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 요네하라 마리(米原万里) |
국적 | [[일본| ]][[틀:국기| ]][[틀:국기| ]] |
출생 | 1950년 4월 29일 도쿄도 주오구 |
사망 | 2006년 5월 25일 (향년 56세) |
학력 | 프라하 소비에트학교 도쿄외국어대학 러시아어학과 도쿄대학 대학원 |
경력 | 일본러시아어통역협회 초대 사무국장 SJ상 수상(1992) |
가족 | 아버지 요네하라 이타루(米原昶), 어머니 요네하라 미치코(米原美智子) 여동생 이노우에 유리(井上ユリ), 제부 이노우에 히사시(井上ひさし) |
1. 개요
일본의 러시아어 동시통역사 및 작가.2. 프라하 소비에트학교 시절
일본공산당 간부였던 아버지를 따라 가족들이 체코슬로바키아 사회주의 공화국의 수도 프라하로 이주하여, 1959년에서 1964년까지 소비에트학교에서 공부했다. 이 학교는 당시 체코슬로바키아에 주재하던 각국 외교관이나 공산당 고위 간부, 고위 관료의 자제들이 많이 다니는 일종의 특수 명문학교였다.마리는 어린 마음에도 “공산주의 사회에는 계급이 없어야 되는데, 왜 우리 학교 친구들은 다들 특권계급 티가 줄줄 날까?”라는 의문을 여러 번 품었다. 예를 들어 루마니아 외교관의 딸이었던 친구의 집에서 입주 가정부를 고용하는 것도 모자라 가정부를 다락방에서 재운다는 이야기를 듣고 얼굴이 굳어버렸다고 할 정도. 하지만 프라하를 떠나고 20~30년 후 옛 친구들의 자취를 찾아 다시 프라하에 갔다가, 소비에트학교가 있던 시절부터 학교 앞에서 과자가게를 운영하던 노부인과 대화하면서 일본인이 러시아어를 잘하는 것을 신기해하는 노부인에게 “어렸을 때 소비에트학교에 다녔다”고 말하자, 그 시절을 기억하고 있던 노부인이 “그 학교는 스쿨버스도 운영했고, 선생님들도 매일 옷을 바꿔입는 멋쟁이였고, 학생들도 있는 집 자식이라는 티가 났다.”고 이야기하는 것을 듣고 ‘주변에서 보기에도 그렇게까지 티가 났단 말인가’라고 다시 한 번 씁쓸해하였다.
이러한 학풍은 마리의 성장배경에 상당한 영향을 끼친 것으로 추정된다. 요네하라 집안은 시골의 부유한 지주였고 아버지 이타루는 여러차례 국회의원(중의원)을 지냈지만, 마리는 동구권 국가 노멘클라투라의 자녀인 다른 학생들의 사이에서는 오히려 자신을 서민적이라고 느꼈다. 예를 들어 이타루가 파견된 <평화와 사회주의 제문제> 편집부는 당시 국제 공산주의 정당 간의 협력조직으로서 여기에 대표로 파견된 인물들은 체코슬로바키아에서 각국 대사와 같은 수준의 예우를 받고 있었고, 이에 따라 관사로 아파트도 제공받았는데, 이 아파트는 일본에서 방문한 손님들이 “아주 멋진 호화 아파트다”라고 감탄할 정도로 넓고 시설도 좋았다고 한다.[1] 하지만 같은 수준의 아파트를 제공받은 루마니아 대표는 “집이 너무 좁아서 못 견디겠다”며 굳이 관사를 나가서 집세를 내고 더 큰 집을 빌렸다는 것. 그리고 이에 마리는 ‘이 집은 충분히 좋은데 왜 여기서 살지 못하겠다는 것인지 모르겠다’고 의아하게 여겼음을 기록했다.
