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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치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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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상세3. 역사
3.1. 전근대의 신앙치료3.2. 현대의 신앙치료
4. 문제점
4.1. 법적 문제4.2. 의학적 문제
5. 관련 문서

1. 개요

信仰治療, Faith healing
종교적인 신앙을 통해 질병의 치료를 시도하는 행위 전반을 뜻한다. 좁게는 신앙만으로 치유하는 것을 의미하지만, 넓게는 치료에 신앙을 접목시키는 모든 행위를 뜻한다.

2. 상세

일반 개신교에서도 이단으로 취급되는 유사과학. 신앙치유 혹은 신유라고 부르기도 한다. 단, 신유라고 하면 개신교계에서는 '남의 병을 낫게 할 수 있는 성령의 은사' 같은 것으로 취급되는 경향이 있어서, 엄밀히 말하자면 이 문서에서 말하는 신앙치료와는 좀 다르다.

이러한 신앙을 통한 치료 행위는 비과학적이다. 무슨 얘기냐면 과학적 방법론이 적용되지 않았다는 얘기다. 즉 일정한 조건 아래 변수의 투입으로 도출된 결과 - 도출된 결과를 바탕으로 기존의 이치에 맞는 가설 확립과 같은 과학적 방법론이 신앙치료에는 전혀 없다. 신앙만으로 치유를 시도했을 경우 치유는 되려 겉보기에 멀쩡해져서 치료되었다고 판단하고 방치하였다가, 병이 재발하거나 악화되면서 더욱 큰 피해를 입는 사례가 많다.

3. 역사

3.1. 전근대의 신앙치료

질병의 원인에 대해 제대로 규명하지 못했던 고대에는 이를 '신이 인간에게 내리는 징벌'이라고 해석하게 마련이었으며, 이에 제물을 바치는 등 손이 발이 되도록 싹싹 빌고 정신을 가다듬고 기도하면 신의 용서를 받아 결국 나을 수 있다고 여겼다. 이렇게 신앙(또는 주술)을 통해 질병을 치유하려는 것은 사실상 종교의 역사와 함께 시작되었다고 봐도 무방하며, 세계의 거의 모든 종교에 이런 식의 치료 행위가 존재한다. 사실상 이 때의 관점으로는 이러한 신앙치료가 제대로 된 '의료 행위'로 간주되었을 것이다. 영어에 'medicine man'이라는 단어가 있는데, 약사나 약장수가 아니라(특히 북미 인디언의) 치료 주술사를 의미한다. 즉 이 시절에는 주술과 의술의 경계가 모호하였다는 이야기.

이후 어느 정도 문명이 발달하게 되면서, 사람들이 경험적으로 알게 된 의료적 지식과 종교치료가 결합하는 양상이 나타났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환자들이 의술의 신 아스클레피오스 신전에서 요양했다는 이야기가 있으며, 구약성서에 나오는 유태인의 율법 중에는 한글 성서에서 나병이라고 번역한 피부병에 걸린 자는 병이 나을 때까지 마을에서 떨어진 곳에서 지내야 하며, 그가 입었던 옷가지는 불태워야 한다는 조항이 있었다.

이를 현대의 기준으로 분석해 보면 치료와 예방에 제법 도움이 되는 행위였음을 알 수 있다. 아스클레피오스 신전은 도시와 멀찌감치 떨어진 외딴 곳에 지어졌기 때문에 환자의 생활 환경을 개선하여 어느 정도 요양소의 역할을 수행함으로써 실제 병이 낫는 데에 도움이 될 수 있었고, 덤으로 아스클레피오스 신전 사제들은 의술의 신을 모시는 사제들인 만큼 의료행위도 가능했다. 유태 율법 역시 환자를 격리하고 전염의 매개가 될 수 있는 오염된 의복을 제거해 어느 정도 피부병의 전염을 방지하는 데에 기여할 수 있었다.

