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000><colcolor=#fff> 시마다 신스케 島田紳助 | |
본명 | 하세가와 키미히코 (長谷川公彦)[1] |
출생 | 1956년 3월 24일 ([age(1956-03-24)]세) |
일본 교토시 미나미구 | |
국적 | 일본 |
신체 | 170cm, 64kg, AB형 |
직업 | |
소속사 | |
데뷔년도 | 1974년 |
은퇴년도 | 2011년 |
혼인여부 | 기혼 |
동기 | 아카시야 산마 |
前 대표 프로그램 | 개운 뭐든지 감정단[3], 행렬이 생기는 법률 상담소[4], 퀴즈 헥사곤[5]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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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현재 일본에서 그의 위치를 잘 표현하는 아수라상[6] |
아카시야 산마와 동기이며, 시무라 켄, 타모리, 비트 다케시 등 거물 개그맨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었던 사람이다. 2011년 불명예 은퇴하기 전까지 11년간(2000년~2011년) 가장 많은 수의 프로그램(총 14개)을 연간 평균 시청률 TOP 10에 안착시킨 게닌이다.(2위는 동기인 아카시야 산마로 12개)
시마다 신스케는 최초로 만자이 방법론을 체계적으로 정립한 게닌으로 유명하다. 또한, M-1 그랑프리라는 만자이 경연대회의 아이디어를 요시모토 흥업에 제시하고 본인이 직접 대회의 집행위원장을 맡으며 후배 게닌들에게도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한 거물이었다.
세계적으로는 2011년 야쿠자와 유착관계였다는 것이 폭로되어 연예계를 은퇴한 일본의 코미디언으로 유명하다.
좋게 한 은퇴가 아님에도 요시모토 흥업의 후배 개그맨들이 간혹 방송에서 (주로 신스케가 진행했던 행렬이나 프로그램에서 아카시야 산마가 게스트 MC로 섭외되면) 신스케를 언급할 정도로 재능 하나는 인정할만 한 입담꾼이다.
2. 생애와 커리어
본명은 하세가와 키미히코(長谷川公彦). 초등학교 3학년 때 가정교사를 들일 정도로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중,고교 시절 소문난 불량 학생이였던 그는 고등학생때 B&B의 만자이를 보고 충격을 받아 만자이시가 되겠다는 꿈을 가지게 되었고 대학에 진학할 때가 되자 "자신은 공부에 뜻이 없으며 만자이시가 되고자 한다."는 것을 부모님에게[8] 밝히고 1974년 18세의 나이에 이마 이쿠요, 쿠루요(今いくよ・くるよ)와 B&B 등을 제자로 둔 부부 만담가 시마다 요노스케, 이마 키타요(島田洋之介・今喜多代)의 제자로 들어가면서 연예계에 입문했다. 시마다 신스케라는 예명은 이때 스승한테서 받은 이름이다. 연예계 동기로는 아카시야 산마, 세키네 츠토무 등이 있다. 이후 무척 절친한 사이가 된 신스케와 산마는 처음 만났을 때 서로의 예명을 듣고 서로를 비웃었다고 한다.1977년 시마다 신스케는 요시모토 흥업이 운영하는 극장의 진행요원 출신인 동료 게닌 마츠모토 류스케[9][10]와 함께 만자이 콤비 신스케 X 류스케를 결성하여 1985년까지 활동했다. 이들은 보다 젊은층에게 만자이를 어필할 목적을 가지고 신스케의 불량 학생 시절 경험을 바탕으로 리젠트 머리를 하고 무대에 오르는 블량아(츳빠리) 만자이라는 새로운 스타일의 만자이를 고안해냈고 1980년부터 1982년까지 방영된 <The Manzai>에 출연, 이를 선보여 전국의 중,고교생 들에게 선풍적인 인기를 끌면서 스타덤에 올랐다. 1985년 5월 20일에 열린 그들의 콤비 해체 및 만자이 은퇴 기자회견이 전국에 생중계되고 기자회견에서 시마다 신스케가 언급한 다운타운이 곧바로 미디어의 주목을 받을 정도의 인기였다.
2023년까지 일본의 국민 개그맨으로서 활동했던 다운타운의 마츠모토 히토시가 고교생 시절 시마다 신스케의 만자이를 보고 감동해서 개그맨이라는 직업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11] 시마다 신스케도 마츠모토 히토시의 재능을 인정해서 아직 마츠모토가 무명이나 다름없던 신인 시절인 1985년 5월 20일, 기자회견을 열어 "신스케 X 류스케로는 한신 X 쿄진이나 사부로 X 시로, 다운타운을 이길 수 없다"며 콤비 해산-만자이 은퇴를 선언하게 된다.[12] 둘이서 진행하는 「마츠신」이라는 토크쇼가 있었는데, 말발에 있어서만큼은 일본내에서 당할 자가 없다는 평을 받는 두 사람인 만큼 가만히 앉아서 이야기하는데도 미친듯이 웃긴 최상급 퀄리티를 자랑한다.
