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9-06 16:35:59

리투아니아-라트비아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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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투아니아 라트비아
1. 개요2. 역사적 관계
2.1. 중세2.2. 18세기2.3. 19세기2.4. 20세기2.5. 21세기
3. 교통 교류4. 관련 문서

1. 개요

리투아니아라트비아의 관계에 대한 문서이다. 양국은 오늘날 유이하게 남은 발트족 민족 국가로 언어, 문화, 종교 등에서 공통점이 많은 편이며 푸틴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해 서로 협력하고 있다.

국경을 맞댄 이웃나라 치고는 드물게 사이가 무척 좋은 편인데, 2020년 실시된 여론조사에서는 리투아니아인 중 93%가 이웃나라 라트비아에 대해 우호적이라고 응답했다.# 이는 양국의 민족주의가 자신들이 세계적으로 희소한 그리고 고대 인도유럽어족의 특징을 상당부분 보전한 발트어파 민족주의에 기반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2. 역사적 관계

2.1. 중세

리투아니아 지역과 라트비아 지역은 고대부터 발트어족들이 거주하던 지역이다. 중세까지 이들은 고립된 늪지대를 중심으로 기독교 개종을 거부하고 발트 신화를 신봉하고 있었다. 튜튼 기사단프루스족을 정복하고 리투아니아 서부로 밀고 들어옴과 동시에 리보니아 검의 형제기사단이 라트비아 지역을 침략하였다. 리투아니아와 라트비아의 여러 부족들은 독일 십자군들을 상대로 단결하여 여러차례 진퇴를 거듭했다. 1236년에는 사모기티아인들과 세미갈리아인들이 사울레 전투에서 리보니아 기사단 마스터와 기사 48명을 포함 3,000여명을 전사시키는 승전을 거두었으며, 1260년에는 쿠로니아인[1]들과 사모기티아인들이 두르베 전투에서 검의 형제기사단 그랜드 마스터를 전사하게 만들었다. 1270년에는 세미갈리아인들과 리투아니아인들의 연합에 맞선 카루제 전투에서 검의 형제기사단 마스터가 또 한 번 더 전사했다.

리보니아 검의 형제기사단은 계속해서 많은 단원을 잃고 기사단 마스터가 계속 전투중에 죽어나가자, 혼란스러운 분위기를 타개하기 위해서 보다 강한 튜튼기사단의 산하로 들어갔다. 여러차례 패전에도 불구하고 리가를 중심으로 한자동맹의 주요 참여 도시로 참가해 발트무역으로 많은 돈을 벌었던 리보니아 기사단은 세미갈리아인들이 기근에 시달리는 틈을 타서 1290년 세미갈리아 정복을 완료하였다. 리투아니아의 연대기에 따르면 약 10만여 명의 난민들이 독일인들의 농노가 되는 것을 피해 리투아니아로 피난왔다고 한다. 1298년 리투아니아 대공국이 리보니아 기사단으로부터 라트갈리아를 정복하여 검의 형제기사단의 초창기 영토였던 라트갈레 지역은 다시 발트 민족의 땅이 되었다.[2]

독일인들의 영향으로 수많은 발트족들이 천주교로 개종되고, 이후 14세기에는 리투아니아인들이 폴란드 왕국동군연합 과정에서 천주교로 개종하였다. 크레보 조약을 통해 맺어진 폴란드-리투아니아 동군연합은 리투아니아를 위협하던 튜튼 기사단을 격파하고, 이후 리보니아도 점령하여 오늘날의 라트비아 및 에스토니아 지역도 차지하면서 강대국이 되었다. 그러나 중세 초 발트 신화를 공유하던 시절 리투아니아인들과 라트비아 부족들이 자유를 위해 독일인들에 대항해 힘을 합치던 때와 다르게, 15세기 이후에는 리투아니아 대공국이 가톨릭으로 개종한 영향으로 독일인 지주들이 프루스인, 리투아니아 마이너 주민 및 라트비아인 위에서 계속 군림하는 상황이 그대로 이어진다.

