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왓 프라깨오 วัดพระแก้ว | Wat Phra Kaew |
왓 프라깨오의 야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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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태국 방콕의 사찰이다. 정식 이름은 왓 프라시라따나사사다람[1]으로, '에메랄드 불상의 사원', 혹은 '에메랄드 사원'이라고도 불린다. 태국 불교의 상징과도 같은 에메랄드 불상이 안치되어 있어 태국 전역에서 가장 신성한 사찰이기도 하다.왓 프라깨오는 짜끄리 왕조의 시조인 라마 1세 시절인 1783년 처음 지어졌다. 그 이래로 모든 태국 국왕들은 왓 프라깨오를 증축하면서 높이 받들었고, 이는 현재 국왕인 라마 10세 시기까지 이어져 내려온다. 덕분에 왓 프라깨오는 거의 태국에서 신성불가침의 영역으로 통한다. 현재는 방콕 왕궁, 왓 포 등과 함께 방콕 최고 관광지들 중 하나로 매년 8백만 명에 달하는 관광객들이 찾는다.
2. 역사
톤부리 왕조 딱신 왕 휘하의 장군이었던 라마 1세는 딱신 왕의 광기가 점차 심해지자 쿠데타를 일으켜 딱신 왕을 몰아내고 짜끄리 왕조를 개창했다. 라마 1세는 딱신 왕의 영향력이 강했던 톤부리에서 벗어나고 싶어 하였거니와, 수도 톤부리에 있는 옛 왕궁은 거대한 사찰 두 곳 사이에 끼어서 매우 협소했다. 그리하여 라마 1세는 1782년 4월 수도를 방콕으로 천도했다.[2]라마 1세는 방콕을 완전히 새로운 신수도로 지었다. 짜오프라야 강 동안에 왕궁을 세웠고 그 바로 옆에 거대한 사찰을 세웠다. 원래 태국에서는 왕궁 바로 옆에 왕족 전용 불교 사찰을 세움이 관습이었고 라마 1세 역시 이를 그대로 따랐던 것이다. 왕실 전용이었기에 새롭게 지어진 사찰은 승려 거주구역이 없음을 제외하면[3] 모든 면에서 다른 사찰들과 비슷했다. 1783년 새로운 사찰의 첫 삽을 펐고 라마 1세는 이 사찰의 이름을 '왓 프라 씨 라타나 쌋사다람', 즉 '신성한 스승의 사원의 보석을 보관한 사찰'이라고 지었다. 태국은 전통적인 남방불교국가이거니와, 왕권을 담마라자(Dhammaraja), 즉 호법의 군주리는 데서 찾을 정도로 왕실과 불교의 관계가 깊다. 따라서 이 사찰에 많은 신경을 쏟았고, 심지어 당시 왕궁도 아직 임시로 목재로 만든 반면 이 사찰은 석재로 지었을 정도였다.
1784년 3월 22일에는 마침내 톤부리의 왓 아룬에 안치되었던 에메랄드 불상을 성대한 예식과 함께 방콕의 왓 프라깨오로 이운하였다. 1786년에 라마 1세는 새로운 수도의 정식 이름을 '끄룽 텝 마하나콘 아몬 라따나꼬신 마힌타라 유타야 마하딜록 폽 노파랏 랏차타니 부리롬 우돔랏차니웻 마하사탄 아몬 피만 아와딴 사팃 사카타띠야 윗사누깜 쁘라싯(กรุงเทพมหานคร อมรรัตนโกสินทร์ มหินทรายุธยา มหาดิลกภพ นพรัตน์ราชธานีบุรีรมย์ อุดมราชนิเวศน์มหาสถาน อมรพิมานอวตารสถิต สักกะทัตติยะวิษณุกรรมประสิทธิ์)'으로 지었다. 해석하면, 천사의 도시, 위대한 도시, 영원한 보석의 도시, 인드라 신의 난공불락의 도시, 9개의 고귀한 보석을 지닌 장대한 세계의 수도, 환생한 신이 다스리는 하늘 위의 땅의 집을 닮은 왕궁으로 가득한 기쁨의 도시, 인드라가 내리고 비슈바카르만(विश्वकर्मा)이 세운 도시' 정도가 된다.
