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06 17:10:58

에드가 다비즈

엣하르 다비츠에서 넘어옴
에드가 다비즈의 역임 직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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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FC 아약스 주장
야프 스탐
(2006~2007)
에드가 다비즈
(2007~2008)
클라스얀 휜텔라르
(2008~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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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가 다비즈의 수상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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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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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스트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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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덜란드의 축구인
파일:attachment/에드가 다비즈/Davids.jpg
<colbgcolor=#eeeeee><colcolor=#000000> 에드가 다비즈
Edgar Davids
본명 엣하르 스티븐 다비츠[1]
Edgar Steven Davids
출생 1973년 3월 13일 ([age(1973-03-13)]세)
네덜란드령 기아나 파라마리보
국적
[[네덜란드|
파일:네덜란드 국기.svg
네덜란드
]][[틀:국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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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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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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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리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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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리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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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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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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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체 169cm | 체중 68kg
직업 축구 선수 (수비형 미드필더 / 은퇴)
축구 코치
축구 감독
소속 <colbgcolor=#eeeeee><colcolor=#000000> 선수 용 아약스 (1985~1991 / 유스)
AFC 아약스 (1991~1996)
AC 밀란 (1996~1997)
유벤투스 FC (1997~2004)
FC 바르셀로나 (2004 / 임대)
인테르나치오날레 (2004~2005)
토트넘 홋스퍼 FC (2005~2007)
AFC 아약스 (2007~2008)
크리스탈 팰리스 FC (2010~2011)
바닛 FC (2012~2014)
감독 바닛 FC (2012 / 플레잉 코치)
바닛 FC (2012~2014)
SC 텔스타 (2020~2021 / 수석 코치)
SC 올랴넨스 (2021)
네덜란드 대표팀 (2022 / 코치)
국가대표 74경기 6골 (네덜란드 / 1994~2005)
가족 조카 로이스톤 드렌테

1. 개요2. 선수 경력3. 은퇴 이후4. 플레이 스타일5. 기록
5.1. 대회 기록5.2. 개인 수상
6. 여담7.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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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네덜란드축구 선수 출신 지도자.

2. 선수 경력

2.1. 클럽

2.1.1. AFC 아약스

남미의 수리남 출신으로 1985년 아약스 암스테르담 유스팀에서 축구를 시작하였다. 1991년 1군 팀에 승격하였다. 1994-95 시즌에는 파트릭 클라위버르트 등과 함께 AC 밀란을 꺾고 UEFA 챔피언스 리그를 제패했다. 이후 도요타컵에서도 그레미우승부차기 끝에 꺾고 우승하였다. 1995-96 시즌에도 UEFA 챔피언스 리그 결승까지 진출했지만, 첫번째 키커로 나와 실축을 하여 유벤투스에 패해 준우승에 머물렀다. 아약스에서 5시즌 동안 106경기에 출장해 20골을 기록했다.

아약스 암스테르담에서의 활약을 바탕으로 1996년 AC 밀란으로 이적, 입단 첫해 19경기에 출전하였다. 그러나 그 다음해에는 개막 직후 AC 페루자전에서 골키퍼와 충돌한 뒤 부상을 당해 시즌을 날려버렸다. 그 후 1997년 시즌 중반 밀란 수뇌부가 불화를 이유로 그를 방출시켜버려 유벤투스로 이적했다.[2]

2.1.2. 유벤투스 FC

1997-98 시즌 유벤투스스쿠데토 획득에 공헌하였다. 하지만 동거녀 폭행 사건을 일으키며 유벤투스와 관계가 안 좋아지기 시작하였고 2001년에는 금지약물 검사에서 양성반응이 나와 4개월 출장 정지 처분을 받았다.# 본인은 "녹내장 치료제에 포함된 성분이 원인"이라고 변론했다. 2001-02 UEFA 챔피언스 리그 아스날전에서 당시 감독인 마르첼로 리피가 그를 제어하기 위한 목적으로 이고르 투도르를 대신 출장시켜 문제가 발생하였다. 리피의 기용 방법에 분노를 표출한 그는 생방송 중 카메라에 "경기에 나오지 못한다면 나는 팀을 떠날 뿐이다"라고 말하였다. 이 발언에 유벤투스 수뇌부는 다비즈에게 무거운 벌금을 부과하였고 양자간의 관계가 점점 악화되었다.

