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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우디아라비아 제6대 국왕 압둘라 빈 압둘아지즈 알사우드 عبدالله بن عبدالعزيز آل سعود Abdullah bin Abdulaziz Al Saud | |
<colbgcolor=#006c35><colcolor=#fff,#fff> 이름 | 압둘라 빈 압둘아지즈 알사우드[1] Abdullah bin Abdulaziz Al Saud |
출생 | 1924년 8월 1일 |
네지드 토후국 리야드 (現 사우디아라비아 리야드주 리야드) | |
사망 | 2015년 1월 23일 (향년 90세) |
사우디아라비아 리야드주 리야드 | |
묘소 | 사우디아라비아 리야드주 리야드 알우드 공동묘지 |
재임기간 | 제4대 총리 |
1996년 2월 21일 ~ 2015년 1월 23일 | |
재위기간 | 제6대 국왕 |
2005년 8월 1일 ~ 2015년 1월 23일 | |
부모 | 아버지 이븐 사우드 국왕 어머니 파다 빈트 아시 알슈라임 왕비 |
배우자 | 알아누드 알파예즈 왕비 외 30명 |
자녀 | 칼리드 왕자 외 35명 |
종교 | 이슬람교 (수니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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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사우디아라비아의 6대 국왕이다.1924년 이븐 사우드의 12남으로 태어났으며, 1990년대 들어서 그의 이복형인 파흐드 국왕이 쓰러지자 대리청정을 시작했다. 결국 이복형이 사망하자 2005년 사우디아라비아의 왕에 즉위했고, 2015년 사망할 때까지 전제 정치를 펼치며 사우디아라비아를 통치했다.
2. 생애
2.1. 권력의 중심축에 서지 못했던 초기 인생
그는 사우디아라비아를 건국한 압둘 아지즈 전 국왕의 아들 36명 중 10번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힘없는 왕자였으며, 형제 사이에서 차별을 받으며 자랐다. 당시 그의 어머니는 압둘 아지즈와 경쟁 관계에 있던 유력 부족장의 딸이었다. 압둘 아지즈는 정권 안정을 위해 정략결혼을 했기 때문에 그녀와 그녀의 아들인 압둘라를 좋아하지 않은 것이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그의 나이 여섯 살 때 유일한 버팀목인 어머니마저 세상을 떠나자 그의 위치는 굉장히 불안해졌다. 다른 왕자들은 20대 초반부터 장관직에 오른 반면, 그는 1962년 38살이 될 때까지 변변한 관직에도 오르지 못했다.2.2. 권력의 중심이 되다
그러나 1962년 유력 왕자인 탈랄을 몰아내는 데 가담하면서 그를 몰아내고 이듬해인 1963년 방위군 사령관에 임명되며 사우디아라비아 권력의 중심에 다가섰다. 이후 12년 뒤인 그는 1975년 사우디아라비아의 부총리에 임명됐다. 이 자리는 차기 왕태제로 지명될 가능성이 높은 자리였으며, 그해에 압둘라와 가까운 사이인 형 칼리드가 왕위에 오른 것도 그가 왕이 되게 한 중요한 이유가 되었다. 1982년에는 국왕이었던 칼리드가 사망하고 파흐드가 즉위하자 왕태제의 자리는 압둘라의 몫이 됐으며, 압둘라는 방위군 지휘권을 내놓으라는 반대파의 압박도 버텨냄으로써 마침내 1995년 파흐드 국왕이 뇌졸중으로 쓰러지자 사실상 국정을 책임지게 됐다.2.3. 노블리스 오블리주
