롤리 핑거스의 수상 경력 / 역대 등번호 |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MLB 월드 시리즈 우승반지 | ||
1972 | 1973 | 1974 |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올스타 | |||
1973 | 1974 | 1975 | 1976 |
1978 | 1981 | 198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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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지 잭슨 | 리키 헨더슨 | 캣피시 헌터 | 롤리 핑거스 | |
<rowcolor=#CCAC00> No.34 | No.42 | No.43 | ||
데이브 스튜어트 | 재키 로빈슨 | 데니스 에커슬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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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12284b> 버드 셀릭 | 폴 몰리터 | 로빈 욘트 | |
<rowcolor=#ccac00> No.34 | No.42 | No.44 | |
<rowcolor=#12284b> 롤리 핑거스 | 재키 로빈슨 | 행크 애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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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003831> 등번호 | 이름 | 포지션 | 활동 기간 | |
43 | 데니스 에커슬리 | 투수 | 1987~1995 | |
32,38, 34 | 롤리 핑거스 | 투수 | 1968~1976 | |
39, 35, 22, 24 | 리키 헨더슨 | 좌익수 | 1979~1984 1989~1993 1994~1995 1998 | |
27 | 캣피시 헌터 | 투수 | 1965~1974 | |
9, 44 | 레지 잭슨 | 우익수 | 1967~1975 1987 | |
34, 35 | 데이브 스튜어트 | 투수 | 1986~1992 1995 | |
- | 찰리 핀리 | 구단주 단장 | 1960~1981 | |
2019년 헌액된 인물 | ||||
<rowcolor=#003831> 등번호 | 이름 | 포지션 | 활동 기간 | |
10, 11, 22, 29, 42 | 토니 라 루사 | 내야수 감독 | 1963 1968~1971 1986~1995 | |
14, 17, 21, 28, 35 | 바이다 블루 | 투수 | 1969~1977 | |
19 | 버트 캄파네리스 | 유격수 | 1964~1976 | |
25 | 마크 맥과이어 | 1루수 | 1986~1997 | |
- | 월터 A. 하스 주니어 | 구단주 | 1981~1995 | |
2021년 헌액된 인물 | ||||
<rowcolor=#003831> 등번호 | 이름 | 포지션 | 활동 기간 | |
- | 코니 맥 | 감독 구단주 | 1901~1950 1901~1954 | |
- | 에디 콜린스 | 2루수 | 1906~1914 1927~1930 | |
- | 홈런 베이커 | 3루수 | 1908~1914 | |
- | 치프 벤더 | 투수 | 1903~1914 | |
2 | 미키 코크런 | 포수 | 1925~1933 | |
2, 3 | 지미 폭스 | 1루수 | 1925~1935 | |
10 | 레프티 그로브 | 투수 | 1925~1933 | |
- | 에디 플랭크 | 투수 | 1901~1914 | |
6, 7, 28, 32 | 알 시몬스 | 좌익수 코치 | 1924~1932 1940~1941, 1944 1940~1945 | |
- | 루브 워델 | 투수 | 1902~1907 | |
