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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브라질의 역사를 다루는 항목.
2. 유럽인 도래 이전
고대 역사 이래로 구석기, 좀 나은 쪽은 신석기 수준의 삶을 계속 유지하고 있었기에 주변의 문명들과는 다르게 이전에 뭘 하고 살았는지는 불명이다. 이유는 이쪽은 남미의 선진 문명국이던 잉카 제국, 콜롬비아의 타이로나 문명과 무이스카 문명과는 아마조니아를 사이에 두고 매우 멀리 떨어져 있어서 영향력이 전혀 닿지 않았고 모든 원주민은 국가 이전 상태로 살고 있었다. 주요한 원주민으로는 브라질 해안 지역과 아마존 강 유역에 사는 투피족과 남부 지역의 과라니족이 있었고, 그리고 싸잡아서 투피어로 타푸이아(Tapuia)라고 불리던 내륙 지역에 살던 다양한 민족들이 있었다. 이들은 포르투갈인이 도착했을때 2000여개의 다양한 부족들을 이루고 있었다. 투피족들은 수렵채집과 동시에 만디오카 등을 재배하면서 주로 마을 단위로 자급자족하며 살았다. 이들은 라테라이트를 개간해서 테라 프레타라고 일컷는 흑토지대를 만들기도 했으니, 나름대로 농경지식을 가졌던것으로 보인다.16세기 초에 탐험한 포르투갈인들이 기록한 바로는 아마존 강 하류에 투피족만이 상당한 수준의 마을이나 도시가 있었다는 기록이 조금 남아있다.(마라조아라 문화) 환경파괴로 인해서(...) 쿠히쿠구를 비롯한 당대의 유적들도 종종 발굴되곤 한다. 그러나 잉카 제국이나 아즈텍 제국처럼 강력한 국가는 등장하지 않았던 걸로 보이며, 문자도 전혀 사용되지 않았다. 또한 아마존 하류의 문명은 포르투갈의 콘키스타도르들이 정복하기 훨씬 이전부터 쇠퇴해왔던 걸로 추정되며 이 때문인지 포르투갈인이 온 시점에서는 거의 사멸하기 직전이었으며, 포르투갈인이 브라질에 본격적으로 오기 시작하면서 몇 안 되는 원주민들은 전파된 전염병으로 모두 사멸했다. 이로 인해 현재 남아있는 원주민은 약 80만 명으로, 대부분 투피족에 속한다. 하지만 수가 많지 않아 브라질 내에서는 1%도 채 되지 않는다.
확실한 건 원주민 대부분은 투피-과라니어족 계열의 언어를 쓰고 있었다는 것 정도다. 다만 이들이 썼던 투피어 계통의 언어는 비교적 근대시기까지 널리 쓰여져왔다[1].
3. 식민지 시대
대항해시대에 들면서 브라질은 포르투갈의 식민지가 되었다.인도항로를 막 발견한 바스코 다 가마의 탐험대가 포르투갈로 귀환하였고, 페드루 알바레스 카브랄이 이끄는 13척 규모의 함대가 1500년 3월 9일 리스본을 출발했다. 카보베르데를 지나 서쪽으로 항로를 튼 이 함대는 한 달 뒤인 4월 21일 오늘날 브라질 영토에 도달했다.[2] 그리고 새로이 발견된 이 땅이 1494년 스페인과 체결한 토르데시야스 조약에 따른 경계선(서경 43도 37분)의 동쪽에 위치한 것으로 확인되면서 브라질은 포르투갈령으로 확정되었다.[3]
다만 이 조약 기준 포르투갈의 몫은 지금 브라질보다는 훨씬 작은 해안지역에 국한됐고 이후 포르투갈 개척자들이 내륙 강 상류로 배를 타고 계속 올라가면서 남미대륙 내륙 부분을 대거 추가해 지금의 브라질 국토의 틀이 잡힌다. 스페인인들이 차지한 남미대륙 서해안에서 내륙으로 가려면 안데스산맥을 넘어야 하니 포르투갈이 내륙 선점이 가능했다.
