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2. 코시엔 역대최강 KK콤비3. 마쓰이 히데키 5연타석 고의사구 사건4. 기적의 백홈5. 연장 15회 승부, 보크로 끝나다6. 1998년 : 헤이세이의 괴물, 등장하다7. 끝내기 승리를 만든 한마디8. 칸제이 고교의 비극9. 2006년, 치벤 와카야마 vs. 테이쿄10. 손수건 왕자 vs. 마군11. 사가키타의 기적12. 죠스이칸 비에 울다13. 릿쇼다이 쇼난 고교의 투혼14. 히로시마 24이닝 혈전: 야마오카 vs. 타구치15. 2013년 치바 쇼타의 연속커트 논란16. 아버지와 아들이 함께 걸어간 로얄로드17. 기적과 복수18. 키요미야 코타로의 첫 여름 19. 친구와의 약속20. 일본 제일의 하극상21. 시골 농업고, 100번째 여름의 진정한 주인공22. 도호쿠의 비원, 그리고 성불23. 코로나19로 인한 2020년 대회 취소, 그리고 <그 여름을 돌려줘> 프로젝트
1. 개요
일본 고교야구 전국대회의 유명한 일화들을 기록한 문서.2. 코시엔 역대최강 KK콤비
구와타 마스미와 기요하라 카즈히로, 일명 KK콤비가 활약한 1983년-1985년의 오사카 PL학원고등학교는 고시엔 역대 최강이라 불린다. 이 콤비는 출전할 수 있는 5개의 대회(83년 여름, 84년 봄-여름, 85년 봄-여름)에서 모두 고시엔 본선에 진출하여 우승 2회, 준우승 2회, 4강 1회라는 말도 안 되는 업적을 남겼다.[1][2]1학년 첫 대회였던 83년 여름부터 구와타와 기요하라는 에이스와 4번타자 자리를 획득했는데[3], 이 역사적인 콤비가 결성된 과정도 나름 극적이었다. 기요하라는 처음부터 엘리트로 대접받았지만 체구가 작았던 구와타는 신입생들 중에서도 뒷전이었고, 결국은 주전자 담당으로 취급받으며 투수를 때려칠까 말까 고민하던 상황이었다. 하지만 팀의 투수코치가 우연히 구와타의 가능성에 주목했고 감독에게 우기다시피 하여 그를 기용하게 했다. 이에 경악한 선배들이 네놈 때문에 우리의 여름이 끝장나게 생겼다며 구와타에게 린치를 가했지만, 그는 굴하지 않고 오사카 지역예선의 선발 첫 경기에서 완봉을 거두며 실력을 증명해 보였다.
이후 이 KK 콤비는 팀을 이끌면서 고시엔 예선 최고의 격전구 중 하나로 꼽히는 오사카 지역 예선을 통과하는 대 파란을 이뤄낸다.[4] 그리고 여름 고시엔 본선, 구와타는 당시 2개 대회(82 여름 - 83 봄)를 연속 제패하고 3연속 우승을 노리던 당대 최강, 일명 "메아리 타선"의 이케다 고교(池田, 도쿠시마)를 4강에서 7-0으로 셧아웃시키며 전국을 충격에 몰아넣었고[5] 결승에서도 최고의 격전구인 카나가와현 대표로 올라온 요코하마 상업고교를 제압하며 우승을 차지했다. 그리고 기요하라는 결승전에서 우월 홈런을 치며 승부를 결정지었다.
좌측이 기요하라, 오른쪽이 구와타
그러나 2학년 대회에서 KK 콤비는 웃을 수 없었다. 봄-여름 모두 결승까지 갔으나 준우승으로 돌아서야 했던 것. 봄에는 도쿄에서 올라온 이와쿠라 고교에게 8회말에 1실점하고 그게 결승점이 되어 1-0으로 패했다. 여름 대회는 더 극적이었는데, 무명 공립교이던 도리데 제2고교(이바라키)에게 연장 끝에 구와타가 KO당하면서 8-4로 졌던 경기라 충격이 컸다.[6]심지어 3학년 봄 대회는 결승전도 아닌, 4강에서 고치 현의 이노 상고에게 3-1로 패퇴하기까지 하여 콩라인에 드는가 싶었지만, KK 콤비는 마지막인 85년 여름 결승에서는 야마구치현의 우베 상고를 상대로 9말 4-3 사요나라 우승으로 자신들의 3년간 여름 대회만 2회 우승을 이뤄냈다. 이 경기에서 구와타가 리드를 허용할 때마다, PL 학원에는 기요하라가 있었다. 그는 동점포를 2번이나 쏘아올려 학교와 친우를 구해냈다. 특히 두 번째 동점 솔로포[7]로 3-3 균형을 맞췄을 때, 아사히 방송 캐스터가 외친 한 마디는 지금까지도 유명한 명언. 이 KK 콤비의 고시엔 5개 대회 통합 성적은 경악 그 자체. 투수 구와타는 20승 3패 방어율 1.55로, 20승은 통산 2위 기록에, 학제 개편 이후로는 1위 기록이며 타자 기요하라는 타율 .440에 13홈런, 구와타는 6홈런. 이게 역대 홈런 1, 2위다.[8][9][10]
3. 마쓰이 히데키 5연타석 고의사구 사건
마쓰이 히데키(세이료 고교[11], 3학년)는 1992년 여름 코시엔 2회전 vs. 메이토쿠 기주쿠[12] 전에서 메이토쿠 기주쿠 감독 마부치 시로에 의해 5연속 고의사구를 당했고 결국 팀은 한 점차로 졌다. 5번째 고의사구가 나올 때 해설자가 "승부하지 않습니다!!!!!!"라고 비명을 지른 것은 코시엔의 유명한 명대사(?) 중 하나.마지막 고의사구 장면에선 분노한 관중들이 3루측 내야석에서 온갖 쓰레기를 그라운드에 투척했고[13] 중계진도 메이토쿠 기주쿠를 맹비난했다. 경기 후에는 당시 고교야구연맹 회장이 '도가 지나쳤다'며 담화를 발표했고 메이토쿠 기주쿠 고교의 숙소 주변에는 야구팬들의 습격(...)을 우려해 경찰이 배치되어야 했다. 메이토쿠 기주쿠는 다음 시합에서 히로시마 공고에 8:0으로 대패하며 탈락. 경기가 끝난 이후 관객들은 "돌아가! 돌아가!"를 연호하며 야유를 쏟아냈다.[14]
경기가 끝난 후 인터뷰에서 마쓰이 히데키는 '상대의 작전에 대해서는 할 말 없습니다' 라고...하지만 이 사건이 워낙 임팩트가 컸던지 고교야구에 5연속 고의사구를 당할정도의 강타자가 있다라는 인식이 널리 퍼지게 됐고, 안그래도 유명하던 마쓰이는 완전히 전국구 선수가 되어버렸다.그래서 나온 말이 (고시엔에서 홈런을) 쳐서 유명해진 것이 키요하라, 안쳐서 유명해진 것이 마쓰이. 물론 마쓰이도 5연속 고의사구를 얻어낼 만큼 많이 때려내긴 했지만 그만큼 임팩트가 컸다는 소리.
