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13 08:02:31

박정희/사상

민족적 민주주의에서 넘어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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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정치관과 사상3. 같이 보기

1. 개요

대한민국 제5-9대 대통령 박정희의 사상적 측면에 대해 다룬 문서이다.

박정희주의 문서와는 엄연히 구분되는데, 박정희주의는 '박정희 시대에 대한 향수를 배경으로 하는 베이비 붐 세대의 박정희 숭배 및 공경 현상'을 일컫는 말이지만, 본 문서에서는 박정희 개인의 사상적 측면에 대해서만 다룬다.

정치적 스펙트럼은 보통 우익(유신 이전)에서 극우(유신 이후)로 분류된다.

2. 정치관과 사상

1961년 5.16 군사정변을 통해 집권한 박정희는 이후 현실정치의 구체적 상황, 예를 들어 대통령 선거 유세나 연두 기자회견 등에서 야당 정치인, 재야 인사 및 학생들을 비난하거나, 제헌절이나 대통령 취임식 등의 연설에서 공식행사의 취지에 맞게 민주주의나 정치에 관한 규범적 언명을 한 적도 많지만, 연설문이나 저작에서 자신의 정치관을 일반적인 명제의 형태로 직접적으로 표현한 적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예외적으로, 1978년 육군사관학교 졸업식에서 행한 다음 연설에서는 박정희 본인의 정치관을 총체적이고 압축적으로 잘 드러내고 있다.
한마디로 정치의 목적과 제도의 참다운 가치는 그 나라의 당면 과제를 효율적으로 해결하고 원대한 국가 목표를 착실히 실현해 나가기 위해 국민의 슬기와 역량을 한데 모아 생산적인 힘을 최대한으로 발휘할 수 있도록 뒷받침하는 데 있다고 나는 믿습니다. 어떤 명분과 이유에서든 (중략) 국민총화와 사회안정을 저해하고 국론의 분열과 국력의 낭비를 조장하는 그러한 형태의 정치 방식은 우리가 당면한 냉엄한 현실이 도저히 그것을 용납하지 않을 것입니다.
1978년 4월 3일 육군사관학교 졸업식 유시(諭示) 中
이 연설에서 박정희는 정치의 목적과 제도의 가치를 국가의 목표에 봉사하는 것으로 제시했다. 즉, 박정희에게 '국가 의식'은 '정치 이전에 요구되는 것'이었다. 국가가 정치에 선행하고 우위에 있다고 여기는 이러한 사고는, 개인의 생명과 자유 및 재산을 보전하기 위해 부차적으로 정치와 국가의 존재 이유를 상정하는 사회계약론을 기반으로 한 서구의 자유주의적 사고와 정면으로 충돌하며, 따라서 다분히 국가주의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국가의 당면 과제는 물론 원대한 국가 목표를 민주적인 합의에 입각해서 설정하는 것이 곧 민주주의의 본령이라 할 수 있는데, 박정희에게 당면 과제와 원대한 국가 목표는 위기를 수반하는 '냉엄한 현실'이 우리에게 선택의 여지없이 부과하는 무언가 '긴급하고 자명한 것’으로 상정되고, 정치는 이러한 과제와 목표를 실현해 나가도록 뒷받침해 주는 수단으로 인식되고 있다. 또 박정희의 수사의 일관된 특징이라면, 꼭 '냉엄한 현실'이나 '위급한 현 상황'과 같이 시국의 불안이나 현실, 북한의 위협과 같은 현실적 차원에서의 위기를 강조한다는 것이 있다. 이는 '위기의 사상'으로 표현되며, 또한 '영원한 긴급상황'이라고도 불린다. 이러한 위기 강조는 대중들에게 민족이나 국가가 처한 위기 앞에서 단결함으로써 이 위기를 극복해야 하고, 더 나아가 개인의 자유 추구와 같은 행위는 사회의 안정을 저해하는 한편 민족의 자유라는 큰 '대의'(大義)를 거스를 우려가 있으므로 용납되어선 안된다는 주장까지 받아들이게 만든다.