1985년 만자이 콤비를 해체한 후에는 예능 프로그램의 MC로 활동했다. 시마다 신스케는 콤비를 해체하기 전에 이미 우리들은 익살족의 오프닝 코너 <웃긴 베스트 탠>의 사회를 보면서 MC 커리어를 시작한 바 있었다. 콤비가 해체된 80년대 중반부터 시마다 신스케는 MC로서 전성기를 맞이하여 수 많은 인기 예능 프로그램의 사회를 맡았으며 요시모토 흥업의 도쿄 지사장이었던 기무라 마사오의 제안으로 1989년 4월부터 방송을 시작한 TV 아사히의 정치 토론 프로그램 '선데이 프로젝트'의 메인 진행을 2004년까지 맡으면서 자신보다 먼저 MC로서 절정의 인기를 누리고 있던 친구 아카시야 산마와의 차별화를 꾀하는데도 성공했다. 또한 시마다 신스케는 1991년부터 TBS테레비에서 시작된 춘추 개편기 특별 프로그램인 <올스타 감사제>의 종합 사회를 첫 회부터 은퇴한 2011년까지 매년 맡았다.
2000년도 후반부터 시마다 신스케는 "안하는 선보다는 실천하는 위선이 낫다"라며 자신이 MC를 맡은 프로그램에서 선행특집이나 감동특집을 자주 짜기 시작하면서, 감동포르노의 남발, 방송의 사유화로, 적지 않은 시청자에게 반감을 주었다. 그 단적인 예로 원래는 법정 상담 프로그램인 「행렬이 생기는 법률사무소」라는 프로그램은 신스케가 기획한 기획에 휘들려서 원래는 단발성 기획이였던 "ㅇㅇSP(스페셜)!"이 남발되어 2000년도 후반부터는 정규 진행이 없어져, 매화 스페셜로 게스트와 토크를 돌리는, 제목만 법률인 프로그램으로 전락했다. 시마다 신스케가 방송마다 자주 말했던 "素敵やん(아름답지 않냐?)", "泣けるやん(눈물 나오지 않냐?)"등의 감동강요멘트는 후배인 마츠모토 히토시가 신스케식 감동강요방식을 비꼬는 의미로 많이 사용했다.
3. 게닌으로서의 활약상
3.1. 만자이시
신스케 x 류스케의 만자이 모음
시마다 신스케는 개그맨 데뷔를 스탠딩 만자이로 했고 MC로 대성하기 전에는 신스케 X 류스케 콤비로 활동하면서, 자신들의 만자이를 보러 온 관객들 대부분이 젊은층이라는 것을 캐치하여 동네 양아치들이 대화를 주고 받는 만자이 스타일인 "츳빠리 만자이"를 창시하여 만자이계를 주름잡았다. 방송 작가 후루카와 카이치로는 "기존의 만자이는 츳코미가 보케를 비웃는 패턴이었다. 그런데 신스케 X 류스케의 만자이는 보케들끼리 이야기를 주고 받는 것에 가깝다. 이것은 대혁신이라고 할 수 밖에 없다."라고 두 사람의 만자이를 극찬했다.
"츳빠리 만자이"는 시마다 신스케가 기존의 만자이를 분석하다가 만든, 당시로서는 "유사 만자이"에 가까운 파격적인 스타일이었다. 신스케는 만자이의 보케와 츳코미간의 대화에서 마(間)[13]가 많으면 많을 수록, 긴시간의 연습과 내공이 필요하고, 실수를 할 위험이 커진다는 사실을 발견해내고 마(間)의 개수를 줄이기 위해 아이카타인 류스케가 츳코미를 해도 보케를 맡은 자신이 말을 멈추지 않고 빠른 탬포로 대사를 말하는 새로운 만자이를 만들었던 것이다. 신스케의 선배인 나카타 카우스는 "너희가 전통을 파괴했다"라며 화내었고, 시마다 신스케도 "이런 방식은 절대 오래 못가요. 몇 년 안에 한계가 올테니 그때까지만 눈감아주세요"하고 사죄하였다. [14]
시마다 신스케는 고전 만자이부터 당시의 현대 만자이까지 음원을 다 들으며 만자이의 변천사를 확인하고, 공책에 최신 만자이의 대사/시간/타이밍/어조/음색/을 기록하여 분석, 타이머로 타이밍과 시간을 재면서 연습하여 최초로 만자이 방법론을 체계적으로 정립한 사람이다.[15] 그 전까지의 만자이는 스승밑에 들어가서 구전으로 배우는 전통적인 방법이었지만, 신스케가 행한 만자이의 수치화/이론화를 기초로 현대 만자이의 시스템으로 재정립되었다. 현대 만자이에서 따로 스승이 필요하지 않게 된 것은 요시모토 흥업이 요시모토 종합 예능학원을 설립한 이후인데 요시모토 종합 예능학원이 설립될 수 있었던 배경에는 기존의 "스승으로부터 보고 훔쳐라" 식으로 모호했던 만자이 기초가 시마다 신스케의 이론을 기반으로 웃기는 음의 높낮이/0.01초의 타이밍 등으로 구체화/체계화된 것에 있었다. 현재 일본 오와라이 게닌 방송에서 자주 타이밍이나 시간, 음의 높낮이를 따지는 장면이 포착되는 것도 신스케가 만든 기초 이론의 연장선에 있다. 실제로 시마다 신스케는 요시모토 종합 예능학원 설립 초기에 다운타운을 비롯한 여러 후배들을 직접 가르치기도 했다.