우리나라에서도 귀신 탓에 질병에 걸릴 수 있다고 여겼다. 물론 한의학적 처방이 기본이었지만, 단순한 질병이 아닌 귀신의 농간이나 팔자 탓이라고 생각하면 집안 노인들이나 주부가 간단한 푸닥거리나 기타 주술을 행하였다. 만약 집안의 노인들 선에서 할 수 있는 주술로 해결 안 되겠다 싶으면 경쟁이를 불러 옥추경을 낭송하게 하거나, 무당을 불러 굿을 해서 귀신을 쫓아내려고 했다.

이는 당대의 사정을 이해해야 할 필요가 있다. 가장 큰 이유는 의료 접근성 때문이었다. 혜민서활인서 같은 서민 전용 병원은 있었지만 모든 마을에 있는 것은 아니었고, 또한 교통수단이 발달하던 때가 아니라서 병원이 가까이 있지 않는 경우라면 의원에게 응급처치를 받기 힘들었다. 그나마 한양 같은 도시라면 인프라가 있으니 어느 정도 낫지만, 시골에서는 의원을 찾아가려면 몇십 리씩 걸어야 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거기에 의원을 직접 불러와서 치료해도 돈이 깨지니, 돈 없는 서민들이라면 당연히 가급적 간단한 주술로 해결을 보려고 할 수밖에 없었고, 꼭 의원이 아니더라도 간단한 민간의술을 하는 사람에게 치료를 받기도 했었다.

단, 이 시절에도 무당은 함부로 부르지 못했는데, 굿을 하려면 한두 푼이 깨지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즉 무당을 부를 정도라면 그만한 금전적 부담을 감수해야 한다고 생각할 만큼 상황이 나빴던 것. 갑오개혁 때 '몸이 아프면 약을 먹고 주술은 하지 말아라.'하는 내용이 나올 정도로 오래된 일이다. 물론 유학자들도 이런 '음사'를 좋지 않게 여겼기 때문에 한약과 침술을 이용한 한의학을 권장했으며, 스스로 의술을 배우거나 구급방, 동의보감같은 서적을 탐독하며 독학하면서 비상시에 써먹기도 했다.[3] 당장에 왕들도 (그 시대 기준으로는) 제대로 된 치료를 받았다. 단지 스트레스와 과로 때문에 효과를 제대로 보지 못한 경우가 적지 않고, 왕실도 사람인 만큼 하다 하다 안 되니까 승려나 무당을 불러서 굿도 지내고 했을 뿐이다.

3.2. 현대의 신앙치료

병리학이 발달하면서 질병의 원인이 신의 징벌이 아니라 과학적 근거가 존재하는 것이 밝혀짐에 따라, 병에 걸렸으면 병원에 가서 약 먹고 주사 맞으며 치료받는 행위가 보편화되었다.

이에 따라 종교에서 치료를 담당하던 것도 사라지기 시작했다. 어느 가톨릭 신자가 무슨 병이든 치유해 준다고 하는 심령기도회에 다녀온 이야기를 했더니, 그 신자의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 있던 성당 신부"아니 아프면 병원을 가야지, 거길 왜 갑니까?"라고 되묻더라는 일화도 있다.
너희 중에 병든 자가 있느냐 그는 교회의 장로들을 청할 것이요
그들은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며 그를 위하여 기도할지니라 (개역개정)

Are any among you sick?
They should call for the elders of the church and have them pray over them, anointing them with oil in the name of the Lord. (NRSV)
야고보서 5장 14절
병자성사를 언급하는 성경 구절에도 병에 걸렸을 때는 의료에 의존하라고 말한다. 기름을 바르면서 기도하는 게 무슨 의학이냐고 생각할 수도 있는데, 당시에 기름을 바르는 것, 즉 도유(unction)는 널리 행해지는 의료 행위였다. 그래서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서도 마음씨 착한 사마리아인이 강도 당한 남자에게 응급처치를 위해 기름을 발라준 것이다. 그리고 이 기름은 요즘 기준으로 말하면 일종의 마데카솔 같은 것으로, 실제 영어성경에서도 치료용 기름은 oil이 아닌 ointment, 즉 연고라고 번역하는 예가 다소 존재한다.[4] 또 이 당시에는 과학이 발전하지 않았기 때문에 제사장이 학자 또는 교육자를 겸하는 일이 흔했다. 이 구절은 기도를 하기는 기도를 하되, 의학적인 치료를 하는 도중에 기도를 하라고 가르치는 구절인 것이다.

