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ki style="margin: -5px -10px; display: inline-table" | <tablebordercolor=#fff,#e5e5e5> | BBC 뮤직 매거진 선정 20대 교향곡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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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000,#e5e5e5> 순위 | 곡명 | 작곡가 | |
<colcolor=#000,#e5e5e5><colbgcolor=#fff,#000> 1위 | 교향곡 3번 <영웅> | 루트비히 판 베토벤 | |
2위 | 교향곡 9번 <합창> | 루트비히 판 베토벤 | |
3위 | 교향곡 41번 <주피터> |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 | |
4위 | 교향곡 9번 | 구스타프 말러 | |
5위 | 교향곡 2번 <부활> | 구스타프 말러 | |
6위 | 교향곡 4번 | 요하네스 브람스 | |
7위 | 환상교향곡 | 엑토르 베를리오즈 | |
8위 | 교향곡 1번 | 요하네스 브람스 | |
9위 | 교향곡 6번 <비창> | 표트르 차이콥스키 | |
10위 | 교향곡 3번 | 구스타프 말러 | |
11위 | 교향곡 5번 <운명> | 루트비히 판 베토벤 | |
12위 | 교향곡 3번 | 요하네스 브람스 | |
13위 | 교향곡 8번 | 안톤 브루크너 | |
14위 | 교향곡 7번 | 장 시벨리우스 | |
15위 | 교향곡 40번 |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 | |
16위 | 교향곡 7번 | 루트비히 판 베토벤 | |
17위 | 교향곡 5번 |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 | |
18위 | 교향곡 2번 | 요하네스 브람스 | |
19위 | 교향곡 6번 <전원> | 루트비히 판 베토벤 | |
20위 | 교향곡 7번 | 안톤 브루크너 | |
링크 |
브루크너의 교향곡 | |||||
00번 | 1번 | 0번 | 2번 | 3번 | |
4번 (낭만적) | 5번 | 6번 | 7번 | 8번 | 9번 (미완성) |
정식 명칭: 교향곡 제8번 C단조
(Sinfonie Nr.8 c-moll/Symphony no.8 in C minor)
1990년 10월 20일, 세르주 첼리비다케 지휘, 뮌헨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연주.[1] |
1. 개요
안톤 브루크너의 열 번째 교향곡이자, 완성작으로서는 마지막 교향곡이다.작곡자 본인도 이 교향곡을 '나의 가장 아름다운 교향곡'으로 일컬었던 만큼 규모와 길이, 악기 편성 등 외향적인 면에서 뿐만 아니라 음악적 소재와 구성의 완성도 등 모든 면에서 브루크너 최고의 걸작이자 교향곡 역사상 가장 위대한 작품 중 한 곡으로 평가받는다.
1884년 7월부터 1887년 8월 10일에 걸쳐 초고가 작곡되었으나, 지휘자 헤르만 레비[2]가 초연을 거절하면서 1889년부터 1890년에 오늘날의 형태로의 개정이 이루어졌으며, 이 개정판을 바탕으로 1892년 한스 리히터의 지휘로 초연되었다.
2. 곡의 형태
고전적인 4악장제의 곡이지만 평균 연주시간이 1시간 20분이나 되기 때문에, 브루크너의 교향곡 중에서도 연주시간이 가장 긴 대작이다.[3] 그리고 사실 1악장은 15분 내외의 길이로 브루크너 교향곡 중에서는 상당히 짧은 편이지만, 나머지 악장들, 특히 3악장과 4악장은 브루크너 교향곡 중에서 특히나 긴 편이다.3번 이후로 오랜만에 단조 조성을 사용한 교향곡이 되었는데, 그 깊이와 어두움은 이전 작품들보다도 훨씬 무겁다. 브루크너는 이 곡을 쓰는 동안 지인들의 죽음 등 비보를 계속 받았고, 자신의 건강도 점차 쇠약해짐을 느끼고 있었는데, 이런 작곡가의 개인사가 곡의 분위기에 반영되었다고 생각하는 이들도 많다.
1악장 첫머리는 전형적인 '브루크너 오프닝' 이지만, 참으로 오묘하고 애매한 조성 때문에 신비스러움 보다는 으스스함을 안겨준다.[4] 이외에도 전곡에 걸쳐 '브루크너 리듬' 과 '브루크너 시퀀스', '브루크너 휴지', 오르간을 연상케하는 관현악의 음색 등 브루크너만의 개성적인 모든 면모가 총괄되어 나오고 있어서, 작곡 인생의 총결산이라는 느낌을 강하게 받게 만든다. 그리고 다소 뜬금없이 승리의 메시지를 안겨주면서 끝났던 초고의 1악장 코다도 후술할 대규모 전곡 개정을 거치면서 브루크너 교향곡의 1악장 중 유일하게 어둡고 조용하게 끝을 맺는 것으로 처리되면서 악장 전체를 통해 소위 '죽음의 메시지'라 불리는 어두운 분위기가 관통하고 있다.