2001년 시마다 신스케는 자신의 소속사 요시모토 흥업에 「새로운 만자이 콘테스트를 기획하고 싶다」면서 기획안을 냈고 그 결과 M-1그랑프리라는 만자이 대회가 개최되었다. 신스케는 대회 집행위원장을 맡았다. M-1그랑프리는 2001년 첫 대회를 시작으로 10년 동안 계속 개최되면서 수많은 인기 게닌들의 등용문이나 다름없는 대회로 자리잡았다. 시마다 신스케가 해당 대회를 개최한 이유는 「내가 인기 사회자로서 활동할 수 있게 된 것은 데뷔 초기부터 8년 동안 계속했던 만자이 콤비 '신스케 X 류스케' 활동으로 얻은 경험과 인기가 밑바탕이 되어 가능했다.」고 늘 생각해왔기에 자신의 뒤를 이을 차세대 만자이 게닌을 직접 발굴하여 프로듀스 하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또한, 신스케는 중간에 만자이를 그만둔 것에 대한 죄책감으로 「지금의 인기를 누릴 수 있게 해준 것에 대한 보은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항상 해 왔다고 한다.
3.2. 예능 프로그램 MC
시마다 신스케는 은퇴하기 직전까지 11년간(2000년~2011년) 가장 많은 수의 프로그램(총 14개)을 연간 평균 시청률 TOP 10에 안착시킨 명 MC였다.(2위는 동기인 아카시야 산마로 12개)시마다 신스케는 프로그램 진행 능력이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특출난 것으로 유명했다. 특히, 말발이 굉장히 뛰어난데 엄청난 순발력을 지니고 있어서 1초만에 분위기를 전환시키기도 하고 애드립이 끊이지 않으면서도 그게 매번 빵빵 터진다. 섹드립에도 일가견이 있다. 자신이 MC를 맡은 프로그램에 출연하는 연예인들에게 예능 캐릭터를 부여하는 능력도 탁월해서 다른 MC라면 신경쓰지 않을 사소한 부분까지 캐치하여 분량이나 캐릭터를 만들어냈다. 덕분에 시마다 신스케가 맡고 있었던 장수 프로그램들은 대부분 오직 그의 진행 능력 하나로 존재하고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16]
그러나 신스케는 방송을 진행할 때 자신의 말발을 무기로 거의 강요하다시피 하면서 웃음과 감동을 유도하려 하고, 게스트의 의견을 깔아뭉개며 자기가 원하는 쪽으로만 대화를 이끌어나갔기 때문에 안티도 많은 개그맨이었다.[17][18]
이렇게 짜여진 각본과 케릭터를 강요받은 스트레스로 연예계를 은퇴한 연예인은 적지 않다. 시마다 신스케가 기획하고 MC를 맡은 "퀴즈! 헥사곤!"에서 바보 케릭터로 낙인찍힌 모델인 칸베 란코는 바보인 척을 계속해야한다는 압박에 연예계를 은퇴하였고, 엔카 가수인 코우다 신은 바보 케릭터에 대한 압박에 곡을 원래 분위기로 부룰수 없게 되어, 연예계를 은퇴하여 절에 들어가 승려가 되었다.
게다가 시마다 신스케는 자신이 한 말을 수시로 뒤집는 것은 기본에다, 마츠모토 히토시 같이 좋아하는 후배들은 대놓고 밀어주지만, 도쿄03 같이 마음에 안 드는 후배 게닌들은 무자비하게 짓밟는 정말 고압적인 스타일을 가지고 있었다. 실제로 시마다 신스케는 일본 연예계에서 싸움을 잘하고 성격도 불같은 군기반장으로 유명했다. 일본 예능계 전체에서도 알아주는 극 S(ドS) 게닌인 하마다 마사토시조차 신스케 앞에서는 순한 양이 될 정도였다.[19] 하마다가 시마다 신스케와 방송 중에 신스케 앞에서 대놓고 담배를 피우다가 신스케가 대노해서 하마다의 입에 3개피를 더 쑤셔넣은 적도 있다. #
4. 취미 및 기호
- 불량 학생으로서 싸움에 이기기 위해[20] 고등학교에 다닐 무렵부터 복싱을 배워왔으며 이로 인해 복싱에 무척 조예가 깊고 일본에서 복싱이 마이너한 스포츠로 인식되는 것을 안타까워할 정도로 상당한 복싱 팬이다.
- 모터스포츠에 지대한 관심을 보인 연예인으로 유명했다. 1986년부터 1995년까지 오토바이 레이싱 팀인 「팀 신스케」의 감독으로 스즈키 8시간 내구 레이스와 전일본 로드 레이스 선수권에 참전했고 NHK의 스포츠 프로그램에서 시마다 신스케의 인터뷰가 방송되기도 했다. 1980년대 후반은 버블 경제 시대였기 때문에 모터스포츠계에는 많은 유명인들이 감독으로 한 자리 잡은 레이싱 팀이 2 륜 · 4 륜을 불문하고 난립하고 있었지만, 신스케는 스스로 기획서를 작성하고 직접 후원 기업들을 돌아 다녔으며 레이싱 경주 당일은 스스로 전략을 수립하고 라이더와 직원에게 지시하는 등 다른 연예인 감독과는 완전히 차별화된 행보를 보여주었다. 1999년에 시마다 신스케가 직접 당시의 활동을 회고하며 쓴 저서 「바람이여, 스즈카에」는 소설이지만 논픽션에 한없이 가까운 작품이다.