2022년 헌액된 인물 | ||||
<rowcolor=#003831> 등번호 | 이름 | 포지션 | 활동 기간 | |
30, 3 | 에릭 차베스 | 3루수 | 1998~2010 | |
6 | 살 반도 | 3루수 | 1966~1976 | |
15, 45, 8, 36, 26 | 조 루디 | 좌익수 1루수 | 1967~1976 1982 | |
10 | 레이 포시 | 포수 해설자 | 1973~1975 1986~2021 | |
- | 키스 리프먼 | 팜 디렉터 | 1971~ | |
- | 스티브 부치니크 | 클럽하우스 매니저 | 1966~ | |
2023년 헌액된 인물 | ||||
<rowcolor=#003831> 등번호 | 이름 | 포지션 | 활동 기간 | |
16 | 제이슨 지암비 | 좌익수 1루수 | 1995~2001 2009 | |
26, 7, 4 | 밥 존슨 | 좌익수 | 1933~1942 | |
5, 4 | 카니 랜스포드 | 3루수 | 1983~1992 | |
24, 38, 18 | 진 테니스 | 포수 1루수 | 1969~1976 | |
- | 로이 스틸 | 퍼블릭 어드레스 아나운서 | 1968~2005 2007~2008 |
{{{#!wiki style="margin: -10px -10px" | <table bordercolor=#12284b> | 아메리칸 패밀리 필드 명예의 거리 |
{{{#!wiki style="margin: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191919,#ffffff | 행크 애런 | 롤리 핑거스 | 폴 몰리터 | 로빈 욘트 | 세실 쿠퍼 |
버드 셀릭 | 해리 달튼 | 밥 우에커 | 짐 갠트너 | 고먼 토마스 | |
하비 킨 | 돈 머니 | 에디 매튜스 | 존 퀸 | 워렌 스판 | |
루 버데트 | 자니 로건 | 테드 히게라 | 조 애드콕 | 제프 젠킨스 | |
프린스 필더 | 벤 시츠 |
{{{#!wiki style="margin: -10px -10px" | <table bordercolor=#12284b> | 밀워키 브루어스 명예의 벽 |
{{{#!wiki style="margin: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191919,#ffffff | 행크 애런 | 제리 어거스틴 | 살 반도 | 크리스 보시오 | 자니 브릭스 |
제로미 버니츠 | 마이크 콜드웰 | 빌 카스트로 | 제프 시릴로 | 짐 콜본 | |
세실 쿠퍼 | 크레이그 카운셀 | 척 크림 | 롭 디어 | 칼 엘드레드 | |
마이크 페터스 | 롤리 핑거스 | 짐 갠트너 | 무스 하스 | 빌 홀 | |
대럴 해밀턴 | 테디 히게라 | 존 자하 | 제프 젠킨스 | 하비 킨 | |
식스토 레즈카노 | 팻 리스태치 | 마크 로레타 | 데이브 메이 | 밥 맥클루어 | |
폴 몰리터 | 돈 머니 | 찰리 무어 | 하이메 나바로 | 데이브 닐슨 | |
벤 오글리비 | 댄 플리잭 | 대럴 포터 | 켄 샌더스 | 조지 스캇 | |
케빈 세이처 | 버드 셀릭 | 리치 섹슨 | 벤 시츠 | 테드 시몬스 | |
짐 슬래튼 | B.J. 서호프 | 돈 서튼 | 고먼 토마스 | 빌 트래버스 | |
밥 우에커 | 호세 발렌틴 | 그렉 본 | 페르난도 비냐 | 피트 부코비치 | |
빌 웨그먼 | 밥 위크먼 | 로빈 욘트 | 빌 쇼로더 | 코리 하트 | |
해리 달튼 | 프린스 필더 | 더그 멜빈 | J.J. 하디 | 트레버 호프먼 | |
리키 윅스 | 요바니 가야르도 | 카를로스 고메즈 | 프란시스코 로드리게스 | 라이언 브론 | |
조나단 루크로이 |
명예의 전당 헌액자 | |
롤리 핑거스 | |
헌액 연도 | 1992년 |
헌액 방식 | 기자단(BBWAA) 투표 |
투표 결과 | 81.3% (2회) |
1981년 메이저 리그 아메리칸 리그 MVP | ||||
조지 브렛 (캔자스시티 로열스) | → | 롤리 핑거스 (밀워키 브루어스) | → | 로빈 욘트 (밀워키 브루어스) |
1981년 메이저 리그 아메리칸 리그 사이 영 상 | ||||
