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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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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타 성채 일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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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만 시기의 아르타 석교

1. 개요2. 역사
2.1. 중세
2.1.1. 에피로스 친왕국의 수도2.1.2. 혼란기2.1.3. 아르타 친왕국
2.2. 오스만 제국2.3. 근현대

1. 개요

그리스어 Άρτα
영어 Arta
튀르키예어 Narda

그리스 서부의 도시. 암브라키아 (아르타) 만 북쪽, 아라크토스 강의 만곡부에 위치한다. 인구는 약 2만 4천명으로, 프레베자와 함께 에피로스 남부 지방의 주요 도시 중 하나이다. 옛 지명은 암브라키아고, 에페이로스 왕국의 수도로써 번영했다. 다만 기원전 1세기 이후 천년 가까이 버려졌다가 13-15세기 들어 에피로스 친왕국 및 아르타 친왕국의 수도가 되며 다시 번영했다. 중세 다리와 성채, 성당 등이 남아있어 동로마 제국사에 관심이 많다면 들려볼 만하다.

2.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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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브라키아 유적의 극장 유구

기원전 625년 코린토스의 참주 킵셀로스의 아들 고르고스가 도시를 세워 아폴론 손녀의 이름을 따 암브라키아라 명명했다. 암브라키아는 농업, 어업, 선박용 목재 생산 등으로 점차 성장했다. 주민들은 고르고스 사후 그의 아들 페리안데르를 축출하고 민주정을 설립했다. 암브라키아는 코린토스와 협력하며 코르키라 (코르푸)와 대립했고, 기원전 433년 양측이 대결한 시보타 전투에서도 코린토스 편으로 참전했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도 스파르타 편에 참전했다가 기원전 426년 이도메네 전투에서 아테네-아카르나니아-암필로키이 연합군에게 패해 역량이 고갈된 후 이탈했다. 기원전 338년, 암브라키아는 마케도니아 왕국에 복속했다. 다만 코린토스 및 아테네의 지원으로 마케도니아 병력이 배치되는 것 외에는 자치를 유지했다.

기원전 294년, 암브라키아는 피로스 1세에게 주어져 에페이로스 왕국의 수도가 되었다. 피로스는 새 수도에 궁전, 신전, 극장 등을 세웠다. 기원전 234년 피로스 3세의 사후 사촌누이 데이다미아가 주민들이 반발한 암브라키아를 포위한 후 즉위했으나, 다음해 역시 암살되었다. 이후 왕정이 폐지되고 에페이로스 동맹 수립되었다. 에페이로스 동맹은 기원전 225년 포에니케로 천도했다. 뒤이은 아이톨리아 전쟁 시에 암브라키아는 간을 보다가 아이톨리아 동맹에 가담했다. 3차 마케도니아 전쟁 시기 암브라키아는 로마군에 강렬히 저항했고, 로마측 땅굴에 독가스를 풀어 세계사 최초의 화학전을 벌이기도 했다. 도시의 상세한 역사는 아타나다스의 암브라키카에 집대성되었다. 기원전 189년 로마 장수 마르쿠스 플라비우스 노빌리오르에 의해 점령된 후 암브라키아는 자유 도시로 선포되었으나 점차 쇠퇴했고, 기원전 29년 서남쪽에 니코폴리스가 생긴 후 주민들이 그곳으로 이주되며 폐허가 되었다. 그렇게 수세기간 유적으로 남았다가 동로마 시기에 아르타란 도시로 재탄생했다.

2.1. 중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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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세기에 세워져 1270년에 확장된 성 테오도라 성당

9세기 들어 몇몇 성당이 세워지는 등 도시 재건의 징조가 보였고, 11세기 들어 형성된 새 도시는 아라크토스 강이 와전된 아르타였다. 1082년 보에몽 휘하 노르만족이 침공해 아르타를 포위했으나, 콤니노스 황조 들어 동로마 제국이 안정을 찾으며 도시는 베네치아와의 교역 등으로 점차 성자해 1157년에 주교구가 되었다. 1165년에는 여행가 투델라의 벤자민도 방문했다. 12세기 말엽 아르타는 니코폴리스 테마 하의 자체적인 징세 구역인 에피스켑시스가 되었다.