그러나 스페인이 점령한 라틴아메리카의 식민지 지역들에서는 금과 은, 구리, 주석, 납, 백금 등등 온갖 지하자원들이 쏟아져나오는데 비해,[4] 포르투갈이 점령한 브라질에서는 자원 개발이 쉽지 않았다. 나중에 브라질 고원 쪽에서 금과 은이 나오기는 하였지만 그건 먼 훗날인 19세기 말의 이야기이다. 이에 실망한 포르투갈 사람들은 브라질을 대충 관리하고 대신 그 당시 짭잘한 수익을 올리던 인도 교역에 집중한다. 포르투갈인들이 처음 브라질에 도착했을 당시에는 브라질 북동부 전체가 광활한 열대우림으로 덮여있었고 소수의 브라질인 식민 개척자들의 힘만으로는 무슨 당시 전기톱이나 다이너마이트가 있는 것도 아니고 도저히 개발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스페인의 라틴아메리카 역시 상당수가 열대우림 지역인 것은 마찬가지였으나, 이 쪽은 기존의 아즈텍 제국이나 잉카 문명에서 도시도 지어놓고 어느정도 도로 체계도 갖추어놓고 옥수수 밭도 개간을 해놓아서, 개발이 수월했다는 차이가 있었다.
초창기 브라질에 이민정착한 포르투갈인 상당수는 세파르드 유대인들이었다. 포르투갈에서는 레콩키스타가 완료된 이후 이웃나라 스페인처럼 유대인들을 강제로 개종시키거나 추방하는 정책을 취했는데, 이 과정에서 일부는 기독교인으로 위장한 이후 브라질 식민지로 이주하였고,[5] 이후 원주민과 흑인 노예를 부리며 플랜테이션 농장주로 살았다. 포르투갈 입장에서는 식민지 운영 인력이 워낙 부족했던 이유로 유대인들이 브라질로 이주해서 신분세탁하는 것을 봐주어야 했다. 포르투갈인 대농장주들이 이것저것 재배해보다가 찾아낸 게 "파우 브라질" 이라는 빨간색 염료의 원료가 되는 나무였다. 이걸로 염료 팔아 돈을 벌다가 이후 마데이라 제도 등에서 재배하던 사탕수수를 도입해 플랜테이션을 시작하는 순간… 계륵과도 같았던 브라질은 포르투갈에게 있어서 진정한 축복의 땅이 되었다. 브라질 북동부는 이 당시에 사우바도르를 중심으로 한 플랜테이션으로 엄청난 번영을 구가하였다. 문제는 브라질 북동부 토양이 열대 라테라이트 토양이라는 점이었는데, 플랜테이션을 짓기 위해 열대우림을 파괴하면 강수량 때문에 표토층이 씻겨나가고 금세 토양이 황폐화되었다. 나무가 다 베어지고 가림막이 없어져 뜨거워진 대지에는 비가 예전처럼 내리지 않게 되었는데, 이런 식으로 북동부의 땅들은 점점 가물고 척박해져갔다. 한 때 포르투갈인 탐험가들을 경악하게 했던 브라질 북동부의 광활한 열대우림들은 몇 세기만에 가뭄이 자주 일어나는 건조 지대로 바뀌었다.
1580년 포르투갈의 아비스 왕조가 후사없이 단절되자 스페인 국왕 펠리페 2세가 모후가 포르투갈 왕족인 것을 근거로 포르투갈의 왕위를 요구하면서, 동군연합인 이베리아 연합에 편입됐고, 1640년 포르투갈이 분리 독립함에 따라 브라질은 다시 포르투갈 영토가 되었다. 그런데 이 기간에 포르투갈과 스페인이 맺었던 토르데시야스 조약이 사실상 실효[6]하면서 브라질의 포르투갈인들이 남미 내륙으로 대거 진출하게 되어, 오히려 더 넓어진 지금의 브라질의 영토를 갖게 되었다. 그리고 남부지방으로도 진출하여 북동부의 사우바도르 대신 남동부의 리우데자네이루가 브라질의 중심지가 된다.
