혁은 본래 중국 국민당 당 강령 중 하나였으며, 쑨원은 신해혁명 때 동맹회의 강령에 "평균지권(平均地权)"이라는 내용을 넣었다. 북벌을 성사시킨 후, 국민당은 노동법 공표 및 공장에서 일하는 아동 및 여성 보호법 등 도시 정책과 함께 농촌조직 개량, 농지정리, 최고 임대료법 제정, 농민생활 향상 등 일련의 농촌정책을 발표했다. 이후 1926년 10월, 국민당은 농민들의 후원을 얻어내기 위해 광저우에서 각 성별 대표 연석회의를 개최해 <최근 정강>을 통해 소작토지의 임대료를 25% 경감한다고 규정해 농민의 부담을 경감시켰으니, 이른바 "25감조" 정책이었다. 1927년 5월, 국민정부는 <소작농 보호법>을 제정했다.
"소작농이 지불해야 하는 소작료는 수확량의 40%를 초과할 수 없다. 소작농이 지주에게 임대료를 납부하는 것 외에 추가로 부과되는 모든 가혹한 세금을 취소한다. 또한 소작농은 경작한 토지에 대해 영구 소작권을 가진다."

그러나 이 정책이 실재로 시행된 지역은 저장성 뿐이었으며, "25감조' 적용 폭이 비교적 컸기 때문에 처음부터 도농지주 계급의 반대에 부딪쳤다. 결국 저장성 정부는 압력에 의해 감조 방침을 취소했고 대부분의 성에서는 처음부터 제대로 적용되지 않았다. 하지만 국민정부는 이후로도 토지개혁을 꾸준하게 추진해 농민의 권익을 증진시키고자 노력했다. 국민당의 정책은 농민과 지주의 눈치를 동시에 보느라 어느 한쪽도 만족시키지 못할 온건한 개혁이었으며 지주들의 편법 행위가 근절되지 않았다는 한계가 있지만 농민들의 공산주의에 대한 관심도를 떨어뜨리고 국가에 충성을 바치도록 유도하는데 기여했다.
2.2.2.2. 농촌 부흥운동
국민정부는 난징 10년 동안 지속적으로 농촌부흥운동을 전개했다. 이는 국민경제을 발전시키기 위한 목적도 있었지만 무엇보다도 농민들이 공산주의에 물드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것이었다. 정부는 농촌 부흥위원회 등 일련의 농업 기구를 설립했고 상임 위원회를 수반으로 삼았다. 이 기구들은 농촌금융 구제, 일부 농산물세 감면, 수입식량에 대한 과세, 농업실험소 설립 농업생산 지도, 농업보급지역 개설 등 여러 정책을 실시했다. 또한 황하, 회하, 장강과 태호 등 여러 강 및 호수의 농업 시설 수리위원회도 잇달아 설립되어 농업 시설 수리 공사를 주기적으로 실시했다.

그러나 난징 10년 내내 내전이 빈발했고 지방의 말단 관리는 지주와 토호에게 의존해야 했고 국민정부의 통치력이 농촌 전역을 완전히 장악하지 못했기 때문에 이러한 정책을 통한 성과는 제한되었다. 그래도 1930년대 중반에 접어들면서 점차 국민정부의 통치력이 확장되어 국민정부의 농업정책이 빛을 발휘하는 듯했다. 그러나 불행히도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해 모든 농업 정책이 중단되었고 뒤이은 국공내전으로 인해 국민정부 치하 중국 경제가 파탄 지경에 처하면서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2.2.2.3. 농업기술 개발
국민정부는 농업기술의 개량에도 힘을 쏟았다. 예를 들어 1933~1937년 동안 국민정부는 중앙농업실험소, 전국 벼-보리 개량소, 중앙면산 개량소를 설치했다. 이 기구들은 미국에서 면화를 도입하고 밀과 쌀의 품종을 개량했으며 살충제와 화학 비료 개발을 주도했다. 또한 국민정부는 농업발전을 위한 부서를 구성했다. 예를 들어 행정원은 1928년 2월에 농광부를 설치하고 1933년 4월에 농촌부흥위원회를 설치했으며 1938년 4월에 농산촉진위원회를 설치했다. 이러한 정부의 노력에 힘입어, 쌀 생산량은 1931년 9억 7436만 9천 섬에서 1936년 10억 3412만 5천 섬으로 6.1% 증가했다.