- 일본에 오키나와 붐을 일으킨 장본인일 정도로 오키나와섬과 인연이 깊은 편이다. 이국적이면서도 푸근한 시골같은 이미지가 좋았다는 듯. 심심하면 방송에서 '이시가키 섬'이나 '미야코 섬' 같은 야에야마 제도의 섬들 예찬을 늘어놓았고, 실제로 「마츠신」에서 꿈이라고 말 했던 '이시가키 섬에서 하는 찻집'을 은퇴 후 「토무루」라는 이름으로 오픈했었다. 다만 이런 오키나와에서의 장사는 금전적 목적과는 거리가 있다.[21] 거주인구도 얼마 없고, 대중교통도 불편하기 짝이 없는 위치들이라... 가격도 그다지 비싼 편이 아니었고 은퇴한 후배 개그맨들을 찻집의 점장으로 앉히고 밥벌이를 만들어 주기도 했었다. 현재 찻집은 문을 닫은지 오래다.
- 시마다 신스케는 방송에서 일본의 경제 문제나 정치에 대한 관심을 표시한 경우가 많은 개그맨으로 유명했다. 비록 정치계 입문설은 자주 부인했으나, 실제로 고이즈미 준이치로를 지지하며 선거유세까지 한 적도 있었다. 그래서 방송에 게스트로 정치인이 나오면 깨갱했다. 그 예로 아소 타로 전 총리가 총리되기 전에 「행렬이 생기는 법률상담소」에 나왔을 때.
5. 사건 사고
5.1. 매니저 폭행
2004년 10월 25일. 자신의 신입 여자 매니저를 폭행, 고발당해 벌금을 물었다.당시 시마다 신스케는 자신이 진행하는 예능 프로그램 <퀴즈 신스케 군>의 녹화를 위해 테레비 아사히의 스튜디오에서 대기하고 있었는데 신입으로 온 여자 매니저가 자신에게 한 인사가 마음에 안 든다며 그녀를 별실로 데려가 무참히 폭행했다고 한다. 매니저는 시마다 신스케에게 주먹으로 맞았다고 신스케를 고소하면서 자신이 쓰고 있던 안경이 부러진 것과 신스케가 자신을 향해 집어던진 가방 속 내용물이 산산조각 난 모습을 증거물로 제출하였다.
여자 매니저가 당시 시마다 신스케를 향해 건낸 인사는 "안녕하세요 고등학교 때 오사카의 키무라 팀이 저를 귀엽게 봐주셨어요. 그때는 정말 신세졌습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였다고 하며 시마다 신스케는 "오사카의 키무라 팀에 있던 자신의 선배에 대해 안 좋은 감정이 있어서 갑자기 폭주를 했다."며 자신의 행동을 변호했다.
벌금형 판결 이후 시마다 신스케는 근신 처분만 받고 얼마 안가서 곧바로 연예계에 복귀하였고 여자 매니저는 피해자였음에도 불구하고 연에인에 대한 안전 배려를 위반했다며 요시모토 흥업에서 해고당했다. 2011년, 시마다 신스케와 야쿠자 사이의 유착 관계가 폭로된 이후 야쿠자의 압박에 의해 소속사가 그녀를 일방적으로 해고시킨 것이 아닌가 하는 의혹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5.2. 후배 여자 연예인에게 성상납 강요
시마다 신스케는 이미 1980년에 결혼했음에도 불구하고 방송에서 "남자의 바람기는 어쩔 수 없다."는 말을 자주했으며 "부인과 이혼 위기가 몇 번 있었다.", "내 아내는 내가 다른 여자랑 자는 것을 눈감아준다."라고 본인이 직접 인정할 정도로 평소 사생활이 더러운 것으로 유명했다.[22]. 심지어는 방송에서 "성희롱이 뭔지 의미를 모르겠어. 예능 프로그램에 처음 출연한 신인 여성 아이돌이 긴장했을 때 가슴을 주물러주면 긴장이 풀리잖아 그게 뭐가 나빠?", "일본의 연예계는 야쿠자의 세계보다 더 더럽다." 등의 발언을 하기도 했다.그래서 시마다 신스케가 방송에서 밀어주던 여성 탤런트들에게는 늘 성상납 의혹이 나돌았는데 # 결국 시마다 신스케 은퇴 후 후배 연예인이 신스케가 자신에게 성상납을 강요했다는 폭로를 함으로서 이러한 의혹이 사실로 밝혀졌다.
2021년 4월에 성공한 사업가로도 유명한 마리에라는 모델이 인스타 라이브를 통해 10대 시절, 시마다 신스케가 자신에게 성상납을 강요했다는 폭로를 한 것이다.#
신인 시절, 시마다 신스케가 진행하는 방송에 출연하게 된 마리에는 연예계 후배들이 방송 녹화전에 시마다 신스케의 대기실에 가서 신스케에게 인사를 하는 관행을 몰라서 그의 대기실에 가지 않았는데 방송 녹화가 끝나고 신스케가 유일하게 인사를 하지 않은 마리에에게 자신이 말한 장소로 와서 자신에게 사과하라고 언질을 줬다고 한다. 그래서 마리에는 긴장한 채로 신스케가 알려준 장소에 갔는데 그 곳에는 수 많은 게닌들과 그라비아 아이돌들이 모여있었고 중앙에 앉은 시마다 신스케가 자신에게 성상납을 하라는 제안을 했다고 한다. 마리에에 의하면 신스케의 제안에 거부를 하자 당시 주위에 있던 데가와 테츠로를 비롯한 게닌들이 그녀에게 성상납을 하라며 부추겼다고. 이때 시마다 신스케는 모여있는 사람들에게 자신이 품었던 여자들이 얼마나 크게 성공했는지를 무용담처럼 늘어놓았다고 한다.
