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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오무라 사부로/선수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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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cccccc,#323232><colcolor=#20272c,#d3dade> 모기업 관련 정보 파일:롯데(일본) 로고.svg 롯데홀딩스 · 롯데그룹 산하 스포츠단
일본시리즈 우승
★★★★
1950 · 1974 · 2005 · 2010
리그 우승
(5회)
1950 · 1960 · 1970 · 1974 · 2005
퍼시픽리그 전·후기 우승
(4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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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기노 타카시/선수 경력
핵심 인물 구단주 신동빈 · 구단주 대행 다마즈카 겐이치 · 감독 요시이 마사토 · 2군 감독 사부로
선수회장 나카무라 쇼고 · 주장 나카무라 쇼고
경기장 1군 ZOZO 마린 스타디움 · 2군 롯데 우라와 구장
홈 중계 채널 파일:닛테레뉴스24 로고.jpg
구단 상세 정보 역사 · 선수단 및 등번호 · 역대 선수 · 유니폼 · 응원가 · 집시 롯데 · 10.19 · 칠석의 비극 · 도시락의 저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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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프로 이전3. 프로 경력
3.1. 치바 롯데 마린즈
3.1.1. 신인 시절3.1.2. 2000 시즌3.1.3. 2001 시즌3.1.4. 2002 시즌3.1.5. 2003 시즌3.1.6. 2004 시즌3.1.7. 2005 시즌3.1.8. 2006 시즌3.1.9. 2007 시즌3.1.10. 2008 시즌3.1.11. 2009 시즌3.1.12. 2010 시즌3.1.13. 2011 시즌
3.2. 요미우리 자이언츠
3.2.1. 2011 시즌
3.3. 치바 롯데 마린즈 2기
3.3.1. 2012 시즌3.3.2. 2013 시즌3.3.3. 2014 시즌3.3.4. 2015 시즌3.3.5. 2016 시즌

1. 개요

치바 롯데 마린즈 소속의 코치, 오오무라 사부로의 선수 경력을 정리한 문서.

2. 프로 이전

파일:고교시절 사부로.jpg
PL학원고등학교 시절

오카야마 시립 오카테루 중학교(오카야마 리틀 시니어)를 졸업 후, 당시 오사카 최고의 야구명문으로 불리던 PL학원고등학교[1]에 진학하여. 1994년 제66회 선발 고등학교 야구대회에 출전하여 1번티자 중견수로서 4강 진출에 기여한다. 이때 선발투수로는 가나자와 고교 투수 나카노 마사히로가 퍼펙트 게임을 달성했지만 다음 경기의 선두타자로 중전 안타를 쳐 2경기 연속 퍼펙트 게임을 막은 타자로도 알려져 있다. 어렸을 때는 한신 타이거스의 팬이었던 것을 블로그에서 말하고 있다. PL학원고등학교시절 2년선배에 이마오카 마코토, 1년 선배에 마츠이 카즈오, 동기에 우다카 신지, 1년 후배에로는 후쿠도메 코스케, 2년 후배에 마에카와 카츠히코가 있었다.

졸업 후엔 대형 내야수 자원으로 주목받으며 드래프트 1순위로 치바 롯데에 입단하였는데, 당시 롯데엔 그와 같은 성씨를 가진 오무라 이와오[2]가 있던 탓도있었고 같은 해에 이치로가 본명인 스즈키 이치로(鈴木一朗)에서 등록명을 이치로(イチロー)로 변경해 재능을 꽃피운 것을 본떠, 본인의 강한 희망으로 '사부로(サブロー)'라는 등록명을 사용하게 되었다.

3. 프로 경력

3.1. 치바 롯데 마린즈

파일:20160912_saburo2.jpg

3.1.1. 신인 시절

파일:사부로 입단식.jpg

프로 1년차인 1995년 6월에 1군 첫 승격하였다. 좌익수로 있던 피트 인카빌리아의 부진으로 스타팅 기회도 주어져 고졸 1년차에 시즌 28경기에 출전했다. 1996년은 당시 롯데 외야진의 뎁스 때문에 1군으로 출전할 기회가 한정되어 겨우 9경기 출전에 그쳤다.1997년부터는 등번호 2번을 부여받아 프로 최다인 33경기에 출전했지만 타율 0.179로 저조했다. 1998년 단 2경기 출전에 그치며 프로 첫 시즌 무안타에 그쳤다. 1999년이 되어서야 외야수로서 비로소 1군멤버로 자리잡는 데 성공은 했지만 여전히 기대에 못미치는 활약을 보였다.

