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03 17:10:07

송광민/선수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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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아마추어 시절2. 프로 경력
2.1. 한화 이글스 시절
2.1.1. 2006 ~ 2010년
2.1.1.1. 시즌 중 군입대
2.1.2. 2013 시즌2.1.3. 2014 시즌2.1.4. 2015 시즌2.1.5. 2016 시즌2.1.6. 2017 시즌2.1.7. 2018 시즌2.1.8. 2019 시즌2.1.9. 2020 시즌
3. 은퇴

1. 아마추어 시절

한화 이글스의 연고지인 대전광역시 태생으로 어린 시절부터 빙그레-한화의 팬이었으며, 대전 신흥초등학교 4학년 때 동네 친구 정민혁과 함께 야구를 시작했고, 지역 야구 명문인 공주고등학교를 졸업했다.

2002년 한화의 2차 10순위 지명을 받았고 동국대학교에 입학하여 야구부 주전으로 활동했다.[1]

2. 프로 경력

2.1. 한화 이글스 시절

2.1.1. 2006 ~ 2010년

2006년 동국대학교를 졸업하고 한화 이글스에 입단했으며, 2군 남부리그에서 독보적인 3할 타율을 기록한 후 8월 1군에 콜업되며 이후 꾸준히 1군에 남아 김민재와 더불어 한화의 유격수 자리를 지켰다. 2006 시즌 후에는 김대우, 이현승 등과 함께 대륙간컵 야구 대회에 국가대표로 참가했다.

리그내 빅뱃 유망주였으나, 베테랑과 안정된 수비를 선호하는 김인식 감독으로 인하여 출전기회는 보장받지 못하였다.

송광민이 두각을 나타낸 건 2009 시즌. 김태균이범호가 모두 부상으로 부진하였고 마지막 시즌을 소화하던 김민재의 노쇠화가 가시화되는 가운데에서도 이도형과 함께 한화 타선에서 고군분투했으며, 내야 수비를 안정시키는데도 크게 기여했다. 이 때의 활약으로 소속 팀이 정규 시즌 꼴찌였음에도 2009 시즌 KBO 골든글러브 후보에 이름을 올렸다. 다른 경쟁자들에 비하면 출루율이 부족하고 삼진 비율이 높아 살짝 타격이 부족했으나 타율 0.261에 109안타 14홈런 43타점은 결코 만만치 않은 수준이며, 부족한 정교함을 상당한 장타력과 빼어난 수비로 만회하였다.

2009 시즌이 끝나고 이범호가 팀을 떠나자 3루수의 공백이 생긴 한화 이글스는 그에게 이범호의 등번호 7번을 주었고, 송광민은 이범호의 포지션이었던 3루수로 자리를 옮기게 되었다. 그리고 동국대학교 시절 은사인 한대화 감독과 재회하게 되었다. 한화 역사상으로도 손꼽히는 암울한 시즌이었던 2010년에도 송광민은 뎁스가 바닥난[2] 한화 타선 속에서 그나마 기본적인 타격과 함께 안정적인 3루 수비로 이범호의 빈 자리를 그럭저럭 메워 주었다. 한화 팬들은 송광민의 2010 광저우 아시안 게임 대표 선발을 기원하며 광저우이라는 별명을 붙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2010년 6월부터 갑자기 실수가 잦아지고, 타석에서도 영 힘을 쓰지 못해서 한화 팬들에게 미친 듯이 까였는데, 알고 보니...[3]
2.1.1.1. 시즌 중 군입대
한화 이글스는 2010년 6월 27일, 송광민이 시즌 중에 입대를 하게 되었음을 발표했다. 해당기사. 이 기사대로라면 송광민 본인의 책임이 크다. 지금이야 군복무 기간도 줄고 해서 유망주들이 시즌 중 입대하는 경우가 많아졌지만 이건 방금전까지 1군에서 멀쩡히 주전으로 뛰던 선수가 덜컥 입대를 하는 거니 차원이 다른 문제다.

그나마도 빨리 병역을 해결하고 나왔으면 그나마 나았을텐데, 발목에 문제가 있어서 훈련소에서 퇴소를 당했고, 그 발목 부상의 여파로 수술과 재활을 거쳐야 했고 2011년 6월에야 간신히 공익근무 입대를 했다. 총 3년을 날린 셈.해당기사

공익 시절 죽어라 몸을 만들고 연습하며, 서산 야구장 완공 뒤에는 소속기관인 교육지원청의 배려로 대전에서 서산으로 근무지를 옮겼다.

