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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상고등학교 木商高等學敎 Moksang High School | |||
<nopad> | |||
개교 | <colbgcolor=white,#191919> 1920년 | ||
유형 | 일반계 고등학교 | ||
성별 | 남녀공학 | ||
형태 | 공립 | ||
교장 | 최해룡 | ||
교감 | 차용훈 | ||
교훈 | 밝은마음, 알찬실력, 바른행동 | ||
교화 | 동백꽃 | ||
교목 | 향나무 | ||
학생 수 | 493명 2023.03.01 | ||
교직원 수 | 51명 2023.03.01 | ||
관할 교육청 | 전라남도교육청 | ||
주소 | 전라남도 목포시 소영길 13 | ||
홈페이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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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노벨상 배출학교 Nobel Prize |
2000년 노벨평화상 Nobel Peace Prize |
김대중 (Kim Dae-jung) The Nobel Peace Prize 2000 Born: 3 December 1925, Mokpo, Korea (now South Korea) Died: 18 August 2009 Residence at the time of the award: South Korea [출처] |
목상고등학교(木商高等學校) Moksang High School |
목상고등학교 개교 이후 지금까지 |
D[dday(1920-06-01)] |
목상고등학교는 전라남도 목포시에 위치한 공립 고등학교이다.
2. 연혁
1920년 6월 1일에 목포상업전수학교로 개교하였다. 지금의 목포여고 자리[2]인 대성동에 개교하였다. 1939년에는 1932년에 편입된 용당리, 산정리 부근으로 이전하였는데, 이곳이 현재의 교사이다. 1950년에는 목포상과대학이 분리되어 공존 하였다가. 대성학교, 광주농과대학과 통합되어 전남대학교가 탄생되었다. 어찌보면 전남대의 전신인 셈. 1951년에는 기존의 6년제 중 3년제를 분리하여 목포제일중학교로 분리하였고 1953년에는 목포상업고등학교로 개편되어 2001년 인문계 전까지 유지되었다. 그러다가 김대중 정부 때인 2001년에 인문계로 전환 되었고, 동시에 교명도 전남제일고등학교로 개명하게 되었으나, 2013년에 상업고등학교 시절 약칭인 목상고등학교로 변경하였고 지금에 이른다.
본 학교에서 분리된 형제학교는 목포제일중학교, 전남대학교가 있다.[3]
자매학교로는 중화인민공화국의 상하이 사범 대학 부속 고등학교와 자매결연중이다.
3. 학교 상징
3.1. 교화
동백꽃 (冬栢) Camellia |
3.2. 교가
여기는 학문의 동산 우리들의 보금자리
지식과 덕을 쌓는 곳 힘과 의기를 기르는 곳
유달산 기상을 배워 인격의 키를 높이고
다도해 승리의 바다 충무공 정신 뼈에 새겼네
나라와 겨레의 자랑 보람찬 목상일고의 건아
번영과 부강을 위해 현실의 개척자 되라
누리와 인류의 빛 슬기로운 목상일고의 건아
어둠과 거짓 박차고 새시대의 선구자 되자
지식과 덕을 쌓는 곳 힘과 의기를 기르는 곳
유달산 기상을 배워 인격의 키를 높이고
다도해 승리의 바다 충무공 정신 뼈에 새겼네
나라와 겨레의 자랑 보람찬 목상
번영과 부강을 위해 현실의 개척자 되라
누리와 인류의 빛 슬기로운 목상
어둠과 거짓 박차고 새시대의 선구자 되자
여타 학교에 비해서 교가가 상당히 긴 편이다. 위의 취소선은 목상고등학교의 구 명칭인 전남제일고등학교일 때, 사용한 것으로 제일고를 줄여서 일고라고 칭하였다.
작곡가는 친일인명사전 인명부에 이름이 오른 작곡가 김동진[4]이다.
때문에 최근 목상고는 학부모와 학생들을 상대로 교가 변경에 대한 설문조사를 실시했으며, 설문조사 결과에 따라 교가 변경에 대한 논의를 할 것이라고 한다.
3.3. 교목
향나무 (香木) Chinese Juniper |
4. 학교 시설
목포상업학교운동장은 중앙의 그라운드만 빼고는 마치 초원처럼 한없이 넓은 잔디밭으로 유명하다. 꿈에도 잊을 수 없는 그날
1991년 6월 13일
동아일보, <국교시절 아름다운 추억, 김지하>
1991년 6월 13일
동아일보, <국교시절 아름다운 추억, 김지하>
학교 면적은 총 54,628m^2이다. 학교 건물은 본관, 후관, 학생부 건물, 음악 및 미술실, 도서관, 강당(인동관), 기숙사로 총 7곳으로 구성되어 있다.
4.1. 본관
본관 Main Building |
구. 본관 |
학교의 본관으로, 1964년에 완공된 건물이다, 본래는 1939년에 대성동 교사(현. 목포여자고등학교)에서 용당동 교사로 옮길 때 세운 건물을 뼈대만 남기고 다시 건축한 건물이다. 역사는 가장 오래되었으며, 학교의 중추 시설인 교무실과 교장실 및 행정실 등이 위치하며, 1학년과 2학년 교실 역시 본관에 위치한다. 사진을 기준으로 왼쪽으로 방향을 틀면, 행정실이 위치하며 쭉가면 김대중실이 위치한다. 반대로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면, 교무실과 교장실이 위치하며 쭉가면 컴퓨터실이 위치한다. 교실 배정 순서는 사진을 기준으로 왼쪽에서부터 1반이 시작된다.
