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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왼쪽부터 다아시 레츠키, 지미 체임벌린, 빌리 코건, 제임스 이하 | ||||
국적 | [[미국| ]][[틀:국기| ]][[틀:국기| ]] | |||
결성 | 1988년, 미국 일리노이 시카고 | |||
데뷔 | 1990년, 싱글 'I Am One'[1] | |||
해체 | 2000년 | |||
재결성 | 2006년[2] ~ 현재 | |||
데뷔 앨범 | [3] | |||
현재 멤버 | 빌리 코건 (보컬, 기타) 제임스 이하 (기타) 키키 웡(기타)[4] 지미 체임벌린 (드럼) | |||
과거 멤버 | 다아시 레츠키[5] (베이스 기타) 제프 슈뢰더[6] (기타) 니콜 피오렌티노 (베이스 기타, 키보드) 마이크 번 (드럼, 키보드) 진저 풀리 (베이스 기타) 멜리사 아우프 데 마우어[7] (베이스 기타) | |||
장르 | 얼터너티브 록, 얼터너티브 메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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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특유의 서정적인 사운드로 90년대를 휩쓴 미국의 얼터너티브 록 밴드.
2. 상세
얼터너티브 록 음악이 한창 전성기인 1990년대에 주로 활동하였으나 당시 미국에서 유행하던 사운드가든, 앨리스 인 체인스, 펄 잼, 너바나 등의 시애틀 그런지 밴드와는 음악적으로 많은 차이를 보였다.이들은 그런지 뿐만 아니라 슈게이징, 사이키델릭 록, 헤비 메탈 등에 영향을 받으며 자신들만의 음악적 개성을 구축해나갔고, 그 결과 당대 그런지 및 얼터너티브 록 밴드들과 차별화된 음악성을 지닐 수 있었다.
리더 빌리 코건의 천재성이 상당히 돋보였던 밴드이다. 일례로 스매싱 펌킨스가 2000년에 해체하기 전 냈던 음반들은 모두 각기 다른 개성을 지녔으면서, 1~3집의 경우 모두 높은 평가를 받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90년대에 활동한 많은 밴드들이 현재 해체하거나 거의 활동하지 않는 것과 달리 이들은 새로 멤버를 꾸려 현재까지도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다.
한국 팬들은 호박들이나 '스매싱 펌킨스'의 앞글자를 따 '스펌'이라고도 부른다.
2.1. 활동
2.1.1. 1988년 ~ 2000년
1988년, 시카고의 한 레코드 가게에서 일하던 빌리 코건은 제임스 이하를 만난다. 두 사람은 모두 기타리스트라는 것과 동생이 장애인이라는 공통점이 있어 서로 친해지게 되었고 이후 함께 데모 테이프를 만든다. 이 데모에서 코건이 2곡, 이하가 1곡을 썼는데, 코건이 이하가 쓴 곡을 크게 비판해서 기분이 상한 이하는 한동안 빌리 코건과 말도 하려 하지 않았다고 한다.어느 날 빌리와 제임스는 함께 락밴드의 공연을 보러 갔고, 평소처럼 공연을 마친 밴드를 신나게 까고(…) 있던 차, 그 말을 듣고 빡친 밴드원 중 한명과 말싸움을 하게 되는데 그 여자가 다아시 레츠키였다. 두 사람은 이렇게 우연히 인연이 닿은 다아시를 베이스로 영입, 락밴드 스매싱 펌킨스를 결성하였다. 참고로 스매싱 펌킨스라는 밴드 이름은 빌리 코건이 제안한 이름이었는데 제임스 이하와 다아시 레츠키는 이 이름을 마음에 들어하지 않아 빌리 코건의 주장을 반대했지만 빌리가 "밴드의 메인 송라이터는 나니까 밴드 이름도 내 마음대로 지을거다" 라고 밀어붙여서 밴드 이름이 되었다고 한다.
스매싱 펌킨스는 시카고의 나이트 클럽 ‘아발론’에서 성공적으로 데뷔 라이브를 마쳤고 데뷔 공연 직후, 시카고에 위치한 클럽 메트로 사장이 드러머를 고용하면 밴드가 클럽에서 공연을 할 수 있게 허락하겠다는 말에 이들은 재즈 드러머 출신의 지미 체임벌린을 맞아들여 밴드의 라인업을 완성했다. 완전체 멤버들의 첫 공연은 1988년 10월 5일, 클럽 메트로에서의 공연이었다.
1990년, 너바나, 소닉 유스 등이 소속되었던 레이블 서브 팝을 통해 발표한 그들의 데뷔 싱글인 ‘I Am One’과 후속 싱글 ‘Tristessa’가 순식간에 품절되자 이에 자신감을 얻은 스매싱 펌킨스는 메이저 진출을 시도했고, 이후 메이저 레이블 버진 레코드와 계약에 성공, 1991년 5월 28일 Caroline 레이블에서 대망의 1집 Gish를 발매하게 된다. 1990년 12월부터 1991년 3월까지 프로듀서 부치 빅의 Smart Studios에서 녹음된 이 앨범은 몽롱한 디스토션이 걸린, 단순하지만 결코 평범하지 않은 기타 리프가 돋보이는 밴드 극초기의 곡들인 'Siva'와 'Bury Me', 프로그레시브 록을 연상시키는 역동적인 구조와 시적인 가사가 돋보이는 'Rhinoceros', 'Snail' 등 몽환적인 얼터너티브 사운드, 하드 록과 어쿠스틱 사운드를 적절히 배합시킨 곡들을 선보이며 주목을 받았다. 그러나 앨범 녹음 기간 동안 빌리 코건은 자신이 원하는 음악적 지향점에 완벽하게 도달하기 위해 밴드 멤버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종종 자신이 직접 기타 및 베이스 트랙을 재녹음하였고 이는 빌리 코건과 기타리스트 제임스 이하, 베이시스트 다아시 레츠키 사이에 불화를 일으키는 원인이 되었다.