물론 목표 실현을 위한 수단으로서의 역할도 정치의 과제라 할 수 있지만, 당면 과제와 원대한 목표의 설정 역시 민주적 정치 본연의 과제이다. 그러나 긴급한 위기에 직면하여 그러한 과제와 목표 설정이 정치의 영역에서 배제될 때, 그 정치는 '행정'의 차원을 강하게 지향하게 되고, 과제와 목표 설정은 민주적인 합의의 대상이 아니라 최고 통치자의 결단과 예지의 산물로 귀결되며, 그 결과 유신정권 시절 박정희의 통치가 보여준 것처럼 정치는 초월적 영도자에 의한 행정적 독재의 모습을 띠게 될 가능성이 높아진다. 실제로 박정희 역시 사석에서 "나는 행정가이지 정치가가 아니야"라며 정치가보다는 행정가를 자처하는 발언을 하곤 했다.

위 발언에 뒤이어 박정희는
총력안보, 국력배양만이 우리가 나라를 지키고 민족의 생존권을 수호하며 평화와 번영을 다져 나가는 유일한 길이요, 그것만이 조국의 평화통일을 앞당기는 첩경이 되는 것입니다.
라고 언명하면서 국정의 목표와 실천 방법을 구체적으로 밝혔다. '국가와 민족의 수호', '평화와 번영' 및 '평화통일' 등 국정 목표를 제시하면서, 오직 자신의 판단과 해석에 입각한 '총력안보'와 '국력배양'만이 그 유일한 실현수단임을 강조한 것이었다.

그러나 역사가 보여준 바와 같이 실행수단으로서의 총력안보와 국력배양은 곧 서구적 민주주의를 배제하는 것이었다. 더 나아가 서구적 자유민주주의를 사대주의라고 공격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총력안보와 국력배양을 추진하면서, 여야의 자유로운 정치적 경쟁을 통해 권력의 전횡을 방지하고자 하는 민주정치, 특히 정당과 의회 및 선거 정치는 고비용과 저효율의 낭비 또는 사치로 치부되었다. 이 점에서 박정희의 정치관이 서구의 자유주의나 민주주의에 정면으로 반하는 것임은 명백하다고 할 수 있다.

2.1. 아시아적 가치

박정희의 이데올로기는 기본적으로 아시아적 가치에 기반을 두었다는 평이 지배적이다. 아시아적 가치란 자유주의, 민주주의 등 현대 서구의 주류 사상과 대비[1]되는 아시아 특유의 정치·사회적 가치와 정신을 일컫는 말로, 주된 특징으로는 공동체주의 또는 집단주의 강조[2], 개발독재와 같은 권위주의 체제 선호, 쾌락주의에 반대하는 도덕주의적 사회보수주의 등이 있다. 이는 서구 학계에서 대한민국, 일본, 중국, 대만,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등 일부 아시아 국가들이 이룬 급속한 경제 발전의 근간으로 주목받기도 했으나, 인권을 경시하고 독재를 옹호한다는 점에서 비판받기도 한다.

2.2. 국가주의[A]

우리의 반만 년 역사는 한마디로 말해서 퇴영과 조잡과 침체의 연쇄사였다. 국가가 나서서 국민성을 개조하는 것만이 강력한 민족국가를 건설하는 길이라고 본다.
박정희의 저서 《국가와 혁명과 나》(1963) 中
박정희는 극단적인 국가주의를 추구했던 일본 제국사관학교에서 교육받고 일본 제국의 군대에서 복무한 영향인지 강한 국가주의 성향을 띠었다.

5.16 직후 박정희는 자신의 신념인 국가주의를 직설적으로 관철하자니 '비민주적'이라는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할 것을 예상하고 이를 '민족적 민주주의'라는 이름으로 포장하였는데[4], 자신의 저서 《우리민족의 나갈 길》(1962)에서 "우리나라의 민주주의는 스스로 터득한 것이 아닌, 외세로부터 받아들인 것이다. 하지만 한국 사람들은 아직 자각과 자율성이 모자르기 때문에, 서구식 민주주의를 도입하는 것은 아직 시기상조라고 본다. 우리는 서구식 민주주의가 아닌 우리 현실에 맞는 민주주의를 실행해야 하는데, 우리 민족의 뿌리 깊은 노예근성을 청산하기 위해서라도 국가가 앞장서서 국민을 계몽시킬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민족적 민족주의' 주장은 해방정국 시기부터 중도우파적 민족주의자들 사이에서도 여러 번 주장되었던 것이기에 지식인 사회나 국민들에게도 잘 먹혀들어갔다.

