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에는 쿠데타가 필요해요의 등장인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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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에는 쿠데타가 필요해요의 등장인물.원 역사의 우드로 윌슨에서 모티브를 따온 인물이다.
2. 작중 행적
원 역사대로 이승만의 스승으로서 언급된다. 1916년 시점에서는 이미 대통령 재선까지 된 상태이고 미국도 1차대전에 얽히는 만큼 조만간 출연 가능성이 높다. 솜 전투 이후 본격적으로 언급되는데 서부전선이 꼬이자 급히 군을 준비하려 했으나 너무나도 만신창이인 미군의 현실을 보고 경악해 공화당의 연방군 강화책을 지지하고 있다고 언급된다. 이게 놀라운 이유는 윌슨 대통령은 민주당 소속이기 때문인데 군대가 너무 심각하게 보인 나머지 반대당의 정책을 지지하고 있는 것이다.전후 협상에서 미국의 국제적 영향력을 강화시키기 위해 14개조 평화 조약을 들고 나왔으며, 1차대전 이후 영국의 동아시아 내 영향력이 크게 저하되어 한국-프랑스 동맹이 새로운 강자로 올라오는 상황에서 네덜란드가 인도네시아 방어를 위해 프랑스-한국 동맹으로 줄을 바꿀 기미를 보이자, 이대로라면 동아시아-동남아시아의 균형이 너무 프랑스 식민제국에게 유리해진다 판단하고, 영국-일본 동맹의 동아시아의 영향력을 강화시켜 프랑스-한국 동맹의 세력을 꺾은 뒤 총체적인 세력을 비슷하게 만들고 미국은 중재자로 나서 동아시아-동남아시아 정세를 쥐락펴락한다는 구도를 고안한다. 당시 장관들과 비선실세들은 이런 윌슨의 구도를 두고 너무 위험한 장난을 치는 것이 아니냐며, 2차대전을 막기 위해 내놓은 계획이 그리스 신화의 신탁이 될 수 있음을 우려하지만 윌슨의 뜻을 꺾지는 못한다.
대한제국을 프랑스 2중대로 간주한 윌슨은 일본이 연해주에 육군 8만을 투입하고 대규모 약탈, 학살을 벌여서 여러 열강들의 불쾌감을 산 상황에서 관동주와 교주만을 일본에게 넘기겠다는 영국의 구상에 미국이 동의를 표하는 것은 물론, 대한제국의 전후 협상 지분을 최대한 줄이려고 한다. 이미 일본군이 연해주에서 깽판을 치고 있는 상황에서 관동주를 일본에게 넘긴다는 것은 대한제국이 일본에게 3면이 포위당한다는 뜻이었기 때문에 당연히 대한제국은 분노했고, 김시혁이 윌슨을 노려보자 쪼는 소인배같은 모습을 보인다.
2.27 계엄령~3.1 혁명이 발발하자 평소의 이상주의는 어디다 갖다 치웠는지 영국과 손잡고 근황파를 지원해 내전을 장기화시키려다 이를 들켜 평소의 이상주의는 어디 갔냐는 후버를 앞세운 공화당의 정치 공세와 만주에 이권이 걸린 미국의 자본가들, 한국 내전의 장기화를 원하지 않는 상하원까지 모두의 반대에 부딪치자 '정의로운 투쟁 중인 한국에 내정간섭을 하는 것은 문명국으로서 해서는 안 되는 일'이라며 슬그머니 꼬리를 내린다.[1]
전후 협상이 끝나가는 상황에서 명백히 미국보다 아래인 대한제국, 일본 제국조차 한몫 크게 챙겨가는데 청년 200만을 참전시켜 놓고 제대로 이권 챙긴 건 없고 뜬구름 잡는 이상만 늘여놓는 윌슨에 향한 국민의 시선은 점점 더 싸늘해져 텃밭인 캘리포니아까지 뒤집어져서 국제연맹 참가 법안이 하원에서 폐기, 미국이 제안한 국제연맹에 미국이 못 들어가는 사태가 벌어진다. 미국 대중들은 미국의 영광을 위해 참전을 한 것이지, 세계평화를 위해 참전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우선 윌슨의 재선을 도왔던 가장 큰 세력이 독일계 미국인(당시 미국 내 백인 인구의 45%를 차지했다.)과 아일랜드계 미국인이었는데, 독일계는 조상의 나라인 독일과 싸우고 싶지 않아서 1차대전 참전에 반대했고 아일랜드 독립운동을 지원하던 아일랜드계 미국인들은 영국을 돕기 싫어했기에 서로 이해 관계가 일치해 나란히 윌슨의 편을 들었다. 그런데 윌슨이 재임 도중에 말을 바꿔서 1차대전에 참가하면서 이들 모두가 실망할 수 밖에 없었고[2], 특히 아일랜드계 미국인들은 윌슨이 전후 협상에서 영국의 편을 들자 영국에 대한 분노가 윌슨에게까지 옮겨가서 상당히 과격한 반응을 보였다.