왓 프라깨오는 라마 3세, 라마 4세 시절에 증축 작업을 거쳤다. 라마 3세는 1831년 방콕 천도 5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사찰을 대폭 개보수했고, 라마 4세 역시 거대한 증축 공사를 벌이면서 왓 프라깨오에 굉장히 많은 신경을 쏟았다.[4] 또한 1932년 방콕 천도 150주년 기념으로 라마 7세가 복구 작업을 벌였고 1982년에는 라마 9세 대왕이 또다시 방콕 천도 200주년을 기념하면서 또다시 왓 프라깨오에 대대적인 손질을 했다. 그이래 지금까지도 꾸준하게 손질이 이루어지고 있으며, 현재는 매 시즌마다 국왕이 직접 불상의 옷을 갈아입히는 행사를 여는 등 태국 최고 사찰의 위상을 여지없이 뽐내고 있다. 그외에도 왓 프라깨오는 현대 태국에서 가장 유명한 관광지들 중 하나이며, 2016년 기준으로 800만 명에 달하는 관광객들을 받아들이며 막대한 외화를 벌어들이고 있다.[5]
3. 내부
사진 | 설명 |
은둔 치료사의 동상 (Hermit Doctor) 위의 그림에서 1번 위치에 있는 동상. 관광객들이 이용하는 출입구인 4번 문(Gate IV)을 통과해 들어가면 가장 먼저 보이는 동상이다. 무릎 한 쪽을 올려 팔을 받치고 관광객들을 내려다보며 인자하게 웃는 모습이다. 이름은 '지바카 코마라밧차(태국어: 치와까 꼬마라팟)'라고 하는데, 불경을 통해서 부처의 주치의로 알려진 인물로 약초를 이용한 태국 전통 의술 및 마사지 기술의 창시자였다고 전해진다. 석회를 약초와 함께 물에 개어 사용했고, 때문에 동상 앞에는 석회가 가득 든 항아리가 있다. 동상 자체는 라마 3세의 재위기에 청동으로 주조되었다. | |
프라 우보솟 (Phra Ubosot) 위의 그림에서 2번으로 표시된 푸른빛 지붕의 건물.[6] 한국 불교에는 일대일로 대응되는 건물이 없는, 상좌부 불교 계열 사찰들의 중심건물이다.[7] 왓 프라깨오의 알파요 오메가인 에메랄드 불상이 바로 이 프라 우보솟 내부에 안치되었다. 왓 프라깨오 내에서 가장 중요한 건물인만큼 장식도 제일 화려하고 건물 주변에 살라[8] 12채가 둘러쌌다.[9] 1783년 라마 1세 시대에 지어졌고 사찰 내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이기도 하다. 입구는 동쪽으로 나있고 외벽에는 황금 가루다 조각상 등이 극히 정교하게 장식되어 있다. 내부에는 석가모니의 일대기와 국왕의 행진을 담은 벽화가 그려졌다.[10] | |
쁘라삿 프라 텝 비돈 (Prasat Phra Thep Bidon) 위의 그림에서 3번으로 표시된 주황빛 지붕의 십자기둥 모습의 건물.[11] 라마 4세 시기에 처음 지어졌고, 이때만 해도 원래는 에메랄드 불상을 보관해둘 용도로 지어졌다.[12] 하지만 건물이 완성된 이후 큰 문제가 발견되었으니, 바로 새 건물이 대관식을 치르기에 지나치게 공간이 좁다는 사실이었다. 라마 4세의 뒤를 이은 라마 5세는 이 건물을 대신 짜끄리 왕조의 역대 국왕들의 기념관으로 만들었다. 현재 쁘라삿 프라 텝 비돈 내부에는 모든 역대 국왕들의 실물 크기 조각상들이 있다. 외벽은 푸른 타일로 굉장히 정교하게 장식되었다. 왕실기념관인 만큼 일반적으로는 관람객들의 출입이 금지되며 1년에 딱 한 번, 짜끄리 왕조 기념일인 4월 6일 날에만 유일하게 개방한다. | |