1집 Gish가 발매된 직후 이들은 1991년 6월 15일부터 15개월 간 Gish 월드 투어에 나섰고 9월에는 영국 Camden Underworld를 통해 유럽에 데뷔했다. 밴드는 수준급의 라이브를 통하여 나름의 명성을 얻었지만, 비슷한 시기 록씬을 평정했던 너바나의 Nevermind, 펄 잼의 Ten 등 그런지 및 얼터너티브에 밀리며 Gish는 호평에도 불구하고 기대했던 것보다 미진한 판매를 보인다. 게다가 투어 도중 밴드의 리더 빌리 코건은 약혼녀인 코트니 러브가 1992년 2월 24일에 혼전임신으로 커트 코베인과 결혼했다는 소식을 들은 후 우울증에 걸렸고[8] 드러머인 지미 체임벌린은 헤로인을 하기 시작했으며[9], 연인 사이였던 제임스 이하와 다아시 레츠키는 파경을 맞이하였다.
1992년 9월 12일 공연을 마지막으로 Gish 월드 투어가 끝난 후 빌리 코건은 우울증에 시달린 채로 시카고의 위치한 자신의 집에서 은둔 생활을 하기 시작했다. 폭식증과 자살 충동에 시달리던 빌리 코건은 결국, 어느 날 자살 시도를 하였으나 다행히 미수에 그친다. 빌리 코건의 전 여자친구이자 소꿉친구인 크리스 파비언은 빌리 코건이 자살 시도를 했다는 소식을 듣고 충격을 받아 빌리에게 찾아가서 그의 우울한 마음을 위로해 주며 정신과에서 심리 상담을 받아보라고 설득했다. 그리고 자신을 보살펴 준 크리스 퍼비언의 상냥한 마음씨에 감동한 빌리 코건은 그녀에게 공식적으로 프로포즈했고 그녀가 승낙하여 두 사람은 정식으로 약혼을 하게되었다.
이후 빌리 코건은 '사람들이 자신과 밴드를 기억해줄만한 명반 하나는 남겨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다시 기타를 잡고 작곡을 시작했다. 그러나 당시 레코드 임원들은 스매싱 펌킨스 1집의 저조한 판매량을 이유로 계약을 파기하려고 했고 결국 빌리 코건은 임원들 앞에서 혼자 어쿠스틱 기타를 들고 자신이 작곡한 곡을 연주해 평가를 받는 상황까지 오게된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렇게 굴욕적인 행동까지 해야 한다면 차라리 다른 직업을 가져보자고 생각한 빌리 코건은 일부러 연주를 제대로 하지 않았는데, 임원들은 그것을 듣고 그런지의 과격함이 묻어나오는 것 같다며 앨범 제작을 허락했다는 것이다.
2집의 제작이 성사되자 빌리 코건은 멤버들에게 연락을 했고 밴드는 1992년 11월 부터 본격적으로 리허설을 시작했으나 드러머인 지미 체임벌린은 헤로인에 중독되어 헤롱거리고 있었고 연인 사이였다가 Gish 투어 막바지에 헤어졌던 제임스와 다아시는 같이 한 장소에 있는 것도 거부할 정도로 사이가 악화된 상태였다.[10] 그러자 빌리 코건은 1992년 12월부터 1993년 3월까지 애틀란타에 있는 Triclops Sound Studios에서 프로듀서 부치 빅의 도움을 받으며 지미 체임벌린이 미리 녹음한 드럼 파트를 제외하고 모든 악기를 혼자서 다 연주하며 앨범을 완성시킨다. 부치 빅은 2집 앨범을 녹음했을 당시 빌리 코건과의 작업을 "우리들은 앨범 완성도의 기준을 정말 높게 잡았다. 모든 작업이 아날로그 테이프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시간이 많이 걸렸고 우리들은 4달 내내 일주일에 6일을 12시간 동안 녹음실에서 씨름하면서 엘범 작업에 열중했다. 마지막 2달 동안은 일정이 밀려서 일주일에 7일, 하루에 14~15시간씩 녹음을 진행했다."라고 회고했다.
2집 앨범 녹음이 완료되자 빌리 코건은 이번 앨범은 분명히 성공할 것이라며 제임스 이하와 다아시 레츠키에게 밴드에 재가입하라고 설득하였고 2집의 최종 완성본을 듣고 앨범의 성공을 직감한 두 사람은 빌리 코건의 제안을 받아들여서 다시 밴드에 가입했다. 이후 밴드는 본격적으로 투어 리허설을 하게 된다. 한편, 1993년 6월. 빌리 코건은 마침내 연인이던 크리스 퍼비언과 자신의 집에서 약소하게 결혼식을 올렸다. 여러 사진들 위에 가사가 적혀있는 2집의 부클릿 디자인도 크리스 퍼비언의 작품이라고 한다. 그녀는 직업이 미술관의 큐레이터일 정도로 미술에 조예가 깊은 여자였다.