대조적으로 사이에 끼인 2악장은, 작곡자 본인이 '독일의 야인'이라는 표제를 붙인 전형적인 브루크너식의 거칠고 역동적인 ABA 3부 형식 스케르초이다. 비올라와 첼로의 깡마른 선율로 구축된 으스스한 주부와 전원적인 현의 선율과 하프의 아르페지오가 울려퍼지는 대조적 분위기의 느린 트리오로 구성되어 있다.[5]
27분이나 되는 명상적인 분위기의 3악장은 교향곡 역사상 가장 아름다운 느린 악장 중 하나인데, 2개의 주제군 속의 4개의 길면서 다채로운 아름다움을 가진 악구들이 론도 형식으로 반복되다가 트럼펫과 심벌즈가 찬란하게 울려퍼지는 클라이맥스를 맞이한다.
마지막 악장의 구조는 소나타 형식을 바탕으로 했지만, 교향곡 5번을 제외한 브루크너 교향곡의 모든 4악장과 비교했을 때 가장 복잡하게 짜여져 있는데, 7번과 달리 여기엔 각 주제 간의 대립 기믹도 없고 수시로 바뀌는 분위기 때문에 연주하기도 듣기도 꽤 어려운 대목이다. 하지만 브루크너의 작곡 기법이 최대한 발휘된 부분이기도 하고, 대조적인 분위기의 3개의 주제들의 음악적 매력 또한 엄청나기 때문에 계속 듣다 보면 20분이 넘는 곡이 전혀 지루하지가 않게 느껴진다. 마지막의 장대한 종결부에서는 전 악장의 주요 주제를 교묘히 짜맞춰 몽땅 등장시키는 기예에 가까운 모습까지 보여준다.
관현악 편성은 브루크너 교향곡들 중 가장 크게 짜여져 있는데, 이 곡에서부터 목관악기를 세 대씩 편성하는 3관 편성이 사용되었다. 호른은 종래의 4대에서 8대로 곱배기가 되었고, 7번에서 처음 쓴 바그너 튜바도 3악장과 4악장에서 등장시키고 있다. 특기할 만한 점은 7번 교향곡에서 호른 주자와 바그너튜바 주자가 분리되어 있었지만, 8번 교향곡에서는 5번~8번 호른 주자가 바그너튜바의 연주를 겸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연주회에서 호른과 바그너튜바를 각각 양팔에 들고 입장하는 네 명의 단원들을 볼 수 있다. 브루크너는 이 네 명의 주자에게 곡 중에 수시로 두 개의 악기를 교체해서 연주하도록 지시하고 있다. 3악장의 클라이맥스에서는 심벌즈와 트라이앵글이 등장하고, 2악장의 트리오와 3악장에서는 하프까지 나온다.[6] 이 때문에 교향곡 8번은 브루크너가 하프를 쓴 유일한 작품이 되었다.