4.2. 후관
후관 |
대신송촌과학관 |
학생부 건물 |
학교의 후관은 총 3개의 건물로 구성되어 있다. 후관은 급식실과 3학년 교실로 구성되어 있으며 중국어교실과 과학관으로 연결되어 있다. 과학관은 이름에서 바로 알 수 있듯이, 대신증권에서 지어준 건물이다.[5] 후관과는 다른 건물이지만 붙어있기 때문에 학생들과 교직원들은 대신송촌과학관이라 부르지 않고 그냥, 후관으로 통틀어서 부른다. 학생부 건물은 사진에서 뒤에 있는 건물로, 학생부가 있기 때문에 학생부 건물이라고 부르며 공식 명칭은 딱히 없다. 학생부 건물은 보건실과 기술실, 진로실 등이 위치하고 있다. 후관이 지어진 계기가 특이한데, 1998년에 급식을 시행해야 하는데 급식실이 없다는 말을 들은 그 유명한 목포 세발낙지인 장기철 씨가 지어준 건물이다. 그래서 후관 앞에 장기철이 쓴 비석이 있는 것이다.
4.3. 인동관 (체육관)
인동관 |
4.4. 기타 부속건물
음악/미술실 건물 |
무아도서관 |
5. 학교 특징
5.1. 위치
위치는 목포에서는 상당히 좋은 곳으로, 1980~90년대까지 목포시의 금융가였던 용당동(목포)에 위치하고 있다[6] 터미널과 목포역, 그리고 목포항까지 직통으로 이뤄지는 도로가에 있어 교통도 굉장히 편리하다.
5.2. 교통편
시내버스는 학교 바로 앞 정류장인 목상고등학교 정류장에서 배차간격이 5분~7분인 1번과 삼학도, 북항까지5.2.1. 시내버스
목상고등학교(26010) 학교 앞 서점인 학원사 바로 건너편에 있는 정류장이다. (괄호 안의 장소는 경유지이다.) | |
일반시내버스 | |
간선 | |
지선 | |
일반좌석버스 | |
시내좌석버스 | |
목포우체국(27006) 목상고등학교 정류장의 반대편격인 정류장이다. (괄호 안의 장소는 경유지이다.) | |
일반시내버스 | |
간선 | |
지선 | |
일반좌석버스 | |
시내좌석버스 | |
한일시장(26020) 정문 앞 도로(도로명상 소영길)로 쭉가면 나오는 정류장으로 학교 바로 옆에 있다. (괄호 안의 장소는 경유지이다.) | |
일반시내버스 | |
간선 | |
도심순환 | |
한일시장(26007) 정문 앞 도로(도로명상 소영길)로 쭉가면 나오는 정류장으로 학교 바로 옆에 있다. (괄호 안의 장소는 경유지이다.) | |
일반시내버스 | |
간선 | |
도심순환 | |
5.2.2. 철도
역명 | 노선 | 주요 경유지 | 열차 종류 | 비고 |
동목포역 | 호남선 | 송정리역, 장성역, 익산역, 서대전역, 용산역 방향 | 무궁화호, 통일호 | |
동목포역 | 경전선 | 남광주역, 순천역, 진주역, 마산역, 부산진역 방향 | 통일호 | 1일 1회 운영 |
5.3. 야구부
지금은 해체되어 흔적 조차도 남아 있지 않지만, 일제 강점기 시절과 현대에 들어서 잠깐 동안에 존재하였다.목포상업생래인(木浦商業生來仁)
목포공립상업학교직원생도삼십사명(木浦公立商業學校職員生徒三十四名)은이십일일오전팔시삼십분(二十一日午前八時三十分)에내인시내중요처(來仁市內重要處)를견학(見學)하고오후삼시(午後三時)부터인천남상업(仁川南商業)과야구시합(野球試合)을한후육시반(後六時半)에출발(出發)하야봉천(奉天)으로향(向)하얏다더라(인천(仁川))
조선일보, 1924년 9월 24일
목포공립상업학교직원생도삼십사명(木浦公立商業學校職員生徒三十四名)은이십일일오전팔시삼십분(二十一日午前八時三十分)에내인시내중요처(來仁市內重要處)를견학(見學)하고오후삼시(午後三時)부터인천남상업(仁川南商業)과야구시합(野球試合)을한후육시반(後六時半)에출발(出發)하야봉천(奉天)으로향(向)하얏다더라(인천(仁川))
조선일보, 1924년 9월 24일
대조주최중등야구(大朝主催中等野球) 조선예선대회(朝鮮豫選大會)
입팔일정오(廿八日正午)부터목포상업(木浦商業) 대 (對) 군산중학(群山中學)◆동오후사시(同午後四時)부터부산(釜山) 중학대부산일고(中學對釜山一高)(대구고보구(大邱高普球) 장(場)에서)
조선일보, 1929년 7월 22일
입팔일정오(廿八日正午)부터목포상업(木浦商業) 대 (對) 군산중학(群山中學)◆동오후사시(同午後四時)부터부산(釜山) 중학대부산일고(中學對釜山一高)(대구고보구(大邱高普球) 장(場)에서)
조선일보, 1929년 7월 22일
해당 팀이 해체되면서 가을까치 김정수가 광주진흥고등학교 야구부로 옮겨서 졸업하게 된다.
6. 학교 생활
6.1. 학생증
지위 | 행명 | 관리지점 | 국제브랜드 | 비고 |
정식 | 국민은행 | 하당종합금융센터 | 마에스트로 | 구. 한국주택은행지점 |
국제학생증 | 신한은행 | 광교영업부 | 마스타카드 | 구. 조흥은행지점 |
국제학생증 | 중소기업은행 | 마스타카드 | ||
국제학생증 | 하나은행 | 영업1부 | 마스타카드 | 구 외환은행 지점 |
학생증은 국민은행으로 나오며,[7] 국민카드 답게 마에스트로나 국내전용으로 나온다. 또한 개인적으로 국제학생증을 따로 신청도 가능한데, 신한은행과 외환은행, 중소기업은행에서 각각 신청할 수 있으며, 학교 검색시 전남제일고도 같이 나오기 때문에, 이 과정에서 유의해야 한다.