그가 복무를 시작하게 된 이후 한화 이글스의 3루는 정말 답이 안 나왔다. 그리고 김태완에 이어 송광민까지 빠져버린 한화 타선은 붕괴되다 못해 나락으로 완전히 빠져 버렸다. 그나마 투수진이 여러 젊은 투수들의 합류와 중고참들의 부활 또는 각성으로 조금씩 정상화가 되어가고 있는데 반해, 타선은 점점 심각해지면서 이미 바닥이라고 생각했지만 그 밑에 더한 바닥이 있다는 걸 보여 주고 있다. 그나마 2011년은 최진행이 홈런기계로 발전하고 시즌 중에 카림 가르시아가 왔고, 한상훈고동진도 각성해서 조금은 나은 편이기는 했으나 2012년에는 말짱 도루묵.

2.1.2. 2013 시즌

시즌 중 입대라는 초유의 사태의 장본인답게 시즌 중 소집해제되어 팀에 복귀했다. 6월 19일 정식으로 선수 등록을 마치고 선수단에 합류. 등번호 뺏긴 하주석 지못미

파일:6igmKrw.jpg
해당기사
29세에 공익으로 가서, 약 27년 근무 후 환갑을 바라보는 꽃다운 나이 56에 복귀(...) 공무원 연금 나오겠다

6월 20일, LG와의 2군 경기에서 제대 후 처음으로 공식 경기에 투입. 결과는 4타수 3안타 3타점. 3안타도 2점 홈런 1개에 2루타 2개로 다 장타라서 한화 팬들을 설레게 하고 있다. 수비력도 좀 더 지켜봐야겠지만 최소한 두 경쟁자보다는 낫다는 평가.

곧바로 1군에 콜업되어 유격수나 3루수 포지션에서 뛰었으며 7월 11일에는 더스틴 니퍼트를 상대로 복귀후 첫 홈런을 만루홈런으로 쳐냈다. 프로 데뷔 첫 만루홈런.

이후로는 유격수 포지션으로 고정되어, 3루로 옮겨간 이대수, 2루의 한상훈과 함께 한화 내야수비를 급격히 안정화시켰다. 물론 간간히 꼴칰스러운 수비도 나오긴 하지만 말 그대로 간간히. 내야수비가 안정화되면서 루키 투수가 많은 한화 투수진에 보탬이 되고 있다.

또한 장타력을 상실한 김똑딱을 대신하여 한화 중심 타선에서 장타를 날려대고 있다. 홈런수는 5개로, 시즌 초부터 뛴 최진행의 8개, 김태균의 7개의 뒤를 이어 3위다. 6월 말에 복귀한 타자가 팀내 홈런 3위에 1, 2위와 숫자차이도 얼마 안난다. 때문에 8월 말 김태균이 이탈해도 팬들은 차라리 잘 되었다고 하는 중.

그 기세를 이어 8월 30일 롯데와의 경기에서 데뷔 후 처음으로 4번타자로 선발출장하였다. 성적 또한 기대에 부응하여 2점 홈런 하나 포함 4타수 2안타 3타점. 하지만 이날 팀은 6:4로 패배.

이후로도 3번, 4번타자로 출장하고 있으나 타격감이 점점 떨어지는 모습이다. 김태균, 최진행이 다 빠지고 김태완은 여전히 헤매고 있는 상황에서 팀 타선의 중심을 잡아야 하는 상황이기에 부담이 되는 면도 있을듯.

9월 13일 NC 다이노스와의 경기에서 5타수 1안타 1홈런을 기록하며 시즌 7호 홈런을 기록했다. 시즌 중인 6월에 콜업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현재 최진행에 이어 김태균과 함께 팀내 홈런 공동 2위를 차지하고 있다. 8홈런의 최진행이 이미 시즌 아웃된 상황이고, 7홈런의 김태균 또한 여전히 부상으로 출장을 하고 있지 못한것을 보면, 시즌 끝날때쯤엔 팀내 최다 홈런선수가 될 것이 유력한듯...했으나 김태균이 10홈런을 침으로써 팀내 홈런 3위에 머물렀다.

시즌 최종 성적은 67경기 .261 64안타 7홈런 33타점 18볼넷 62삼진 6실책 .322 .400 .722를 찍으며 3년만에, 그것도 공익으로 시즌 중반에 복귀한 것 치곤 대성공을 거뒀다. 다만 여전히 선구안이 시망이라는 것을 증명해 주었다.[4]

2.1.3. 2014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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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균, 펠릭스 피에와 함께 타선을 지탱하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

2.1.4. 2015 시즌

3월 12일 시범경기에서는 놀랍게도 좌익수로 출장했다(!). 유격수 수비는 생각보다 별로라는 것이 2014 시즌에 입증되었고, 그의 포지션인 3루수에는 거포 자원 김회성이 겹치다보니 김성근 감독이 스프링캠프 기간동안 포지션을 전환시켰다고. 생각보다 괜찮은 수비[5]최진행은 까였다.