나중에 그 5연속 고의사구를 내 준 당시 선발 투수 코노 카즈히로와 만나게 됐을 때 "날 전국구 유명인으로 만들어 줘서 고마워"라고 했다고 한다.
고교 시절의 마쓰이.
이 사건으로 메이토쿠 기주쿠 야구부와 마부치 시로 감독은 일본 고교야구에서 악역(ヒール) 취급을 받는다. 그리고 메이토쿠 기주쿠 야구부는 2005년 야구부원 간 폭력사건과 2006년에 한국 수학여행 절도사건을 일으키면서 이미지가 상당히 나빠진 상황.[16] 또한 이 5연속 고의사구 사건은 아사히 신문에서도 1992년 8월 17일 칼럼인 <소중한 것을 잊어버린 메이토쿠의 벤치>를 통해 신랄하게 깠으며[17] 스포츠신문 1면이 이 사건으로 대서특필되는 등 사회에 상당한 논란거리를 가져다 준 사건.
4. 기적의 백홈
자세한 내용은 1996년 일본 전국고등학교야구선수권대회/결승전 문서 참고하십시오.고시엔 100년 역사상 최고의 명장면.
5. 연장 15회 승부, 보크로 끝나다
1998년 여름 대회는 마쓰자카 다이스케[18]가 홀로 무쌍을 찍는 맹활약을 펼치며 팀을 우승으로 이끈 대회로 유명하지만, 이외에도 여러 진풍경이 나왔는데, 고시엔 역사 상 최초의 끝내기 보크 그 중 하나이다.8월 16일 열린 고시엔 2회전 야마구치 현 대표 우베상업고교와 아이치 현 대표의 도요타오타니고교의 경기는 9회말 도요타오타니고교가 2:1로 끌려가는 상황에서 아웃카운트를 1개를 남기고 극적으로 동점을 만들며 15회까지 가는 접전 속에 2:2로 팽팽한 균형을 유지하고 있었다.
15회말 도요타오타니고교의 공격, 우베상고의 에이스 후지타 슈헤이는 도요타오타니의 타선을 상대로 연속안타를 허용하며 주자 1,3루의 위기를 맞은 뒤, 다음타자를 고의사구로 거르며 무사만루 상황에서 승부를 하기로 결정한다.
그리고 이어진 무사만루 상황, 포수와 싸인을 주고받은 뒤 셋포지션에 들어가려던 후지타는 어째서인지 잠시 머뭇거리다 다시 셋포지션을 풀었고, 후지타가 자세를 푼 순간, 주심이 보크를 선언하며 3루 주자가 홈에 들어오며 도요타오타니고교가 3:2로 역전, 그대로 경기가 끝나버리고 만다. 당연히 관중들의 반응은 충격과 공포 그 자체. 이는 고시엔 역사상 최초로 나온 끝내기 보크였고, 우베상고는 이 보크 하나로 인해 어이없이 짐을 싸야했다. 끝내기 보크로 우베 상고를 이긴 도요타오타니고교는 3회전에서 1997년 여름 고시엔 우승팀인 치벤와카야마 고교(와카야마현)를 꺾는 이변을 일으켰고 8강에서는 하마다 고교(시마네현)마저 끝내기로 이기면서 준결승까지 갔으나 교토세이쇼 고교한테 패하며 탈락했다.
이런 사상 초유의 상황이 벌어진 이후, 당연히 사람들은 왜 후지타가 셋포지션에 들어갔다가 다시 자세를 풀었는가에 대하여 의문을 제기했는데, 나중에 알려진 바에 의하면 우베상고의 포수는 사인이 간파되고 있음을 파악하고 경기가 끝나기 직전 싸인을 변경하였는데, 무사만루 상황 당시 후지타가 포수에게 요구한 싸인이 변경되기 이전의 싸인임을 알고 무의식적으로 다시 싸인을 보내려다 자세가 풀려진 것이라고 한다.
또한 이 끝내기 보크의 당사자, 후지타 슈헤이는 15회까지 210구를 던지는 동안 단 2실점 밖에 허용하지 않는 초인적인 모습을 보여주었으나, 이 행동 하나로 패전투수를 뒤집어쓸 수 밖에 없었다. 후지타는 이듬해인 1999년, 3학년에 다시 한번 고시엔 무대에 도전하지만, 우베상고는 예선에서 탈락하고 만다. 여담으로 우베 상고는 2년 뒤인 2001년에 고시엔을 가게 되었다. 도요타오타니 고교는 번번히 예선에서 탈락하다가 2006년에 마침내 현 대회 결승까지 갔으나 아이치공대 부속 메이덴 고교한테 0:9로 완패를 당하면서 고시엔 진출에 실패했고 2006년을 끝으로 2007년부터 올해까지 15년 동안 현 대회 결승도 못 가보고 예선에서 광탈했다.
6. 1998년 : 헤이세이의 괴물, 등장하다
마쓰자카 다이스케를 앞세운 카나가와의 명문 요코하마 고교는 1998년 봄 센바츠를 우승하고 이어 여름 고시엔에도 출전한다. 이 봄-여름 대회를 걸친 1998년 마쓰자카의 활약은 선수 개인으로서는 역대 최고의 퍼포먼스 중 하나라고 불린다.8강전 vs. PL학원[19] : 17회 완투승 (투구수가 250개가 넘었다!) [20] 해당 경기는 아사히 신문에서 진행한 최고의 고시엔 경기 투표에서 1위로 선정되었다.
다음날(!) 벌어진 4강전 vs. 메이토쿠기쥬쿠 고교 : 마쓰자카는 좌익수로 선발 출전, 요코하마 고교는 메이토쿠 기쥬쿠에게 8회초까지 0:6으로 압도당하고 있었으나 8회말에 마쓰자카의 2타점 적시타를 포함해[21] 4득점, 4:6으로 따라잡는다. 그리고 마쓰자카가 9회초에 등판해[22] 15구로(삼진-볼넷-병살타)1이닝을 막아내고, 9회말 마지막 공격에서 무사 만루 → 2타점 동점 적시타 → 마쓰자카의 희생번트 → 이어진 2사 만루에서 끝내기 안타로 극적인 역전승을 거둔다.
또 그 다음날(!!)의 결승전 vs. 교토 세이쇼 : 마쓰자카는 노히트 노런을 기록하며 팀을 고시엔 우승으로 이끈다.[23]
요약하자면 고작 사흘동안 하루도 쉬지 않고 3경기 27이닝을 던지며 17회 완투승 → 구원승 → 노히트노런을 거둔 초인적인 역투였다. 그런데 더 놀라운 점은 이렇게 혹사당하고선 프로가서도 엄청난 이닝이터였다.
결승전에서 노히트노런을 거두고 환호하는 마쓰자카. 그리고 마쓰자카 세대는 2000년대의 프로야구를 이끄는 주역이 된다.