영국과 프랑스, 네덜란드가 브라질 인근 땅을 노리고 공격을 시도할 때도 있었지만 이들이 상륙한 지점이 영 좋지 않았다.[7] 그리고 어차피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는 카리브해 섬 식민지에서 짭짤한 소득을 올리고 있는데 무리해서 열대우림 내륙 지역으로 침투할 이유가 적었다. 오늘날과 다르게 당시엔 땅은 남아돌아도 노동력은 부족하던 시대였고, 노예 무역의 큰 손 포르투갈 외에는 광활한 브라질 열대우림을 개간할 노동력을 공급할 수 있는 나라가 없었다. 물론 포르투갈과 사이가 나빴던 네덜란드는 노예를 수입 못하건 말건 신경 안쓰고 브라질 식민지를 공격했는데,[8] 일시적이나마 브라질 북동부를 점령하는 데 성공했으며 포르투갈과 일진일퇴를 거듭하긴 했다.[9] 이후 네덜란드 서인도 회사는 네덜란드령 브라질을 운영하면서 영토를 넓혀나갔지만 이 전쟁은 결국 1661년 8월 6일의 헤이그 조약으로 포르투갈의 승리로 끝나고 네덜란드는 브라질 식민지를 포기한다.#
4. 독립과 왕정 시대
그러던 중, 1808년 나폴레옹이 포르투갈을 침공하면서 왕실이 모두 브라질로 망명을 떠나는 사태가 벌어진다. 그래서 브라질의 리우데자네이루가 잠시 포르투갈 왕국의 수도가 되기도 했다. 나폴레옹이 몰락한 뒤, 왕실은 다시 본국으로 복귀했으나 정치적 위상이 엄청나게 커진 브라질1825년에 브라질 최남단에 있던 시스플라티나 주[11]가 아르헨티나의 지원을 등에 업고 독립에 나서자 아르헨티나를 상대로 500일 전쟁을 일으켰다. 그러나 산티아고 몬테 해전에서 브라질 해군이 우루과이 해군에게 궤멸되고, 그 여파로 인구 부족 현상까지 겪게 되었다. 페드루 1세에 대한 브라질 국민들의 증오는 날이 갈수록 더해갔다. 결국 프랑스와 영국이 중재를 한 끝에 몬테비데오 조약이 채결되며 1830년 브라질은 끝내 시스플라티나 주를 잃었고, 다음해 페드루 1세는 다섯살짜리 아들에게 왕위를 넘겨주고 포르투갈로 줄행랑쳤다. 이 시스플라티나 주가 지금의 우루과이이다.
한편 페드루 1세 축출 이후 브라질은 지방 전역에서 반란이 일어나 반란군과 제국군 간 유혈충돌로 사실상의 내전 상태로 빠져들기 시작하였다. 그러다 1841년 성인이 된 페드루 2세가 친정을 시작하면서 다시 안정을 되찾았다. 페드루 2세는 당대에도 후대에도 명군으로 평가받는 인물로 커피 재배의 장려 및 보급과 유럽 국가들의 이민을 받아들이는 등의 강력한 경제발전 정책을 취했으나, 기득권 세력과의 대립이 잦아졌다. 페드루 2세는 기득권 세력의 통제를 위해 3국 동맹 전쟁을 이용하여 노예들이 전시입대 후 전역 시 자유인이 되도록 하는 등 점진적으로 노예제 폐지 법안을 발효했고 결국 1888년 노예제 완전 폐지를 선언했다. 그러나 노예제 폐지는 당시 농장주 등 여러 기득권 세력들의 반발을 키웠고 1889년 데오도루 다 폰세카 장군이 주도한 군부 쿠데타가 일어나 페드루 2세가 폐위되면서 브라질은 군주제가 폐지되고 공화국이 되었다.
5. 구공화국 시대
1889년 11월 15일부로 공화정으로 바뀐 브라질은 한동안 커피 재배, 생산에 의존하는 방식으로 국가의 부를 축적했다. 커피 산업 호황은 브라질을 구원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었다. 당시 브라질의 북동부는 커피 재배로 기사회생하지 않았으면 계속해서 폭동과 반란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던 상황이었던 것이다.[12] 다행히 브라질 북동부 지역은 좀 척박하긴 해도 해발고도가 높아서 커피 재배에 나름 적합한 땅이었다. 당시 카리브해의 영국, 네덜란드 식민지에서 운영하던 사탕수수 플랜테이션들이 기존 브라질의 사탕수수 농장들보다 생산성이 높아서 브라질의 사탕수수 플랜테이션이 서서히 몰락하던 상황이었으나, 이런 섬 지역들은 해발고도가 높은 경작지가 넓지 않아 커피 대량 재배에는 비교적 불리했다. 브라질의 커피 재배 산업은 규모의 경제를 바탕으로 국제 커피 시장에서 입지를 넓혔으며, 한편으로 북동부의 잉여 노동력[13]을 흡수하여 사회 불안을 예방하였다.구공화국 시기의 브라질에는 코로넬리즈무(coronelismo)라고 불리는 정치체제가 들어섰는데, 이는 코로넬리스(coroneles)라고 일컫어진 대지주들과 그들 영향력하에 놓인 유권자들의 몰표에 기반한 일종의 후견주의 체제였다. 이 시기에는 상파울루와 미나스제라이스의 대지주들이 주축이 되어 만들어진 상파울루 공화당과 미나스제라이스 공화당이 일종의 동맹을 맺고 번갈아가면서 정권을 잡았는데, 이를 흔히 북부의 커피 플랜테이션과 남부 팜파스의 낙농업 개발에 빗대, 카페 콩 레이치(café com leite), 즉 '커피와 우유의 시대'[14]라고 일컫는다. 상파울루 공화당이 북동부에서 이주해온 지주들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면, 미나스제라이스는 그런 경향이 덜한 편이었다. 한편 남부 히우그란지두술의 경우 전통적으로 접경 지역이었기 때문에 군의 영향력이 강한 지역이었는데, 이 지역 지주들에 의해 결성된 히우그란지두술 공화당 역시 군부와 정치면에서 많은 시각을 공유하고 있었다.