2.2.3. 화폐 정책

1927년 10월 25일, 국민정부는 <중앙은행조례> 19조를 제정하여 상하이에 설립될 중앙은행을 중국 최고의 금융기관으로 규정하고 국가가 중앙은행을 통해 화폐를 조달할 것임을 선언했다. 1928년 10월 8일, 국민정부는 중앙은행조례 20조를 개정해 중앙은행에 2000만 위안을 할당할 것임을 규정했다. 1928년 11월 1일 중앙은행이 설립되었고 본사는 상하이에 있었다.

1930년대 중앙은행 총재로 재임한 쑹쯔원은 중국의 금융개혁에 적지 않은 공헌을 했다. 그는 청말 이후 혼란스러웠던 화폐 정책을 통일하고 금융통화제도를 개혁했다. 국민정부는 1927년 북벌을 성사시킨 후 영국과 미국의 지원에 힘입어 백은을 저당잡힌 채 통일 화폐제도를 준비했다. 1933년 3월 8일, 국민 정부는 은본위 화폐제조 조례를 공포하여, 폐기하고 원제를 개조했다. 구체적으로는 은화 1원을 모든 거래의 본위 화폐로 삼았고 은화 1원은 7전 1분 5리로 규정했다. 상하이 금융기관은 3월 10일부터 일률적으로 은화를 사용했고, 다른 도시들은 4월 6일부터 은화를 일률적으로 사용했다. 이후 1933년 7월 1일부터 중앙 조폐창의 새 은화가 유통되기 시작했다.

세계 대공황 시기, 미국은 국내의 경제난을 만회하기 위해 1934년 5월 금 매입법을 통과시켜 은값을 올리고 백은전을 대량으로 구매했다. 이로 인해 중국 백은이 대량으로 유출되어 1934년 7월부터 10월 중순까지 3개월 반 동안 2억 위안에 달하는 백은이 유출되어 국민 경제의 발전과 화폐 제도에 심각한 악영향을 끼쳤다. 이에 국민정부는 쑹쯔원의 주관 하에 1935년 11월 4일 은본위제를 외환본위제로 바꾸고 지폐로 은전을 대신하게 하는 법폐 제도를 시행했다.

중앙은행의 지폐제도는 중국 화폐를 안정시키는 데 크게 성공해 중국 근현대사에서 가장 철저하게 개혁된 화폐제도로 평가받고 있다. 중국 최초로 전면적으로 유통된 불환 지폐로 화폐 통일이 완료되었고, 현대적인 관리통화제도가 도입되었다. 민간 및 중외은행에 예치된 백은과 은화 8억 위안이 반년 동안 정부에게 넘어갔고, 지폐는 1935년 11월부터 유통되기 시작해 반년 동안 9억여 위안으로 늘어났고 1937년 6월엔 14억여 위안에 이르렀다. 또한 중앙은행은 보조화폐 방면에서 1936년 2월부터 20점, 10점, 5점 니켈보조화폐와 1점 반분의 동전을 발행하여 10진신제를 완성하여 당시 보조화폐의 혼란 상황을 해결했다.

그러나 국민정부는 중일전쟁과 국공내전 시기 대량의 화폐를 발행해 군비를 지불했고 프랑스 화폐의 발행량이 급격히 증가하여 최대 60억 위안에 달했다. 이로 인해 극심한 인플레이션이 발생했고, 결국 국공내전 시기 중국 경제는 파국에 이르러 국민정부가 중국 대륙에서 축출되는 결과를 초래했다.

