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의 페르난도 7세의 왕비에 대한 내용은 마리아 크리스티나(양시칠리아) 문서 참고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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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1598년 5월 6일에서 1621년 7월 13일까지 일시적으로 총독이 아니라 주권자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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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FF6C3><colcolor=#000000> 테셴 여공작 마리아 크리스티나 Maria Christina, Herzogin von Teschen | |
이름 | 마리아 크리스티나 요한나 요제파 안토니아 (Maria Christina Johanna Josepha Antonia) |
출생 | 1742년 5월 13일 |
신성 로마 제국 오스트리아 대공국 빈 | |
사망 | 1798년 6월 24일 (향년 56세) |
신성 로마 제국 오스트리아 대공국 빈 | |
재임 | 테셴 공국의 여공작 |
1766년 4월 8일 ~ 1798년 6월 24일 | |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의 총독 | |
1780년 11월 29일 ~ 1792년 3월 1일 | |
배우자 | 테셴 공작 알베르트 카지미어 (1766년 결혼) |
자녀 | 마리아 크리스티나 테레자 |
아버지 | 프란츠 1세 |
어머니 | 마리아 테레지아 |
형제 | 마리아 엘리자베트, 마리아 안나, 마리아 카롤리나, 요제프 2세, 마리아 엘리자베트, 카를 요제프, 마리아 아말리아, 레오폴트 2세, 마리아 카롤리나, 요한나 가브리엘라, 마리아 요제파, 마리아 카롤리나, 페르디난트, 마리아 안토니아, 막시밀리안 프란츠 |
종교 | 가톨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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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합스부르크 제국의 수장 마리아 테레지아와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프란츠 1세의 4녀. 1녀와 3녀가 일찍 죽었기 때문에 차녀가 되었다.어머니와 생일이 똑같아서 남다른 편애를 받았는데 그걸 믿고 교만하게 굴어 말년에는 남매들의 푸대접을 받고 살았다.
2. 생애
2.1. 어머니의 남다른 편애
크리스티나라고 불렸고 애칭은 미미였다.크리스티나는 아름답고 총명하고 그림 실력도 뛰어났지만 무엇보다 마리아 테레지아와 생일이 똑같아서 같은 날에 축하를 받아 더 귀여움을 받았다. 그러나 이런 유별난 편애를 믿고 형제 자매들을 감시하며 그들의 잘못을 고자질하고 잔소리했기 때문에 남매들의 대부분과 사이가 나빴다.
크리스티나의 이런 무분별한 행동은 마리아 테레지아의 사후 그녀가 남편과 함께 서유럽 각국의 군주, 군주의 배우자가 된 남매들을 찾아갔을 때 오스트리아 여대공(황녀)이 아닌 일개 귀족 대우로 푸대접을 받는 원인이 되었다.
2.2. 올케와의 불륜
한편 오빠 요제프 2세는 파르마 공작 필리포 1세의 딸 파르마의 이사벨라를 신부로 맞았다. 이사벨라는 원래 스페인의 인판타(공주)였으나 아버지 펠리페 왕자가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으로 엑스라샤펠 조약을 통해, 파르마 공작 필리포 1세가 되면서 같이 파르마의 공녀가 되었고 루이 15세의 외손녀이자 친가와 외가 모두 부르봉 왕조 출신이었다.[1] 지적인 데다 미모까지 뛰어난 이사벨라를 요제프 2세는 무척이나 사랑했고 부부 사이도 나쁜 편은 아니었다.그러나 이사벨라는 요제프의 열렬한 애정에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으며 시큰둥해했는데 그 이유는 이사벨라가 레즈비언이었고 시누이인 마리아 크리스티나를 사랑했기 때문이다. 이사벨라와 크리스티나는 이사벨라의 살아생전 내내 연인 관계이자 불륜 관계였다. 이사벨라는 크리스티나에게 보낸 연서에서 그녀를 '나의 가장 소중한 보물(my most precious treasure)'이나 '나의 위로(my consolation)' 같은 깊은 애정이 담긴 호칭으로 부르면서 진정한 연인으로 여기는 걸 가감 없이 드러냈고 정작 남편인 요제프 2세는 '그 대공(the Archduke)' 라는 짧고 무성의한 호칭으로 부르면서 그에게 애정이 전혀 없음을 확실히 보여줬다.