대규모의 선거인단을 거느린 주이자 윌슨 당선에 결정적인 공을 세운 캘리포니아의 경우에도 이전부터 일본이 의도적으로 하와이와 캘리포니아에 일본인 이주민들을 대량으로 보내서 영향력을 강화시키려 하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반일 정서가 강했는데 일본의 영향력을 키우자는 윌슨의 주장에 무슨 소리냐고 분노하여 반일 정서의 연장선으로 윌슨에게서 돌아섰다. 이런 상황에서 윌슨이 주장하던 도덕주의와 이상주의도 한국의 혁명을 막고 전제군주를 돕자는 계획이 일찌감치 대중들에게 누출되어 허울뿐임이 드러나며 돌이킬 수 없는 이미지 하락을 겪게 된다.
이를 통해 레임덕을 맞았음이 분명해졌음에도 특유의 이상론에서 빠져나오지 못해 민주당을 설득해 재표결을 노려야 한다는 참모들의 조언을 무시하고 국민만 설득하면 된다며 환갑 넘은 노인이 9,000마일 전국 순행에 나서는 무리수를 둔다. 윌슨의 뛰어난 연설 실력 때문에 연설 중에는 사람들의 환호를 샀지만, 연설이 끝나면 바뀌지 않는 현실에 대중들이 돌아서는 일이 반복되었고, 공화당과 민주당 반대파도 아름다운 말만으로 현실이 해결되지는 않는다고 비판을 이어갔다.
그로 인한 몸의 피로가 누적된 상황에서 대한제국과 소비에트가 국교를 맺었다는, 본인이 생각한 균형이 무너지는 일이 벌어졌다는 소식을 듣고 매우 분노하여 당장 한국-소련 조약을 무력화시키려 했지만 장관들은 물론이고 영국 간첩인(...) 비선실세조차 소용없다고 반대했다. 소련은 14개조 평화 조약 대상에 들어가지 않는 국가라서[3] 14개조 평화 조약에 규정하는 비밀외교 금지 조항에 걸리지 않고, 미국 자본가들은 한국-소련 협상을 통해 소련에 미국 자본을 유입시켜 큰 돈을 벌 수 있겠다며 매우 기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정확히 말하면 영국과 일본이 미국의 동아시아 무역을 크게 방해하고 있어서 한국의 도움을 받아 간신히 진입을 시도하고 있던 상황인데, 여기서 소련과의 조약을 무력화시키겠다고 한국의 분노를 샀다가는 한국은 당연히 미국 자본 유입을 막을 것이고 미국의 동아시아 무역 시장도 아작날 수 밖에 없다. 그렇게 되면 미국 자본가들의 분노는 당연하게도 윌슨 대통령과 그 소속 정당인 민주당에 집중될 것이고 자연스레 민주당의 라이벌인 공화당에 돈을 퍼부어서 정권 교체를 노릴 것이기에 장관들이건 비선실세건 반대하는 것이 당연하다.
결국 윌슨은 한국을 막았다가는 정권 교체를 당할 것이고 한국을 놔뒀다간 자신의 구상이 전부 무너진다는 딜레마에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다가 뇌졸중이 와서 쓰러져 버리고, 그에 따라 백악관에 아무 말 없이 은둔하면서 각종 유언비어가 나도는 원인이 된다. 나중에 백악관에서 정보를 캐내 진상을 알게 된 후버는 한국 정부가 의도치 않게 자신을 괴롭힌 윌슨에게 돌이킬 수 없는 한 방을 먹여준 것이라고 씁쓸하게나마 평을 남겼다. 결국 원역사대로 1920년 대선에서 민주당이 패배하며 그가 추진하던 모든 것에 제동이 걸려버렸다.