2.1.1. 에피로스 친왕국의 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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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하일 2세 콤니노스 두카스가 세운 파리고리티사 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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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나기아 파리고리티사의 내부 성화

4차 십자군 이후 라틴 제후들 간의 회담에서 아르타는 베네치아 령으로 결정되었으나, 1205년 미하일 1세 콤니노스 두카스가 접수해 이피로스 전제군주국 (에피로스 친왕국)을 세우며 무산되었다. 동로마 후계국들 중 한때 제일 강했던 에피로스 친왕국의 수도로써 아르타에는 파리고리티사, 카토 파나기아 등의 성당이 세워졌고 1227년에는 성채가 건설되었다. 1213년, 1219년, 1226년에는 에피로스 자체 공의회가 열렸다. 13세기 후반 들어 아르타에는 베네치아 영사관이 세워졌고, 도예 산업이 발달했다. 아르타는 도자기와 함께 암브라키아 만의 비옥한 토지를 기반으로 물소, 소, 말 등의 가축을 이용한 육포, 비계, 햄, 털과 염료 등을 수출했다.

비록 1259년 펠라고니아 전투니케아 제국군이 잠시 아르타를 점령했으나 곧 미하일 2세 콤니노스 두카스가 수복했고, 1292년 안드로니코스 2세의 침공도 격퇴되었다. 미하일 2세는 파리고리티사 성당을 건설했고, 또 처음으로 아라크토스 강에 다리를 놓았다 한다. 1303년에는 나폴리 왕국카를로 2세가 한달 간 포위했으나 역시 실패했다. 1313년 아르타는 대화재를 겪었고, 이듬해에는 동로마 군이 또다시 공격했다. 1318년 콤니노스-두카스 가문이 오르시니 가문으로 교체된 후 정치 혼란이 계속되었고, 1331년 나폴리 왕국의 후원을 받는 고티에 6세가 아테네 공국카탈루냐 용병대에게서 수복하기 위해 에피로스를 지나며 아르타를 점령하자 조반니 2세 오르시니는 나폴리 왕국에 복속했다.[1]

2.1.2. 혼란기

1336년에는 테살리아를 두고 에피로스 친왕국과 다투던 안드로니코스 3세가 에피로스를 공격, 1338년까지 아르타 등 내륙 대부분을 점령하며 일대는 130년만에 동로마 제국령이 되었다. 다만 1339년, 아르타의 니콜라스 바실리체스 등 에피로스 각지의 인사들이 봉기를 일키자 안드로니코스 3세는 친정하여 반란 도시들을 하나하나 점령 혹은 협상을 통해 탈환했다. 1340년 들어 사태가 진정되자, 요안니스 앙겔로스가 에피로스 총독으로써 아르타에 파견되었다. 하지만 1347년, 동로마 내전 및 흑사병 창궐을 틈타 그해 가을 세르비아 제국스테판 두샨이 아르타 등 에피로스 전역을 정복했다. 스테판 두샨은 오르시니 가문의 공주와 결혼한 이복형제 시메온 우로시를 총독에 봉했다. 1355년 스테판 두샨이 사망하자 이듬해 이오니아 제도에 있던 니키포로스 2세 오르시니가 돌아와 에피로스 친왕국을 재건했다. 니키포로스 2세는 아르타 대신 북쪽의 이오안니나를 수도로 삼았다. 1359년 니키포로스 2세가 혼란을 틈타 남하하던 알바니아 인들과 아켈로오스 전투를 벌이다 전사하며 시메온 우로시가 에피로스 주요 도시들을 재차 장악했으나, 후자는 테살리아에 주로 머물며 알바니아 부족장들에게 데스포티스 (친왕) 직위를 뿌리고 사실상 에피로스를 방치했다.[2]

2.1.3. 아르타 친왕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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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타 성채

1367년에 데스포티스 칭호를 받은 알바니아 부족장 중 하나인 페테르 로샤가 아르타를 점령, 아르타 친왕국을 세우며 에피로스 대부분 지역을 장악했다. 이오안니나 등 에피로스 북부만이 시메온 우로시의 사위인 토마 프렐류보비치 하의 에피로스 친왕국 령으로 유지되었다. 1374년, 페테르 로샤가 사망하자 새 아르타 데스포티스에 오른 진 부아 슈파타는 나프팍토스를 점령하고 이오안니나를 공격하는 등 에피로스 남부를 확고히 장악했다. 1378년 4월 로도스 기사단이 아르타를 공격했으나 진 부아 슈파타는 오히려 기사단장 후안 페르난데즈를 사로잡으며 격퇴했다. 비록 1384년 오스만 군이 습격하긴 했지만, 그는 아르타에 안정을 회복시킨 후 1399년에 사망했고 동생 스쿠라가 계승했다. 다만 1400년에 세르비아-알바니아-불가리아 혈통의 모험가 본코가 아르타를 장악해 폭정을 행하며 베네치아와 결탁하려 했고, 1401년 진 부아 슈파타의 손자 무리크가 도시를 회복하며 슈파타 가문의 지배를 이어갔다. (혹은 그 모든 일이 1399년 13월까지 벌어졌다고도 한다.)

