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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 𐤉𐤔𐤓𐤀𐤋 | |||||
성서 고고학에 의거한 다윗 & 솔로몬 시기 이스라엘 왕국의 강역 | |||||
기원전 1047년 ~ 기원전 720년[1] | |||||
성립 이전 | 이후 | ||||
12지파 | 기원전 930년: 유다 왕국 | ||||
기원전 720년: 아시리아 | |||||
페니키아 문자 | 𐤉𐤔𐤓𐤀𐤋 (이스라엘) | ||||
현대 표기 | ממלכת ישראל המאוחדת (이스라엘 연합 왕국) מַמְלֶכֶת יִשְׂרָאֵל (이스라엘 왕국)[2] | ||||
위치 | 가나안, 레반트 | ||||
수도 | 기브아 (기원전 1030년 ~ 기원전 1010년) 마하나임 (기원전 1010년 ~ 기원전 1008년) 헤브론 (기원전 1008년 ~ 기원전 1003년) 예루살렘 (기원전 1003년 ~ 기원전 930년) 세겜 (기원전 930년) 브누엘 (기원전 930년 ~ 기원전 909년) 디르사 (기원전 909년 ~ 기원전 880년) 사마리아 (기원전 880년 ~ 기원전 722년) | ||||
정치 체제 | 신권정치[3], 군주제[4] | ||||
국가 원수 | 왕 | ||||
주요 국왕 | 사울[5](40년) 다윗[6](40년) 솔로몬(40년) 여로보암 1세[7](22년) 오므리(12년) 아합(22년) 예후(28년) 여로보암 2세(41년) 호세아(9년) | ||||
언어 | 고대 히브리어 | ||||
민족 | 히브리인 | ||||
종교 | 야훼 신앙(유대교 및 사마리아교의 정립 이전) 가나안 다신교 | ||||
주요 사건 | 기원전 1047년 사울 즉위 기원전 1008년 다윗 즉위 기원전 970년 솔로몬 즉위 기원전 930년 여로보암의 반란, 르호보암의 유다 건국 기원전 925년 셰숑크 1세의 침공 기원전 853년 카르카르 전투[8] 기원전 720년 아시리아에 멸망 | ||||
현재 국가 | [[이스라엘| ]][[틀:국기| ]][[틀:국기| ]] [[팔레스타인| ]][[틀:국기| ]][[틀:국기| ]] [[요르단| ]][[틀:국기| ]][[틀:국기| ]] [[시리아| ]][[틀:국기| ]][[틀:국기| ]] [[레바논| ]][[틀:국기| ]][[틀:국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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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고대 가나안 지역에 있었던 히브리인의 국가이다. '헤브라이 왕국'이라고도 불린다.2. 고고학적 역사
이스라엘 왕국이 존속한 시기는 철기 시대에 해당한다. 기원전 1000년경 이후로 200년간 기후가 온난해지면서 가나안 일대에 인구가 늘어났고 무역이 활발해졌다.이집트 제22왕조 파라오인 셰숑크 1세의 전투 기록에는 기원전 900년대에 사마리아를 중심으로 하는 국가가 있었다고 한다. 정작 성경에서는 이 시기까지는 사마리아가 수도가 아니었지만.
아시리아 국왕 샬마네세르 3세는 카르카르 전투 비문에 적장의 한 사람으로 '이스라엘인 아합'을 언급하였고, 다른 비문에는 '오므리의 후손 예후'가 자신에게 조공을 바치는 모습을 새겨놓았다. 또한, 모압 왕국의 메사 석비에는 오므리의 자손들을 자신이 무찔렀다는 내용이 있다.