7. 출신 인물
7.1. 독립운동가
7.2. 정치계
- 김대중 - 대한민국 제15대 대통령 (22회)
- 김문옥 - 전 국회의원
- 김관선
- 김영수(1955)
- 강선명 - 전 국회의원 (1회)
- 강찬원
- 문차복
- 신행용 - 전 국회의원 (1회)
- 홍성하
- 이경재(1932) - 전 국회의원
- 이완식
- 권노갑 - 전 국회의원 (27회)
- 이훈평 - 전 국회의원 (38회)
- 임종기 - 전 국회의원 (22회)
- 손영채 - 전 하남시장
- 박경원(1923) - 전 장관, 전 육군 2군사령관 (20회)
- 이성일 (27회)
- 장상기
- 조동회
- 최기동
- 최동철
7.3. 법조계
- 정태균 - 전 대법관 (23회)
- 김용제 - 전 서울중앙지방검찰청장
7.4. 금융계
- 고범준 - 전 한국은행 부총재 (14회)
- 윤순정 - 전 한일은행장
- 임광행 - 보해양조 창업주
- 한석환 - 전 제주은행장
- 김인묵 - 전 제주은행장
- 신용호 - 교보생명 창업주
- 배민홍 - 전 전북은행장 (15회)
- 박상구 - 전 부산상호저축은행 명예회장 (21회)
- 정채봉 - 현 우리은행 부행장
- 양재봉 - 초대 대신금융그룹 회장 (22회)
- 강동숙 - 전 KB선물 사장
- 백보길 - 전 신한BNP파리바자산운용 사장
7.5. 기업인
- 박세정 - 전 대선제분 회장
- 김한선 - 전 아시아자동차 (현. 기아자동차 광주공장) 회장
- 서구 - 현 금호아시아나그룹 상근고문
- 김종규 - 현 삼성출판박물관장
- 이광훈 - 전 롯데칠성음료 대표이사
- 박기범 - 전 크라운제과 대표이사
7.6. 공직계
- 오길영 - 전 주 시드니 대한민국 영사관 영사 (18회)
- 고봉식 - 전 제주도교육감
- 이승택 - 전 제주도지사, 전 고용노동부 장관 (18회)
- 김치영 - 전 전매청 청장, 전 한국조폐공사 사장 (4회)
- 추규호 - 전 주영국 대한민국 특명전권대사, 전 출입국·외국인정책본부장, 현 주 교황청 대한민국 특명전권대사 (48회)
7.7. 학계
7.8. 문화예술계
7.9. 체육계
8. 기타
- 타는 목마름으로 유명한 시인 김지하가 어렸을 적에 자주 놀러왔다고 한다. 김지하가 다닌 학교는 목포산정초등학교인데, 실제로 목상고와 지금도 가깝다.목포상업학교운동장은 중앙의 그라운드만 빼고는 마치 초원처럼 한없이 넓은 잔디밭으로 유명하다. 꿈에도 잊을 수 없는 그날1991년 6월 13일, 동아일보 <국교시절 아름다운 추억, 김지하>
- 전라남도교육청에서 학교를 나열할때, 가장 먼저 뜨는 학교이기도 하다. 행정안전부 코드 순서상 전남에서는 목포가 가장 앞서고 다음이 학교가 있는 용당동이기 때문.
- 제헌 국회의원선거때 부터 전라남도 목포시 용당동(용당1동) 제1투표소를 지금까지 운영하고 있다. 현재 부지로의 이전도 8.15 광복 이전에 했고 용당동이 목포시 행정안전부 동 코드 상 맨 앞에 위치하기 때문에 목포시 제1투표소나 다름없다. 또한 목포시에서 중앙에 위치하기 때문에 갑작스레 치러진 제19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목포실내체육관 대신에 개표장으로 활용 되었다.
- 목포시 소재 학교들의 운동장이 전반적으로 넓은 편이지만 목포고등학교, 목포홍일고등학교, 목포제일중학교를 능가할 정도로 운동장이 정말 넓은 편이다. 과거 체육대회 때 일화로, 본부석에서 "X학년 X반 경기하러 나오세요" 안내방송을 수 차례 했음에도 운동장 반대편에 있는 학생들까지 들리지가 않아 몰수패를 당했다고 한다.
- 2024년 2월 5일 제101회 졸업식(148명)을 거행했으며 누계 졸업생은 28,133명이다. 같은 해 3월 4일 제104회(남 73명, 여 102명, 총 175명)가 입학했다.
8.1. 초창기
1920년 6월 1일에 목포상업전수학교로 개교하였다. 당시에는 확정된 부지가 없어서, 임시로 다른 곳에서 수업을 하였고, 목포에 중등교육기관이 전무하였기 때문에, 한인과 일본인이 같이 재학하는 학교로 개교하였다. 후에 12월 7일에 대성동 40번지(지금의 목포여고)로 부지가 확정되어 그곳에 건물을 올린 것이 첫 교사이다.당지상업전수학교부지(當地商業專修學校敷地)는이삼후보지(二三候補地)에취(就)하야전의중(詮議中)이던바금회대성동불란서교회하(今囘大成洞佛蘭西敎會下)로결정(決定)하고일천오백평(一千五百坪)을매수(買收)하야본년도(本年度)에건축(建築)할사(事)로되얏다더라(목포(木浦))
조선일보, 1920년 12월 7일
조선일보, 1920년 12월 7일
문화통치 기간에도 불구하고 1922년 1월 23일, 한인 학생 38명이 일본인 교장을 배척할 것을 요구하며 동맹휴학을 결성하는 등. 다른 학교와 다름없이, 역사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곤 했다.
[한성특약통신]
일본제국주의자의 한국통치가 얼마나 잔혹한지는 이미 널리 알려진 대로이다. 교육 방면에서의 압제도 계속 강화되고 있다. 일본은 한인의 민족정신을 말살하기 위해 각급 학교의 역사와 국어(한국어)과목을 폐지하여 한국 학생들의 엄청난 불만을 자아내고 있다. 일본의 교육정책에 불만인 한국 학생들은 일본인 교사 배척 등 여러 명분으로 수시로 동맹휴학을 단행하여 자신들의 주장을 표출하고 있다.
제1조 한 · 일학생의 공학제를 철폐하라.