3. 평가
'지도 교수님이 노망이 나셨나?'
- 이승만
- 이승만
'가장 멋진 이상주의자이자 가장 위대한 대통령이면서 가장 머저리 같은 외교를 한 대통령'
- 허버트 후버
독자들의 평은 머리가 꽃밭인 얼간이. 위에 나온 이승만의 평이 그의 소설상 모든 행적을 설명한다. 이승만뿐만 아니라 작중 내 인물들도 이상과 현실을 구별 못해 헛짓거리 하는 인물로 간주한다.- 허버트 후버
내각의 장관들을 믿지 못해 자기 측근들을 따로 두어 그들의 말만 들어 행정부를 반갈죽하거나, 외교 문제로 외무장관과 윌슨의 외교 자문(영국 스파이다!)간의 갈등이 터져 외무부가 뇌사 직전에 이르거나, 의회와 갈등을 빚거나 하는 등 정녕 행정학의 아버지가 맞나 싶을 정도로 윌슨 후기 개판스러운 미 정국이 노골적으로 묘사되며,[4] 영일동맹과 한프동맹의 균형을 맞춰 미국이 중재자로서 국제적인 영향력을 확보하겠다는 구상은 좋았지만 그걸 실현하기 위한 방법은 하나같이 문제가 많다.
1차대전 때 대한제국은 동부전선과 서부전선에서 독일군을 실컷 갈아버리는 것은 물론, 루르를 공격해 독일의 항복을 받아냄으로써 전후 협상에서 당당히 새로운 열강의 한 축으로 인정받을 만큼 큰 공을 세웠던 반면, 일본은 1차대전 당시 손해 보기 싫다는 이유로 극히 일부의 장병만 보내 생색을 내던 상황에서 영국의 충동질이 있었다지만 8만이나 되는 군대를 연해주로 보내고는 연해주에 알박기를 하겠답시고 연해주 전역에서 약탈, 학살, 강간 등의 각종 전쟁범죄를 벌인 것은 물론 연해주의 러시아인과 한국인을 해치고 한국령인 동만주까지 위협하는 등 트롤러에 가까운 모습을 보였다. 이 때문에 전후 협상에서 일본은 끝내 정식 열강이 되지 못하고 열강에 준하는 나라 취급에 멈춰야 했을 정도. 이런 상황에서 전후 협상 때 대한제국은 힘이 이미 세니까 일본에게 영향력을 넘기고 찌그러져 있으라는 건 명분이 부족하다.
사적으로도 미군이 영국군과 프랑스군에게 너무 약하다고 무시당하는 상황에서 한국군이 미군의 교육을 담당해서 군대의 질을 올려주는 것은 물론, 미군이 그나마 활약할 수 있을 만한 위치를 선정하고 작전을 짜주는 등 배려를 많이 해줬기 때문에 윌슨의 행동은 은혜를 원수로 갚은 수준의 행동이나 다름없다. 대한제국이 미국에게 이미지가 나쁜 나라였다면 그나마 참작의 여지는 있었겠으나, 극동전쟁 당시부터 미국이 한국에 가지고 있는 이미지는 대체로 좋은 편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영국과 일본의 각종 삽질이 겹쳐 남중국에서 일본 자본과 영국 자본이 영향력을 대거 상실하자 그 자리를 한국 자본과 프랑스 자본이 채우게 되고, 네덜란드가 프랑스-한국에게 접촉함으로써 대한제국-프랑스령 인도차이나-네덜란드령 동인도로 이어지는 세력 구도를 갖게 되지만, 이는 적어도 1919년의 미국에게 이익이면 이익이지 결코 손해가 아니었다.
영국과 일본의 자본은 미국이 동아시아와 동남아시아에서 세력을 뻗치는 것을 철저히 막고 있었으며, 윌슨도 이 건 때문에 일본의 편을 든다는 것에 불쾌감을 보이기도 했을 정도였다. 반면에 한국과 프랑스는 중국 진출의 후발주자이며, 대한제국 영토는 극동전쟁과 영토 확장 때문에 미개척지가 많아서 미국 자본의 유입에 호의적이었다. 대한제국은 미국 자본가들에게 우호적인 태도를 보이며 미국 자본을 만주를 중심으로 한 자국 영토에 받아들이는 것을 허락하고, 한국-프랑스-네덜란드로 이어지는 동아시아-동남아시아 루트에 진출하는 것도 받아들였으며 남중국 자본에 대한 미국 자본의 유입 과정에서도 한국의 중재가 있었다.