플루트 3/오보에 3/클라리넷 3/바순 3(세번째는 콘트라바순을 겸함)/호른 8(5~8번 호른은 바그너튜바를 겸함)/트럼펫 3/트롬본(알토1 테너1 베이스1) 3/튜바/팀파니/심벌즈/트라이앵글/하프3/현 5부(제1바이올린-제2바이올린-비올라-첼로-콘트라베이스).[7]
3. 작곡과 초연
작곡에 3년이라는 긴 시간이 걸리기는 했지만, 브루크너 자신은 작곡하면서 이 곡에 대단히 자신감을 가졌던 것 같다. 특히 전작인 7번이 이례적인 대성공을 거두면서 8번의 성공도 기대하고 있었다. 7번의 초연과 보급 과정에서 브루크너는 특히 뮌헨 왕립오페라의 지휘자 헤르만 레비의 지휘에 깊은 인상을 받았기 때문에 8번의 초연을 헤르만 레비에게 맡길 생각이었다. 1887년 곡의 완성과 동시에 악보를 헤르만 레비에게 보냈다. 그러나 스코어를 면밀히 검토한 레비는 고심 끝에 작품을 완전히 이해할 수 없다면서 초연을 정중히 거절하였다. 레비의 예상치 못한 거절로 브루크너는 충격을 받았고, 작품에 개정이 필요하다는 제자들의 강력한 권유가 더해지며 이 작품은 대대적인 개정을 거치게 되었다. 이런 전면적인 개정 작업 끝에 오늘날 연주되는 형태로 완전히 변모된 이 작품은 초연부터 대성공을 거두었으며, 오늘날 브루크너 교향곡 가운데 최대의 걸작으로 꼽히고 있다.한편 헤르만 레비의 초연 거절로 부터 받은 충격은 3번 교향곡의 대실패 때와 맞먹는 것이었다. 레비 또한 소심한 브루크너가 자신의 거절로부터 받을 충격을 미리 예상하고 제자들에게 먼저 연락해서 브루크너가 자살을 기도할 지도 모른다고 걱정했을 정도였다. 레비 뿐 아니라 요제프와 프란츠 샬크 형제, 페르디난트 뢰베 등 제자들까지 곡을 개정해야 한다고 의견을 내놓는 바람에, 결국 브루크너는 곡의 윤곽을 통째로 뒤엎는 수준의 대규모 개정 작업을 시작했다. 레비로부터 촉발된 개정작업은 전작들까지 꺼내서 대대적으로 개정하는 결과를 낳았다. 교향곡 4번의 1888년판, 교향곡 3번의 1889년판, 교향곡 1번의 빈 판이 모두 이 시기(1887년~1890년)에 개정되었다. 이 시기를 2차 개정파동이라 부르기도 한다. 이처럼 전작들을 개정하느라 정작 교향곡 8번의 개정은 자꾸 지연되어 1889년부터 본격적으로 이루어졌다. [8]
브루크너는 1889년 3월 4일부터 1890년 3월 10일까지 8번 교향곡을 개정 작업을 했으며, 이렇게 개정된 교향곡 8번은 1892년 12월 18일 한스 리히터가 지휘하는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가 초연했다. 곡의 길이와 난해함에도 불구하고, 초연 무대는 7번 성공의 여세를 몰아 찬사를 받았다. 물론 다른 사람들이 함께 있는 자리에서 브루크너의 면전에다 자신은 8번 교향곡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고 은근슬쩍 비판한 요하네스 브람스와 대놓고 '악몽 같은 숙취'라는 혹평을 내린 에두아르트 한슬리크[9], 막스 칼베크를 위시한 브람스파는 여전히 브루크너를 비난하는 데 여념이 없었다.
출판 과정에서도 브루크너의 높아진 위상이 플러스로 작용했는데, 초연된 해 하슬링어-슐레징어-리나우 출판사에서 출판할 때 오스트리아 황제 프란츠 요제프 1세가 인쇄비와 출판비를 전액 부담했다고 한다. 다만 이것은 브루크너가 황제에게 곡을 헌정했단 것도 플러스 요인으로 작용했다.
4. 판본
4.1. 1887년 노바크판
1982년 8월, 엘리아후 인발 지휘, 프랑크푸르트 방송 교향악단 연주.[10] |
브루크너가 처음 완성한 형태의 판본이다. 이 판본의 총보는 완성과 동시에 헤르만 레비에게 보내었으나 헤르만 레비가 초연을 거절하면서 초연이 무산되고 말았다. 이에 충격을 받은 브루크너는 바로 개정 작업에 들어가게 되고 그 개정의 결과물이 1890년판이다. 이 초고는 오랫동안 완전히 사장되어 있다가 1972년 레오폴드 노바크의 편집으로 출판되고 다음 해인 1973년 9월 2일 한스-휴베르트 쇤젤러[11]가 영국에서 공개 연주하면서 처음 세상에 알려졌다.[12]
아예 재작곡 수준이라는 4번급 개정은 아니었지만, 8번도 개정할 때 엄청난 부분이 변했다. 일례로 1, 2, 3악장은 아예 새로운 오선지에 다시 쓰여졌다고 한다. 다만 4악장의 개정은 다른 악장에 비해서는 적은 편이어서 원래 오선지에다가 주로 X자를 그어서 삭제하는 형태로 진행되었다. 그 중 일부는 나중에 브루크너 교향곡을 편집한 로베르트 하스에 의해 복구(?)되었는데, 하스는 이 부분들이 제자들의 강요로 억지로 삭제되었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X자 표시를 한 부분들을 복원했다. 그러나 나중에 브루크너 교향곡을 편집한 레오폴드 노바크는 이 삭제들도 브루크너 본인의 의도라고 판단해서 삭제된 부분을 그대로 두었다.
각 악장에서 눈에 뜨이는 개정 부분을 자세히 보자면 다음과 같다. 전반적으로 과도한 반복이나 다소 난잡하고 부자연스러운 악구들, 무거운 오케스트레이션 위주로 정비한 편이다.