심지어 이사벨라는 자신이 낳은 차녀의 이름도 크리스티나와 똑같이 '마리아 크리스티나'로 지을 정도였다. 처음엔 이사벨라 쪽에서 먼저 크리스티나에게 열렬히 구애하며 더 많이 좋아했지만 크리스티나도 연인이 된 후 이사벨라에 대한 감정이 점차 깊어져 갔다고 한다. 하지만 둘의 관계는 당대에 금기시되는 동성애이자 불륜인[2] 금단의 관계였기 때문에 당연히 세간의 눈을 피해 필사적으로 숨겨야만 했다. 우울증이 깊었던 이사벨라는 시가와 남편 모두를 잘 속였으나 크리스티나에게 보낸 편지에서만은 불안정한 정신 상태를 드러내기도 했다.
이후 이사벨라는 네 번째 임신을 한 상태에서 천연두에 걸려 고열로 인해 딸을 조산했는데 그렇게 해서 낳은 딸은 태어나자마자 죽고 그녀 역시 며칠 뒤에 21세의 나이로 요절했다. 마음 깊이 사랑했던 부인을 잃은 요제프 2세는 당연하게도 매우 애통해하며 재혼을 한사코 거부했는데, 그런 요제프 2세를 보다 못한 크리스티나는 진실을 알려줬는데, 크리스티나는 당사자인 요제프 2세가 받을 충격과 사랑했던 아내에게 들 배신감, 무엇보다 동생인 자신에 대한 배신감이 들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 건지, 크리스티나는 이사벨라가 자신에게 쓴 러브레터를 보여주면서 요제프 2세에게 모든 진실을 알려 줬다. 이 편지를 읽은 후 요제프 2세는 배신감에 치를 떨며 안 그래도 냉랭한 성격이 더 삭막해지는 정서적 문제를 앓게 되었다. 이사벨라는 요제프를 정말 전혀 사랑하지 않았기에 크리스티나는 일기에 '내가 결혼해서 저 따위 대우를 받고 사느니 정원 나무에 목을 매달아 자살하고 만다' 라고 적었을 정도다.
크리스티나를 향한 이사벨라의 열렬한 사랑에 비해 크리스티나의 마음은 잘 알려지지 않은데다 크리스티나는 이사벨라가 사망한 지 3년 만에 연애 결혼을 했지만, 이사벨라가 천연두를 앓을 때 크리스티나는 그녀의 곁을 지켰다고 한다.
게다가 크리스티나는 이사벨라가 남긴 유일한 딸 마리아 테레지아 여대공도 요절하기 전까지 잘 보살펴 준 것을 보면 이사벨라의 마음이 더 크긴 해도 둘은 서로 사랑하는 연인 사이가 맞는 듯 하다.
이사벨라와 크리스티나의 사랑을 소재로 한 한국 소설로 <황제의 완벽한 사랑>이 있다. 참조 사실 이사벨라 사후의 이야기도 크리스티나의 시점으로 길게 이어지므로 크리스티나의 전기에 가깝다.
2.3. 연애 결혼
이사벨라가 사망한 지 3년 후, 크리스티나는 오스트리아의 황녀임에도 당시로서는 드물게 연애 결혼을 했다. 합스부르크 왕조가 정략결혼으로 영토를 넓힌 걸 감안하면 매우 특별한 일이었다.다른 형제들의 배우자와 달리 크리스티나의 남편 알베르트 카지미어는 작센 선제후 겸 폴란드-리투아니아 국왕인 아우구스트 3세의 4남이어서 작센 선제후국의 후계자도 아니었고 수여받은 다른 작위도 없어서 오스트리아의 여대공인 크리스티나의 남편이 되기에는 다소 처지는 조건이었지만 크리스티나는 어머니가 아버지를 잃고 우울해하던 1765~1766년에 슬픔에 잠긴 어머니에게 "연애결혼을 허락하면 평생 어머니 곁에 있을 수 있다" 라고 속삭였다.
