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04 18:43:27

소비에트-폴란드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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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비에트-폴란드 전쟁
Советско-польская война[1]
Wojna polsko-bolszewicka[2]
(wojna polsko-sowiecka[3], wojna polsko-radziecka[4], wojna polsko-rosyjska 1919–1921)[5]

Polish-Soviet War
러시아 내전소비에트의 서방 공세의 일부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Polish-soviet_war_1920_Polish_defences_near_Milosna,_August.jpg
기간
1919년 2월 14일~ 1921년 3월 18일
원인
폴란드러시아간의 국경분쟁
볼셰비키의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 파기에 따른 우크라이나 침략
장소
러시아 소비에트 공화국을 제외한 구 러시아 제국동유럽 부분 영토[6]
교전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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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력
94만 3,976명[7]
100만여 명[8]
피해 규모
총 피해 약 22만 5천여 명[9]
전사 47,551명
부상 113,518명
실종 51,351명
탈영 38,909명
총 피해 미상
전사 6만~10만여 명
포로 15만 7천여 명[10]
결과
폴란드의 승리
리가 조약 체결
발트 3국의 독립
폴란드와 볼셰비키의 벨라루스, 우크라이나 분할

1. 개요2. 상세
2.1. 배경2.2. 전쟁 전반(1919.02-1920.04)2.3. 전쟁 중반(1920.04-1920.08)2.4. 전쟁 종반(1920.08-1921.03)2.5. 종전(리가 조약, 1921.03)
3. 영향4. 결론5. 주요 전투

[clearfix]

1. 개요

소비에트-폴란드 전쟁의 일자별 경과
소파[11]전쟁(), 혹은 폴란드-볼셰비키 전쟁[12]이라고도 한다. 소비에트[13]-폴란드[14] 전쟁은 1919년 2월 14일부터 1921년 3월 18일까지 약 2년 간 벌어진 전쟁이다.

이 전쟁은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1848년 혁명 때부터 널리 퍼진 연속혁명론과 무력 혁명수출을 결정적으로 분쇄했다는 점에서 유럽의 정치사와 군사사에서 중요한 사건 중 하나다.

또한 이 전쟁에서는 기병의 기동력에 의해 승패가 결정되었는데, 이 때문에 소련에서는 이때의 전훈을 분석하여 종심 전투 이론을 개발하게 된다. 폴란드인에게는 제2차 빈 공방전과 더불어 가톨릭 국가 폴란드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중요한 사건 중 하나이기도 하다.

2. 상세

2.1. 배경

제1차 세계 대전이 진행되던 1917년 독일 제국 정부는 전쟁 수행에 따른 인적, 물적 자원의 동원을 위해 폴란드인의 협력이 절실해졌다. 따라서 독일은 러시아 제국령이었던 프리비슬린스키를 포함한 지역에 폴란드 왕국을 부활시켰다. 이로써 폴란드인들은 명목상으로나마 민족국가를 수립할 수 있었고 실제로 이들은 폴란드 제2공화국의 전신이 된다.

한편 과거 폴란드 영토였던[15] 우크라이나 지역은 폴란드-리투아니아가 멸망한 이후 러시아의 지방으로 편입되어 있었으나 19세기 말부터 민족주의가 발흥함에 따라서 우크라이나 고유의 민족정체성을 자각하기 시작했다.[16] 이들은 2월 혁명 이후 라다를 소집해 모스크바와 동등한 권한을 가진 연방국가로서의 개편을 요구하였다. 이 조건에 케렌스키 정부는 사실상의 승인, 페트로그라드는 명시적인 동의를 함으로써 우크라이나인들은 자유를 획득할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하였으나 제헌의회를 폐지시킨 10월 혁명 이후 키예프 라다는 모스크바에 더 이상에 기대를 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독립국가 건설로 방향을 선회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볼셰비키는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공화국[17]이라는 우크라이나인 볼셰비키로 이루어진 괴뢰 체제를 앞세워 우크라이나를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이들은 우크라이나 전역을 휩쓸었으나, 5백여명의 사관학교 출신 결사대가 크루티에서 기차를 타고 진군하는 볼셰비키를 저지하는 사이에[18] 키예프 라다는 빈니차로 이전할 수 있었고 결국 우크라이나 정부를 붕괴시키지 못한 상황에서 리가가 함락당하자 전쟁 수행능력을 잃어버린 볼셰비키는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에서 벨라루스우크라이나의 독립을 인정해야만 했다. 벨라루스는 벨라루스 인민공화국, 우크라이나는 우크라이나 인민공화국을 건국했고, 이에 따라 우크라이나와 벨라루스는 러시아의 영토가 아니었다.[19] 따라서 폴란드가 러시아를 침략했다는 주장은 사실이 아니지만 해당 지역에 주둔하던 볼셰비키를 선제 공격한 것은 사실이다.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 명목상 동유럽에는 평화가 도래하였으나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을 체결한 두 당사자 중 하나인 독일 제국이 소멸하고 볼셰비키는 아직 행정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해당 구역은 실질적으로 무주지가 되어버렸다. 이런 상황에서 폴란드, 러시아, 우크라이나의 생각은 서로 다를 수 밖에 없었는데 폴란드는 연방을 멋대로 분할해버린 당사자[20]들이 모두 소멸한데다가 독일과 러시아가 국력을 회복할 상황을 대비해서 최대한의 완충장치를 확보하려 한 반면, 우크라이나 인민공화국은 우크라이나 민족[21]을 아우르는 독립국가를 건설하려 했고, 볼셰비키는 러시아 제국의 유산을 최대한 승계하는 동시에 한편으로는 독일과 헝가리 지역에서 발생하는 소비에트 혁명을 최대한 지원하려 했다.

과연 러시아 SFSR을 위시한 볼셰비키는 독일 제국11월 혁명으로 붕괴한 이틀 후인 13일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의 파기를 선언했고[22], 그 직후 동유럽에 소비에트의 서방 공세라고 알려진 침공을 개시한다. 그 대상은 동유럽의 모든 신생국가, 즉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벨라루스[23], 우크라이나[24], 에스토니아는 1918년 11월, 라트비아와 리투아니아는 12월, 벨라루스와 우크라이나는 1919년 1월에 침공을 당했다. 이 중 폴란드의 중심부와 지척인 벨라루스는 1919년 1월 5일 수도 민스크가 함락되고 러시아의 괴뢰정권인 벨로루시 사회주의 소비에트 공화국이 설치되어 볼셰비키의 침략을 당한 나라들 중 가장 빨리 망해버렸다.[25][26] 한편 우크라이나도 1919년 1월 7일 러시아의 재침을 받았다. 이 침공으로 인해 1919년 1월 1일만 해도 해안지대를 제외한 드니프로강 서안 전역과 동안의 일부를 통치하던[27] 우크라이나 인민공화국은 2월 5일에 수도 키예프를 내주고 오늘날 우크라이나 중서부-서남부 일대만 간신히 점유하는 빈사 상태에 놓이고 말았다.[28] 볼셰비키가 동유럽 신생국들의 독립을 인정할 의지를 전혀 보이지 않자, 폴란드는 볼셰비키와 일전을 벌이기로 마음먹는다.