2.2.4. 재정 및 세금제도

국민정부는 세무기구를 통합 설립해 재정 및 세금 제도 개혁에 착수했다. 우선 각 지역의 세무기관을 정돈하고 세정을 개혁하고 징수 기관을 통일해 모든 세금을 정부가 공인한 세무기관에 귀속시켰다. 그리고 1928년부터 1934년까지 외국 정부와 여러 차례 협상을 벌여 관세제를 중국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개선했고 네 차례의 관세개혁을 통해 세관의 관세를 크게 올려 정부 재정 수입을 획기적으로 늘리게 해, 건국 초기 재정 적자를 크게 개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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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자료는 난징 정부가 1928년부터 1937년까지의 9년간의 재정 연도의 주요 수입과 지출을 열거한 것이다. 각 성과 지방 정부의 지출은 1938년 이전에도 여전히 컸지만 중일전쟁 시기엔 중앙정부에 비해 급격히 감소했다. 그렇지만 난징 10년 시기 각 성과 지방 정부의 지출을 난징 정부 지출에 추가한다하더라도, 그 총액은 1931~1936년 기간 동안 국민 총생산 중 3.2~6%에 불과했다. 같은 시기 미국은 1929년 8.2%, 1933년 14.3%, 1941년 19.7%를 기록한 것과 비교하면 매우 적은 수치다. 이는 정부 예산이 협소한 세수 기반으로 운영되어야 했음을 증빙하는 것으로, 실제로 이 부분은 국가 세수의 가장 큰 부담으로 작용했다.

국민정부는 1927년부터 1937년까지 총 35억 6천만 위안의 각종 국내 부채를 차입했다. 부채비와 군사비는 총 지출의 3분의 2이상을 차지했으며 부채 지출은 20~25%를 차지했다. 1927년부터 1935년까지, 채무 상환은 31억 1000여만원, 내채 22억 1000여 만원, 외채 6억 3천여만 원, 배상금 2억 8천여 만원 등이 지출되었다.

국민정부는 1928년에 열린 전국재정회의에서 국민소득에 대한 토지세 65%를 정식으로 각 성에 양도했다. 이는 북양정부 이래 "정부의 재정관리가 혼란스럽다"는 세간의 인식을 개선하기 위한 것으로, 일부 경제 부문에 대한 재정적 요구를 포기했음을 의미한다. 그 결과 불공정한 농지제도를 철저히 검증하려는 시도가 중단되었고, 이로 인해 잠재적인 농업 세수가 대부분 지방 정부에게 들어가서 정부의 세수가 제약되는 결과를 야기했다.

국민정부는 재정을 정비하는 과정에서 예산 계획을 세우고 직접세를 추진했으며 가혹한 잡세 폐지와 지방 통관세 페지를 추진했다. 1927년 7월 국민정부는 국내 통관세 폐지 조례를 공표했지만 시국이 불안정했기 때문에 1931년 1월까지 시행이 미뤄졌다. 이후 1931년 6월까지 모든 종류의 잡세와 통관세에서 이름을 바꾼 세금과 공납제를 일률적으로 폐지해, 국내 화물이 순조롭게 유통되게 했다. 또한 국민정부는 1934년 7월에 각 성에 가렴잡세를 폐지하도록 명령했고 1937년까지 3년간 전국 25개 성시에서 7,100여 종의 잡세를 폐지했다. 그리고 1936년 7월에 '소득등 임시 행조례"를 공표해 공무원 임금 및 보수 소득과 기타 공체예금 이자소득에 1937년까지 직접세를 징수했다. 이 네 가지 재정 조치는 중국 재정을 정상 궤도에 올려놓기에 충분한 조치였다.

2.3. 외교 방면

2.3.1. 성과

난징 10년 시기, 국민정부의 외교 방침은 4가지 목표를 달성하는 것이었다.
1. 불평등 조약 파기
2. 일본의 대륙 침략정책 저지
3. 열강의 중국경제 원조 쟁취
4. 동아시아에 집단 안정보장 체제 수립

1930년대 중국의 외교 성과는 여러 불평등 조약을 점진적으로 폐지하고 영사재판권, 관세자주권을 회수하는 것으로, 그 중 의미있는 성과는 다음과 같다.
1. 1930년 10월 1일 영국이 점령한 웨이하이(威海卫) 환수
2. 1931년 1월 15일 벨기에의 중국 조계지 회수
3. 1933년 신관세법 시행으로 기본적인 관세 자주권 실현.