- 제1악장: 제시부의 코데타의 음향 간소화, 발전부 클라이맥스 전 경과구를 단축하고 클라이맥스 악구의 반복 횟수도 3회에서 2회로 줄임, 발전부 후반과 재현부에서 제1주제의 재현 부분은 아예 새로 작곡, 재현부 끄트머리의 클라이맥스에다 팀파니 가필, 악장의 종결부를 장조의 긴 투티에서 단조의 고요한 짧은 악절로 완전히 새로 작곡
- 제2악장: 주부에서의 과도한 반복구 제거[13], 주부 후반부의 다소 난잡한 음향을 바로잡음, 트리오는 전반적인 템포를 늦추고[14] 주요 주제를 변경, 트리오의 중반부에서의 현의 트릴을 하프의 아르페지오로 변경.
- 제3악장: 중초반부에서 현의 반복구의 길이를 절반 정도로 단축하고 음형도 변경, 그 부분 직후의 클라이맥스 후에 이어지는 경과구를 단축하고 그 뒤의 제1주제 제2악절이 관악기로 재현되는 부분 삭제, 그 후 제2주제 제2악절이 연주되는 부분 뒤의 경과구적 파트는 사실상 재작곡. 클라이맥스 전 경과구는 초반부 몇 마디 빼고는 대대적으로 단축하고 새로 작곡, 악장의 전체 클라이맥스를 C장조에서 Eb장조로 바꾸고 심벌즈도 '3번씩 연타 2번 -> 1번만 치기 2번'으로 바꿈, 클라이맥스 후에 제1주제 제2악절이 2번 연주되는 부분을 1번으로 바꾸고 그 부분도 재작곡, 코다 도입 부분의 오케스트레이션 변경
- 제4악장: 제2주제의 종결부를 짧게 새로 씀, 제3주제 직전의 경과구를 짧게 다시 작곡, 발전부 초반의 현 중심 악구의 후반 교체, 재현부에서 제1주제와 제2주제 사이의 경과구 단축, 코다의 클라이맥스 시작 부분을 간소화하고 전 곡의 마디막 마디를 온전한 유니즌으로 변경.[15]
노바크판에서는 잘려나갔지만, 하스가 복구(?)한 대표적인 부분들은 다음과 같다.
* 제1악장: 재현부에서 제3주제가 등장할 때 호른의 패시지 삭제[16]
* 제3악장: 전체 클라이맥스 전의 작은 클라이맥스 뒤에 이어지는 음울한 분위기의 개별 파트 삭제
* 제4악장: 제시부의 후반에서 독주 바이올린이 활약하는 부분을 삭제하고 팀파니의 짤막한 솔로로 대체, 재현부에서 제2주제 부분의 중반부 삭제
비록 1악장 발전부와 3악장 후반부 등은 개정 과정에서 오히려 완성도가 낮아지긴 했으나, 이를 제외하면 평균적으로 8번 교향곡은 개정판의 완성도가 초고보다 높다고 볼 수 있다.
1982년 당시 브루크너의 알려지지 않은 초고들을 최초로 녹음하고 있던 엘리아후 인발[17]이 8번 교향곡의 초고로 최초의 녹음을 남겼다. 이후 게오르크 틴트너를 비롯해 시모네 영, 데니스 러셀 데이비스, 블라디미르 페도세예프, 켄트 나가노, 프란츠 뵐저-뫼스트 등이 초고를 채택한 녹음을 남기고 있다. 하지만 이들이 모두 레비의 비판으로 촉발된 개정이 '브루크너 자신의 의지로 행해진 개정 작업이 아니다' 는 견해를 보이는 것은 아니다. 1887년 판본으로 녹음을 남긴 지휘자들의 일부는 1890년 판본도 지휘하였다. 게오르크 틴트너의 경우 음악적으로 하스판을 가장 높이 평가하지만 음반사의 요구로 1887년 판본을 녹음했으며 향후 하스판으로 재녹음하길 원한다고 밝힌 바 있다.