2.2. 전쟁 전반(1919.02-1920.04)

파일:1024px-PL-RU_war_1919_phase_I.svg.png 파일:1024px-PL-RU_war_1919_phase_II.svg.png
1918~1919년 러시아의 발트 3국 및 벨라루스 방면 공세
빨간색 화살표가 붉은 군대의 진로이다.
1919년 발트 3국 및 폴란드의 반격
흰색 화살표는 에스토니아-라트비아 연합군, 검은색 화살표는 리투아니아군, 파란색 화살표는 폴란드군의 진로이다.
사실 소비에트-폴란드 전쟁의 시작점을 잡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러시아 제국이 붕괴하고 독일군이 동유럽 점령지에서 철수하면서 권력의 거대한 공백이 형성되었고, 이 틈을 타서 민족주의 세력과 볼셰비키, 백군 세력이 각지의 권력을 차지하기 위해 서로 치고받고 싸웠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런 분쟁은 현지의 자생적 정치세력이 각국 중앙정부의 완전한 통제를 받는 게 아니라, 일단 권력탈취를 알아서 시도하고 사후승인을 받는 경우가 적지 않아서 전쟁의 정확한 시작일을 논의하는 것이 골치아프게 된다.

그 중에서도 빌뉴스는 특히 분쟁의 여지가 많은 도시였다. 빌뉴스는 역사적으로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영토였지만 폴란드 분할 이후로는 러시아 제국의 영토였고, 민족 구성으로는 폴란드계와 유대계가 다수인 도시였다. 그러므로 1차대전이 끝나고 빌뉴스 영유권을 두고 다투는 나라는 4개국에 달했다.[29] 그러므로 빌뉴스를 차지하기 위한 각축전도 치열하게 벌어졌다. 1918년 3월 빌뉴스는 리투아니아 정부의 수도로 기능했지만 이듬해 1월 1일 독일군의 철수를 전후로 하여 동유럽 현지의 각 세력은 빌뉴스의 차지를 시도했다. 폴란드계는 신생 폴란드에 합류할 목적으로 1918년 9월 독자 군 창설을 시작했고, 볼셰비키는 12월 15일 "노동자 평의회"를 조직했다.

독일 제국군이 철수하기 직전 12월 29일 폴란드 정부는 해당 지역의 폴란드계 자위대에 해산 및 폴란드군 합류를 명령했고, 실제로 자위대는 폴란드군 단대호를 배정받고 자위대를 지휘하던 각 장교들은 폴란드군의 계급과 직책을 부여받았다. 독일의 철수시도를 두고 도시를 볼셰비키에게 넘기려는 시도라고 판단한 폴란드군은 31일 행동을 개시하여 독일군의 무장해제를 시도하고 빌뉴스의 권력을 장악했다. 이때 리투아니아 정부는 빌뉴스를 떠나 카우나스로 임시 천도한다. 협상 끝에 독일군은 빌뉴스 일부를 폴란드군에 양도하는 대신 일부 시가지와 철도역은 자기가 통제하기로 했다. 볼셰비키의 노동자 평의회가 폴란드군의 시도를 저지하려 했으나 실패하고 오히려 1월 2일에 항복하고 무기고를 압수당했다.

빌뉴스에서 폴란드와 볼셰비키의 교전이 벌어지자 곧바로 서방 공세를 벌이던 붉은 군대 서부전선군 예하 16군이 개입하여 폴란드군의 저항을 무력으로 분쇄하고 5일 빌뉴스를 점령했다. 폴란드군은 인근 지역으로 후퇴했다가 독일군에 억류되어 무장해제되고 이후 폴란드 정부 통제 지역으로 이송되었다. 빌뉴스를 장악한 볼셰비키는 2월 27일 리투아니아-벨로루시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을 선포하여 자기 괴뢰국인 리투아니아벨라루스를 서로 병합했다. 그리고 빌뉴스에서뿐만 아니라, 벨라루스 서부 전역에서 볼셰비키의 진격에 반발한 폴란드계 및 벨라루스계 주민들이 자위대를 조직하여 1월 내내 붉은 군대와 교전을 벌였다. 이 빌뉴스 전투(1918. 12. 31~1919. 01. 05)가 발발한 1918년 12월 31일을 소비에트-폴란드 전쟁의 시작으로 여기는 학자들도 있다.

그러나 가장 일반적으로 잡는 전쟁의 시작일은 1919년 2월 14일이다. 이날 폴란드군은 벨라루스 베레자 카르투스카(Bereza Kartuska)에 주둔하던 붉은 군대를 공격하여 80명을 사로잡았다. 노먼 데이비스(Norman Davies)에 의하면, 1919년 초 전선에 배치된 폴란드군은 8만, 붉은 군대는 5만 정도 되었다. 3월 폴란드군은 네만강[30]을 도하하여 핀스크를 점령했다. 폴란드의 공세는 4월 16일에 본격적으로 개시되었다. 벨라루스 서부의 주요 도시들이 폴란드군에 점령되었고, 러시아가 점령했던 빌뉴스도 19일에 폴란드군의 손에 떨어졌다.[31][32] 아직 백군과의 싸움이 더 급했던 러시아는 빌뉴스 일대에서 퇴각했다.

5월 말-6월 초에는 러시아가 반격을 벌여 전선이 볼히니아갈리치아 근방에 형성되었지만, 8월 폴란드는 벨라루스 중부 방면으로 다시 공세를 벌였다. 8일 민스크를 점령한 폴란드군은 8월 말 베레지나강,[33] 9월 2일 다우가바강까지 진격했다. 벨라루스 방면의 북부전선뿐만 아니라 우크라이나 방면의 남부전선에서도 폴란드군은 빠르게 진격, 폴레시에 습지[34] 서부와 볼히니아를 점령하고 루마니아 왕국과 접경했다. 그러나 이때 피우수트스키는 치명적인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는데, 비슷한 시기 모스크바로 총공세를 펼치던 안톤 데니킨의 지원 요청을 두 번이나 거절한 것이다. 피우수트스키에게 있어 기본적으로 러시아 제국주의자인 데니킨은 폴란드와 우크라이나의 독립에 있어 방해되는 존재였고[35], 무엇보다 볼셰비키의 군사력을 과소평가한 나머지 데니킨과 굳이 동맹을 맺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11월 초에는 양측간의 분쟁을 외교적으로 해결하기 위한 협상이 열렸지만, 데니킨의 모스크바 공세를 쳐부순 러시아는 12월 폴란드가 제시한 조건들을 거부했다. 러시아가 키예프를 재점령(12월 12일)한 지 이틀 후, 피우수트스키도 더 이상 미련을 가지지 않고 협상을 파기했다. 30일에는 같이 대소전쟁을 벌이던 라트비아와 군사동맹을 체결, 이듬해 1월 초 라트비아 남동부 다우가프필스를 점령하여 라트비아에게 양도했다. 하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폴란드와 볼셰비키 간의 전쟁은 전면전이라기보단 국경분쟁에 가까웠다.