박정희는 집권기간 자신의 국가주의를 한국 사회에 뿌리내리게 했다. 1968년 1.21 사태 이후 이순신 성웅화 작업을 시작하면서 국민들에게 충성이라는 메시지를 주입하려 했고, 이때 박정희는 유독 이순신의 일사봉공(一死奉公) 정신을 강조했다.[5] 또한 1968년 12월에는 '우리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로 시작하는 국민교육헌장을 박정희의 이름으로 반포했다. 이는 학교 교과과정에 포함되었고, 학생들은 무조건 이를 달달 외워야 했으며 공무원들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박정희의 이러한 국가주의는 젊은 시절 그가 경험한 일본 제국의 군국주의를 고스란히 닮았다는 문제가 있었는데, 그 예시가 상당히 많다. 앞서 언급한 국민교육헌장은 일제강점기 당시 천황의 이름으로 내려진 교육칙어와 유사하며, 1971년부터 시작된 새마을운동은 일제의 농촌진흥운동을 빼닮았다. 또 국기에 대한 맹세[6] 일제의 황국신민서사와 너무도 비슷하며, 학교에서 매주 월요일 아침마다 하는 애국조회는 아예 명칭까지 똑같았다. 국기하강식을 하는 오후 6시가 되면 거리에서 부동자세로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하고, 영화관에서 영화 상영 직전에 관객들이 전원 기립하여 애국가를 제창하는 것 역시 일제의 잔재였다. 일제의 황국신민체조는 국민체조로 이름을 달리하여 부활했으며, 일제의 교련 수업도 1971년부터 다시 부활하여 학교를 병영화하였다.

여기에 박정희의 종신집권을 가능케 한 10월 유신의 유신(維新)도 일본의 메이지 유신쇼와 유신에서 따온 것이다.[7] 이에 대해 박정희는 "메이지 유신을 성공시킨 분들(이토 히로부미, 사이고 다카모리 등)이 나의 멘토다. 또 1930년대 쇼와 유신 때처럼 우리도 군부가 나서서 국가를 개조해야 한다고 봤다. 고로 유신이란, 메이지/쇼와 유신 때처럼 우리도 낡은 제도를 고쳐 새롭게 하자는 의미에서 붙인 말이다"고 밝혔다.

이렇게 박정희의 국가주의적 사고관은 민족적 민주주의(또는 한국식 민주주의)'라는 이름으로 포장되어 20년 가까이 한국을 지배했었고, 오늘날까지도 그 흔적은 좀처럼 사라지지 않고 있다.

2.3. 근대화 보수주의[8][B]

이 논문[A]의 필자는 민주화 이전 대한민국의 보수주의를 '집권 우익 세력이 자유민주주의를 방어하고 국가안보(반공)와 경제발전(또는 근대화)에 필요한 정치적 안정을 유지한다는 명분으로 권력이 집중된 권위주의적 정치질서를 옹호하기 위해 제시한 이념'으로 정의했다. 본 문단에서는 이러한 개념 규정에 기초해 박정희의 보수주의를 국가안보(반공)와 경제발전에 대한 옹호로 나누어 분석하고, 이어서 비서구사회에서 후발적으로 근대화를 이루기 위해 급진적인 개혁을 수행한 과정에서 나타나는 박정희식 보수주의의 특징을 '근대화 보수주의'라는 개념으로 서술하겠다.

근대적 보수주의란 보통 에드먼드 버크에서부터 유래된 것으로 여겨지며, 진보적 보수주의와도 동일시되었다. 원래 전통적인 의미에서의 보수주의란 구한말위정척사파와 같이 근대화의 물결로부터 전통, 문화, 신앙 등의 요소를 지키고자 하는 흐름을 가리켰으나, 사회주의의 확산과 자본주의의 폭발적인 발전, 러시아 혁명 등을 거치며 이러한 노선에 전면적인 수정이 가해지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근대적인 요소, 대표적으로 자유주의의 일부 요소와 민족주의를 수용해 체화시킨 후 사회 안정과 법질서 수호를 내세우며 현대 보수주의로 진화하게 되었다. 근대적 보수주의란 이렇게 전통적 보수주의와는 달리 근대적 요소를 수용하여 당대 기준 상대적으로 진보적인 것으로 여겨진 이념인데, 한국의 경우 해방 정국에서부터 역사적 경험에 따라 전통적 보수주의의 궤멸이라는 시대적 상황과 서양에 한참 뒤쳐진 현실적 상황에서 '서양 따라잡기'의 일환으로 근대적 보수주의를 수용하게 되었다. 대표적으로 이승만이 이러한 근대적 보수주의의 상징과도 같은 인물이며, 한민당의 경우 다소 전통적인 의미에서의 보수주의적 성향이 잔존했으나 근대적 요소를 상당수 받아들인 상황이었다.