구단에 대한 불만이 더욱 커진 다비즈는 절대로 재계약을 안할 것이라고 하며 AS 로마로의 이적을 감행하려 하였고 토티마저도 다비즈의 이적을 지원해주며 이적이 성사되는 줄 알았으나, 당시 유벤투스 단장이었던 루치아노 모지의 반대로 이적이 무산되었다.[3] 그 이후 모지는 첼시의 제의를 받아들이고 다비즈를 이적시키려고 하였으나 선발명단 제외와 원했던 AS 로마 이적이 가로막혀 더욱 화가 난 다비즈는 유벤투스에게 "이적료를 안겨줄 수 없다"는 앙심을 품고 자유계약으로 나갈 생각으로 일부러 첼시에게 말도 안되는 주급을 요구하며 첼시행을 거절하고 빈정거리는 태도로 유벤투스에 남고 싶다고 했다. 유벤투스 측도 처음에는 놀랐으나 다비즈가 자유계약으로 나가려고 하는 거라면 우리도 자유계약 선수를 영입하면 된다고 하는 등 다비즈의 행동을 맞받아치면서 양측의 관계는 돌이킬 수 없는 지경까지 가게 되었다. 이후 리피가 실명을 거론하지 않고 다비즈의 행동을 비판하였는데 의도는 정말 비난하려는 것은 아니었고 다비즈가 이 말을 듣고 다시 돌아와주길 바라는 의미로 한 말이었다. 하지만 한 성격하는 다비즈가 이 말을 들을리 만무하였다.[4]

당시 국가대표팀 감독이었던 딕 아드보카트는 다비즈가 선발 출장 기회를 자주 갖지 못해 유로 2004에서 폼이 저하될 것을 우려하여, 당시 바르셀로나 감독이었던 프랑크 레이카르트에게 다비즈의 임대를 제안하였다.

2.1.3. FC 바르셀로나 (임대)

이 제안은 승인을 받게 되어 2004년 1월 11일 바르셀로나로 임대되었다. 1월 17일 아틀레틱 빌바오전에서 라리가에 데뷔하였다. 이후에도 라리가에서 활약하며 부진했던 바르셀로나를 리그 2위로 끌어올리는 공신이 되었다.[5] 이후 바르셀로나로 완전이적 가능성이 대두되었으나 두 구단간의 이적료 협상의 이견을 좁히지 못하여 완전이적에는 실패하고 말았다.

그리고 이 당시 수원 삼성과의 친선전을 위해 수원을 방문했었다!

당시 호나우지뉴의 인기가 대단했지만 다비즈의 플레이를 국내에서 볼수 있다는 점 때문에 대한민국 팬들이 다비즈에게도 주목을 많이 하였다.

2.1.4. 이후

2004년 7월 계약 만료 후 인테르로 자유이적하였으나, 후안 세바스티안 베론에스테반 캄비아소와의 주전 경쟁에서 밀리고 로베르토 만치니 감독과 관계가 악화되며 14경기 출전에 그쳤다.

2005년 잉글랜드의 토트넘 핫스퍼로 이적하였다. 입단 첫해는 31경기에 출장하며 주전 미드필더 자리를 확보하는 것 같았으나, 2006-07 시즌 코트디부아르 출신의 디디에 조코라가 입단한 후 주전 자리에서 밀리며 출전 기회가 감소하며 9경기 출장에 그쳤다.

출전 기회를 찾기 위해 2007년 1월에 친정 팀 아약스로 이적하며 11년 만에 복귀하였다. 2007-2008 시즌 개막전이었던 고 어헤드전에 보호대 없이 출전했는데 왼발 골절 부상을 입으며 장기간 전력에서 이탈해 11경기 출전에 그쳤다. 이후 경기 출장이 없었고 아약스에서 방출되었다.

이후 2년 간의 공백 기간이 있었다가 2010년 8월 풋볼 리그 챔피언십 소속의 크리스탈 팰리스로 이적하였다. 하지만 크리스탈 팰리스에서도 6경기 출장에 그쳤고, 2010년 11월 팀을 떠나게 된다.

2012년 10월 풋볼 리그 2 소속의 바닛의 플레잉코치로 이적하였다. 등번호는 골키퍼들의 대표 번호인 1번. 2012-13 시즌 28경기에 출장해 1골을 기록하였지만 팀의 컨퍼런스 프리미어 강등을 막지 못하였다. 2013-14 시즌 8경기에 출장하였다. 2013년 12월 28일 현역 은퇴를 선언하였다.