스티브 스톤 (볼티모어 오리올스) | → | 롤리 핑거스 (밀워키 브루어스) | → | 피트 부코비치 (밀워키 브루어스) |
1974년 월드 시리즈 MVP | ||||
레지 잭슨 (오클랜드 애슬레틱스) | → | 롤리 핑거스 (오클랜드 애슬레틱스) | → | 피트 로즈 (신시내티 레즈) |
1977년 ~ 1978년 메이저 리그 내셔널 리그 롤레이즈 구원 투수 상 | ||||
롤리 이스트윅 (신시내티 레즈) | → | 롤리 핑거스 (샌디에이고 파드리스) | → | 브루스 수터 (시카고 컵스) |
1980년 메이저 리그 내셔널 리그 롤레이즈 구원 투수 상 | ||||
브루스 수터 (시카고 컵스) | → | 롤리 핑거스 (샌디에이고 파드리스) | → | 브루스 수터 (시카고 컵스) |
1981년 메이저 리그 아메리칸 리그 롤레이즈 구원 투수 상 | ||||
댄 퀴즌베리 (캔자스시티 로열스) | → | 롤리 핑거스 (밀워키 브루어스) | → | 댄 퀴즌베리 (캔자스시티 로열스) |
1977년 ~ 1978년 메이저 리그 내셔널 리그 세이브왕 | ||||
롤리 이스트윅 (신시내티 레즈) | → | 롤리 핑거스 (샌디에이고 파드리스) | → | 브루스 수터 (시카고 컵스) |
1981년 메이저 리그 아메리칸 리그 세이브왕 | ||||
구스 고시지 (뉴욕 양키스) 댄 퀴즌베리 (캔자스시티 로열스) | → | 롤리 핑거스 (밀워키 브루어스) | → | 댄 퀴즌베리 (캔자스시티 로열스) |
오클랜드 애슬레틱스 등번호 32번 | ||||
켄 샌더스 (1968) | → | 롤리 핑거스 (1968) | → | 밥 존슨 (1969~1970) |
오클랜드 애슬레틱스 등번호 38번 | ||||
랜디 슈와츠 (1965) | → | 롤리 핑거스 (1968) | → | 알 다우닝 (1970) |
오클랜드 애슬레틱스 등번호 34번 | ||||
라몬 웹스터 (1967) | → | 롤리 핑거스 (1969~1976) | → | 밥 레이시 (1977~1980) |
데이브 스튜어트 (1986~1992, 영구결번) | → | 영구결번[1] | → | |
샌디에이고 파드리스 등번호 34번 | ||||
켄 레이놀즈 (1976) | → | 롤리 핑거스 (1977~1980) | → | 스톰 데이비스 (1987) |
밀워키 브루어스 등번호 34번 | ||||
에드 로메로 (1980) | → | 롤리 핑거스 (1981~1982, 1984~1985) | → | 존 헨리 존슨 (1986) |
마크 리 (1990~1991) | → | 영구결번 | → |
애슬레틱스 No.34 | 밀워키 브루어스 No.34 | |
<colbgcolor=#003831><colcolor=#FFFFFF> 애슬레틱스 사장 특별자문 | ||
롤리 핑거스 Roland Glen Fingers | ||
본명 | 롤랜드 글렌 핑거스 Roland Glen Fingers | |
출생 | 1946년 8월 25일 ([age(1946-08-25)]세) | |
오하이오 주 스테우벤빌 | ||
국적 | [[미국| ]][[틀:국기| ]][[틀:국기| ]] | |
학력 | 업랜드 고등학교 - 차피 칼리지 | |
신체 | 193cm / 86kg | |
포지션 | 마무리 투수 | |
투타 | 우투우타 | |
프로입단 | 1964년 아마추어 자유계약 (KCA) | |
소속팀 | 오클랜드 애슬레틱스 (1968~1976) 샌디에이고 파드리스 (1977~1980) 밀워키 브루어스 (1981~1982, 1984~1985) | |
프런트 | 오클랜드 애슬레틱스 사장 특별자문 (2020~) | |
기록 | 합작 노히트 노런 (1975.9.28) |
[clearfix]
1. 개요
오클랜드 애슬레틱스의 전성기 시절, 팀의 뒷문을 지켰던 든든한 마무리이자, 선수 생활의 말년이었던 밀워키 브루어스 시절에도 팀의 영광을 안겨준 선수다. 뛰어난 구위를 바탕으로 뒷문을 지켜낸 투수로 명성을 떨쳤던 선수.은퇴 시점에서 세이브 통산 기록 1위였으며 이를 7년간 지키고 있었다. 아울러 멋있게 기른 콧수염이 인상적이었던 선수기도. 메이저리그 명예의 전당에 헌액된 역대 두 번째 마무리 투수다.[2] 통산 성적은 114승 118패 341세이브 2.90.