이유:(一)한국어 문제. (二)한국역사 문제. (三)한국 학생과 일본 학생의 차별철폐 문제. (四)한인 학생의 입학률 문제. (五)한인졸업생의 취업률 문제.
제2조 학교 당국의 부정과 관련한 문제.
(一)신입생선발과 관련하여 농간을 부리지 말라. (二)공금횡령사건의 진상을 밝혀라.
제3조 서신과 서적의 무조건 압수 혹은 검열과 심문을 중지하라.
제4조 교내 언론의 자유를 보장하라.
제5조 결원된 교원을 신속하게 보충하라.
제6조 교무회의에 학생대표가 참석할 수 있도록 허용하라.
제7조 무자격교사를 해임하라.
목포상업전수학교 생도 일동.
광저우민국신문 보도
일본제국주의자의 한국통치가 얼마나 잔혹한지는 이미 널리 알려진 대로이다. 교육 방면에서의 압제도 계속 강화되고 있다. 일본은 한인의 민족정신을 말살하기 위해 각급 학교의 역사와 국어(한국어)과목을 폐지하여 한국 학생들의 엄청난 불만을 자아내고 있다. 일본의 교육정책에 불만인 한국 학생들은 일본인 교사 배척 등 여러 명분으로 수시로 동맹휴학을 단행하여 자신들의 주장을 표출하고 있다.
제1조 한 · 일학생의 공학제를 철폐하라.
이유:(一)한국어 문제. (二)한국역사 문제. (三)한국 학생과 일본 학생의 차별철폐 문제. (四)한인 학생의 입학률 문제. (五)한인졸업생의 취업률 문제.
제2조 학교 당국의 부정과 관련한 문제.
(一)신입생선발과 관련하여 농간을 부리지 말라. (二)공금횡령사건의 진상을 밝혀라.
제3조 서신과 서적의 무조건 압수 혹은 검열과 심문을 중지하라.
제4조 교내 언론의 자유를 보장하라.
제5조 결원된 교원을 신속하게 보충하라.
제6조 교무회의에 학생대표가 참석할 수 있도록 허용하라.
제7조 무자격교사를 해임하라.
목포상업전수학교 생도 일동.
광저우민국신문 보도
학교 주뇌(主腦)된 현 교장의 아등(我等) 조선인 생도에 대한 무진(無盡)의 압박주의 및 치욕적인 행위의 까닭에 오조선인(吾朝鮮人) 생도는 견인불발(堅忍不拔)의 정신으로 금일까지 만탄(萬歎)을 배(排)하고 목적을 달(達)하라는 오등(吾等)의 각오와 실행도 춘일(春日)의 영자(影子) 같이 소(消)하였다. 특히 수일 전에 본심을 발휘한 교장의 언어를 들은 오등(五等)은 인(因)하야 오등(五等)의 목적 및 발전에 심대한 영향이 유함을 사(思)함에 묵과키 난(難)하므로 단결하여 그 구조의 방법을 고찰함이니 즉 차(卽此)와 여(如)한 교장의 교훈을 불수(不受)하기로 결(決)함이라 차(此)에 교장의 아등(我等)에 대하여 특히 자극을 여(與)한 언어는 좌(左)와 여(如)함.
1. 대정 10년 3월 25일 수업증서 수여식일 주반(晝飯)을 지참치 아니한 생도에게 대하여“망국민(亡國民)은 할 수 없다”
2. 월일 미상 목포정명여학교[14] 생도 만세 소요의 당일 선인학생(鮮人學生)을 소집하고 그 소요를 지(知)하였느냐고 문(問)함에 부지(不知)라는 생도의 답변에 대하여 “허언(虛言)을 함은 조선인의 민족성이라”
- 대정 11년 1월 20일, 목포상업전수학교 생도 이순영 -
이 말을 쉽게 해석하면 일본인 교장이 평소에 조선인 학생을 홀대하고 무시하는 등. 교육자로서, 알맞지 않은 행동을 하였고 "망국민은 할 수 없다."라는 말을 하는 등. 조선인 학생을 대놓고 무시하였다. 또한 목포정명여학교 만세 운동을 아냐는 교장에 물음에 알지 못한다는 학생의 말에 허언은 조선인의 특징이라며, 폭언을 하는 등의 행동을 더이상 참을 수 없다며, 동맹휴학을 결성한 것이다. 이것은 당시 휘문학교의 동맹휴학과 관련이 있다.1. 대정 10년 3월 25일 수업증서 수여식일 주반(晝飯)을 지참치 아니한 생도에게 대하여“망국민(亡國民)은 할 수 없다”
2. 월일 미상 목포정명여학교[14] 생도 만세 소요의 당일 선인학생(鮮人學生)을 소집하고 그 소요를 지(知)하였느냐고 문(問)함에 부지(不知)라는 생도의 답변에 대하여 “허언(虛言)을 함은 조선인의 민족성이라”
- 대정 11년 1월 20일, 목포상업전수학교 생도 이순영 -
또한, 1920년대 학생조직이었던 목포학우회와 목포유학생회를 당시 조선인 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조직하여 활동하였고, 학생운동을 주도하였다. 이는 후에 탄탄한 동문회 조직의 기반이 된다.
하나! 목포학우회 결성!
- 1925년 12월 16일 자 중외일보
- 1925년 12월 16일 자 중외일보
8.2. 성장기와 혼란기
목포학생만세운동 참여 학교 | ||
목포공립상업학교 (現 목상고등학교) | 목포정명여학교 (現 목포정명여자중학교) | 목포공립실과고등여학교 (現 목포여자중학교) |
1922년 목포공립상업학교(목포상업학교)로 교명을 변경하고 본격적인 성장기에 돌입하게 되었다. 학제는 총 5년제로 구성되어 있었다. 당시, 목포에는 여러 금융기관들이 위치하고 있었는데, 조선식산은행 목포지점[15], 18은행 목포지점, 동양척식주식회사 목포지점이 있었으며 후에 창립하게 되는 호남은행[16] [17] 또한 목포상업학교 출신들이 많이 채용되었다. 그러다가 평시와 관계없는 학교 상황이 계속 되다가 1929년, 광주학생항일운동이 발생하게 된다.