물론 현대 기독교에서도 이런 기름을 발라주는 것이 아직 전통으로 남아서, 말 그대로 기름(성유)바르면서 기도를 해주는 경우가 있다.(가톨릭, 정교회병자성사 참조.) 그러나 이 경우에도 현대의학으로 하는 치료를 막지는 않는다.

심리적으로 안정된다거나 정신병 치료에는 도움이 된다는 이야기도 있는 만큼[5] 실제로 병이 치유되는데 플라시보 효과 정도의 도움은 기대할 수 있다는 것이 정신의학계의 중론이다.[6]

Leibovici(2001)의 신앙치료 효과 연구[7]는 BMJ에 실렸다. Lancet 이외에 임팩트 팩터로는 쩔어주는[8] 의학계의 최상급 저널인 그 British Medical Journal 맞다. 이 연구결과는 일부러 장난성으로 게재하는 BMJ의 크리스마스 에디션에 실린 것으로, 데이터는 진짜지만 실험 설계부터가 이미 재미를 위한 것이었다. 그런데 이런 전후사정을 모르고, 혹은 고의적으로 앞뒤 자르고 일부만 인용해먹는 사람들 때문에 애꿎은 일반인들이 다수 낚여서 두고두고 회자되는 처지가 되었다. 사실 논문을 직접 보면 헷갈릴 일이 없는게, 흔히 알려져 있듯이 환자들에게 기도를 들려주고 그 예후를 살핀 것이 아니라, 4~10년 전에 병원에 왔었던 환자들의 이름만 가지고 기도한 뒤, 그들의 진료 기록을 가지고 비교한 것이다. 논문 제목부터가 원격(remote)에서[9] 소급(retroactive)적으로[10] 기도해서 그 결과를 살핀다는 것이다. 누가 봐도 그냥 재미있으라고 한 실험인 것. 논문 내에 통제집단과 실험집단을 동전 던지기로 결정한다는 글이 그대로 적혀있을 정도다. 즉, 이 내용을 가지고 진지하게 신앙치료의 효과가 증명되었다고 말하는 사람은 실제 논문을 한번도 안 읽어봤다는 뜻이다.


오늘날에도 신앙치료를 하는 개인이나 단체가 많으며, 나무위키에 등재된 대표적인 단체로 개신교계에서 이단으로 정죄된 예수중심교회가 있다. 물론 이단이 된 이유도 이 신앙치료와 연관이 있는데, 이 교회에선 모든 질병의 원인을 귀신으로 보며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의 안수기도[11]로 모든 병이 낫는다고 믿는다. 그러나 해당 교회에선 병원 치료를 하지 말라고는 대놓고 말하지는 않는다.[12] 그 외 한국에서 기도로 치료를 했다거나 받았다고 주장하는 공인으로는 김신욱[13], 박보검[14] 정도가 있다.

요약하자면, 모든 현상을 신이 주관한다는 것을 믿는 것이야말로 종교이기에 병이 어서 치유 되기를 신에게 기도하는 것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니지만, 병의 치유가 초자연적인 현상으로 해결되기만 바라는 것이 아니라, 신이 사람을 고칠 재능을 준 의사를 만나 적절한 조치를 받는 것이 좋다고 할 수 있다. 더불어 국내에 개신교를 전한 초창기의 선교사들 중 많은 사람이 의료진과 교육자들이였다.
병원에 간다거나, 약을 먹는 등의 조치를 하면서 기도를 하는 병행요법을 쓰는 것은 문제가 안되나, 믿음의 힘만 믿고 의학을 거부하고 신앙치료만 받는 것은 자기를 학대하는 행위요, 신을 모독하는 것이다.