1993년 7월 27일, 마침내 2집 Siamese Dream이 발매되었다. 앨범은 첫 싱글 Today가 전미에 유명세를 타며 4백만장이 판매되었고 1993년 빌보드 차트에서도 4위까지 올랐다. 앨범 전반에서 마이 블러디 밸런타인을 연상시키는[11] 매우 진한 퍼즈 톤이 사용되었으며, 지저분한 기타 리프가 인상적인 오프닝 트랙 'Cherub Rock', 첫번째 싱글로 발매되었고 지금도 밴드의 대표곡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는 'Today', 자신의 불행한 유년 시절을 담은 'Disarm', 병으로 고생하는 동생 Jesse를 위해 만든 'Spaceboy' 등 해당 앨범 수록곡들 대다수가 명곡으로 꼽힌다.
1994년 9월 8일 공연을 마지막으로 13개월에 걸친 2집 투어가 마무리 된 후 빌리 코건은 '다음 앨범을 마지막으로 밴드가 해체될 것이 분명하다.'는 생각에 완벽한 앨범을 만들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빠져서 일생일대의 프로젝트에 몰두하게 되는데, 바로 1995년 발매한 2CD 앨범 Mellon Collie and the Infinite Sadness였다.
빌리 코건은 사실상 자신의 솔로 앨범이었던 전작과 달리, 밴드 구성원들이 다함께 협력하는 온전한 밴드 앨범을 만들고 싶어했고 전작에서 담지 못했던 밴드의 라이브 사운드를 앨범에 담고 싶어했다. 그래서 빌리는 그전까지 스매싱 펌킨스 앨범의 프로듀싱을 맡은 부치 빅 대신에 나인 인치 네일스와의 작업으로 유명한 플러드[12]와 마이 블러디 밸런타인의 명반 loveless 앨범의 앤지니어를 맡은 알란 모울더(Alan Moulder) 라는 2명의 프로듀서를 고용하였다. 플러드는 빌리 코건의 의견을 듣고 앨범 제작을 시작하면서 밴드가 리허설 룸 Pumpkinland에서 리허설을 마친뒤 곧바로 레코딩 스튜디오에 와서 녹음을 하는 방침을 내세웠고 앨범 녹음시에도 밴드 멤버들의 합주를 적극적으로 권장하였다.[13]
플러드는 음악적인 요소 뿐만 아니라 밴드의 작업 환경에도 개입했다. 플러드가 비효율적인 스튜디오 환경을 바꾼 덕분에 멤버들은 의미 없는 대기 시간을 획기적으로 줄일 수 있었고 멤버들이 시간을 효율적으로 쓸 수 있게 되어 빌리 코건의 솔로 앨범이나 다름 없던 전작과 달리 제임스 이하와 다아시 레츠키도 레코딩에 전적으로 참여하였다.
3집 앨범의 녹음은 1995년 3월부터 8월까지 진행되었다. 3집을 제작하면서 빌리 코건은 전작의 성공 요소 중 하나였던 두꺼운 기타 사운드를 한층 발전시키면서도 이에 종속되지 않는 다양한 사운드를 만들고자 했으며 이러한 기타 트랙의 연주는 1집 때처럼 빌리와 제임스가 반반 나누어서 담당했다. 또한, 각 CD의 마지막 두 곡은 제임스 이하가 작곡했고 두 곡 중 Farewell and Goodnight은 밴드 멤버 전체가 파트를 나눠 불렀다. 믹싱 과정에서는 처음으로 ProTools를 사용하여 디지털 레코딩을 시험하였다.
그러나 빌리 코건의 워커홀릭 기질로 인해 밴드 멤버들은 하루에 15시간 녹음이라는 살인적인 스케줄을 소화해야 했고 결국 앨범 녹음 중에 멤버들간의 불화가 다시 심화되었다(...) 빌리 코건은 인터뷰에서 "나는 락밴드에 종사하는 음악인으로서 내 인생에는 오로지 음악만이 전부인데 나머지 멤버들은 음악 외에 사적인 것들에 시간을 많이 할애한다. 나는 그런 멤버들이 이해가 가지 않는다."며 다른 멤버들을 애둘러 비판했다. 다아시 레츠키는 훗날 인터뷰에서 "나는 커피, 담배, 도넛으로 20시간을 버티며 앨범 작업을 해야했고 그 결과 콩팥에 이상이 생길 정도로 건강이 망가졌다"라고 빌리 코건을 비난했다. 앨범 제작 과정이 담겨있는 666 테이프 영상
이러한 힘겨운 여정을 끝내고 1995년 10월 24일, Mellon Collie and the Infinite Sadness가 더블 앨범의 구성으로 발매되었다. 3집 발매 당시 음반사 관계자들은 더블 앨범으로 앨범을 발매하는 것은 앨범이 망하는 지름길이라고 극구 말렸지만 빌리는 고집을 피우며 그 많고 심오한 음악들을 한 앨범에 때려 넣었고 그 결과 이 앨범은 전세계적으로 엄청난 호평을 받았다. 3집은 더블 앨범이라는 약점에도 불구하고 미국 내에서 900만장을 팔아치우며[14] 빌보드에서 그해의 얼터너티브 락 부문을 수상하였다. 해당 앨범은 아름다운 멜로디를 기반으로 관현악 선율이 첨가된 ‘Tonight Tonight’에서부터 미니멀한 사운드의 1979, 강렬한 하드록인 ‘Bullet with Butterfly Wings’까지 다채로운 음악 스타일과 사춘기적 지성미라 말할 수 있을 잔혹하고도 서정적인 가사 등으로 2집 Siamese Dream과 더불어 스매싱 펌킨스가 발표한 앨범들 중 가장 뛰어난 앨범으로 손꼽힌다. 다만 혹자는 지나치게 장황하다며 혹평하는 경우도 있는데, 그 때문인지 거의 만장일치로 호평을 내리는 Siamese Dream에 비해 평균적인 평단의 평가는 다소 낮은 편이다. 물론 어디까지나 Siamese Dream에 비해서지, 명반 대우를 받지 못한다는 뜻은 아니다.