2. 선수 경력
2.1. 오클랜드 애슬레틱스의 수호신
아버지는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 산하 마이너리그 소속 야구 선수로 룸메이트가 전설적인 강타자 스탠 뮤지얼이었다. 선수로는 대성하지 못하고, 은퇴 후에 오하이오에서 철강 노동자로 살았지만, 어느 날 갑자기 가난함에서 벗어나고 싶어 뜬금없이 캘리포니아주로 이주했다. 하지만, 거기서도 결국 철강공장에 다시 취직했다.
다행히 아들인 롤리 핑거스는 야구에 대한 재능이 뛰어나서 프로 구단의 주목을 받았다. 먼저 그에게 접근한 것은 LA 다저스인데, 실제로 계약금 2만 달러를 제시하며 입단시키려고 했다. 하지만, 핑거스는 당시 다저스에 무지막지한 원투펀치인 샌디 쿠팩스와 돈 드라이스데일을 보고, 이 두 양반이 있는 한 자기에게 기회가 오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고, 제안을 거부한다. 그리고 1만 3천 달러를 제시한 캔자스시티 애슬레틱스에 입단한다.
초기에는 선발과 구원을 오가는 역할이었는데, 선발보다는 구원에서 더 잘 던지는 쪽이었고, 마침내 팀은 결단을 내려 그에게 구원 투수의 역할을 부여했다. 물론 오늘날처럼 1이닝만 막는 것이 아니라, 팀이 이기고 있으면 언제든 등판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8회 등판은 기본이었고, 7회 등판, 심지어 6회에 나와서 경기를 끝낸 적도 있었다.
오클랜드는 그가 구원 투수로서 제 기량을 서서히 발휘하던 무렵인 1971년부터 리그를 평정하기 시작했다. 오클랜드의 지구 5연패 및 리그와 월드시리즈 3연패를 달성한[3] 1971년부터 1975년까지 롤리 핑거스는 매년 60경기 이상 나와[4] 120이닝 가깝게 던지면서 팀의 뒷문을 책임졌다. 그리고 1972년과 1974년까지 오클랜드가 월드시리즈 3연패를 달성하는 동안 PO에서 맹활약했다. 특히 1974년 월드시리즈에서는 4경기 나와 9.1이닝을 던지며 1승 2세이브를 기록해 월드시리즈 MVP를 수상했다. 공교롭게도 그가 부진했던 1971년과 1975년 PO에서 팀은 월드시리즈 진출에 실패했다.
오클랜드의 수호신으로 군림하며 영광을 누렸던 핑거스는 그러나 팀의 재정이 점차 악화되면서 주축 선수들이 떠나는 것을 보고, 그 역시 팀을 떠나기로 마음을 먹는다. 그리고 마침내 1976년 FA 자격을 얻어 샌디에이고 파드리스로 이적했다.
