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르마 공국의 카를로 2세에 대한 내용은 카를로 2세(파르마)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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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486년 10월 10일 | ||
사보이아 공국 샤제쉬랭 | |||
사망 | 1553년 8월 17일 (향년 66세) | ||
사보이아 공국 베르첼리 | |||
묘소 | 베르첼리 대성당 | ||
재위기간 | 사보이아 공국의 공작 | ||
1504년 9월 10일 ~ 1553년 8월 17일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colbgcolor=#cd0000><colcolor=#fff> 부모 | 아버지 필리포 2세 어머니 브로스의 클로드 | |
배우자 | 포르투갈의 베아트리스 (1521년 결혼/1538년 사망) | ||
자녀 | 에마누엘레 필리베르토, 아드리아노, 루도비코, 에마누엘레 필리베르토, 카테리나, 마리아, 이사벨라, 잔마리아, 에마누엘레, 에마누엘레 | ||
가문 | 사보이아 가문 | ||
종교 | 가톨릭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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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사보이아 공국의 공작. 실질적으로 마지막 프랑스 정체성을 가졌던 사보이아 가문의 군주이다.[1]2. 생애
사보이아 공작 필리포 2세와 클로딘 드 브로스(Claudine de Brosse 1450~1513)의 맏아들로, 1504년 이복형 필리베르토 2세가 후사 없이 사망하자 사보이아 공작으로 즉위했다. 1521년 포르투갈 왕국의 공주 베아트리즈(Beatriz de Portugal 1504~1538)와 결혼했다.1513년, 제네바에서 필리베르 베르틀리에(Philibert Berthelier 1465~1519)의 반란에 직면하였다. 1515년 교황 레오 10세를 설득하여 밀라노 대교구 산하였던 토리노 교구를 대교구로 승격시켰고, 1526년 니차 백국을 창설하였다. 1530년 제네바의 개혁가 프랑수아 보니바르(François Bonivard 1493~1570)를 시옹 성에 수감했다.[2] 1534년, 제네바에서 이번에는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의 폭동이 일어나자 진압을 위해 군대를 파견했으나 역으로 털렸다. 1535년, 2번째로 군대를 보냈으나 또(...) 털렸고 권위만 실추되었다.
외교적으로는 부인의 언니가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5세의 황후 이자벨이어서 합스부르크 가문과 동맹을 맺었다. 이에 프랑스 국왕 프랑수아 1세[3]는 사보이아 가문과 합스부르크 가문의 동맹도 분쇄할 겸 사보이아 공국을 밀라노 공국 탈환의 교두보로 삼을 목적으로 1536년에 사보이아 공국을 침공했다. 수도 샹베리와 핵심 도시 토리노가 연달아 프랑스군에게 함락당했고, 베른 시민들이 프랑스의 침공에 편승하여 쳐들어와 보와 키아블레세(Chiablese)[4]의 통제권까지 상실했다. 베르첼리로 후퇴한 카를로 2세는 있는 자원을 쥐어짜 마지막으로 반격을 시도했으나 중과부적이었고 결국 실패로 끝났다. 발레다오스타, 니차, 쿠네오, 베르첼리 정도를 제외한 공국 대부분을 잃은 후 유일한 아들 에마누엘레 필리베르토를 카를 5세에게 보낸 후 본인은 베르첼리에서 포위되어 지내다 1553년 사망했고 베르첼리 대성당에 안장되었다.
3. 기타
- 기존에는 카를로 2세를 카를로 3세로 불렀으나 이는 사보이아 가문의 역사를 집필한 17세기 프랑스의 역사학자 사뮈엘 귀케농(Samuel Guicenon 1607~1664)의 저서에 따른 관습적인 세 계승이었는데, 최근 고고학 발굴과 문헌 고증을 거쳐 기존의 카를로 2세는 카를로 조반니 아메데오(Carlo Giovanni Amedeo/Charles-Jean-Amédée)로 불렸으며, 카를로 3세는 카를로 2세(Carlo II di Savoia/Charles II de Savoie)로 불렸음이 이탈리아, 프랑스, 스위스 3국의 사학계에서 검증되었다.
[1] 사보이아 가문은 프랑스(사부아)와 이탈리아(피에몬테, 발레다오스타) 사이에 걸쳐 있으면서 프랑스인이라기에는 이탈리아같고, 반대로 이탈리아인이라기에는 프랑스 같은 애매한 정체성을 유지했다. 그래도 대체적으로는 프랑스에 가까워지려고 했으나 이탈리아 전쟁을 겪은 후 아들 에마누엘레 필리베르토가 토리노로 천도하면서 이탈리아인으로 정체성을 완전히 굳혔다.[2] 이 사건을 바탕으로 영국의 시인 조지 고든 바이런은 시옹의 죄수(The Prisoner of Chillon)를 집필했다.[3] 프랑수아 1세의 어머니 사보이아의 루이사는 카를로 2세의 이복누나였다.[4] 에비앙레뱅이 있는 사부아의 역사적인 지명. 프랑스어로는 샤블레(Chablai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