그는 젊은 시절을 왕실이 아닌 천막 생활을 하는 베두인 부족과 생활했다고 하며, 격의없는 생활을 선호했다고 한다. 그는 왕실에서 ‘폐하(your majesty)’라는 호칭을 없앴으며, 왕의 손에 입맞추는 의전을 폐지했다. 또한 7000명에 이르는 왕자와 공주에게 주던 수당도 삭감했으며, 페이스북 페이지를 개설해 사우디아라비아의 시민들이 직접 불만을 표시하도록 했다. 하지만 2010년 튀니지부터 ‘아랍의 봄’이 시작되면서 중동에 민주주의를 권장하는 오바마 미국 대통령에게 최소 두 번 이상의 전화를 걸어 발언의 위험성을 경고하는 등 탄압은 여전했고 자국 내 반정부 행동에는 철저한 무관용 정책을 취했다.2.4. 이스라엘과 미국에 대한 감정
2001년 이스라엘 탄압에 반대하는 팔레스타인 저항 운동이 일어나자 이스라엘을 지원하는 미국에 항의 메시지를 보냈으며, 미국이 국빈 초청을 했지만 끝내 거절했다. 2001년 8월 이스라엘 군인이 팔레스타인 여성을 잔혹하게 폭행하는 사건이 터지자 2001년 8월에는 주미 대사를 일시적으로 철수시키기도 했다. 그러다가 2001년 9.11 테러가 일어났는데 문제는 당시 여객기를 납치한 하이재커 19명 가운데 15명이 사우디아라비아 국적(그것도 법학대생이나 경찰총장 등 사우디 고위집안 도련님들)인 것으로 밝혀지자 압둘라는 보안군을 동원해 이슬람 과격분자에 대한 무자비한 소탕작전을 펼쳤고 이로 인해 알카에다의 표적이 되기도 했다.[2]2.5. 개혁 정책
그는 여성이 슈퍼마켓 계산대에서 일하는 것을 허용했고 여성을 차관에 임명하기도 했다. 또 자신의 돈 중 125억 달러를 기부해 자신의 이름을 딴 연구 대학을 세웠으며 여성도 남성과 함께 연구할 수 있도록 했다. 하지만 2005년 10월 즉위 후 미국 ABC 뉴스의 바바라 월터스와 가진 첫 TV 인터뷰에서 말한 여성에게 운전을 허용하겠다는 약속은 실현되지 않았다. 2013년에는 사우디아라비아의 주중을 일요일부터 목요일까지로 하고, 주말을 금요일과 토요일로 바꿨다.2005년 그가 집권 첫 해에 사우디 역사상 처음으로 직접 선거를 통해 지방행정자문회의 위원 592명을 선출했다. 그는 여성의 참정권을 약속했으나 수차례 연기된 끝에 2015년 실시를 약속한 상태다. 압둘라 국왕이 한 일 중 가장 큰 업적은 수만명의 사우디 청년을 서구 대학에 국비로 유학시킨 정책이라고 평가되며 이들은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뒤 국내 보수 세력을 견제하는 왕의 지원군이 됐다.
3. 사망
그러다가 결국 2015년 1월 23일 폐렴으로 사망했다. 사우디 왕실은 국영TV를 통해 폐감염으로 리야드의 킹 압둘아지즈 병원에 입원한 압둘라 국왕이 사망했다고 발표했다. 그리고 사우디아라비아의 수도인 리야드에서 그가 사망한 당일 오후에는 압둘라의 이슬람식 장례식이 열렸으며 시신은 한 묘지에 안장됐다. 그날 치러진 이슬람식 장례식은 에르도안 터키 대통령을 비롯하여 카타르, 쿠웨이트, 바레인 등 중동국가의 지도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치러졌으며, 사우디에서 이슬람 전통인 와하비 해석에 따라 상아색 천에 싸인 그의 시신은 관 없이 안장됐다. 본래 사우디 뿐만 아니라 이슬람식 장례법은 관도 묘표도 없이 그냥 보자기나 천으로 싼 시신을 구덩이에 넣고 흙을 부어 묻은 다음 머리와 다리 부분에만 벽돌이나 작은 돌을 묘표 대신으로 놓는다.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 압델 파타 엘 시시 이집트 대통령, 나루히토 일본 황태자, 펠리페 6세 스페인 국왕, 압둘라 2세 요르단 국왕, 프레데리크 덴마크 왕세자, 빌럼 알렉산더르 네덜란드 국왕, 찰스 영국 왕세자, 무함마드 6세 모로코 국왕 대신 방문할 무레이 라히드 왕자가 사우디로 찾아와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고 한다. 그가 사망하자 버락 오바마는 "우리는 많은 도전을 함께 헤쳐왔다. 나는 항상 압둘라 국왕의 관점을 존중했고 우리의 진실되고 따뜻한 우정에 감사해왔다"며 "지도자로서 그는 항상 진실됐고 신념을 위한 용기를 갖고 있었다"는 말을 남겼다.