4.2. 1888년 3악장 개정
1888년의 것으로 추정되는 3악장 개정판이 더모트 골트와 카와사키 타카노부, 후안 카히스 등의 편집으로 나왔지만, 모두 미출간 상태다.[18] 1887년판과 1890년판의 과도기적 형태로, 2관 편성에서 3관 편성으로 확장된 것이 특징이다. 브루크너 교향곡 3번의 1876년판처럼 느린 악장만 개정한 형태이기 때문에 앞으로 따로 연주될 기회는 많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독일의 지휘자 게르트 샬러의 브루크너 교향곡 전집에 포함된 8번 녹음이 1888년판으로 명기되어 있다.4.3. 1890년판
1887년 초고를 완성함과 동시에 헤르만 레비에게 초연이 의뢰되었으나 레비의 거절로 인해 브루크너는 작품의 개정에 돌입하게 된다. 이때의 충격이 얼마나 심했는지 그는 전작인 1번, 3번, 4번 등도 다시 꺼내서 개정했다. 1번의 린츠판, 3번의 1889년판, 4번의 1888/89년판이 모두 이때 개정되었다. 그때문에 8번의 개정은 지연되었고 실질적으로 1889년부터 1890년에 걸쳐 집중적인 개정작업이 이루어졌다. 후대에 다음과 같은 두 편집으로 출판되었다.4.3.1. 1890년 하스판
최초의 원전판으로 1935년 로베르트 하스의 편집으로 출판되었다. 1890년 판본을 바탕으로 하고 있긴 하지만 하스는 작곡가가 이 작품을 개정할 때 제자들의 입김이 지나치게 들어가서 작곡가의 의도와 달리 과도한 삭제가 이루어졌다고 보고 1887년판 중 삭제된 일부 대목을 복원하여 1890년판에 갖다 붙였다. 복원부분은 대부분 4악장에 집중되어 있는데, 하스는 자필악보에 X자로 그어진 부분이 제자들의 압력에 의한 것이라고 보아 이런 부분을 모두 복원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이는 하스의 주관적인 판단에 의한 것이라 하여 후술하듯 영미쪽 음악학자들에게 집중적으로 비판받고 있다. 전체적으로 1890년판이지만 일부 악절을 1887년판에서 복원했기 때문에 현재는 비판을 의식하여 1887/90년판이라 기재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곡 전체의 근간은 완전하게 1890년판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에 이러한 표기는 적절하지 않다.다만 지휘자들이 이 판본을 예술적으로 가장 뛰어나다고 평하는 경우가 많아 자주 사용되고 있다. 심지어 노바크의 1890년 판본이 출간된지 한참이 지났음에도 여전히 하스 판본을 선택하는 지휘자들이 많다.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베르나르트 하이팅크, 크리스티안 틸레만, 귄터 반트, 다니엘 바렌보임, 크리스토프 폰 도흐나니, 피에르 불레즈[19], 사이먼 래틀, 야닉 네제-세갱 등의 지휘자들이 이 판본으로 녹음하였다.
4.3.2. 1890년 노바크판
1955년 레오폴트 노바크의 편집으로 출판되었다. 하스가 추가한 부분을 다시 삭제하였다(주로 3악장 및 4악장). 노바크는 4악장에서 X자로 그어진 부분이 제자들의 압력에 의한 것인지 본인의 의도인지 알 수 없지만 어쨌거나 최종적으로 삭제하는 것을 작곡가가 동의한 것이라는 논리로 이러한 부분을 모두 재삭제했다. 사실 노바크의 일괄 삭제 역시 확실치 않은 부분 마저 모두 일괄적으로 삭제했다는 문제점이 있지만 어쨌든 현재 노바크판이 1890년판의 표준으로 여겨지고 있고 특히 영미쪽 학자들[20]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고 있다.세르주 첼리비다케, 카를로 마리아 줄리니, 안드리스 넬슨스, 만프레드 호넥, 마리스 얀손스, 로린 마젤, 주빈 메타 등의 지휘자들이 이 판본으로 녹음하였다.
4.3.3. 하스판 VS 노바크판?