1406년 에피로스 친왕국의 후계를 자처하던 케팔로니아 백작 카를로 1세 토코가 아르타를 공격했지만 격퇴되었고, 얼마 후 스쿠라의 아들 팔이 남부 영토의 앙겔로스켈론을 오스만 제국에 넘겼으나 카를로가 곧 점령했다. 팔은 1407년 나프팍토스 역시 베네치아에 넘기며 아르타 친왕국의 영토는 암브라키아 만 북안에 국한되었다. 위기를 느낀 무리크는 그간 대립하던 이오안니나의 에피로스 친왕 에사우 부온델몬티와 결혼 동맹을 맺어 맞섰다. 그러던 1411년, 에사우 부온델몬티가 사망하고 이오안니나 주민들이 어린 후계자 조르조 부온델몬티를 폐위하자 무리크는 두 차례나 그곳을 포위했으나 알바니아 군주를 거부한 주민들의 저항으로 격퇴되었다. 결국 카를로가 에피로스 친왕에 추대되며 아르타 친왕국은 그의 세력에 남북으로 포위되었다. 무리크는 카를로와 협상에 나섰지만 거부되자, 다른 알바니아 왕공 제네비시와 동맹해 1412년 여름 크라네아 전투에서 그의 에피로스 군대에 전멸에 가까운 패배를 안겼다.

다만 이번에도 이오안니나 점령에는 실패했고, 카를로는 오스만 내전을 치르는 황자 무사 첼레비와 결혼 동맹을 맺어 겨우 영토를 유지했다. 무리크는 아카이아 공국과 동맹했으나 가족 분쟁으로 제네비시와의 동맹을 잃은 채로 1414년 사망했고, 이복형제 야쿱이 계승했다. 메흐메트 1세의 궁정에서 성장하며 이슬람으로 개종한 야쿱에 대해 아르타 주민들은 그가 오스만 제국에 도시를 넘길까봐 경계해 봉기를 일으켰고, 다른 이복동생 카를로 마스체라노를 옹립했다. 하지만 탈옥한 야쿱은 오스만 군대와 돌아와 잠깐의 포위 후 아르타를 점령했고, 봉기를 주도한 성내의 주요 인사들을 처형했다. 야쿱은 니코폴리스 방면으로 남하했으나 에피로스 군에 패했고, 아르타 수비에 전념했다. 그러자 카를로는 이오안니나로 철수했으나, 곧 야쿱을 보블리아나로 유인해 매복 공격으로 사로잡은 후 처형했다. (1416년 10월) 같은날 아르타의 귀족들은 기존의 권리 유지를 조건으로 카를로에게 항복했고, 그는 3일 뒤 입성했다. 이로써 아르타 친왕국은 멸망하고, 약 반세기 만에 다시 에피로스 친왕국 령이 되었다.

2.2. 오스만 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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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타 성채와 시계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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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세기의 아르타 석교

하지만 3차 에피로스 친왕국 지배기는 오래가지 못했다. 1429년 카를로의 사후 벌어진 내분을 틈타 오스만 군대가 1430년에 이오안니나를 점령했고, 카를로의 조카 카를로 2세 토코는 아르타로 천도했다. 이로써 아르타는 거의 한세기 만에 에피로스 친왕국의 수도가 되었지만 이미 오스만 영토에 거의 둘러싸인 상태였다. 1448년 카를로 2세가 사망하고 어린 아들 레오나르도 3세가 계승하자 1449년 3월, 오스만 제국군이 아르타를 공격해 점령했다. 이후 레오나르도는 산지의 앙겔로카스트론에 웅거하며 메흐메트 2세 및 오스만령 아르타 총독에 연공을 바치며 연명하다가, 1460년 스칸데르베그와 호응해 저항에 나섰다가 그마저도 잃었다. 자킨토스 섬으로 피신한 레오나르도는 다시 술탄에 복속했으나, 1479년 미성년인 아르타 총독을 업신 여겼다가 남은 이오니아 제도 (레프카다, 자킨토스, 케팔로니아) 및 보니차마저 상실한 후 이탈리아로 도주했다. 이로써 에피로스 친왕국 및 케팔로니아 백국은 완전히 멸망했다.