1930년 국민정부는 상하이 임시법원을 저장성 지방 정부 관할에서 중앙위원회 관할로 변경했으며 1931년 4월 1일 상하이 특별 행정구를 폐지하고 상하이 임시 법원을 재구성했다. 이와 동시에, 상하이 조계 거주 중국인의 형사사건에 대해 중국과 조계국 관리가 회심해야 하는 사법 제도가 개정되어 조계 내 서방국가 인사들에 대한 언급이 없는 민형사 사건은 모두 중국 법원에서 심리하는 것으로 정해졌다.

2.3.2. 중독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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쿵샹시아돌프 히틀러

장제스는 게르만 민족이 갖고 있는 "근검절약하고 매사에 최선을 다하며 규율을 준수하는" 민족정신을 높이 평가했다. 1933년 히틀러가 집권하자, 장제스는 나치 정부와 직접 교제하기 시작했고 중국과 독일 양국은 밀월 관계를 맺었다. 특히 수많은 독일 군사 고문들이 중국에 와서 국민혁명군의 발전에 기여했다. 1928년 11월, 첫 번째 중국 방문자인 보어 대령은 독일 고문단을 이끌고 중국에 도착하여 국민당 고급 장교들을 교육했다.

1934년 6월 '독일 국방군의 아버지'라는 별칭을 가지고 있을 정도로 군사 방면에서 최고의 전문가로 손꼽히는 한스 폰 젝트가 총 고문으로 초빙되었다. 젝트는 장제스에게 난징정부의 직속 관할하에 있는 10개 사단을 훈련시키고 최신 장비를 갖추는 데 초점을 맞추고 독일 육군 장교단을 본뜬 '교도여단'을 창설하자고 제안했다. 1935년 젝트가 사임한 후, 알렉산더 폰 팔켄하우젠이 총고문을 역임하였고 중일전쟁 시기 장제스에게 서남 지역을 대후방기지로 삼을 것을 제안했다.

동시에 중국과 독일 간의 광물과 무기를 맞바꾸는 무역도 급속히 발전했다. 1936년 독일의 대중 무기 수출 액수는 640만 5000마르크로 독일 무기 수출 총액의 28.8%를 차지했으며, 중국은 독일 무기 무역의 최대 구매자가 되었다. 1937년 중일전쟁이 터졌을 때, 국민혁명군은 이미 8만여 명의 독일식 장비를 갖춘 중앙교도사단을 갖추고 일본군에 맞서 싸웠다.

그러나 나치 독일이 일본과 손을 잡기로 결정하면서 중독간 밀월관계는 종식을 고했다. 1938년 6월 24일 주중 독일 대사는 소환되었고 독일 국방부는 중국에 대한 무기 수송을 금지했으며 독일 고문 전원이 7월 5일에 독일로 돌아갔다.

2.3.3. 중소관계

1927년 4월 12일 장제스가 상하이에서 공산당원들을 대거 숙청하고 7월 15일 왕징웨이가 이끄는 우한의 국민정부가 공식적으로 국공합작을 종료한 후, 스탈린은 중국 공산당의 무장봉기를 지지했다. 1927년 12월 소련의 여러 외교원들이 광저우 폭동에 가담한 사실이 드러나자, 국민정부는 소련과의 국교를 단절하고 각 성에 주재하는 소련 영사관에게 철수를 요구했고 각지의 소련 국영 상업 기관들의 영업을 정지시켰다. 또한 1929년 7월, 국민정부는 소련이 장악한 중동 출도의 일부 관리권을 무력을 동원해 강제로 거둬들였다. 이에 소련 정부는 17일 중국과의 외교관계 단절을 선포하고 그해 9월부터 11월까지 중국 동북군을 공격해 대승을 거두고 중동로를 차지했다. 이것이 바로 중동로 사건이다.