2.3. 전쟁 중반(1920.04-1920.08)

전쟁은 1920년 초 전면전으로 발전했다. 러시아의 침공으로 인해 세력권이 폴란드 접경지대로 쪼그라든 우크라이나 인민공화국이 폴란드에게 동맹을 요청한 것이다. 우크라이나와 폴란드는 4월 21일 바르샤바 조약을 체결, 우크라이나는 폴란드의 동부 갈리치아 영유권을 인정하는 대신 폴란드로부터 우크라이나 유일의 합법정부로 인정받고 대소전쟁에서 폴란드의 군사지원을 받기로 했다. 폴란드-우크라이나 동맹은 5월 7일에 키예프를 해방시켰다. 자원과 인구가 풍부한 우크라이나의 분리독립을 결코 용인할 생각이 없었던 러시아는 폴란드에 대한 반격을 결정, 세르게이 카메네프가 최고사령관으로 임명되어 전쟁을 지휘했다. 남서부전선군을 지휘하던 알렉산드르 예고로프는 지원군을 받아 5월 28일 키예프로 기동했다. 제1기병군을 지휘하는 세묜 부됸니는 폴란드군의 방어선을 붕괴시키는 데 큰 활약을 했다. 키예프는 6월 10일 붉은 군대에 재점령되었다. 키예프 공세에 투입되었던 폴란드군 10만은 1만 5천이 전사하고 1만이 포로가 되는 큰 피해를 입었다. 그나마 군대 자체가 붕괴되는 수준에 이르지 않은 것은 다행이었다.

반격은 성공적이어서, 6월 10일 키예프가 탈환되고 7월 11일과 14일 각각 민스크와 빌뉴스도 함락시켰다.[36] 이 무렵 영국이 폴란드의 공산화를 막기 위해 개입하여 더 이상 진격하지 말라고 경고했으나 당 중앙위원회는 7월 16일 전쟁을 계속하기로 결정, 17일 영국 측에 모든 중재 시도를 거부하며, 오직 폴란드와 직접 협상할 것이라고 응답했다. 23일 정치국은 폴란드 출신의 율리안 마르흘레프스키(Julian Marchlewski)를 지도자로 삼은 폴란드 임시혁명위원회(Polrewkom)를 수립했다. 이에 영국 정부는 새로운 국경선을 제안했는데 이것이 바로 당시 영국 외무장관 조지 너새니얼 커즌의 이름을 딴 커즌 라인이었다. 러시아는 초기에는 이 제안을 잠시 고려했으나 붉은 군대의 진격 속도가 상상을 초월하자 이를 무시하였고 블라디미르 레닌은 폴란드 침공을 주장했다. 레프 트로츠키와 카를 라데크는 레닌의 이러한 주장에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고 남서부 지역에서 크림반도의 표트르 브란겔이 지휘하는 백군과 싸우던 이오시프 스탈린도 폴란드에 정신을 쏟는 사이에 백군이 회생할 가능성, 붉은 군대가 폴란드를 치기에는 너무 약하다는 점,[37] 폴란드 노동계급의 강성한 민족주의를 경고했다.

하지만 레닌은 폴란드로 들어가면 모든 노동자들과 유럽의 좌파 정당이 혁명을 일으켜 러시아를 맞이할 것이라는 주장을 굽히지 않고 폴란드를 거쳐 독일까지 모두 적화할 수 있으리라 믿었다. 러시아 공산당은 폴란드를 넘어 독일까지 진출, 독일 공산당을 원조하여 정권을 장악하여 러시아-폴란드-독일을 아우르는 거대한 소비에트 연방을 만들자는 대소련 구상도 하였는데,[38] 이것이 서방 자본주의 국가들이 폴란드를 원조하는 계기가 되었다.[39] 참고로 이 구상은 러시아 군대가 폴란드 국경선을 넘기도 전부터 거론되던 것으로, 당시 레닌이[40] 얼마나 낙관에 빠져 있었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레닌, 트로츠키, 투하쳅스키는 폴란드의 수도 바르샤바를 최우선 목표로 설정한 전략 계획을 승인했고 이에 붉은 군대는 폴란드-우크라이나 국경을 넘어섰다. 그로드노는 22일, 비아위스토크는 28일, 브레스트는 29일 함락되었다. 부크강의 폴란드군 방어선도 일주일만에 무너졌다. 서부전선군은 8월 2일 나레프강을 도하하여 바르샤바에서 97km 떨어진 곳까지 진격했다. 동시에 독일과 체코슬로바키아는 국경 분쟁을 겪고 있던 폴란드를 이 기회에 볼셰비키의 힘을 빌어 아예 멸망시키려고 했다. 독일은 단치히 자유시사보타주를 사주하여 폴란드의 물자반입을 거부했으며, 폴란드로 향하는 물자가 자국을 경유하는 것을 거부했다. 체코슬로바키아도 폴란드로 향하는 물자의 반입을 막아버렸다. 폴란드와 혈맹에 가깝던 헝가리는 3만의 기병군단을 폴란드에 파병하려 했지만 체코슬로바키아는 중립을 선언하면서 이동을 막았다. 한편 스탈린은 레닌의 의지가 확고하자 확전 반대파에서 찬성파로 돌아섰다. 5월 26일 남서부전선군에 배속된 스탈린은 7월 12일 레닌으로부터 다음과 같은 메시지를 받았다.
"스탈린에게 요청하는 바, 1) 공세를 강화하기 위한 준비에 박차를 가하고, 2) 내게 의 의견을 전해주기 바랍니다. 나는 개인적으로 (영국의 중재는) 크림반도를 합병하겠다는 야심을 감춘 순전히 사기라고 생각합니다."
스탈린은 크게 고무되어 다음과 같이 답장했다.
"폴란드군은 완전히 궤멸되고 있으며, 폴란드는 통신과 행정이 마비되었고, 폴란드에서 내리는 명령은 목적지에 도착하는 것보다 훨씬 자주 우리 수중에 떨어지고 있습니다. 간단히 말해 폴란드인들은 쉽게 회복되지 않을 붕괴를 겪고 있습니다."
계속된 승리에 고무된 볼셰비키는 커즌이 런던에서 평화협상을 열어 휴전을 맺자고 제의했을 때 이를 다시 무시했다. 스탈린은 영국의 제의를 비웃었다.
"나는 폴란드가 패배한 지금처럼 제국주의가 약했던 적이 없고 우리가 지금처럼 강했던 적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우리가 단호하게 대처하면 할수록 우리에게나 세계혁명에 모두 좋을 것입니다. 정치국의 결정을 알려주십시오."
하지만 폴란드에서의 전황은 러시아의 낙관과는 다르게 돌아갔다. 폴란드 침공에 반대하던 시절의 스탈린[41]이 경고한 대로 폴란드로 진격할 때 보급 문제가 심각해지기 시작했고 민족주의로 똘똘 뭉친 폴란드 노동자와 농민들은 러시아에 협조하기는커녕 러시아를 침략자로 인식하여 맹렬히 저항했다. 그리고 투하쳅스키는 전선에서 한참 떨어진 민스크에서 지휘하느라 전선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모든 것을 낙관했으며 폴란드인들이 수도 방위를 위한 힘을 비축하기 전에 싸움을 끝내야 한다면서 신속한 바르샤바 점령에만 맹목적으로 집착하고 있었다.