2.2. 밀워키 브루어스의 수호신
오클랜드 시절에 비해 연봉이 4배 올랐고, 고향과도 가까운 샌디에이고로 간 것은 분명 나쁜 선택은 아니었다. 실제로 샌디에이고에서도 괜찮은 활약을 선보였지만, 문제는 이 당시 샌디에이고는 그리 강팀이 아니었다. 1977년과 1978년 두 차례 세이브 1위에 올랐지만, 샌디에이고로서는 거물 마무리를 오래 잡을 정도로 그리 한가한 팀은 아니었고, 마침낸 1980년 시즌이 끝난 후, 삼각 트레이드를 통해 밀워키 브루어스로 이적하게 된다.로빈 욘트와 폴 몰리터를 앞세워 창단 후 처음으로 강호로 도약한 밀워키 브루어스에 합류해서 핑거스는 맹활약한다. 1981년 78이닝에 나와 6승 3패 28세이브 평균자책 1.04 라는 기록을 내며 활약하며, 팀을 사상 첫 PO에 올려 놓았고, 본인은 사이 영 상과 리그 MVP를 동시에 수상했다. 활약은 이듬 해에도 계속되어 29세이브를 기록하며 팀의 또 한 번의 PO 진출을 이끈다. 그러나 이 때 부상으로 인해 1982년 월드 시리즈에는 나서지 못하는데, 이게 밀워키가 7차전 접전 끝에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에게 패하는 원인이 되고 만다. 뒷문의 불안으로 먼저 선취점을 낸 경기가 5경기였지만, 이를 지키지 못한 것. 반면 이 때 세인트루이스에는 또 다른 메이저리그 명예의 전당에 헌액된 마무리인 브루스 수터가 버티고 있었고, 그 차이가 승부를 갈랐다.
1984년에도 좋은 활약을 보였지만, 만 38세 시즌인 1985년에는 5점대 평균 자책점을 찍으면서 무너졌고, 결국 이 시즌을 끝으로 은퇴하기에 이른다.
3. 콧수염
롤리 핑거스 하면 떠오르는 것은 콧수염이다. 사실 원래는 콧수염을 기르지 않았다고 한다. 오클랜드 시절 팀 동료 레지 잭슨이 수염을 기르고 나타나자, 원래는 팀 동료들은 구단주인 찰리 핀리가 수염을 못 기르게 할 줄 알고, 잭슨이 수염을 밀도록 만들기 위해 자신들도 그냥 면도를 안 해 버렸다.[5] 그런데, 메이저리그에서 손꼽히는 괴짜 구단주인 찰리 핀리[6]는 오히려 수염 기르기 콘테스트를 열었고, 필 받은 핑거스는 이 때 정말 열심히 수염을 가꿔서 핀리가 내건 보너스를 타는데 성공했다. 그리고 이 때부터 가꾼 그의 카이젤 수염은 핑거스의 트레이드 마크가 되었다. 그리고 핀리는 아예 수염의 날을 지정해 수염을 기른 관중을 무료 입장시키는 마케팅을 펼쳤다. 물론 수염 기른 선수들이 그라운드에서 뛰고 있었고.밀워키에서 무너진 후, 1985년 밀워키에서 나왔을 때, 신시내티 레즈에서 그를 영입하려고 시도했다. 하지만, 팀의 구단주인 마치 쇼트[7]가 수염은 무조건 면도한다는 규정을 내세워서 결국 입단하지 못하고 그냥 은퇴해 버렸다.
4. 평가
천대받던 마무리 투수의 개념을 정립하는데 일조한 인물이다. 그보다 앞서 명예의 전당에 헌액된 너클볼 투수 호이트 윌헬름이 구원 투수가 팀의 에이스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줬다면, 핑거스는 좋은 구원 투수 한 명이 팀의 우승에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는지를 보여줬다. 오클랜드의 전성시대와 밀워키의 전성 시대에 모두 핑거스가 기여를 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나이가 들면서는 2이닝 이상 던지지는 않았지만, 초창기에는 그야말로 마구잡이 구원 등판의 위엄도 보여줬다. 100이닝 이상은 매년 기본으로 던진 것. 통산 던진 이닝이 구원 투수 치고는 상당히 많은 1701이닝이라는 점은 그의 등판 빈도와 활용도를 짐작케 한다.그가 개척한 구원 투수의 길은 브루스 수터가 이기는 경기에만 나간다는 개념으로 업그레이드 시켰고, 리치 고시지를 거쳐 마침내 토니 라 루사와 데니스 에커슬리에 의해 등장한 1이닝 마무리로 완성되었다. 요컨대 사실상 마무리 투수가 팀에 어떤 기여를 할 수 있는지를 정확하게 증명한 선수. 오늘날과 완벽하게 일치하지는 않지만, 사실상 구원 투수의 개념을 개척하는데 기여한 선수다.