쁘랑 (Prang) 위의 그림에서 4번으로 표시된 옥수수 모양의 탑들. 왓 프라깨오에는 쁘랑 총 8기가 있다. 공식적인 이름은 '프라 아사다 마하 쩨디(พระอัษฎามหาเจดีย์)'라고 부른다. 라마 1세 시기에 처음으로 세워졌고 라마 3세가 현재의 모습처럼 유리 모자이크들로 화려하게 덮었다.[13] 쁘랑 8기는 모두 팔각 기단 위에 곧게 세워져 있다. 쁘랑 각각에 출입구 4개가 있고, 문 옆에는 데바가 양 옆으로 지키고 있다. 각 쁘랑들은 불교 원리를 상징한다. 예를 들어 흰색 쁘랑은 고타마 싯다르타에게 봉헌되었으며 푸른색 쁘랑은 다르마, 분홍빛 쁘랑은 비구[14], 보라색 쁘랑은 연각[15]에게, 연청색 쁘랑은 전륜성왕에게, 붉은색 쁘랑은 보살에게, 황색 쁘랑은 미륵불에게 바쳐졌다. | |
허 프라 몬티얀탐 (Ho Phra Monthiantham) 위의 그림에서 5번으로 표시된 주황빛 지붕의 건물.[16] 사찰의 북동쪽 모서리에 자리하고 있다. 라마 1세의 동생이자 총독이었던 마하 수라 싱하낫이 건물 공사의 대금을 댔다고 전해진다. 총 4겹의 지붕들이 겹쳐져 있으며, 사면 모두 기둥들이 일렬로 지붕의 처마를 받치고 있다. 건물의 박공에 뇌신 인드라가 새겨져 있고 내부에는 원숭이신 하누만의 모습이 그려진 목재 장식들이 있다.[17] 현재 호 프라 몬티엔탐은 불교 행사가 열리는 용도로 주로 사용된다. 각지의 고승들이 이 곳에서 설법하기도 하고, 평시에는 승려들이 오래된 서적들을 연구하거나 불교계에서 따로 시험을 치를 때 이 곳을 시험장으로 쓰기도 한다. | |
프라 몬돕 (Phra Mondop) 위의 그림에서 6번으로 표시된 초록빛 지붕에 황금기둥으로 세워진 탑.[18] 쁘라삿 프라 텝 비돈 바로 뒤에 있다. 주 목적은 옛날 불교 텍스트들을 보관하는 것이라 약칭으로 도서관이라 불리기도 한다. 현재의 건물은 라마 1세 시절에 처음 지어졌다. 프라 몬돕이 완공되자 라마 1세는 아유타야 왕국이 멸망하면서 실전된 불경을 다시 복사하도록 시켰고, 완성된 대장경 한 부를 프라 몬돕 내부에 보관하고 있다. 총 20개 기둥들이 '몬돕' 양식[19]의 지붕을 떠받치고 있으며 기둥은 적, 청, 녹 등의 색유리가 수도 없이 붙어있다. 처마에 장식된 황금 잎사귀 장식들에는 수많은 풍경들이 매달려 바람이 불 때마다 소리가 난다. 내부에는 방이 하나 있고, 바닥에는 은으로 짠 카펫이 깔렸고 진주층으로 상감한 대장경 8만 4천여 쪽이 보관되었다. | |
프라 사웻꾸따칸 위한 엿 (Phra Sawetkudakhan Wihan Yot) 위의 그림에서 7번으로 표시된 주황빛 지붕에 백색 벽으로 지어진 건물.[20] 간단히 줄여서 '위한 엿'이라고 부르는 경우도 많다. 부처의 벽화와 불화들을 보관한 저장소이다. 라마 3세가 귀중한 불화들을 특별히 보관하기 위해 처음 지었다. 위에서 내려다보면 십자기둥 형태인데, 지붕 중앙에는 높은 왕관 모양의 탑이 하나 세워져 있다. 탑은 수많은 도자기 타일들로 장식되었다. 창문에는 라마 5세의 인장이 왕관 장식 아래에 새겨져 있고, 인간 몸통에 새 머리를 한 불교 호법신들이 동쪽과 서쪽에 나있는 입구를 지키고 있다. 문짝은 진주층으로 상감되었는데, 이는 앙 통 지방의 왓 파 목 사원에서 떼온 것이다. | |