다만 라트비아 동부 라트갈레 지역의 라트갈레인들은 리투아니아인들과 문화적 유사성이 더 많았고, 다른 라트비아인들이 독일 문화의 영향으로 천주교에서 개신교로 개종하는 동안 라트갈레인들은 리투아니아인들과 마찬가지로 가톨릭을 고수하였다.

2.2. 18세기

대북방전쟁의 결과 러시아 제국이 라트비아 지역을 점령하였다. 러시아 제국은 회유책으로 라트비아 지역의 발트 독일인들은 러시아 제국의 내에서 상당한 수준의 권리를 보장하였고, 라트비아 농노 위에 독일인들이 군림하는 사회 구조가 지속된다. 폴란드-리투아니아는 러시아의 공세로 계속 동부 영토를 상실하기 시작했고, 국력이 점점 쇠락한 18세기말에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을 프로이센 왕국, 합스부르크 제국, 러시아 제국삼분하면서 폴란드 리투아니아는 멸망하고 리투아니아 대부분 지역도 러시아 제국의 영토가 되었다. 이 과정에서 라트비아의 남부 내륙 지역인 라트갈레 지역 역시 러시아 제국으로 귀속되었다.

리투아니아 서부의 발트어족 일파인 프로이센어를 사용하던 프루스인들은 독일 기사단국의 후신 프로이센 공국, 프로이센 왕국[3]의 지배시기를 거치면서 언어와 민족 정체성을 잃고 18세기 독일인들에게 완전 동화되었다.

2.3. 19세기

라트비아 지역은 러시아 본토보다 농노 해방이 일찍 이루어졌는데, 이는 라트비아 내 독일인들의 권한을 회수하고 이들을 견제하려는 목적에서 이루어진 조치였다. 같은 맥락에서 리투아니아, 라트갈레의 농노 해방 역시 폴란드 민족주의를 약화시킬[4] 목적으로 다른 지역에 비해 농노들에게 훨씬 유리한 방향으로 농노 해방이 진행되었다. 리투아니아와 라트비아 농노들에게는 농노 해방의 대가로 부과된 토지보상금이 귀족보다 농노에게 더 유리하게 책정되었다.

리투아니아 대공국 시절 유대인 초빙의 영향으로 유대인 인구가 많았던 리투아니아와 다르게 라트비아의 유대인 인구는 독일계에게 밀려 상대적으로 소수에 불과했다. 리투아니아와 라트비아, 벨라루스의 아슈케나지 유대인들은 리트바크 유대인이라고 불렸다.

당시 상당수의 리투아니아인과 라트비아인들이 유럽 러시아는 물론 중앙아시아시베리아로 자발적 혹은 강제로 이주정착하였다. 러시아 제국에서는 리투아니아 민족주의자 상당수를 시베리아로 유배시켰다. 이렇게 시베리아로 강제이주당한 리투아니아인들 중 고국으로 귀환하지 못한 사람들은 그대로 현지에서 러시아인에 동화되었다. 라트비아의 경우 라트비아 민족주의의 주 타깃이 독일인이었기 때문에 러시아 제국의 탄압은 덜 받은 편이었다. 대신 라트비아인 상당수가 러시아의 대도시 상트페테르부르크모스크바로 이주하였고 스톨리핀의 시베리아 이주 장려 정책에 자극받아 일부는 연해주와 중앙아시아, 시베리아 등으로 이주하였다. 이렇게 러시아로 이주한 라트비아인들 역시 정착한 지역에서 러시아인에 그대로 동화된다. 같은 맥락에서 러시아 제국은 19세기 말부터 리투아니아인들 사이에서 미국, 브라질 이주 붐이 불때 '골치아픈 불순분자들이 빠져나간다'고 생각해서 순순히 허락해준 반면, 라트비아인들의 신대륙 이주는 제한하는 편이었다. 이러한 연유에서인지 오늘날 리투아니아계 미국인 인구가 수십만여 명 정도에 달하는 것에 비교해 라트비아계 미국인 인구는 유대계와 독일계를 제외하면 얼마 되지 않았었다고 한다.[5]

2.4. 20세기

러시아 제국이 혁명으로 몰락한 뒤, 소련이 출범하면서 전간기 라트비아와 리투아니아는 잠시 독립국이 되었다.[6] 하지만 제2차 세계 대전 기간에 나치 독일이 라트비아와 리투아니아를 침공해서 점령한다. 나치 독일의 점령하에서 수많은 유대인들이 학살당했다. 제2차 세계 대전중에 소련발트 3국을 점령하면서 라트비아와 리투아니아는 소련의 공화국에 편입되었다.