7. 끝내기 승리를 만든 한마디
1999년, 1980년 진출 이후 19년만에 여름 고시엔에 진출한 오카야마 현 대표 오카야마이과대학 부속 고등학교는 개교 이래 2번째 진출한 고시엔을 맞아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100kg이 넘는 거포 모리타 카즈야를 중심으로 강력한 타선을 구축한 오카야마이대부속고교는 1회전에 후쿠시마 현 대표 가쿠호 이시카와 고교를 상대로 승리를 거둔 것을 시작으로 3회전에서는 당해 봄 고시엔 준우승 팀 미토 상고를, 8강전에서는 효고 현 대표 타키가와 제2고교를 꺾으며 준결승까지 진출, 재작년 우승팀인 와카야마 현 대표 치벤 와카야마 고교와 맞붙게 되었다.8월 20일 펼쳐진 준결승전, 6회까지 1:4로 끌려가고 있던 오카야마이대부속고교는 7회말 주장 모리키타 신고의 2타점 적시타로 3:4까지 추격한다.
그러나 8회초, 오카야마이대부속에게 불길한 일이 발생한다. 주축선수 중 한 명인 1루수 바바 마사오가 1루 수비도중 타자주자의 스파이크에 왼발이 밟혀 피가 날 정도의 부상을 입은 것. 바바 본인은 감독에게 아직 뛸 수 있다며 교체를 거부한 채로 계속 경기에 임했으나 부상은 생각보다 심각했는지 이어진 8회 말, 바바는 발 부상으로 인해 자신의 타석에서 맥없이 초구 내야플라이로 물러나게된다.
이러한 바바의 플레이를 보고 화가 난 주장 모리키타는 바바에게 화를 내게 되는데, 이때 모리키타가 한 말 한마디가 이 극적인 승리의 발단이 되었다.
痛いんやったら、代えてもらえや
"아프면 바꿔달라고 하라고''
"아프면 바꿔달라고 하라고''
바바 본인의 인터뷰에 의하면, 모리키타의 일갈을 듣기 전까지 이전까지 발의 부상이 계속 신경쓰이다가 이 말을 듣고 난 뒤 마음을 다시 다잡게 되었다고 한다.
이어진 9회말, 오카야마이대부속고교는 아웃카운트를 하나를 남기고 주자 1,3루의 기회를 맞고, 타석에는 운명의 장난처럼 바바가 들어서게 된다. 그리고 바바는 2구째 들어오는 직구를 받아치며 좌중간 끝내기 2타점 적시타를 때려내었고, 바바는 1루까지 다리를 절뚝이며 뛰어가 동료들과 얼싸안았다. 주장의 일갈 한마디가 팀을 끝내기 승리로 이끈 나비 효과를 불러일으킨 셈.
그러나 이 경기에 모든 것을 쏟아부은 탓일까. 오카야마이대부속고교는 결승전에서 군마 현 대표 키류다이이치고교를 상대로 14:2로 대패하며 준우승에 머문다. 하지만 이 대회 오카야마이대부속고교의 준우승은 학교 최고 성적으로 남아있다.
8. 칸제이 고교의 비극
고시엔 역사상 가장 비극적인 학교로 불리는 2005년-2006년의 칸제이 고등학교(오카야마현)는 이 2년동안 네번의 고시엔에 출전, 네번 모두 최종이닝에 역전패하며 탈락한다.2005년 봄 고시엔: 칸제이 고교는 게이오 고등학교(카나가와)와의 1회전에서 접전끝에 9회말 굿바이로 7:8 역전패한다. 여기까지는 가슴아프긴 해도 고시엔이라면 흔히 일어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비극은 고작 시작에 불과했으니.......
2005년 여름 고시엔: 칸제이 고교는 교토외대니시고(교토)와의 2회전에서 2회부터 롱릴리프로 투입된 2학년 다스 로마슈 타스쿠의 혼신의 피칭과 타선의 갑작스런 폭발로 8회에는 10:4로 리드하고 있었다. 그러나 다스가 갑자기 무너지며 교토외대니시고에게 8회초와 9회초 공격에서 무려 8점을 허용하며 10:12로 역전패했다. 경기가 끝나고 선배들을 껴안고 통곡하며 사죄하던 다스의 모습은 2005년 고시엔에서 가장 오래 기억되는 장면 중 하나.
2006년 봄 고시엔: 3학년이 되어 팀의 에이스 겸 부주장으로 승격된 다스. 봄 고시엔 2회전에서 훗날 손수건 왕자라 불릴 사이토 유키의 와세다 실업고교(서도쿄)와 격돌했다. 다스와 사이토의 피말리는 대결끝에 시합은 7:7, 연장 15회 무승부로 재시합이 결정되었다. 그리고 재시합, 재차 등판한 다스가 기백의 피칭으로 9회까지 3:2로 리드를 잡아냈다. 그러나, 최후의 9회 초 수비, 우익수의 실책으로 2점을 허용하며 3:4로 또다시 역전패했다!!
2006년 여름 고시엔: 다스의 마지막 여름, 강력한 우승후보로 꼽힌 칸제이 고교는 이번에야말로 한을 풀고야 말겠노라며 고시엔으로 향했다. 그리고 분세이 예대 부속고교(도치기)와의 1회전, 9회말 투아웃까지 10:7로 리드하는 다스와 칸제이 고교.
그러나 아웃카운트 하나 남기고, 갑자기 물밀듯이 터져나온 분세이예대 부속고 타선에 다스가 침몰당하며 10:11, 끝내기 안타로 역전패
마지막 안타가 외야에 떨어지는 순간 다리에 힘이 풀린 채 마운드로 쓰러지는 다스. 고시엔 항목 맨 위의 사진이 쓰러진 채 통곡하는 다스의 모습이다.
이후 아사히방송과의 인터뷰에서 다스는 "마운드에서 기도했다. 신님, 제발 부탁합니다. 아직 야구를 하고 싶다고요....." "왜 내게만 계속 이런 일이 생기는 걸까...... 하지만, 다시 태어날 수 있다면 한번 더 고등학교에서 지금의 동료들과 야구를 하고 싶다!"고 밝혀 수많은 사람들의 감동을 자아냈다.
칸제이 고교가 다스의 한을 푼 것은 5년이 지난 2011년 여름의 갑자원이었다. 칸제이 고교는 1회전에서 봄 고시엔 준우승팀이자 우승후보 1순위였던 큐슈국제대부속고교와의 대결에서 압도적 열세가 예상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연장 12회 혈투끝에 굿바이 안타로 2:1, 극적인 승리를 거두었고 이후에도 승승장구하며 4강까지 진출, 학교 역대 최고성적을 올렸다. 칸제이 고교는 4강에서 그 해 챔피언이 되는 니치다이산 고교[24]에 4-14로 대패했다.
다스는 졸업 이후 2006년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즈에 고교생 드래프트[25] 4순위 지명을 받아 프로에 데뷔했지만 그 후 5년간 2시합 등판, 0승 1패에 그친 채 2011년 방출되어 은퇴하였고, 현재는 다르빗슈 유 박물관의 관장으로 재임중이다.
9. 2006년, 치벤 와카야마 vs. 테이쿄
2006년 여름 고시엔 치벤 와카야마 고교 vs. 테이쿄 고교의 준준결승전에서는 사상 최대의 역전극이 일어난다. 테이쿄 고교는 9회초 투아웃까지 4-8로 밀리고 있었으나, 아웃카운트 하나 남기고 폭풍 8득점으로 12-8로 경기를 뒤집는다.테이쿄의 9회초 대공세
여기까지만 해도 극적인 역전극인데......절체절명에 몰린 치벤 와카야마가 곧바로 9회말에 5점을 몰아치며 13-12로 재역전승을 거둔다.