2.1. 통일 왕국의 실체(유다와의 관계)
성경에서는 사울과 다윗, 솔로몬의 치세 아래 유다와 통일된 이스라엘 왕국을 서술하고 있다. 하지만 현대 고고학자들은 기존과 달리 통일 왕국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의견을 주장하기도 한다. 고고학적 연구 이후 학자들은 다윗과 그의 왕조는 실존했더라도 오로지 유대 지역만을 통치하던 소왕국이었고 북쪽의 이스라엘과는 상관 없고 이스라엘과 유다는 처음부터 별개였다는 것이다.그러다가 이스라엘 오므리 왕조에 이르러 유다의 여호사밧 왕이 결혼 동맹을 통해 이스라엘에 복속되어 종속국이 되었다가, 기원전 722년 아시리아의 이스라엘 정복 이후 정치적인 혼란 속에서 후대 유다 왕국의 요시야 왕이 아시리아가 물러간 옛 이스라엘 땅을 잠시 차지하자 유다 왕국의 유대인들이 자기들을 마치 옛 이스라엘의 일원이었던 것처럼 생각하며 '통일 왕국'이라는 개념을 만들었다는 견해가 등장했다(참고). 이 견해가 사실이라면, 이스라엘(야곱)의 12지파라는 것도 사실은 별개인 각 부족을 하나로 묶기 위해 만들어낸 개념이 된다. 현재 학계에서는 기존의 통일 왕국설, 위의 통일 왕국 부정설, 둘 사이의 절충설이 서로 대립하고 있다(영문 위키백과).
3. 성경의 서술
성경에 따르면 이스라엘 왕국의 역사는 크게 통일 왕국 시대와 분열 이후로 구분된다. 아래 내용은 대부분 성경, 그중에서 열왕기와 역대기를 참고하였다. 성경은 야훼 유일신 신앙(아브라함 계통의 종교) 입장에서 서술되었기에 바알 신앙을 비롯한 기존 가나안 전통 신앙을 '우상숭배'라 하며 이를 따르는 인물들과 세력들을 부정적으로 묘사하는 경향이 있다.3.1. 통일 왕국
파일:Kingdom-of-Saul-Map.png | |
사울의 통치 시대 이스라엘 왕국의 강역 |
사울이 처음으로 이스라엘의 국왕 자리에 오르면서 이스라엘 왕국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기원전 10세기 즈음 그 유명한 다윗과 솔로몬의 치하에서 이스라엘 왕국의 최전성기가 이루어졌다고 기록된다. 다윗은 일생에 걸쳐 수십 번의 전쟁을 통해 12지파로 갈라진 이스라엘 민족을 통일하고 뛰어난 용병술을 자랑하는 군대 장관 요압을 앞세워 주변국을 병탄하기에 이른다.
이스라엘 주변으로는 암몬, 모압, 에돔, 티레, 시돈과 같은 페니키아 계열 민족들이 살고 있었는데 이스라엘을 비롯한 이들 모두는 페니키아어(히브리어)를 입말로 썼고, 지속해서 영향을 주고받은 민족이기 때문에 다윗과 솔로몬은 이들을 쉽게 합병하여 단시간 내에 영토를 넓힐 수 있었다.
다윗과 솔로몬 통치 시대 이스라엘 왕국의 강역 |
그리하여 북쪽으로는 레바논 동남부까지 남쪽으로는 요르단 강 동편 및 네게브 사막까지 뻗어 나갈 수 있었다. 또한 이스라엘은 필라스티아 (블레셋)와 달리, 북으로 인접한 페니키아와는 우호를 맺었다. 따라서 제대로 된 항구와 함대를 갖추지 못했음에도 이스라엘은 뛰어난 조선 기술과 운수 기술을 가진 페니키아 덕에 지중해 서쪽 이베리아 반도에 위치한 다르싯(또는 다시스, 타르테소스로 추정)과 교역했다. 심지어 홍해로 이어지는 에시욘게벨 항을 통해 인도 반도와도 교역을 할 수 있게끔 페니키아가 도왔다고도 한다. 그 덕분에 이스라엘은 부유한 상업 국가로 발돋움하게 된다. 당시 페니키아 도시들 중 시돈은 오늘날로 치면 뉴욕급 도시로 이후 아합 왕 시절에 시돈의 공주가 왕비가 되어 이스라엘에 큰 영향력을 끼친다.
