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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D2DEFF><colcolor=#000> 앙주 공작 루이 1세 Louis Ier d'Anjou | |
출생 | 1339년 7월 23일 |
프랑스 왕국 뱅센 뱅센 성 | |
사망 | 1384년 9월 20일 (향년 45세) |
나폴리 왕국 비셸리에 | |
재위 | 앙주 공국의 공작 |
1360년 ~ 1384년 | |
배우자 | 블루아의 마리 (1360년 결혼) |
자녀 | 루이 2세, 샤를 |
아버지 | 장 2세 |
어머니 | 보헤미나의 보나 |
형제 | 샤를 5세, 장, 필리프 2세, 잔, 마리, 이자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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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프랑스 왕국 발루아 가문의 첫 분가인 발루아 앙주 가문의 시조이자 앙주 공작. 프랑스 국왕 장 2세의 차남으로, 백년전쟁 시기에 형 샤를 5세를 도와 잉글랜드 왕국에게 빼앗긴 영토를 탈환하는 데 기여했다. 이후 샤를 6세의 섭정 중 한 사람으로서 활동하다가 나폴리 왕국의 왕위를 쟁취하기 위해 카를로 3세와 대결했으나 끝내 목적을 이루지 못했다.2. 생애
1339년 7월 23일 프랑스 왕국 벵센 성에서 노르망디 공작이자 왕위 후계자 장 왕자와 보헤미아 국왕 얀 루쳄부르스키의 딸인 보나의 차남으로 출생했다. 그는 어린 시절 형제 및 비슷한 나이의 귀족 아이들과 함께 고급 교육을 받았다. 특히 당대의 저명한 학자였던 실베스트르 드 라 세르벨로부터 라틴어와 문법을 잘 교육받아 라틴어에 통달했다.어린 시절 궁정에서 자라면서 형제자매들과 함께 할아버지 필리프 6세와 할머니 나바라의 블랑슈의 사랑을 듬뿍 받았다. 그러나 정작 장 2세는 자식들에게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 그가 아들들에게 보낸 서신은 단 하나도 전해지지 않으며, 푸아티에 전투 후 잉글랜드로 끌려갔을 때에도 사냥개와 매 사냥에 관한 컬렉션을 편집하는 데 관심을 보일 뿐 아들들에게 안부를 전할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다. 단지 막내아들 필리프만이 장 2세와 함께 런던에 억류되었고, 아버지로부터 매 사냥에 대한 열정을 이어받았다. 그 대신, 선량한 성격이었던 어머니 보나가 자식들에게 사랑을 베풀었다. 시인 기욤 드 마쇼에 따르면, 그녀는 자녀 양육이 자신의 삶의 소명이라고 여기고 모든 시간과 에너지를 여기에 쏟아부었다고 한다.
1350년 9월 26일 아버지 장이 장 2세로서 대관식을 거행했을 때 참석했고, 형 샤를과 함께 기사 작위를 받았다. 1354년 2월 2일, 장 2세는 자신의 친구이자 심복이었던 샤를 드 라 세르다를 살해하고 반기를 들었던 나바라 왕국의 국왕이자 에브뢰 백작 카를로스 2세와 협상한 끝에 망트 조약을 체결했다. 이에 따르면, 카를로스 2세는 보몽-르-로거 군, 브레퇴일 성, 콩체스 성, 퐁-오데메르 성, 체르부르 시, 코탕탱의 폐쇄, 노르망디의 카렌탕, 쿠탕스 및 발로그네 일대를 영지로 수여받고 노르망디 공작의 모든 특권을 직함 없이 누릴 수 있는 대가로, 장 2세에게 용서를 구하기 위해 파리로 가야 했다. 루이 왕자는 카를로스 2세의 안전을 보장하기 위해 에브뢰에 인질로 보내졌고, 카를로스 2세는 1354년 3월 4일 파리로 가서 삼부회 의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왕에게 공개적으로 용서를 구해 사면을 받았다.