그러나 한국에서 근대적 보수주의는 서구와는 다른 방향으로 진행되었는데, 서구의 근대적 보수주의가 고전적 자유주의를 수용해 재산권 보호와 개인, 시장의 자유를 주장한 것과는 달리, 한국에서는 오히려 경제발전을 명분으로 광범위한 개인 및 기업, 시장에 대한 자유 침해를 저질렀고 일부 기업들에게 특혜를 주는 것을 마다하지 않았다. 또 이는 서민들의 경제적 자유와 재산권을 제약하는 결과로까지 나아갔다.

박정희의 근대적 보수주의는 특히나, '점진적인 사회개혁'을 추친하는 현대 서구식 보수주의와 달리 '조국근대화'라는 사명 달성을 위한 급진적이고 과격한 사회 변화를 수반했으며, 이는 전통에 대한 파괴와 무시를 통한 근대화를 주장했다. 이승만 정부가 구정 을 폐지하려다 큰 반발에 부딪힌 것이나 박정희 정부무속 탄압은 이것의 대표적인 예시라 할 수 있다.

그 결과, 박정희의 근대적 보수주의는 역설적이지만 매우 진보주의적인 수사를 띠게 되었다. 박정희는 근대화를 통한 시련의 극복, 역사의 진전과 그 결과로서 고도의 산업화와 풍요로운 복지사회의 실현과 같은 이상을 국민들에게 주입하며 '더 나은 미래'에 대한 확신을 불어넣고, 이러한 진보에 방해되는 요소를 타파해야 한다고 주장함으로써 매우 진보적이고 민족주의적인 주장을 여러 번 반복했다. 한민족의 정신과 절개를 강조한 민족주의적 수사는 다분히 복고적이고 보수적인 것으로서, 박정희의 수사에는 진보적인 수사와 보수적인 수사가 복합적으로 섞여있는 것이다. 박정희는 자신의 과업을 "온갖 전통적인 것, 수구적인 것, 낡은 것이 빠르게 근대화되고 개혁되고 새로워지는 변화의 과정"이라고 주장함으로써 전통을 개혁하여 미래에 도달할 영광스러운 목표를 향한 위대한 발걸음이라는, 전형적인 진보주의자의 수사를 사용해 근대적 보수주의를 정당화했다. 이러한 박정희식 근대적 보수주의의 진보적 성격은 1970년 광복절 축사에서 '민족 통일을 완료하여 도달한 민족중흥과 세계에 당당한 우리 민족'이라는 원대한 비전을 제시함으로써 절정에 달했다.

박정희는 이러한 진보적 수사를 쓰는 대신, 이런 원대한 목표로 나아가기 위한 정치 질서로서의 보수를 주장했다. 그는 정치적 안정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요소라 주장하며 정국의 안정이 경제발전의 대전제이고, 민주화운동, 학생운동 등 그가 보기에 사회적 불안을 야기하는 것은 민족의 발전을 가로막는 행위라 주장했다. 박정희가 학생운동을 비판하며 한 발언은 전형적인 보수주의자의 수사이다.