5. 명예의 전당 입성
빅게임에서 강했고, 구원 투수로서 명성을 떨쳤으며, 가는 팀마다 맹활약한 선수라서 그런지 명예의 전당에 헌액된 다른 구원 투수들과는 달리 메이저리그 명예의 전당에 단 두 번만에 입성할 수 있었다.[8] 그가 현역 시절 달았던 등번호 34번은 그의 전성기를 함께 한 오클랜드 애슬레틱스와 밀워키 브루어스 모두의 영구 결번으로 지정되었다.5.1. 명예의 전당 통계(Hall of Fame Statistics)
블랙잉크 | 그레이잉크 | HOF 모니터 | HOF 스탠다드 | |
롤리 핑거스 | 12 | 52 | 128 | 18 |
HOF 입성자 평균 | 40 | 185 | 100 | 50 |
- JAWS - Relief Pitcher (26th)
career WAR | 7yr-peak WAR | JAWS | |
롤리 핑거스 | 26.1 | 19.2 | 22.7 |
릴리프 HOF 입성자 평균 | 40.6 | 28.2 | 34.4 |
6. 연도별 성적
롤리 핑거스의 역대 MLB 기록 | |||||||||||||||||
<rowcolor=#FFFFFF> 연도 | 팀 | G | W | L | S | HLD | IP | ERA | H | HR | BB | HBP | SO | WHIP | ERA+ | fWAR | bWAR |
1968 | OAK | 1 | 0 | 0 | 0 | 0 | 1⅓ | 27.00 | 4 | 1 | 1 | 1 | 0 | 3.750 | 15 | -0.2 | -0.2 |
1969 | 60 | 6 | 7 | 12 | 3 | 119 | 3.71 | 116 | 13 | 41 | 4 | 61 | 1.319 | 92 | 0.2 | -0.6 | |
1970 | 45 | 7 | 9 | 2 | 1 | 148 | 3.65 | 137 | 13 | 48 | 2 | 79 | 1.250 | 97 | 1.6 | 0.9 | |
1971 | 48 | 4 | 6 | 17 | 1 | 129⅓ | 2.99 | 94 | 14 | 30 | 8 | 98 | 0.959 | 112 | 1.0 | 1.6 | |
1972 | 65 | 11 | 9 | 21 | 1 | 111⅓ | 2.51 | 85 | 8 | 32 | 1 | 113 | 1.051 | 115 | 1.5 | 1.3 | |
1973 | 62 | 7 | 8 | 22 | 4 | 126⅔ | 1.92 | 107 | 5 | 39 | 4 | 110 | 1.153 | 186 | 2.4 | 1.7 | |
1974 | 76 | 9 | 5 | 18 | 10 | 119 | 2.65 | 104 | 5 | 29 | 1 | 95 | 1.118 | 126 | 3.2 | 1.4 | |
1975 | 75 | 10 | 6 | 24 | 5 | 126⅔ | 2.98 | 95 | 13 | 33 | 6 | 115 | 1.011 | 122 | 2.2 | 2.2 | |
1976 | 70 | 13 | 11 | 20 | 1 | 134⅔ | 2.47 | 118 | 3 | 40 | 7 | 113 | 1.173 | 136 | 4.1 | 3.8 | |
<rowcolor=#4e2200> 연도 | 팀 | G | W | L | S | HLD | IP | ERA | H | HR | BB | HBP | SO | WHIP | ERA+ | fWAR | bWAR |
1977 | SD | 78 | 8 | 9 | 35 | 1 | 132⅓ | 2.99 | 123 | 12 | 36 | 1 | 113 | 1.202 | 119 | 2.1 | 2.2 |
