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4-23 01:57:20

피에르 판호이동크

피에르 판호이동크의 수상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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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덜란드의 前 축구선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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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eeeeee,#191919> 이름 피에르 판호이동크
Pierre van Hooijdonk
본명 페트뤼르 페르디난뒤스 요하너스 피에르 판호이동크
Petrus Ferdinandus Johannes Pierre van Hooijdonk
출생 1969년 11월 29일 ([age(1969-11-29)]세)
네덜란드 스텐베르겐
국적
[[네덜란드|]][[틀:국기|]][[틀:국기|]]
신체조건 193cm
직업 축구선수(스트라이커 / 은퇴)
소속 선수 RBC 로센달 (1989~1991)
NAC 브레다 (1991~1995)
셀틱 FC (1995~1997)
노팅엄 포레스트 (1997~1999)
SBV 피테서 (1999~2000)
SL 벤피카 (2000~2001)
페예노르트 로테르담 (2001~2003)
페네르바흐체 SK (2003~2005)
NAC 브레다 (2005~2006)
페예노르트 로테르담 (2006~2007)
국가대표 파일:네덜란드 축구 국가대표팀 로고.svg 46경기 14골 (네덜란드 / 1994~2004)
가족 아들 시드니 판호이동크
1. 개요2. 선수 경력
2.1. 초기 생애2.2. RBC 로센달 시절2.3. NAC 브레다 시절2.4. 셀틱 시절2.5. 노팅엄 포레스트 시절2.6. SBV 피테서 시절2.7. 벤피카 시절2.8. 페예노르트 시절2.9. 페네르바흐체 시절2.10. 말년2.11. 국가대표 경력
3. 여담4. 수상 기록
4.1. 대회 기록4.2. 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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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피에르 판호이동크는 네덜란드의 前 축구 선수다. 그는 1989년에 데뷔한 이래 90년대와 2000년대 초반 명성을 떨쳤다. 빠른 스피드, 절륜한 개인기, 준수한 볼키핑, 예술적인 프리킥 실력, 번뜩이는 골 결정력을 주무기로 삼은 그는 대한민국 축구 팬들에겐 1998년 FIFA 월드컵때 대한민국과의 조별리그 2차전에서 네 번째 골을 득점한 선수로 유명하다. 그의 실력은 확실히 한 국가를 대표하는 최고의 스타플레이어가 될 만 했다. 그러나 그에게는 불행히도 당시 네덜란드엔 수많은 스타 플레이어들이 쏟아져나오는 바람에 그는 상대적으로 묻히고 말았고 가는 곳마다 마찰을 빛는 모난 성격 탓에 한 곳에 머무르지 못하고 전 유럽을 떠도는 저니맨으로 전락했다. 그래도 그 또한 1990년대~2000년대 초반 네덜란드의 황금기를 상징하는 멤버 중의 한 사람임은 분명하다.

2. 선수 경력

2.1. 초기 생애

판호이동크는 1969년 11월 29일 네덜란드 스테베르겐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모로코계였는데 그가 태어나기 전에 그의 어머니와 이혼했다. 판호이동크는 홀어머니 밑에서 스테베르겐 인근의 작은 마을 웰버그에서 자랐다. 그는 곧 SC 웰버그의 유스 팀에 입단하였고 그곳에서 활동하면서 축구와 가까워졌다. 어린 시절 그가 가장 좋아하는 팀은 NAC 브레다였고 시간이 될 때마다 경기장을 찾아가 브레다를 응원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11살이 될 무렵, 판호이동크는 NAC 브레다가 주최한 유스 경기에 참여해 브레다 스카우터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그는 NAC에 합류하라는 요청을 받고 즉시 합류해 주로 오른쪽 미드필더로 활동했다. 그러다가 14살 때 프로로 뛰기엔 적합하지 못해 아마추어로 전환해야겠다는 팀의 통보를 받고 불만을 품은 그는 포지선을 스트라이커로 변경했다. 그후 그는 5년간 NAC 브래다 아마추어 팀에서 활동하다가 1989년 RBC 로센달로 이적했다.