2.2. 국가대표

1994년 4월 20일 아일랜드전에서 네덜란드 국가대표로 데뷔하였다. 그러나 라디오에서 "Hiddink should stop putting his head in some players' asses."("히딩크는 몇몇 선수들한테 병신같은 짓을 하는 걸 그만둬야 한다") 라는 발언을 하며 대표팀 감독이던 거스 히딩크에게 공개적으로 항명을 했고, UEFA 유로 1996 대회 도중 대표팀에서 쫓겨나야만 했다.

이후 자숙(?)의 시간을 보내다 결국 1998 프랑스 월드컵 엔트리에 포함되었고, 조별리그에서 당시 날쎈돌이라 불리던 서정원을 상대로 볼을 빼앗는 장면은 지금까지도 올드 한국 축구팬들의 트라우마로 남아있을 정도로 강렬한 인상을 남겼고,[6] 16강전이었던 유고슬라비아전에서 중거리슛으로 극적인 결승골을 기록하는 등의 활약으로 올스타팀에 선정되었다. 네덜란드와 벨기에가 공동 개최한 유로 2000에서도 대회 개최 전부터 대회 광고 모델로 주목을 받았으며, 팀은 4강전에서 이탈리아를 상대로 승부차기 끝에 석패했으나[7] UEFA Team of the Tournament에 선정되었다.

2002 한일 월드컵 예선에서는 부진하여 본선 진출에 실패했다. 유로 2004에서는 팀을 준결승까지 이끌었다. 이후 대표팀 입지가 크게 줄었고 이듬해 대표팀에서 은퇴했다.

3. 은퇴 이후

2012년 바넷의 플레잉 코치로 나서며 지도자 생활을 시작하였고, 2012년 10월부터는 바넷의 지휘봉을 잡았다. 그러나 5부 리그 강등을 막지 못했고, 5부 리그에서도 10위에 머무는 등 부진이 이어지자 2014년 1월 19일 바넷의 감독직에서 물러났다. 2020년 8월에 SC 텔스타 수석 코치로 부임했다. 2021년 1월에 SC 올랴넨스 감독으로 부임했다. 한국 시각으로 2022년 5월 7일 새벽에 네덜란드 대표팀 코치로 부임한다고 공식 발표되었다. 계약 기간은 카타르 월드컵까지.

2022년 카타르 월드컵 8강전에서 아르헨티나에게 패한 이후 다가온 메시에게 무엇인가 말을 건넸다.# 처음 나온 SBS에 기사에 따르면 축하해주는 것이라고 했으나 이후 '메시가 반 할 감독과 언쟁을 벌였다'라는 보도를 보면 말린 것에 가까울 수도 있다.#

4. 플레이 스타일

타고난 체력과 활동력으로 커버하는 점은 클로드 마켈렐레, 거친 몸싸움과 태클을 바탕으로 중원을 잠식하는 점은 젠나로 가투소와 비슷한 스타일이다. 그렇지만 마켈렐레나 가투소와는 달리 호나우지뉴를 연상시키는 뛰어난 개인기와 수준급의 드리블, 그리고 일자로 꽂아버리는 강력한 킥력도 갖춘 만능 미드필더. 심지어 그 미친듯한 체력을 바탕으로해서 활동반경마저 넓었다. 미드필드에서 투지 넘치는 플레이를 보이며 싸움닭이라는 별명까지 얻었다.[8] 이때 뛰어난 운동 능력에 대한 일화로는 1998년 프랑스 월드컵 4강 브라질전에서 당시 신체적으로 최전성기였던 호나우두를 쫒아가 공을 커트해 낸 것이 대표적이다.

아약스 시절 프랑크 레이카르트의 후계자라 불리며 기대를 받았고, 1995년 아약스의 챔피언스 리그 우승 돌풍의 핵심에 위치했다. 이후 1990년대 후반 대표적인 수비형 미드필더로 이름을 날렸으나, 부상과 녹내장, 약물파동 등으로 인해 전성기가 길지는 못했다. 후임이였던 마르크 판보멀이 성질이 워낙 지랄맞아 카드캡터질을 자주 보여 준 지라[9] 다비즈의 공백을 네덜란드인들이 많이 아쉬워한 편.