이렇게 스매싱 펌킨스는 너바나가 해체한 당시의 락 씬에서 본좌로 오르는 것 처럼 보였다. 그러나 이 시기 밴드의 상황은 최악이었다. 우선, 3집 투어 도중 헤로인 중독으로 키보디스트 조나단 멜보인이 세상을 떠났고, 드러머 지미 체임벌린이 마약소지혐의로 체포되면서 투어가 도중에 중단되었다. 그렇게 투어가 1달간 중단되는 동안 밴드 멤버들은 서로 연락도 하지 않고 따로 놀기 시작했다. 제임스 이하는 3집 앨범에서 자신의 곡이 대거 빠진 것에 대한 서운함을 갖고 있었기에 투어가 잠시 종료되자 자신의 솔로 1집 앨범을 준비하기 시작했으며 다아시 레츠키는 3집의 지나친 투어일정 때문에 임신 중임에도 몸을 돌보지 못하여 자신의 아이가 유산되자 우울증에 걸려 잠적했다. 빌리 코건도 친어머니 마사의 죽음으로 우울증이 재발한 상태였다.
중지되었던 투어는 드러머 맷 워커(ex-Filter), 키보디스트 데니스 플레밍(the Frogs)을 보강하여 1996년 8월 27일 라스베가스에서 다시 시작되었고 투어가 종료된 후에도 스매싱 펌킨스는 활동을 이어갔다. 투어가 종료된 후 지미 체임벌린이 재활치료를 받고 밴드에 복귀할 때 까지 드러머를 공석으로 남겨놓고 싶다는 빌리 코건의 주장에 의해 스매싱 펌킨스는 지미 체임벌린이 빠진 3인조의 라인업으로 1997년 6월부터 4집 앨범을 녹음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당시 우울증이 심각한 상태였던 다아시 레츠키를 염려한 제임스 이하가 빌리 코건에게 다아시가 정신건강을 회복할 때 까지 그녀에게 휴가를 주자는 제안을 했고 이에 앨범의 베이스는 빌리 코건과 제임스 이하가 반반 맡아서 연주하였다고 한다. 앨범 녹음은 1998년 3월에 완료되었다.
1998년 6월 2일, 마침내 스매싱 펌킨스의 4집 앨범 <Adore>가 발매되었다. <Adore>는 한마디로 충격이었다. 앨범에는 디스토션으로 무장한 기타 리프는 온데간데없이 어쿠스틱한 피아노 반주에 시니컬하고 조용조용한 빌리의 목소리가 담겨있었으며 전반적으로 일렉트로닉의 느낌이 강했다. 기존 사운드를 바란 팬들은 이에 실망했고 차트에서도 고전을 면치 못하며[15] 평론가들 사이에서도 논란이 많았다. 다만 시간이 흐른 현재는 범작에서 수작 사이로 평가받고 있다. 일례로 피치포크에선 8.5점을 주었는데, 이는 벡의 명반 Odelay와 같은 점수이다. [16]
이후 지미 체임벌린이 재활 치료를 마치고 밴드에 다시 복귀했고 스매싱 펌킨스는 1999년 4월부터 5집 앨범 작업에 착수했다. 그러나 1999년 10월, 5집 앨범의 녹음을 완료한 직후 베이시스트인 다아시 레츠키가 이유를 밝히지 않고 팀을 떠나 활동을 완전히 접었고[17] 밴드는 홀의 베이시스트 멜리사 아우프 데어 마우어를 영입하여 5집 활동 준비를 시작했다. (멜리사는 투어 세션 멤버로 5집 앨범 레코딩에는 참여하지 않았다.)
2000년 2월 29일, 스매싱 펌킨스는 5번째 앨범 <Machina: the machines of god>을 발표했다. 앨범은 전작 <Adore>의 연장선상인 변형된 일렉트로닉 사운드와 밴드의 상징이나 다름없었던 두터운 퍼즈톤의 사이키델릭한 분위기, 중세풍의 컨셉으로 엮인 가사, 독일의 표현주의에 입각한 뮤직비디오로 중무장하였지만 팬들의 관심을 돌리기에는 역부족이었고 150만장이 팔리며 전작보다도 낮은 판매량을 보인다. 여기에 그동안 빌리 코건의 독단적인 밴드 운영에 불만이 많았던데다 1998년 솔로 1집을 낸 이후부터 개인 활동을 시작한 제임스 이하가 5집 활동을 마치고 밴드에서 탈퇴하겠다는 의사를 내비쳤고 결국, 밴드는 2000년 월드 투어를 끝으로 해체를 선언, 그 해 12월, 밴드로서 처음 공연했던 고향 시카고의 '메트로' 클럽에서 마지막 공연을 갖는다.
