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 모의 수상 이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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덴버 너기츠 No. 432 | |
이름 | Douglas Moe |
생년월일 | 1938년 9월 21일 ([age(1938-09-21)]세) |
국적 | [[미국| ]][[틀:국기| ]][[틀:국기| ]] |
출신지 | 뉴욕 주 브루클린 |
학력 | 노스캐롤라이나 대학교 |
신장 | 196cm |
체중 | 98kg |
포지션 | 스몰 포워드 |
프로입단 | 1961년 드래프트 2라운드 (전체 22번, 시카고 패커스) |
소속팀 | 팔라카네스트로 페트라르카 파도바(이탈리아) (1965~1967) 뉴올리언스 버커니어스(ABA) (1967~1968) 오클랜드 오크스(ABA) (1968~1969) 캐롤라이나 쿠거스(ABA) (1969~1970) 버지니아 스콰이어스(ABA) (1970~1972) |
지도자 | 캐롤라이나 쿠거스(ABA) 어시스턴트 코치 (1972~1974) 덴버 너기츠 어시스턴트 코치 (1974~1976/2003~2008) 샌안토니오 스퍼스 감독 (1976~1980) 덴버 너기츠 감독 (1980~1990) 필라델피아 세븐티식서스 감독 (1992~1993) |
등번호 | 4번(파도바), 34번(뉴올리언스, 오클랜드, 캐롤라이나), 15번(버지니아) |
1988년 NBA 올해의 감독상 | ||||
마이크 슐러 | → | 덕 모 | → | 코튼 피츠시몬스 |
1. 개요
미국의 농구인으로, 덴버표 공격농구의 시조로 손꼽힌다.2. 일생
2.1. 선수생활
대학 시절의 모습.
이탈리아 활동 시절의 모습. 뒷줄 4번 선수가 덕 모이다.
뉴올리언스에서의 모습. 앞줄 34번 선수가 덕 모이다.
오클랜드 시절의 모습.
캐롤라이나에서의 모습.
버지니아에서의 모습.
1938년에 뉴욕 브루클린에서 태어나 1958년에 노스캐롤라이나 대학교에 입학해 재학 시절 프랭크 맥과이어 감독 밑에서 농구수업을 받으며 실력이 상승해 1959년과 1961년 두 차례 올-아메리칸 퍼스트 팀에 선발된 바 있었다. 이후 1961년 NBA 드래프트에 신청해 전체 22번으로 시카고 패커스에 지명되었으나, 입단을 포기하고 1965년에 이탈리아로 건너가 팔라카네스트로 페트라르카 파도바라는 농구 팀에서 2년을 뛰다가 1967년에 NBA의 대항 리그인 ABA가 창설되자 미국으로 귀국해 뉴올리언스 버커니어스를 시작으로 1972년 버지니아 스콰이어스를 끝으로 은퇴할 때까지 5년 동안 네 팀을 거치며 준수한 선수 생활을 했다. 특히 1968~1970년까지 세 번 ABA 올스타에 뽑히기도 했다.
2.2. 지도자 생활
2.2.1. ABA ~ 스퍼스까지
덴버 코치 시절 래리 브라운 감독과 함께
1972년에 현역에서 은퇴하자마자 UNC 후배인 래리 브라운 감독이 일하는 캐롤라이나 쿠거스의 코치로 지도자 생활을 시작하여 1974년에 덴버 너기츠의 코치에 이르기까지 브라운 감독과 바늘과 실같이 따라다녔다.
이후 ABA가 NBA로 합병되자 모는 1976년에 당시 동부지구 소속인 샌안토니오 스퍼스의 감독으로 부임해 '아이스맨' 조지 거빈을 중심으로 한 화끈한 공격 농구를 펼쳐 1979년 2차전에서 줄리어스 어빙이 버틴 필라델피아 세븐티식서스를 꺾고 동부 컨퍼런스 파이널까지 도달했으나 웨스 언셀드를 축으로 한 워싱턴 불리츠에게 7차전 만에 3승 4패로 패했다. 이후 덕 모는 1979/80 시즌 막판에 경질당했다.
2.2.2. 금광촌의 무리들을 이끌다
덕 모의 바로 왼쪽분이 훗날 샬럿 호네츠의 감독이 될 알란 브리스토우 코치이다.
1980/81 시즌 도중에 덕 모는 덴버의 감독직에 부임했다. 첫 시즌은 37승 45패로 끝나는 바람에 플레이오프에 못 나갔으나 알렉스 잉글리시와 키키 반더웨이, 고참인 댄 이젤 삼인방을 축으로 얼리 오펜스와 속공을 앞세운 화끈한 공격 농구를 선보여 1981/82 시즌부터 플레이오프에 다시 진출해 플옵 단골로 급부상해 인기를 구가했다. 특히 1983년 12월 13일에 디트로이트 피스톤즈를 상대로 NBA 역사상 최다 양팀 득점 기록인 180점대로 끌어올렸고[1], 1984/85 시즌에는 샌왕과 유타 재즈를 차례로 꺾고 컨퍼런스 파이널에 진출했으나 서부 최강인 '쇼타임' LA 레이커스에게 5차전 만에 1승 4패로 패배당했다.
1985년에 팀의 큰형인 이젤이 은퇴하고 자연히 잉글리시가 중심으로 팻 리버, 대니 쉐이즈[2], 빌 핸즐릭, 캘빈 냇이 받쳐주며 플옵은 꾸준히 갔으나, 쇼타임 레이커스의 아성에 밀려 번번이 1~2라운드에서 떨어지고 말았다.
1989-90 시즌을 앞두고 팀은 컴샛 비디오 엔터프라이즈에 팔렸고, 당시 컴샛의 CEO인 로버트 우슬러(1936~2010)[3]는 그의 코칭 스타일이 맘에 들지 않았다.(관련 기사) 결국 그는 시즌 종결 후 1990년 9월에 계약기간 3년을 남겨 둔 채 경질되었다.
2.2.3. 말기
덴버를 떠난 덕 모는 잠시 야인으로 지내다 1992년부터 필라델피아 세븐티식서스의 감독을 했으나, 별 성적을 못 내고 시즌 도중에 해임당했다.
이후 한동안 야인으로 지내다 2003년부터 덴버 너기츠 코치로 돌아와 2005년부터 부임한 UNC 동문 조지 칼 감독에게 도움이 되는 조언을 해 주면서 보좌해 오다가 2008년을 끝으로 지도자 일선에서 물러났다.
2.3. 감독 스타일
그의 지도 스타일은 '판단과 선택을 빠르게'라는 모토 하에 얼리 오펜스와 런앤건을 앞세운 고득점형 농구였다. 더구나 팀이 위치한 콜로라도 주 덴버는 고산지역이었기 때문에 상대 팀들이 느끼는 피로감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처음에 그는 런앤건을 선택할 때 주변 농구인들로부터 수비를 등한시한다는 이유로 비난을 받았으나[4], 팬들은 이런 농구 스타일을 사랑했다.3. 이후
2002년에 그의 승수인 '432'가 마킹된 유니폼이 덴버에서 영구 결번되었고, 2015년에는 샌안토니오 스포츠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1] 결과는 186-184로 덴버 패배.[2] 돌프 쉐이즈의 아들.[3] CNN의 공동창업자이기도 하다.[4] 실제로 런앤건이 주력인 팀들은 수비가 받쳐주지 않아 정상에는 오르지 못 하는 경우가 많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