그러나 카를로스 2세는 이후에도 장 5세 다르쿠르 등 여러 노르망디 영주들을 회유해 자기 편으로 삼고 장 2세의 정책에 번번이 거슬렀다. 1356년 2월, 장 2세가 르 보드뢰유에서 노르만 귀족들을 소집한 뒤 잉글랜드와의 전쟁 자금을 충당하기 위해 더 많은 세금을 납부하라고 요청하자, 카를로스 2세는 여러 노르망디 영주와 함께 거부했다. 이에 장 2세는 카를로스 2세가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3세와 내통하고 있다고 의심했고, 장남 샤를과도 친분을 다지는 것에 위협을 느꼈다. 결국 1356년 4월 5일, 샤를 왕자의 초대를 받고 루앙에서 열린 연회에 참석한 카를로스 2세 일당을 전격 체포했다. 이때 루이 왕자는 기병 100명과 함께 이에 동참했다.
1356년 9월 푸아티에 전투에 참여했으나 패배가 임박하자 형제 샤를, 장과 함께 전장을 빠져나갔고, 아버지 장 2세와 막내동생 필리프는 잉글랜드군에 생포되었다. 이후 아버지를 대신해 섭정을 맡은 샤를 왕자는 잉글랜드와 협상을 벌였지만, 동원 해제된 용병들이 자기들끼리 무리를 결성해 시골 지역을 약탈하는 상황이 전개되면서 민심이 갈수록 흉흉해졌다. 샤를 도팽은 용병대를 토벌하기 위해 30,000명의 영구 군대를 창설하기로 했고, 이를 위해 삼부회를 다시 소집해 새로운 세금을 부과하려 했다. 그러나 1356년 10월 17일에 개최된 삼부회는 패배를 초래한 장 2세의 측근들을 성토하는 자리로 변질되었다. 에티엔 마르셀을 비롯한 삼부회 인사들은 당시 장 2세에 의해 두에의 아를뢰 요새에 수감된 카를로스 2세의 추종자들과 결탁하고, 샤를에게 통화 가치를 위험한 수준으로 평가절하한 왕실 고문들을 해고하고, 국왕을 돕는 의회를 정기적으로 선출하고 개최하도록 허용하며, 카를로스 2세를 석방하라고 요구했다.
샤를 왕자는 현 상황에서 왕권을 다소 통제하는 건 받아들일만 하다고 여겼지만, 카를로스 2세의 석방은 발루아 왕조를 위험에 빠뜨릴 게 분명했기에 받아들일 수 없다고 여겼다. 하지만 이 제안을 즉시 거부할 수 있을 만큼 강력하지 않았던 그는 아버지의 의향을 물어봐야 한다는 이유를 들며 응답을 미루다가 삼부회를 해산시켰다. 1356년 12월 10일, 샤를 왕자는 삼부회를 거치지 않고도 금고를 채울 수 있는 새로운 통화를 시행하는 칙령을 반포한 뒤 형제 루이에게 파리를 맡기고 메츠로 떠났다. 이에 파리 상인들은 격분했고, 에티엔 마르셀은 소규모 장인과 직공들을 선동해 시위를 일으키게 했다. 시위대는 파리에 남아있던 루이가 있는 궁정을 에워싸고 칙령을 취소하라고 강하게 압박했다. 하지만 루이는 형 샤를에게 결정권이 있으며 자신이 멋대로 처리할 수는 없다며 시간을 끌었다. 그 후 파리로 서둘러 돌아온 샤를은 칙령을 취소했다.