한편 피우수트스키는 한때 키예프 점령을 통해 대부분의 폴란드 정치가들로부터 지도적 역할을 인정받았지만, 그 키예프에서 참패하고 전세가 크게 불리해지자 권력이 약화되었다. 피우수트스키의 정치적 동맹자였던 레오폴드 스쿨스키 내각은 키예프 함락 전날인 6월 9일 사퇴했고, 27일 민족민주주의 진영의 브와디스와프 그랍스키 내각이 구성되었다. 그러나 그랍스키 내각은 7월 24일 다시 빈첸티 비토스 내각으로 교체되었다. 비토스 내각은 러시아로 사절단을 파견하여 평화협상을 시도했다. 러시아는 8월 10일 영국에 요구조건을 제시했다. 카메네프는 명목상 폴란드의 독립민족자결을 보장하긴 했지만, 요구조건의 내용은 사실상 항복 내지는 폴란드의 무장해제에 가까운 것이었다.[42]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 수상은 볼셰비키의 요구조건을 받아들였고, 영국 대사는 폴란드 정부에 내용을 전달했다. 14일 폴란드 사절단은 회담을 위해 투하쳅스키가 있는 민스크의 사령부를 방문했다. 사실상 멸망 직전에 몰린 폴란드였으나, 전황은 8월 12일부터 25일까지 계속된 바르샤바 전투를 기점으로 극적인 전환을 맞이하게 된다.

투하쳅스키가 이끄는 서부전선군은 폴란드군의 저항이 약한 바르샤바 북방에서 전선을 돌파, 서쪽으로 종심 깊게 돌진하여 바르샤바를 포위하려고 시도했다. 그러나 이것은 피우수트스키가 파놓은 함정이었다. 폴란드군은 의도적으로 바르샤바 북쪽에서 약하게 저항하여 투하쳅스키가 종심 깊은 공격을 실시하도록 유도한 뒤, 서부전선군의 허술한 남쪽 측면을 최정예 충격집단(Grupa Uderzeniowa)으로 들이받아 포위 격멸시키는 작전을 짰다. 붉은 군대는 그대로 함정에 빠져 300km에 달하는 남쪽 측면을 완전히 노출했다. 16일 피우수트스키가 직접 이끄는 2만여 충격집단이 측면을 파고들어 36시간만에 70km를 진격했다.[43] 뒤이어 거대한 재앙이 붉은 군대에 닥쳤다. 전선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서 상황을 빠르게 판단하지 못했던 투하쳅스키는 18일이 되어서야 전군에 퇴각 후 재집결하라는 명령을 하달했지만, 일선 부대에 명령이 너무 늦게 도착하거나 심지어 아예 전달되지 않는 경우도 있었다. 일부 부대는 폴란드군에 맞서 싸우다가 괴멸되었고, 다른 부대는 계속 서진하다가 퇴로마저 차단당했다. 서부전선군은 전투병력 14만 중 2만 5천이 전사하고, 6만 5천이 포로로 잡히는 대참패를 겪었다. 다른 3만여 명은 동프로이센으로 후퇴하여 그곳에서 억류되었다. 투하쳅스키는 막대한 피해를 입고 물러나야 했다.

후일 '비스와강의 기적'이라고 불린 바르샤바 전투의 승리를 두고 프랑스 군사절단의 막심 베이강이 폴란드의 작전을 입안하여 큰 승리를 거두었다는 소문이 퍼졌다. 특히 피우수트스키와 갈등을 빚던 민족민주주의 진영이 이런 주장을 했다.[44] 그러나 베이강이 인정했듯이, 당시 바르샤바의 작전은 폴란드가 입안한 것이었고, 전투에 참전한 병력도 전부 폴란드 병사들이었다. 물론 이전에 프랑스에서 건너온 폴란드 자원병(폴란드계 프랑스인들과 폴란드 출신 독일군 포로로 구성)과 각종 물자, 프랑스 장교들이 상당한 도움이 되기는 했지만, 이 승리의 주연은 단연 폴란드와 폴란드의 독립 영웅 유제프 피우수트스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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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르샤바 근방에서 폴란드군에게 노획된 붉은 군대 군기.

2.4. 전쟁 종반(1920.08-1921.03)

이것을 기점으로 전세는 다시 역전되어 폴란드에 유리하게 되었다. 피우수트스키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붉은 군대를 수차례 더 격파했다. 카메네프는 서부전선군과 남서부전선군에서 동시에 진격하여 상황을 타개하려 했으나 남서부전선군의 경우에는 폴란드뿐만 아니라 백군과도 싸워야 했으므로 두 전선의 조율은 무척 힘들었다. 무엇보다 남서부전선군에는 독불장군 스탈린이 있었다. 이미 바르샤바 전투가 벌어지기 전에도 스탈린은 리보프 점령 계획을 수립하여 군사적 영광을 차지하려 했고[45] 7월 22일 예고로프가 리보프와 루블린으로 진격함에 따라 서부전선군과의 조율은 불가능해졌다.

8월 2일 정치국은 남서부전선군을 둘로 나누어 절반은 폴란드와의 전쟁을, 절반은 우크라이나 방위를 맡겼으나 남서부전선군의 움직임은 없었다. 카메네프는 남서부전선군에 병력을 이동시키라고 지시했으나 스탈린은 이는 불가능한 명령이라며 노발대발했다. 이미 리보프에 투입된 남서부전선 병력은 바르샤바로부터 320킬로미터나 떨어져 있었고 늪이 가득한 습지 때문에 신속한 이동도 불가능했다. 거기에 폴란드 주민들의 저항도 극심했다. 스탈린은 카메네프의 명령을 거부하면서 그의 잘못된 명령으로 남서부전선군의 작전이 좌절되었다고 비난했다. 예고로프는 카메네프의 명령에 복종하려 했으나 스탈린은 작전 승인을 거부하고 리보프 공격에 매달렸다. 하지만 부됸니의 제1기병군이 인근에서 발생한 전투 때문에 빠지면서 더 이상 공격이 불가능해지자 8월 20일 스탈린은 리보프 공격을 포기했다. 이 시점에서 이미 서부전선군 전체가 궤멸된 상태였다. 설상가상으로 8월 말-9월 초 코마루프(Komarów) 전투에서 제1기병군마저 궤멸되었다. 1기병군의 잔여 병력은 9월 20일 폴란드 전선에서 철수했다.