시즌 시작 직후에는 부상으로 출장하지 않다가, 4월 29일 KIA와의 경기에서 8번 좌익수로 선발 출장했다. 그 날 경기에서 타격은 3타수 3안타 1타점으로 괜찮은 모습을 보여줬으나 수비에서 본헤드 플레이를 2번이나 저지르며 실점의 원인이 되었다. 이 날 경기 이후 팔꿈치 통증으로 다시 엔트리에서 말소되었다. 이후에도 나아지지 않아 8월 25일 일본으로 건너가 이태양이 수술을 받은 병원에서 토미존 수술과 뼈 사이 신경을 옮기는 수술을 함께 받으며 잔여 시즌 동안 재활하게 되었다.

2.1.5. 2016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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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천재로 불리며 팀 타선의 핵심으로 활약했다.

2.1.6. 2017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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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7. 2018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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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7.1. FA
시즌 후 FA신청을 했으나 무조건적인 온정주의를 거부하는 프런트 때문에 협상이 장기화된 상태다. 일각에서는 여러가지 옵션이 붙은 계약을 제시받았다는 말들이 나오는데 출루율도 있는 것으로 추정.[6]

결국 해를 넘겼다. 박종훈 단장은 "선수들이 FA를 선언했다면 팀을 나갈 수도 있다고 생각해야 한다" 할 정도로 FA에 굉장히 야박한 편인데, 협상은 계속 제자리걸음인 상황.

그러나 1월 7일 저녁에 올라온 인터뷰 단 한번으로 송광민에 대한 일말의 긍정적인 감정마저 다 사라져 버렸다. KBS와의 인터뷰에서 "나이 먹은 사람들은 FA 선언하지 말고 죽으라는 소리지. 보상 선수만 없어도 저희 아무 데나 갈 수 있어요."라는 폭탄 발언을 해버린 것이다.[7] # 자신이 이적하지 못하는 것은 순전히 제도 때문이며 제도만 아니었으면 자신을 받아줄 팀은 얼마든지 있을 것이라는 자신감을 표현한 것인데, 시즌 중에도 감독과 트러블을 빚은 선수가 이런 발언을 한다는 것은 팀에 대한 불만 및 낮은 충성도를 명백히 보여준다고밖에 해석할 수 없다. 그리고 그 다음날 선수들의 인터뷰가 모두 삭제되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송광민의 발언은 짤방과 보이스리플로 이미 박제된 지 오래라 송광민에 대한 이미지는 FA 선언 이후 싸늘하게 돌아설 정도였다.

결국 1월 27일 한화 이글스와 2년 최대 16억에 FA 계약을 맺었다.# 계약금 3억에 연봉 2.5억, 옵션 연간 4억이다. [8] 팬들은 저렇게 대우를 해줬는데도 저런 발언을 했냐며 의아해하는 반응.

하지만 2019년과 2020년 모두 성적이 나빴기 때문에, 옵션이 공개되지 않았지만, 일반적이지 않게 특별히 쉬운 옵션[9]을 계약했던 게 아닌 이상, 옵션 금액 대부분은 받지 못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2.1.8. 2019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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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9. 2020 시즌

5월 5일 SK와의 시즌 개막전에서 4타수 3안타 2득점 중 2루타를 두개나 때려냈으며, 두개의 2루타 모두 득점으로 연결되며 승리에 크게 기여했고, 5월 6일 개막 2차전에서는 3타수 2안타 1홈런으로 9회초 2사 상황에서 하재훈의 144km/h 직구를 받아쳐 홈런을 만들었다.[10]

5월 7일에 열린 3차전에서도 5타수 3안타 2타점으로 불방망이를 이어갔다. 특히 6회초에만 두 차례 타석에 들어서 선두타자 안타로 출루했고, 타순이 한 바퀴 돌고 다시 들어선 2사 만루에서는 승부에 쐐기를 박는 2타점 적시타를 터트렸다. 여러 번의 호수비는 덤.

하지만 SK전 시리즈 이후 언제 그랬냐는듯 22타수 1홈런을 기록중이다. 5월 16일 기준 19타수 연속 무안타, 무볼넷 행진을 이어가며 아름다운 1주일은 끝나버렸다.