하지만 이러한 영광은 솔로몬 치세 말기에 완전히 무너져 내렸는데, 다윗의 무자비한 정복 전쟁의 결과로 민족주의적 저항 의식이 싹튼 북동쪽의 아람과 남쪽의 에돔에서 반란이 일어나 이스라엘의 통치에서 벗어났으며, 동쪽의 모압과 암몬에 가해지는 영향력도 예전만 하지 못하게 되었다. 설상가상으로 이스라엘의 무역을 돕던 북쪽의 페니키아계 왕국들마저 독립하게 되어 이스라엘과의 무역 경쟁에 뛰어들게 되었다. 솔로몬 사후, 12지파 중 10지파는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으로부터 등을 돌렸고, 여로보암은 이들 10지파를 이끌고 반란을 일으켜 성공, 북이스라엘의 국왕이 되었다. 유다 지파와 소수가 된 벤야민 지파만이 르호보암의 통치 아래에 있었고, 이들을 중심으로 남부에 유다 왕국이 건국됨으로써 히브리 민족의 국가는 남북으로 분열되었다.
3.2. 분열 이후
이스라엘 왕국의 영토 |
여로보암의 국왕 즉위와 유다 왕국의 건국으로 히브리인의 영토는 남북으로 분열되었다. 유다 왕국이 이스라엘 왕국과 대등하게 분열되었다는 관점에서는 이후의 이스라엘 왕국을 (남)유다 왕국에 대비하여 '북이스라엘 왕국'이라 부르기도 하고, 또는 분열 이후 이스라엘 왕국의 수도 이름을 따 '사마리아 왕국'이라 일컫기도 한다.
분열 이후로 이스라엘 왕국과 유다 왕국은 그저 그런 나라로 살았다. 북이스라엘은 오므리, 아합이나 여로보암 2세가 통치하던 시기 제법 강성하던 시절이 있었지만 주변국을 완전히 지배하진 못했다. 그저 있는 영토를 지키거나 건국 수준의 영토를 회복하거나 주변국과의 전쟁에서 승승장구하던 나름의 맹주 정도로 보면 될 것이다.[9] 이스라엘 왕국과 유다 왕국의 사이는 좋았던 기간도 있었지만,[10] 대개는 나빴던 기간이 많았다. 초창기엔 허구한 날 싸웠고, 예후 왕조 시기에도 요아스와 아마샤가 벳 세메스에서 회전을 벌였다. 예후 왕조 이후의 혼란기 시절에 즉위한 베가가 아람-다마스쿠스 왕국과 연합해서 유다 왕국을 치기도 하였으나, 유다 왕국의 구원 요청에 응해 달려온 신아시리아 제국의 명군 티글라트-필레세르 3세에게 역관광당했다.
이스라엘 왕국은 10개 지파의 연합체였기 때문에 과거 판관들처럼 지파별로 돌아가면서 왕이 선택되었다. 따라서 왕가의 힘은 귀족들의 견제 때문에 약했으며, 제사장 지파였던 레위 지파가 오히려 왕보다도 막강했다.[11] 그래서 왕이 10지파를 대표할 자격이 없거나 의심되면 쿠데타도 손쉽게 벌어졌고, 실제로 8번이나 왕가가 바뀌었다.[12][13] 반면 유다 왕국은 유다 지파만의 왕국이나 다름없어서[14] 다윗의 언약을 명분으로 왕권 강화와 세습을 이어갔다.
이 시기쯤에 히브리인의 종교 역시도 격변하는데, 주변의 다신교 주민들과 교류하고 병존하며 다소 느슨하게 유일신 개념을 믿던[15] 히브리인들은 이 시기를 겪으며 우리가 아는 모습에 한층 더 가까워진다. 하지만 이는 유다 왕국의 이야기이고 이스라엘 왕국에게는 야훼 신앙에 근거한 정통성이 없었기에 여로보암 1세는 금송아지 숭배를 시작했고 이후로도 금송아지 숭배 등 다른 신앙을 가졌으며, 심지어 오므리 왕조의 경우 이민족 신인 바알을 숭배하기도 했으며 유다 왕국에서도 잠깐이지만 이민족 신을 믿기도 했다. 그나마 예후 왕조 정도가 이민족 신을 숭배하는 것이 없었던 것 정도 물론 정통 야훼 신앙을 간직한 이가 없는 건 아닌지 북이스라엘에서도 선지자들이 나왔다. 엘리야, 엘리사 등이 북이스라엘 출신.