굿바이 승리에 환호하는 치벤 와카야마 선수들
아래는 테이쿄 고교 응원단의 표정 변화.
속수무책으로 밀리던 9회초
9회초 테이쿄의 대역전
이 "2006년 치벤 와카야마 vs. 테이쿄"는 일본에서 대역전승을 가리키는 일종의 고유명사가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치벤 와카야마는 준결승에서 다나카 마사히로의 토마코마이 고등학교를 만나 탈락한다. 그 다나카는 하술할 결승에서...)
10. 손수건 왕자 vs. 마군
사이토 유키(와세다 실업고교)와 다나카 마사히로(코마다이 토마코마이 고교)는 2006년 여름 고시엔 결승전에서 격돌, 15회동안 완투하는 초인적인 투수전을 펼쳤지만 경기는 1-1로 무승부, 재시합이 결정되었다. (고시엔에서는 15회를 채울 경우 재경기를 실시한다.)왼쪽이 사이토 유키(전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즈), 오른쪽이
바로 다음날 열린 결승전 재시합[26]에서 사이토와 다나카는 또다시 격돌, 9회까지 투수전을 벌였고 결국 사이토가 마지막 타자로 나온 다나카를 삼진처리하며 4-3, 2006 여름 고시엔은 와세다 실업고교의 우승으로 끝난다. 이 대회에서 사이토 유키는 7경기에서 무려 950개가 넘는 공을 던졌고, 이른바 "손수건 왕자"라 불리며 (경기 도중 흰 손수건으로 땀을 닦는 사이토의 모습은 전국적인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전국 최고의 스타로 급부상한다. 당시 사이토의 인기는 프로선수 그 누구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였다. 역사적으로도 당시 사이토의 인기에 비견할만한 선수로는 사이토의 고등학교 선배인 아라키 다이스케[27], 위에서 나온 PL학원의 KK 콤비[28] 정도밖에 없다.
결승전 당시 소프트뱅크 감독 오 사다하루는 위암으로 인해 감독직을 잠시 내려놓고 게이오기주쿠대학 병원[29]에서 수술을 받은 후 입원해있었다. 병원에서 15회까지 가는 결승전을 시청했으며 결승전 재경기 시각(1시)를 앞두고 미리 식사를 마친 뒤 열렬히 모교인 와세다 실업학교를 응원했다고 한다. 오 사다하루가 재학 당시 봄 고시엔 제패에는 성공했으나 여름 고시엔 제패가 없었던 와세다 실업학교는 사이토의 활약으로 비원의 첫V를 달성한다. 오 사다하루는 훗날 "와세다 실업고의 우승이 본인이 병마와 싸우는 데 큰 힘이 되었다"고 술회했다.
2006년 여름 일본을 지배한 사이토의 손수건 왕자 신드롬.
두 투수는 고시엔 이후 열린 가을 전국체전 결승전에서 재격돌하는데, 여기서 사이토의 와세다실업고교가 다나카의 코마다이 토마코마이 고교를 1:0으로 또 이긴다(...) 이 두 선수의 대결은 그야말로 전국민적인 관심을 불러일으켰고, 이 전국체전 결승전이 벌어진 경기장은 "손수건 기념 경기장(ハンカチメモリアルスタジアム)"으로 개명되었다.
러키☆스타 9화에도 2006 토리노 동계올림픽, 2006 NPB 잠시 이에 대한 언급이 나온다. 그만큼 대단한 사건이었다는 반증.
대단한 라이벌이었던 이 둘은 각각 대학진학과 프로입단을 택하게 되고, 이후 운명이 드라마틱하게 갈려버린 것으로도 유명해진다.[30]
11. 사가키타의 기적
자세한 내용은 2007년 일본 전국고등학교야구선수권대회/결승전 문서 참고하십시오.일개 공립학교가 고시엔에서 우승한 사건. 가장 위대한 우승이라 평가받고 있다.
12. 죠스이칸 비에 울다
2009년 여름 고시엔에서 히로시마 대표 죠스이칸[31] 고교는 코치현 대표 코치 고교와의 1회전에서 2승 1패로 탈락(?)한다.첫 시합, 죠스이칸이 2:0으로 리드하지만 3회 종료 후 비로 노게임 선언.
다음날 벌어진 재시합: 죠스이칸이 리드하지만 6:5로 리드하던 5회초 1아웃에 다시 비로 노게임 선언. 이 경기에서는 죠스이칸이 후공이었기 때문에 아웃 두개만 더 잡았으면 강우 콜드로 승리했을 상황이었다.
다음날 비가 그치며 간신히 성립된 세번째 시합: 여기서 9:3으로 패배하며 죠스이칸이 탈락한다. 2번 이기고 한번 졌지만 결국 패배한, 이른바 "죠스이칸 비에 울다" 사건.
그리고 이 죠스이칸 고교는 2011년 여름 고시엔에서도 사상 최초의 3시합 연속 연장전을 치르기도 한다. (그리고 3경기 전부 이겼다! 하지만 다음 시합에서 패하며 탈락) 이래저래 고생하는 것으로 유명한 학교. 참고로 죠스이칸을 8강에서 이긴 고등학교는 위에 언급된 칸제이 고교이다.
죠스이칸 고교 야구부
13. 릿쇼다이 쇼난 고교의 투혼
2009년 여름 고시엔에서 8강에 진출한 리쇼다이 쇼난 고등학교 야구부는 지난 수십년간의 고시엔에서도 가장 눈물겨운 투혼을 불태운 학교로 손꼽힌다.이 학교의 행보는 그야말로 눈물의 드라마와도 같았다.
- 2009년 여름 대회에서 학교 역사상 최초로 고시엔 출전 결정. (시마네현 대표)
- 41세의 나이에 심근경색으로 급서한 다나카 겐지 감독의 영정을 모시고 출전. 당시의 3학년은 이 감독이 지도한 마지막 제자들이었다.
- 대회 직전 인플루엔자가 팀을 강타. 컨디션 바닥까지 떨어짐.
- 첫 경기인 카료 고교(야마구치)와의 32강전에서 0-0의 격렬한 투수전을 벌이다가, 9회초 수비 1사 2루에서 얻어맞은 큼지막한 타구를 외야수의 기적적인 다이빙캐치로 막아내고 다음 타자를 1루수 땅볼로 잡으며 패배를 모면. 그리고 바로 다음 9회말 공격에서 굿바이 홈런으로 승리.
- 다음 2회전, 18명의 선수 중 주전 2명과 모든 구원투수 등 총 4명이 인플루엔자로 출전불가 판정. 투수는 에이스 한명밖에 남지 않음.
- 도쿄농업대학 제2고교(군마)와의 16강전에서도 경기 내내 밀리다가 8회에 3점을 몰아치는 극적인 역전극으로 4-2 신승.
- 마침내 올라온 8강전, 그해의 전국 준우승팀이 되는 초강호 니혼분리고교(니가타)와 대결을 앞두고 팀의 주장까지 인플루엔자로 출전불가 판정. 고작 13명만 남음.
- 초강호교를 상대로 엄청난 투지를 발휘, 6회에는 3-2로 역전까지 잡아냄.
