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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장환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부장환
夫章煥 | Boo Chang Whan
파일:부장환.jpg
<colcolor=#fff><colbgcolor=#0047a0> 자문(子文)
본관 제주 부씨[1]
출생 1914년[2] 6월 27일[3]
전라남도 제주군 신좌면 조천리 2912번지
(現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조천읍 조천리)
사망 1988년 12월 2일 (향년 74세)
강원도 춘천시
묘소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3묘역-551호
상훈 건국포장

1. 개요2. 생애3. 기타4. 선거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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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독립유공자. 2005년 건국포장을 추서받았다.

독립유공자 부덕환은 그의 둘째 형이고, 독립유공자 부병각은 그의 7촌 재종숙(再從叔)이다.

2. 생애

1914년 6월 27일 전라남도 제주군 신좌면(現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조천읍) 조천리 2912번지에서 아버지 부병익(夫秉益, 1877. 2. 18 ~ 1964. 10. 24)과 어머니 김해 김씨(1877. 7. 5 ~ 1957. 11. 27)[4] 사이의 4남 2녀 중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조천공립보통학교(現 조천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대구사범학교를 다니다가 2학년 때 중퇴하였다. 1931년 일본으로 건너가 오사카에 거주했는데, 이때 니혼대학 전문부 법과를 다니다가 중퇴했다고도 한다.

그는 1932년 2월 시마나카 노부오(島中信雄)의 권유로 전협(全協:전일본노동자협의회)[5]출판노조 오사카지부에 가입하여 지부위원, 관서위원회 준비위원 등으로 활동하는 한편, 그해 4월 후카야(深谷)의 권유로 일본공산청년동맹에 가입하여 전협출판노조 조직원으로 활동하였다. 이때 모종의 사건에 연루되었다가 4월 8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 및 출판법 위반 혐의로 예심이 종결되어 기소중지 처분을 받은 바 있다.#

1933년 1월 일본 오사카에서 전협 확대위원회 책임자 오영수(吳永洙)·김광수(金光洙)·유원식(劉轅埴) 등과 함께 출판관서지부(出版關西支部)를 결성하고 중앙에서 파견된 조직원 야마다 가레오(山田包夫)와 협력하여 조직 확대를 도모하기 위해 힘을 쏟았다.

그러나 오영수와 유원식 등이 체포되면서 뜻대로 활동을 펼 수 없게 되자, 그는 신문판매점을 중심으로 조직을 확충하려는 재건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로 인해 그해 6월 체포되어 구금되었다가, 1935년 8월 31일 오사카지방재판소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징역 2년형(미결 구류일수 중 400일 산입)에 집행유예 5년을 선고받고 곧 출옥하였다.

출옥 후에는 오사카에서 오지마금속공업주식회사(大島金屬工業株式會社)를 창립했으며, 1937년에는 오사카동양주물공업회사(東洋鑄物工業會社) 사장을 지냈고 이후 8.15 광복을 맞아 귀국하였다.

귀국 후 용산구 후암동에 거주하였으며, 이때 실업계에 투신, 1946년 11월 20일 경성상공회 신규 상임위원에 선출되었다.#

1947년 4월 피혁을 제작하는 원료 단닝 2천톤을 미군정청 물자영단으로부터 불하받고 이를 되팔아 취한 이득액 수백만원을 회사공금에 쓴 혐의 때문에 부당이득죄로 기소되었으나, 그해 5월 22일 무죄 판결을 선고받았다.

1948년 4월 김구·김규식 등이 남북협상을 위해 북한에 건너갔을 때, 김규식의 수행원으로 평양다녀왔으며, 그해 9월 7일에는 서울상공회의소 대의원선거에 입후보하여 재선출되었다.

1949년 서울특별시 영등포구에서 조선텐닝공업주식회사조선피혁주식회사를 설립해 경영하던 중, 그해 1월 조선피혁주식회사 공장을 인수한 이래 막대한 회사의 공금과 제품·재료 등 부정처분하여 약 3천만원을 착복한 정황이 감찰위원회에 포착되었다. 이 때문에 14일 감찰위원회에 의해 파면된 후로 줄곧 지명수배상태에 있다가 그해 11월 2일 체포되었다. 같은 달 16일에는 기소되었고, 12월 31일 30만원의 벌금형을 선고받았다. 1950년 1월 6일 이에 공소하였으나 3월 19일 대체심리가 종결되었다.

이후 인천국제상선주식회사 사장과 재산관리인회 이사, 경기도 상공회의소 의원 등을 역임하기도 했으며, 1952년 동양위생재료공업회사를 창립했다.

1956년에는 서울특별시 마포구 용강동조선방직공업주식회사, 용산구 신계동에 동양위생재료주식회사를 경영하면서 부산광역시 동구 범일동에 지점을 열기도 했다.# 이때, 동작구 노량진동에 소유하던 주택을 제주도 출신 유학생들에게 '영주학사'라는 이름으로 무료로 방을 제공하기도 했다.

그밖에 대한제면공업협회 이사와 대한위생재료공업협회 이사장을 지내기도 했다.

1958년 제4대 국회의원 선거 당시에는 고향 제주도로 내려가 무소속으로 제주 북제주군 선거구에 출마, 자유당 김두진 후보에 밀려 낙선하기도 했다.

1988년 12월 2일 강원도 춘천시에서 별세하였다.

3. 기타

2005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포장이 추서되었다. 그의 유해는 당초 제주시 조천읍 조천리에 안장되었다가, 2007년 9월 13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3묘역에 이장되었다.

강원대학교 스포츠과학과 부기원(夫基源, 1952. 1. 15 ~ ) 명예교수는 그의 다섯째 아들이다.#

4. 선거 이력

연도 선거종류 소속정당 득표수(득표율) 당선여부 비고
1958 제4대 국회의원 선거 (제주 북제주군) 무소속 7,352표 (17.60%) 낙선 (4위)

[1] 열공계(悅公系) 18세 환(煥) 항렬.[2] 1958년 제4대 국회의원 선거 당시에는 1915년생으로 출마하였으며, 제주부씨족보 2권 501쪽에는 1911년생으로 기재되어 있다.[3] 1911년 8월 21일생으로 기재한 문헌도 있다.#[4] 김종윤(金鍾允)의 딸이다.[5] 당시 일본공산당의 외곽단체였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