소련에게 큰 피해를 입은 장쉐량은 소련과의 무력 충돌은 무익하다고 판단하고 12월 22일 소련 대표와 하바롭스크 협정을 체결했다. 그러나 국민정부 국무회의는 협정의 범위가 중동로의 문제 자체를 넘어 통상, 공관 복원 등 중앙에서 직접 교섭해야 할 사안으로 보고 장쉐량이 직권을 넘어섰다며 비준을 보류했다. 그러다가 1934년 일본의 위협이 갈수록 거세지자, 중국과 소련 모두 일본을 견제하기 위해 서로 타협하기로 결정했다. 1937년 7월 7일 루거우차오 사건이 벌어지자, 장제스는 쑨커 입법법원장과 외교부장 왕충후이를 소집해 소련에 대해 더 많은 무기, 물자 원조를 얻어내고 중소공조조약을 체결할 것을 지시헀다. 이에 쑨커와 왕충후이는 즉시 상하이로 가서 소련 주재 대사와 상담했고, 그 결과 중국과 소련은 1937년 8월 2일 난징에서 중소불가침조약을 체결했다.

이후 소련 정부는 중국에 전쟁 물자를 제공했고 1937년 11월 공군 지원대를 중국에 파견해 중국군의 방위 작전에 참전했다. 1941년 6월 22일 독소전쟁 발발 전까지 중국에 파견된 소련 지원군 약 2000명 중 약 200명이 전사했다. 또한 소련은 독소전쟁 발발 전까지 항공기 904대, 경량 및 중형 폭격기 318대, 항공기 전차 82대, 차량 1526대, 견인차 24대, 대포 1190문, 기관총 9720정, 소총 5만개, 총탄 1억 6700만여 발, 기관총 총탄 1700만여 발, 폭탄 3100여 발, 포탄 187만여 발, 항공기 엔진 및 엔진 부품, 가솔린 등 군수물자를 제공했다.

2.3.4. 중일관계

1928년 5월 3일, 국민혁명군은 북벌을 진행하던 중 산둥성 지난을 점령했다. 이때 일본 정부는 국민혁명군이 지난에서 일본인을 강간하고 살해했다고 주장하고 이를 보복하기 위해 군대를 파견해 중국 군인과 민중 6천여 명을 학살했다. 이른바 제남 사건, 중국에서는 제남참안(濟南慘案)이라고 불리는 이 사건 때 채공시를 비롯하여 국민정부 외교부 직원 17명과 수백명의 제남 시민 및 국민혁명군 군병이 살해당했다. 이후 일본군은 중국인 학살을 부인하고 국민정부에게 사과와 배상을 요구했으며 5월 11일 지난을 공략한 후 아예 눌러앉았다. 이듬해 3월, 국민정부와 일본 정부는 중일 협력 협정에 서명했고 일본군은 지난에서 철수했다.

1930년 5월 6일, 중일관세협정이 난징에서 조인되었다. 일본은 이 협정을 통해 중국의 관세 자주권을 인정했지만 3년간 110가지의 일본산 수입 제품에 대해서는 관세를 매기지 않기로 했다. 1934년 국민정부는 중일관세협정이 만료되는 시점에 수입세율을 올렸다. 중국 수입관세는 1929년 4%에서 1930년 10%로 증가했고, 1934년에는 25%에 이르렀다.

1931년, 일본 관동군은 대본영에게 사전 허락을 받지도 않고 독자적으로 만주 사변을 벌여 봉천군벌을 격파하고 만주 일대를 석권했다. 이후 일본은 1932년 3월 1일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 선통제를 만주국의 황제로 옹립하기로 결정했고 1934년 3월 1일 선통제가 정식으로 즉위해 연호를 '강덕(康德)'으로 정했다. 이에 국민정부는 국제연맹에 정식으로 항의하며 일본을 제재할 것을 호소했고, 국제연맹은 조사단을 파견해 진상을 파악한 뒤 만주국을 승인하지 않고 일본군의 만주 철수를 촉구하는 결의안을 채택했다. 그러자 일본은 즉각 국제연맹을 탈퇴했다. (일본의 국제연맹 탈퇴 참조)

이후 일본은 하매 협정, 진토 협정, 기동사변, 수동사변을 잇달아 일으켜 중국에 대한 침략 야욕을 드러냈고 중국인들의 반일 감정이 폭발해 각지에서 항일 시위가 벌어졌다. 결국 국민정부는 서안 사건 이후 반일 여론을 이기지 못하고 공산당과 연합해 항일 민족 전선을 구성했고 양국은 1937년 7월 7일 루거우차오 사건 이후 중일전쟁을 단행했다.