4. 문제점

파일:attachment/faith-healing.jpg
(...) 무당의 말만 믿고 의사를 믿지 못하는 환자다.
진월인, 사기열전에 수록된 내용 중에서 제자에게 아무리 의사라도 고치지 못하는 병 6가지 중에 마지막 6번째를 얘기하는 장면[15]
하나님께서는 의약품을 만드셨고 우리에게 우리 몸을 지켜 건강하게 살도록 지성을 주셨습니다. 만약 누가 이웃에게 손해를 끼치지 않았으나 의약품과 지성을 하나도 이용하지 않으며 자신의 몸에 피해를 줬다면 하나님께서 보시는 앞에서 자살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마르틴 루터, 흑사병과 관련된 편지 중(1527년)
향유와 고운 곡식 예물을 바치고 제물 위에 기름을 네 형편껏 쏟아부어라. 그다음에는 의사에게 맡겨라. 주님께서 그를 창조하셨다. 의사가 너를 떠나지 못하게 하여라. 그가 너에게 필요하다. 치유의 성공이 의사의 손에 달려 있는 때가 있다.
가톨릭 성경 집회서, 38장 11-13절[16]
"제가 늘 부가적으로 하는 말이 있죠? 약은 약사에게. 진료는 의사에게."
광우. 소나무에서 기도가피로 치료했다는 불자들의 일화를 언급할때마다 자기 법문을 듣고 기도만 하면 병이 낫고 병원 갈 필요도 없다라며 일반화를 할것을 우려해서 늘 이 부분을 강조한다. 정확히는 병원에 가서 진단을 받고, 그래도 못고칠것 같으면 병원 치료와 함께 기도를 병행해라라는 의미로 말하는것. 즉 아프다고 기도만 하라는 의미가 아니다란걸 강조하고 있다.

일부 사이비 종교에서 한다는 신앙치료 또한 대중에게 있어 신앙치료의 이미지를 '광적인 신앙치료'로 고정시켜버린 주요한 원인.

대표적인 문제는 이러한 신앙치료의 효과를 과신하여 현대의학을 무시하거나 거부하는 사람들이 아직도 있다는 것. 이 때문에 신앙치료라는 말에는 비하적 의미까지 담겼다. 대표적인 예가 그것이 알고싶다에 등장했던 어린이 '신애'의 사례로, 수술로 종양만 적출하면 낫는 '윌름즈 종양'[17]을 부모가 신앙으로 치료하겠다며 방치한 결과 종양이 5 kg이 넘도록 증식하고 혈관까지 전이되어 결국 신애는 사망했다. 신애의 부모는 아이를 병원에 데려가라는 교회 목사의 간곡한 권고조차 거부하는 바람에 목사가 '말로 해서 될 사람들이 아니다, 강제로라도 아이를 치료받게 해야 한다.'하며 장탄식을 하게 했고, 제작진이 도움을 청하기 위해 취재 자료를 가지고 당시 국회의원들을 방문했을 때는 자료 영상을 본 의원들조차 기가 막혀 차마 말을 하지 못했을 정도였다. 결국 이는 명백히 신애의 부모에게 책임이 있다.

영미권에서 신앙치료로 유명한 집단 중 하나가 바로 크리스천 사이언스. 창립자인 메리 베이커 에디가 직접 『성경의 열쇠로 푸는 과학과 건강』이라는 책을 썼을 정도니 말 다했다. 예수의 치료 행위를 본받아서 병을 치료할 수 있다고 믿으며, 사실 예수의 행위는 기적의 한 종류가 아니라 올바른 정신과 마음을 지닌 사람이라면 누구나 발휘할 수 있는 신성한 힘이라고 설명은 하는데... 딱 보면 알겠지만 신앙치료에 대한 잘못된 신념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 교리가 이러하니 신자들이 병이 나도 병원에 갈 리가 없다. 실제로 1967년에 매사추세츠의 도로시 셰리던이 과실치사상죄로 법의 심판을 받고, 그리고 1986년에 플로리다의 에이미 허먼슨이라는 소녀가 부모의 잘못된 신앙치료로 인해 운명을 달리하는 등, 잊을 만하면 이슈가 되곤 하는 집단.