2.3.1. 안보우선주의와 반공주의

군사혁명위원회는 첫째, 반공을 국시(國是)의 제일의(第一義)로 삼고, 지금까지 형식적이고 구호에만 그친 반공태세를 재정비 강화할 것입니다.
5.16 혁명 공약 中
여순사건 전후의 진상조사에 따르면 박정희남로당의 군책을 맡았었던 것으로 밝혀졌는데, 이후 공식적으로 전향한 뒤에도 박정희에게는 늘 좌익 콤플렉스가 따라다녔다. 때문에 5.16 직후 미국은 박정희를 불신했고 북한은 내심 큰 기대를 했었다.[11] 제5대 대통령 선거에서 상대 후보 윤보선에게 매카시즘 공세를 당하기도 했다. 이렇듯 박정희에게 좌익 콤플렉스는 미국의 신임을 얻고 야당의 공세를 무력화하기 위해 반드시 극복해야 하는, 그야말로 일생의 콤플렉스와도 같았다. 그렇기 때문에 박정희는 반공주의국시로 삼고, 강력한 반공 정책을 실시하며 좌익 사범에 대해서 통상적인 수준 이상으로 강경하게 대처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전의 이승만 정부장면 내각도 반공 성향이 강했으나, 이를 공식적으로 국시로 삼은 것은 박정희 정부가 처음이다.

그러나 박정희 정권의 반공을 단순히 이렇게 '개인적 콤플렉스로 인한 반동'으로 치부하는 것은 심각한 무리가 있다. 박정희가 좌익 콤플렉스가 있었다지만, 대선에서 윤보선이 남로당 경력을 물고 늘어졌을 때 오히려 이승만 정부 시절 공비 토벌을 명분으로 한 조직적인 양민학살 등에 호되게 당한 바 있는 경상도전라도 농촌의 민심에서 역풍이 불어 몰표가 나오면서 결과적으로 박정희 당선에 기여했기 때문이다.

박정희의 반공주의의 기원은 바로 '국가안보'에 대한 일관적 강조이다. 박정희는 국가안보를 국가와 민족 존립의 가장 중요한 명제로 보고 집권 18년간 이를 누차 강조해 왔으며, 대한민국의 당시 안보적 현실에서 이 안보를 위협하는 세력이 자연스레 북한공산주의로 설정되었기에 박정희의 안보주의는 곧 반북, 반공주의를 띠게 되었다. 이러한 안보주의적 성향은 5.16 당시 '백척간두에서 방황하는 조국의 위기'를 근거로 자신의 쿠데타를 정당화한 것에서 극적으로 드러난다. 또 유신 선언 직전 발표한 특별담화에서는 중화인민공화국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 선임미국주한미군 감축 또는 극단적으로는 철수 논의, 북한의 전시동원체제 구축 등 대내외적인 안보 상황을 언급하며 '대한민국의 안전이 중대한 위기에 처해 있다'고 주장하면서 '민주주의가 우리에게 가장 소중한 것이라면 이를 지키기 위해 우리가 향유하는 자유의 일부마저도 희생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즉 박정희에게 안보란 국가와 민족의 가치를 지키기 위해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이었으며, 이를 위협하는 존재로 설정된 공산주의 등은 타도의 대상이 되었고, 더 나아가 공산주의의 위협을 방어하기 위해서는 우선 내부의 분란이 없어야 한다는 논리를 바탕으로 학생운동, 민주화운동 등이 국론분열로 국민적 단결을 약화해 공산주의에게 빈 틈을 보이게 만드는 원인으로 보아 이를 억누르는 것까지 정당화했다. 이것이 바로 서구의 보수주의 및 반공주의와의 중대한 차이라고 할 수 있다.

박정희는 '법과 질서 유지'라는 보수주의의 대명제마저 이런 '안보'의 차원에서 다루었다. 서구 보수주의의 '법과 질서'가 평온하고 안녕한 사회를 만들고 분란을 지양하기 위한 차원이었다면, 박정희의 법과 질서 강조는 권위주의 체제를 유지함으로써 국가의 안보 위기에 대응하기 위한 차원이었다. 따라서 '법과 질서를 흔드는 행위'는 곧 '안보를 무너뜨리는 행위'로 간주되었던 것이다. 여기에 유신 이후로는 더 나아가, 박정희의 시각에서 '퇴폐적인 풍조'로 분류된 것들까지도 안보상 위협이 되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여기에는 물론 장발, 미니스커트 등 서구로부터 들어온 '퇴폐적인' 문화들 대부분이 포함되었고, 만화 등 어린 학생들의 오락거리조차 예외가 아니었다. 국가안보를 위해서라면 퇴폐적인 풍조까지 단속해야 한다는 이 주장은 곧 개인의 자유를 심각하게 침해할 수 있음을 의미했고, 실제로도 그러했다. 박정희는 안보를 위한다는 명목으로 군사문화, 병영문화를 군대 밖으로까지 끌고 나와 사회 전반에 이식했다. 교육과정에 교련을 도입하고, 관료조직에 군사문화를 도입했으며, 직장에 수직적 권위주의를 도입하고, 사회 전 영역을 차례차례 군사화시켰다. 이 시기에는 심지어 경제개발계획을 짜는 것과 같은 비군사적인 행위마저 지극히 군사적으로 진행되었고, '군(軍), 관(官), 민(民)이 혼연일체가 된 유비무환의 정신자세' 구축을 주장하며 이를 '총력안보의 생활화'를 지시했다. 이는 사회를 항시 전시(戰時) 상태로 두겠다는 뜻이었다.