이후 에티엔 마르셀과 그를 추종하는 무리들의 권세가 갈수록 강해져서 왕실을 위협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급기야 1358년 2월 22일, 에티엔 마르셀이 민중을 선동해 폭동을 일으켜 샤를이 있던 팔레 드 라 시테 궁전으로 쳐들어가 왕자를 지키던 장병들을 모조리 죽이고 샤를 앞에서 샹파뉴 원수 장 드 콩플랑과 노르망디 원수 로베르 드 클레르몽을 살해했다. 이때 루이 왕자는 왕실 여인들과 함께 폭도들을 피해 파리 외곽의 모앙브리 요새로 피신했다. 이후 자크리의 난을 일으킨 폭도들이 에티엔 마르셀이 파견한 파리 시민 부대와 함께 모앙브리를 포위했지만, 그해 6월 9일 흑태자 에드워드의 심복인 장 3세 드 그레일리와 푸아 백작 가스통 3세 페부스가 40명의 기사와 함께 모앙브리로 달려가 농민 1,000명을 격파하고 루이 등을 구출했다. 이후 에티엔 마르셀이 피살되고 파리의 반란이 진압되면서 안정을 되찾자, 루이는 파리로 돌아왔다.
1360년 7월 8일, 루이 왕자는 브르타뉴 공작 샤를 드 블루아와 브르타뉴 여공작 잔 드 팡티에브르의 딸인 마리 드 블루아와 결혼했다. 1361년, 아버지 장 2세는 자신이 프랑스로 귀환하고 지난해에 체결된 브레티니 조약의 실행을 보장하기 위해 아들 루이와 장 드 베리, 삼촌 필리프 도를레앙, 루제와 데르발 영주 보나베 4세 드 루제, 사촌 루이 2세 드 부르봉를 런던에 인질로 보내기로 했다. 인질들은 느슨한 제약을 받았고, 어린 왕자들은 잉글랜드 영토 내에서 원하는 대로 이동할 수 있었다. 반면, 왕자들은 다른 인질들과 달리 다른 인질로 교체될 수 없었다. 장 2세는 잉글랜드로 가고 싶지 않아하는 두 아들 루이와 장 드 베리를 달래기 위해 루이를 앙주와 메인 공작에 선임했고, 장 드 베리를 베리 공작에 선임했다.
그러나 루이는 잉글랜드에 그대로 억류될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는 아내가 기다리고 있는 불로뉴의 노트르담 대성당에 순례하는 것을 잉글랜드 왕실로부터 "반드시 런던으로 돌아온다"는 조건하에 허락을 받아낸 뒤, 불로뉴에 도착하자마자 잉글랜드 호위대를 제압한 뒤 아내 마리와 함께 신성 로마 제국과의 국경 지대에 있는 기즈성으로 달아났다. 장 2세는 아들에게 당장 런던으로 돌아가라고 명령했지만, 루이는 이를 무시하고 여차하면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이자 외삼촌인 카를 4세의 궁정에 피신하려 했다. 결국 장 2세는 기사도를 지키기 위해 자신이 루이를 대신해 인질로 가기로 했고, 런던에서 여생을 보내다가 1364년에 사망했다.
장 2세 사후 장남 샤를 왕자가 샤를 5세로서 프랑스 왕위에 올랐다. 직설적인 성격이었던 루이는 당시 아들이 없던 샤를 5세에게 자신이 왕위의 가장 직접적인 상속자임을 상기하면서 도팽에 선임해달라고 요구했다. 샤를 5세는 이에 분개했지만, 자기가 아들을 낳으면 투렌에 맡기겠다는 답신을 보내, 루이를 잠재적인 후계자로 세울 듯한 암시를 내비쳤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럴 생각이 없었던 샤를 5세는 아들 샤를을 낳은 뒤 없던 일로 처리했다. 이후 랑그독 보안관에 선임된 루이는 상비군을 조직하는 샤를 5세의 정책에 앞장섰으며, 자신의 영지에서 날뛰는 자유 용병대를 몰아내는 데 힘을 기울였다.