이런 광적인 신앙치료에 관련해서 신이 치료해 줄 것이다고 믿어서 병원에 가지 않다가 사망한 사람이 신을 만난 후 자신을 왜 구해주지 않았냐고 하자 신이 "네게 의사를 보내 주지 않았느냐"라고 대답하는 내용의 블랙 코미디도 있다. 사실 단순한 블랙 코미디가 아니라 실제로 정상적인 교회라면 목회자가 나으라고 기도는 해주더라도 기도가 끝나면 의사를 찾아가라고 하는 것이 일반적이며, 어디까지나 기도는 의사가 병을 잘 알거나 고칠 수 있게 해 달라고 비는 정도이다. 이 농담을 설교에 넣어 교훈용 일화로 쓰는 목사들도 있다. 물론 병원에서도 답이 없다 하여 마지막으로 기댈 곳이 이것밖에 없는 경우라면 논외로 하겠지만,[18] 종교의 근본 목적은 병을 고치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다. 당장 멀리 갈 것도 없이 의사간호사들 중에서도 가톨릭 또는 개신교 신자들이 있으며 종교 재단이 병원을 운영하거나 선교의 일환으로 의료봉사를 하는 일도 많다.수술을 하기 전에 환자가 무사히 회복할 수 있게 해 달라고 기도를 하는 이들도 있다. 가톨릭이든 개신교든 기본적인 입장은 환자를 치료하는 의술 또한 하나님(하느님)이 주신 은사라고 보기 때문이다.

이런 특수한 경우의 실험이 존재한다.

물론 탈동성애 운동에도 악용되는데, 한겨레신문의 보도에 따르면 한 성소수자가 목사의 안수기도 전환치료 과정에서 폭행 피해를 당해 탈출한 사례가 있다.

4.1. 법적 문제

신앙치료를 이유로 자기 자식의 현대의학에 의한 치료를 거부하는 사례는 가장 대표적인 부진정부작위범의 모습이다. 형법학자들은 부작위범을 진정부작위범과 부진정부작위범으로 나누고 있는 바, 진정부작위범은 구성요건 자체가 부작위로 구성된 범죄를 말하며, 대표적으로 퇴거불응죄, 다중불해산죄가 이에 해당된다. 이와 달리 부진정 부작위범이란 작위범에 해당되는 구성요건을 부작위로서 충족시키는 경우를 말하며, 위의 사례처럼 부모가 자식의 치료를 거부해 죽음에 이르게 한 경우가 대표적이다.[19] 결국 '신애'의 부모는 부작위에 의한 살인죄로 처벌받았다. 이처럼 보호자가 신앙치료를 맹목적으로 믿고 자기 아이의 일반 치료를 거부하는 것은 처벌받게 되므로 주의해야 한다.[20] 일반 의료행위로 치료가 가능하다면 신앙치료는 가급적이면 의존하지 않는 것이 좋다.

우리나라의 의료법은 영리/비영리를 불문하고 무면허 의료행위를 전부 처벌하고 있다.[21] 이웃의 부탁으로 수지침을 놓아주는 정도라면 모를까 모든 무면허 의료 행위는 처벌되며, 신앙치료라도 예외는 없다. 그 밖에 경범죄처벌법상의 미신요법[22]도 적용될 수 있다.

신앙치료로 치료시기를 놓치게 하는 것도 문젠데, 신앙치료를 한답시고 때리다가 환자를 죽게 하는 경우도 있다. 치료한답시고 한 일이니 살인의 고의는 인정되지 않아 폭행치사 또는 과실치사로 처벌된다. 이에 관한 판결로 소위 '마귀야 물러가라' 판결이 있다. 목사안수기도를 통해 정신질환을 치료한다면서 수 차례 피해자의 흉부를 강타하는 등의 방법으로 폭행해서 사망에 이르게 하였고, 폭행치사로 처벌한 원심 판결을 정당하다고 한 판결이다. 이와 유사한 사안에서 중과실치사를 인정한 판결도 있는데, 아마 검사가 중과실치사로 기소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아니면 그 사건에선 폭행의 고의가 인정되지 않는 사정이 있었든지.