소련에 편입당한 이후 라트비아와 리투아니아에는 수많은 러시아인들이 이주하였다. 과거 리투아니아 마이너에 해당하던 지역의 독일인들과 리투아니아 개신교 신도들은 2차대전 종결 전후하여 전부 추방당하고 칼리닌그라드라는 새로운 지명을 얻었으며 사실상 공백지가 된 땅에 러시아인들이 들어왔다. 오늘날 칼리닌그라드 인구의 절대다수는 러시아인이다. 라트비아 역시 2차대전을 계기로 상당수 독일인들이 죽거나 추방당하고 감소한 인구를 메꾸기 위해 소련에서 러시아인/벨라루스인/우크라이나인들을 이주시켰다.[7] 소련 해체 직전 1989년 통계 당시 라트비아 전체 인구의 35% 가까이가 동슬라브인 계열이었다.

91년에 소련해체되면서 양국은 독립했다.

2.5. 21세기

양국은 현재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해 협력과 교류가 활발하다. 2004년에는 유럽연합, 북대서양 조약 기구에 가입했다. 양국은 언어, 문화, 종교 등에서 공통점이 많은 편이고 교류와 협력이 많아지고 있다.

2020년 벨라루스 시위 당시 양국은 루카셴카의 독재를 비판하고 시위대를 지지하는 성명을 발표하였다.

2023년 1월 13일, 양국을 잇는 가스관이 폭발하는 사고가 발생했다.#

3. 교통 교류

양국은 공통적으로 철도 교통보다는 고속버스가 발달한 편이다. 양국 모두 인구가 적고 인구 밀도가 낮은 나라이면서 국토 역시 넓지 않기 때문이다. 라트비아의 저가 항공사 에어 발틱은 리투아니아에서도 사실상 국민 항공사 역할을 한다. 에어 발틱은 저가 항공사라 장거리 노선은 거의 없지만 대신 코드쉐어 등을 통해 프랑스 파리,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독일 프랑크푸르트 등 다른 EU 대도시 공항 및 EU 국가들의 플래그 캐리어들과 연결이 이루어지기 때문.

4. 관련 문서



[1] 쿠를란트-젬갈렌 공국의 이름이 쿠로니아와 세미갈리아에서 유래되었다. 세미갈리아를 독일어로 읽으면 젬갈렌[2] 후에 리보니아 연맹이 루터 교회로 개종한 이후에도 라트갈레 주민들은 리투아니아의 영향으로 가톨릭을 믿게 된다.[3] 다만 프로이센 왕국의 전신은 현대 독일브란덴부르크주 일대에 있던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국이다. 프로이센은 칭왕 문제 때문에 이름만 빌려왔고 실제로는 아오안 취급이었다.[4] 아직 리투아니아 귀족 가문 상당수가 폴란드계 정체성을 가진 상황이었다.[5] 오늘날 라트비아계 미국인 정체성을 가진 사람들은 대개 2차대전 이후 소련이 라트비아를 점령하는 과정에서 연합군 진영으로 탈주하여 미국으로 망명한 라트비아인 4만여 명의 후손이다.[6] 이 덕분에 양국은 스탈린대숙청이 한창이던 시기를 비껴갈 수 있었다.[7] 차이점이 있다면 리투아니아의 경우 러시아인 유입이 사실상 방치한 변방 땅인 칼리닌그라드 일대에만 그쳤었다면 라트비아의 경우 러시아인 유입이 주로 수도 리가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는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