“우리 2천만 생명을 사랑하고 우리 조국을 사랑하는 광주남녀학생 수십 명은 빈사의 중상을 입고 200여 명은 불법검거로 철창에서 신음하고 있다. 그들은 정의를 위해 시위했던 것이다……”
광주학생만세! (光州學生萬世)!
- 생도들이 뿌린 격문 - (출처: 1929년 12월 6일 자 동아일보)
광주학생만세! (光州學生萬世)!
- 생도들이 뿌린 격문 - (출처: 1929년 12월 6일 자 동아일보)
싸워라, 싸우자.
전 피압박 민족 제군! 우리들은 사회적 민족적 착취와 압박을 받았다.
보라, 압제자의 비인간적 만행과 폭압 전제 정치를! 광주학생항쟁에서 경찰 당국이 취한 처치를! 흉기를 가지고 도전해 온 자들은 중학생(일본인)이 아니었던가. 빈사의 중상을 입고 철창에서 신음하는 고보생! 그들은 정의를 위하여 가두에서 시위하였다.
우리들은 광주형제의 석방을 요구하며, 참고 참아 오던 피와 눈물로써 시위를 전개하자.
- 생도들이 뿌린 격문 (2) (출처: 1929년 12월 6일 자 동아일보)
전 피압박 민족 제군! 우리들은 사회적 민족적 착취와 압박을 받았다.
보라, 압제자의 비인간적 만행과 폭압 전제 정치를! 광주학생항쟁에서 경찰 당국이 취한 처치를! 흉기를 가지고 도전해 온 자들은 중학생(일본인)이 아니었던가. 빈사의 중상을 입고 철창에서 신음하는 고보생! 그들은 정의를 위하여 가두에서 시위하였다.
우리들은 광주형제의 석방을 요구하며, 참고 참아 오던 피와 눈물로써 시위를 전개하자.
- 생도들이 뿌린 격문 (2) (출처: 1929년 12월 6일 자 동아일보)
하나! 악법 폐지
하나! 피압박 민족은 가두에서 시위하라.
하나! 중국혁명 지지
하나! 제국주의 반대
하나! 식민지 해방 만세 (기외, 2항 있음)
2천만 전 피압박 민중 제군.
2천만의 생존을 사랑하고, 우리들의 조국을 사랑하는 광주 청년 남녀 학생은 독인 같은 일제의 탄압에 부딪쳤다. 그들은 옥내에서, 병상에서 신음하고 있다. 이런 슬픔은 >>영원히 피압박자의 흉중에서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보라, 정의를 위하여 가두에서 시위한 광주 고보생들은 자유를 불법으로 약탈당한 한 개의 동물이 되고 말았다.
기억하자, 우리들은 광주형제들을 그들의 손으로부터 탈취하자. 동시에 피와 눈물의 시위를 하는 것만이 우리들의 역사적 임무이다.
하나! 치안유지법 즉시 철폐
하나! 집회, 결사, 언론의 자유를 전취하라.
하나! 피압박 민중해방만세(기외, 7항 있음).
- 생도들이 뿌린 격문 (3) (출처: 1929년 12월 6일 자 동아일보)
하나! 피압박 민족은 가두에서 시위하라.
하나! 중국혁명 지지
하나! 제국주의 반대
하나! 식민지 해방 만세 (기외, 2항 있음)
2천만 전 피압박 민중 제군.
2천만의 생존을 사랑하고, 우리들의 조국을 사랑하는 광주 청년 남녀 학생은 독인 같은 일제의 탄압에 부딪쳤다. 그들은 옥내에서, 병상에서 신음하고 있다. 이런 슬픔은 >>영원히 피압박자의 흉중에서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보라, 정의를 위하여 가두에서 시위한 광주 고보생들은 자유를 불법으로 약탈당한 한 개의 동물이 되고 말았다.
기억하자, 우리들은 광주형제들을 그들의 손으로부터 탈취하자. 동시에 피와 눈물의 시위를 하는 것만이 우리들의 역사적 임무이다.
하나! 치안유지법 즉시 철폐
하나! 집회, 결사, 언론의 자유를 전취하라.
하나! 피압박 민중해방만세(기외, 7항 있음).
- 생도들이 뿌린 격문 (3) (출처: 1929년 12월 6일 자 동아일보)
당시, 광주학생항일운동이 발생하게 된 계기가 목포와 전혀 상관 없던 것이 아니었다. 발생지였던 광주와 나주는 당시 목포의 영향력 하에 있던 도시로, 당시 목포의 한인 학생이 있었던 교육기관인 목포공립상업학교도 참가하지 않을 수 없었고, 이는 목포시내에서의 시위로 발생하였다. 학생 시위대는 학교측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학교내의 전화선과 전신을 모두 절단하고 외부와의 연락을 전부 차단한다. 이에 11월 19일 오후 1시경에 시위대를 구성하여, 양동(현재의 대성동 일부)과 무안통(무안동)을 걸쳐서 목포역전까지 진출하였고 이 중간에 목포정명여학교(현. 목포정명여자중학교)와 목포공립실과고등여학교(현.목포여자중학교)학생들이 합류하면서 시위대는 대규모로 변하였다.
이를 두고 보고만 있지 않던 목포경찰서는 100명의 경찰을 투입, 70명의 학생을 구속시켰다. 주도자로 이광우와 박종식[국회의원]의 등이 경찰에 의해 지목되어, 광주지원에서 징역을 선고받았다.
물론, 그 전에도 독립을 향한 염원을 비추인 사건은 있었다. 1926년에 목포제유노동자들이 총파업하면서 몇몇 학생들이 파업시위에 동참한 것을 시작으로 1922년에 학생들이 휘문학교와 연계하여 결성했던 학생조직을 재건했던 것이다. 이 학생조직은 꽤나 탄탄해서, 1930년대 후반에 목포상업학교독서회(木浦商業學校讀書會)가 결성되어 기존의 선인(鮮人)학생회의 계보를 이었으며, 이에 목포부와 조선총독부에서 강제 해산을 하기 위해 강구하기 시작했고, 당시에 목포에서 발생했던 비밀결사 전위동맹사건으로 교장이었던 오카타 요시타카는 무력으로 해체를 감행하였다.