상파울루와 미나스제라이스의 정치적 동맹은 1929년 상파울루 출신의 와싱톤 루이스 대통령이 차기 대선 후보자로 같은 상파울루 공화당 출신인 줄리우 프레스치스를 임명하면서 깨지게 되고, 이에 미나스제라이스는 1930년 대선에서 히우그란지두술과 동맹을 맺고 히우그란지두술의 주지사 제툴리우 바르가스를 대통령 후보로 내세운다. 세계 대공황의 여파로 브라질의 경제는 타격을 입게 된 상황이었는데, 이 때 조직력에서 앞선 줄리우 프레스치스가 승리를 거두었고, 같은해 7월엔 바르가스의 러닝메이트였던 주앙 페소아[15]가 피살당하기도 하였다. 이에 히우그란지두술과 미나스제라이스를 중심으로 반란이 일어났고, 이어진 군사 쿠데타로 구공화국은 붕괴되었다.
6. 바르가스 시대
새로 대통령이 된 바르가스는 1937년 친위쿠데타를 일으켜 국회를 해산하고 강압적인 독재 정치를 시도했으며, 파시즘에 입각한 포르투갈 제2공화국을 표방해 이스타두 노부(Estado Novo)[16]를 선포하였다(제3공화국). 초기에 공산주의자를 강력하게 탄압하는 등 파시즘적인 색채가 강했지만 의외로 나치식의 인종차별과는 거리가 멀었고[17], 1943년부터는 연합군측으로 제2차 세계 대전에 참전하며 미국과 관계를 강화했다.[18]바르가스 정부의 특징으로는 노동자 보호, 복지확대 등의 포퓰리즘 정책과 수입대체산업화를 통한 공업 진흥을 통해 브라질의 경제를 활성화시켰다. 그리고 제2차 세계 대전 참전으로 국위선양에도 앞장섰다. 그러나 제2차 세계 대전이 1945년 8월 15일 일본 제국의 무조건 항복으로 종료되자 바르가스의 강압적인 독재 통치에 대한 불만이 고조되었고 결국, 바르가스는 1945년 10월 군부 반대파 세력들이 일으킨 쿠데타로 실각당했다.
7. 제4공화국 시대
1946년 5차 개헌이 단행되며 신헌법이 채택되면서 새로운 민주 정부가 들어섰으나(제4공화국) 브라질의 정치적 혼란은 여전했다. 이 와중에 1951년 대선에서 제툴리우 바르가스는 대통령 시절의 공업진흥과 복지 확충들의 공약을 내세워 대통령에 다시 당선되었지만 소련과 우호관계를 맺어서 보수파의 반발을 샀고, 또한 인플레로 위기에 몰리자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바르가스의 죽음으로 보수파의 세가 약화되어서 1956년 당선된 주셀리누 쿠비체크 대통령은 신행정수도 브라질리아 건설을 비롯하여 자동차 산업 육성, 메타스 계획 등 각종 개혁정책을 펼치며 집권 기간 동안 연평균 7%의 GDP 증가를 이루었다. 그러나 정부 지출 증가 및 환율 하락 등의 원인으로 인하여 인플레이션 문제가 더욱 심해지기도 하였다.1960년 대선에서는 보수파의 지지를 얻은 자니우 쿠아드루스 후보가 정부의 부정부패를 비판하며 인기를 얻으며 당선되었다. 쿠아드루스는 외교적으로는 냉전 대립에서 벗어나 제3의 길을 찾고자 했고, 경제적으로는 보수적인 경제 안정화를 추진했다. 그러나 이는 양측의 지지를 모두 잃는 결과로 나타났다. 결국 쿠아드루스는 7개월만에 사임하였지만, 이번에는 군부에서 주앙 굴라르 부통령의 대통령직 승계를 반대하게 된다. 결국 내각제로 전환하며 대통령의 권한을 약화시키고 나서야 굴라르는 대통령에 취임할 수 있었다. 굴라르 정부의 토지개혁 및 일부 산업의 국영화 등을 비롯한 정책은 지배층의 반대에 부딪히게 되고, 인플레이션 문제는 해가 갈수록 악화되어 1962년에는 인플레율이 54%까지 치솟았고, 경제성장률도 하락했다. 군부와 보수파는 쿠데타를 모의하기 시작했고, 1964년 3월 31일부로 카스텔루 브랑쿠 장군 등 일단의 군부 지도자들이 쿠데타를 일으켜 군부가 다시 정치에 개입하면서 이후 브라질은 군사 독재 정권이 들어섰고, 카스텔루 브랑쿠 장군이 간접선거로 선출된 대통령에 취임하였다(제5공화국).