2.4. 문화 방면

2.4.1. 교육 투자

국민정부의 초기 교육정책은 리스쩡, 차이위안페이를 비롯한 아나키즘 세력이 주도했다. 중국의 아나키스트들은 교육을 통한 온건한 사회개혁론을 주장했는데 교육을 통해 바른 인간을 길러내면 바른 인간들로 구성된 사회가 건전한 사회가 될 것이라는 낙관적인 믿음이었다. 국민당의 아나키스들은 국민당 중앙위원회 산하 감찰위원회를 중심으로 활동했으며 국민혁명 시기 내내 장제스를 지지하였다. 장제스는 난징 국민정부 수립 이후 아나키스트들에게 권력을 배분하여 이들이 교육혁명론을 펼칠 수 있도록 공간을 마련해주었다. 하지만 반장전쟁초공작전을 거치면서 국민정부 내부의 반공사상이 차차 심화되었으며 이 때문에 차이위안페이는 국민정부와의 관계를 사실상 단절하였고 리스쩡은 해외 망명을 선택하는 등 국민정부의 아나키즘 세력이 일소되거나 우징헝처럼 거수기로 전락하면서 교육정책은 장제스가 장악하게 된다.

1928년, 국민정부 대학원은 제1차 전국 교육회의를 소집하여 중화민국 학교제도 정리안을 통과시켰다. 1935년 5월, 행정원은 <의무교육실시 잠정방법 대강> 및 <민국 24년 중앙의무교육 경비지배방법 대강>을 수정, 통과시켰다. 국민정부는 전국의 학령 아동이 10년 안에 1,2년제 의무교육을 받고 나중엔 4년제 의무 교육을 이수하게 할 계획이었다. 1937년 국민교육부가 내놓은 '학령 아동 강제입학 잠정 방법'에 따르면, 취학 전 아동의 취학률은 1929년 17.1%에서 1936년 43.4%로 높아졌으며 이중 전체 학생에서 대학생의 비율은 1:16,000이었다. 1936년 전국에 전문대학 이상 학교가 108개교였는데, 이중 대학교는 42개교, 독립대 36개교, 전문학교 32개교가 있었다. 또한 학부는 272개, 학과 1095개, 재학생은 4만 1922명이었다.

1927년에 공표된 '대학 교원 자격 조례'는 대학 교원 월급을 교수 400~600위안, 부교수 260~400위안, 강사 160~260위안, 조교 100~160위안으로 규정했다. 교수의 최고 월급 600위안은 국민정부 장관의 봉급과 기본적으로 동일한 액수였다. 1930년대 초반에 고등학교 교사의 평균 월급은 220위안, 중학교 교사의 평균 월급은 120위안, 초등학교 교사의 평균 월급은 30위안이었다. 같은 시기 상하이 일반 노동자의 월급이 15위안인 것을 감안하면 국민정부가 교사들을 얼마나 우대했는 지 짐작할 수 있다.

1927년 7월, 국민정부는 중화민국 대학원조직 조례를 공표했고 뒤이어 본원설립 중앙연구원을 제정했다. 또한 이화설립연구소, 사회과학연구소, 지질연구소, 관상대(观象台) 등 4개 연구기관을 설립했다. 1928년 4월, 국민정부는 '국립중앙연구원 조직조례 개정'을 발표하여 중안민국 대학원 중앙연구원을 국립중앙연구원으로 격상시키고 차이위안페이를 원장으로 임명했다. 그리고 1928년 11월 9일, 국민 정부는 국립중앙연구원 조직법을 공표했다.