해체 직전 스매싱 펌킨스는 마지막 앨범 세션 당시 녹음했지만 앨범에는 미수록된 곡들을 모아서 Machina II/The Friends & Enemies of Modern Music 이라는 제목으로 인터넷에 공개한 적도 있다. 이는 라디오헤드보다 10년 앞선 것이다.
2.1.2. 2007년 ~ 현재
이후 몇 년간 빌리와 제임스는 각각 솔로 활동에 집중하였다. 하지만 제임스가 성실하게 소소한 결과물을 쌓아나갔던 것과 대비되게 빌리는 자신의 컨셉에만 신경을 쓰며 부진하였다. 상대적인 만족도 차이인지 2005년 중순부터 빌리 코건은 솔로 앨범 프로모션이나 일간지 광고에서 스매싱 펌킨스의 재결성 의지를 계속 밝혀오다 2007년 재결성을 선언, 드럼을 맡은 지미 체임벌린을 제외한 나머지 멤버들을 신인 뮤지션으로 채워서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했다. 이 재결성에 팬들은 환호하였지만 새로 내놓은 앨범 Zeitgeist는 관심을 받지 못했다. 관객들도 공연장에서 옛날 곡들은 신나게 따라불러도 신곡은 관심없다는 반응을 보였다.2009년, 빌리 코건을 제외하고 마지막 남은 원년 멤버였던 지미 체임벌린이 밴드를 떠났다.
2011년 9월 1일에 새 앨범 'Oceania'를 공개한다고 한다. 지난해부터 웹상에서 공개되고 있는 'Teargardens by Kaleidescope'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발매되는 앨범이며, 빌리 코건은 'Oceania'를 "앨범 속 앨범" 이라고 밝혔다. 즉, 총 44곡이 순차적으로 공개된 후에야 완성되는 'Teargardens by Kaleidescope' 라는 프로젝트의 한 부분으로써의 앨범이라는 말. 타로 카드를 모티브로 기획되었다는 이 프로젝트라는데, 새 앨범도 앨범이지만 정말 44곡을 하나로 묶어 거대한 컨셉트 앨범을 만들어낼지 궁금해진다.
2012년에 나온 Oceania는 이질적이지만 그래도 졸작 소리까지 듣던 전작보다는 상당히 후한 평가를 받으면서 2기가 제대로 자리잡을 수 있을 거라는 기대를 주는 데에는 성공하였다. 하지만 2014년 중반기에 들어 2기 멤버 중 2명이 탈퇴하면서 밴드의 미래가 불투명해져 버렸다. 2014년 12월에 발매된 앨범 Monuments to an Elegy는 빌리 코건과 제프 슈뢰더 둘이서 작업하여 완성했고, 2015년 초 발매가 예정되어 있었던 Teargarden by Kaleidyscope Project 시리즈의 마지막 앨범 Day for Night는 결국 발매가 무산되었다.
2016년 빌리 코건이 원년 멤버+제프 슈뢰더로 스매싱 펌킨스 재결성을 고려하고 있다는 얘기가 들려왔다. 또한 2016년에 빌리 코건과 사이가 좋지 않다고 여겨졌던 제임스 이하가 스매싱 펌킨즈 공연에 깜짝 등장하며 팬들의 기대를 모았다. 다만 이 재결성에 다아시 레츠키는 참가하지 않으며, 빌리 코건은 다아시가 가입을 거절했다고 주장했으나, 이를 접한 다아시 레츠키가 인터뷰를 통해서 "자신은 스매싱 펌킨스의 재결성에 참여하고 싶다는 의사를 내보였으나 빌리 코건이 독단적으로 밴드의 재결성에 자신을 배제했다."며 빌리 코건을 극딜했다. 이후로도 다아시는 참여할 일이 없을 것으로 보인다.
2018년 2월, 빌리 코건은 다아시를 제외한 원년 멤버인 제임스 이하, 지미 체임벌린과의 재결합을 공식적으로 발표했다. 제프 슈뢰더는 계속 밴드에 남아서 활동을 할 예정. 또한 향후 재결합 멤버로 두 장의 EP를 낼 것이라고 했으며 7월부터 9월까지 투어를 돌았다.
2018년, Shiny and Oh So Bright, Vol. 1이 발매되었다.
2020년, Cyr이 발매되었다. 디페시 모드스러운 일렉트로닉한 사운드로 채워진 앨범인데 평가는 그다지 좋지 못하다.
2022년, 새 앨범 Atum: A Rock Opera in Three Acts의 일부분이 공개되었다. 2023년에 두 번째 파트가 공개되었으며, 2023년 4월에 완전한 버전이 발매되었다.
2023년 10월 24일, 2007년부터 16년간 밴드에 재직하던 기타리스트 제프 슈뢰더가 팀을 탈퇴했다. 이로써 현재 다아시 레츠키를 제외한 원년 멤버들[18]만 밴드에 남게 되었다.
2024년 8월 2일 새 앨범 <Aghori Mhori Mei>를 발매했다. 오랜만에 일렉트로닉 사운드를 완전히 배제하고 디스토션을 먹인 기타 사운드를 전면에 내새운 순수한 락 사운드로 가득찬 앨범이다.