8. 군부 독재 시대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한 브라질 군부 세력들은 군부 지도자들이 돌아가면서 대통령직을 역임하며 군사 독재 정치를 펼쳤다. 그리고 여러 반대파 세력들과 야당 세력들을 추방이나 자격 박탈, 검열 내지는 고문 등의 방법으로 억압하면서[19] 친미, 반공 노선의 외교 정책을 내걸어 외국 자본 도입에 의한 강력한 공업화 정책을 추진했다.집권 초기 군사 정권은 이른바 브라질의 기적이라는 경제 호황을 이룩하며 90%대인 인플레이션을 10% 대까지 낮추고 실업률은 3% 이내의 완전고용을 이룩했으며, 1960년대 후반부터 1970년대 초반에 이르는 기간 동안 경제성장률이 연 평균 10%를 넘기는 호황세를 보였다. 또한 당시 자동차와 텔레비전같은 물품이 중산층에게도 널리 보급되기 시작했고, 1970년 브라질의 월드컵 우승을 적극적으로 이용하여, 군부정권에서 각종 슬로건 홍보를 하는 데 이용했다. 하지만 이러한 호황 속에서도 이득을 챙긴 건 소수 부유층들이었고, 일반인들에게 돌아간 몫은 적었다. 정부는 자본 축적을 위해 임금 인상률을 물가상승률보다도 낮게 책정했는데 이로 인해서 실질 임금증가율은 경제성장률에 훨씬 못 미쳤고, 빈부격차가 급속히 증가하여 국민저축률이 낮아질 수밖에 없었다. 또한 소득배분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만큼 국민들의 저축률은 낮아질 수밖에 없었고[20] 이로 인해 브라질 경제발전 자금의 대다수를 외채에 의존했기 때문에 나중에 [21], 동시에 공업화에 따라 석유 수요가 크게 늘어났지만 오일 쇼크로 인해 한계를 맞이했고, 경제성장률은 6% 이내로 떨어지고 갚아야할 외채는 급속히 불어났고, 물가상승률 또한 다시금 올라가기 시작했다.
1967년, 코스타 이 시우바 장군이 간접선거로 대통령에 선출되었다. 군사정권은 격렬한 반대에 부딪혔는데, 1968년 6월 리우데자네이루를 중심으로 대규모 시위가 일어났고, 공산주의자들은 무장 투쟁에 들어갔다. 코스타 이 시우바 대통령은 제도법 제5호를 선포해 의회를 폐쇄하고 반정부 운동을 강력하게 탄압했다. 이후 1969년 에밀리우 가하스타주 메디시 장군이 대통령에 올랐고, 메디시는 아마존 지역을 개발하려고 하였으나 성공적인 결과를 이루는 데에는 실패하였다.
1974년 취임한 에르네스투 가이제우 대통령은 일부 억압적인 정책을 완화하였으나 오일쇼크 등에 따른 불황과 초인플레이션, 외채 문제로 경제는 파탄 상태에 빠졌다. 집권 군사 정권에 대한 국민들의 저항은 계속해서 이어져 군사 정권은 민정 이양을 약속하지 않을 수 없었다.
