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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1598년 5월 6일에서 1621년 7월 13일까지 일시적으로 총독이 아니라 주권자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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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BDAC9C><colcolor=#000000> 아스투리아스 공비 • 사보이아 공작 부인 오스트리아의 마르가레테 여대공 Erzherzogin Margarete von Österreich | ||
이름 | 독일어 | 마르가레테 폰 외스터라이히 (Margarete von Österreich) |
네덜란드어 | 마르가레타 판 오스턴리크 (Margaretha van Oostenrijk) | |
스페인어 | 마르가리타 데 아우스트리아 (Margarita de Austria) | |
이탈리아어 | 마르게리타 다스부르고 (Margherita d'Asburgo) | |
출생 | 1480년 1월 10일 | |
브라반트 공국 브뤼셀 | ||
사망 | 1530년 12월 1일 (향년 50세) | |
브라반트 공국 메헬렌 | ||
재임 | 합스부르크 네덜란드의 총독 | |
1507년 ~ 1530년 | ||
배우자 | 아스투리아스 공 후안 (1497년 결혼 / 1497년 사망) | |
사보이아 공작 필리베르토 2세 (1501년 결혼 / 1504년 사망) | ||
아버지 | 막시밀리안 1세 | |
어머니 | 부르고뉴 여공작 마리 | |
형제 | 펠리페 1세 | |
종교 | 가톨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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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신성 로마 제국의 황녀이자, 아스투리아스 공비[1], 사보이아 공작 부인, 합스부르크 네덜란드의 총독이다.2. 유년 시절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막시밀리안 1세와 부르고뉴국의 여공작 마리 드 부르고뉴 사이의 1남 1녀 중 장녀(둘째)로 태어났다. 펠리페 1세의 여동생이기도 하다.1482년, 어머니인 마리 드 부르고뉴가 낙마 사고로 죽고 새어머니 비앙카 마리아 스포르차에게서 자랐다. 어린 시절은 브뤼셀에서 보냈다.
3. 두 번의 결혼
그녀는 평생 동안 한 명의 남자와 약혼하고 두 명의 남편과 결혼했으나 모두 비극으로 끝났으며 이후 죽을 때까지 재혼하지 않았다.원래 프랑스 도팽 샤를 8세[2]와 약혼하였으나 13세의 나이로 왕위에 오른 샤를이 브르타뉴 공국을 얻기 위해 안 드 브르타뉴[3]과 결혼하면서 차였다.[4]
이후 새언니인 후아나의 오빠이자 오빠 펠리페 1세의 손위처남이며 카스티야 연합 왕국의 왕위 계승자였던 아스투리아스 공 후안과 결혼했으나 후안은 얼마 안 가 사망하였다.[5] 후안의 누나이자 포르투갈의 왕비인 이사벨 왕비 또한 사망하여 이후 통합 스페인 왕국의 왕위는 이사벨라와 후안의 여동생인 후아나 공주(일명 광녀 후아나)에게 상속되었다.
마지막으로 부황 막시밀리안 1세의 반(反) 프랑스 정책과 맞물려, 마침 프랑스의 위협으로부터 보호 세력을 구하려던 사보이아 공작 필리베르토 2세의 구혼으로 재혼[6]하였으나 필리베르토 2세 역시 결혼 3년 만에 사망하였다. 사보이아 공작부인으로 있는 동안 사냥에 빠져 살던 필리베르토 2세에게 영향을 미쳐 국정을 농단하던 레나토[7]를 내쫓아 사보이아 공국의 정권을 장악하였는데 그녀의 국정 수행 능력은 괜찮은 편이었다.
4. 카를 5세의 후견인
필리베르토 2세의 이복동생인 카를로 2세가 즉위한 후에도 마르가레테는 사보이아 공국의 브레스 지역에 머무르며 부친의 정략결혼 요청[8]을 거부하고 두번째 남편을 추모하는 삶을 살았다. 그러다가 카스티야 연합 왕국의 여왕 이사벨 1세가 사망하자 그녀의 새언니인 후아나 왕녀가 즉위하게 되면서 그녀의 오빠인 필리프 또한 통합 스페인 왕국으로 떠났다. 이때 후아나의 광증 때문에 세 자녀들인 레오노르, 카를, 이사벨은 여동생인 마르가레테에게 맡겼다. 마르가레테는 세 조카들을 성심껏 양육했고, 그 중에서도 훗날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가 될 카를의 교육에 주의를 기울였다. 카를에게 직접 읽기, 쓰기, 역사, 통치학, 종교, 언어를 가르쳤으며, 당대의 대석학인 에라스뮈스와 아드리안 주교 등을 가정교사로 들여 카를이 착실하게 제왕학 수업을 받도록 했다.그녀의 오빠인 필리프가 통합 스페인 왕국에서 사망하면서 그의 장남인 카를이 작위를 승계해 명목상 부르고뉴 공작이자 합스부르크 네덜란드의 통치자가 되었다. 그러나 당시 6세에 불과했기에 섭정이 필요했는데, 저지대 국가 각국 의회에서는 어린 군주의 고모인 마르가레테를 섭정으로 선출했다.