1936년 통계에서, 초등학교는 1927년 21만 2385개에서 1936년 32만 80개로 늘었고 일반 중학교는 945개에서 1956개로, 사범학교는 336개에서 814개로 증가했다. 전문대 및대학들은 수적으로 큰 폭으로 증가하지 않았지만 당국의 문과 문과 모집 제한과 이공계 인센티브 정책으로 인해 1930년 문과 졸업생이 과학 및 공학 졸업생의 2배였으나 1937년에는 1:1 비율로 균형을 맞추었다.

2.4.2. 문화, 학술

문화 분야에선, 루쉰, 후스 등 걸출한 문학가들이 등장했고 문화출판업에서 쩌우타오펀과 타오싱즈(陶行知), 문학계에 장아이링(张爱玲), 션총원(沈从文), 차오위(曹禺), 경극과 신예술계에 메이란팡 등이 등장했다. 이밖에 리수통(李叔同), 꾸워지에깡(顾颉刚), 쉬베이훙(徐悲鸿), 량수밍(梁漱溟), 장원제(张元济), 황옌페이, 린휘인(林徽因), 양사성(梁思成), 린위탕(林语堂), 펑유란, 치바이스(齐白石), 첸중수(钱钟书), 양강(杨绛), 바진(巴金), 오청원(吴清源), 유평백(俞平伯), 페이샤오퉁 등이 등장해 1930년대 중국 문화의 발전에 공헌했다.

1935년 중국학자들 사이에 서구화와 중국 정체성 간의 문화 논쟁이 일어났다. 후스가 1929년에 내놓은 '전면서화(全盘西化) 개념에 많은 중국 유명 학자들이 받아들였지만 1935년 왕신명(王新命), 하병송(何炳松) 중국 학자 10명이 '중국본위 문화건설 선언'을 발표해 전면서화에 반기를 들었다. 이후 양측 진영은 상당한 시간 동안 격렬한 논쟁을 벌였지만, 쌍방은 중국 사회가 현대화를 시급히 필요로 한다는 데 인식을 같이 했다.

과학 발전 분야에서, 지질학, 생물학, 물리학, 화학이 모두 장족의 발전을 이루었으며 특히 지질학 분야에선 실업부의 지질조사소가 주관하여 중국의 광산을 조사하고 지질 조사를 통해 토양, 지진을 연구했다. 생물학의 연구는 주로 중국 과학사가 부설한 생물 연구소에서 주관했으며 베이징 생물 조사소, 중앙연구원, 동식물 연구소 등 여러 연구소에서 전국 각지의 동식물의 분류, 형태, 생리유전, 겨제적 용도에 대해 광범위하고 깊이있게 연구했다.

난징 10년은 고고학 연구 분야에서도 장족의 발전을 이루었다. 1927년 하북 방산현 주구점에서 신석기 시대의 유적이 발견되었다. 이후 1929년부터 1936년까지 하남 안양 소둔촌에서 상나라의 도성을 발굴했고, 1930년에는 허베이 이현 연태촌에서 전국시대 연나라의 도성이 발굴되었으며, 1930년부터 1931년까지 산둥성 리청 일대에서 신석기 시대의 검은색 토기가 발굴되었고, 이와 동시에 산시성 완콴현에서 신석기시대 유적지가 발굴되었으며, 1934년에 산시성 보계현에서 신석기 시대 유적지가 발굴되었다. 강남 방면에선, 1930년 양쯔강 남쪽 난징 치샤산(栖霞山)에서 육조묘(六朝墓)가 발견되었으며 1936년 항주, 우싱, 한커우에서 신석기 시대 유적지가 발견되었다.