8회말 수비에서 패배를 직감한 에이스 사키타가 눈물을 흘리며 공을 뿌리고, 수비를 간신히 마친 뒤 덕아웃에서 오열하면서 동료들을 응원하던 광경은 일본 전국의 심금을 울렸다.[32]
비록 8강에서 패배했지만, 리쇼다이 쇼난 고교 야구부는 전국적인 찬사를 받았으며 그 해 대회의 주인공 중 하나로 꼽혔다.
14. 히로시마 24이닝 혈전: 야마오카 vs. 타구치
2013년 여름 고시엔 히로시마 지역예선 결승전에서는 마치 만화와도 같던, 일본 고교야구 사상 가장 격렬했던 투수전 중 하나가 펼쳐진다. 지난 십수년간 히로시마는 2007년 사가키타에게 패해 준우승한 코료 고교와 "죠스이칸 비에 울다" 사건의 죠스이칸 고교가 고시엔 출전권을 독점해왔으나 그 두 강호는 각각 다른 다크호스들에게 패해 탈락한다. 그 장본인들은 코료를 꺾은 세토우치 고교의 에이스 야마오카 타이스케와 죠스이칸을 격파한 히로시마신죠 고교의 에이스 타구치 카즈토였다.좌측이 야마오카, 우측이 타구치. 이 두 에이스는 히로시마의 지배자들이었던 코료와 죠스이칸을 각각 9이닝 2실점으로 압살한다.
이 두 에이스가 이끄는 다크호스들이 고시엔 진출권을 둘러싸고 격돌한 결승전은 그야말로 처절한 투수전이었는데, 두 투수가 완투하는 가운데 무려 15이닝동안 양 팀 아무도 점수를 내지 못했다! 결국 0:0 무승부로 재시합이 선언된다. 특히 야마오카는 9회 1사까지 노히트, 15이닝을 1안타 15삼진으로 봉쇄하는 전설에나 남을 퍼포먼스를 선보였다.
▲히로시마대회 결승 (연장15回 무승부)
그리고 이틀 뒤 벌어진 재시합, 또다시 0의 행진이 시작된다. 두 에이스는 또다시 완벽하게 상대 타선을 틀어막았고 8이닝이 지나도록 점수가 나지 않았다. 하지만 8회말, 세토우치 타선이 마침내 1점을 뽑아냈고 이은 9회초 공격에서 야마오카가 히로시마신죠 타선을 막아내며 일본 전국의 관심을 불러모은 이 24이닝에 걸친 투수전은 1:0으로 마침내 막을 내린다.
▲히로시마대회 결승 (재시합)
2경기 24이닝, 총 47회의 공격기회동안 두 팀이 뽑아낸 점수는 세토우치의 마지막 공격에서 나온 단 1점에 불과했으며, 야마오카와 다구치 두 투수는 총 43개의 삼진을 잡아냈다. 그야말로 만화에나 나올 법한 투수전이었다.[33]
야마오카 타이스케: 24이닝 무실점 6피안타 21삼진
타구치 카즈토: 24이닝 1실점 18피안타 22삼진
야마오카의 세토우치 고교는 고시엔에 진출, 1회전에서 우승후보 메이토쿠 기쥬쿠 고교와 격돌, 0:2로 아깝게 패한다. 그러나 야마오카는 완투했으며, 6안타를 허용하는 와중에 9개의 삼진을 잡아냈고 자책점은 1점에 불과했다. 야마오카의 슬라이더는 이른바 "사라지는 마구"로 불리며 유명세를 구가했고, 그 해 전국 최강의 타선 중 하나로 불렸던 메이토쿠 기쥬쿠가 2점밖에 뽑아내지 못한 것은 이 경기가 유일했다.
고시엔 종료 뒤 열린 세계야구청소년 선수권 대회에서 야마오카와 타구치 모두 일본대표팀에 선발된다. 타구치는 이후 요미우리 자이언츠에 입단, 2017년 13승 4패 3.01의 성적을 올리며 팀의 에이스로 발돋움했다. 2017 아시아 프로야구 챔피언십 에서는 결승전 한국과의 경기에서 7이닝 3피안타 무사사구 삼진 6개를 기록하며 일본을 우승으로 이끌었다. 현재는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스로 트레이드되어 야쿠르트에서 활약하는 중. 사회인 야구 도쿄가스에 입단한 야마오카는 이후 오릭스 버팔로스에 2016년 NPB 신인드래프트 1라운드로 지명되었다.
그리고 이 둘은 두 번의 일본시리즈에서 다시 만나게 되는데, 2021년 일본시리즈에서는 타구치가 우승하고, 2022년 일본시리즈에서는 야마오카가 우승했다.
15. 2013년 치바 쇼타의 연속커트 논란
2013년 여름 고시엔에서 하나마키히가시 고교의 2번타자 치바 쇼타의 타법이 문제시된 사건. 신장이 156cm에 불과한 이 선수의 타법은 작은 키를 이용해 얼굴을 스트라이크존에 바짝 갖다 대고서 공을 바라본 뒤 가볍게 휘두른 배트를 공에 맞춰 파울을 얻어내는 것이었다. 이런 식으로 볼넷이 될 때까지 계속해서 파울을 쳐댔고, 그 결과 고시엔 준준결승까지의 스탯은 7할 타율에 출루율 8할. 게다가 완전히 투수를 소모시키는 전략인지라 투수들이 한 시합에서 이 선수 한 명에게 던지는 투구수가 40개에 달할 정도였다.[34]결국 '의도적으로 파울을 치는 타법은 그 동작에 따라 심판이 번트로 판정할 수 있다'는 일본 고교야구 규정에 의거해 치바 쇼타는 준결승에서 심판진에게 '이 타법으로 계속해서 파울을 칠 경우 3번트 실패로 간주한다'라는 통보를 받게 된다. 그리고 치바 쇼타는 준결승에서 하나의 안타도 치지 못한 채 출루하지 못했고, 팀도 미야자키현의 노베오카가쿠엔고교한테 0:2로 패했다.[35] 게다가 이 선수 뿐만이 아니고 이 팀 자체가 준준결승 당시 2루에 진루한 상황에서 포수의 사인을 보고 타자에게 제스쳐로 알리는 이른바 '사인 훔치기' 의혹으로 주심에게 주의를 받기도 했다. 결국 '비겁한 야구', '더러운 야구'라는 비난과 '단순히 기술일 뿐' '신체조건에서 밀리는 선수의 근성있는 야구' '8강까지는 아무런 문제제기도 없다가 준결승 직전에야 지적하는 것은 연맹의 횡포'라는 의견 등 찬반양론이 갈렸다.[36] 특히 이미지가 좋을수가 없었던 게 사인 훔치기로 주의를 받은 바로 다음경기에서 지금까지 폭발하던 타선이 식어버리면서 영봉패해버리는 바람에 더더욱... 하지만 이러한 논란에도 불구하고 이 선수는 95회 고시엔 베스트 나인에 선정되었다.
"小さな巨人(작은 거인)" 치바 쇼타. 그의 야구는 근성인가, 계략인가?