3.1.2. 2000 시즌

5월 18일,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전에서 2회말에 마츠모토 테루로부터 프로입단 첫 홈런이 되는 좌측 3점 홈런을 쳤다. 그해 이 홈런을 포함해 5홈런을 기록하는 등 타격면에서 성장세를 보였고 후반기에는 주전 우익수으로 자리 잡았다. 출전 경기 수는 전년보다 줄었지만 타석 수는 크게 늘어 전년보다 타율 0.270을 기록했다.

3.1.3. 2001 시즌

오츠카 아키라의 성장과 데릭 메이 영입으로 외야수 층이 약간 두꺼워졌기 때문에 캠프에서 내야수로 시작하게 됐다.

3월 24일 세이부 돔에서의 개막전 「9번 2루수」로 선발 출장을 하였다. 그러나 자신의 부진과 같은 2루 사카이 다다하루의 호조가 겹쳐 5월 하순부터는 다시 외야로 출전하게 됐다.

3.1.4. 2002 시즌

2002시즌부터는 외야수로 등록됐다. 시즌 내내 2번 중견수 주전선수로 활약하며 올스타전에 첫 출전. 데뷔 첫 규정 타석에 도달해, 자신 최다인 131경기출장, 타율 0.286, 9 홈런, 13 도루를 기록했다.

3.1.5. 2003 시즌

1번 우익수로 개막 선발 출장했지만, 이 해는 부상으로 80경기 출장에 그쳤다. 그러나 데뷔 첫 2자릿수 홈런(10개)을 기록하고 요미우리 자이언츠 명예감독이기도 한 일본 2004 아테네 올림픽 야구대표팀 감독 나가시마 시게오에게 "이 정도로 상체를 잘 쓰는 타자는 본 적이 없다"라는 호평을 들었다.

3.1.6. 2004 시즌

9시즌 만에 롯데 감독으로 복귀한 바비 밸런타인이 등번호 2번을 원했고 구단 측이 이를 양해해 등번호를 3번으로 변경했다. 이 해는 전년을 웃도는 89경기에 출전했지만 타율 0.256, 5홈런으로 성적이 떨어졌다.

3.1.7. 2005 시즌

2005년에는 팀의 일본시리즈 우승의 주역이 되었다. 특히 2005년 시즌에는 클러치 히터로서의 모습에 주목한 바비 발렌타인 감독에 의해 이승엽, 베니 아그바야니, 맷 프랑코 등의 외국인 강타자들을 제치고 4번에 자주 기용되었는데, 이는 바비 발렌타인의 야구와 '마린건 타선'을 상징하는 '연결형 4번 타자'로 매스컴의 주목을 샀다. 2할 후반대의 타율에 2자릿수 홈런, 안정적인 외야 수비를 기대할 수 있는 올라운드 외야수로서 롯데 전력의 기둥 역할을 했다.

3.1.8. 2006 시즌

8월 15일자로 FA행사권을 취득. 이 해는 전년을 웃도는 115경기에 출전했지만 규정 타석에 들어서지 못하고 타율 0.218로 타격 부진에 빠졌다. 이것도 있어서 취득한 FA권을 행사하지 않고 2년 계약으로 팀에 잔류했다.

3.1.9. 2007 시즌

개막전 엔트리에는 들지못했지만 5월부터 4번 우익수에 정착. 리그 7위의 득점권 타율 0.310, 팀 2위이자 자신의 최고인 68타점을 올렸다. 6월 6일의 요미우리전에서 9타석 연속 안타 기록을 해, 구단 기록인 호리 코이치의 8타석 연속 안타를 갈아치웠다[3]. 클라이맥스 시리즈에서는 제1 스테이지 MVP를 획득. 시즌 오프에는 2008 베이징 올림픽 출전을 목표로 하는 야구 일본대표의 최종 후보로 선출되어 대만에서 개최된 2008 베이징 올림픽 예선을 겸한 아시아 선수권에 출전. 한국전에서 동점 적시타를 날리고 대만전에서는 동점 스퀴즈를 터뜨리는 등 주축급 활약을 펼친다. 또 총 3경기에서 당시 잘 지키지 않았던 좌익수 수비를 굳건히 지켜 일본의 2008 베이징 올림픽 출전권 획득에 기여했다. 덧붙여 이 대회는 본명의 오무라 사부로(大村三郎)로 출장했었다.