2.4.3. 방송, 신문. 출판

1928년 가을, 국민정부는 난징에 중앙방송을 설치하여 국민당의 이념을 선전했다. 이와 동시에, 각 성시의 공공 민영방송도 급속히 증가했으며, 전국의 방송국은 공공 또는 민간에 관계없이 전국 라디오 방송국은 당국의 지도를 받았다. 중앙 방송국은 중국 국민당 중앙선전부 소속으로, 1931년 7월에 중앙 집행위원회 산하에 편입되었다. 1937년 6월 조사에 따르면, 전국에 78개에 방송국이 있었는데, 그 중 강소성 및 상하이 지역에 절반이 넘는 방송국이 있었다. 당시 방송은 초기 단계에 있었고 중국 라디오 취청자 숫자는 백만 이하로 중국 인구의 0.25%에 불과했다.

1930년대 중국 신문 산업에서는 중국 신문들의 기업 경영화 추세가 점차 뚜렷해졌고, 내륙 및 외진 지역의 타블로이드 신문도 점차 발달했다. 당시 중국 신문 산업은 주로 북쪽의 하북성, 허난, 산동, 남부의 강소성, 절강에 집중되어 있었다. 1935년 통계에 따르면, 강소성과 절강선의 신문사는 414개 있었고 산둥에는 223개의 신문사가 있었다고 한다.

출판계 역시 장족의 발전을 거두었다. 난징 정부 수립 후 정치 및 학계의 치열한 경쟁으로 잡지 산업은 번창했다. 1936년 전국에 잡지 1,518개, 주간 423개, 순간 152개, 월간 184개, 월간 591개, 격월간 20개, 계간 101개, 반기간 18개로 집계됐다. 난징 10년 시기에 창립되어 영향력이 비교적 큰 잡지는 정론지와 문예지가 많았고 그 중에는 좌파 간행문이 성황을 이루었다. 또한 우익 친정부 인사들은 좌파 간행물에 대항하기 위해 '신생명' 월간지 등을 창간해 좌파 잡지와 경쟁을 벌였다. 1930년대 중반 국민정부가 방송 및 신문 출판업에 대한 통제를 강화했지만, 지식인들은 여전히 각 매체에서 대립했으며 좌익 및 친정부 인사들간의 의견 대립이 종종 벌어졌다. 이렇듯 난징 10년 시기 사회는 어느정도 언론의 자유를 향유했다.

2.5. 사회 방면

2.5.1. 교통 건설

2.5.2. 변경 개발

2.5.3. 도시 행정 건설

2.5.4. 신생활운동

2.6. 국방 방면

장제스는 일본에 대항하기 위해 1935년부터 1937년까지 대대적인 국방건설 사업을 진행하였다. 자세한 것은 해당 문서 참조.

3. 종말

4. 평가

5. 참고 문헌

5.1. 저서

  • 중국현대정치사론, 장옥법, 고려원.
  • 일제의 대륙침략사, 소운서, 이문영, 고려원.
  • 중국자본주의논쟁사, 허계신 등 공저, 고려원.
  • 근대중국농촌사회연구, 박정현, 고려대학교출판부.
  • 근현대 중국의 국가건설과 제3의 길, 강명희, 서울대학교출판부.
  • 중국초기혁명운동의 연구, 민두기 등 공저, 서울대학교출판부.
  • 서안사변과 장학량, 장제스 등 공저, 건국대학교출판부.
  • 중국 국민정부의 공업정책, 김지환, 서신원
  • 중화민국과 공산혁명, 신승하, 대명출판사.
  • 동북군벌과 일본, 송한용, 서도문화사.
  • 중국근현대사 3권 혁명과 내셔널리즘(1925~1945), 이시카와 요시히로, 삼천리.
  • 다큐멘터리 중국 현대사 2권, 서문당 편집실, 서문당.
  • 장개석 연구, 배경한, 일조각.
  • 왕징웨이 연구, 배경한, 일조각.
  • 중일외교사연구, 구정승미, 도서출판선인.
  • 장제스 평전, 조너선 펜비, 민음사
  • 중국혁명사, 서진영, 한울아카데미.
  • 서안사변, 나가노 히로무, 일월서각.

5.2. 링크


[1] 왕징웨이 내각 이전에는 탄옌카이 내각과 1차 장제스 내각이 있었으나 반장전쟁 진압과 만주사변 방어에 총력을 기울이느라 별 힘을 쓰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