박정희 정권 시기 대표적인 반공 정책으론 반공법 제정, 중앙정보부 조직 등이 있다. 1968년 울진-삼척 무장공비 침투사건의 희생자 이승복 어린이를 반공영웅화하기도 했으며, 여러 반공 영화가 만들어졌다. 다만 이러한 반공 정책은 동백림 사건, 인민혁명당 사건 등 간첩 조작 사건을 통해 공안정국을 조성해 박정희의 권력을 강화하는 데 종종 악용되기도 하였다.

2.3.2. 발전주의

박정희의 사상에서 경제발전은 민족주의와 안보, 경제적 풍요 등의 핵심적 요소로서 매우 중요하다. 박정희는 경제가 우선이라는 점에서 다른 야당 정치인이나 지식인들과 의견이 일치했다. 다만 그 방법에서 의견 차이가 났을 뿐이며, 이는 '수출제일주의'라는 모토로 대변된다. 민주당계 정당의 정치인들이 민족주의적, 보수주의적 입장에서[12] 수입대체산업화와 같은 민족경제론을 부르짖을 때, 박정희는 수출 증진으로 경제를 발전시켜 빈곤을 퇴치하겠다고 주장하며 집권 기간 내내 정권의 경제적 성과를 부단히 선전했다. 신문 1면이나 경제면에는 항상 수출이 얼마나 증대되었는지, 경제 성장률이 얼마였는지와 같은 기사로 도배되었으며, 이는 마치 현대의 프로스포츠 기사처럼 사람들의 눈을 사로잡는 것이었다. 또 박정희는 각종 연설에서 이러한 경제성과와 경제발전의 중요성을 자랑하고 또 강조함으로써 국민들에게 발전의 중요성을 뇌리에 깊게 각인시켰다. 이런 '발전주의'는 박정희 정부의 주요 원동력이자 국민들의 지지를 유지하는 주 원동력이었다. '잘 살아보세'라는 상징적 구호로 대표되는 이러한 경제제일주의와 발전주의는 4.19 혁명 이후 찾아온 '붕괴 후 혼란기'와 미국의 지원 중단으로 국가 경제가 파탄 난 상황에서 민중들은 물론이고 대다수 지식인들에게도 폭넓은 공감대를 형성했고, 결과적으로 군정이 안착할 수 있는 기반을 만들었다.

또 박정희는 이러한 경제발전의 측면에서도 반공을 강조했다. 박정희는 군정 당시 펴낸 책에서 '빈곤은 공산주의가 침투하는 통로'라고 지적하며 경제발전이 곧 공산주의의 침투를 방지하는 차원에서도 필요함을 강조했다. 박정희 정권에게 경제발전과 안보란 상충된다기 보단 상호보완적인 것이었으며, '조국근대화 작업은 승공(勝共)을 위한 또 하나의 중요한 과업'이라 주장했다. 그러나 한편으로 '통일은 자립과 근대화 달성 이후에나 가능하다'며 통일을 후대의 일로 유예하는 역할도 수행했다.