라마끼엔 회랑 (Ramakien gallery) 위의 그림에서 8번으로 표시된 주황빛 지붕의 회랑.[21] 인도 대서사시 라마야나를 기반으로 한 태국의 서사시 '라마끼엔'의 내용 전체가 정교한 벽화로 그려졌다. 라마끼엔은 1797년 라마 1세의 직접 감독 하에 번역, 재구성된 서사시로 5개 장으로 구성된다. 라마 1세는 라마끼엔 서사시로 왕권의 정통성을 강화하고 태국만의 고유한 문학 대서사를 창조하고자 하였다고 한다. 라마 1세 시절 그려진 벽화들은 점차 지워지고 훼손되었기에 라마 3세 재위기에 아예 통째로 모두 지웠다고 모조리 새로 그렸고, 지금까지도 여전히 개보수 작업을 한다. 벽화는 총 178개 장면들로 이루어졌는데 그 아래에 짤막하게 소개글이 있다. 라마끼엔의 첫 장면을 담은 벽화는 위한 욧 근처의 7번 문(Gate VII) 쪽에 있다. | |
허 프라 낙 (Ho Prah Nak) 위의 그림에서 9번으로 표시된 붉은빛 바탕에 초록색 테두리 지붕의 건물.[22] 용도는 왕실 납골당이다. 왓 프라깨오 북서쪽 모서리에 있는 호 프라 낙은 원래 건립될 당시에는 불화를 모시는 건물이었으나, 시간이 흐르면서 왕족들의 유해를 보관하는 납골당이 되었다. 이 곳에 모셔져 있던 불화들은 모두 프라 위한 욧으로 옮겨졌다. 초기에는 오직 여성 왕족들의 유해만이 안치되었으나 시간이 흐르면서 남성 왕족들 역시 여기에 유해를 안치하였다. 왕실 납골당이기는 하지만 역대 국왕들의 유해는 단 한 구도 없고 모두 총독들이나 그 후손들의 유해들만 있다. 내부에는 수많은 황금 납골항아리들이 열을 지어 안치되었다고 한다. 물론 관광객들은 내부에 들어갈 수는 없다. | |
앙코르와트 모형 (Model of Angkor Wat) 위의 그림에서 10번으로 표시된 자리에 있다. 왜 캄보디아의 상징인 앙코르와트가 뜬금없이 왓 프라깨오 한복판에 있는지 궁금해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이에는 또 사연이 있다. 1860년대에 태국의 라마 4세는 찬란한 앙코르 유적의 상징인 앙코르 와트를 방콕으로 뜯어내 가져오고 싶어했다. 라마 4세는 병사 3천 명을 보내 사원 유적을 통째로 뜯어오라 명령하기도 했으나, 당연히 캄보디아인들이 극렬한 반발하고 병력들 사이에서 전염병이 돌아 뜻을 이루지 못했다. 사원을 뜯어오는 데에 실패하자 왕은 왓 프라깨우 내에 앙코르와트의 모형이라도 만들라고 명했고, 이 때문에 왓 프라깨우 내부에 꽤나 정교한 앙코르와트 모형이 뜬금없이 놓였다.[23][24] | |
프라 시 랏타나 쩨디 (Phra Si Rattana Chedi) 위의 그림에서 11번으로 표시된 거대한 황금빛 탑.[25] 탑에는 스리랑카에서 건너온 부처의 가슴뼈, 즉 진신사리가 봉안되었다. 라마 5세는 라마 4세가 선물받은 진신사리를 보관하고자 1855년 이 탑을 세웠다고 한다. 탑 전체가 황금색으로 덮여있 사람들의 관심을 끄는데, 실제로는 겉면만 금빛 타일로 덮어놓았고 안쪽은 벽돌로 지었다.[26] 층층이 기단 위에 좁아지는 원통형으로 이루어진 탑의 디자인 자체는 아유타야의 왓 프라 시 산펫 사원에서 모티브를 따와 만든 것이라고. 탑의 내부에는 천장이 반구형인 방이 하나 있는데,이 천장에는 차트라[27]가 아래로 내려오는 듯이 새겨졌고 전해진다. 방 중앙에는 부처의 사리가 담긴 흑빛 사리탑이 한 기 있다고 한다. | |