그러나 그녀는 신념을 굽히지 않고 끝내 신스케에게 성상납을 하지 않고 자리를 떴으며 이후 소속사에다 시마다 신스케와는 같이 방송을 못하겠다며 사과를 했다고 한다. 그 결과 그녀는 연예계에서 매장될 뻔 했지만 타모리와 폭소문제를 비롯한 모리타 카즈요시 아워 웃어도 좋다고!의 식구들이 그녀를 방송에 출연시킴으로서 연예계 생활을 이어가게 해주었다고 한다.
시마다 신스케는 원래 이미지가 좋지 않았고(...) 이미 2011년에 은퇴해서 타격이 크진 않지만 옆에서 부채질했던 데가와 테츠로에게 불똥이 튀어서 욕을 먹는 중이다. 테츠로측은 당연히 부인하고 있다.
6. 불명예 은퇴
사진은 NNN 스트레이트뉴스 오프닝 영상 중 캡쳐된 사진이다.
2011년 야쿠자와 연루된 연예인이라는 것이 폭로되어 연예계 은퇴를 발표했다.#
은퇴 기자회견에서 시마다 신스케는 「과거 도움을 받은 야쿠자와 2~3회 정도 다른 사람을 통해 안부를 주고받은 일이 있고, 우연히 만났을 때 인사를 한 것이 전부였기에 본인은 '이 정도라면 OK'라고 생각했으나, 소속사에게 이것이 큰 문제임을 들었고 그렇다면 은퇴가 맞는 것 같아 은퇴를 선택했다.」 「자숙으로 끝낼 수도 있었으나 본인의 의지로 은퇴를 선택했으며, 연관이 있던 야쿠자와는 앞으로 연락하지 않을 것이나 도움을 받은 사람의 은의로써 밖에서 마주치면 먼발치에서 고개를 숙이겠다.」고 당당히 말했다. 신스케는 「'코미디로 돈을 벌 수 있는 것'이나, '후배 연예인을 프로듀스해서 성공시키는 것'이 재미있기 때문에 방송을 계속 했던 것이지, 돈 자체에 대한 욕심은 (이미 벌만큼 벌어서) 별로 없다」라고 밝혔다.[23] 또한, 「본인과 관련된 각종 루머들이 유포되는 것을 그동안은 연예인이라는 입장상 참았지만 추후로는 무조건 고소하겠다.」라며 기자회견 중 엄포를 놓기도 했다.
이 사건 때문에 닛케이 엔터테인먼트에서 발표하는 싫어하는 게닌 랭킹 1위에 오르는 불명예를 얻었다. 에가시라 2:50 10년 연속 1위의 독주를 막았다. 물론 에가시라 2:50가 시마다와 달리 공사 구분이 철저한데다가[24] 투표 당시 도호쿠 대지진 때 봉사를 하고 개념 발언 등을 하면서 나름 호감도를 산 것도 있긴 있다.
중앙이 '시마다 신스케', 왼쪽이 '강홍문', 오른쪽이 '타카야마 키요시'다. |
시마다 신스케가 야마구치 야쿠자 넘버 3인 재일교포 야쿠자 하시모토 히로부미(한국명:강홍문)와 관련이 있게 된 계기는 1998년 간사이 계열 방송 신스케의 인간 만다라(紳助の人間マンダラ) 녹화 중에 시마다 신스케가 "스케쥴이 지연되는 바람에, 다음 방송 스케줄 장소인 이 곳으로 급히 가야돼서 택시를 탔는데, 그 택시 앞을 구일본제국군의 군가를 틀면서 느릿하게 서행하는 우익차량이 막아버리고 있었어. 거기에 짜증이나서 "왜 느릿느릿 가냐고" 소리를 치자, 우익차량에서 우익청년과 아재들이 줄줄히 나타나면서 언쟁이 벌어졌고, 우익쪽에서 "너 이 국화(일본/천황가의 꽃)문양을 보고 아무 생각없냐!"라는 말에 "국화문양(항문)은 내 엉덩이에도 있구만!"라고 바로 대꾸했지. 내 대답에 우익들이 아연실색하면서 멍하게 있길래, 나는 그 틈을 타서 택시기사에게 "기사님, 지금이에요!"해서 우익들을 남기고 줄행랑해서 이 녹화장에 도착했어."라는 잡담을 했는데, 편집될줄 알았던 이 잡담이 방송되어서, 그걸 본 야쿠자의 이나가와카이(稲川会) 계열[25]의 우익단체 타이토우샤(大行社)[26]가 방송국 앞에서 큰 소리로 군가를 부르거나 욕설을 하는 등의 횡포를 부리기 시작한 것에서 비롯되었다. 이들은 평소 지한파라는 의심을 받던 신스케를 미워하고 있었다.[27] 이나가와카이는 이전 야마구치구미와 반목하던 사이였지만 기타큐슈의 쿠도카이 회장이 경찰에 붙잡히고 난 이후 야쿠자 업계에 위기의식이 나타나 오월동주식으로 협력하고 있으며 키요다 지로는 시마다 신스케와 그닥 연결점이 없는 사람이라 이나가와카이가 시마다 신스케를 미워한다는 것은 루머일 가능성이 높다.