2.2. 내한 공연
2000년 멤버 간 불화가 절정에 이르러 해체 선언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올림픽공원 체조경기장에서 2000년 7월 4일에 열린 첫 내한 공연에서 밴드는 성실한 모습을 보이며 공연을 성공적으로 마쳤다.[19] 특히 마지막 곡으로 1979를 부르기 전 빌리 코건의 말이 인상적인데, "미국인으로서, 한국에 평화가 올 수 있다는 가능성에 매우 고무됐습니다. 여러분의 아이들이 전쟁 없는 나라에서 살길 바라며, 이 곡을 여러분과 북한의 주민들에게 바칩니다. 여러분의 밝은 미래를 기원합니다."영상 라고 하며 북한에 대해 관심이 있는 모습을 보였다.2010년 8월 14일 10년만에 다시 한번 내한 공연을 하였다. 하지만 오리지널 멤버가 아닌 2기 멤버로 방한해 아쉬운 면이 없지않아 있었다. 게다가 이전엔 브라질과 한국 공연이 제일 인상깊었다고 밝혔는데 재내한 때는 10년 만이라 인지도도 많이 떨어져 좌석이 2/3 밖에 못 채워서 빌리 코건이 충격에 빠졌고 1979도 부르지 않았다.
하지만 2년 뒤인 2012년 8월에 2012 슈퍼소닉 공연을 위하여 세번째로 내한하였고, 그때는 다행히 1979도 불렀다.
3. 음악적 특징
90년대를 대표하는 얼터너티브 록 밴드이면서 당대의 가장 개성적인 밴드였다. 그런지 밴드가 지배한 당대 록씬에서 그런지와는 전혀 다른 사운드를 자랑했으며, 본인들도 그런지 밴드로 불리는 것을 싫어했다.[20] 음악적 기반은 헤비 메탈과 사이키델릭 록.너바나는 펑크 록, 펄 잼은 정통파 아메리칸 하드 록이 기반이고 사운드가든이 레드 제플린, 블랙 사바스 등 70년대 하드 록과 펑크 록이 혼합된 얼터너티브 메탈을, 앨리스 인 체인스는 블랙 사바스의 무거운 사운드와 육중한 리프를 따와 기존의 슬럿지 메탈을 얼터너티브 록에 합친 얼터너티브 메탈을 보여주었다면 스매싱 펌킨스는 사이키델릭 스타일의 얼터너티브 록이었다. 일례로 밴드는 일렉트릭 기타의 노이즈와 트래몰로 주법을 사용하여 몽환적인 사운드를 내는 것으로 유명했는데 이는 지미 헨드릭스와 초기 지미 페이지가 자주 보여준 사이키델릭 블루스 스타일이다. 밴드 특유의 몽환적인 느낌은 마이 블러디 밸런타인의 영향이 크다. 또한 Mellon Collie and the Infinite Sadness 앨범에서 부분적으로 나타나는 연극적인 곡 구성은 프로그레시브 록 밴드 제네시스의 영향으로 보인다. 동시대에 활동한 다른 락밴드들과 달리 신디사이저도 자주 사용했다.
단, 당대 밴드들이 약물의 영향력을 음악에 적극적으로 활용했던 것에 비해 스매싱 펌킨스는 마약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을 취했다. 이는 빌리 코건의 완벽주의 성향 때문으로 원년 멤버 시절에 빌리 코건은 완벽한 연주를 위해 밴드 멤버들에게 공연 중 금주를 요구했다고 한다. 다만, 훗날 밝히길 빌리 코건은 1집 <Gish> 활동 무렵에는 LSD를 상시 복용했으며 90년대 스매싱 펌킨스 활동 당시 공연 뒷풀이 파티에서 엑스터시나 메스암페타민도 종종 했다고 한다. 단, 알콜 알레르기 때문에 술은 전혀 마시지 않으며 커피와 담배도 하지 않는다고 한다. 또한, 밴드의 원년 베이시스트인 다아시 레츠키는 코카인 중독, 드러머인 지미 체임벌린은 헤로인 중독에 시달리기도 했다.
약력에서 알 수 있다시피 빌리 코건은 독재자 기질이 있다. 또한 다른 멤버들하고 싸워 떠나면 인터뷰에서 그 멤버를 비난하는 등 뒤끝이 별로 좋지 못하다. 스매싱 펌킨스가 처음으로 해체했을 때는 해체 원인을 모조리 제임스 이하에게 돌리기도 했다.
다만, 독재자 기질이 있다고 빌리 코건의 음악적 재능을 폄하할 수는 없다. 특히, 신작 발매 때마다 예전의 곡들을 현재의 컨셉에 맞추어 편곡하는 창작력은 정평이 나 있는 부분이다.
이들의 음악을 이야기하는데 라이브를 빼놓을 수 없다. 공연 하나하나마다 분위기가 살아 숨쉬는 빌리 코건의 샤우팅과 멤버들의 탄탄한 연주는 누구나 인정하는 그들의 특징이다. 부틀렉을 잘 찾아보면 매 해마다 기타 톤이 달라지고 편곡이 달라지는 변화를 느낄 수 있다.