1978년 취임한 주앙 피게이레두 대통령은 브라질 군사정권의 마지막 대통령으로 이전 대통령들과는 달리 브라질의 민주화에 기여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몇 년 전 밝혀진 바에 따르면 피게이레두 정권 시절 브라질 군사독재정권의 비밀문서 1만 9400건이 파기되었다고 한다.[22] 한편, 경제상황은 더욱 악화되어 브라질의 경제성장률은 80년대 들어 마이너스로 전환되었고, 1984년 인플레이션율은 223.8%까지 급증했으며, 대외채무도 910억 달러까지 증가했다.
9. 신공화국 시대
1985년 1월 탄크레두 네베스가 대통령으로 선출되면서 1960년 이후 처음으로 당선된 민간인 대통령이며 1964년 군부 쿠데타 이후 처음으로 여야 정권 교체가 이루어졌다.(제6공화국)[23] 하지만, 네베스는 취임도 하기 전에 갑자기 사망하고, 부통령 당선인인 조제 사르네이가 승계했다. 참고로 당시 브라질의 외채가 어느정도였냐면 브라질이 수백억 달러의 경상수지 흑자를 내고있었지만 하도 외채가 많아서 외채 상환에 다 썼던 상황이었다. 조제 사르네이는 1986년 2월, 경제 정책의 일환으로 기존의 크루제이루 화를 평가절하하여 크루자두 화를 도입했고, 물가와 임금동결, 환율고정을 실시했다. 일단 물가상승은 한숨을 돌리는 듯했지만 외채가 워낙에 막대했기 때문에 공식환율과 암시장 환율간의 격차가 커지고, 이로 인해 실질임금이 삭감되는 결과를 낳으면서 결국 물가통제는 실패했다. 결국 브라질 정부는 1987년 모라토리엄을 선언하게 된다.1989년, 29년 만에 직선제 대통령 선거가 치러져 젊고 개혁적인 이미지의 페르난두 콜로르[24]가 대통령이 되어 경제 문제 해결을 내세웠으나, 초인플레이션은 진정될 기미는 보이지 않았고, 콜로르마저 부패 스캔들로 탄핵되며 다시 정치적 혼란은 계속되었다.
1995년 취임한 페르난두 카르도주 대통령은 강력한 경제 개혁 정책을 폈고, 초기엔 초 인플레이션을 잡는 등 성과를 보이는 듯 했지만 이 저환율 정책이 무역적자를 유발시키고 경제자유화로 자본이 치고빠져나가기 좋게[25](...) 금융산업의 자유화를 대대적으로 시행하면서 결국 다시 경제위기에 빠졌고 IMF 구제금융을 받기에 이른다. 그리 좋은 평을 듣지 않았고, 사회각분야에 부패가 엄청났던 시절임은 여전하나 헤알화를 어느 정도 안정화시켰다는 점은 인정받기는 하다.
2002년 대선에서 루이스 이나시우 룰라 다시우바가 대통령에 당선되어 2003년 민주화 이래 최초의 좌파계 대통령[26]으로 취임한 후 계속 강력한 경제개혁 정책을 추구함과 동시에 성장하는 경제를 바탕으로 지역 강대국으로서의 입지를 구축하였으며, 2010년 대통령 선거에서 룰라의 후임으로 지우마 호세프가 당선되어[27], 룰라의 정책을 계승하고 있었지만 2013년 대규모 시위로 삐그덕거리더니 2015년 원자재값 폭락으로 인한 경제난으로 인기가 워낙 없어 탄핵당하고, 미셰우 테메르가 승계했지만 부패 문제에다가 복지예산을 삭감하는 정책을 펴고있어서 광범위한 반감을 사고있다. 지우마 호세프 때에 터졌던 대규모 비리에 연루되었던 노동자당에 대한 국민들의 깊은 불신과 너무 높은 범죄율, 지우마 호세프 탄핵으로 인한 브라질 정당간의 의심과 분열로 인해 2018년 대선에선 '군사독재시기의 군인 출신'이자 극우 성향의 자이르 보우소나루가 당선되었다.
현재는 브릭스(BRICs)라고 불리는 세계경제의 신 성장동력으로 주목받는 국가. 하지만 고질적인 빈부격차와 치안부재 문제가 심각하다. 빈부격차의 경우는 국기에서 녹색 부분이 월 10달러 이하 소득자, 노란색이 월 100달러 이하 소득자, 보라색이 월 1,000달러 이하 소득자, 그리고 흰색이 월 100,000달러 이상 소득자라는 모 단체의 그림이 있을 정도. 그나마 룰라 다 시우바 대통령 시절을 거쳐가면서 빈곤층이 크게 줄고 헤알화 가치가 올라 나아졌긴 했지만, 그래봤자 브라질의 피파 랭킹과 유사한 정도[28]. 식민지 시대부터 이어져 온 대지주와 자본가 집단 '코로넬리스'에 의해 1889년 왕정이 폐지되었고, 지금도 코로넬리스 계층은 엄청난 부를 구가하며 브라질 사회를 극악한 부익부 빈익빈 사회로 만들어가고 있다. 사실 브라질이 공화정으로 전환한 계기가 페드루 2세가 노예제를 폐지하자 분노한 기득권 세력이 군벌을 사주해 일어난 쿠데타 때문일 만큼 뿌리가 깊다.