2.4. 반자유주의[B]

박정희가 5.15 사건, 2.26 사건을 언급하며 찬사를 하자, 황용주가 "천황 절대주의자이고 국수주의자 놈들이며 그들이 일본을 망쳤다"고 반박한다. 그러자 박정희가 다음과 같이 답한다.
"일본의 군인이 천황 절대주의자 하는 게 왜 나쁜가. 그리고 국수주의가 어째서 나쁜가. 그런 잠꼬대 같은 소릴 하고 있으니까 글 쓰는 놈들을 믿을 수 없다. 일본이 망한 게 뭐꼬. 지금 잘해 나가고 있지 않나. 역사를 바로 봐야 해. 패전 후 얼마 되지 않아 일본은 일어서지 않았나. 자유주의? 자유주의 갖고 뭐가 돼. 국수주의자들의 기백이 오늘의 일본을 만든 거야. 우리는 그 기백을 배워야 하네."
4.19 혁명 이후 이병주(국제일보 주필, 소설가), 황용주(부산일보 주필), 조증출(대구사범 동기)과의 술자리에서

2.4.1. 냉전자유주의로부터의 영향

박정희는 일본 제국의 군인으로서 복무한 개인적 경험과, 한민족의 생존을 위한 서구적 근대화라는 시대적 상황 속에서 자유주의를 받아들이지 못했다. 박정희에게 서구식 자유주의(개인주의)는 이해할 수 없는 사상이었고, 자연스럽게 냉전자유주의적 성향을 띠게 되었다. 국가와 민족의 대의(大義)를 위해 국민의 자유, 더 나아가 국민의 목숨까지도 기꺼이 바쳐야 한다는 국가주의적 사상은 냉전이라는 시대적 상황에서 공산주의자들을 적으로 설정하고 그 적들의 위협을 물리쳐 민족의, 국가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 개인의 자유는 희생할 줄도 알아야 한다는 냉전자유주의, 민족적 자유주의로 연결되었다. 또 이를 위해 자연스럽게 개인의 자유나 인권에 대한 경시와 폄훼가 수반되었다. 박정희는 '해방'은 민족의 자유를 뜻하지만 민족의 자유가 곧 개인의 자유는 아니라면서, 국가의 안보와 국가의 안정이 보장되지 않으면 곧 민족의 자유와 해방의 의미는 위협받고, 그렇게 되면 개인의 자유까지 위협 받는다는 논리로써 국가의 안정과 안보가 제일이고 공산주의자들을 물리쳐야 한다고 주장했다. 박정희는 공산주의자들이야말로 인간의 존엄성을 부인하고 자유주의를 거부하는 집단이라고 보았고, 자유를 지키기 위해선 공산주의를 물리치고 자유를 수호하기 위한 총화단결과 동원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냉전자유주의, 혹은 한국식 자유주의는, 한국의 체제와 자유를 위협하는 적을 서구의 자유주의자들과는 달리 절대 왕정, 교권주의가 아닌 공산주의로 인식했다는 점에서 뚜렷한 차이를 보인다. 자유주의는 기본적으로 자유를 위협하는 '적'으로부터 스스로를 방어하기 위해 태어난 사상이고, 한국의 자유주의는 공산주의라는 적과의 투쟁으로 탄생하게 되었다. 이는 안재홍, 안호상 등 해방정국의 중도파 민족주의자, 이승만 정부, 한민당, 박정희 정부, 심지어 3공화국 당시의 신민당에도 모두 해당되는 사항이었다. 그러나 박정희 정부가 다른 이들과 달랐던 것은, 이러한 한국식 자유주의를 극단적으로 교조화하고 신봉했다는 점이었다. 그렇게 박정희와 한국식 자유주의는 개인의 인권과 자유를 무시하는 방향으로 나아가 국가와 민족의 자유를 위해선 안정을 위협하는 반대파나 위험세력을 거리낌 없이 숙청하기 위한 반공적 자유주의, 냉전적 자유주의가 되었으며, 결과적으로 체제 안정을 수호하는 도구로 활용되었다. 결국 박정희 체제에서 반공은 자유를 위한 반공이라는 본래의 이데올로기를 잃고 체제를 위한 반공으로 변질되었다.

박정희는 이전의 보수주의 세력과는 달리 '자유'의 범위를 개인으로 보지 않았다. 박정희에게 자유란 민족과 같은 공동체나 집단이 누리는 것이지 개인이 누리는 것이 아니었으며, 개인이 소속된 집단이 자유를 누릴 때 비로소 개인은 자유롭게 되고 그렇지 않으면 개인의 자유도 잃게 된다는 것이었다. 이는 토마스 홉스에서부터 시작된 많은 19세기 자유주의자들 사이에서도 발견되는 현상으로, 아이러니하지만 박정희의 자유관은 원론적인 홉스의 자유관과 상당히 닮아있다. 또 사회유기체설 등의 논의와도 밀접하게 연관되어있다.[14]