결국 그녀는 마리아 테레지아의 자녀들 중 유일하게 연애결혼을 허락받았다. 이것만으로도 큰 행운인데, 거기다 결혼하면서 막대한 지참금과 남편이 테셴 공작으로 임명되는 특권, 락센부르크의 대저택 등을 선물받았다. 락센부르크의 대저택은 외국으로 시집 간 자매들이 평생 그리워하던 가족 나들이용 별궁으로, 마리 앙투아네트는 이를 본떠 자신의 이름을 딴 마을을 베르사유 궁전 안에 건설할 정도로 가족 모두가 눈독 들이던 재산이었다. 평소 여제의 편애로도 부족해 남편을 잃은 어머니의 상실감을 이용해 연애결혼까지 해 버린 크리스티나는 남매들에게서 더욱 미움을 받았다.건강 문제로 결혼하지 않고 수녀가 된 큰언니 마리아 안나도, 정략결혼한 마리아 카롤리나와 마리 앙투아네트도 어머니의 편애를 믿고 교만하게 행동하는 크리스티나를 모두 미워했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특히나 다른 형제들 이상으로 파르마 공작부인 마리아 아말리아는 크리스티나처럼 연인이 있었지만 크리스티나만 연애 결혼을 허락하면서 자신은 정략결혼을 시켜버린 처사에 더욱 분노했다. 당시 파르마 공작 페르디난도 1세는 스페인 부르봉 왕조의 일원으로 스페인 국왕 펠리페 5세의 손자였다. 동맹의 역전으로 둘의 결혼이 정해지면서 애인과 헤어져야 했기 때문에 더더욱 분노했다.
결국 마리아 아말리아는 결혼 이후 어머니와 절연했고 '남편에게 순종하라'는 어머니의 가르침을 무시하고 정치에 간섭하며 복수했다. 사실 마리아 테레지아부터가 데릴사위로 들어온 남편에게 겉으로만 순종했고[3] 그런 어머니를 닮은 마리아 카롤리나도 남편을 제치고 권력과 정치를 자기 마음대로 휘둘렀으니 모전여전이다. 아말리아는 평생 어머니와 절연하고 결혼한 후 외도, 사치로 스캔들을 만드는 것뿐만 아니라 오스트리아의 이익과 반대되는 길을 가는 등 물의를 빚는 식으로 복수하다가 오스트리아 입국을 영구적으로 금지당했다.
한편 크리스티나의 남편 알베르트는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의 총독 자리까지 받았다. 알베르트는 본국에서 후계자도 아니었으며 처가에서 여러 작위를 하사받았기 때문에 크리스티나는 결혼 후에도 합스부르크로트링겐의 성(姓)을 유지하였다.
2.4. 쓸쓸한 말년
프레스부르크[4]에 거주하면서 평생 마리아 테레지아의 곁을 지켰으나 빽이었던 어머니의 사후에는 당연히 사이가 틀어진 형제자매들의 냉대와 경멸을 감수해야 했다.큰오빠 요제프 2세는 즉위 전부터 자신에게까지 대놓고 설치는 크리스티나에게 악감정이 굉장히 컸고[5] 막내여동생 마리아 안토니아도 크리스티나를 가리켜 "어머니의 얼굴을 제일 많이 봤다"며 불평했고 크리스티나가 프랑스를 방문했을 때 당연히 언니를 푸대접하며 프티 트리아농을 보여 달라는 요청도 무시했다. 이에 크리스티나도 빈정이 상했는지 프랑스 혁명으로 마리 앙투아네트가 죽을 위기에 처하자 '(프랑스 왕과) 결혼하지 않았으면 좋았을 텐데.'라는 말 한 마디만을 남겼다고 한다.[6] 요제프와 안토니아뿐만 아니라 레오폴트 2세, 밀라노 총독 페르디난트 카를, 쾰른 선제후 막시밀리안 프란츠 등, 당시 살아 있던 대부분의 남매들도 어머니의 총애만 믿고 안하무인으로 굴던 크리스티나를 노골적으로 싫어했다.
마리아 테레지아의 사랑을 받으면서 오스트리아에 편히 있을 수 있었다지만 자식 복은 없었다. 결혼 후 크리스티나는 첫 딸 마리아 크리스티나 테레사를 출산했지만 심각한 난산으로 태어난 딸은 다음 날 바로 사망했다. 이 때 크리스티나는 난산으로 후천적 불임이 되었는지 이후 다시는 임신하지 못했다. 그래서 남동생 레오폴트와 스페인의 마리아 루이사[7]의 아들인 조카 카를 대공을 양자로 들여 재산을 상속해 주었다.