카를이 15세가 되자 섭정을 거두었지만 2년 후 통합 스페인 왕국의 공동 국왕 페란도 2세가 사망하면서 그의 외손자인 카를이 통합 스페인 왕국의 공동 국왕[9]이 되기 위해 떠나게 되자[10] 합스부르크 네덜란드의 대리 통치자이자 총독이 되었다.
이후에는 황제선거에서 카를 5세가 신성 로마 제국 황제로 선출되는데 큰 공헌을 했다. 카를이 타고난 다이아 수저로 유럽의 이런저런 땅들을 모두 집어삼키자 프랑스 국왕 프랑수아 1세가 후보자로 출마하여 견제했는데 이때 마르가레테는 합스부르크 가문과 거래하던 거부 푸거 가와 벨저 가에게 85만 두카트를 빌려 선제후들에게 뇌물로 뿌림으로써 카를이 신성 로마 제국 황제로 선출될 수 있도록 했다. 이후 푸거 가는 대가로 은광산 채굴권을 받았다. 카를의 황제 선출 이후 동생인 페르디난트가 오스트리아 대공국을 물려받기 전까지 합스부르크 네덜란드에서 국정 운영에 관련된 경험을 쌓을 수 있도록 도움을 주었다.
5. 최후
1530년 깨진 유리를 밟았는데, 대수롭게 생각하지 않았던 상처에 괴저가 생겨 다리를 절단해야 하는 상황에까지 이르렀다. 카를 5세를 후계자로 지명한다는 서한과 함께 수술 준비에 들어갔으나 결국 의사들이 건네준 강한 아편을 먹고 다시는 깨어나지 못했다. 유해는 본인이 두번째 남편인 사보이아 공작 필리베르토 2세의 유해를 안장하기 위해 지은 부르캉브레스의 브루 왕립 수도원(Monastère royal de Brou)에 합장되었다.6. 기타
상단에 있는 그녀의 초상화는 베르나르트 반 오를레이가 그린 것으로, 마르가레테 본인에 의해 고용되었다.이후 1960~70년대에 발행된 벨기에 500프랑 지폐에 그와 함께 각각 앞뒷면 도안으로 들어가기도 했다.
[1] 카스티야 연합 왕국의 왕세자비를 뜻한다.[2] 사실 샤를 8세의 아버지 루이 11세는 부르고뉴 공국을 꿀꺽하기 위해, 마르가레테의 어머니 마리 드 부르고뉴를 협박해 샤를 8세와 강제로 결혼시키려 한 전적이 있었다. 마리가 프랑스의 위협에서 벗어나기 위해 막시밀리안 1세와 결혼하면서 실패했지만.[3] 막시밀리안 1세의 두번째 아내이자 마르가레테의 새어머니이다. 이 사건으로 인해 막시밀리안과 안의 결혼은 무효화되었다.[4] 정확히 말하면 섭정이었던 누나 안 드 프랑스의 의중이 반영되었을 것이다.[5] 당시 마르가레테는 임신 중이었는데 얼마 안 가서 딸도 사산했다.[6] 여담으로 마르가레테와 마찬가지로 필리베르토 2세에게도 재혼이었다. 필리베르토 2세는 자신의 5촌 누이인 욜란다와 결혼했으나 욜란다가 어린 나이에 사망하면서 홀아비가 되었다.[7] 필리포 2세의 사생아로 필리베르토 2세의 이복형.[8] 막시밀리안 1세는 마르가레테를 잉글랜드 왕국의 헨리 7세와 결혼시키려 했다.[9] 명목상 어머니 후아나 여왕과 공동 국왕이었지만 후아나 여왕은 광증이 있어 사실상 카를이 통합 스페인 왕국의 유일한 국왕이었다.[10] 통합 스페인 왕국에서는 완전히 이방인인 카를보다 그의 남동생으로 통합 스페인 왕국에서 나고 자란 페르난도 왕자를 더 선호했지만, 마르가레테가 친정인 합스부르크 왕가의 빽을 십분 활용하여 기어이 카를을 국왕 자리에 앉혔다. 그리고 장남인 카를에게 카스티야가 상속되고 차남인 페르난도 왕자에게 아라곤이 상속될 경우 분할상속 염려가 있어 페란도 2세가 왕위 계승 서열 1위인 카를에게 몰아줬다는 얘기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