그로 인해 1919년의 미국 자본가들은 한국의 도움을 받아서 막 동아시아 시장에 진출하는 상황이었는데, '균형의 유지'라는 명목으로 영국과 일본의 영향력을 다시 확대했다가는 시장의 유입이 막혀 미국 자본에 큰 손실을 입힐 가능성이 높았다. 특히 일본은 남중국 자본의 주도권을 잡고 있을 당시 영국조차 경고했을 만큼 폭압적이고 독재적인 태도를 보여 여러 열강들의 불쾌감을 산 전적이 있었다. 따라서 미국의 자본가들은 자연스레 친한-친프, 반일-반영 정서를 띌 수밖에 없었고, 이는 윌슨의 구상을 미국 자본가들이 적극적으로 방해하는 원인이 된다. 윌슨도 이를 모르지는 않았지만 사업가가 아니었던 윌슨은 그 과정에서 오갈 자본의 대규모 손실과 그로 인한 반발을 너무 가볍게 생각했다.
미국 대중들도 윌슨의 구상에 전혀 호의적이지 않았다. 미국인들은 극동전쟁 당시에 한국이 보여준 투사적인 모습에 이미 1차 호감작이 완료된 상태였고, 1차대전 때 한국군이 미군을 챙겨주기도 했으며 한국군이 용맹하게 싸우며 전공을 올리는 모습에 호감을 갖고 있었다.[5] 당시 미국인들은 계층을 가리지 않고 돈을 벌어 성공하는 것을 최고의 미덕으로 여기는 '부르주아 기질'이 강하기 때문에 미국 자본의 문제에 있어서 강도 귀족과 의견이 별로 다르지 않았고, 일본이 미국에게 보이는 여러 행동으로 인해 미국의 사회 각층에서는 이때부터 일본에게 상당한 경계심을 갖고 있어 일본을 견제하기 위해 한국을 도와야 한다는 의견도 적지 않았다.[6] 거기다 일본이 미국의 동아시아 사업을 크게 방해하기도 했을 뿐더러, 당시에는 미국과 사이가 좋지 않았던 영국과 손을 잡고 있었기 때문에[7] 대중들은 더더욱 윌슨을 좋게 볼 수 없었다.
대중도, 자본가도 등을 돌린 윌슨에게 남은 건 군부의 지지였지만 미국 군부도 윌슨의 구상이 마음에 안들기는 마찬가지였다. 본작에서는 영국이 1차대전 이후 국제적인 영향력이 더 약화된 데다 프랑스와 대한제국이 손을 잡으면서 영국이 일본의 돌출행동에 이를 갈면서도 일본에 대한 지원을 한동안 이어나가겠다고 방침을 결정한 탓에[8] 미국에게 있어 활동 영역은 넓지만 어디까지나 대륙 중심의 국가인 프랑스-한국 동맹과 달리 바다를 중시할 수밖에 없는 섬나라 해상제국 연합인 영국-일본 동맹이 월등히 위험했다.[9] 이러니 1900~1910년대 색부호 전쟁 계획에서 영국과 일본 해군을 동시에 상대할 적색-주황색 전쟁계획(War Plan Red-Orange)까지 상정하고 있던 미국의 군부가 한국보다 일본을 더 경계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10]
즉 윌슨의 구상은 대한제국의 괘씸함과 상관 없이 미국의 자본가, 민간, 군부 모두가 납득할 수 없는 구상임을 알 수 있다. 괜히 머리가 꽃밭이라고 작중 대내외적으로 까이는 것이 아니다. 그런 상황에서 아집에 사로잡혀 한국의 혁명을 방해하려 함으로써 이상주의자로서의 명분까지 잃어버려 대중의 비난을 샀고, 결국 그로 인해 뇌졸중 직전에는 근래 보기 힘든 수준의 레임덕을 맞이했다는 서술까지 나온다. 그럼에도 현실적인 문제를 이해하지 못해 자기 구상을 밀어붙이다가 결국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처지에 내몰려 뇌졸중으로 쓰러지는 윌슨의 말로는 현실을 보지 못하는 이상주의자의 위험성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4. 기타