야크샤 (Yakshis) 위의 그림에서 12번으로 표시된 곳을 포함한 여러 장소들에 세워져 있는 수호상들. 태국어로는 '약(ยักษ์)'이라고 부르지만 한국인들에게는 야차라는 이름으로 더 친숙하다. 주로 사원의 출입문 양 옆으로 1쌍씩 서 있으나 북쪽 출입문에는 없다. 야크샤는 태국의 서사시 라마끼엔에 등장하는 거인 수호신들로, 피부색과 왕관의 형태로 구분한다. 각각의 거인상들은 모두 약 5m 정도로 상당히 크다.[28] 거인상들은 모두 철퇴나 무기를 꼬나쥐고 사찰에 침입하려는 악귀들을 막아낸다는 의미로 굉장히 험상궂은 얼굴을 하였다. 워낙 독특한 얼굴과 화려한 생김새 덕분에 요즘에는 사실상 태국의 마스코트들 중 하나이기도 하다. 거인상들은 수리야폽, 인타라칫, 망꼰깐, 위룬혹 등 이름도 다양하며, 모든 거인상들은 다 개별적으로 라마끼엔에 출연하는 등장인물이다.[29] | |
살라 (Sala) 위의 그림에서 13번으로 표시된 건물을 포함해 프라 우보솟을 둘러싼 12채 파빌리온.[30] 회색 대리석 기단 위에 지어져있다. 이 살라들은 모두 라마 1세 시기에 프라 우보솟과 함께 지어졌으며, 12개 살라들 모두 크기와 디자인이 똑같다. 6개의 사각기둥들이 주황색과 푸른색 타일이 덮인 기둥들을 떠받치고 있다. 색감만 보면 굉장히 화려한 디자인이지만 워낙 왓 프라깨오의 건물들이 색채가 다채롭기 때문에 정작 사원 내부에 들어가면 딱히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 |
에메랄드 불상 (The Emerald Buddha) 위의 그림에서 14번으로 표시된 프라 우보솟에 안치된 불상.[31] 태국과 짜끄리 왕조를 상징하는 불상이자 태국의 정체성 그 자체이기도 할 정도로 신성한 불상이다. 자세한 내용은 아래 문단 참조. |
4. 에메랄드 불상
계절별 불상의 모습[32] | 프라 우보솟 내의 모습[33] |
4.1. 기원
태국 내에서 최고로 신성하고 격이 높은 불상이다. 전설에 의하면 치앙마이 인근에 있는 한 사원에 벼락이 떨어졌고, 벼락이 사원의 탑을 쪼개면서 그 속에 있던 스투코 덩어리가 드러났다는 것이다. 사원의 주지스님은 이 덩어리를 신비롭게 여겨 자신의 거처에 가져다 놓았는데, 어느 날 스투코 덩어리가 깨지면서 그 속에 있는 찬란한 녹색 빛이 휘황찬란하게 뿜어져 나왔다고 한다. 놀란 스님은 스투코 덩어리를 깨어냈고, 깨진 스투코 덩어리 내부에는 아름다운 녹색 벽옥으로 만든 불상이 있었다고.[35]이 불상에 대한 신비로운 전설들은 굉장히 많다. 란나 왕국의 왕은 이 불상을 자신의 궁전으로 모셔가고 싶어 불상을 코끼리에 실어 옮기려 들었다. 그러나 코끼리는 절대 궁전으로 향하지 않았고, 무슨 수를 써서라도 람팡 지역으로 발길을 옮겼다. 왕은 이를 상서로운 징조로 받아들여 람팡 지역에 왓 프라깨오 돈 타오 사원을 지어 불상을 모셨다. 1468년에는 마침내 불상이 치앙마이로 옮겨졌으며 치앙마이의 왕들은 이 신성한 불상을 고이고이 모시며 왕가의 보물로 여겼다. 이후 불상은 1552년 란쌍 왕국의 수도 루앙프라방으로 옮겨졌다. 1564년 란쌍 왕국의 쎄티타랏 왕은 미얀마의 공격을 피하기 위해 수도를 비엔티안으로 천도했고, 이와 함께 에메랄드 불상도 함께 가지고 갔다.