국력은 북이스라엘 왕국이 남유다 왕국보다 압도적으로 강하였다. 초기에는 잦은 왕조 교체로 남유다에게 패배하기도 하는 등 영 좋지 않은 모습을 보였지만 오므리가 오므리 왕조를 연 후 나라가 안정되기 시작했고 아합은 페니키아 공주 이제벨과 혼인하고, 딸 아달리야를 유다 왕비로 시집 보내는 등 페니키아, 아람, 유다를 연합한 맹주가 되어[16] 신아시리아 제국의 침공을 물리치기도 했다.[17][18] 허나 종교적으로 아합이 들인 바알 신앙과 기존의 야훼 신앙이 대립하는 등 혼선이 있던 시기이기도 하다.
이후 들어선 예후 왕조 시기에 이르러 바알 신앙은 완전히 뿌리 뽑히지만 여로보암 1세 시절부터 이어진 금송아지 숭배는 뽑히지 않았다. 그렇지만 예후 왕조의 여로보암 2세 시기는 북이스라엘 초기에 맞먹는 영토를 이루는 등 나름대로 전성기를 구축했다.
그러나 여로보암 2세 사후 나라는 기울기 시작하여 왕위를 이어받은 즈가리야가 반년만에 살해당해 예후 왕조는 멸망했고 이후 멸망할 때 까지 30년 동안 4개 왕조 5명의 군주가 즉위하는 초기에 맞먹는 대혼란에 빠진다. 특히 베가 왕조 시기, 대부분의 땅이 아시리아의 손에 넘어가[19] 북이스라엘은 큰 타격을 받았다.
결국 호세아 시기에 신아시리아 제국의 침공으로 3년간의 사마리아에서의 공성전에서 패배하여 멸망하고, 왕족과 귀족을 포함한 적지 않은 백성이 살해당하거나 아시리아가 당시에 훗날 페르시아를 건국하게 될 이란계 야만족들을 격파하고 새로 얻은 영토였던 메소포타미아 동부로 끌려가 사민되었다. 이에 반해 유다 왕국은 친아시리아 정책을 펼쳐서 아시리아로부터의 화를 피할 수 있었다.[20] 북이스라엘 왕국에 남은 유민들 중 아이러니하게도 상대적으로 유다에 가까웠던 사마리아 근처 이스라엘인들은 사마리아인으로 불리게 된 반면, 그보다 북쪽 갈릴리, 즉 옛 분리 이스라엘 왕국 북부 이스라엘인들은 유다의 동화 정책에 상당히 순응한 데다 유다인들이 그 일대로 많이 이주하게 된 탓에 정체성 자체는 유다인들과 동일해지게 된다.[21]
한편 운 나쁘게 메소포타미아 동부로 끌려가 식민된 소위 말하는 이스라엘 열 지파의 운명에 대해 더 알아보면, 얼마 못 가 이란계 야만 부족들이 이를 갈고 앗시리아를 쳐들어와 맹공을 가했기에 아시리아는 정작 이스라엘 열 지파를 식민했던 지역을 포기하고 국경선을 서쪽으로 되물린다. 이후로 그 지역에 살던 이스라엘 유민들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일부는 후퇴하는 앗시리아를 따라 서쪽으로 피난가거나, 이란계 부족들의 맹공과 약탈에 살해당하거나, 그대로 남아 이란인들에게 동화되었다고 추측할 뿐. 어느 경우든 이들이 이스라엘인으로서 정체성을 잃고 현지에 동화되었을 가능성은 높다고 보인다. 이들이 멀리 동방으로 떠났다는 전설도 있는데 잃어버린 10지파 항목 참조.