현재는 니혼대학에 생산공학 전공으로 진학해 야구를 하고 있으며 2016년 전국체육대회, 메이지진구 야구대회에 출전하는 등 대학무대에서도 준수한 활약을 하고 있다. 타격폼을 보통의 폼으로 바꿔도 높은 출루율을 자랑한 건 덤. 2016년에는 닛폰 테레비의 <Going>에서도 커트타법으로 유명한 아카호시 노리히로에게 자신이 오래 연습해야 했던 커트 기술을 잘 쓰고 있다는 평을 듣기도 했다. 그러나 아카호시는 치바의 타격폼을 보고 타석에서 체중이 1루로 쏠려 있는 까닭에 강한 타구를 치기가 어려워서, 이것을 개선하는 것이 장기적으로 살아남기 위한 과제라고 지적했다. 이후 프로지명을 받지 못하고 향후 프로행을 위해 사회인야구 큐슈 미츠비시 자동차 팀에 입단했지만, 신장이 157cm로 지나치게 작아서[37] 사회인야구에서도 프로 지명이 힘들 것으로 예상되었고, 결국 3년간 미츠비시 자동차에서 뛰고 프로에 지명받지 못하자 25살의 나이로 현역 은퇴를 선언했다.[38] 이 선수가 조금 더 크긴 하지만 우리나라 기준으로 155cm가 안 되면 사지연장술이 국민건강보험 급여처리가 된다. 이게 뭔 뜻이냐면 적어도 한국에서 성인 남성이 155cm보다 작다면 장애나 질환으로 인정해주며 따라서 수술비와 병실료 등 치료비용의 90%를 지원해주겠다는 뜻이다.[허나]
프로야구 좀 본 팬들은 이게 대체 왜 문제인지 모를 수도 있다. 커트로 투수를 소모시키는 것은 프로야구에서는 훌륭한 전략의 하나로 타석당 투구수가 많은 타자는 칭찬을 받는다. 하지만 풀리그로 치러지는 프로야구 경기와 다르게 고시엔은 토너먼트 경기로 치러지고, 아직 신체의 성장이 진행 중인 고등학생들이 일정을 소화한다는 점에서 조금 다르게 생각해야 한다. 전국 도도부현에서 올라온 약 48+a 개의 팀들[40]이 맞붙는 고시엔 본선은 고시엔 구장을 비워주는 홈 팀 한신 타이거스의 입장도 있고 하니 보통은 3주, 아무리 늦어도 한 달 안에 대회가 끝나야한다.그렇기 때문에 개막일을 제외하면(개막일은 3경기) 하루에 4경기나 편성이 되고 아침 8시부터 경기가 시작되며 한국 고교야구 전국대회와는 달리 야간 경기가 없다.[41] 다음 경기를 위해 가능한 빨리 경기를 끝내야하기에 공수교대나 사사구때도 무조건 뛰어나가야 하고 진 팀은 주저앉아 울 시간도 없이 상대팀과 인사하고 경기장을 나가지만 그럼에도 다음 경기시간이 밀리는게 부지기수다. 게다가 한창 더울 8월에 아침부터 경기를 시작하는데 이러한 상황에서 당연히 이기기 위한 전략이라 하더라도 타자 한명이 고의적으로 몇 십개의 공을 커트하는 것은 시간을 잡아먹는 일이고 이는 경기진행에 차질을 줄수 있다고 볼 수 있다.물론 땡볕에 서있어야하는 수비팀과 관객들 역시 죽어나가는 일이다. 예선포함 약 한 달 동안 한여름 땡볕에서 경기를 치러야하는 선수들의 체력문제와 앞서 말한 한신의 입장, 빠른대회 진행 등 여러가지 상황을 고려했을때 이러한 몇 십개의 고의적인 커트는 논란이 될 수밖에 없다. 프로야구는 6개월간 거의 매일 경기를 치루긴해도 대부분 해가 질 때쯤 선선한 저녁시간에 치르고, 퍼시픽리그의 경우 4팀,센트럴리그는 2팀이 돔 구장을 쓰는 만큼 더위문제가 해결가능한 돔 경기를 치를 때도 많으면서 여러명의 투수를 운용해 한 시즌을 진행하는 만큼 한 투수만 죽어라 던지고 한 달안에 빨리 끝내야 하는 고시엔과는 이러한 커트전략이 당연히 비교하기가 힘든 문제이다. 물론 별말 없다가 갑자기 이를 문제삼아 금지시키는 것은 역시 이해가 안되는 부분이기도 하고, 근본적으로 이러한 살인적인 일정으로 진행되는 고시엔이 제일 큰 문제점이긴 하다.
결국 이 연속커트 사건 이후 본격적으로 일본프로야구에서 고교야구 선수들의 혹사 실태가 공론화되었다. 마츠이 히데키 5연타석 고의사구의 경우 선수가 지도자의 명령을 거부하기 어려운 수직적인 의사결정구조와 함께 팀 자체가 안 좋은 의미로 공론화되었으나[42] 치바 쇼타의 경우 온전히 선수 본인의 경기가 안 좋은 의미로 공론화된 희귀한 사례가 되었다.
16. 아버지와 아들이 함께 걸어간 로얄로드
2013년 여름 고시엔의 우승팀 마에바시 이쿠에이 고등학교(군마)는 감독인 아버지와 선수인 아들이 함께 전국제패를 일궈내며 일본 전역을 감동시켰다.감독인 아라이 나오키는 20년 가까이 야구부를 이끌어온 베테랑 감독. 야구부를 지도하는 아버지의 모습을 바라보며 커온 아들, 아라이 카이토는 초등학교 5학년 시절 "6년뒤의 나"라는 작문에서 "아버지의 학교에 들어가 아버지와 함께 고시엔에 진출, 전국제패를 이룩하겠습니다."라고 호언장담했다.
아라이 카이토의 초등학교 시절 작문. "고시엔에서 전국제패"
고시엔에서의 위닝볼을 아버지 아라이 나오키 감독에게 선물하는 아들 아라이 카이토
그리고 6년 뒤 고시엔, 아라이 카이토는 4번타자이자 주장으로 팀을 이끌었고 약체로 평가받던 마에바시 이쿠에이 고교는 전국의 강호들을 연파하며 파죽지세로 결승까지 진출한다. 그리고 아라이 카이토는 결승전에서 승리를 결정짓는 결승타를 쳐냈다.
그렇게 아라이 부자는 그 초등학교 5학년 꼬맹이의 장담대로 아버지와 아들이 함께 전국제패를 달성해냈고, 마에바시 이쿠에이 고교는 여름 고시엔 첫 진출에 우승이라는 대업을 이뤄낸다.
이후 아라이는 메이지 대학 상학부를 졸업하고 미츠비시 자동차 오카자키에서 근무하면서 해당 회사 기업팀에서 야구선수를 계속하고 있다.
17. 기적과 복수
2014년 여름 고시엔 지역예선 이시카와 현 대회 결승, 마쓰이 히데키의 모교인 세이료 고교는 코마츠 오오타니 고교와의 대결에서 9회까지 0:8로 압도당한다. 그러나 9회말...세이료가 9점을 뽑아내며 기적적인 역전승을 거둔다.