1779년 당시 태국 출신 장군이었던 라마 1세가 라오스를 침공하고 비엔티안을 함락했다. 이때 라마 1세는 비엔티엔을 함락하고 불상을 태국으로 가지고 왔고, 당시 수도였던 톤부리에 왓 아룬을 지어 불상을 그 곳에 안치했다. 이후 라마 1세가 쿠데타를 일으켜 딱신 왕을 몰아내고 짜끄리 왕조를 개창하자 불상은 짜끄리 왕실과 태국의 상징이 되었고, 그 이래로 지금까지 태국의 명실상부한 상징으로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라마 1세는 에메랄드 불상을 보관하기 위해 왕궁 인근에 왓 프라깨오를 1784년 축성했고, 에메랄드 불상은 그해 3월 22일 성대한 의식과 함께 왓 프라깨오의 프라 우보솟에 안치되어 현대에 이른다.
이러한 내력이 있는 까닭에 현대 라오스인에게 에메랄드 불상은 국력이 약해서 탈취당한 문화유산으로 인식되기도 한다고 한다. 한국외국어대학교 태국어과의 정환승 교수의 역사기행문에 따르면, 한 라오스 국립대학의 교수가 "에메랄드 불상은 자신들에게는 값진 문화유산이나 영험 많은 불상이라기보다는 약소국의 비애를 상징하는 역사적 산물"이라고 말하면서 씁쓸해했다고.[36]
4.2. 행사
불상의 옷을 갈아입히는 라마 10세[37] |
보통 3월과 8월, 11월에 한 번씩 왕이나 그에 준하는 고위 왕족이 직접 불상의 옷을 갈아입힘이 관례로 거의 연례행사처럼 열린다. 3월부터 8월까지인 건기와 여름에는 뾰족뾰족한 태국 전통식 왕관과 황금 가슴 장식, 목걸이, 팔찌 및 수많은 보석류를 입힌다. 참고로 불상이 착용하는 모든 장신구들은 국왕과 격이 같은 것들을 사용한다고 한다. 8월부터 11월까지인 우기에는 사파이어를 박아넣은 황금 왕관과 한쪽 어깨에 걸치는 숄을 입고, 11월부터 3월까지인 겨울에는 다이아몬드를 박은 황금 숄을 몸 전체에 빙빙 두른다.
[1] วัดพระศรีรัตนศาสดาราม[2] 그래 봤자 톤부리와 새로운 수도 사이는 굉장히 가까워 강 건너편이었다. 현재의 행정구역상 톤부리 지역은 아예 방콕 시내에 포함된다.[3] 국왕의 경호를 위해 함부로 승려들을 사찰에 들이지 않았다. 대신 인근 사찰의 고승들이 잠깐 다녀가면서 재를 지내고 돌아갔다.[4] 라마 4세가 벌려놓은 공사가 워낙 컸기에 이 공사는 후대 라마 5세 시절에야 끝난다.[5] 참고로 프랑스의 루브르 박물관에 매년 920만 명 정도가 방문한다. 태국에 얼마나 많은 관광객들이 다녀가는지 짐작해볼 수 있다.[6] 태국어로는 'พระอุโบสถ'라고 쓴다.[7] 우보솟은 상좌부 불교의 승려들이 초하룻날과 보름날에 포살을 하고, 구족계 수계 의식을 하는 건물이다. 결계당(結界堂)이라는 번역어도 있는데, 우보솟 주변 일정 범위 안에는 전기선 등도 연결하면 안 되고 나무 뿌리가 가지도 침범하면 안 되는 금역이기 때문이다. 만약 우보솟의 일정경계 안으로 나무뿌리나 전기선 등이 침범하면, 원칙적으로 해당 우보솟은 더 이상 불교 율장에 따른 적법한 공간이 아니고, 따라서 침범 이후로 행한 모든 포살과 수계는 무효가 된다. 상좌부 불교의 사찰이 진정으로 '사찰'이 되려면 반드시 적법한 우보솟이 있어야 한다.[8] 13번 건물 참조[9] 살라 안쪽에는 각각 하나씩 금잎사귀로 장식된 표지석이 있다. 