그 외에, 여호와의 증인의 교리상 딸의 수혈을 못하게 하여 딸을 죽게 한 엄마에게 유기치사죄[23]를 인정한 판결이 있다.

한편 교리상의 이유로 무수혈수술 중 환자가 과다출혈이 발생하여 사망한 경우 의사의 죄책에 관하여 환자가 무수혈 수술의 위험성에 대한 설명을 상세히 들었고, 그럼에도 무수혈을 진지하게 희망한 경우에는 의사에게 업무상 과실치사를 인정할 수 없다는 대법원 판결도 있다.[24] 환자 스스로 위험성을 잘 알면서 목숨보다 자신의 종교적 신념을 관철하는 게 더 중요하다고 결정을 내린 상황이므로 일반화하기는 곤란할 것이다.[25]

우리나라뿐 아니라 독일, 미국 등 세계 각지에 신앙치료와 관련된 판결이 존재함을 보면 세계적인 문제인 듯하다.

국가무신론이 이념이던 주요 공산국가에서는 신앙치료 자체가 탄압대상에 들어갔다.

4.2. 의학적 문제

의학계에서는 이런 식의 신앙치료를 매우 부정적으로 보고 있다.

이는 역사상 의학계에서 이에 대해 연구를 하면서 온갖 더러운 걸 다 목격했던 것도 크다. 의사들이 환자를 치료할 때 가장 먼저 맞닥뜨리고 동시에 치료하는데 가장 어려움을 겪었던 부류가 바로 이렇게 신앙에만 의지한 채 의학적 치료 및 예방을 거부하는 사람들이었다.

예시로 1차 십자군 원정 후, 예루살렘을 점령한 후에 가톨릭교 의사들과 이슬람교 의사들과의 차이인데 당시 이슬람교는 황금기를 맞이하고 있어서 이븐 시나와 같은 현대 의학의 왕자와 같은 사람들을 많이 배출했었다. 그러나 서양 쪽은 종교적 믿음이 강한 시기였으므로 당대 의료 기술이 이슬람교 국가들보다 뒤쳐져 있었으며 오히려 이슬람교 사람들의 방법을 이단 취급해서 죽은 사람이 많았다고 한다.

다른 예시로 예루살렘에 거주하던 한 여인이 머리에 고통을 호소하자 이슬람교 의사가 그 여인에게 약초를 비롯한 현대 의학에 가깝게 연고 비슷한 걸로 상처를 치료해주려고 했는데, 가톨릭교도 의사가 막아서며 "저 놈은 이단이니 당신을 죽이려 할 거다!"라며 자신이 치료하겠다고 나섰다. 그런데 치료한답시고 환자의 머리에 악마가 있다며 머리에 상처를 내고 소금을 뿌린 뒤, 무슨 제령의식 비슷한 걸로 성경을 읇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여인은 상처가 곪아서 사망했다(...).[26]

공공보건 수준이 열악한 일부 제3세계 국가뿐만 아니라 선진국으로 분류되는 국가들에서마저도 이건 현재진행형이다.

예를 들면 1970년대 미국의 외과의사 윌리엄 놀렌(William A. Nolen)은 이런 치료 현장에서 기적으로 치유되었다는 사람 25명을 인터뷰하고 조사했다. 그러나 이 중 폐암이 나았다는 한 사람은 폐암이 아니라 호지킨병에 걸린 것으로 밝혀졌고, 척추암이 나았다는 환자는 그 자리에서 척추버팀대를 제거하고 뛰다가 다음날 척추가 붕괴되어 4개월 후에 사망했다. 결론적으로 그 25명 중 치료된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었다.

결과적으로 말하자면, 이건 치료에 속하지 않는다. 그냥 치료와 병행하는 기도 정도에서 끝나면 전혀 문제가 없는데, 현대 의학을 이단으로 보고 그 대체제조차 허용하지 않으며 보통 교주들이 신자들의 믿음을 강화하기 위한 의식 개념으로 기적을 띄워주기 때문에 의료행위에 대한 단순한 거부감과 불신보다도 훨씬 더 심각한 악영향을 미치게 된다.