뛰는 모습을 보면 호나우지뉴를 연상시킨다. 보이는 이미지와는 달리 매우 뛰어난 개인기를 가졌고, 뛰는 폼마저도 상당히 비슷한데 피부색과 긴 곱슬머리를 뒤로 묶거나 헤어밴드로 고정시킨 머리스타일까지 비슷하다! 단순히 닮았다 정도가 아니라 누가 누군지 잘 구분이 가지 않을정도로. 실제로 바르사 시절 호나우지뉴와 함께 뛰었는데 당시 영상을 보면 이게 호나우지뉴인지 다비즈인지 한참을 쳐다봐도 잘 구분이 가지 않을 정도다. 물론 둘의 포지션은 한참 달랐지만[10] 타고난 피지컬을 위시해서[11] 공을 빼았고, 다비즈의 체력과 그것을 바탕으로한 활동 영역이 호나우지뉴의 포지션과 겹칠 정도로 엄청났다는것을 암시한다. 단, 다비즈는 히바우두, 카를루스, 긱스와 함께 당대를 대표하던 왼발잡이였다. 호나우지뉴와는 주발부터 다르다.

5. 기록

5.1. 대회 기록

5.2. 개인 수상

6. 여담

파일:시대별 최고의 수비형 미드필더.jpg
골닷컴에서 시대별 최고의 수비형 미드필더 5인을 선정했는데, 2000년대 최고의 수비형 미드필더 4위에 이름을 올렸다.

과거 네덜란드령이었던 수리남에서 태어났다. 대표팀 동료인 클라렌스 세도르프지미 플로이드 하셀바잉크도 수리남 출신이다. 선배인 루드 굴리트프랑크 레이카르트도 수리남계이다.

리그 오브 레전드 루시안 스킨 중 하나 인 스트라이커 루시안(Striker Lucian)은 에드가 다비즈를 모델로 한 스킨이라고 한다. 소송까지 갔었고, 다비즈가 이겼으며 라이엇 게임은 스트라이커 루시안의 네덜란드 수입만 보상 하면 된다고 한다.

현역 시절 나이키와 전속 계약을 맺고 활동했다. 다비즈가 주연급으로 출연했던 나이키의 1999년 'The Mission' CF는 나이키의 블록버스터급 축구 광고 가운데에서도 명작으로 손꼽힌다.

그의 사촌인 로렌조 다비즈도 프로 축구선수였으며 한때 FC 아우크스부르크에서 구자철과 한솥밥을 먹기도 하였다. 둘의 사이가 꽤 좋았는지 국내 중계채널에서 한국어를 하는모습도 보인적 있다.

수비형 미드필더지만 특이하게도 득점왕 수상경력이 있다. 바로 92-93 시즌 KNVB 베이커 득점왕이 그것.

6.1. 고글

선수 시절 그가 유명한 이유는 플레이 스타일도 있겠지만 그전에 특수 고글 착용으로 인해 엄청난 유명세도 있었다.[12]

2000년 왼쪽 눈에 녹내장이 발병해 실명의 위험이 있었지만, 수술을 통해 극복하고 경기중에는 FIFA의 공식 허가 속에 특수 보호 고글을 착용하게 되었다. 이 고글은 나이키에서 특수 제작한 고글로 공에 맞아도 깨지지 않고 물렁물렁한 특수재질로 눈 보호에 적합하다고 한다.

이후 고글은 그의 트레이드 마크가 되었고, 그 뒤로 여러 선수가 고글을 썼지만 지금도 축구에서 고글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선수이다.

7. 같이 보기

1 반 데 사르 · 2 레이저허르 · 3 스탐 · 4 F. 더 부르 · 5 누만 · 6 용크 · 7 R. 더 부르 · 8 베르캄프 · 9 클라위버르트
10 세도르프 · 11 코쿠 · 12 젠던 · 13 오이여르 · 14 오버르마르스 · 15 보하르더 · 16 다비즈 · 17 V. 호이동크
18 더 후이 · 19 V. 브롱크호르스트 · 20 빈터르 · 21 하셀바잉크 · 22 헤스프
파일:네덜란드 국기.svg 거스 히딩크

1 반 데 사르 · 2 레이저허르 · 3 스탐 · 4 F. 더 부르 · 5 젠던 · 6 세도르프 · 7 코쿠 · 8 다비즈 · 9 클라위버르트
10 베르캄프 · 11 오버르마르스 · 12 V. 브롱크호르스트 · 13 콘터르만 · 14 V. 포센 · 15 파울 보스펠트 · 16 R. 더 부르 · 17 V. 호이동크
18 더 후이 · 19 누만 · 20 빈터르 · 21 마카이 · 22 베스터르펠트
파일:네덜란드 국기.svg 프랑크 레이카르트