흔히 쓰이는 악보는 하스판과 노바크판이다. 다만 하스판에 대해서는 논쟁이 있었다. 비판의 주요한 내용은 하스가 자의적으로 1890년 판본에 1887년 판본의 일부 내용을 결합시켰다는 것이다. 하스가 1890년판에다가 1887년판의 일부 내용을 덧붙인 것은 개정과정에서 제자들의 외압에 의해서 원치 않은 삭제가 이루어졌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다만 이에 대한 정확한 근거는 무덤에 있는 브루크너와 제자들만 알고 있는 사실이기 때문에 결국 판본의 편집은 하스의 주관적인 판단과 감각에 의존할 수 밖에 없었다. 하스의 주관적인 편집 기준에 대해 특히 미국쪽 음악학자(대표적으로 벤자민 코스트베트와 윌리엄 캐러건)은 하스판은 쓰레기통에 버려져서 더이상 연주되지 말아야 한다, 지구상에서 그 존재를 없애야 한다는 등의 극단적인 주장까지 펼치고 있다. 하지만 노바크판도 순수한 의미에서 1890년판이라고 볼 수 없으며, 편집 과정에서 확실치 않은 부분은 결국 노바크의 자의적인 판단으로 결정된 부분들이 있다. 사실 노바크가 일부러 하스판과 차별시키려고 4악장에서 확실치 않은 부분까지 일괄적으로 다 삭제해버린 측면도 있는데 이 부분도 논란의 여지가 있다.그러나 전술하듯, 음악가들 중에서는 하스판의 음악성을 더 높이 쳐주는 사람이 많다. 예를 들어 1악장 3주제가 동형 반복될 때 호른의 거친 포효가 등장하는데, 이 호른의 패시지는 1887년판에서는 제시부, 재현부에 모두 등장하지만, 1890년판에서는 제시부에서만 등장하고 재현부에서는 흐름이 달라졌기 때문에 삭제되었다. 그런데 하스는 이 누락된 호른 패시지를 1890년판의 흐름에 맞게 변형하여 추가했다. 이 부분은 미국 음악학자 벤저민 코스트베트 등에게 '직접 작곡'이라고 맹비난을 받는 부분인데, 물론 하스가 직접 작곡한 것은 분명히 아니다. 초고인 1887년판에 있었던 소재가 1890년판에서 음악적 흐름이 달라지면서 사라져 버린 것을 하스가 창조적으로 부활시켰다고 하는 것이 보다 적절한 표현일 것이다. 여기서 발휘된 하스의 음악적 감각은 찬탄이 나올 만한 뛰어난 것이다. 하스가 창조적으로 변형하여 새로 적용한 이 호른의 거친 포효는 음악적 효과도 실로 대단할 뿐만 아니라, 제시부와 재현부의 수미상응을 더욱 완벽하게 만들어 구조적으로도 더욱 견고해졌다. 4악장에서도 마찬가지로 하스가 '복원'(?)한 부분 덕분에 제시부와 재현부도 상응하게 되어 구조적으로 더욱 완벽해졌다. 게오르크 틴트너는 하스를 매우 높이 평가하여 8번 교향곡의 최고의 버전이라고 칭찬했다. 틴트너는 말년에 낙소스에서 브루크너 교향곡 전집을 녹음할 때 8번의 경우 하스판을 택하고자 했지만, 음반사의 요구로 1887년판을 대신 사용했다.[21]
현재 두 판본의 선택 비중은 거의 비슷하다. 그러나 젊은 지휘자들은 하스에 비판적인 사람들의 비난을 피하기 위해 안전하게 노바크판을 택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일부 영미쪽 학자들의 이지메에 가까운 비판과 철저한 자필보에 입각한 정격연주 붐으로 인해 2000년대 이후 한동안 정말 하스판이 거의 연주되지 않아 사장되나 하던 시절이 있었지만[22], 2010년대 이후 베르나르트 하이팅크, 다니엘 바렌보임, 크리스티안 틸레만, 리카르도 무티 등 거장 지휘자들이 여전히 하스판을 고수하면서 하스판이 다시 살아나 현재는 하스판과 노바크판 모두 자주 연주되고 있으며, 이제는 야닉 네제 세갱 같은 젊은 지휘자들도 자유롭게 하스판을 지휘하고 있다.
하스판을 비난하는데 열을 올리며 원칙주의자 행세를 했던 코스트베트는, 훗날 자신의 과거 입장과는 완전히 모순되는 행보를 보이는데, 그것은 바로 4번의 논란 있는 판본(1889년)의 정당성을 주장하며 자신이 편집한 새로운 판본[23]을 내놓게 된 것이다. 코스트베트는 자신의 판본을 팔아먹기 위해 하스를 이용하여 새 판본의 정당성을 설파하는 이중적 면모를 보였다. 그는 이 곡의 인쇄초판 개정 작업에도 브루크너가 관여했고, 개정 과정에서 편집자들과 브루크너 간의 승인 여부를 재검토해야 하기 때문에 '무단 개정판' 이라고 무조건 배척할 수는 없다고 슬그머니 입장을 바꾸었다.
4.4. 1892년 샬크판
1892년 작곡가의 생전에 출판된 유일한 악보. 제자인 요제프 샬크와 막스 폰 오버라이트너의 편집으로 간행되었다. 브루크너 생전에 출판된 다른 악보들과 마찬가지로 출판을 위한 편집 과정에서 제자들의 편집이 반영되어 곳곳에서 첨삭과 재편곡이 이뤄짐. '샬크판', '리나우판', '샬크-오버라이트너판', 개정판(Revised version) 등으로 불린다.대체적으로 1890년 노바크 판본과 유사한데, 금관과 팀파니는 다소 차이가 있고 일부 악절은 삭제되어 있기도 하다. 미국의 음악학자인 벤자민 코스트베트 같은 경우에는 하스 판본보다 이 샬크 판본이 작곡가의 의도에 부합한다고 평가하며, 하스 판본은 사실상 판본으로 취급하지 않는다.