그리고 이 해산 사건은 나비 효과를 불러일으켜서, 그 다음해에 목포상업학교에서 치러진 시험에서 조선인 학생들은 모두 백지를 내자는 행동을 하기로 결심하였고, 이 행동은 며칠이 지나고 휘문고보에서 발생한 백지시위의 동기가 된다.
韓典勳 신문조서(제二회)
피의자 韓 典 勳
위 사람에 대한 보안법 위반사건에 대하여 소화 五년 二월 二一일 京城지방법원 검사국에서
신문자 조선총독부 검사 森浦藤郞
서기 조선총독부 재판소 서기 鈴木直夫
열석하여 검사는 전회에 이어서 피의자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신문하다.
문 韓典勳인가.
답 그렇다.
...(중략)
문 교육의 정도는 어떤가.
답 휘문고등보통학교 五학년인데, 금년 一월 一二일 퇴학했다.
문 조선학생과학연구회, 기타의 단체에 가입해 있었는가.
답 관계가 없다.
문 금년 一월 一二일 밤에 張洪琰과 백지동맹의 상의를 했다는데 그런가.
답 그 날 밤에 勸農洞의 徽文학교 四학년생의 집에서 張洪琰, 李錫天, 金炳欽, 柳文熙 등 一〇명쯤이 모여서 張洪琰은 一二일에 시험이 시작되는데 三학년과 四학년은 백지동맹을 하기로 되어 있으므로 백지동맹을 하자고 하니 그것에 찬성하고 一三일부터 백지의 답안을 내기로 정했다.
문 張洪琰은 왜 백지동맹을 계획했는가.
답 시험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문 기타 목포에서도 백지동맹을 하고 있으니 학교에 반항하기 위하여 백지동맹을 하자고 한 것이 아닌가.
답 光州의 학생 및 木浦상업학교에서도 백지동맹을 했으니 京城에서도 하자고 했었다.
... (후략) ...
진술자 韓 典 勳
위 조서를 진술자에게 읽어 주게 하였더니 틀림없다고 진술하고 자서 무인하다.
작성일 소화 五년 二월 二一일
신문자 경성지방법원 검사국
조선총독부 검사 森浦藤郞
서기 조선총독부 재판소 서기 鈴木直夫
피의자 韓 典 勳
위 사람에 대한 보안법 위반사건에 대하여 소화 五년 二월 二一일 京城지방법원 검사국에서
신문자 조선총독부 검사 森浦藤郞
서기 조선총독부 재판소 서기 鈴木直夫
열석하여 검사는 전회에 이어서 피의자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신문하다.
문 韓典勳인가.
답 그렇다.
...(중략)
문 교육의 정도는 어떤가.
답 휘문고등보통학교 五학년인데, 금년 一월 一二일 퇴학했다.
문 조선학생과학연구회, 기타의 단체에 가입해 있었는가.
답 관계가 없다.
문 금년 一월 一二일 밤에 張洪琰과 백지동맹의 상의를 했다는데 그런가.
답 그 날 밤에 勸農洞의 徽文학교 四학년생의 집에서 張洪琰, 李錫天, 金炳欽, 柳文熙 등 一〇명쯤이 모여서 張洪琰은 一二일에 시험이 시작되는데 三학년과 四학년은 백지동맹을 하기로 되어 있으므로 백지동맹을 하자고 하니 그것에 찬성하고 一三일부터 백지의 답안을 내기로 정했다.
문 張洪琰은 왜 백지동맹을 계획했는가.
답 시험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문 기타 목포에서도 백지동맹을 하고 있으니 학교에 반항하기 위하여 백지동맹을 하자고 한 것이 아닌가.
답 光州의 학생 및 木浦상업학교에서도 백지동맹을 했으니 京城에서도 하자고 했었다.
... (후략) ...
진술자 韓 典 勳
위 조서를 진술자에게 읽어 주게 하였더니 틀림없다고 진술하고 자서 무인하다.
작성일 소화 五년 二월 二一일
신문자 경성지방법원 검사국
조선총독부 검사 森浦藤郞
서기 조선총독부 재판소 서기 鈴木直夫
또한, 이 시기인 1939년에는 현재 부지인 용당동 교사로 이전했는데, 이때 부터 지금까지 용당동에 자리잡고 있다. 이때 건설 비용은 총 18,000여원이었다.