2.2. RBC 로센달 시절

당시 RBC 로센달은 재정 적자가 심각해서 다른 팀에 비해 유스팀 선수들을 이른 시기에 기용해야 했다. 이에 따라 판호이동크는 1988-89 시즌 중반에 교체로 몇경기를 뛰어 3골을 기록했다. 그리고 다음 시즌인 1989-90 시즌, 팀 주전 공격수들이 모조리 부상당하는 바람에 판호이동크는 훨씬 많은 기회를 부여받아 32경기에 출전해 6골을 기록했다. 이후 로센달은 그와 프로 계약을 체결하고 그에게 주전 공격수 자리를 맡겼다. 판호이동크는 1990-91 시즌에 잠재력을 폭발시켰다. 그는 이 시즌에 37경기에 출전하여 27골을 몰아넣어 네덜란드의 여러 빅클럽들의 주목을 받았다. 그중에는 NAC 브레다도 있었는데, 판호이동크는 어린 시절부터 응원했던 브래다로 지체없이 가기로 결심했고 곧바로 그들과 계약을 체결했다.

2.3. NAC 브레다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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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 자신이 열렬히 응원했던 팀으로 돌아온 판호이동크는 이곳에서 본격적인 전성기를 시작했다. 그는 1991년부터 1995년까지 4시즌 동안 115경기에 출전해 81골을 기록했다. 브래다는 판호이동크의 활약에 힘입어 1993년 에레디비지에로 승격했다. 그러던 1995년 1월, 스코틀랜드의 명문 클럽 셀틱 FC가 그를 영입하기로 결정했고 그 또한 셀틱 같은 명문 클럽에서 뛰고 싶어 이를 수락했다.

2.4. 셀틱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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셀틱으로 이적한 판호이동크는 1995년 1월 11일 하츠 FC와의 원정경기에서 데뷔전을 치렀다. 그는 데뷔하자마자 데뷔골을 기록했고 팀은 1:1 무승부를 거두었다. 이후 판호이동크는 빠른 속도로 셀틱에 적응했고 곧 셀틱 팬들이 가장 좋아하는 선수가 되었다. 그가 오기 전, 셀틱은 6년 동안 아무런 트로피도 획득하지 못하고 레인저스 FC의 아성에 짓눌려 있었다. 이로 인해 우울해 하던 셀틱 팬들은 판호이동크에게서 위안을 얻었다. 먼저 1995년 5월 스코티쉬 컵 결승전에서, 셀틱은 판호이동크의 골에 힘입어 에어드리오니언스 FC를 1:0으로 꺾고 대회 우승을 거머쥐었다. 그후 1995-96 시즌엔 리그 26골을 포함하여 전 대회 32골을 기록, 스코틀랜드 최고의 스코어러로 등긍했다. 그러나 아쉽게도 이 시즌엔 아무런 트로피도 획득하지 못했다.

이렇듯 셀틱에서 탁월한 활약을 선보인 판호이동크였으나 1996-97 시즌은 그와 셀틱 모두에게 불행한 시기였다. 셀틱의 회장이자 구단주인 퍼거스 맥켄과 불화를 빛는 바람에 벤치에 박혀 있는 시간이 많아진 것이다. 더구나 당시 네덜란드 국가대표팀 감독이었던 거스 히딩크는 그가 셀틱의 핵심 선수가 되지 않는 한 국가대표팀에 선발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결국 그는 셀틱을 떠나기로 결심했고 1997년 450만 파운드의 이적료를 기록하며 노팅엄 포레스트로 이적했다.

2.5. 노팅엄 포레스트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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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호이동크가 입단할 무렵, 노팅엄 포레스트는 EPL에서 강등당할 위기에 몰려 있었다. 판호이동크는 1997년 3월 11일 블랙번과의 경기에서 데뷔했고 팀은 1:1 무승부를 기록했다. 포레스트 측은 판호이동크가 팀을 강등에서 구원해주길 기대했다. 그러나 정작 판호이동크는 8경기에서 고작 한 골만 기록했고 결국 포레스트는 2부리그로 강등되고 말았다. 그는 팀의 강등이 자신의 부진 때문이라며 여기에 남아서 포레스트를 EPL로 복귀시키겠다고 선언했다. 이후 판호이동크는 케빈 켐벨과 훌륭한 파트너쉽을 구축하고 34경기에 출전해 23골을 기록하며 기어이 포레스트를 EPL로 복귀시키는 데 성공했다.