한 팬 사이트는 1988년부터 지금까지의 모든 공연 스케줄 및 누군가 녹음한 음원과 관객 녹음, 방송분 등 이력을 전부 기록 중이다.링크
빌리 코건은 자신의 밴드를 '반은 인디락에 발을 걸친 유랑민'으로 표현하였다.[21] 그런데 좋게 말하면 다양한 장르의 수용, 나쁘게 말하면 잡탕식의 음악이 한 우물만 파는 음악인들에게는 좋지 않게 비춰진 모양이다. 일례로 미국 인디 락의 대부 페이브먼트는 이들에 대해 Range-Life라는 곡으로 디스한 바 있다.
4. 평가
90년대를 호령한 미국의 얼터너티브 록 밴드들 중에서도 너바나, 펄 잼, 앨리스 인 체인스, 위저, R.E.M., 플레이밍 립스, 제인스 어딕션, 페이브먼트 등과 함께 대중뿐만 아니라 평단에서도 매우 높은 평가를 받는 밴드이다. 전반적으로 서정적인 미국식 멜로디에 사이키델릭한 편곡과 진한 퍼즈 및 디스토션 사운드를 입힌 얼터너티브 록이라는 게 1~3집까지의 평가이며, 4집부터는 일렉트로닉에 영향을 받은 얼터너티브 록으로 평가받고 있다.뭐니뭐니해도 밴드의 최전성기는 2집 Siamese Dream부터 3집 Mellon Collie and the Infinite Sadness까지의 시기. 물론 1집 Gish도 평단에서는 수작이라고 평가받았지만 대중적인 인기와 음악적 평가 모두 정점을 찍은 시기는 2집부터 3집까지다. 4집부터는 대중적인 인기도 식고 평단의 평가 또한 낮아졌다.[22]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도 새 앨범을 내며 왕성히 활동하고 있으며, 대중들에겐 살아있는 얼터너티브 록의 신화 대접을 받고 있다.
5. 기타
스매싱 펌킨스 2기 활동 당시 빌리 코건이 2기의 베이스 멤버 니콜 피오렌티노가 2집 Siamnese Dream의 커버 모델이었음을 밝혔다.링크 다만 이걸 밝힐 당시 30대였는데 16년전에 찍은 커버는 아무리 봐도 너무 어린 모습이라 의구심을 품는 미국인들이 몇몇 보였다.결국 이후 밴드 관계자가 앨범의 두 소녀들은 니콜 피오렌티도가 아닌 리산드라 알과 알리 랭어라고 언급했다. 링크
카림 압둘자바가 나오는 Oceania 앨범 광고 영상이 꽤 위트있다.#
2015년 여름, 스매싱 펌킨스와 마릴린 맨슨의 합동 투어에서 지미 체임벌린이 등장하여 복귀 사실을 알렸다. 이상하게도 다른 멤버는 다 내쫓는데, 빌리 코건은 지미 체임벌린을 마약 문제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한번 내쫓고 다시 영입한 뒤, 그 뒤로 계속 데리고 다니고 있다. 이에 대해 의문을 제기 하는 사람도 있는데, 지미 체임벌린이 스매싱 펌킨스에 딱 맞는, 여러가지 다채로운 성격의 리듬을 모두 소화해낼수 있는 그리 흔치 않은 드러머이기 때문에 빌리 코건이 계속 그와 작업하는 것이다. 사실 헤비하고 투베이스 잘 밟아내는 드러머는 많을지 몰라도, 헤비한 속주 드러밍도 소화해 내면서 끊어치는 펑키한 그루브나 엘빈 존스를 연상케하는 재즈적인 필링이나 사이키델릭 블루스에서의 몽환적이고 느릿느릿한 박자까지 다 소화해내는 드러머는 많지 않다. 특히 Tonight, Tonight 같은 심포닉 구성의 곡에서도 적절하게 빛을 발하는 그의 센스는 최고로 평가 받는다.
Doomsday Clock이 트랜스포머에 수록되었다.
My Love Is Winter가 시카고를 배경으로 하는 비디오 게임 와치독스의 오디오 목록에 수록되었다.
6. 멤버
1988년~1999년2000년
2007년~2014년
2018년~2023년[26]
2024~
재미있게도 오리지널 라인업이나 2기 멤버 모두 동아시아계 기타리스트와 여성 베이시스트로 구성되어 있다.