불교에서 속세와 사찰을 구분하는 경계를 구분하는 셈.[10] 내부가 워낙 사람들로 북적거리고 에어컨이 없어 꽤나 후덥하기 때문에 대부분 벽화를 자세히 보지 못하고 빨리 나온다.[11] 태국어로는 'ปราสาทพระเทพบิดร'라고 쓴다.[12] 라마 4세는 공사가 완공되기 전에 사망했다.[13] 원래 쁘랑 8기 모두가 사찰의 벽 바깥에 있었으나 라마 4세가 사찰을 확장하면서 8개 중 2개가 사찰의 담장 안으로 들어왔다.[14] 출가한 남성 승려를 이르는 말. 여성의 경우 비구니라고 한다.[15] 다른 이에게 설법을 구하지 않고 스스로 진리를 깨달은 부처. 벽지불(辟支佛) 또는 독각(獨覺)이라고도 한다.[16] 태국어로는 'หอพระมณเฑียรธรรม'이라고 쓴다.[17] 하누만은 마하 수라 싱하낫 총독의 상징이었다.[18] 태국어로는 'พระมณฑป'라고 쓴다.[19] 태국 전통의 지붕 양식. 굉장히 정교한 건축방식으로, 모서리가 많고 층을 겹겹이 쌓은 것으로 유명하다.[20] 태국어로는 'พระเศวตกุฏาคารวิหารยอด'라고 쓴다.[21] 태국어로는 'พระระเบียง'라고 쓴다.[22] 태국어로는 'หอพระนาก'라고 쓴다.[23] 참고로 당연히 캄보디아 정부는 이를 문화재 훔치기라고 강력하게 반발하지만 태국 정부는 씹고 있다.[24] 태국 정부는 상대적으로 국력이 약한 캄보디아를 무시하는 경향이 강하다.[25] 태국어로는 'พระศรีรัตนเจดีย์'라고 쓴다.[26] 참고로 이 타일들은 라마 5세가 직접 이탈리아에서 공수해온 것이다.[27] 왕실의 권위를 상징하는 우산[28] 실제로 보면 생각보다 크기가 커서 놀랄 정도.[29] 이 때문에 자세히 살펴보면 모두 특색이 있게 생겼으며 왕관이나 복장들도 미묘하게 다르다.[30] 태국어로는 'ศาลาราย'라고 쓴다.[31] 태국어로는 'พระแก้วมรกต'라고 쓴다. 정식 이름은 '프라 푸타 마하 마니 랏타나 빠티마꼰'(พระพุทธมหามณีรัตนปฏิมากร)이다.[32] 태국에서는 계절마다 불상의 옷을 갈아입힌다. 왼쪽부터 오른쪽으로 여름, 우기, 겨울철 불상의 모습이다.[33] 프라 우보솟 내부에 들어가면 에메랄드 불상은 너무 높은 곳에 있어서 거의 연두색 점처럼 보인다. 게다가 워낙 사람들이 뒤에서 많이 몰려오다보니 안에 들어갔다가도 몇 분만에 제대로 불상을 보지도 못하고 나오는 사람들이 상당수.[34] '에메랄드' 불상이라고 해서 에메랄드로 만들어졌다고 착각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절대 아니다.서술 트릭[35] 고고학자들의 연구 결과 불상은 15세기 란나 왕국의 불상 양식과 흡사하다고 한다. 따라서 란나 왕국 시기 만들어졌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 학계의 정설.[36] 정환승, 2019, 「랏따나꼬신을 가다」, 『태국역사문화기행』, 441면.[37] 2017년 11월 19일에 치러진 예식이다.[38] 옛날 의상은 왕궁 내부의 박물관에 보관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