3.1.10. 2008 시즌

타율 0.289로 좋은 성적을 냈지만 초봄에 왼쪽 허벅지 부상으로 1군에서 이탈한 적도 있어 105경기 출전에 그쳐 전년보다 타점이 10점 이상 줄었고 규정 타석에도 오르지 못했다. 시즌오프에는 메이저리그 이적도 고려해 FA권을 행사할지 고민중이라는 기사가 보도됐지만 결국 FA권을 행사하지 않고 잔류했다.

3.1.11. 2009 시즌

개막을 1군에서 맞이해 시즌 내내 1군과 대동. 팀이 침체된 가운데 호조를 유지해 2002년 이래 자신 2번째의 올스타전 출장을 완수한다. 전년보다 119경기에 출전해 규정타석에 도달한 해로 커리어 유일의 3할에 자신의 최고 타율 0.314(리그 3위), 자신의 첫 시즌 20홈런(22개), 자신의 최다 타이인 68타점을 기록했다. 한편 수비 주루에서의 쇠퇴가 현저해진 해이기도 했다.

3.1.12. 2010 시즌

이 해부터 선수 회장에 취임했다. 시즌에서는 주로 6번, 시즌 마지막 3연전부터 포스트시즌까지는 4번을 맡았다. 전년보다 크게 타율을 낮추면서도 자신의 최다인 71타점을 기록했다. 홈런도 19개로 전년에 이어 장타력은 건재했고 통산 1000안타·100홈런도 기록. 팀의 클라이맥스 시리즈 출전 및 2번째 일본 제일에 공헌했다.덧붙여 일본시리즈에서의 성적은 우수 선수상을 획득한 전회 출장 때보다 전체적으로 웃돌고 있었지만(타율 0.300, 1 홈런, 6 타점, 9 안타), 팀 동료 이마에 토시아키가 시리즈 MVP, 우수 선수상도 마찬가지로 팀 동료 키요타 이쿠히로 우치 타츠야, 상대팀인 오시마 요헤이가 각각 수상했기 때문에 수상하지 못했다.

3.1.13. 2011 시즌

개막 초에는 주로 7번을 쳤지만 김태균의 부상으로 4월 말부터 4번에 들어가게 된다. 수비면에서는 당초는 우익수를 맡고 있었지만, 키요타 이쿠히로·이시미네 쇼타등이 선발출장하게되면서 좌익수로 돌아갔다.

5월 4일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스전에서 오른손 약지에 사구를 맞았다. 사부로는 괜찮다고 어필했지만 1군에서 등록이 말소되어 그대로 1군 복귀는 하는 모습을 볼 수 없었다.

6월 29일 쿠도 타카토[4]+ 금전과 교환 트레이드로 요미우리 자이언츠로 이적이 발표되면서 팬들과 선수단은 큰 충격에 빠졌었다.[5]

3.2. 요미우리 자이언츠

파일:요미우리 사부로.jpg

3.2.1. 2011 시즌

2011년 6월 30일에 지배하 선수 등록되어 요미우리에 입단 회견을 했다. 구단측의 방침에 의해 등록명은 본명인 오무라 사부로(大村三郎), 등번호는 트레이드 상대 쿠도가 사용하고 있던 0번으로 정해졌다.

7월 1일에 1군에 합류, 즉 출장 선수 등록되어 같은 날의 주니치 드래곤즈전 8회말에 대타로 출장 요시미 카즈키로부터 좌측에 솔로 홈런을 쳤다.

7월 2일에 도쿄 돔에서 이적 후 첫 선발로 시합에 출전했다.

상대팀의 선발 투수가 좌투수가 예상될 때는 5, 6번으로서의 선발 출장이 많았으나, 그 이외는 대타로서의 출장이 주를 이루고, 컨디션이 좋아지지 않아, 한때는 2군으로 말소되는 등, 48경기의 출장에 그쳤다. 클라이맥스 시리즈 퍼스트 스테이지 1차전에서는 대타로 출전해 홈런을 쳤지만, 팀은 퍼스트 스테이지에서 패해 시즌을 끝냈다. 일본 시리즈 종료 후, 출장 기회를 요구하며 FA권을 행사했다. 요미우리 재적은 불과 154일이었다.