자신뿐만 아니라 방송국, 다른 출연자들에게까지 위협이 들어가는데도 불구하고, 야쿠자와 연계되어 있는 우익단체를 건들기 싫었던 경찰이 데모의 허가를 받고 하는것이라는 이유로 보기만하고 대처하지 않는 상황이 계속되자 시마다 신스케는 친분이 있었던[28] 전 프로복싱 세계챔피언[29]이자 야쿠자와 연줄이 있는 와타나베 지로(渡辺二郎)에게 이 일을 어쩌면 좋냐고 상담했고, 그 말을 들은 와타나베가 야마구치 야쿠자 넘버 3인 재일교포 하시모토 히로부미(강홍문)을 시마다 신스케에게 소개, 하시모토가 우익들의 뒷배를 봐주고 있는 야쿠자끼리 담판을 지어 사건을 해결했다.
사건 해결 후 시마다 신스케는 은인인 하시모토와 술동무가 되었고 그와 부동산업도 같이 했다. 그러던 중 신스케와 하시모토를 연결시켜준 와타나베가 사기 및 협박으로 체포 되었을 때, 압수 당한 휴대폰에서 시마다 신스케와 하시모토 히로부미를 연관짓는 메일 106통이 나왔고 이 중 경찰을 욕하는 내용이 들어있는 메일이 있어서 경찰은 괘씸죄로 신스케도 연루시켜서 고발준비를 한다. 요시모토측은 사전에 그 메일 내용을 입수하는데 성공, 시마다 신스케가 발뺌하지 못하도록 메일을 보여주면서 신스케에게 하시모토와의 관계를 따졌고, 시마다 신스케는 「관계를 부정하지도 않겠지만, 이게 문제가 되고, 관계를 끊어야 한다면, 난 연예계를 은퇴하겠다.」라고 말하여 갑작스럽게 은퇴를 선언했다.
시마다 신스케가 갑작스럽게 은퇴를 선언한 것에는 구해준 은인의 은혜를 저버리지 않았다는 측면도 있지만, 갑자기 인연을 끊어버리면 야쿠자인 하시모토가 분노하여 뭘 할지 모르기에, 자기가 은퇴하는 길을 선택했다는 측면도 있다고 분석된다. 특유의 언변으로 전국민적인 인기를 누리며 탑의 위치에서 군림했던 개그맨이 한순간에 몰락했다는 공통점 때문에 시마다 신스케를 한국의 서세원과 비슷하다고 평가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시마다 신스케의 경우 순전히 개인의 인성이 안좋아서 몰락한 서세원과는 상황이 다르며 일본내에서는 시마다 신스케를 동정하는 사람들도 존재한다.
7. 은퇴 이후
은퇴 이후로 TV에 직접 출연은 없지만 자료영상이나 담당하던 방송 중 현재도 지속중인 몇 편의 예능방송에서 가끔 과거 화면들이 나올때 간혹 모습을 볼 수 있다. 몇몇 후배들의 이벤트에 깜짝 등장하기도 했다고 하는데, 그 때마다 "방송 복귀는 절대 없다"라고 강조한다고 한다. 또 후배들과도 연락을 지속해서, 후배들을 통해 꾸준히 근황이 들려오는 편. 주로 하와이와 오키나와를 왔다갔다하며 지낸다고 한다.그러다가 2020년 1월 13일, 헥사곤 패밀리로 친분이 있던 misono[30]의 유튜브 채널에 등장하며 정식 방송출연은 아니지만 어쨋든 거의 8년 반 정도만에 미디어에 모습을 드러냈고, 아무리 안좋은 일로 은퇴했다곤 해도 신스케 클래스의 인물이 유튜브에 등장한 것으로 꽤나 화제가 되었다. 이 방송에서 신스케가 밝히기를 「현역으로 활동했을 때는 나도 모르게 다른 게닌들을 따라할까봐 내가 출연한 프로그램을 제외하면 예능 프로그램을 시청하지 않았다」고 한다.