이후 투하쳅스키와 트로츠키는 서부전선군의 궤멸이 스탈린이 멋대로 병력을 사용했기 때문이라고 비난했고 이후 이것이 정설처럼 알려졌으나 이는 명백한 책임 전가로 바르샤바에서의 패배는 상황 파악을 하지 못한 투하쳅스키가 지나친 낙관을 기반으로 무리한 바르샤바 공격을 지시했기 때문이었다. 스탈린에게 책임이 없진 않으나 그것은 투하쳅스키의 책임보단 현저히 작은 것이었다. 게다가 스탈린이 서부전선군의 작전에 협조했다 쳐도 보급망이 붕괴되고 도로도 형편없는 320킬로미터를 달려서 바르샤바의 전투에 스탈린의 병력이 투입되는 것은 불가능했다. 8월 19일 모스크바로 돌아간 스탈린은 크림의 브란겔을 무시하고 남서부전선을 무시한 중앙에 책임이 있다고 맹렬히 비난함으로써 정치적 입지를 고수했고 트로츠키가 반박했음에도 불구하고 정치국은 브란겔 전선을 주요 전선으로 인정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와 별개로 레닌과 트로츠키는 스탈린이 폴란드와의 전쟁에서 보인 태도가 적절치 않았다고 비난하면서 2주의 공식 휴가를 주었다. 격노한 스탈린은 9월 1일 정치국에 복귀하여 군사활동에서 물러나게 해달라고 요구, 자신의 충고를 받아들이지 않는 혁명군사위원회를 떠났다.

서부전선군을 전멸시킨 폴란드는 벨라루스 영토만이라도 확보하려 이후 엄청난 속도로 붉은 군대를 밀어붙였다. 9월 투하쳅스키는 1차대전 당시 독일군이 구축한 요새와 네만강 주변의 하천을 활용하여, 폴란드-리투아니아 국경선에서 폴레시에 습지로 이어지는 방어선을 새로 구축했다. 비록 바르샤바를 목전에 두고 파멸적인 패배를 겪긴 했지만, 투하쳅스키는 신속하게 병력을 재건했다. 9월 1일 병력은 7만 3천, 대포는 220문에 달했다. 이들은 바르샤바 전투의 잔존병력, 인근의 지원부대, 그리고 동프로이센에 억류되었다가 풀려나온 3만여 병력으로 구성되었다. 9월 투하쳅스키는 카메네프의 명령으로 다시 공세를 펼치려 했으나 12일 코브린에서 패배하여[46] 공세는 실패로 돌아갔다. 폴란드군은 그대로 네만강의 서부전선군을 공략하여 방어선을 완전히 무너뜨렸다. 20일부터 26일까지 벌어진 네만강 전투에서 서부전선군은 4만 이상의 피해를 입었고, 벨라루스 방면의 붉은 군대는 붕괴된 채 동쪽으로 그저 끝없이 퇴각했다. 폴란드군은 다우가바강까지 재진격하고 10월 중순 민스크를 점령했다.

한편 우크라이나 방면에서는 우크라이나 인민군[47]이 붉은 군대의 남서부전선군을 패퇴시키고 10월 빈니차 일대까지 진출했다. 우크라이나 인민군은 이후 우크라이나 방면으로 공세를 계획했지만, 공세를 시작하기 하루 전 붉은 군대에게 먼저 공격당해 다시 폴란드 영내로 퇴각했다. 이 시점에서 러시아와 폴란드 모두 경제가 파탄 직전이었으므로[48][49] 전쟁을 지속하는데 한계가 있었다. 러시아에서 긴급히 소집된 정치국 회의는 트로츠키가 폴란드와 타협해 강화조약을 체결하는 안을 제출하여 이를 통과시켰다. 러시아 내부에서도 무리한 전쟁을 주장한 레닌에 대한 비난이 거세졌다.

9월 22일 개최된 9차 당회의에서 레닌은 '엄청난 패배와 파멸적 상황'을 인정하고 자신이 폴란드를 그저 독일을 적화하기 위한 교두보로 여기고 얕보았다고 시인했다. 레닌은 "나는 군사학 지식이 있다고 조금도 자부하지 않는다."라면서 붉은 군대에게 불가능한 임무를 맡긴 것에 대해 자아비판했다. 트로츠키는 스탈린에게 책임을 돌리며 비난했고 리보프 공세에 대한 정보가 들어오면서 정치국은 그에 대한 비난으로 가득 찼다. 레닌 역시 책임을 전가하기 위해 스탈린의 전략적 오판에 대해 비판했다. 하지만 전쟁의 근본적인 책임은 트로츠키와 스탈린 모두 전쟁을 하기 어렵다고 경고했음에도 낙관에 차 전쟁을 계속한 레닌에게 있었다. 결국 당 회의에서 일부 당대표가 레닌에게 전쟁을 일으킨 책임을 물었다. 9월 23일 스탈린은 자신이 전쟁에 반대했음을 알리는 짧은 연설을 함으로써 자신을 변호했는데 변명거리가 궁색했던 리보프 공세에 대한 변명은 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스탈린은 폴란드 침공의 실패의 책임을 오랫동안 뒤집어쓰게 되었다. 스탈린은 이 원한을 오랫동안 잊지 않고 있다가 나중에 보복하게 된다.

2.5. 종전(리가 조약, 1921.03)

결국 양측은 일단 1920년 10월 12일 정전을 합의했고, 이후 협상에서 벨라루스를 절반으로 분할하여 서쪽은 폴란드에게, 민스크를 비롯한 나머지는 러시아가 영유하는 강화 조약을 맺었다. 이것이 바로 1921년 3월 체결된 리가 조약이다. 민스크를 폴란드가 러시아한테 양도하는 것도 합의시키기가 매우 어려웠는데, 피우수트스키는 민스크뿐만 아니라 키예프까지 달라고 요구했기 때문이다.

하여간 리가 조약 체결로 인해 폴란드-러시아 간 국경선이 합의됨에 따라 우크라이나 인민공화국은 멸망이 확정됐고, 우크라이나 인민공화국 정부는 국외로 망명했다.

3. 영향

사실 폴란드 정부는 이번 협상을 조금 더 끌고 갈 경우 당시 폴란드-볼셰비키 전선, 즉 벨라루스의 중추지 민스크를 포함한 100km 정도까지 더 동쪽 크레시 강토를 확장하는 이득을 볼 여지가 남아있었으나, 로만 드모프스키 등의 폴란드 민족주의자들은 비폴란드 민족들을 더 폴란드 강역 내로 편입시키지 않으려 했다. 이들은 또한 전쟁에 참여한 장성들이 전후 국민영웅으로 떠오르는 것을 막기 위해 멋대로 협상을 종결짓고 말았다. 덕분에 단독강화를 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믿었던 우크라이나 인민공화국은 공중에 붕 떠오른 새가 되어 소멸하고 말았으며[50] 우크라이나 영토에 살고 있던 수십만명의 폴란드인과 폴란드 영토에 사는 우크라이나인들 역시 졸지에 실향민이 되어버렸다. 한마디로 폴란드는 전쟁에서 이득을 보기보다 당장의 국가안전을 보장받는 것을 선택했다는 것인데 이런 문제는 곪아들어가 제2차 세계대전 기간 동안 스테판 반데라를 위시한 상호간의 증오범죄로 폭발해 수십만명의 학살 피해자를 낳고 말았다.