정치적으로 특수한 학교답게, 초등학교 고학년~중학생 수준의 학생들 간의 관계, 또는 교내 분위기에서도 각국의 정치적 상황이 큰 영향을 끼쳤다고 한다. 대부분의 학생들은 학교에서 자신이 자국을 대표한다고 느끼고 있었고, 서구권과의 관계가 악화되자 소련 및 동구권 출신 학생들이 서구권 출신 학생들[2]과 어울리는 것을 자제한다거나, 요시프 브로즈 티토가 지도하는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공화국와 소련의 관계가 경색되자 유고슬라비아의 노동자 자주관리체제를 소개하는 유고슬라비아 학생에게 소련 출신 교장이 직접 시비를 걸기도 했다. 마리는 당시 국제 공산주의 진영 내에서 좌파로 분류되던 일본공산당 출신인 자신이 우파로 분류되던 유고슬라비아 공산당 출신의 학생과 친구가 되면 ‘사상과 이념이 사람 사이의 우정을 가로막지 못한다’는 자신의 생각을 증명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일부러 유고슬라비아인 친구를 사귀려고도 했다.
마리가 프라하 생활에 대해 남긴 기록을 보면, 당시 소비에트학교의 동구권 국가 출신 학생들 중에는 대사 등 외교관 자녀들이 많았지만, 서구권 국가 출신 학생들은 외교관이 아니라 단순한 서구권 공산당 간부의 자식들이 많았다.[3] 마리의 아버지 이타루 역시 중의원 의원까지 지낸 인물이기는 하지만, 프라하에는 일본 정부를 대표하는 공직자가 아닌 일본공산당 대표로서 국제 공산당 간의 교류협력조직에 파견된 것이다.
이러한 차이가 발생한 이유는 물론 간단한데, 공산당이 유일정당으로 집권당인 동구권 국가에서는 외교관 등 주요 공직자가 모두 공산당 소속인 것이 당연하지만, 공산당의 집권 사례가 거의 없는 서구권 국가에서는 공산당 소속 인물이 주요 공직자가 되는 경우가 극히 드물기 때문이다. 특히 국내 정치에서는 공산당이 국회의원이나 장관 등을 배출하는 경우가 있을지라도, 해외에서 자국을 대표해야 하는 외교관이 지나치게 강한 정치적 정체성을 가지는 것은 오히려 백안시되었다. 게다가 소비에트학교는 체코슬로바키아 등 소련의 위성국에 설치되어 있기는 하였지만 교장 및 교사까지 모두 소련 본국에서 임명하여 파견하고, 교육과정 및 학사관리까지 모두 소련 본국에서 관리하고, 학적자료도 소련 본국으로 보내서 관리한다고 할 정도로 철저히 소련의 통제 하에 있는 학교였기에, 서구권 국가 중 체코슬로바키아와 외교관계가 있는 국가라 하더라도 일반적인 외교관 자녀가 다닐만한 학교는 아니었다. 즉 1960년대 기준으로 친소련적인 입장인 공산당 소속 인사가 아니면 자기 자식을 보낼 생각이 들지 않았을 것이고, 학교에서도 받아주지 않았을 것이다.
학교를 떠난 후에도 정치적 특수성은 여전했다. 30년 만에 옛 친구들을 찾으러 떠난 길에 유고슬라비아 출신 친구의 행방을 추적하다가 “그 친구 아버지가 (유고슬라비아 연방의 구성국이던 보스니아의) 대통령이 되었다”는 소리를 듣기도 했다. 마리는 친구를 찾기 위해 일단 친구의 아버지(=친구네 집안)의 행적부터 추적하는데, 친구 아버지의 성씨만 알지 이름은 몰랐다. 그래서 성씨와 함께 “젊은 시절 반 나치즘 파르티잔(유고슬라비아 파르티잔) 활동을 했고, 유고슬라비아 연방의 주 체코슬로바키아 대사를 역임했다”는 경력만 말하며 “그런 사람을 아느냐”고 물어보자 “그 집안에는 6형제가 있는데 모두 반나치 파르티잔 활동을 했고, 그중 외교관 경력이 있는 사람은 막내인데, 막내는 (유고슬라비아 연방 해체 이전) 보스니아의 마지막 대통령이었다”는 대답이 줄줄 흘러나왔다. 즉 친구는 구 유고슬라비아 연방에서는 누구나 이름 정도는 알만한 정치 명문가의 자제였던 셈이다.