2023년 1월 6일 AbemaTV에서 방송된 에디온 아레나 오사카에서 열린 복싱 이벤트 '3150FIGHT vol.4'를 링사이드에서 관전하던 중, 주최자인 가메다 코우키로부터 초대 게스트로 이름을 소개받으며 오랜만에 TV 카메라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1] 일반적으로 연예인의 본명은 잘 알려져 있지 않은 편이지만 산마와 신스케는 토크가 물이 오르면 서로 본명으로 불러대는 경우가 있어서 둘 다 본명이 꽤 알려져 있는 편이다.[2] 2011년 은퇴와 함께 퇴사[3] TV 쇼 진품명품의 원조 프로그램.[4] 솔로몬의 선택의 원조 프로그램.[5] 퀴즈 육감대결의 원조 프로그램. 육감대결에서의 "너 모르지?", "다알지?"는 각각 "헥사곤!", "세이프!"에 해당한다.[6] 전체적으로 되도 않는 일에 쉽게 감동하여 자신의 방송을 통해 도움을 주는 어린아이같은 면과, 뻔뻔하면서도 돈과 권력을 밝히는 못된 이미지가 공존하는 연예인이었는데 여자 매니저 폭행 사건으로 이미지가 실추되기 시작했고 2011년애 야쿠자와 관련된 인물이었다는 것까지 폭로되자 여론이 급속히 악화되면서 본인이 연예계 은퇴를 선언했다. 이후 후배 여자 연예인 성상납 문제까지 터지면서 방송계에서 영구히 퇴출되었다.[7] 대한민국에서나 일본에서나 MC는 원래 희극인들이 맡는 역할이 아니었다. 70년대, 콩트 55호(コント55号)가 각종 버라이어티의 사회자를 맡으면서 개그맨이 MC도 할 수 있다는 것을 대중들에게 처음 알렸다면, 타모리와 시마다 신스케는 개그맨으로 이름을 알린 뒤 MC 쪽에서도 크게 성공하면서 대중들에게 MC 역할을 맡는 개그맨을 각인시켰다.[8] 신스케의 부모님은 진지하고 온화한 성격으로 신스케가 양아치짓을 하다 경찰에 붙잡혀도 "대화로 해결할 수 있다."며 단 한번도 신스케에게 격노하지 않았다고 한다.[9] 본래 시마다 신스케는 아카시야 산마와 콤비를 짜고 싶어했으나 산마는 핀게닌으로 활동하기를 원했기에 신스케의 제안을 거절했다. 대신 산마는 신스케에게 직접 마츠모토 류스케를 소개해줬다고 한다.[10] 마츠모토 류스케는 말년의 인터뷰에서 "신스케 X 류스케 전성기 시절 300명의 여자와 잤다."고 본인입으로 직접 말했을 정도로 평소 사생활이 문란한 것으로 유명했기 때문에 동료 개그맨들 사이에서 평판이 좋지 않았고 1985년 신스케의 의향에 따라 콤비가 해체된 후 개그맨으로서 뚜럿한 커리어를 만들지 못하고 1987년, 요시모토 흥업을 퇴사함으로서 개그계를 떠났다. 이후 류스케는 AV를 제작하는 회사의 경영을 맡은 것을 시작으로 사업가로 전향했지만 사업 파트너들과의 불화로 운영하던 AV 제작 회사가 부도나고 부업으로 한 카페까지 망하며 1억 3000만엔이라는 막대한 빚이 생겼으며 결국, 1998년에 파산을 신고했다. 이후 류스케는 연예계로의 복귀를 시도했지만 후배 연예인 및 제작진들과 불화를 겪어서 실패하고 2006년, 만 49세의 젊은 나이에 갑작스러운 뇌출혈로 세상을 떠났다.[11] 원래 마츠모토 히토시의 고교 졸업 후 지망은 인쇄업자였지만 시마다 신스케의 만자이를 보고 개그맨이라는 직업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때마침 친구인 하마다 마사토시가 마츠모토의 웃기는 재능을 높이사서 그에게 막 설립된 개그맨 양성소 요시모토 종합 예능학원에 같이 입학하자고 설득하여 1기생으로 입학, 본격적으로 개그맨이 되었다.[12] 이 에피소드는 서로가 좋아하는 네타로, 「마츠신」에서도 자주 써먹었으며 야쿠자 사건으로 은퇴를 표명할 때도, 마츠모토에게 만큼은 먼저 알렸다고 한다.[13] 대사와 다음 대사까지의 시간 또는 보케에 대한 츳코미까지의 시간. 엄밀히 말하면 호홉 리듬이나 전체적인 이야기 진행의 리듬을 뜻함. 만자이가 재미있냐 없냐를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이다.[14] 실제로 시마다 신스케는 우리들은 익살족에서 '웃긴 베스트 텐'을 진행하여 인기를 얻자 「츳빠리 만자이의 유행은 금방 식을 것이고 방송 생활을 오래하려면 MC로서 활동해야 한다.」라고 판단, MC 커리어도 병행하기 시작했다.[15] 시마다 신스케가 막 신스케 X 류스케로서 활동을 시작할 때 선배인 카미오카 류타로가 신스케의 만자이를 보고 그를 저녁 식사 자리에 불러서 "너는 어떤 만자이를 하고 싶니?"리고 물었고 신스케는 "지금까지 없었던 새로운 만자이를 하고 싶습니다."라고 당돌하게 말했다. 그러자 류타로는 "좋아 그럼 내가 고전부터 현대까지 거의 모든 시대의 만자이 음원을 줄테니 한번 연구해봐라"라면서 자료들을 주었다고 한다. 이후 신스케는 카미오카 류타로를 스승으로 여기며 존경했고 2000년에 류타로가 연예계 은퇴를 선언하자 "선배는 내 연예인으로서의 길잡이시니 은퇴하지 말아달라."라며 은퇴를 만류했다고 한다. 