한편 폴란드는 러시아 외의 다른 접경국과도 영토 문제로 잦은 갈등을 벌였다. 대표적인 사례로 폴란드는 러시아와의 전쟁 기간 동안 한때 연합을 이루던 나라인 리투아니아의 수도 빌뉴스를 인구의 60%가 폴란드인이라는 논리로 그 일대를 괴뢰국화한 뒤 얼마 후 자국 영토로 편입시켰다. 당연히 리투아니아는 이 사건 직후 격분하여 즉시 폴란드와의 외교를 단절했다. 체코슬로바키아와는 교통의 요충지이자 석탄 주산지인 실레시아의 테셴의 영유권을 놓고 다퉜는데, 이 지역은 역사적으로 폴란드계가 대부분이었지만 지배 세력은 폴란드계-체코계-독일계를 오고간 복잡한 내력을 가졌다. 테셴 분쟁은 1919년 체코슬로바키아가 폴란드의 잠정 통치 지역을 무력점령하는 것으로 끝났지만, 훗날 폴란드는 1938년 뮌헨 협정 당시 1920년에 잃은 실지를 병합하는 것으로 보복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에 테셴 지역은 체코슬로바키아와 폴란드의 국경 조정으로 폴란드령 치에신과 체코령 체스키테신으로 다시 분할되어 1938년 이전 국경으로 돌아갔다. 이외에 슬로바키아령 야보리나, 토르스테냐도 폴란드에 잠시 병합되었다가 나중에 다시 슬로바키아령이 되었다.

추가로 이때 폴란드군은 붉은 군대를 대파하고 붙잡은 포로들을 학대하여 1만 5천-2만여 명이 수용소에서 사망했다. 소련 시절 카틴 학살 같은 만행을 저질러 놓고도 공산주의 시절은 물론[51] 공산주의가 몰락한 현재까지도 러시아가 사과를 거부하는 레퍼토리 중 하나가 이때의 포로 사망률이다. 하지만 이 전쟁에서 러시아 측에 붙잡힌 폴란드 포로들도 1만 5천-2만여 명이 사망했기에 적어도 포로 대우 측면에서는 러시아도 그렇게 자유롭지 못하다. 다만 당시 러시아는 국제적으로 고립되어 원조를 받기 힘들었으나, 폴란드는 서방 국가들의 적극적인 원조를 받았고 내부가 러시아 수준으로 혼란스러운 것도 아니었다.

소비에트-폴란드 전쟁은 새로이 탄생한 두 국가, 즉 소련과 폴란드가 각각 러시아인과 폴란드인에게 새로운 국가의식을 확고히 심어주고 서로에 대한 적대적 관념을 고착화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소비에트-폴란드 전쟁 이전까지 러시아와 공산당은 외세에 무릎을 꿇고 피를 흘리게 만든 배신자로 여겨졌으나, 폴란드와의 전쟁을 기점으로 유럽 근방에 대한 군사적 능력을 잃은 백군, 멘셰비키 파벌들을 대신해 러시아의 수호자로 올라섰다. 비록 패배했을지언정 우크라이나가 완전히 폴란드에게 넘어가는 걸 막아낸 것을 본 러시아 사회는 소비에트 적군을 배신자들의 군대가 아닌 새로운 러시아의 수호자로 여기게 되었다. 즉 러시아 시민들이 소비에트 정권의 영토 수호 의지를 목격하게 된 것이다. 폴란드 역시 소비에트-폴란드 전쟁에서 코 앞까지 들이닥친 미하일 투하쳅스키의 서부전선군을 분쇄한 유제프 피우수트스키의 '비스와강의 기적'은 그를 명백한 폴란드의 영웅이자 지도자로 만들었고, 이는 공산주의의 위협으로부터 승리한 폴란드 민족주의의 상징이 되었다. 즉 폴란드에게 있어서 몰락과 식민화, 해방 이후 새로운 신화로써 우뚝 서게 된 것이다.

그러나 러시아와 폴란드 모두 이 전쟁을 치름으로써 서로에게 큰 원한을 가지게 되었다. 특히 러시아에게 있어서 붉은 군대의 연쇄적인 붕괴는 충격이었고, 미하일 투하쳅스키레프 트로츠키는 스탈린에게 책임을 돌렸다. 이로 인해서 이뤄진 연속적인 스탈린 비난, 그리고 소련 군부의 일방적인 투하쳅스키와 트로츠키 편들기는 이후 스탈린이 군부 대숙청을 벌이는 간접적 요인이 된다.

끝으로 우크라이나벨라루스는 이번 전쟁의 진정한 패배자가 되었다. 오늘날 우크라이나 영토에는 우크라이나 인민공화국서우크라이나 인민공화국이라는 2개의 우크라이나계 국가가 존재했다. 양측은 1919년 1월 22일 즐루키 협정(Act Zluky)을 합쳐 고대하던 우크라이나 통일 직전까지 갔으나 우크라이나는 러시아에게, 서우크라이나는 폴란드에게 침공당해 거의 멸망 직전까지 갔다. 그리고 소비에트-폴란드 전쟁을 계기로 우크라이나는 아예 분단되어 독립국가를 건설할 기회를 상실하고 또다시 외세의 지배를 받아야 했다. 벨라루스도 원래는 벨라루스 인민공화국이라는 독립국이 존재했으나 마찬가지로 분단되어 외세의 지배를 받았다. 이 두 나라는 1991년 소련 해체를 계기로 비로소 분리독립하며 독립국가를 수립할 수 있었다.

4. 결론

폴란드는 최소한 당장의 국가존속은 보장받을 수는 있었다. 그러나 폴란드를 지배했던 독일과 소련은 여전히 존재했고, 이러한 문제점을 인지한 폴란드는 핀란드에서 루마니아까지 1차 세계대전으로 독립한 신흥국가들을 아우른 미엥지모제(Międzymorze)라는 연방국가로의 개편을 검토하였지만 이미 서로의 민족주의적 괴리를 재확인하는 결과만 낳았을 뿐, 신생국들의 연합으로는 실질적으로 발전하지 못한 채로 이론적인 차원에서 머무르고 말았다.

또한 서부 우크라이나 지역에서 급진 우크라이나 민족주의가 발흥한 계기가 된 전쟁이며[52]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 조직(OUN)은 2차 세계대전 직전까지 폴란드를 상대로 파괴, 암살공작을 벌였다. 2차대전 발발 후로도 스테판 반데라가 이끄는 OUN-B 분파는 나치에 협력하여 폴란드인과 유대인을 상대로 무자비한 학살을 벌였다.