이 당시 세이료측 벤치는 완전한 패배 분위기였으나, 감독의 한마디가 전세를 역전시키는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그 한마디란 "올해 우리 학교의 슬로건은 반드시 웃는다(必笑) 아니었냐? 질 땐 지더라도 우리가 내건 슬로건 만은 끝까지 지켜내자"였고, 그 말을 들은 당시 에이스 이와시타 다이키 선수가[43] 마운드에서 포수와 함께 "야, 우리 즐기자" "그렇네, 즐겨보자"라는 대회를 나눈 후 이런 대역전극이 시작되었다.
9회 말 8점차의 상황에서 대타로 나선 선수부터 모든 선수들이 모두 웃으며 경기를 즐기려 하자, 오히려 코마츠 오오타니 고교의 선수들은 "쟤들 왜저래? 왜 이런 상황에서 웃을 수 있지?"라는 생각에 오히려 압도당하기 시작했고, 때마침 운 나쁘게도 에이스 야마시타 아몬이 다리에 경련이 오는 상황이 되어 2학년 후보투수였던 키무라 쿄시로로 바뀌게 되고 키무라가 고시엔 경기라는 중압감을 이기지 못하고 무너지면서 이런 기적의 역전극이 벌어지게 되었다고.
1년 후, 2015년 여름 고시엔 지역예선 이시카와 현 대회 준준결승, 역전극의 승자 세이료 고교와 코마츠 오오타니 고교가 재대결한다. 이번에는 세이료 고교가 우세, 9회까지 3:0으로 리드한다. 그러나 9회말...
이번에는 코마츠 오오타니가 4점을 뽑아내며 9회말 역전승, 통렬한 복수에 성공했다.
여기서 또 재미있는 상황이 발생하는데, 코마츠 오오타니 측의 선발은 바로 1년 전 중압감을 이기지 못하고 7점차(첫 1점은 에이스 야마시타가 내 줬다) 대역전패를 당했던 당시 2학년 투수였던 키무라 쿄시로[44]였는데(이 대회에선 3학년 에이스), 이 친구가 선배 야마시타 처럼 다리에 경련이 오는 바람에 1점을 내 준 상황에서 교체되어버려 후속 투수[45]가 실점을 하며 9회까지 3:0으로 끌려갔던 것.
게다가 동점 적시타를 낸 선수는 1년전의 대역전패를 보며 코마츠 오오타니의 분통함에 공감하여 입학한 1학년 선수가 대타로 나와 때려낸 것이라[46][47] 여러 의미에서(똑같은 상황에 끌려들어갔음에도 역전에 성공, 대역전패를 보며 함께 분개하며 코마츠 오오타니에 입학한 신입생이 자기 손으로 복수를 해 줬다는 점 등) 정말 통렬한 복수전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근데 코마츠 오오타니 고교는 이후 치러진 준결승에서 카나자와고교에게 6대3으로 패하여 저 해 코시엔에는 가지 못했다.
그리고 이 사건으로부터 10년 뒤인 2024년, 두 학교는 또 다시 결승에서 맞붙었다. 이번에도 코마츠 오오타니 고교가 9회까지 5대0으로 리드하고 있었고 9회 말을 잘 막아내며 10년만에 리벤지, 그리고 악몽에서 탈출하였다.[48]
여담으로 이 사건의 주역들은 대부분 프로에 가지 못했지만, 두 학교의 2014년 에이스 두 명은 모두 프로에 갔다. 먼저 세이료의 에이스 이와시타 다이키는 롯데의 선발투수로 정착하며 1군 레귤러가 되어 알 사람들은 다 아는 유명한 선수가 되었다. 그리고 코마츠 오오타니의 에이스였던 야마시타 아몬은 소프트뱅크에 육성선수 드래프트 3라운더로 입단했다. 하지만 1군 기록 없이 4년만에 방출. 이후 12구단 합동 트라이아웃를 거쳐 요미우리 자이언츠에 입단했으나 여기서도 1년만에 방출. 2021년 현재는 사회인야구 클럽팀에서 에이스로 활약중이다. 또한 2015년에 대역전극을 허용한 세이료의 선발 타니카와 코마는 이후 킨키대학으로 진학하여 타자로 전념한 후 현재는 사회인야구 토시바에서 뛰고 있다. 2019년에 드래프트에 참가했기 때문에 만약 또 도전한다면 2021 드래프트에 나올 예정.
18. 키요미야 코타로의 첫 여름
2015년의 여름 고시엔에서 가장 주목받았던 선수는 뭐니뭐니해도 서도쿄 대표[49][50] 와세다 실업 고교의 슈퍼 1년생 키요미야 코타로 (清宮幸太郎). 오 사다하루 (왕정치)와 사이토 유키[51]를 배출했고 도쿄 프리미엄까지 붙어서 일본인들에게 가장 사랑받는 고교 중 하나인 와세다 실업 고교, 거기에 1학년생이 괴물같은 포스를 낸다는 것만으로도 일본 전체가 떠들썩했다.[52] 전 럭비 일본 대표 출신인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천부적인 몸에다 어릴 적부터 럭비와 야구를 병행하며 파워까지 갖춘 그는 1학년생으로서 지역대회 타격 5할이라는 경이적인 성적으로 연일 스포츠 신문의 1면을 장식했다. 때로는 과하다 싶을 정도로.동도쿄 지역에서 간토이치(관동1)고교의 나이지리아 혼혈 선수인 오코에 루이가 지역대회 4할에 100미터 11초 주력[53]으로 관심을 받기도 했지만 역시나 일본인, 와세다, 도쿄 라는 매력적인 배경을 가지고 있는데다 성적까지 걸출하다보니 진작에 '제 2의 마쓰이'라는 식의 수사들이 붙기 시작했고 언론에서는 프로선수들에게도 부지런히 기요미야에 대한 코멘트를 받아왔다. 과도한 관심이 부담될만도 한데 인터뷰에서 자기는 그런 압박감이 오히려 동기 유발이 된다라며 1학년생 답지 않은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실제로 경기에서도 보면 1학년이라고 믿기지 않을 정도로 차갑고 냉정해 보인다.
처음 맞이하는 여름 고시엔 대회이고 1학년이 3번을 맡는다는 것도 중압감을 느낄만한데 1회전에서 1안타, 2회전에서 2안타를 치더니 결국 3회전에서 3안타 1홈런, 4회전에서도 홈런을 때리며 고시엔의 스포트라이트는 거의 혼자 다 받는 듯했다. 1학년이 고시엔 대회에서 2홈런을 친 것은 1983년 PL학원의 전설의 KK콤비 중 구와타 마스미(기요하라가 아닌 것도 이채롭다 ) [54] 이래로 32년만이다. 준결승은 서도쿄의 와세다 실업 고교와 동도쿄의 관동1고가 진출함으로써 도쿄 두 팀이 한꺼번에 4강에 올랐는데 (이것도 28년만의 기록)
경기 후 인터뷰에서도 고시엔에 데리고 와준 선배들에게 감사를 표하며 '다시 태어나서 야구를 또 하게 된다면 이 선배들과 하고 싶다' 라는 의젓한 멘트를 눈물을 흘리며 날리기도 했다. 타력에 비해서 투수력이 비교적 약하다는 평이었던 와세다 실업이기 때문에 격전지 중의 하나인 서도쿄에서 내년에도 살아남을 수 있을까 싶은 우려도 있지만[55] 기요미야의 포텐셜을 볼 때 벌써부터 프로팀들이 눈독을 들이는만큼 앞날이 기대되는 선수. 고시엔이 끝난 후에 세계 청소년 야구대회 일본 대표에 1학년으로는 유일하게 뽑히기도. [56]
2017년엔 주장을 맡아 준결승전에서 하치오지고교에게 승리하고 고교 통산 최다홈런 타이기록(107홈런)을 세웠지만, 결승전에서 도카이대 부속 스가오 고교에게 패하여 결국 고3 고시엔 진출은 좌절되었다. 대신 와세다대 계열 학교 중에선 사가현의 와세다사가고등학교가 개교 8년만에 처음으로 고시엔에 진출했으나 미야자키현 대표인 세이신우르술라고교에게 1회전에서 패하였다. 2017년 8월까지의 스포츠신문, 주간지 보도를 보면 기요미야 본인은 와세다대학에 진학할 것이 유력하지만 일부 언론에서는 사이토 유키의 사례를 들어 기요미야의 진학에 대해 상당히 우려를 표하고 있는 중. 그러나 와세다에서는 인간과학부 통신교육 과정도 있어서 도호쿠복지대 통신교육과정을 수강한 키쿠치 유세이의 사례처럼 학업과 프로생활을 병행할 수도 있다.