그러나 류타로는 신스케에게 "너는 이미 나를 넘어섰다."라고 답하며 그대로 연예계를 은퇴했다.[16] 때문에 은퇴 선언 이후에는 진행하던 프로그램들이 그대로 유지될지, 신스케의 빈자리는 누가 차지하게 될지에 대해 많은 추측이 있었다. 실제로 시마다 신스케가 은퇴하자 퀴즈 헥사곤과 시마다 신스케 사장의 프로듀서 대작전 같은 프로그램은 강판되었다. 대신 신스케의 영향력이 크긴 했지만 방송 특성상 대체MC를 투입해도 어떻게든 이끌어 갈 수 있는 방송은 지속을 결정, 이후 이마다 코우지가 대부분의 방송(행렬이 생기는 법률 상담소 초기와 인생이 바뀌는 1분간의 깊고 좋은 이야기, 올스타 감사제, 개운 뭐든지 감정단의 4개 방송)을 물려받았다. 이후 행렬이 생기는 법률상담소는 이마다의 동기인 히가시노 코지와 고토 테루모토가 번갈아 맡는 형식으로 바뀌었다.[17] 후배인 개그콤비 킹콩의 멤버 카지와라 유우타는 여러 방송에서 "산마 선배는 몸 속에 숨긴 수많은 무기를 자유자재로 사용하며 어떤 상황에서 몇명의 상대든 유연하게 싸우는 타입이라면, 신스케 선배는 상대를 마운트 포지션으로 잡아 움직이지 못하게 한 후 무자비하게 난타하는 타입"이라며 두 사람의 개그 스타일을 비유했다.[18] 2014년 10월 21일 방송된 와이도나쇼(ワイドナショー)에서 마츠모토 히토시, 타케다 테츠야, 히가시노 코우지가 신스케의 은퇴 후, 그의 방식을 분석했는데, 아카시야 산마는 자기가 원의 중심에 서서 자기가 주인공으로서 토크를 돌리는 방식인 반면, 시마다 신스케는 자기가 원밖에서 돌면서 게스트들에게 케릭터를 부여하여, 그 사람들을 주인공으로 토크를 돌리는 방식이라고 분석했다. 그래서 신스케는 자기가 정한 케릭터로 돌리는 토크가 이미 머리 속에 있어서, 게스트나 다른 사람이 그 케릭터에 어긋나는 행동과 말을 하면, 무시하거나, 토크를 끊어버리면서 자기 방법을 강행하는 버릇이 있다고 분석했다.[19] 방송에서는 시마다 신스케가 마츠모토를 칭찬하면서 하마다를 무시하는 언행을 하면 하마다가 화를 내며 신스케의 뒤통수를 때리는 개그를 하기도 했자먼 사석에서의 하마다는 신스케에게 감히 대드는 것은 생각치도 못할 정도로 신스케를 무서워했다고 한다. 다만, 이는 시마다 신스케가 하마다 마사토시의 직속 선배이니 그런 것도 있다. 우리나라로 치자면 박명수가 이경규 앞에서 쩔쩔매는 모습을 생각하면 쉽다. 일본이나 대한민국이나 개그계는 군기가 쌔기로 유명하다.[20] 시마다 신스케는 본인 스스로 "나는 승부사 기질이 있다." 라고 인정한 바 있다. 만자이 이론을 체계적으로 정립한 것이나 연예인 모터스포츠 감독으로서는 드믈게 자신이 직접 치밀하게 전략을 짰던 것 모두 "내가 상대(관객 혹은 상대 레이싱 팀)와의 싸움에서 져서는 안된다." 는 마음가짐을 밑바탕에 두고 행한 일이라고 밝혔다.[21] 시마다 신스케는 은퇴하기 전부터 방송에서, 이미 죽을때까지 아무 일을 하지 않아도 걱정없을만큼 돈을 많이 벌었다는 말을 자주 했었다.[22] 시마다 신스케는 불륜으로 연예계 활동을 정지한 베키에 대해서도 「모든 것을 잃어도 좋다고 생각하고 사람을 사랑하다니, 대단해」라며 응호했다.[23] 실제로 전에 마츠모토 히토시와 함께 진행한 방송 마츠신에서 시마다 신스케가 자신을 둘러싼 소문에 대해 열변을 토하며 해명하는 시간이 있었는데, 다른 잘못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하지 않았으나, 돈만 밝힌다는 이미지에 대해서는 자주 부정해 왔다. 기존 마츠신에서의 발언 등을 보면, 돈도 쓸만큼은 있고, 은퇴를 수시로 고려하긴 했던 모양이다.[24] 에가시라는 개그 안 할 때는 상당히 신사적이고 점잖은 사람인데다 영화평론집을 낼 정도로 의외의 면모도 있다고 한다.[25] 유명한 폭력단으로 한국 여성들을 꾀어내 나쁜 짓을 많이 하던 야쿠자 단체이며 극우 가두선전을 자주한다.[26] 이 타이토우샤(大行社)는 이나가와카이 산하의 극우조직인데 이나가와카이는 시간이 지나 재일출신 키요다 지로가 총재가 된다. 산하이지만 사실상 활동은 별개적이다.[27] 시마다 신스케는 평상시 방송에서 지한파적인 면모를 보인적이 있어서 일본내에서는 신스케가 재일이 아니냐고 의심하는 자들도 있다.[28] 시마다 신스케는 복싱을 좋아해서 와타나베 지로를 알고 있었고, 둘이 같이 방송에 출연한 것을 계기로 서로 친하게 지내고 있었다. 후에 와타나베가 억울하게 살인사건에 연루되었을 때 신스케가 증인이 되어 변호하기도 했다.[29] 은퇴 후에 사기와 협박 등의 사건으로 복싱계에서 영구제명 되었다.[30] 코다 쿠미의 동생이며 본인도 가수이기도 하다. 언니보다 먼저 데뷔했으며 DAT(Day After Tomorrow)의 보컬이었다. 해체 이후 솔로로 활동할 때 헥사곤 패밀리에 합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