또한 그리스 출신 친구인 리차의 아버지가 교통사고로 돌아가셨다는 소리를 듣자, 대뜸 “혹시 정치적 암살이라고 생각하세요?”, “아니요, 단순한 사고라고 생각합니다”라는 대화를 주고받기도 했다. 그리스는 1974년까지 반공 성향의 군사독재정권이 통치하고 있었기에 1960년대 당시 그리스 공산당은 해외 망명자들을 중심으로 운영되고 있었으며, 당연히 그리스 정부는 심한 갈등관계에 놓여있었다. 리차의 아버지는 체코슬로바키아에 대표로 파견될 정도로 공산당 내 주요 인사였으니 당연히 정치적 갈등에 휘말릴 가능성이 있다고 여겨졌고, 마리도 이런 사정을 대강 알고 있으니 ‘암살이 아닌가?!’라는 생각부터 했고, 이 소식을 마리에게 전해준 리차의 아버지의 지인 역시 자기 딸뻘 되는 사람이 이런 질문을 하는 것을 황당하게 여기지 않고 “다행히 암살은 아니고, 단순한 사고였다”고 침착하게 대답한 것이었다.
3. 작가 및 통역가 활동
그 후 일본으로 다시 돌아와서 도쿄외국어대학 러시아어학과를 졸업하고 도쿄대학 대학원까지 수료했다.러시아어 번역을 처음 시작하게 된 것은 대학 졸업 이후 취직이 되지 않자 시간 때우기 겸 아르바이트 삼아 시작한 것이 계기라고 한다. 그런데 일을 시작하고 얼마 후 동구권 붕괴 소식이 들려오자 갑자기 사장이 휴가를 1달이나 내주면서 “앞으론 죽도록 바빠질 테니, 최소 몇 년 간은 쉬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도록 푹 쉬고 오라”고 했다고 한다. 실제로 소련 및 동구권이 개방되면서 러시아어 번역자의 업무량이 폭주했고, 이 당시 일을 얼마나 많이 했는지 이 때 받은 번역료 덕분에 친구들을 찾아 동유럽에서 돌아다닐 때 객실 하나를 전세내어 편하게 지낼 수 있었을 정도였다고 한다. 이후 일본 러시아어통역협회에서 초대사무국장을 지냈고, 1992년 SJ상을 수상하는 등 다양한 활동을 했다.
작가로서는 주로 에세이를 집필했으며, 본인의 경험을 녹여 유머러스하게 묘사하는 것이 특징이다. 마리는 대체로 개인의 경험과 내면으로 대표되는 미시서사에 집중하는 경향이 강한 일본 문단 주류와는 달리, 대하서사에 가까운 거시서사를 익숙하게 다루었다. 어린 시절의 경험이 큰 영향을 끼쳤을 가능성이 상당히 높다.
평생 독신으로 산 것으로도 유명하다. 하지만 왼손 약지에 반지를 끼고 다녀서 유부녀라는 오해를 사기도 했다.