5. 관련 문서



[1] 잘 보면 부부갈등도 포함시키고 있는데 자녀가 있는 가정일 경우 자녀에게도 악영향을 주는 건 맞지만 병으로 써놓을 만한 건 아니다.[2] 해당 교회는 광주광역시 광산구의 시골 지역에 위치해 있다. 참고로 광주지역 장로교 신학대학원인 광신대학교 출신 목회자들이 신앙치료나 반과학적인 언행을 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광신대는 광신자를 키운다는 악명이 있긴 하다.[3] 예를 들면 사상의학의 창시자 이제마는 유학자였으며, 그 사상의학 이론 또한 성리학에 근거하여 논거를 전개하고 있다.[4] 기름은 예부터 연고로 사용되어왔다. 상처 부위에 기름을 바르면 기름막이 상처의 습도를 유지해 주면서 세균과 이물질의 침입을 막기 때문이다. 현대 인류는 여전히 기름을 같은 용도로 사용한다.[5] 그러나 정신병 역시 전문적인 의학-심리학과는 거리가 먼 종교에 치료를 맡겼다가 오히려 증세가 악화된 경우도 존재한다. 무엇보다도 종교 성직자들은 정신병에 대한 학위나 이해가 부족한 경우가 많다. 심지어 선천성 질환인 아스퍼거 증후군 환자에게 '네 마음을 고치기 위해 참선을 해야 한다.'고 강요하는 사람도 있다![6] 종교적 믿음은 정신질환자들이 불안을 다스리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다. 또한 정신질환자들은 사회적으로 소외되기 쉽고 사회적 고립이 증상을 악화시키는 경우도 많은데, 종교 공동체에 소속되어 활동하면 이를 어느 정도 예방할 수 있다. 다만 이 문서에서 여러 번 강조하였듯 이는 정신병 치료에 보조적으로 도움을 주는 정도이고, 의학적·심리적 처치의 효과성을 높여줄 수는 있어도 이를 주된 치료라고 말할 수는 없다.[7] Leibovici, L. (2001). Effects of remote, retroactive intercessory prayer on outcomes in patients with bloodstream infection: randomised controlled trial. Bmj, 323(7327), 1450-1451.[8] 2014년 기준 IF는 17.445.[9] 즉, 기도 자체를 환자 얼굴도 안보고 진료 기록만 가지고 한 것이다.[10] 즉, 이미 치료 끝나고 그 결과들이 나온 지 수년이 지난 환자들에게 기도한 것이다.[11] 정확히는 안수기도가 아니라 축사(逐私), 그러니까 귀신 쫒는 행위[12] 사실 귀신을 거의 모든 병의 원인으로 보는 것은 김기동이 원조이다. 이초석은 그에게 배운 한만영에게 교육 받았다.[13] '치유의 은사가 왔다'면서 남의 발목에다가 퇴마의식을 시전하여 낫게 했다고...[14] 어릴 적 고열로 아팠을 때 부친이 어느 권사로부터 예수중심교회를 권유받아 목사에게 안수기도를 받음으로써 고열은 물론이고 탈장까지 나았으며 보검이라는 이름도 하사받았다간증이 돌아다닌 바 있다. 그러나 2022년에 출석교회를 바꾼 것으로 추정되기도 했다.[15] 진월인은 당대 엄청난 명의로 이름이 높았는데 그는 의사가 고치지 못하는 6가지 병이 있다고 말했다. 첫째로 교만하여 의사를 찾지 않는 것. 둘째로 돈을 아껴 병을 고치려 하지 않는 것. 셋째로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지나치게 하는 것. 넷째로 음양이 불안정한 것. 다섯째로 약을 받아들일 수 없을 정도로 몸이 쇠약한 것. 마지막 6번째가 이 사례다. 이 6번째 사례에서 무당을 목사나 성직자 따위로 바꾸면 훌륭한 '기독교 계열에서 많이 얘기하는 신앙치료'를 비판하는 말이 된다.