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마르 호이트 관련 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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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라마르 호이트의 수상 경력 / 역대 등번호 |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1983년 메이저 리그 아메리칸 리그 사이 영 상 | ||||||||||||||||||||||||||||||||||||||||||||||||||||||||||||||||||||||||||||||||||||||||||||||||||||||||||||||||||||||||||||||||||||||||||||||||||||||||||||||||||||||||||||||||||||||||||||||||||||||||||||||||||||||||||||||||||||||||||||||||||||||||||||||||||||||||||||||||||||||||
피트 부코비치 (밀워키 브루어스) | → | 라마르 호이트 (시카고 화이트삭스) | → | 윌리 에르난데스 (디트로이트 타이거스) |
1982년 ~ 1983년 메이저 리그 아메리칸 리그 다승왕 | ||||
데니스 마르티네즈 (볼티모어 오리올스) 스티브 맥카티 (오클랜드 애슬레틱스) 잭 모리스 (디트로이트 타이거스) 피트 부코비치 (밀워키 브루어스) | → | 라마르 호이트 (시카고 화이트삭스) | → | 마이크 보디커 (볼티모어 오리올스) |
게리 카터 (몬트리올 엑스포스) | → | 라마르 호이트 (샌디에이고 파드리스) | → | 로저 클레멘스 (보스턴 레드삭스) |
시카고 화이트삭스 등번호 50번 | ||||
브릿 번스 (1978) | → | 라마르 호이트 (1979~1980) | → | 후안 아고스토 (1981~1986) |
시카고 화이트삭스 등번호 31번 | ||||
조 게이츠 (1978) | → | 라마르 호이트 (1980~1984) | → | 브루스 태너 (1985) |
샌디에이고 파드리스 등번호 31번 | ||||
에드 윗슨 (1983~1984) | → | 라마르 호이트 (1985~1986) | → | 에드 윗슨 (1987~199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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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마르 호이트 LaMarr Hoyt | |
본명 | 듀이 라마르 호이트 주니어 Dewey LaMarr Hoyt Jr. |
출생 | 1955년 1월 1일 |
사우스캐롤라이나 주 컬럼비아 | |
사망 | 2021년 11월 29일 (향년 66세) |
사우스캐롤라이나 주 컬럼비아 | |
국적 | 미국 |
학력 | 키난 고등학교 |
신체 | 190cm / 88kg |
포지션 | 선발 투수 |
투타 | 우투우타 |
프로 입단 | 1973년 드래프트 5라운드 (전체 109번, NYY) |
소속팀 | 시카고 화이트삭스 (1979~1984) 샌디에이고 파드리스 (1985~198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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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국의 전 야구선수. 포지션은 투수로 시카고 화이트삭스에서 주로 활약했다. 사이 영 상이 양대 리그 수상으로 분리 된 이후 시카고 화이트삭스에서 배출한 첫 사이 영 상 수상자이자 화이트삭스 소속으로 사이 영 상을 받은 세 명 중 한 명이다. [1]메이저리그에서 활약한 기간이 불과 8년밖에 안되지만, 그 8년 동안 98승에 사이 영을 수상하는 등 빅리그에 나름의 족적을 남기며 짧지만 불꽃같은 선수시절을 보냈다.
2. 선수 시절
사우스캐롤라이나주 출신으로, 고등학교 졸업후 1973년 드래프트에서 뉴욕 양키스의 지명을 받았다. 이후 마이너에서 착실히 실력을 쌓던 중 1977년, 팀의 또다른 투수 유망주 밥 폴린스키, 주전 외야수 오스카 갬블과 함께 시카고 화이트삭스의 주전 유격수 버키 덴트를 상대로 트레이드되었다. [2][3][4]화이트삭스로 넘어간 후에도 마이너리그에서 담금질을 하던 호이트는 1979년 처음으로 빅 리그 무대를 밟은 뒤 1980년부터 본격적으로 메이저리그에서 활약하기 시작, 스윙맨으로 나서며 9승 3패 4.57의 평균자책점을 기록하였으며 1981년에는 불펜으로 나서며 9승 3패 3.57의 평균자책점과 10세이브를 기록하였다.
이후 1982년부터는 선발로테이션에 정착, 그 해 239.2이닝 동안 19승에 3.53의 평균자책점, 14완투라는 성적을 거두며 이닝이터의 머습을 보여주었고 화이트삭스의 1선발로 자리잡았다.