목포상교공사착수(木浦商校工事着手)
【목포(木浦)】목포상업학교의 이전신축문제는 기지매수수속급 설게등으로 인하야 아직까지 밀려나오든바 이지음 모든준비가완성되엿슴으로 지난칠일 도청에서 공사입할(입찰(入札))을 식켯스나예정가격에 달하지못하얏슴으로목포부에서수의로 청부를 시켯다는데 완성기는 한사개월후이라고하며공사비는 일만팔천여원이라한다
조선일보, 1937년 5월 15일
【목포(木浦)】목포상업학교의 이전신축문제는 기지매수수속급 설게등으로 인하야 아직까지 밀려나오든바 이지음 모든준비가완성되엿슴으로 지난칠일 도청에서 공사입할(입찰(入札))을 식켯스나예정가격에 달하지못하얏슴으로목포부에서수의로 청부를 시켯다는데 완성기는 한사개월후이라고하며공사비는 일만팔천여원이라한다
조선일보, 1937년 5월 15일
8.3. 전성기
1944년에 당시 송정공립학교와의 통합하여 목포공립학교로 재출범하였다. 그 후 1년 뒤에, 1945년에 목포공업중학교로 다시 구. 송정공립학교 계열이 분리되었다. [19] [20]
1946년에 미군정기 군정단 군정중대 1946년령 학무국 문서에 의하여 목포공립상업중학교로 개편되었다. 그러다가 1953년에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교육 정책에 의하여 목포상업고등학교로 확대 출범 되었고, 그 전 사이인 1949년에 3년제를 분리하여 목포상업고등학교 병설중학교를 개교하였다.[21]
1952년부터 1990년대까지 목포상고는 최고의 전성기를 맞이한다. 그 당시에는 학교만 나오면, 교보생명과 대신증권 등의 금융기관에 당연히 취업한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전성기였고, 상고였던 덕분에 조흥은행, 한국상업은행, 제일은행, 한일은행, 서울은행, 기업은행 등. 많은 은행에 취직되었다.[아직까지는] 아직도 학교 건물 내에 군데군데에 흔적이 남아있는데 대표적으로 거울 밑에 상업은행 등. 많은 흔적들이 남아있다. 또한 지역계에서의 위력도 상당했는데, 이 지역계가 호남지역만에 한한것이 아니라, 제주도에서까지도 목포상고를 찾아 올 정도였다. 밑에 동문 목록에 제주은행, 제주도교육감 등이 적혀있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게 그런 사람들이다. 또한 이 시절까지는 호남선 복선화 이전이라, 학교 바로 뒤에 동목포역이 존재해서 무안군, 함평군, 나주시와 광산은 물론 멀리 해남군, 완도군, 진도, 강진 등 서남부와 장성, 담양의 북부권까지 목포상고로 진학할 정도로 시대의 분위기가 따라줘 명망있는 학교로 성장하여 전성기를 누릴 수 있었다. 1960년, 4.19 혁명이 일어났을 때, 목포역까지 가두 행진을 하는 등. 역사의 한 페이지에도 빠지지 않고 등장 하였다.
8.3.1. 4.19 혁명
4.19 혁명 목포 학생 시위 참여 고등학교 | ||
목포상업고등학교 現.목상고등학교 | 목포고등학교 | 목포여자고등학교 |
4.19 혁명 때의 목포상고 (4月 革命) Revolution of April |
목포발. 때마침 사일구날 희생된 목포출신 김부연(19)군의 유해가
26일 낮 일십이십분 당지에 도착하였는데, 이날 낮 일이시 부터
시 학생 일천여명이 데모를 감행하다가 김 군의 유해를 안고
이승만 물러가라 사일구를 상기한다는 구호와 전우가를 부르면서 시내를 행진하였다
이 때 역 구내 광장등과 골목골목에서는 삼만여 군중이 삽시간에 모여 데모대와 호응하여 만세를 부르고 있어
자뭇 공기가 험악하다 그러나 경찰은 아무런 제지를 않고 있어 아무런 사고는 일어나지 않고 있다.
- 1960년 04월 27일, 동아일보
26일 낮 일십이십분 당지에 도착하였는데, 이날 낮 일이시 부터
시 학생 일천여명이 데모를 감행하다가 김 군의 유해를 안고
이승만 물러가라 사일구를 상기한다는 구호와 전우가를 부르면서 시내를 행진하였다
이 때 역 구내 광장등과 골목골목에서는 삼만여 군중이 삽시간에 모여 데모대와 호응하여 만세를 부르고 있어
자뭇 공기가 험악하다 그러나 경찰은 아무런 제지를 않고 있어 아무런 사고는 일어나지 않고 있다.
- 1960년 04월 27일, 동아일보
8.3.2. 한일협정 반대투쟁
목포 12일 상오 8시 10분쯤 목포고등학교 학생 1천1백여명은 한일 회담을 백지화하라는 플래카드를 들고 데모했다.
데모는 교문을 나서 산정동(山亭洞) 철도건널목과 삼학양조회사 앞 등에서 약 2백명의 정사복 경찰관의 저지선을 뚫고 역전까지 진출 및 해산했다.
경찰은 2백10여명을 연행했다.
목포 상고 생(木浦商高生)들은 성토
한편 이날 상오 10시 30분 목포상업고등학교 3년생 약 2백명도 1시간 동안 한일회담반대 성토대회를 열었다.
조선일보 1965년 5월 13일
데모는 교문을 나서 산정동(山亭洞) 철도건널목과 삼학양조회사 앞 등에서 약 2백명의 정사복 경찰관의 저지선을 뚫고 역전까지 진출 및 해산했다.
경찰은 2백10여명을 연행했다.
목포 상고 생(木浦商高生)들은 성토
한편 이날 상오 10시 30분 목포상업고등학교 3년생 약 2백명도 1시간 동안 한일회담반대 성토대회를 열었다.
조선일보 1965년 5월 13일
15일까지 휴교
목포 8개남자고교 휴교
[木浦] 목포시내 8개 남자 고등학교는 13일부로 15일까지 임시 휴교에 들어갔다.
이 휴교조치는 12일의 목포고등학교 데모와 목포상업고등학교 학생들의 굴욕적인 외교 반대 성토 대회의 강행에 자극이 되어...
교육 당국의 지시로 각 고등학교는 사태의 확대를 미연하기 위한 조치라고 말하고 있다.
그런데 일부 고교는 중간고사까지 중단하고 휴교에 들어간 것이다.
경향신문 1965년 5월 13일
목포 8개남자고교 휴교
[木浦] 목포시내 8개 남자 고등학교는 13일부로 15일까지 임시 휴교에 들어갔다.
이 휴교조치는 12일의 목포고등학교 데모와 목포상업고등학교 학생들의 굴욕적인 외교 반대 성토 대회의 강행에 자극이 되어...
교육 당국의 지시로 각 고등학교는 사태의 확대를 미연하기 위한 조치라고 말하고 있다.
그런데 일부 고교는 중간고사까지 중단하고 휴교에 들어간 것이다.
경향신문 1965년 5월 13일
1965년에 박정희 정부의 한일 회담으로 인한 한일협정 반대투쟁에 목포고등학교와 동시에 데모 및 성토대회를 열어, "굴욕적인 한일회담에 반대한다."라고 성명을 발표했다.