여담으로 압둘라 국왕의 사망 소식에 국제유가가 반짝 급등하는 일도 일어났다.
후임 국왕으로는 이복동생 살만 빈 압둘아지즈 알사우드가 즉위했다.
4. 샤리아 통치
압둘라는 1995년 이전에는 비록 왕이 아니었지만 파드 전 국왕이 10여 년간 혼수상태에 있으면서 사우디아라비아를 실질적으로 통치해왔는데 그의 통치도 다른 선왕들과 마찬가지로 샤리아에 입각한 통치를 했다.또한 인권단체들은 압둘라가 시도하는 개혁의 범위는 늘 최소한이었다고 주장하며, 그가 개혁을 시도한 이유는 아랍의 봄으로 인해 중동의 민주화 운동이 거세지자 이를 막기 위해 주고 여러 복지 정책을 시행한 것뿐이지 절대로 그가 좋은 왕이어서가 아니라고 주장한다.[3] 게다가 사우디아리바의 여성에게 투표권은 줬지만 중동의 국가들 중에서도 가장 늦게 투표권을 주었고 또한 사우디는 의회가 없고 지방선거가 유일하다.
그의 통치 시기 이후 사우디아라비아에서는 전화의 모든 내용이 녹음되며, 카메라가 장착된 휴대전화는 사용이 금지되는 물품이 되었다. 또한 사우디아라비아 공무원이 국내 또는 해외언론과 대화하는 것은 불법이라는 법률도 있으며, 법에 따라 모든 사우디 국민은 수니파 무슬림이어야만 한다. 또한 앰네스티 인터내셔널에 따르면 사우디아라비아 경찰은 자백을 받아내기 위해 고문을 하는게 지극히 일상적인 일이라고 할 만큼 고문을 이용한 인권유린이 만연해 있다고 한다. 잔혹한 형벌들도 여전히 유지되고 있다.
사우디아라비아 여성은 친척이 아닌 남성과 공공장소에 모습을 드러내지 말아야 하며 얼굴과 신체를 가려야 되고 운전은 금지되어 있다. 또한 남자와 여자가 같은 엘리베이터도 탈 수 없게 만들었으며 서구식 복장을 하고 생일케이크를 먹으며 생일축하 춤을 췄다는 이유로 청년들을 체포하는 경우도 있다.
2010년 1월 21일에는 학교에 휴대폰을 가져간 13세 학생이 징역 2개월과 태형 90대를 선고받았다. 기사 이 학생이 처벌받은 이유는 학교 내에서 휴대전화기로 통화를 하는 것은 물론 휴대폰을 소지하면 안 된다는 교칙을 어기고 몰래 옷에 넣어 휴대폰을 가져온 것이 이유였다. 심지어 학교의 기강을 세운다는 명목으로 특별히 같은 반 친구들이 지켜보는 곳에서 채찍을 맞도록 했다. 또한 2007년에는 사우디아라비아에서 학생 16명이 교사에게 대들었다는 이유로 300대~500대에 달하는 무자비한 태형을 선고하며 공개 태형에 처해지기도 했다.
한편 성폭행당한 여성이 오히려 간통으로 징역 6개월에 태형 200대를 선고받기도 했다. 혼전동거[4]는 벌금형과 태형, 쇼핑몰에서 키스를 했다는 이유로 태형 90대와 징역 4개월에 처하고, 상점 주인의 부인에게 단순한 친밀감의 표시로 윙크와 손가락 키스를 보냈다는 이유로 태형을 15대나 때리는 등의 조치가 있었다.