4. 역대 국왕
자세한 내용은 이스라엘 왕국/역대 국왕 문서 참고하십시오.5. 기타
구약성경으로 인해 범 세계적인 인지도를 가진 왕국이지만 대중매체에서는 성경과 관련된 작품외에는 거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이상한 특징을 가지고있는데 이는 성경이라는 경전을 통해 높은 인지도를 얻은지라 너무나 강한 종교적 색채로 인한 거부감으로 보인다.[1] 유다 왕국 멸망기준으로 보면 기원전 586년이 된다.[2] 분열 이후[3] 종교지도자(대제사장)과 왕을 겸임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종교적 원리에 의해서 통치된 국가였다.[4] 입헌군주제라는 분석도 있으나 근대적 헌법에 의해 통치한 것은 아니다. 율법에 의하여 왕의 권력이 제한된 것이다.[5] 초대[6] 다윗 왕조 시작[7] 분열시대 시작[8] 아래에 나올 아합이 페니키아, 아람, 남유다와 연합해 아시리아와 싸운 전투로 이 전투로 아시리아의 레반트 진출의 꿈이 좌절되었으나 하필 아합 사후 얼마 못 가 아합 왕가는 멸망하고 이후 들어선 예후 왕조가 주변국과 적대 관계가 되자 끌어들여 기껏 미뤄졌던 아시리아의 레반트 진출 시기가 앞당겨졌다. 실제로도 아합 시절에 비하면 예후 왕조 시절은 주변국과의 관계가 썰렁하기만 하다. 그나마도 예후 왕조 시절엔 나라라도 제대로 유지되었지 예후 왕조 이후에는 주변 사정도 안 좋은데 나라 꼴도 엉망진창이 된다.[9] 사실 이 두 나라가 처참한 약소국이라기보다는 그냥 주변국과 비등비등한 그런 국가 수준이라고 보는 게 더 맞을지도 모른다. 일단 성경의 기록을 신뢰하고 본다면 주변국에 비하면 두 나라가 지나치게 약소국인 것은 아니다. 이집트, 아시리아, 신바빌로니아 같은 나라와 비교하면 지나치게 약소국인 게 맞지만 바로 국경을 접하고 있는 필리스티아, 에돔, 모압, 암몬, 아람 등과 비교해보면 이들을 단기간 복속한 기록은 있을지언정 적어도 이들에게 복속당한 기록은 없다. 판관기에서는 몇 번씩 단기간 복속되곤 했던 것과는 차이점.[10] 이 경우는 오므리 왕조 시기로 이 때는 결혼 동맹 때문인지 사이가 좋았다. 그러나 이것도 현대의 연구로는 이스라엘 왕국이 갑이고 유다 왕국이 을인 관계지 동등한 관계는 아니었을 거라고 추정한다.[11] 북이스라엘의 왕들이 꾸준히 금송아지 숭배를 추진한 것 역시 이와 연관이 있다고 할 수 있다. 특히 페니키아계 도시인 시돈의 공주와 결혼한 아합은 아예 이방신인 바알 신앙을 도입하기도 했다.[12] 심지어 초기 시절인 여로보암 왕조와 바아사 왕조의 경우 초대 왕(여로보암 1세, 바아사)이 죽고 얼마 안 가서 무너졌다. 시므리 왕조는 아예 시므리가 7일 만에 비명에 가 최단명 수준으로 무너졌을 정도, 이 때문에 초기에는 오히려 유다 왕국이 더 안정적인 편이기도 했다. 그나마 오므리 왕조와 예후 왕조가 오래가고 안정되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그 이후로는 말짱 도루묵... 심지어 앞서 말한 시므리 왕조, 살룸 왕조, 베가 왕조, 호세아 왕조처럼 1대로 끝난 왕조도 있다. 특히 시므리 왕조 빼곤 전부 말기에 존속했다. 즉 말기로 갈수록 나라 꼴이 엉망이 되었다는 것. 심지어 즉위 3년 내에 시해된 왕도 수두룩하다.[13] 성경에서는 이 부분에 대해서 "이게 다 하느님 제대로 믿지 않아서다!"로 넘어가는 경향이 있는 듯한데 예를 들면 금송아지 숭배를 시작한 여로보암 1세에 대해서는 그 죄악으로 아들이 죽고 집안도 멸문당했다고 설명하고, 바알 신앙을 받아들인 아합의 경우 그의 오므리 왕가를 멸한 예후가 장군 시절에 기름 부음을 받으며 오므리 왕가와 바알 숭배를 없앨 것을 명령받았으며 그 덕에 예후 왕가가 예후 다음으로 4대까지 가게 되었다고 설명한다. 