이후 1998 월드컵 네덜란드 대표팀 스쿼드에 차출되어 교체 멤버로 활약한 판호이동크는 월드컵이 끝난 후 포레스트 보드진에게 프리미어리그에서 살아남을 수 있도록 스쿼드를 강화해달라고 요구했고 포레스트는 이를 약속했다. 그런데 얼마 후, 포레스트는 오히려 그의 투톱 파트너로서 훌륭한 활약을 했지만 엉덩이 부상을 자주 당해 팀의 골칫거리이기도 했던 케빈 켐벨을 터키의 축구 클럽 트라브존스포르에게 250만 유로를 받고 팔아버렸다. 또한 포레스트는 팀내 최고의 유망주로 손꼽히던 스콧 제밀과의 새 계약을 거부했고 클럽 주장인 콜린 쿠퍼가 포레스트와 함께 승격한 미들스브러로 이적하는 것을 허용했다.

이러한 포레스트 보드진의 무책임한 태도에 격노한 판호이동크는 이적을 요청했지만 클럽의 새 구단주는 이를 거부했다. 이에 판호이동크는 약속대로 강화하지 않고 스쿼드를 약화시키는 클럽 주인들에게 배신감을 느끼며 더 이상 그들을 위해 활약할 수 없다고 선언했다. 이후 그는 1인 파업을 선언하고 친정팀인 NAC 브래다 훈련장으로 가서 그곳에서 훈련을 받았다. 이러한 그의 행동에 대해 감독 데이브 바셋과 팀 동료들, 그리고 팬들은 합심하여 판호이동크를 비판했다. 판호이동크는 끝까지 이적을 요구했지만 클럽이 계속 거부하고 여론마저 그에게 등을 돌리자, 결국 그는 11월 초에 선택의 여지가 없음을 깨닫고 포레스트에 복귀하는 데 동의했다.

이렇듯 그가 포레스트에서 단독 파업을 하는 동안, 포레스트는 리그 9경기를 치러서 단 한 번도 이기지 못하고 강등권에 처졌다. 이후 팀에 복귀한 그는 19번 출전해서 6골을 기록했다. 이 중 첫번째 골은 당시 똑같이 강등권에 쳐져 있던 더비 카운티와의 경기에서 기록했는데, 팀 동료들은 정작 골을 넣은 그를 외면하고 어시스트를 기록한 스콧 제밀에게 달려가 축하해줬다.(...) 이렇듯 그는 팀에서 겉돌았고 결국 포레스트가 또다시 강등당하는 걸 막지 못했다. 그후 그는 포레스트 관계자들과 팬들의 싸늘한 눈총을 받으며 쓸쓸히 팀을 떠났다. 2015년, 판호이동크는 "그보다 다르게 처신할 수도 있었다."며 자신이 단독으로 파업한 것에 대해 사과했다.

2.6. SBV 피테서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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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년, 판호이동크는 네덜란드의 축구 클럽 SBV 피테서로 350만 유로의 이적료를 기록하며 이적했다. 그는 그곳에서 훌륭한 활약을 선보여 리그 29경기 25골, 유로파 대회 4경기 2골 등 총 36경기 28골을 기록하며 팬들을 기쁘게 하였다. 이후 그는 2000년 벤피카와 3년 반 계약을 체결했다.

2.7. 벤피카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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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벤피카로 이적한 그는 첫 시즌에 19골을 기록하며 여전히 준수한 모습을 보였다. 그런데 당시 벤피카는 매우 혼란스러워 감독이 세명이나 교체되었다. 그리고 벤피카의 새 회장은 그가 클럽에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여기고 다른 외국 클럽에 팔려 했다. 이에 판호이동크는 조국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하고 2000-01 시즌이 끝난 뒤 페예노르트 로테르담으로 이적했다.

2.8. 페예노르트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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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페예노르트에 입단한 판호이동크는 거기서 다시 한번 성공을 거두었다. 그는 2002년 유로파 결승전에서 프리킥골을 포함해 2골을 터트리며 팀이 도르트문트를 3:2로 격파하고 유로파 우승을 달성하는 데 절대적으로 기여했다. 또한 그는 유로파 대회에서 8골을 터트려 유로파 득점왕에 선정되었고 리그에서는 33경기 24골을 기록해 탁월한 득점기계로서의 면모를 보였다. 그후 판호이동크는 다음 시즌인 2002-03 시즌에 리그 28경기 28골을 기록해 정확히 한 경기 당 한 골을 달성했다.