사우디아라비아에는 여성 폭행을 규제하는 법률이 없으며, 판사가 재판장에서 '''아내가 돈을 낭비하는 등의 잘못을 했다면 충분히 때려도 된다"'는 발언도 있고 음식점에서도 남녀가 따로 주문을 하고[5] 영화와 발렌타인데이가 법적으로 금지된 상태이다. 심지어 병원을 갈 때도 의사가 남자라면 남성 보호자(배우자)가 동행해야 한다. 또 여성에게는 눈만 보이게 하는 아바야 의상만을 입도록해 이슬람권 중에서도 의복의 제약도 가장 심한 편이다.
2007년 11월 22일에는 한 여성이 남자들에게 집단 윤간당했음에도 태형 200대와 6개월 감옥형을 받은 판결이 나왔다. 사우디아라비아 법원은 2006년 10월 열린 1심에서 성폭행범 7명에게 각각 고작 징역 2~9년형을 선고했다, 피해 여성에게는 '쇼핑센터에서 남자 보호자와 동행하지 않은 것은 이슬람 법을 어긴 것'이라며 90대의 태형을 선고했다. 그러자 피해여성은 변호사를 동원해 항소했지만 재판부는 2007년 11월 14일 열린 2심 판결에서 오히려 더 높은 형량을 매겨서 태형이 200대로 늘어났으며 징역 6개월이 추가되었다. 재판부는 "언론을 통해 재판에 영향을 미치려 했기 때문"이라는 이유가 원인이었다고 하며, 같은 이유로 이 여성을 변호하던 변호사의 면허도 정지시켰다. 기사
2009년 3월 11일에는 70대 노파가 자기 집에서 단순히 외간남자와 함께 있었다는 이유로 40대의 채찍형을 선고받았는데 실제로 사우디에서는 집, 자동차 등 밀폐된 공간에서 외간남자와 함께 있기만 해도 음란죄로 처벌받을 수 있다. 기사
또한 사우디아라비아는 정부에 반하는 의견을 가진 사람들을 무자비하게 탄압하며 입에 재갈을 물리고 있다. 그의 통치시기에 정부는 사우디아라비아의 언론인과 시인, 블로거, 활동가, 트위터 사용자, 무신론자들을 조사하고 체포하거나 단기간 구금 및 고문 등의 인권유린이 빈번하게 이뤄진다. 또한 누구든 비판적인 의견을 내면 테러리즘으로 몰아세우는데 사우디아라비아 사법부는 트윗 하나를 두고 반테러법을 적용해 10년형 혹은 그 이상을 현재까지도 선고하고 있다. 또한 사우디아라비아 정부는 인권 단체들과 접촉한 사람들을 '테러리스트'라 낙인찍어버리거나 별에 별 수단을 동원해서 탄압하고 있다. 예를 들어 댓글부대를 조작해서 여론 조작을 시도하거나 반정부인사에게 미끼를 던져서 체포하는가 하면 글을 쓰지 말라고 협박하거나 직장에서 내쫒는 방식도 취한다.
그리고 사우디아라비아 정부는 최후의 수단으로 무자비한 형벌을 동원한다. 사우디아라비아에서는 한 블로거가 정치적·종교적 이슈를 자유롭게 토론할 수 있는 블로그를 만들었다는 이유로 신성모독으로 체포되어 징역 10년과 태형 1000대, 벌금 3억원을 선고받았으며 다른 블로거는 "나는 무함마드를 객관적으로 평가하며 그를 친구처럼 대하고 싶다"는 글을 올렸다가 정부에서 '이단'으로 낙인이 찍혀 살해 협박을 받자 말레이시아로 도망쳤지만 추방되어 신성모독으로 징역형에 처해졌다.
또한 권선징악 위원회(Committee for the Promotion of Virtue and Prevention of Vice)라는 정부(왕실) 지원금을 받는 단체가 있는데, 일명 하야(Hayaa)라고 불리는 이 단체의 자율방범단원들은 사우디아라비아 사회에 서구의 '문란한' 풍습이 스며드는 것을 막고, 율법에 어긋나는 모든 것들을 규제한다는 명목으로 강력한 권한을 휘두른다.