다른 개정판과 마찬가지로 오늘날에는 사실상 사멸한 판본이다. 모든 브루크너 교향곡을 철저하게 제자들에 의한 개정판(뢰베, 샬크판)으로만 연주한 것으로 유명한 한스 크나퍼츠부슈가 이 판본을 녹음했다.
5. 기타
- 구세대 지휘자들은 몇몇 판본을 절충하여 지휘하였다. 칼 뵘과 칼 슈리히트는 하스판과 노바크판을 절충하여 사용했으며, 심지어 빌헬름 푸르트벵글러는 샬크판과 하스판을 절충한 것에 자신이 직접 첨삭까지 한 악보를 공연에 사용하기도 했다.[24]
- 2002년에는 1악장 초반부와 4악장 종결부에 생일 축하합니다를 버무린 특이한 편곡물도 나왔다.
- 한국 초연은 1971년 9월 20일 홍연택과 국립교향악단[25]의 지휘로 서울에서 성사되었으나, 곡의 난해함(?) 때문에 동곡이 한국에서 다시 연주된 것은 무려 31년 후인 2002년 4월 25일 들어와서야였다. 그 주인공은 알렉산더 리브라이히와 융에 도이치 필하모닉으로, 독일문화원과 독일 학술교류처가 마련한 '코리아 프로젝트'를 위해 남북한을 순회하며 이 곡을 연주했다. 이 공연 1주일 전인 2002년 4월 18일 리브라이히와 융에 도이치 필하모닉은 북한 평양에서 브루크너 8번을 연주했다.[26][27] 브루크너 교향곡이 북한에서 연주된 적은 이때가 최초이자 유일했다고 한다.
- 당시 25세에 불과했던 젊은 작곡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가 1889년 바이로이트 음악축제에 방문했을 때 마침 브루크너도 바이로이트에 와 있었는데, 이때 브루크너는 자기보다 40년 늦게 태어난 이 청년 음악가에게 개정 중이던 자신의 교향곡 8번을 소개했고,[28] 얼마 후 이 두 음악가는 피아노 2중주로 8번 교향곡의 3악장을 연주했다고 한다.
[1] 도쿄 산토리홀 실황이다.[2] Herman Levi, 1839~1900, 독일의 유대인 지휘자. 1882년 리하르트 바그너의 파르지팔의 초연을 지휘한 것으로 유명하다.[3] 좀 빠른 연주는 전곡을 70분 대에서 끊기도 하지만, 세르주 첼리비다케 같은 느린 연주로 유명한 지휘자는 100분이나 끄는 경우도 있다.[4] 맨 처음 호른이 길게 끄는 음이 F음인데, C단조의 기본 코드 구성음(C와 Eb, G) 모두에 해당되지 않아 처음 듣는 사람들은 다소 어리둥절한 느낌을 받기도 한다.[5] 다만 초고의 트리오에서 주요 선율은 개정판의 그것보다 더욱 노골적으로 향토적인 분위기를 풍기고, 하프는 아예 나오지도 않는다.[6] 다만 초고에서는 3악장에서만 하프가 쓰인다.[7] 여담으로 8번 교향곡은 처음 작곡될 무렵에는 7번 교향곡과 마찬가지로 확대된 2관 편성을 취했는데, 개정하면서 제3의 목관 악기들을 더해서 확대된 3관 편성으로 증편되었다. 그 결과 유명 작곡가의 교향곡 중 3관 편성으로 작곡된 거의 최초의 교향곡이 되었다.(참고로 구스타프 말러의 교향곡 1번은 1889년 초연될 당시에는 2관 편성이었고, 3관 편성으로 개정되어 연주된 것은 브루크너 8번이 초연된 지 1년이 지난 1893년이었다.)[8] 이 시기에는 1번, 3번, 4번도 개정되었지만 안타깝게도 8번만큼 들인 노력에 비해 그 결실은 크지 않다고 할 수 있다는 게 후대의 대체적인 평가다. 이 시기에 개정된 1번, 3번, 4번의 경우 이전 판본들이 더 선호되고 있다는 점을 보아도 알 수 있다.(심지어 1번의 개정판은 브루크너 교향곡의 개정판 중 최악으로 취급받고 있고, 4번의 개정판은 21세기가 시작될 무렵까지만 해도 아예 제자들에 의한 무단 개정판으로까지 여겨졌다.) 