1367년 교황 우르바노 5세가 아비뇽에서 로마로 사도좌를 이전하겠다고 선언했다. 이때 에드워드 3세의 세번째 아들이자 랭커스터 공작인 곤트의 존이 잉글랜드 국왕 헨리 3세의 왕비였던 엘레오노르 드 프로방스의 후손으로서 프로방스의 영유권을 주장했고, 이를 이루기 위해 군대를 소집했다. 프랑스 왕실은 이를 묵과할 수 없다고 보고, 루이에게 프로방스를 기필코 프랑스의 영역으로 귀속시키라는 지시를 내렸다. 이후 에드워드 3세가 우르바노 5세의 설득에 따라 곤트의 존이 계획을 취소하게 하면서 잉글랜드의 위협은 사그라들었지만, 루이는 이참에 프로방스를 자기의 영역으로 삼기로 작심하고 계획을 밀어붙이기로 했다 루이의 이같은 움직임에 위협을 느낀 우르바노 5세는 나폴리 왕국의 여왕 조반나 1세에게 프로방스에 대한 권리를 보장할 테니 프랑스군의 침략을 저지해달라고 요청했다.
1367년 9월, 루이는 프로방스 원정을 단행해 아를과 타라스콘을 포위 공격했다. 그해 12월에 나헤라 전투에서 생포된 뒤 샤를 5세가 몸값을 지불한 덕분에 석방되었던 베르트랑 뒤 게클랭이 타라스콘 공방전을 치르고 있던 루이와 합류했다. 아를은 곧 함락되었지만, 타라스콘은 프로방스 군대에 의해 19일 만에 구출되었다. 나폴리 궁정 관료 레몽 2세 달굴트가 반격에 나섰지만 세레스테에서 패배했다. 1368년, 우르바노 5세는 아비뇽 인근까지 약탈을 자행하는 앙주 공작과 게클랭에게 분노해 파문을 선언했다. 루이와 게클랭은 교황의 파문을 무시하고 프로방스 공략에 힘을 기울였지만, 프랑스군의 심각한 약탈에 격분한 주민들이 프로방스 전역에서 봉기를 일으키면서 점차 곤란한 처지에 놓였다. 여기에 샤를 5세가 엔리케 2세를 카스티야 연합 왕국의 국왕으로 복위시키기 위한 원정을 단행하고자 게클랭을 소환하면서, 더 이상 공세를 펼 수 없게 되었다. 1370년 1월, 루이는 조반나 1세와 평화 협약을 맺고 1371년 4월 타라스콘에 대한 권리를 포기하는 협약을 맺었다.
이후 루이는 샤를 5세의 재정복 정책에 참여해 기옌에서 잉글랜드군을 모조리 몰아냈다. 1373년 베르트랑 뒤 게클랭과 함께 잉글랜드와 동맹을 맺은 브르타뉴 공국으로 진군해 2달 만에 브르타뉴의 거의 모든 영역을 공략하는 데 일조했으며, 곤트의 존의 슈보시를 감행한 잉글랜드군을 견제하는 역할도 수행했다. 이후 브르타뉴 공국의 치안을 안정시키고 행정을 수행하는 임무를 맡았다. 1377년 게클랭과 함께 가론 강변의 베르주라크, 리부른, 생테밀리옹, 블라예를 탈환했다.
그러나 루이의 통치를 받고 있던 랑그독 주민들은 점점 더 과중해진 세금에 깊은 반감을 품었다. 1378년, 님스 대표 2명이 루이를 찾아가 세금을 더 이상 낼 수 없다고 밝혔다. 루이는 이 사절들을 투옥하는 것으로 대응했지만, 브르타뉴 영주들의 반란을 진압해야 했기 때문에 직접 랑그독에 가지 못했다. 1379년 8월, 랑그독 주민들이 샤를 5세에게 사절을 보내 자신들의 처지를 호소했다. 여기에 10월 21일 루이를 따르는 위원들이 몽펠리에에 도착했다가 주민들의 폭동으로 학살당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이 소식을 접한 루이는 즉각 토벌대를 파견해 몽펠리에와 님스를 장악하고, 주모자들을 처형하고 130,000 프랑의 벌금을 부과했다. 한편 샤를 5세는 이 사건에 큰 충격을 받고, 민심을 수습하기 위해 난로세를 폐지했다. 그 결과 군자금을 모을 재원이 부족해지면서, 프랑스 왕국의 재정복 정책은 둔화되었다.