3.3. 치바 롯데 마린즈 2기

파일:사부로 롯데복귀.jpg

2011년 12월 23일 치바 롯데 마린즈로 복귀가 발표되었다. 사부로의 방출을 결정한 프런트가 퇴임하면서 후임이 사부로의 복귀에 호의적이었기 때문에, 롯데로의 복귀에는 장해물이 없어져 있었다. 등록명은 이적 전 사용하던 사부로(サブロー) 등번호도 3으로 정해졌다.

3.3.1. 2012 시즌

개막부터 5번을 맡았지만, 이후 부진한 조쉬 화이트셀을 대신해 4번으로 기용돼 전반기 팀의 승리에 뒷받침한다. 하지만 여름철 컨디션 난조와 조쉬 화이트셀의 1군 복귀로 6번과 7번 등 하위권으로 돌아섰다. 수비는 처음에는 좌익수로 출전했지만, 조쉬 화이트셀 이탈 후에는 주로 지명타자로 나섰고, 이구치 다다히토나 조쉬 화이트셀 등 다른 야수가 지명타자로 출전할 경우에는 좌익수도 맡았다. 또 시즌 전부터 1루수 훈련도 시작해 9월 21일 오릭스전에서 처음으로 1루수로 출전했다.

이 해에는 최종적으로 자신의 최다인 137경기에 출전했지만 타율 0.239, 7홈런, 52타점으로 뜻하지 않은 성적에 그쳤다.그래도 득점권 타율은 .290, 리그 1위인 78볼넷을 기록했다.

시즌 종료 후에 오른쪽 팔꿈치 수술을 받았다.

3.3.2. 2013 시즌

개막전은 6번 지명타자로 선발출전했지만, 시즌 초반부터 부진이 계속돼 대타 출전이 많아졌다.

6월 29일의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전에서는 9회말, 대타로 등장해 12년 만의 끝내기를 날린다.

컨디션이 오르지 않은 채 7월 말에 부상으로 2군으로 말소되었다.

8월 말에 1군에 복귀. 그 후에는 회복해, 주로 좌익수로 선발자리를 되찾았다. 그러나 시즌 내내 73경기 출장으로 타율 0.245, 5홈런, 24타점으로 또다시 뜻하지 않은 성적에 그쳤다. 게다가 예년에는 높은 타율을 남기는 득점권 타율이 .183로 특유의 승부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전년에는 지명 타자의 출장이 많았지만, 당시즌은 크레이그 브라젤이나 G.G.사토의 입단도 있어 좌익수로 출전이 더 많았다.

3.3.3. 2014 시즌

8년간 이어온 개막전 선발출전을 놓쳤지만 개막전에서 9회 대타로 출전해 안타를 때려낸다. 하지만 이후 부진해 10타석 연속 무안타가 이어지다가 4월 4일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스전에서 시즌 첫 적시타를 포함한 멀티안타를 때린 뒤 점차 컨디션을 끌어올린다.

5월은 타격이 절호조로, 2005년부터 10년 연속이 되는 4번도 맡아, 월간 MVP 후보에 오를 정도의 활약을 보였다.(.324, 2홈런, 11타점, OPS.867). 한때는 타율이 .330을 넘지만 교류전에 들어가서는 서서히 컨디션을 떨어지며 종반에는 중도 가입한 알프레도 데스파이네의 활약과 자신의 실속이 겹쳐 출전이 극격히 감소하였다.

최종적으로는 타율 0.248, 4홈런, 25타점으로 전년과 비슷한 성적에 그쳤다. 반면 득점권 타율은 .284로 지난해보다 크게 올랐다. 또 2년 만에 우익수로도 나섰다.

3.3.4. 2015 시즌

개막부터 부진이 계속되어 주로 대타 기용.

6월 15일의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스전에서 시즌 첫 홈런을 기록했지만. 그 후에도 컨디션은 오르지 않았다.

10월 4일의 닛폰햄전에서 2점 홈런을 날려 팀의 CS출전에 공헌했다. 하지만 CS는 출전 없이 시즌이 끝나 최종 36경기 타율 0.217(46타수 10안타), 홈런 1타점 4개로 부진했다.

3.3.5. 2016 시즌

시즌 초부터 1군 승격없이 2군에서만 머무르고 있었다.