박정희는 또한 유신 헌법 제정을 전후해 여러 연설에서 '큰 자유'와 '작은 자유'를 구분했다. 큰 자유란 당연히 국가나 민족의 자유였고, 작은 자유란 개인의 자유를 의미했다. "큰 자유를 지키기 위해서는 작은 자유는 희생할 줄도 알아야 한다"는 유명한 연설은 국가나 민족의 '큰 자유'가 절대적으로 중요하고 이를 위협하거나 이에 배치되는 '작은 자유'는 경시된다는 의미였다. 그는 사적인 자유를 욕망과 같이 부정적인 것으로 보았으며, 사적인 자유가 유일하게 허용되는 것은 '국가와 민족을 위해 봉사하는 자유'였다.

작은 자유를 부정하는 박정희 정부의 이러한 태도는, 결과적으로 헌법상 기본권과 같은 자유들을 자연법적으로 당연하게 주어지는 것이 아닌 실정법에 의해 비로소 보장되는 것으로 격하되게 만들었다. 유신 헌법에서 개인의 자유란 공동체의 질서나 안녕을 유지하는 한도 내에서만 허용되는, 지극히 법실증주의적인 개념이었으며, 상황에 따라 박탈될 수도 있는 개념이었다. 더 나아가 '사회를 혼란시키면서까지 회복해야 하는 자유와 민주는 없다'고 부정했으며, '국민에게 어느 정도의 자유를 허용하는가는 나라의 사정마다 다르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결국 박정희에게 자유란 국가나 민족의 당시 상황, 안보 등에 따라 늘기도 하고 줄기도 하는 실정법적 자유였으며, 따라서 민족의 생존권이나 국가의 안보가 자연스레 매우 중시되었다. 박정희는 또한 서구식 자유주의, 개인주의를 국가와 민족을 도외시하는 이기주의라 부르며 적대시했다.

3. 같이 보기



[1] 정확히는 자유지상주의, 개인주의 같은 서구 하면 떠오르는 자유분방한 사회 분위기를 반대하는 것에 더 가깝다. 박정희를 비롯한 장제스, 리콴유 같은 아시아적 가치의 상징격인 정치인들도 일단 표면적으로는 민주주의를 지향하는 척은 하기 때문.[2] 사회 구성원들의 공동체에 대한 헌신을 강조하고, 사회의 안정과 번영을 위해 개인의 자유를 절제, 더 나아가 필요에 따라 침해할 수 있다고 본다. 특히 예절, 효도, 충성, 성실, 교육열을 강조하는 측면에서 유교와 관련이 깊다.[A] 박정희시대의 국가주의 — 국가주의의 세 차원 —.[4] 나중에 10월 유신 때는 한국식 민주주의로 개칭한다.[5] 사실 이 사자성어는 1939년 박정희가 만주국육군군관학교에 입학하기 위해 혈서에 썼던 표현이다.[6] 1972년부터 2007년 이전까진 "조국과 민족의 무궁한 영광을 위하여 몸과 마음을 바쳐"라는 전체주의 색채가 짙은 표현이 포함되어 있었다. 2007년 "자유롭고 정의로운 대한민국의 무궁한 영광을 위하여"로 수정되었다.[7] 일본에서 '유신'(維新)이라는 표현은 혁명이 아닌 근본적이고 과감한 개혁, 위로부터의 개혁을 의미한다.[8] 현재 진보적 보수주의라는 용어는 복지나 기타 진보적 의제에 우호적인 태도를 보이는 보수를 말하지만, 원론적인 의미에서 진보적 보수주의는 전통적 보수주의와 대비되어 근대적 가치와 근대화에 긍정적인 보수주의를 뜻한다.[B] 박정희의 정치사상: 반자유주의적 근대화 보수주의.[A] [11] 그래서 김일성은 박정희와 어린 시절 인연이 있던 황태성을 박정희에게 밀사로 보냈으나, 박정희는 미국에게 반공 의식을 과시하기 위해 황태성을 간첩으로 간주하여 처형했다.[12] 김대중이 이끌던 시기까지의 민주당은 보수주의 정당으로 여겨진다.[B] [14] 아이러니한 점이 있다면, 북한주체사상도 매우 유사한 논리를 내세운다는 점이다. 주체사상/내용 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