1 반 데 사르 · 2 레이저허르 · 3 스탐 · 4 바우마 · 5 V. 브롱크호르스트 · 6 코쿠 · 7 판 데르 메이더 · 8 다비즈 · 9 클라위버르트
10 V. 니스텔로이 · 11 판 데르 파르트 · 12 마카이 · 13 바터루스 · 14 스네이더 · 15 F. 더부르 · 16 오버르마르스 · 17 V. 호이동크
18 헤이팅아 · 19 로번 · 20 세도르프 · 21 보스펠트 · 22 젠던 · 23 베스터르펠트
파일:네덜란드 국기.svg 딕 아드보카트


[1] Steven은 네덜란드어 표기 규정을 적용시키지 않는다. 네덜란드어 인터뷰 영상 edgar는 국립국어원 표기세칙에 엣하르로 표기하도록 되어있으며, 위 인터뷰 영상에서도 /etxɑr/로 발음하는 것을 들을 수 있다. 무성 연구개 마찰음 /x/발음은 한국인에게 친숙한 발음은 아니며, 실제 발음은 에트카 정도로 들릴 수 있다.[2] 사생활 문제도 있었으며 밀란 선수들과 사이가 안좋았던 편이었고 특히, 밀란의 레전드 중 한 명이었던 알레산드로 코스타쿠르타와는 욕설을 주고 받을 정도로(코스타쿠르타는 다비즈를 썩은 사과에 비유할 정도였다.) 사이가 매우 안 좋았었다고 한다. 게다가 길거리에서 팬과 시비가 붙어 다투다 팬에게 폭행위협을 하는 사건을 계기로 밀란 측은 다비즈를 완전히 포기하게 되었다.[3] 이유는 모지와 당시 AS 로마 구단주였던 프랑코 센시가 이탈리아 축구계에서 대표적인 앙숙이었기 때문. 대표적으로 모지가 센시가 구단 주로 있는 한 내 눈에 흙이 들어가도 절대로 로마에 선수를 이적시키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할 정도였다. 이 때 유벤투스는 재정난에 시달리던 상황이라서 이적료가 얼마 안되더라도 받을 만했는데도 모지가 이 이적을 극구 반대함으로서 축구팬들에게 모지와 센시가 얼마나 사이가 안좋은 지를 제대로 보여주게 되었다.[4] 이런 일들로 인해 유벤투스와는 완전히 척을 졌는지 훗날 국대 동료였던 야프 스탐이 이적을 생각하고 있을때 유벤투스에서도 스탐에게 관심을 가졌는데, 다비즈가 스탐에게 "유벤투스만은 가지 마라" 라고 재를 뿌리기도 했다. 결국 스탐은 유벤투스가 아니라 AC 밀란으로 이적하게 된다.[5] 당시 바르셀로나는 레알 마드리드에게도 번번히 지며 리그에서 중위권에나 머무는 상태였지만, 에드가 다비즈의 가세 이후 안정적인 빌드업과 공격 전개가 가능해져 이후 계속될 황금기의 초석을 닦을 수 있었다. 그야말로 축구에서 수비형 미드필더의 중요성을 가장 잘 보여준 사례라 할 수 있으며, 후기 사람들은 다비즈의 영입을 신의 한 수로 평가하기도 한다.[6] 그 뒤에 다비즈는 4강 브라질전에서 아예 최전성기 시절의 호나우두를 상대로 호나우두의 공을 커트 시키는 모습까지 보이며 충격적인 활약을 선보였다.[7] 이탈리아의 잠브로타가 퇴장당한 상태에서 네덜란드가 페널티킥을 2번이나 얻었음에도 모두 실축하면서 어이없게 패했다.[8] 물론 그 거친 플레이의 반대급부로 카드도 엄청 받았다. 프로 통산 25번의 퇴장을 당했으니.[9] 그런데 그 판보멀도 다비즈에 비하면, 그리고 앞에서는 순한 양이었다.[10] 다비즈가 피지컬과 엄청난 활동력으로 공을 빼앗아 빌드업에 기여하는 수비형 미드필더였다면, 호나우지뉴는 그렇게 얻어낸 주도권을 최대한 활용하는 공격수였다.[11] 체격 자체는 170cm가 안되었지만 온몸을 던져서 개싸움을 하는 스타일이었고, 이게 그 거칠다는 세리에 A에서마저 먹힐 정도였다.[12] 다비즈가 처음 고글을 쓰고 나올당시 한국 유럽축구팬들사이서는 고글을 벗으면 악마의 눈이 나온다느니(...) 라는 루머가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