이 당시 페예노르트로 이적한 송종국과 같이 경기를 뛰기도 했었다. 송종국의 도움을 받아 득점을 몇 차례 기록하기도 했다. 팀 내 최고의 스타였기 때문에 송종국의 이적으로 페예노르트에 관심이 생긴 한국 팬들에게 이 당시 많이 알려지게 되었다.

2.9. 페네르바흐체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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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그는 돌연 페네르바흐체로 이적했다. 그후 그는 첫 시즌에 24골을 기록하는 등 페네르바흐체에서 52경기에 출전해 32골을 기록했다.또한 2003-04 시즌에 쉬페르 리그 우승을 차지했고 2004-05 시즌에는 잔부상을 여러번 당했지만 나올때마다 여전한 활약을 보여 도 다시 한번 리그 우승을 달성해 2연패를 기록했다. 당시 페네르바흐체 팬들은 그를 '성 피에르'라고 부르며 칭송을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2.10. 말년

2005년 중반, 그는 페네르바흐체와의 계약이 만료되어 친정팀인 NAC 브레다로 이적했다. 그는 그곳에서 17경기에 출전해 5골을 기록했다. 이후 2006년 1월, 그는 다시 페예노르트와 계약해 37경기에 출전해 8골을 기록했다. 2006년 10월 17일, 판호이동크는 2006-07 시즌이 끝난 뒤 은퇴하겠다고 선언했고 2007년 5월 13일 FC 흐로닝언과의 경기를 치르는 것을 끝으로 선수 생활을 마감했다. 그는 프로 축구 선수로서 18년 동안 550경기에 출전해 335골을 기록했다.

2.11. 국가대표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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뛰어난 공격수였지만 당대 네덜란드 축구 국가대표팀에 동 포지션에 본인보다 뛰어났던 선수들이 많았다. 데니스 베르캄프, 파트릭 클루이베르트, 뤼트 판니스텔로이, 로이 마카이 등 판호이동크의 대표팀 라이벌들은 EPL라리가, 분데스리가에서 최고 공격수로 꼽히던 선수들이었다. 거기에다 대포알 슈팅으로 유명했던 하셀바잉크도 있었다. 그럼에도 판호이동크는 1차례의 월드컵, 2차례의 유로 대회 엔트리에 이름을 올린다.

판호이동크는 1994년 12월 14일, 룩셈부르크와의 경기에서 교체투입됨으로서 대표팀 선수로서의 경력을 시작했다. 그의 대표팀 경력 중 가장 안구에 화자되는 경기는 1996년 10월 5일 웨일즈와의 월드컵 지역 예선 경기였다. 당시 네덜란드는 1:0으로 지고 있었는데 판호이동크는 71분에 동점골을 터트렸고 추가 시간 3분 내에 2골을 만들어내 팀을 극적인 3:1 승리로 이끌었다.

판호이동크는 1998년 프랑스 월드컵 출전하여 32강 본선 2차전에서 네덜란드가 대한민국을 5:0으로 격파할 때 네번째 골을 기록했다. 이후 네덜란드는 준결승전까지 진출했고 뒤이은 브라질과의 준결승전 때 출전한 판호이동크는 후반 막판에 페널티 에어리어로 침투해 들어갔다가 주니오르 바이아누에게 걸려 넘어졌지만 심판은 페널티킥을 주지 않았다. 결국 네덜란드는 승부차기에서 패해 결승 진출이 좌절되고 말았다.

유로 2000 16개국 본선에도 대표팀에 뽑혔지만 데니스 베르캄프와 클루이베르트에 밀려 단 1경기도 뛰지 못했다.

네덜란드가 유럽예선 탈락하여 2002년 한일 월드컵 32개국 본선 진출에 실패했기에 판호이동크에게도 출전 기회는 없었다.

유로 2004 엔트리에도 발탁이 되었지만 판니스텔로이, 로이 마카이 등에 밀려 16개국 본선 조별리그 1경기 단 9분 동안만 뛰게 된다. 네덜란드는 준결승에서 탈락(4위)한다.

2004년 11월 17일 안도라와의 경기를 끝으로 대표팀을 은퇴했다. 그는 네덜란드 대표팀에서 46경기에 출전해 14골을 기록했다.

3. 여담

4. 수상 기록

4.1. 대회 기록

4.2. 개인


[1] 2부 리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