5. 주요 전투



[1] 소비에트-폴란드 전쟁[2] 폴란드-볼셰비키 전쟁(폴란드어)[3] 폴란드-소비에트 전쟁(폴란드어)[4] 폴란드-소비에트 전쟁(폴란드어). radziecki 자체가 러시아어 советский의 번역차용이다.[5] 1919-1921년 폴란드-러시아 전쟁(폴란드어)[6]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러시아, 리투아니아, 라트비아, 폴란드 일대.[7] 1920년 9월 1일 기준. 이 중 실제로 전선에 배치된 병력은 34만 8,284명이었다. 전쟁 내내 폴란드와 러시아는 보급 부족에 시달렸으므로 동원된 인력에 비해 실제 병력이 훨씬 적었다. 이 병력은 또한 폴란드와 동맹한 우크라이나 인민공화국을 비롯한 다른 동맹군의 병력을 제외한 것이다.[8] 1920년 여름 기준. 러시아 내전 당시 붉은 군대의 규모는 1920년 11월 1일에 542만 7,273명으로 피크를 찍었다. 숫자만 비교하면 폴란드군 총 병력의 6배에 달하지만, 볼셰비키가 상대한 적은 폴란드뿐만이 아니었으므로 실제로 폴란드 전선에 배치된 병력은 폴란드의 3배 정도였다.[9] 후술할 각 피해 유형을 합산하면 총 25만 1,329명에 달하지만, 이 피해는 폴란드 독립 직후(1918년 11월 1일-1920년 12월 31일) 폴란드가 주변국과 치른 모든 국경분쟁의 피해를 합산한 것이다. 레흐 비시첼스키에 따르면 이 중 90%가 대소전쟁에서 발생했다. 탈영을 제외한 폴란드군의 피해를 합산하면 212,420명인데, 그 중 176,814명(34,681명 전사, 94,291명 부상, 47,842명 실종)이 1920년에 발생했다. 특히 실종자는 거의 대부분 대소전쟁에서 붙잡힌 포로들이었다.[10] 포로 중 2만-2만 5천여 명은 폴란드 측으로 전향했다. 포로가 총 8만이라는 주장도 있으나 이 수치는 전후 소련으로 귀환한 포로의 규모이다. 수용소에서 사망한 포로는 1만 5천-2만에 달했고, 고국으로 귀환을 포기한 일부는 폴란드에 정착했다.[11] 폴란드한자음차하면 '파란(波蘭)'이라고 한다.[12] 폴란드어: Wojna polsko-bolszewicka[13] 소련, 즉 소비에트 '연방' 설립 이전 시점이라 이렇게 칭한다.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이 같은 편으로 참전했지만 아직 하나의 연방으로 묶이지는 않은 상황이었다.[14] 정확히는 폴란드 제2공화국과 우크라이나 민족주의 세력인 우크라이나 인민공화국이 같은 편으로 참전.[15] 그냥 연방 영토가 아니라 '폴란드 왕관령', 그러니까 폴란드 국왕의 직할영토였다.[16] 정확히 말하면 원래는 코자키 장교단이나 성직자, 지식인 위주로 우크라이나 민족정체성이 이미 어느정도 뿌리내린 상태였고, 19세기 말부터는 우크라이나 일대의 도시화와 공업화가 진척되면서 이 정체성이 기층 민중(노동자, 농민)에게 뿌리내리기 시작했다.[17] 1919년 1월 6일 러시아가 설치한 괴뢰국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과 혼동하지 말 것.[18] 당시 동원 가능한 부대는 키예프에서 볼셰비키의 봉기를 막아야 했기 때문이다. 결사대원들은 지금도 우크라이나 민족영웅으로 추앙받고 있다.[19] 10월 혁명 당시 볼셰비키가 자력으로 장악한 도시는 페트로그라드와 모스크바가 전부고 나머지는 현지 행정부한테서 정변을 승인받은 게 고작이었다.[20] 독일 제국,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러시아 제국.[21] 혈연적 공동체가 아닌 말 그대로 우크라이나에 사는 모든 민족을 의미한다.[22] 볼셰비키가 막장스럽기 그지없는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에 서명한 이유 자체가 곧 독일 제국이 붕괴될 테니 그때 가서 무효화 때리면 그만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23] 당시 국명은 벨라루스 인민공화국.[24] 당시 국명은 우크라이나 인민공화국.[25] 벨로루시 SSR은 얼마 후 또다른 괴뢰정권인 리투아니아 SSR과 합병하여 리투아니아-벨로루시 SSR을 성립하지만 폴란드에게 패배하고 볼셰비키가 리투아니아의 독립을 인정하면서 다시 벨로루시 SSR로 환원되었다.[26] 라트비아와 리투아니아도 각각 동년 1월 3일과 5일에 수도 리가빌뉴스가 함락당하고 소비에트 괴뢰정권들이 설치되며 국토 거의 대부분이 점령당하는 등 멸망 직전까지 갔다가 살아남았다.[27] 원래 오늘날 우크라이나의 중앙부만 통치하던 우크라이나 인민공화국이었으나 이 즈음에 동부 갈리치아에서 민족자결을 선포한 동포국가 서우크라이나 인민공화국과 통일하여 드니프로강 서안 전역을 통치하게 되었다. 그런데 서우크라이나가 대(對)폴란드 전쟁에서 패배하면서 얼마 안 가 동부 갈리치아를 상실하고 만다.[28] 3월에 반격작전을 펼쳐 8월 말 키예프를 탈환하는데 성공하지만 동시기에 모스크바로 진공하던 안톤 데니킨의 남러시아 백군에게 키예프를 내주고 만다. 거기에 군인 대부분이 티푸스에 감염되면서 군대가 거의 붕괴되고 말았다. 폴란드에게 원조를 요청하는 1920년 3월에 이르면 우크라이나 인민공화국은 우크라이나 서부의 도시 카미야네치포딜스키 인근만 간신히 통제할 정도로 세력권이 쪼그라들게 된다.[29] 폴란드, 리투아니아, 벨라루스, 러시아. 여기서 벨라루스가 나온 이유는 벨라루스 인민공화국도 자국을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후신으로 간주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리투아니아 대공국은 인구 대부분이 루스인인데다 행정언어도 루테니아어를 사용했다. 러시아도 벨라루스를 멸망시키고 괴뢰국인 벨로루시 사회주의 소비에트 공화국을 설립하여 우회적으로 영토분쟁에 개입했다.[30] 오늘날 벨라루스 서부에서 발원하여 리투아니아 중서부를 흐르고 쿠로니아 석호로 빠져나가는 국제하천.[31] 이때 리투아니아에서 폴란드 측에 반환을 요구했다가 씹혔다는 일화가 있다.[32] 이때 피우수트스키는 정치적으로 잡음을 겪었다. 피우수트스키는 이때 폴란드의 정복자 이미지를 지우기 위해 전(前) 리투아니아 대공국이라는 명칭을 추가한 선언문을 해당 지역 주민들에게 포고했는데, 이때 피우수트스키의 정적인 민족민주주의당(Narodowa Demokracja)은 "지금 뭐하냐? 리투아니아 대공국인지 뭔지 생까고 그냥 우리나라 영토라고 했어야지!"