휴먼라이츠워치'(HRW)는 2007년 2월 18일 사우디아라비아가 적절한 사법절차 없이 수천명을 구금하거나 어린이에게 사형선고를 하는 등 인권침해가 심각하다고 밝힌 보고서를 내놓았는데, 이 보고서에 의하면 사우디아라비아 정부의 비밀경찰은 정치범 수천명을 수년간 기소나 재판없이 수용소에 구금했으며 사우디아라비아의 수도 리야드 남부의 알-하이르 교도소에선 기합 등 육체적 학대 사례도 발견됐다고 한다.
또 일부 수용자는 형기를 마쳤는데도 여전히 교도소에 수용돼 있었다. 기준이 모호한 도덕범죄를 저지른 어린이도 교도소에 수용됐는데 독방에 수용되거나 폭행을 당하기도 했다고 이 단체는 밝혔다. 해당 보고서에서는 충격적이게도 고작 13살 정도의 어린이들이 사형을 선고받기도 했으며, 재판 과정에서도 피고인의 변론권이 보장되지 않았고 범죄를 입증할 충분한 증거가 없는데도 유죄 판결을 받은 피고인도 있다고 고발했다. 기사
현재 사우디아라비아는 코란을 유일한 법으로 받들고 있기 때문에 절도범의 손목을 자르거나 간통죄를 돌팔매질로 처벌하는 등 코란의 구절들을 글자 그대로 엄격하게 해석해 적용하고 있다. 사우디에서 참수형은 상당히 폭넓게 적용되며 살인범 뿐 아니라 강간범, 마약 밀매범, 무장 강도 등도 참수형에 처해질 수 있다. 사우디아라비아 위원회는 2013년에는 범죄자에 대한 총살형이 코란의 뜻에 위배되지 않으므로 허용할 수 있다고 밝히기도 했다. 사우디아라비아에서는 물건을 훔친 도둑은 손목이 잘리고 싸움 중 상대방 치아를 부러뜨린 남성은 자기 이를 뽑히는 처벌을 받기도 한다.
국제 앰네스티에 따르면 사우디 정부는 2015년 상반기에만 102명을 참수형에 처했다.[6] 2011년 민주화 시위에 나섰다가 체포된 시아파 청년 무하마드 알니므르[7]도 참수형에 이은 십자가형[8] 집행을 기다리고 있다. 이런 식으로 지난 30년간 수많은 사람들이 사형당했는데 이렇기 참수된 사람 중 48.5%가 외국인이라고 한다. 사우디아라비아는 자국민은 물론 외국인조차 자국 내에서 샤리아에 어긋나는 중범죄를 저지르면 가차없이 일반 국민이 보는 가운데 참수를 하는 등의 공개처형을 하고 있다.[9]
사우디아라비아는 약 2900만 정도의 국민들이 있는데 이들은 독재뿐만 아니라 가난에도 시달리고 있는데 통계에 의하면 인구의 25%가 빈곤선 이하의 생활을 하고 있다. 특히 사우디아라비아 전체 인구의 절반 이상이 25세 이하, 3분의 2가 30세 이하로 젊은 층이 많은데 문제는 18~24세 인구의 30%가 실업자라는 점이다. 그래서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자행되는 독재와 가난이 오랫동안 지속될 수 없다는 주장이 현재는 상당히 힘을 얻기도 한다. 오바마는 2015년 4월 뉴욕 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사우디 청년이 "실업에 시달리고, 파괴적이고 허무주의적인 이념에 물들어 (극단적 저항 외에는) 정치적 불만을 토로할 수 있는 합법적 출구가 없다고 느끼고 있다"면서 국내 문제에 주의를 기울이라고 사우디아라비아 정부에 충고했다. 그러다보니 국민들에게 돈을 뿌려 불만을 잠재우기도 했다.