오스만 지배 하에서 '나르다'라 불린 아르타는 오랜 평화를 누리며 루멜리아 에얄레트 산하 자체 산작의 치소로써 안정적으로 발전했다. 시내와 근교에는 각각 6개와 2개의 모스크가 세워졌고, 1602-06년에는 아라크토스 강에는 현존하는 석교가 세워져 일대의 랜드마크가 되었다. 1644-46년에는 역병이 돌았고, 1650년에는 아르타 성채 앞에 시계탑이 세워졌다. 1717년 베네치아 공화국이 암브라키아 만을 통제하는 프레베자와 보니차를 점령하며 아르타는 지중해로 나가는 손쉬운 항로가 차단되어 어려움을 겪었다. 오스만 지배가 3세기 이상 이어진 후에도 아르타는 그리스 도시로 남았다. 1776년 기준 주민들은 그리스인 1만, 튀르크인 2백, 유대인 7백으로 구성되었다. 당시 아르타의 특산품은 밀, 포도주, 담배, 선박 건조용 목재 등이었다. 1788년 아르타는 알리 파샤의 야니아 파샤령이 되었다가 1822년 그가 토벌되며 조정의 직할령으로 회복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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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가지 서쪽 외곽의 파이크 파샤 모스크. (좌) 아르타에서 유일하게 원형을 유지한 모스크다. 시내의 버려진 페이줄라 모스크 (우)

그리스 독립 전쟁 당시 아르타 주민들은 독립군에 호응하지 않았지만 인근 농촌이 모두 독립군에 넘어가 오스만 수비대는 졸지에 적지 한복판에 고립된 형국이었다. 1821년 11월에 요르요스 카라이스카키스의 독립군이 아르타를 공격했으나 예상했던 알바니아 부대의 내통이 이행되지 않아 실패했다. 아르타 성채에는 그리스인 포로들이 대거 수감되었고, 1822년 7월에는 동쪽의 페타에서 격전이 벌어지기도 했다. 1832년 종전 당시 신생 그리스 왕국의 국경은 암브라키아 만 동쪽에서부터 그어졌고, 아르타는 프레베자와 함께 오스만측 국경도시가 되었다. 다만 베를린 회담의 후속으로 열린 1881년의 콘스탄티노플 협정에서는 양국의 국경이 아라크토스 강을 따라 그어지며 아르타는 테살리아와 함께 그리스 령이 되었다. 다만 다리의 최상부가 그리스-오스만 국경이 되는 등 아르타는 그리스의 최전방 도시가 되었고, 튀르크 주민들은 그리스 인들에게 헐값에 집을 판 후 이주되었다.

2.3. 근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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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양 직후 아르타에 진주한 그리스군

1881년 8월 그리스 령이 된 아르타는 곧 그리스 군의 주요 군사 거점이 되었고, 성채의 술탄 메흐메드 모스크 등 오스만 시기 건물 다수가 파괴되거나 방치되었다. 1897년 그리스-오스만 전쟁 당시 아르타는 최전선 도시로써 전장이 되었다. 1897년 4월, 다리에서 교전이 벌어졌고 그리스 군은 강 건너편 파이크 파샤 모스크의 오스만 거점을 격파했다. 뒤이어 그리스 군은 아르타와 암브라키아 만 사이의 마을들을 점령하며 테살리아 전선과 달리 오히려 일부 영토를 점령했다. 다만 프레베자 방면의 진격은 저지되었고, 휴전 협정에 따라 그리스 군은 기존 국경으로 철수했다. 1913년 발칸 전쟁 후에야 아르타는 완전한 후방 도시로써 안정을 되찾았다. 2차 대전 시기 1941년부터 일대는 추축국 지배 하에 놓였고 1943년 3월, 나치 독일은 아르타의 유대인 384명 중 대부분을 체포해 절멸 수용소로 보냈다. 1944년 가을 독일군이 철수한 후, 12월 21-22일에는 좌익 계열인 ELAS와 우익 계열인 EDES가 그리스 내전의 전초전 격인 데켐브리아나를 벌였다. 에피로스의 데켐브리아나에서 가장 치열했던 아르타 전투 결과 ELAS가 승리했고, 20여 주민이 마약 유통 혐의로 처형되었다.[3]


[1] 다만 고티에 6세의 원정 자체는 실패했고, 그는 보니차와 레프케다 영토만을 얻었다[2] 1367년에는 에피로스 친왕 작위도 사위 토마에게 줘버린다[3] 이후 EDES 병력은 영국 군함으로 코르푸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