단 그렇다고 쳐도 북이스라엘은 존속 기간 내내 금송아지 숭배를 유지했기에 우상 숭배와는 관련이 없는 듯하지만 바알 숭배와는 관련이 있을지도 모르는데 이미 아합 시절에 선지자 엘리야와의 대결에서 패했을 때 엘리야가 군중들을 동원해 바알의 사제들을 제거한 바 있기 때문.[14] 이스라엘의 초대 왕이자 베냐민 지파 출신인 사울도 자신은 보잘것없는 족속 출신이라고 왕이 되길 두려워했으며, 베냐민 지파는 12지파 사이의 내분으로 인해 멸망 직전까지 가는 등 상당한 약소 지파였다. 그리고 이 베냐민 지파가 유다 지파와 함께 유다 왕국을 구성했다. 물론 시므온 지파도 유다 지파와 반절쯤 함께 있긴 했는데 이쪽은 판관기 시점에서 많이 동화된 상태였다.[15] 다소 느슨하다고는 했지만 나름 부패한 상태였다. 제사장들이 성경 작성자와 선지자들에게 까일 정도였고, 성소 안에서 금지된 행위를 일삼은 적도 있었다. 그리고 '다소 느슨한 유일신 개념'조차도 희미해서 가령 야훼를 주신으로 하는 다신교 신앙을 믿거나 아니면 유일신인데 그게 야훼는 아닌 그런 신앙을 믿는 등 참 복잡했다. 애초에 이스라엘 땅이 지금도 그렇지만 당대에도 여러 이들이 복합적으로 얽혀있고 그만큼 신도 종교도 엄청 다양했다.[16] 다만 이는 임시적이고 아람과는 다시 사이가 나빠져서 결국 아람과 벌인 길르앗 라못 전투에서 전사한다.[17] 이 일은 큰 의미를 갖는데 아시리아의 레반트 진출을 1세기 동안 늦췄다고 평가받기 때문, 그러나 예후의 역성혁명으로 주변국이 적대 관계로 돌아서자 아시리아에 도움을 요청해 다시 말짱 도루묵...[18] 심지어 아합 시절에 아달리야를 유다 왕비로 보낸 것으로 인해 이스라엘과 유다 모두 사실상 오므리 왕조의 지배에 들어간다. 허나 북이스라엘은 아합 사후 2대 12년 만에 예후의 쿠데타로 이스라엘은 아딜리야가 다윗 왕조의 반격으로 오므리 왕조가 멸망한다. 다만 그 잔재는 계속 남았는데 아합의 딸, 아달리야가 유다의 여왕이 되었고 이후 아달리야가 폐위당하고 왕위에 오른 요아스는 아달리야의 외손자였기에 모계 혈통으로나마 오므리 왕조의 혈통은 다윗 왕조에서 살아남는다.[19] 성경에는 르우벤, 므낫세, 갓 지파의 영역이 아시리아의 손에 넘어갔다고 말하는데 그럼 남은 땅은 사실상 에브라임, 단 지파의 땅 뿐으로 과장 보태면 남유다 왕국의 영토에 변화가 없었다면 남유다 왕국 절반 정도 되는 영토로 축소되었다는 얘기다. 예후 왕조 초기에도 많이 털려서 영토가 크게 축소되긴 해서 이런 일이 없던 것만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그 때는 힘만 좀 기르면 회복할 역량은 있었다. 실제로도 예후 왕조 초기가 딱 이 꼴이었다가 여로보암 2세 시절에 건국 시절에 맞먹는 영역을 회복했다. 근데 그게 도로아미타불이 된 것.[20] 다만 유다 왕국이라고 피해가 없었던 건 아니었는데 히즈키야 시대에 선택지를 잘못 골라 아시리아의 센나케리브에게 죽도록 두들겨 맞았다(엄청난 공물을 바치고 땅도 대거 뜯겼으며, 전 국토가 약탈과 살육으로 쑥대밭이 되었다). 그래도 이건 최악은 아니었던 것이 다른 나라들은 죽도록 두들겨 맞는 게 아니라 그냥 죽었다. 북이스라엘 왕국도 이 테크를 따라 망했다. 그나마 다음 왕인 므나쎄가 현실주의적 관점을 견지하여 통치했기에 살아남은 것.[21] 물론 촌구석 사람들이란 비아냥은 받았으돼 사마리아인들마냥 혼혈인이라고 손가락질받진 않았다. 좀 못 사는 지역에 사는 같은 나라 사람들 취급이었다. 사실 그렇게 말하는 유대인들도 압몬, 모압, 에돔 등과 혼혈되었고, 사마리아인들의 혼혈과 이질성이란 측면 또한 유대인들이 상당히 부풀려서 악선전한 측면도 많았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