지금도 브라질은 부패가 심각하지만 예전 브라질의 부패는 상상을 초월한다. 1990년대에는 아예 사회전반 시스템이 모두 부패해서 경찰들조차 죄다 막장이었다. 예를 들자면 공무원은 뇌물이 없으면 휴가조차 갈 수가 없었고, 뇌물의 유무에 따라 견인차 활동구역이 늘었다 줄었다 했다.
설상가상으로 2020년에는 코로나19의 창궐과 자이르 보우소나루 행정부의 무능하고 안일한 대응, 특히 보우소나루 행정부의 트롤링이 병치되어 동년 6월엔 감염자가 100만 명을 돌파하며 수원시 인구만큼의 코로나19 피해자가 나왔다. 특히 6월 3주차에는 일일 신규 감염자 50,000명, 사망자 1,000여 명이 나오는 등 시간이 지날수록 악화 일변도로 갔다.
2022년 2월 8일, 브라질 연방선거법원은 중도우파 민주당과 강성우파 사회자유당이 제출한 합당안을 승인했다고 밝혔다.#
[1] 오히려 투피족을 정복한 포르투갈인들이 역으로 이를 배워서 쓸 정도로, 투피어는 포르투갈어와 함께 브라질의 공용어로 널리 쓰였다. 아예 상파울루에서만 쓰이는 방언이 따로 있었을 정도다.[2] 19세기 이후 역사가들은 알바레스 카브랄의 브라질 발견이 조류에 의해 우연하게 이루어진 것인지, 혹은 신세계에 대해 이미 알고 있어 서쪽으로 항로를 튼 것인지를 두고 논쟁을 벌여왔다. 그럼에도 포르투갈의 항해자들이 1500년 이전에 브라질 해안에 이르렀을 가능성은 배제할 수 없다.[3] 하지만 토르데시야스 조약을 체결할 당시 포르투갈 측의 강한 요구로 기존의 경계선을 서쪽으로 이동시켰다는 점과 새땅을 왕창 발견하고도 왕실에서 놀라지 않았단 얘기를 볼 때 이미 포르투갈인들은 바스코 다 가마나 바르톨로뮤 디아스 등의 항해 과정에서 아메리카까지 가봐서 아메리카 신대륙을 알고 있었단 얘기도 있다. 물론 증거는 없고 (사실 리스본의 왕실 문서 보관고에 소장되어있던 기밀 항해 기록을 보면 알 수 있겠으나 1755년 리스본 대지진으로 몽땅 날아가는 바람에...) 어디까지나 썰일 뿐이다.[4] 페루 부왕령의 포토시 은광에서 나오는 은이 스페인으로 들어오면서 유럽의 은 보유량을 7배 정도 늘어났다고 한다.[5] 브라질 외에도 네덜란드로 이주한 사람들이 더 많았다.[6] 두 나라가 한 나라로 합쳐졌으니 남미에 그어놓은 식민지 경계선이 무의미해진 것[7] 자세한 내용은 기아나 문서 참조.[8] 네덜란드와 포르투갈은 아시아 무역 거점을 두고 서로 다투던 사이였다. 네덜란드의 주요 관심사는 카리브해보다는 아시아 쪽에 있었고, 브라질을 공격한 이유도 브라질 땅이 탐나서보다는 포르투갈 견제 차원에서가 더 컸다.[9] 여담으로 네덜란드인들은 브라질을 정복하는데 실패했지만 대신 안틸레스 제도에서 사탕수수 플랜테이션을 운영하면서 결과적으로 브라질 사탕수수 산업을 몰락시키는 결과를 초래하고 만다. 네덜란드의 빅 픽쳐 다른 한편으로 네덜란드는 수리남과 안틸레스 제도에 커피 재배를 시도하다 조건이 안 맞아서 실패하고 대신 망해가던 브라질 북동부가 19세기 수리남으로부터 커피 재배 기술을 도입하여 가사회생에 성공했다.[10] 브라질의 독립을 원하는 신하들이 부추겨서 황제가 된 것이다. 동 페드루 왕세자는 부왕인 주앙 6세가 죽자 잠시 동군연합의 형태로 포르투갈 국왕 페드루 4세로 즉위했다가 브라질과 포르투갈 양쪽의 반발로 2개월 뒤 포르투갈 왕위를 딸인 마리아 2세에게 물려주고, 브라질 제위는 5년 뒤 아들인 페드루 2세에게 물려주고 퇴위했다. 