[1] 이후 재편곡되어 1집 앨범 Gish의 1번 트랙이 된다.[2] 빌리 코건과 지미 체임벌린만이 복귀했다. 이후 2009년 지미 체임벌린도 밴드를 탈퇴하면서 2018년까지 원년 멤버 중 남은 멤버는 리더 빌리 코건 뿐이었다. 그러나 이후 2018년, 마침내 지미 체임벌린과 제임스 이하가 밴드에 복귀했다. 2023년 현재 원년 멤버 중 복귀하지 않은 멤버는 다아시 레츠키 뿐이다.[3] 1991년 5월 28일 발매[4] 1989년 출생의 동양계 여성 기타리스트로 만 명의 후보 기타리스트들 중에 최종적으로 선택되어 스매싱 펌킨스에서의 활동을 시작하였다.키키 웡의 밴드 가입을 알리는 NBC 기사.[5] 밴드의 원년 베이시스트. 보통 스매싱 펌킨스의 베이시스트 하면 다아시를 떠올리는 경우가 많다.[6] 2007년부터 16년이라는 오랜 시간동안 빌리 코건과 함께 밴드에 있었으나, 2023년 밴드를 탈퇴했다.[7] 홀의 멤버였으며 다아시가 5집 앨범의 녹음을 마친 직후인 1999년 10월에 밴드를 탈퇴하자 스매싱 펌킨스에 가입하여 그들의 마지막 월드투어에서 베이시스트로 참여했다.[8] 1집 녹음 직전, 빌리 코건은 코트니 러브를 만나 연애하게 되고 둘은 스매싱 펌킨스의 월드 투어와 홀의 전미 투어가 끝나면 결혼하기로 약속한 상태였다. 하지만 빌리 코건이 Gish 투어를 돌며 외국으로 떠나있는 사이에 코트니 러브는 너바나의 리더 커트 코베인과 양다리를 걸치기 시작했고 곧, 자신이 커트의 아이를 가진 것을 알게 되자 빌리 코건과의 결혼을 일방적으로 파기한 직후 1992년 2월 24일 커트 코베인과 결혼해버렸다.[9] 훗날 지미 쳄벌레인은 "당시 나는 락스타가 된 후 무엇이든지 해도 상관없다는 자만심에 빠져있던 상태였고 아무 생각 없이 주위 사람들이 권한 헤로인을 투여하기 시작했다."고 회고했다.[10] 2집의 프로듀서 부치 빅은 당시 밴드의 상황을 "리허설 때 멤버들은 매일 서로 싸웠고 회의할 때에는 멤버들 사이에 고성이 수시로 오갔다. 그래서 나는 '이 밴드는 이제 끝났다'라고 생각했었다."고 회고했다.[11] 실제로 빌리 코건은 2집 인터뷰 당시 My Bloody Valentine에게서 영향을 받았다고 밝힌 바 있다.[12] 프로듀서로서 실력을 인정받은 대표적인 사례가 나인 인치 네일스와의 작업이고, 이외에도 U2, 디페시 모드, 이레이저, PJ 하비 등과 작업한 바 있는 최고의 프로듀서 중 하나이다.[13] 전작들은 악기를 각각 따로 녹음했다고 한다.[14] 이건 더블 앨범이라 앨범 판매량을 두배로 계산해서 집계된 결과이기도. 그러니까 앨범 450만개*2=900만장인 셈.[15] 약 200만장이 팔렸다고 한다. 더블 앨범이었던 전작 Mellon Collie and the Infinite Sadness의 실질적인 판매량이 약 450만장인데, 이의 절반도 못 오는 수준.[16] 물론 9.1점을 받은 2집과 9.3점을 받은 3집에 비하면 다소 아쉬운 점수인 것은 사실이다.[17] 다아시 레츠키는 밴드에서 탈퇴한 이후 영화 배우 데뷔를 준비했으나 이내 코카인 소지혐의로 경찰에 붙잡히며 배우로서의 활동이 좌절되었다. 사실 빌리 코건이 자기 홈페이지에서 1999년 당시에는 다아시가 5집 녹음에 참여한 후 밴드를 탈퇴한 것이라고 공표했었지만 실제로는 그녀의 코카인 중독 문제 때문에 밴드에서 방출된 것에 가깝고 5집의 베이스 기타 트랙도 자신이 연주했다는 글을 올린 적이 있었다. 다아시 레츠키는 이후 저작권 소송 건을 제외하면 대중매체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은둔했다가 2009년 방송에 출연해 미시건 주(州)의 시골에 정착했다고 근황을 밝혔다. 2016년 건강이 회복되었다며 활동 재개를 선언했다.[18] 빌리 코건, 제임스 이하, 지미 체임벌린[19] 생활의 참견으로 유명한 웹툰 작가 김양수가 당시 내한공연 분위기를 소개한 웹툰이 남아있다. 보러가기[20] 가끔 스매싱 펌킨스를 두고 그런지 밴드라 말하는 경우도 있는데, 그런지에 영향을 받았을 뿐이지 그런지 밴드라고 보기는 어렵다. 빌리 코건은 스매싱 펌킨스를 "얼터너티브 록의 얼터너티브를 지향하는 밴드"라고 설명했다.[21] 참조.[22] 다만 4집 Adore는 호불호가 갈리긴 해도 시간이 지난 현재는 일부 평단에서 호평받고 있다. 한 예시로 피치포크는 이 앨범이 스매싱 펌킨스의 앨범 중 가장 과소평가된 앨범이라고 말하며 8.5점을 매기기도 했다.[23] 코트니 러브 프론트 밴드 홀의 베이스 출신이었고, 홀의 투어 활동이 한창이던 시점에 이적했다. 상술했던 빌리 코건과 코트니 러브의 관계를 생각하면 재밌는 인연. 투어 세션 멤버로 밴드의 앨범 레코딩에는 참여하지 않았다.[24] 한국계 미국인으로 2013년 8월부터 홍대에 거주했었다가 출처 스매싱 펌킨스 활동을 위해 다시 미국으로 이주했다.[25] 한국의 락 밴드인 YB의 10집 앨범인 Twilight State의 야간마차라는 곡에 참여했다.[26] 2018년 Shiny And Oh So Bright 투어에서는 조이 디비전과 뉴 오더의 베이시스트 피터 훅의 아들인 잭 베이츠가 세션 베이시스트로 참가한다.[27] 1989년 출생의 동양계 여성 기타리스트로 10000명의 후보 기타리스트들 중에서 최종적으로 선택되어 스매싱 펌킨스에서의 활동을 시작하였다.키키 웡의 밴드 가입을 알리는 NBC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