5월 26일 무안타 1병살을 기록하면서 리그 병살 1위를 기록하였다. 중요한 상황에서 단 2구만에 병살을 치면서 은퇴식이고 뭐고 빨리 쫓아내라는 반응이 대부분이다.

5월 29일 SK전에서 5타수 무안타 2삼진을 기록하였다. 특히 9회 초 턱밑까지 추격한 상황에서 마무리 타자 삼진을 당하면서 폭풍같이 까였다. 그와중에 WAR*는 마이너스인건 덤.

5월 30일 SK전에서 치명적인 실책으로 동점을 허용한것도 모자라 2타수 무안타로 이쯤되면 대체 무슨 생각으로 쓰는건지 궁금할정도.

5월 한달동안 보면 기껏 치는 것도 (결과적이지만) 역전되어 의미가 퇴색되는데다가 거의 대부분은 기회가 왔을 때 병살, 삼진, 뜬공으로 기회 날리는 것도 한두번이 아니다. 그러면서도 대체제가 없었기 때문인지 아니면 그냥 넣는건지 감독이라는 사람은 3,4,5번 중 한 곳에 무조건 넣고 본다. 그렇다고 실책을 안 하는 것도 아닌데다가 실책 후 실없이 웃으면서 팬들의 화를 배로 만들고 있다.

최원호 감독 대행이 부임한 후 2군으로 내려갔다.

야구부장 채널에서 송광민을 비롯한 한화의 노장 선수들이 야구도 못하면서 입만 댓발 나와서 팀 분위기를 망쳤다는 사실을 밝히면서 송광민에 대한 비판이 커지고 있다.

이후 6월 16~18일 SK퓨처스 상대로 10타수 6안타 6타점을 쓸어 담으며 노시환의 심각한 부진이 계속되면 1군에 올라오려는 시동을 거는 듯 하다.

6월 28일 KT전 쿠에바스의 공을 받아쳐 투런홈런을 쳤다.

7월 3일 두산전, 1:0으로 팀이 앞서있는 상황에서 7회말 무사 1루 상황에서 정수빈이 번트를 대 뜬 공을 기가 막히게 잡아내 5-3 더블아웃을 만들어냈다. 그러나 아쉽게도 불펜이 불을 지르면서 팀은 2:1로 패배.

7월 7일, 11회 말 5:4로 팀이 리드당하던 중 2사 1.2루에서 동점 2루타를 쳐냈다. 그러나 경기 이후 어깨 통증을 느끼면서 8일 말소되고 말았다.

8월 15일, 0대 0 주자 1,3루에서 대타로 나와 시원한 병살타를 쳤다. 스탯티즈 기준 병살타 9위, 심지어 다른 선수들은 300타석 이상 타석에 들어서서 송광민과 비슷한 수치를 기록하고 있는데 송광민은 고직 134타석만에 9개의 병살타를 만들어냈다.

1,000경기 출장을 달성했다.

8월 21일 kt전에서 도망가는 쓰리런으로 팀의 5대 1 승리를 이끌었다.

8월 25일 대타 타석에서 병살을 치며 1사 만루의 기회를 제대로 걷어차 버렸다. 158타석 11병살이라는 엄청난 병살 기록을 계속 이어나가고 있다.

8월 26일 7회 초 1사 1, 2루 상황에서 대타로 나와 초구를 쳐 병살을 만들어내며 연이틀 대타병살이라는 놀라운 기록을 작성하고 159타석 12병살이라는 대기록을 또!!! 이어나가게 되었다.

8월 27일 1회 1사 1루 상황에 3번 타자로 나와 병살을 때려내며 160타석 13병살이라는 엄청난 기록과 함께 현재 시즌 병살 2위라는 업적도 달성하게 되었다.

9월 5일 7회말 2사 1루에서 노수광의 대타로 나왔으나 삼진으로 물러났고, 우익수 임종찬으로 교체되었다.

9월 6일 KIA전에서 1회부터 수비실책으로 1점을 내주더니 강재민이 등판한 이후 평범한 1루 땅볼을 잡지 못해 강재민에게 3자책을 안겨주었을 뿐만 아니라 공격에서도 삽질을 하면서 무려 7타점을 해먹었을 정도로 최악의 폼을 유지 중이다.

9월 8일 삼성전에서 10회초 2사 만루에서 지명타자 이성열의 대타로 들어갔으나 3구만에 중견수 플라이로 물러났다.

9월 9일 삼성과의 DH 1차전에서 선발 출장해 2회초 안타로 통산 1,000안타를 달성했고, 5회초 역전 투런포를 쳤다.