식민지에 제국 타이틀이 달린 인도 제국과 만주국의 대선배다.[11] 원래 스페인 땅이었다가 7년전쟁 때 포르투갈이 침공하기도 했고, 1816년 포르투갈이 침공하여 브라질의 한 주로 편입되었다. 주민들이 스페인계 이주민들이고 언어도 스페인어를 쓰는 이질적인 지역이어서 포르투갈령인 브라질 제국에게 반감이 크다보니 지배를 거부하고 있었다.[12] 19세기 말 브라질은 남부 팜파스 평원을 개발하고 유럽계 이민자들을 받아들이면서 북동부 지방에 기근이 나건말건 방치하던 상황이었는데, 이 때문에 이 지역 흑인 인구들의 불만이 가중되던 상황이었다. 다른 한편으로 이 북동부 지방은 브라질 지주 계급의 근거지이기도 했다. 이미 브라질의 지주 계급은 브라질 황제까지 끌어내린 바 있었다.[13] 당시 브라질 정부는 브라질을 백화한다는 계획 하에 새로 남부 지방을 개발할 때 기존 북부의 흑인들을 가급적 배제하고 진행하던 상황이었다.[14] 포르투갈어에서 카페 콩 레이치는 카페라테를 뜻하기도 하기 때문에 '카페라테의 시대'라고 번역하기도 한다.[15] 에피타시우 페소아 전 대통령의 조카이기도 했다.[16] 포르투갈어로 '새로운 국가'라는 뜻. 영어로 바꾸면 'New State'와 같은 단어다.[17] 아르헨티나의 후안 페론과 유사한 형태를 보인다. 페론의 경우, 본인이 메스티소라 인종차별을 여러 번 겪어본 적이 있기 때문. 물론 돈 좀 벌겠다고 나치 인사들을 숨겨줘서 미국으로부터도 소련으로부터도 욕을 거하게 먹었지만[18]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이 친히 브라질 나타우까지 내려와 회담을 가질 정도였다.[19] 브라질 음악 장르인 MPB와 트로피칼리아도 이 탄압에 호된 된서리를 맞았다. 일례로 지우베르투 지우와 카에타누 벨로주는 이 탄압 때문에 영국으로 망명했다. 특히 벨로주는 투옥된 상태에서 앨범을 녹음했을 정도.[20] 사실 동아시아 국가들이 경제개발시기에 저축률이 매우 높아서 가계저축률이 20~30%대에 달했고, 중국도 가계저축률은 매우 높은 축이다. 하지만 브라질은 경제개발기에도 가계저축률이 낮았는데 저축을 할 만큼 여유가 있는 가정의 비율이 그리 높지 않은 것이 첫 번째 요인이었다.[21] 오죽하면 이때 외채를 덜 빌렸으면 브라질이 1980년대와 90년대에 고생할 일은 덜했다는 말이 나온다.[22] 이로 인해 각종 처벌을 회피하고 천수를 누리다 사망했다.[23] 1985년 대선은 간선제였다. 1988년 헌법에서 개정된 직선제는 1989년 대선부터 실시되었다.[24] 만 40세에 당선된 역대 최연소 대통령이다.[25] 대대적으로 외자유치를 하여 경제를 살리려는 의도에서 금융규제를 완화했지만 결과적으로 이게 독이 되었다.(동시기 아르헨티나와 우루과이, 베네수엘라, 에콰도르, 볼리비아도 비슷한 꼴을 당했다.)[26] 사실 카르도주 대통령은 사회학자로써 종속이론을 주장하는 등 대통령 취임 이전에는 좌파성향이 강했지만, 대통령 취임 이후에 우파로 전향하다시피했다.[27] 브라질 최초의 여성 대통령이다.[28] 브라질의 피파 랭킹은 과거에는 1~3위를 찍었지만, 다소 부진한 최근에는 6위로 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