사실 이 문제는 석유와 천연가스에 경제를 절대적으로 의존하는 지대추구형 국가인 걸프 연안의 왕정들이 공통적으로 겪고 있는 것이지만, 사우디가 특히 심각한 것은 걸프협력회의 국가들 중에서도 압도적인 인구수 때문. 까놓고 말해 카타르 같은 국가는 자국민이 100만 명도 안 되기 때문에 어느 날 갑자기 기름이 말라버리지 않는 이상 경제적으로 곤란에 처할 가능성은 전혀 없지만, 사우디는 자국 인구만 2,000만에 달해서 천연자원만으로는 도저히 모든 국민들을 배불리 먹일 수 없다.[10] 게다가 부족주의가 만연한 중동의 독재국가답게 친위대, 자기 부족, 자기 부족과 친한 여타 부족들에게 더 많은 자원을 분배해야 되니, 빈곤층이 생길 수밖에 없다. 가장 좋은 해결책은 천연자원말고도 제조업, 서비스업을 육성하여 노동 인력을 흡수하는 것이지만... 게다가 사우디는 대졸자의 절대다수가 이슬람학같은 비생산적인 분야를 공부하고 있다. 그 결과 석유산업 같은 고임금 부가가치 일자리까지 유럽, 북미, 한국과 일본의 엔지니어들의 차지가 되었다.
휴먼라이츠워치는 사우디아라비아의 여성은 남성 보호자의 통제 하에 취직, 교육, 이동의 자유 등을 박탈당했고 900만 명에 달하는 외국인 노동자도 긴 노동시간과 무휴 근무, 임금 체납 등 열악한 노동조건에서 일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자신들의 보고서에서 주장하며, 사우디아라비아에서 900만 명의 여성과 800만 명의 외국인 노동자, 그리고 200만 명에 이르는 시아파 이슬람교도의 인권이 제도적으로 짓밟히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리고 2010년 엠네스티 인터내셔널 보고서는 "사우디 정부가 표현의 자유와 다른 정당한 활동을 억압하기 위해 광범위한 탄압 수단을 동원하고 있다"고 비판했으며, 보고서에 의하면 사우디아라비아의 시민 수백명이 테러리스트라는 혐의로 체포되는 일도 있었다고 한다. 2010년에 밝혀진 바에 의하면 양심수를 포함한 수천명이 국가 안보를 위한다는 이유로 감옥에 수감 중인데 이들 중 상당수가 공정한 재판을 받지 못했다고 압둘라 국왕을 비판했다.
[1] 이슬람권 이름에서 bin은 '~의 아들'이라는 의미이고, 'al'은 '영어에서 of나 the' 정도의 느낌으로 쓰인다. 'abd al'은 누구의 종이라는 의미. 때문에 이걸 해석하면. '알라의 종'이라는 의미의 '압드 알라'가 이름, '빈 압드 알아지즈'는 '압드 알아지즈의 아들'이라는 의미이다. '압드 알아지즈' 역시 '알라의 종'이라는 의미. 그리고 마지막의 '알사우드'는 '사우드 일족의'라는 의미이다. 즉, '사우드 일족에 속한 압드 알아지즈의 아들 압드 알라'[2] 물론 본토 공격이라는 초유의 사건에 눈이 돌아간 미국이 무섭게 압박한 결과이다. 그때 정말로 뭉개고 있었으면 아프가니스탄이나 이라크처럼 조지고 부시는 황상에 의해 개발살 났을지도 모른다. 실제로 이라크는 사담 후세인이 눈새짓 했다가 이라크는 짓밟히고 본인은 사형당했다.[3] 오히려 3대인 파이살 빈 압둘아지즈 알사우드가 오히려 더 좋은 왕에 가깝다. 그는 진심으로 개혁을 했다가 나중에 조카한테 암살 당했는데 일각에서는 이를 개혁 반대파들이 조카를 이용해 암살했다고 주장한다.[4] 심지어 명백히 연애 상황이 아닐 때에도 무조건[5] 주문 창구가 남녀로 나뉘어 있다.[6] 2014년 한 해 동안의 참수형 87명을 웃도는 것은 물론 역대 최고 기록은 1995년 192명 이다.[7] 당시 17세[8] 머리없는 시체를 십자가에 매다는 형벌이다![9] 물론 외국인도 서방의 외국인은 혹형을 못하고 그저 추방으로 그친다. 처형하는 외국인은 국제사회에서 외교적인 힘이 약한 개발도상국들이다.[10] 당장에 그 사우디의 이웃나라이자 석유자원이 나오는 산유국인 이라크와 이란이 왜 왕정이 붕괴되었는지를 생각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