1978 | 67 | 6 | 13 | 37 | 0 | 107⅓ | 2.52 | 84 | 4 | 29 | 1 | 72 | 1.053 | 132 | 2.3 | 2.5 | |
1979 | 54 | 9 | 9 | 13 | 1 | 83⅔ | 4.52 | 91 | 7 | 37 | 1 | 65 | 1.530 | 78 | 0.3 | -1.3 | |
1980 | 66 | 11 | 9 | 23 | 0 | 103 | 2.80 | 101 | 3 | 32 | 0 | 69 | 1.291 | 123 | 2.0 | 1.8 | |
<rowcolor=#FFFFFF> 연도 | 팀 | G | W | L | S | HLD | IP | ERA | H | HR | BB | HBP | SO | WHIP | ERA+ | fWAR | bWAR |
1981 | MIL | 47 | 6 | 3 | 28 | 0 | 78 | 1.04 | 55 | 3 | 13 | 1 | 61 | 0.872 | 333 | 2.6 | 4.2 |
1982 | 50 | 5 | 6 | 29 | 1 | 79⅔ | 2.60 | 63 | 5 | 20 | 1 | 71 | 1.042 | 147 | 2.4 | 2.3 | |
1983 | MLB 기록 없음 | ||||||||||||||||
1984 | 33 | 1 | 2 | 23 | 0 | 46 | 1.96 | 38 | 5 | 13 | 0 | 40 | 1.109 | 200 | 0.7 | 1.7 | |
1985 | 47 | 1 | 6 | 17 | 1 | 55⅓ | 5.04 | 59 | 9 | 19 | 0 | 24 | 1.410 | 83 | -0.7 | -0.4 | |
MLB 통산 (17시즌) | 944 | 114 | 118 | 341 | 30 | 1701⅓ | 2.90 | 1474 | 123 | 492 | 39 | 1299 | 1.156 | 120 | 27.4 | 25.0 |
[1] 데이브 스튜어트와 공동 영구결번[2] 최초는 너클볼 투수인 호이트 윌헬름인데, 너클볼이라는 독특함 때문에 마무리 투수의 시초라기보다는 차라리 불펜 에이스의 시초로 보는 편이 더 타당하다.[3] 이 때 팀 스쿼드가 화려했는데 레지 잭슨, 캣피시 헌터, 바이다 블루, 진 테나스가 동료였다.[4] 1971년만 48경기였다.[5] 그렇게 해야 구단주가 집단으로 반항한다고 생각하고 면도를 강제로 지시하기 때문이다.[6] 지명타자제도의 도입, FA 제도 당시 모든 선수를 FA로 풀자는 파격적인 제안(소수의 선수만 풀리면 몸값이 올라가기 때문에 차라리 매년 모든 선수를 FA로 풀어서 연봉 상승을 막자는 의도였다.), 볼넷을 볼 셋으로 바꾸자는 주장을 한 인물이다.[7] 메이저리그 최초의 여성 구단주로 팀의 중흥기를 만든 주인공이지만, 인종 차별주의적인 발언으로 물의를 빚은 인물이기도 하다. 별명은 여자 스타인브레너.[8] 첫 번째도 아니고 두 번째 만에 입성한 것을 이렇게까지 강조하는 이유는 2010년까지 마무리 투수 중에 첫 턴 입성자는 데니스 에커슬리 한 명 뿐이었고, 2번은 커녕 5수안에 입성한 선수도 핑거스와 데니스 에커슬리 2명뿐이었으며, 그 유명한 트레버 호프먼 조차 3번째 도전에서야 입성했기 때문이다. 에커슬리는 커리어 초반 11년을 우수한 선발투수로 보내면서 그 기간에만 151승을 거두고 커리어 중반부부터 구원 투수로 전향한 케이스니 조금 결이 다르다 치더라도, 호프먼의 성적보다 핑거스가 성적이 더 좋다고는 할 수 없지만 반대로 말하면 호프먼의 성적에 완전 밀리지는 않는다는 것. 다만 마리아노 리베라에 비해선 핑거스가 시대보정을 감안해도 한참 밀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