라고 비난하며 피우수트스키를 향해 반역자 운운하기까지 했다(...).[33] 드니프로강의 지류. 1812년 11월 3일 러시아 원정에서 패배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프랑스군이 도하하기 직전 러시아군에 궤멸된 전투가 벌어진 곳이기도 하다.[34] 오늘날 벨라루스와 우크라이나 사이에 위치하며, 서로는 폴란드 국경에서 동으로는 러시아 국경까지 이어진 거대한 습지.[35] 실제로 데니킨은 폴란드는 몰라도 우크라이나의 독립만큼은 절대로 인정하지 않으려고 했다. 이 양반이 모스크바로 총공세를 벌이기 직전 밑바닥을 다지겠답시고 벌인 일이 우크라이나의 우크라이나 인민공화국마흐노우슈치나 세력을 공격한 것이었다. 마흐노우슈치나는 이후 모스크바 인근까지 진격한 데니킨의 보급로를 개발살내며 처절히 복수한다.[36] 빌뉴스 함락 이틀 전에 리투아니아와 맺은 강화조약에 따르면 러시아는 빌뉴스를 리투아니아에게 넘겨주기로 되어 있었지만 무시하고 넘겨주지 않으려 했다. 심지어 8월에는 아예 리투아니아 정부마저 뒤엎어버리려 했지만, 바르샤바 전투에서 대패한 직후인 8월 26일 빌뉴스를 리투아니아에 반환한다.[37] 당장 보급과 정비 상태가 매우 좋지 않았고 투입할 수 있는 병력도 전성기 러시아 제국이 오스트리아 전선에 100개 사단 이상을 투입할 수 있었던 반면에 러시아는 폴란드로 35개 사단만 투입할 수 있었다.[38] 독일은 제 2제국 시절부터 사회주의 사상의 중심지였으며, 특히 당시 바이마르 공화국에서는 전쟁 책임론과 사회적 혼란에 힘입어 극좌파의 봉기가 산발적으로 이어지고 있었다.[39] 사실 군사 원조 자체는 폴란드 독립 직후부터 프랑스에 의해 계속 이루어지고 있었다. 나폴레옹 전쟁 이래로 폴란드인들이 계속 복무해 왔던 인연으로 프랑스는 폴란드에 대하여 매우 우호적인 입장이었고, 그래서 1차 대전중 프랑스군에 복무한 폴란드인(약 20만 명에 달했다)들을 종전으로 남아도는 잉여 군수 물자와 군사 고문단과 함께 본국으로 돌려보내 신생 폴란드군을 구성할 수 있도록 했다. 그래서 당시 폴란드군의 사진이나 기록화를 보면 죄다 프랑스 군복을 입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훗날 불의 십자가단, 프랑스 사회당을 지도한 프랑수아 드 라 로크도 폴란드군 고문 출신.[40] 정작 레닌의 이러한 구상에 대해 다른 볼셰비키들은 회의적으로 보았고 특히 민족 문제에 정통한 스탈린은 말도 안되는 일이라면서 설령 독일의 적화가 가능해도 독일과 러시아의 민족 문제 때문에 독일이나 폴란드가 연방에 가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하지만 소련은 독재국가가 되어있었고, 레닌의 고집을 막는 건 불가능했다..[41] 1920년 1-2월 경[42] 폴란드군의 병력을 5만으로 제한하고, 군수산업을 해체하며, 이 병력을 무장시키는 데 필요한 무기를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볼셰비키에게 양도하도록 했다. 또한 폴란드에 새로운 병력이나 무기 반입을 금지하고, 비아위스토크와 발트 해를 잇는 철도를 러시아가 교역 목적으로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도록 했다. 폴란드의 동부 국경은 당연히 커즌 라인에 맞게 조정되며, 폴란드군은 동부 국경으로부터 최소 50베르스타(약 53km) 떨어져야 했다. 무엇보다도 '민병대'를 조직하도록 했는데, 이는 폴란드 노동자들을 무장시켜서 붉은 군대에 호응하게 하겠다는 속셈이었다.[43] 훗날 독일 국방군전격전 진격 속도가 이와 비슷하니 거의 무인지경을 내달렸다고 봐도 된다...[44] 심지어 성모 마리아께서 폴란드에게 기적을 안기셨다는(...) 주장마저 나왔다.[45] 초기 입장과 달리 1920년 4월 레닌의 전쟁 확대 계획에 찬성하던 스탈린은 6월이 되자 폴란드 점령군에서 이탈하여 독자적인 길을 갔다.[46] 바르샤바 전투와 똑같은 방법으로 피우수트스키가 이겼다. 초반에 패배를 가장하여 투하쳅스키를 끌어들인 후 후방을 기습하여 퇴로를 차단했다.[47] 우크라이나 인민공화국의 정규군. 원래는 10만이 넘는 병력을 자랑했으나 전쟁과 전염병으로 큰 타격을 입어 이 시점에서는 2개 사단 이하로 축소되었다.[48] 이 당시 러시아 내전이 절정으로 치닫고 있었으므로 폴란드와 러시아가 화평을 맺었다는 썰이 있는데, 1920년 8월 당시 러시아 국내의 유의미한 백군 세력은 크림반도에서 질식 직전인 표트르 브란겔의 남러시아군 외에는 전무했다. 그 남러시아군마저 6월 말 크림반도와 이어진 남단부 우크라이나에 제한적인 공세를 펼친 것 이외에는 아무 영향도 미치지 못했으며, 폴란드와 볼셰비키가 정전에 합의한 직후 볼셰비키의 총공세를 받아 11월에 크림반도를 버리고 철수했다. 북부전선은 이미 1919년 10월에 종료되었고, 동부전선(시베리아 전역)에서 볼셰비키를 상대한 러시아국도 1919년 말 사실상 붕괴되었고, 그 지도자 콜차크 처형이 1920년 2월에 있었다. 이후로는 백군 잔당이 저항하거나 반볼셰비키 농민 봉기가 일어나는 수준에 그쳤다. 즉 백군과의 전투는 폴란드와의 전쟁에 별다른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49] 그리고 러시아 내전의 향방이 대폴란드 전쟁에 별 영향을 미치지 못했듯, 대폴란드 전쟁도 러시아 내전의 향방에 별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폴란드와 한창 전쟁질하던 중에나 휴전한 이후에나 볼셰비키는 혁명 수출 잘만 했다. 1920년 말에도 자캅카스 침공하여 이듬해 초에 해당 지역의 독립국가들을 모두 멸망시키고 점령을 이루어냈다.[50] 폴란드도 일말의 양심은 있었는지 강화조건에는 내각 요인들을 양도하겠다고 했지만 따로 신변을 확보해놓고 행방불명되었다고 우기면서 일을 흐지부지 만들었다.[51] 잘 안 알려져 있지만, 소련의 위성국가였던 폴란드 공산정권도 1970년대부터 지속적으로 소련에 대해 카틴 학살에 대한 진상규명 및 사과를 요구했다.[52]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의 근원은 18세기 코자키 민족주의나 타라스 셰우첸코의 민족담론에서 시작되지만, 우익 민족주의, 당시 이탈리아에서 막 시작된 파시즘과 유사한 연합체로 2차대전 악명을 떨친 서부지역 우크라이나 민족주의는 이 전쟁 결과 영향력을 확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