2006년 56세에 난소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4. 가족
4.1. 아버지
아버지 이타루는 제2차 세계 대전 당시부터 공산당원으로서 반정부 지하활동에 몸담고 있었고, 전후 중의원 의원까지 지낸 일본공산당의 주요 간부 중 하나였다. 친척 중에는 현 참의원 아리타 요시후가 있다. 일가의 프라하 이주 자체가 일본공산당 대표로 당시 범세계적 공산주의 정당간의 교류조직이던 잡지 <평화와 사회주의 제문제>의 일본공산당 대표로 파견된 것을 계기로 한 것이었고, 이 잡지의 편집부에 파견된 각국 공산당 대표는 당시 체코슬로바키아 사회주의 공화국에서 대사급 외교관에 준하는 대우를 받을 정도로 중요한 인물로 여겨지고 있었다.이타루는 부유한 지주 집안 출신이었지만 젊은 시절부터 공산당 활동에 투신하여 제국주의 시대에는 반제국주의/반식민주의 활동에 열성적으로 참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일본에서 공산당 탄압이 극심하던 당시, 부모와 형제들이 “빨갱이짓을 그만두면 뭐든지 해달라는 대로 다 해주겠다. 제발 공산당 활동을 그만두고 결혼이라도 해서 자리잡고 살아라.”라며 여러차례 미리 재산을 나눠주었지만, 이타루는 그때마다 “넹. 투쟁자금 주셔서 ㄳㄳ” 하면서 당에 재산을 헌납했다고 할 정도. 다만 2차대전 패전 이후 일본공산당의 활동이 허용되면서 지하운동을 그만두고 다시 집으로 돌아와 합법적인 정치활동을 시작하여 여러 차례 중의원 의원에 당선되기까지 하였으니, 결과적으로는 지역 유지였던 요네하라 가문의 입장에서도 ‘중앙정계에까지 진출하여 가세(家勢)를 키우는 데 큰 공헌을 한 믿음직한 아들’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소속 정당이 지역 유지를 중심으로 한 지방권력체계를 가장 적대적으로 견제하는 입장이던 일본공산당이긴 하지만.
자민당의 세력이 극히 강했던 농촌에서 공산당 소속으로 연거푸 당선되었던 것 자체가, 해당 지역 최대의 유지(=지방 세력가)였던 요네하라 집안 아들+공산당 간부라는 이중 버프를 받아서 지주나 지역 유지/자산가+노인 등 지역 어른들을 중심으로 한 지방 기득권층과 그 기득권층에 반발하는 청년+지식인 및 개혁세력의 지지를 한꺼번에 싹 긁어모았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이타루는 지하운동 시절 동지였던 미치코와 결혼했는데, 태평양전쟁이 끝나고 수배가 풀린 후 미치코가 남편과 함께 시가에 들어와보니 길거리를 지나가던 동네 어른들마저 ‘요네하라 댁 며느리’라는 이유로 꾸뻑 인사하고 지나갔다고 하는 일화가 있다. 즉 요네하라 일가는 해당 지역에서 상당히 위세가 대단했던 집안으로 보인다.
4.2. 여동생과 제부
3살 아래인 여동생 유리는 이탈리아 요리 전문 요리사이며, 언니에 관해 <언니 마리>라는 책을 썼다.제부 히사시는 작가이며, 평화헌법 개정에 반대하고 식민지배의 과거사에 대한 사과를 주장하는 일본의 대표적인 진보 지식인 중 한명으로 유명하다. 원래 마리&유리 자매 모두가 히사시의 팬이었는데, 친구의 소개로 히사시를 만나게 된 마리가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히사시에게 유리를 소개하여 결국 결혼까지 했다는 ‘성공한 팬질’의 대표적인 사례 중 하나이다.
2008년 당시 한중일 동아시아문학포럼에 일본측 기조발제자로 참여한 히사시는 ‘억압적 제국주의에 저항한 한중일 3국의 대표적인 작가’로 한국의 김산, 중국의 루쉰과 함께 장인인 요네하라 이타루를 소개했다.
5. 작품 일람
- 프라하의 소녀시대
- 교양 노트
- 속담 인류학
- 미식견문록
- 미녀냐 추녀냐
- 문화편력기
- 올가의 반어법
- 마녀의 한 다스
- 발명 마니아
- 대단한 책
- 언어 감각 기르기
- 팬티 인문학
- 차이와 사이
- 인간 수컷은 필요 없어
- 러시아 통신
- 유머의 공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