원 역사의 윌슨은 인종차별주의자로 유명했지만, 본작에서는 대한제국과 일본에게 특별히 인종차별적인 태도를 보이지는 않는다. 일본에 대해서 불쾌해한 것도 일본이 미국을 엿 먹인 것이 주 이유였고 대한제국도 자기 구상에 방해가 된다는 이유로 방해한 거지 황화론적인 이유는 아니었다. 물론 인종차별 언급이 없지는 않은데 국내 사안에서는 윌슨이 레임덕에 시달리던 당시 공화당이 윌슨이 참전용사 흑인들을 무시하고 있다고 깠고, 민주당이 흑인을 감싸는 거냐고 적반하장으로 화냈다는 언급이 지나가듯이 나오기는 한다.[1] 미국 대중들도 소식을 듣고 1차대전 때 자신들을 도와줘 나름 감사를 느꼈고, 프랑스 공화국과 혁명의 원조를 두고 다툴 만큼 혁명(건국)에 대한 자부심이 강한 당시 미국인의 특성상 자신을 도운 우방국의 혁명을 탄압하고 반동을 돕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여론이 강했기에 윌슨의 발상이 얼마나 말도 안됐는지 알 수 있다.[2] 물론 루시타니아호 침몰 사건, 치머만 전보 사건 등 미국의 참전은 독일이 자처한 측면이 강하지만 어쨌든 윌슨이 독일계, 아일랜드계의 바램과 반대되는 행동을 한 건 사실이다.[3] 당시 14개조 평화 조약은 1차대전 참전국들 중에서도 승전국과 패전국에 한정되어 있었는데, 당시 소련은 1차대전 때 빠지고 1차대전이 끝나자 동유럽을 공격해서 파리 회담 당시에도 유럽에 속한 동맹국, 협상국들과 전쟁을 벌이느라 제3의 진영으로 간주되었다.[4] 원 역사에서도 실제로 일어난 고증이다.[5] 미국 대중들이 한국이 전후 협상에서 배상으로 이것저것 받아가는 것에 별다른 반발이 없었던 것을 고려하면, 당시 미국인들은 한국군의 전공은 저 정도는 충분히 받아도 될 정도라 여겼을 가능성이 높다.[6] 특히 일본인 이주자들이 대규모로 들어오고 있던 하와이, 캘리포니아 등의 미국 서부 지역에서 이런 의견이 강했다. 특히 캘리포니아는 윌슨의 당선에 공이 큰 지역이었지만 경합주이기도 해서 균형을 지키겠답시고 대한제국을 견제하고 일본을 지지하는 윌슨의 행동은 경합주 1곳을 공화당에게 헌납하는 꼴이었다.[7] 1차 대전 이전까지 영국과 미국의 관계는 그렇게 좋지 않았다. 당장 미국이라는 나라의 시작이 영국에 대한 영국령 아메리카 식민지의 독립 전쟁으로 시작되어 국가의 시작부터가 영국과 척을 진 것이고 그 뒤로도 미영전쟁을 겪은데다 남북전쟁 당시에 영국이 남부의 지원을 획책하려다 실패하는 등, 두 나라의 관계는 엄청나게 험악했다.[8] 즉, 영일동맹을 유지하겠다는 말이다.[9] 이런 불안감은 미국만 갖고 있는 게 아니라서 영국의 동남아시아와 오세아니아 식민지들조차 영국 본토가 일본을 지원하는 것을 반대했으며, 일본이 배신할 경우를 대비해 한국-프랑스 동맹에게 몰래 접촉하는 듯한 정황까지 보이고 있다.[10] 미국 해군이 한국 해군의 확장에 대해 큰 반응이 없는 것도 이런 판단이 따랐을 가능성이 높다. 한국 해군이 독일제국의 미건조 전함을 배상함으로 받아내기는 했지만 건조 기술이 없으며,[11] 설령 건조가 가능해지더라도 한국은 어디까지나 육군 중심의 대륙 국가이며 주변 해역이 호수에 가까운 정도로 고립되어 있어서 미국 해군의 입장에서는 일본 해군과 달리 별 위협이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