[16] 집회서는 개신교에서 정경으로 인정하지는 않지만 종교개혁자들도 읽으면 신앙에 유익한 책이라고 평가했고 과거에는 개신교 성경에도 부록으로 실려있는 경우가 많았다.[17] 소아에서 주로 발생하는 신장암의 한 종류로, 병리학적으로 악성 종양으로 분류되지만 적절한 시기에 치료를 받는다면 예후가 매우 좋은 질환으로 꼽힌다. 1기인 경우 완치율이 90%에 달하고 다른 암 같으면 연명 치료 이상을 기대하기 힘든 4기여도 완치율이 60%를 넘어갈 정도.[18] 이 경우에는 정말로 기적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실제로도 기적적으로 살아나는 사람도 있고 하니 그 기적의 끈이라도 잡게 만들려면 '나는 살 것이다.'하는 의식을 주입시키기 위한 무언가는 해야한다. 자포자기를 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그게 더 낫다.[19] 다수 학자들의 견해다. 거동범을 진정 부작위범으로, 결과범을 부진정 부작위범으로 보는 소수 견해도 존재한다. 물론 어느 견해에 의하건 부작위에 의한 살인죄는 부진정 부작위범이지만.[20] 아이가 스스로 신앙치료를 원하더라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물론 다 큰 성인이 스스로 치료를 거부하는 것은 처벌받지 않는다. 우리 형법은 자살을 처벌하지 않기 때문이다.[21] 물론 의료 시스템이 현대식으로 정비되기 전부터 관행적으로 이루어지던 불법 민간 의료 행위 등의 경우에는 처벌을 완화해주고 있다. 예를 들어 의사가 없는 시골마을에서 의사면허증 없이 진료를 보던 약종상이나 면허 없이 한의사로서 진료를 보던 사람에 대해서는 처벌을 완화해주는 등.[22] 근거 없이 신기하고 용한 약방문인 것처럼 내세우거나 그 밖의 미신적인 방법으로 병을 진찰·치료·예방한다고 하여 사람들의 마음을 홀리게 한 사람.[23] 판례의 용인설에 따르면 결과발생을 용인하는 내심의 의사가 있음을 요하므로, 생모가 이를 용인하지 않았을 것이므로(=딸의 수혈을 거부하였다 하더라도 대놓고 죽기를 바라며 수혈을 거부한 것은 아니므로) 살인이 아닌 유기치사죄를 인정했으나, 일부 강수설을 주장하는 입장에서는 용인설의 심정적 요소를 제외하고 판단하여 미필적 고의가 인정되므로 살인죄를 인정하자는 입장도 있다.[24] 대판 2014.6.26. 선고 2009도14407판결.[25] 본 단락은 엄밀히 말해 신앙치료의 문제는 아니고 신앙을 이유로 한 치료 거부의 문제지만 어쨌든 종교적 신념과 의학 치료 사이의 갈등이므로 이 문서에 서술하였다.[26] 물론, 이 시기 기독교 신자들이 죄다 신앙치료에만 의존하는 예수쟁이들이라고 일반화하는 건 잘못된 시각이다. 기독교권도 사람 사는 곳인만큼, 이탈리아 등지나 동로마 제국에서는 의사들이 간단한 수술을 집도하기도 했고, 전염병이 발생하면 감염자의 물건을 태워서 병균을 없애는 정도의 과학 상식은 있었던데다, 교황청 측에서 수시로 신앙치료를 권하는 혹세무민한 자들을 이단으로 낙인찍고 처벌하기도 했다. 당대의 가톨릭 신부들도 일종의 신앙치료인 구마의식을 모든 의료행위가 실패한 후에 최후의 수단으로나 행했고, 만일을 위해 의사를 참관시키기도 했다. 다만, 십자군 전쟁 때와 같이 종교의 권위가 세속보다 높았던 시기나, 로마 제국의 유산이 상대적으로 미미했던 북유럽 등지에서는 저런 사람잡는 일이 종종 벌어졌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