1380년 샤를 5세가 사망한 뒤 아들 샤를 6세가 프랑스 왕위에 올랐다. 당시 샤를 6세는 12세의 어린 아이였고, 어머니 부르봉의 잔은 샤를 5세보다 2년 전에 죽었다. 이에 루이가 섭정을 맡았고, 왕을 가르치는 일은 형제 필리프가 맡았다. 그러나 루이는 왕실 재무부에서 32,000 프랑을 임의로 빼서 자기 사비로 챙겼다가 형제들과 사촌들의 반감을 샀다. 결국 형제와 사촌들로부터 강한 압력을 받은 루이는 2달 만에 섭정 직에서 물러나야 했고, 샤를 6세는 성인으로 인정받고 1380년 11월 4일에 대관식을 거행했다. 그 후 샤를 6세를 보좌하는 위원회가 설립되었고, 샤를 5세의 형제와 친척들이 이 위원회에 소속되어 나라를 공동으로 이끌었다.
루이는 섭정 직에서 물러나 일개 위원이 된 뒤 자기 의사가 정책에 잘 반영되지 않자 프랑스 국정 운영에 흥미를 잃었다. 그 대신, 그는 나폴리 왕국 쪽으로 관심을 돌렸다. 당시 나폴리 여왕 조반나 1세는 서방교회 대분열을 벌인 로마 교황 우르바노 6세와 아비뇽 교황 클레멘스 7세 중 클레멘스 7세를 따랐다. 이에 로마 교황 우르바노 6세는 조반나 1세를 파문에 처한 뒤, 전임 나폴리 국왕 카를로 2세의 증손자이며 헝가리 국왕 러요시 1세의 궁정에 머물고 있던 카를로를 나폴리 국왕으로 세우겠다고 선언했다.
1380년 여름, 카를로는 헝가리군 9,000명과 이탈리아 용병대와 함께 남부 이탈리아에 상륙했다. 1380년 11월 11일 로마에 도착한 그는 1381년 6월 2일 교황으로부터 시칠리아와 예루살렘 왕으로 추대되었다. 조반나 1세는 이에 대응해 루이를 후계자로 지명하고 원군을 요청했다. 그러나 루이는 즉각 개입하지 않았고, 그 사이에 조반나 1세는 나폴리에서 포위된 끝에 1281년 8월 25일에 카를로에게 항복했다. 그녀는 순순히 퇴위하기로 했지만 비밀리에 추종자들과 함께 음모를 꾸몄다. 카를로는 이 사실을 적발한 뒤 1382년 5월 22일 무로 로카노 인근의 산필레 요새에서 조반나 1세를 살해했다. 이후 카를로는 1382년 5월 12일 '카를로 3세'로서 나폴리 왕위에 올랐다.
1382년 9월, 루이는 아비뇽 교황 클레멘스 7세에 의해 나폴리 국왕으로 즉위한 뒤 라퀼라로 향했다. 그는 밀라노 공작 베르나보 비스콘티, 사보이아 백작 아메데오 6세의 지원을 받았고, 섭정 기간 동안 얻은 돈을 활용해 총 40,000명에 달하는 병력을 일으켰다. 그러나 그의 군대는 카를로 3세에게 고용된 존 호크우드가 지휘하는 적군 14,000명의 유격 전술에 시달렸다. 그러다가 아메데오 6세가 1383년 3월 1일 몰리세에서 병사하자, 사보이아군은 전장을 떠났다.
이에 루이는 샤를 6세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샤를 6세는 쿠시 영주인 앙게랑 7세 드 쿠시를 파견했다. 앙게랑 7세는 아레초를 공략하고 나폴리를 압박했다. 그러나 루이는 1384년 9월 20일 비셸리에에서 전염병에 걸려 사망했고, 앙게랑 7세는 아레초를 피렌체 공화국에 판 뒤 프랑스로 돌아갔다. 이후 그의 아들 루이 2세와 손자 루이 3세, 앙주의 르네가 대를 이어 나폴리 왕위를 얻기 위해 투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