8월 31일 구단 공식 홈페이지에 2016년을 끝으로 현역 은퇴가 발표되었다. 나이에 많아져 올해는 한 번도 1군에 승격하지 못함으로써 물러날 때를 깨달았다고 한다. 은퇴발표 기자회견에서 사부로는 '이번 시즌을 끝으로 현역에서 은퇴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치바 롯데 마린즈에서 2005년에 31년만의 일본시리즈 우승 등, 일본시리즈 우승을 2번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행복한 야구 인생이었습니다. 어느 때나 응원해 준 팬 여러분, 그리고 구단 관계자를 비롯해, 다양한 형태로 서포트해 준 분들 덕분이라고 생각합니다. 감사를 하고 있습니다. 22년 동안 정말 감사했습니다라고 말했다.
9월 25일의 오릭스전 에서 은퇴 경기을 실시해, 4번 지명 타자로 선발 출장. 9회초에는 지명타자에서 좌익수 및 우익수 수비에 나섰다.
사부로오오오오오오오~~~
타격에서는 3번째 타석까지는 모두 헛스윙 삼진으로 물러났지만 마지막 타석이 된 9회말 4번째 타석에서는 히라노 요시히사로부터 우중간 2루타를 기록. 스스로 은퇴의 꽃길을 장식했다. 이 후 대주자로 교체되면서 눈물을 흘렸다.
파일:은퇴경기 사부로1.jpg

경기 후 열린 은퇴 세리머니에서는 '저에게는 또 하나의 꿈이 있습니다. 이 치바 롯데 마린즈를 일본 제일의 구단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그 꿈을 향해 매진하겠습니다."라고 말했다. 또 이 경기에서는 롯데 구단으로서는 최초의 퍼블릭 뷰잉도 실시되었다. 또, 은퇴 세레머니 및 (은퇴에 즈음한) 현역 생활을 되돌아 보는 기사 등을 통해서, 니시오카 츠요시, 스즈키 다이치, 니시노 유지 등으로부터, 한명의 야구인으로서 적확한 조언을 보낸 것에 대한 감사의 말이 전해지는 것. 외에 은퇴 시합에서는 요미우리시절의 팀동료 아베 신노스케, 사카모토 하야토, 초노 히사요시, 우츠미 테츠야, 야마구치 테츠야, 2014-2015년에 롯데에 재적한 루이스 크루즈가 은퇴식에 참석하는 등, 그 인망의 두께를 엿볼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파일:G20160926013424960_view.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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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쿠와타 마스미, 키요하라 카즈히로, 타츠나미 카즈요시, 마쓰이 가즈오, 후쿠도메 고스케, 마에다 켄타와 사부로의 팀 동료이던 이마에 토시아키 등 대선수들을 많이 배출했다. 현재는 폭력 사태에 연루되는 등의 곡절을 거쳐 휴부 상태로, 2000년대를 거쳐 오사카 고교야구의 패권은 니시오카 츠요시, 나카무라 타케야, 이와타 미노루, 아사무라 히데토, 후지나미 신타로, 모리 토모야 등을 배출한 오사카 토인고교로 넘어갔다.[2] 1969년생으로 고졸 거포 유망주였으나 난청과 잦은 부상으로 인해 주전이 되지 못하고(커리어하이는 99경기 13홈런을 기록한 1999년.) 2003년 은퇴. 그 후 해설가로 일하다가 닛폰햄, 롯데, 요코하마에서 코치를 역임했으며, 닛폰햄 시절엔 이토이 요시오, 나카타 쇼의 성장에 큰 영향을 미쳤다. 현재는 요코하마 2군 타격 코치를 역임 중. 여담으로 응원가가 Old Macdonald had a farm의 반주에 맞추어 '이와이와오!'를 외치는 것이었다.[3] R·J·레이놀즈와 타카하시 요시노부의 11타석 연속안타에 이은 3위기록.[4] 1981년생 (빠른이라 80년생과 동기) 외야수로 사부로에 비하면 한참 일천한 경력을 가진 백업 전문 선수였다. 쿠도는 2013년 방출당했으나 바로 주니치가 주워가서 5년간 더 현역으로 뛰었다. 이후에는 주니치에서 코치를 역임했으며 2022년 현재는 한신의 2군 외야수비 겸 주루코치를 맡고 있다.[5] 그 해 치바 마린 스타디움롯데리아에서는 '사부로 멘치카츠 버거'를 팔고 있었으나 사부로가 트레이드된 뒤 판매를 중단되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