3. 가족관계
3.1. 조상
본인 | 부모 | 조부모 | 증조부모 |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크리스티나 여대공 (Archduchess Maria Christina of Austria) | <colbgcolor=#fff3e4,#331c00> 프란츠 1세 (Francis I) | <colbgcolor=#ffffe4,#323300> 로렌 공작 레오폴드 (Leopold, Duke of Lorraine) | |
로렌 공작 샤를 5세 (Charles V, Duke of Lorraine) | |||
오스트리아의 엘레오노레 (Eleonore of Austria) | |||
오를레앙의 엘리자베트 샤를로트 (Élisabeth Charlotte of Orléans) | |||
오를레앙 공작 필리프 1세 (Philippe I, Duke of Orléans) | |||
팔츠의 엘리자베트 샤를로테 (Elisabeth Charlotte of the Palatinate) | |||
마리아 테레지아 (Maria Theresa) | |||
카를 6세 (Charles VI) | |||
레오폴트 1세 (Leopold I) | |||
노이부르크의 엘레오노레 막달레네 (Eleonore Magdalene of Neuburg) | |||
브라운슈바이크의 엘리자베트 크리스티네 (Elisabeth Christine of Brunswick) | |||
브라운슈바이크볼펜뷔텔 공작 루트비히 루돌프 (Ludwig Rudolf, Duke of Brunswick-Wolfenbüttel) | |||
외팅겐외팅겐의 크리스티네 루이제 (Christine Louise of Oettingen-Oettingen) |
3.2. 자녀
자녀 | 이름 | 출생 | 사망 |
1녀 | 마리아 크리스티나 테레사 공녀 (Princess Maria Christina Theresa) | 1767년 5월 16일 | 1767년 5월 17일 |
[1] 이사벨라의 어머니 루이즈 엘리자베트는 루이 15세의 장녀로 그의 딸들 중 유일하게 결혼했고 친가인 파르마 공국의 부르봉-파르마 가문도 스페인 국왕 펠리페 5세(루이 14세의 손자)의 4남 펠리페 왕자로부터 갈라져나온 부르봉 왕조의 방계였다.[2] 심지어 시누이와 올케 간의 불륜이었기 때문에 만약 들통났다면 합스부르크 왕조와 부르봉 왕조 간의 혼인 동맹마저 뒤흔들 수 있는 중대한 사건이었다.[3] 오스트리아, 보헤미아, 헝가리, 크로아티아에서 국정을 본인이 주도한 것일 뿐 가정에서는 프란츠 1세와는 말을 잘 들었다. 심지어 프란츠 1세는 당대의 다른 남자들처럼 바람도 숱하게 피웠다.[4] 현 슬로바키아 브라티슬라바.[5] 어머니의 편애도 큰 문제였지만 무엇보다 마리아 크리스티나는 요제프의 첫 번째 아내이자 가장 사랑했던 파르마의 이사벨라 공녀와 불륜 관계였다. 사랑하는 아내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재혼까지 거부하던 요제프를 두고 마리아 크리스티나가 오빠의 정신을 차리게 한답시고 이사벨라와의 불륜을 폭로하자 요제프는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안그래도 요제프 2세는 마리아 테레지아에게 사랑받지 못한 반면 크리스티나는 유별나게 편애받았기 때문에 남매간의 사이는 매우 나빴는데 전처와의 불륜까지 겹치자 요제프는 크리스티나를 완전히 혐오하게 되었다.[6] 그러나 크리스티나뿐만 아니라 마리 앙투아네트의 오빠 레오폴트 2세와 조카 프란츠 2세도 프랑스 대혁명 당시 적극적으로 마리 앙투아네트를 구출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그나마 마리 앙투아네트와 가장 친했던 마리아 카롤리나와 마리아 아말리아만 마리 앙투아네트가 국민들에 의해 끌어내려져 '죽음의 집'이라고 불리던 감옥 콩시에르주리에 수감될 때까지 꾸준히 연락했을 뿐이었다. 이에 마리 앙투아네트의 자식들 중 유일하게 살아남은 마리 테레즈 샤를로트는 마리아 카롤리나에게 '어머니는 이모를 제일 사랑하셨다.'고 말하기도 했다.[7] 카를로스 3세와 작센의 마리아 아말리아의 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