때문에 전작들의 개정없이 빨리 8번의 개정을 마무리 짓고 9번을 완성시켰으면 아쉬움이 드는 이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브루크너가 2차 개정파동 동안 전작들을 개정하면서 쌓인 노하우들이 8번의 개정과 9번의 작곡에 영향을 미쳤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2차 개정파동의 노력과 시간은 부질없는 것이 아니라 가치있는 것으로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9] 한슬리크가 브루크너 교향곡 8번 초연 후 쓴 신랄한 비판 리뷰를 유심히 보면 한슬리크가 브루크너 교향곡 8번을 딱 한번 듣고도 곡을 정말 잘 이해(?)하고 있었음을 역설적으로 보여준다는 말이 있다.[10] 브루크너 8번 초고의 세계 최초 녹음이다. 마찬가지로 3번, 4번 초고도 인발이 세계 최초로 녹음했다.(단 4번 초고는 초연 실황 녹음이 남아있긴 하다)[11] Hans-Hubert Schönzeler, 1925~1997, 독일 태생 호주의 음악학자 겸 지휘자. 이로부터 5년 후인 1978년 3번의 초고도 호주에서 세계 초연했다.[12] 다만 1악장은 이미 1954년 5월 2일 오이겐 요훔이 뮌헨에서 연주한 적이 있었다.[13] 특히 코다 직전에 주부의 주제가 개정판에서는 4번 연주되나, 초판에서는 12번이나 반복된다.[14] 초판본에서는 트리오의 템포가 주부와 똑같은 Allegro Moderato로 지시되어 있으나, 개정판에서는 Langsam으로 변경되었다.[15] 개정판에서는 트럼펫이 다른 악기들과 같이 '미레도' 동기를 연주하지만, 초판본에서는 트럼펫이 '미레도' 동기 대신 G음을 3번 연주한다.[16] 후술하듯 하스가 사실상 직접 작곡한 부분이라 봐도 무방하기 때문에 영미권 학자들에게서 엄청난 비난을 받고 있다.[17] 교향곡 3번, 4번 초고를 최초로 녹음하고 음반으로 낸 지휘자이기도 하다.[18] 카히스 편집의 총보는 웹에서 pdf 파일 형태로 입수할 수 있다. http://www.abruckner.com/Data/Documents/B8-Adagio.pdf[19] 불레즈는 생전 브루크너 음반을 딱 1개 녹음하였는데, 브루크너의 사망 100주기를 기념하기 위해 1996년 브루크너가 실제로 오랜 기간 봉직했던 오스트리아 상크트 플로리안 성당에서 빈 필하모닉을 지휘하며 브루크너의 교향곡 8번 하스 판본을 연주하였고, 도이치 그라모폰 사에서 발매되었다.[20] 대표적으로 폴 호크쇼(Paul Hawkshaw)가 있다.[21] 이를 들어 흔히 틴트너가 하스판 만을 선호했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틴트너는 그 이전인 1982년 캐나다 국립 청소년 관현악단을 지휘해 1887년판의 북미 초연을 행한 바 있다. 4번의 초판도 난삽하다고 하스판을 택한 틴트너가 음반사의 요구 만으로 8번의 초판을 골랐다고 보기는 힘들다.[22] 심지어 1960년대부터 하스판을 지휘해오던 베르나르드 하이팅크마저 2000년대 이후 한동안 노바크판으로 연주했을 정도였다. 하지만 2010년대 이후 하이팅크는 다시 하스판으로 지휘하고 있다.[23] 말이 편집이지 사실상 인쇄상 오타를 수정한 것 정도에 불과했다.[24] 다만 푸르트벵글러가 원래 작곡가였다가 초기 작품들의 반응이 좋지 않자 전업 지휘자로 전향한 사람이란 것을 감안하면 그렇게까지 이상한 것은 아니다. 비슷하게 구스타프 말러도 브루크너 4번, 6번을 첨삭하여 연주한 것으로 악명이 높다.[25] 현 KBS 교향악단의 전신이다.[26] 브루크너가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다는 것과 북한이 현존하는 최악의 기독교 탄압 국가라는 것을 대조하면 매우 아이러니하다.[27] 심지어 브루크너 8번의 북한 초연은 2013년에야 성사된 베토벤의 교향곡 9번 초연보다도 11년 일렀다.[28] 이때 슈트라우스는 아버지보다 2살차밖에 나지 않던 노장이 작곡한 8번 교향곡에 크게 감동했지만, 1악장은 그다지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