9월 11일 SK와의 시즌 최종전에서 8회말 2사 만루에서 정진호의 대타로 나와 추격의 2타점 적시타를 쳤다. 다만 후속 안타가 터지지 않으며 팀은 3:4로 패배했다.

9월 20일 KIA전에서 9번 1루수로 나와 136일만에 3안타를 기록했다. 나지완에게 선물받은 배트를 썼더니 공이 잘 맞았다고.

9월 22일 두산전에서 7번 지명타자로 출장해 4회말 아무도 기대하지 않은 도망가는 쓰리런을 쳤다. 8회말엔 1점 더 도망가는 적시타로 팀의 5:1 승리에 기여했다.

9월 25일 롯데전에서는 8회말 내야를 벗어나는 안타를 기록했고, 이 안타로 득점에 성공하며 팀의 승리에 기여했다. 4번째 타석에서 안타를 치고 출루할 때 나지완이 선물해 준 배트가 부러졌는데, 출루하고 나서 부러졌다고 엄청 아쉬워하는 모습이 잡혔다. 나지완이 준 배트를 쓰면서 16타수 7안타로 날아다녔으니 그럴 만도 했다.

10월 28일 연장 11회초 상대가 반즈를 고의사구로 거른 2사 1, 2루 상황에서 결승타를 쳤다.[11]

시즌 내내 흐름 끊어먹는 병살타와 노쇠화로 인한 기량 약화로 욕을 미친듯이 먹었으나 문제는 송광민의 2020년 누적 스탯은 팀내 상위권이다. 특히 43타점에 그쳤음에도 이게 노시환과 함께 팀내 최다 타점 공동1위다. 이제 은퇴를 바라 볼 시점이 되긴 했으나 빈약한 1루와 3루 뎁스를 채우기 위해서라도 다음 시즌에 볼 가능성이 없는 건 아니다.

11월 6일 한화에서 웨이버 공시되었다. 기사

3. 은퇴

웨이버 공시된 후 본인은 현역 연장 의지가 강하다고 밝히고 개인 훈련을 하며 다른 팀들의 연락을 기다렸지만, 어느 팀에도 불러 주지 않아 2021년 1월 현역 은퇴를 선언했다. # 은퇴 후에는 고향 대전에서 유소년 야구 육성과 슬로피치[12] 활성화를 위해 힘쓸 계획이라고 한다. 현재 대전시 야구소프트볼협회 전무이사로 임명되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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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여담이지만 이 때 동국대 감독이 한대화다. 대학 동기생 박희수는 6라운드에서 SK 와이번스에 지명됐다. 2010년 한대화가 한화 감독으로 오면서 잠시 한솥밥을 먹게 되었다.[2] 시즌전에 트레이드로 급하게 데려온 이대수와 두산에서 방출되었다 한화에 입단한 정원석이 핵심으로 활약했고, 김태균과 이범호의 이적에 전시즌 맹활약을 펼친 이도형까지 부상으로 아웃되어 섹시가이 전근표가 4번으로 출장하기도 한 꿈도 희망도 없는 라인업이었다.[3] 송잉여라고 불리다가 내야를 함께 지키던 대학동기 이여상과 엮여서 송잉여상이라고 주로 불렸다.[4] BB/K비율이 0.29다. 통산 62볼넷에 301삼진인데...통산으로 봐도 0.20언저리다.[5] 펜스플레이는 물론에 중계도 괜찮은 모습을 보여줬다. 외야 펜스 앞에서 2루까지 노바운드로 송구했다.[6] 후술하겠지만, 송광민은 전형적인 배드볼 히터다.[7] 이 발언은 박제되어서 보이스리플로 간간이 쓰인다.[8] 보장액이 8억, 옵션이 8억으로 정말 송광민이 얼마나 잘하느냐에 따라 자신의 연봉이 결정나는 구조가 되었다.[9] 그럴 확률은 낮다.[10] 하재훈의 한화 상대 통산 첫 피홈런이자 첫 자책점이다.[11] 후에 황재균스톡킹에서 밝힌 후일담에 의하면 이때 kt wiz 선수단은 KIA전에서 끝내기 패배를 당한 뒤 다음 경기를 위해 대전으로 이동 중이었으며, 송광민이 LG에게 역전타를 치자 송광민 응원가를 틀어놓고 떼창했다고 한다. 그 다음날 경기전에 황재균이 송광민 앞에서 응원가를 불러줬으며, 송광민이 배트를 달라고 하자 바로 가져다 줬다고 한다.[12] 소프트볼을 이용하는 생활 스포츠의 일종으로, 공을 높고 느리게 던져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