1983년은 호이트의 선수 커리어에서 최고의 순간으로, 이 해 260.2이닝동안 24승에 3.66의 평균 자책점 11완투라는 성적을 거두며 다승왕과 사이 영을 동시에 석권, 팀을 ALCS로 이끌었으며 ALCS 1차전에 선발투수로 등판해 무사사구 완투승을 거두지만 팀은 이후 내리 3연패를 당하며 월드 시리즈 진출에 실패한다.
이렇게 맹활약했지만 2년동안 440이닝을 던질 정도로 혹사를 당한 그는 1984년에는 이로인해 폼이 떨어져 13승 18패 평균자책점 4.47이란 부진한 성적을 거두었고, 팀은 1선발이었던 그의 부진으로 전년도 99승에 74승으로 추락하자 그를 샌디에이고 파드리스에서 아지 기옌, 팀 롤러, 빌 롱, 루이스 살라자르를 받아오는 조건으로 마이너리거 케빈 크리스탄, 토드 시몬스와 함께 트레이드시켜버린다. [5]
호이트는 파드리스에서는 첫 해 16승 8패 평균자책점 3.47이라는 준수한 성적을 거두며 반등하는 듯 싶었지만, 1986년 시즌 전부터 마약 복용 혐의로 두번이나 체포되어 재활프로그램에 들어가며 스프링캠프도 날리고 몸도 만들지 못해 8승 11패라는 평균자책점 5.15 부진한 성적을 거두었다. 심지어 시즌 후에는 멕시코에서 마약을 밀수하려다가 걸려 다시 체포되어 집행유예를 받았는데, 이에 분노한 파드리스 구단 측에서 그와 계약을 해지하며 무적 신세가 된다.
이후 오갈데가 없어진 그에게 1987년 시즌을 앞두고 화이트삭스가 다시 손을 내밀며 어찌저찌 선수생활 연명에는 성공했지만, 이도 1987년 12월 그가 마약 혐의로 네 번째 체포를 당함과 동시에 1년 징역을 선고받으며 호이트의 선수생활은 완전히 끝나게 된다.
3. 은퇴 후
마약 혐의로 체포된 호이트는 1988년 1월부터 연방 교도소에서 복역하였으며 그 해 7월 가석방되었다.2021년 12월 2일 화이트삭스 구단 공식 홈페이지를 통해 11월 29일 암투병 끝에 사우스캐롤라이나주의 콜럼버스에 위치한 자택에서 세상을 떠났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이후 토니 라루사 등 야구인들이 그를 추모했다.
4. 피칭 스타일
5. 여담
선수시절에는 꽤나 후덕한 모습이었는데 은퇴한 이후에는 건강이 안 좋아져 상당히 야윈 모습이었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동일인물인지 모를정도. 결국 오랜 암 투병 끝애 세상을 떠났다.그의 아들의 회고에 따르면 선수 본인의 전성기였던 화이트삭스 시절에 대하여 큰 자부심이 었었던 것으로 보인다. 화이트삭스시절을 본인인생의 황금기로 칭하며 마지막까지 화이트삭스 시절과 동료들에 대해 이야기했다고.
[1] 다른 두 명은 1959년 수상자 얼리 윈과 1993년 수상자 잭 맥도웰.[2] 물론 이 트레이드에서 양키스의 메인카드는 호이트가 아닌 오스카 갬블이었다. 클리블랜드 인디언스에서 주전으로 활약하던 갬블은 1976년 시즌을 앞두고 양키스로 이적하여 준수한 활약을 펼쳤지만 특유의 아프로 헤어스타일로 인해 구단주였던 조지 스타인브레너와 마찰이 있었고, 결국 1년만에 양키스를 떠나게 되었다. 이후 갬블은 화이트삭스에서 타율 .297 31홈런 OPS .974의 성적으로 커리어하이를 기록하지만 1년만에 화이트삭스를 떠났고, 1979시즌 양키스로 복귀한다.[3] 반대급부로 양키스로 넘어간 버키 덴트는 이후 1978년 월드 시리즈에서 시리즈 MVP를 수상하고 올스타에 2회 선정되었다.[4] 한편 호이트와 함께 화이트삭스로 넘어간 밥 폴린스키는 메이저리그에서 활약은 커녕 1979년 은퇴할때까지 메이저리그 무대도 밟지 못했다.[5] 하술하겠지만 호이트가 파드리스에서 폭망하면서 이 트레이드는 화이트삭스의 승리로 끝난다. 파드리스에서 받아온 기옌이 신인왕을 수상하고, 팀 롤러와 루이스 살라자르가 망했지만 빌 롱이 쏠쏠한 구원투수로 활약했기 때문. 반면 파드리스는 호이트 뿐만 아니라 함께 받아온 두 마이너리거 역시 폭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