8.4. 쇠퇴기와 전환기
"목상(木商)이라는 이름이 얼마나 전통있고 좋은 이름인데, 어찌하여 이 이름을 버리려 하는가?"
- 2001년, 김대중 대통령(22회 동문)[23]
상업계 고등학교가 쇠퇴할 즈음인 2001년에 교육청으로 부터 인문계 전환을 승인 받고, 전남제일고등학교로 교명을 변경하였다. 하지만 모종의 이유로 명색이 대통령을 배출한 학교지만 목포에서의 인식은 실업계와 동급 내지 그 이하가 되어 버렸고, 특히 일부 사립중학교에서 자교의 성적 중하위권 학생들은 절대로 같은 재단 고등학교를 못 쓰게 하고, 공립고등학교인 목포고나 전남제일고에다가 다 몰아줘 버린 다음에 일부러 미달 혹은 정원에 가까운 인원 정도만 지원하도록 만든 후 타 중학교 상위권 학생들에게도 이러한 점을 어필해서 상위권 학생들을 끌어모으는 식의 '장난질'이 벌어지고 있다는 소문에서의 최대의 피해자로 뽑힐 정도로 인식이 거의 땅바닥이었다. 하지만 이 쇠퇴기도 다행히 오래가지 않았고, 2013년에 과학중점학교로 지정 되면서 전환기를 맞이하였다. 또한 2016학년도 입학생부터 고입선발고사가 폐지 됨에 따라서 완전성적순추첨제[24]으로 변경 됨에 따라서 인문계 계열 학교로 자리 잡아 가고 있다.- 2001년, 김대중 대통령(22회 동문)[23]
8.5. 목포상업전수학원과의 관계?
근대 문헌에 보면, 목포상업전수학원이 있다. 그리고 그것이 현대에 와서 목포상업전수학원이 목상고등학교의 전신이라는 말이 있는데, 결론부터 말하면 전혀 상관 없다. 이는 와전된 것으로, 목포상업전수학원은 목포상공학원의 후신으로 목포문옥조합에서 운영한 일종의 사립 상업계 학원이다. 근대 문헌을 보면, 당시 목포는 광주와 고등보통학교(고보) 유치 경쟁을 했으며, 이에 발판으로 목포상업전수학원을 개설한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후에 고보는 광주로 유치되면서 흐지부지 되었고, 지금의 청년회관 자리에서 존속하다가, 한국 전쟁 전후에 사라진것으로 추정된다. 이 학원에서 유명한 출신 인물을 찾자면, 십중팔구는 한국화가 남농 허건 선생이다. 다시 한번 말하자면 목상고등학교의 전신은 목포상업전수학교 이지, 목포상업전수학원과는 전혀 상관 없다.[출처] https://www.nobelprize.org/prizes/peace/2000/dae-jung/facts/[2] 이곳은 현재까지 4개의 학교 목상고등학교, 목포고등학교, 목포중앙여자중학교, 목포여자고등학교가 있었거나 있다.[3] 목포공업고등학교는 좀 애매한 감이 없지 않은게, 목포공고의 전신인 송정공립학교가 총독부에 의해서 강제로 목포상업학교에 흡수되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목포공업고는 목포공립상업중학교에서 분리된 해를 기준이 아닌 송정공립학교를 기준으로 졸업생 기수를 세고 있다.[4] 만주국 건국을 찬양하는 음악을 작곡하는 등의 할동을 했다.[5] 대신증권 설립자 양재봉씨가 이 학교 동문이기 때문이다.[6] 목포 지도상 중간에 위치한다.[7] 계좌개설시, 하당종합금융센터에서 만들어지며(구. 한국주택은행 지점), 문제가 심각한 한도제한계좌로 나오지 않는다.[8] 전남제일고 시절 재학[9] 한명숙의 노란 샤쓰입은 사나이를 작곡한 대한민국 음악계의 대부이다. 1920년생으로, 2019년 11월 12일에 모교 100주년을 못보고 별세했다.[10] 목포상고 시절 재학[11] 전남제일고 시절 재학[12] 전남제일고 시절 재학[2024년] 한강의 수상으로 유일하지는 않게 되었다.[14] 현재의 목포정명여자중학교[15] 이 지점이 목포부금고를 맡을 정도로 위세가 강력했다. 현재 행복동1가에 위치하고 있었는데 그곳이 구.제일은행 목포지점으로 제일은행이 인수한 지점이다. 역사순으로는 목포에서 가장 오래된 지점으로 이 지점의 후신인 SC제일은행 목포지점은 아직도 하당에서 열렬히 영업중이시다.[16] 후에 동일은행에 강제 합병되어 조흥은행으로 출범한다. 이 은행의 목포지점은 최근까지도 신한은행으로 영업하다가 이전하였다. 상락동1가에 건물이 남아있어 등록문화재 지정 후 신한은행과 목포시에서 관리중이다.[17] 작곡가 손석우가 호남은행에 입행한 케이스이다.[국회의원] 박지원의 아버지이며, 후에 학교에서 명예졸업장을 수여하였다.[19] 이 학교는 후에 목포공업고등학교로 개편되었다.[20] 일설에 의하면 그 과정 중 구. 상업학교 학생들과 송정학교 학생들 사이에서 교사 영입을 위한 갈등이 시작되었고, 이 갈등은 싸움까지 가게 되었다. 그때 구. 상업학교 대표가 다름아닌 권노갑이었다. 그리고 그 싸움을 말리려고 온 사람이 김대중이었고 한다.[21] 이 학교는 후에 1971년 목포제일중학교로 변경된다.[아직까지는] 목포상고 출신 금융인이 꽤 있는 편이다. 주로 우리은행과 기업은행, 제일은행 그리고 단위농협과 수협에 많다.[23] 이 말이 후에 현실이 되었다. 어쨌든 2014년에 목상고등학교로 개명을 하게 되면서 뻘짓+흑역사가 되어 버린 것.[24] 1등이 10명이고 학교가 10개이면 각 1명씩 배정하는 방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