결국 2017년 9월 말경 기자회견을 통해 프로 진출을 선언했고,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즈에 입단하였다. 그리고 2018년 하반기부터 1군으로 콜업되었으며, 2022년 신조 츠요시 감독의 체중감량 지시를 이행한 이부터 본격적으로 활약하는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19. 친구와의 약속
2015년 고시엔 3회전 츄쿄대 부속 츄쿄고(中京大中京高) vs 칸토이치고[57](関東一高). 7회 우승으로 여름 고시엔 역대 최다 우승팀인 아이치현 대표 츄쿄대 부속 츄쿄고와 격전지의 벼랑에서 올라온 동도쿄 대표 칸토이치고. 츄쿄대 부속 츄쿄고의 에이스 우에노 쇼타로 [58]와 칸토이치고의 포수 스즈키 다이치[59]는 초등학교 6학년때 배터리를 이뤘던 친구 사이. 아이치 시니어에서도 같이 호흡을 맞추다가 고등학교 진학을 두고 우에노는 고향 아이치에 남은 반면, 스즈키는 도쿄로 야구 유학을 가서 칸토이치고에 입학. 둘은 나중에 고시엔에서 다시 만나자는 약속을 했는데 문제는 둘 다 1, 2학년 때는 학교 자체가 지역대회에서 밀려서 고시엔에 아예 나오지를 못한 것. 그러다가 두 사람이 3학년이 된 2015년, 나란히 출전하게 된 3회전에서 운명처럼 적으로 만나게 된다.
포수에 7번 타자로 나선 스즈키는 친구인 우에노에게 세 타석에서 좌익수 플라이, 루킹 삼진, 헛스윙 삼진을 당해 두 사람은 대결은 우에노의 압승. 7회 세번째 대결이 흥미로웠는데 11구까지 가는 접전, 스즈키가 계속 파울로 커트하자 두 사람이 배터박스와 마운드에서 서로 웃음짓는 모습으로 훈훈한 모습을 보이기도. 경기가 끝난 후 스즈키는 자기가 당한 삼진 중에서 가장 즐거웠다고.
그러나 경기는 9회 칸토이치고의 나가시마가 끝내기 홈런으로 1-0으로 승리.
우에노: 재밌었지?
스즈키: 지금까지 당한 삼진 중에서 제일 기분 좋았었데이
그런데 이 두 선수, 고교 졸업 후 같은 코마자와 대학으로 입학하면서 다시 한번 배터리를 이루게 되었다. 다만 고교 시절부터 프로 진출이 가능하다고 평가받은 우에노는 대학에서 큰 활약을 못 하고 사회인야구 기업팀 미츠비시에 입단했다. 또한 스즈키 다이치 역시 사회인야구 기업팀 오지홀딩스에 입단. 일단 둘 다 2021년 드래프트 참가 대상인데, 현재는 우에노만 어느 정도 가능성이 있어보이는 상황이다.
그러나 우에노도 지명을 받지 못하면서 둘 다 프로에 가지 못했다. 물론 우에노는 고교 시절부터 프로 가능성이 있다고 평가받은 만큼 한국 나이 27살이나 그 이후에 프로에 갈 가능성이 없지는 않지만..
20. 일본 제일의 하극상
2018년, 100번째 여름 대회에 미에현의 하쿠산 고등학교가 D급 학교 최초로 고시엔에 진출하며 엄청난 관심을 받았다.하쿠산고교가 위치한 하쿠산쵸는 주민이 1만여 명 밖에 거주하지 않는 곳이고 전철도 하루에 8회만 운행하는 깡촌이다. 이렇다 보니 하쿠산고교도 지역내 공립학교중 편차가 꼴찌였고 불량학생들이 대부분이었다. 2013년 다른 학교 야구부에서 불의의 사건 때문에 근신처분을 받고 전근 온 아즈마 타쿠지[60]가 부임하자 학교에서는 그에게 야구부를 키워달라고 요청하였다. 하지만 야구부원은 5명밖에 없었고, 제대로 된 야구장비도 없었다. 그래서 1년간은 야구연습은커녕 운동장 잡초 뽑기와 흙 다듬기 작업만 하였다.[61]
그리고 다음 해에 부임 후 첫 공식전을 가졌는데 이마저도 제대로 된 선수가 없어 감독의 인맥으로 다른 학교에서 선수를 빌려와 치렀고[62] 콜드패를 당하였다. 그러다 2015년 미에현의 최고 야구 명문인 츠상고에서 전국 각지에서 선수들을 스카우트하기 시작했고, 미에현 내 중학교 야구부 학생들이 츠상고에 진학하지 못하는 일이 벌어지게 된다. 이때 감독은 이들을 스카웃하게 되고 학교에서도 이때부터 적극적으로 야구부에 지원해주게 된다. 그리고 1년 뒤 지역 예선에서 3회전까지 진출하는 일이 벌어졌고, 이들이 3학년이 되던 2018년에는 지역예선에서 연거푸 이기며 결승까지 올라가더니 츠상고에 진학하지 못했던 하쿠산고교 야구부 학생들이 결승에서 츠상고를 꺾는 이변을 일으키며 고시엔에 진출하게 된다. 이렇게 되자 신문에서는 일본 제일의 하극상이라며 대서특필까지 하게 된다. 감독의 2년 선배인 우에하라 코지가 축하인사와 꽃다발을 학교에 전달했다. 이렇게 되자 고시엔 1회전 때 지역주민 1만 명 중 2천명이 관광버스를 대절해 일본 제일의 하극상이라고 적힌 흰색티를 입고 고시엔에서 응원을 펼쳤다. 1회전에서 0-10으로 패하고 말았지만 엄청난 관심을 받았다. 후에도 아직 고시엔 진출은 하지 못했지만 타지에서 야구 유학을 오고 현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는 등 야구부 육성에 신경을 쓰고 있다.
결국 2023년 10월 TBS에서 하극상 야구 소년 이라는 드라마가 제작 되어 방영 되었다.
21. 시골 농업고, 100번째 여름의 진정한 주인공
2018년, 100번째 여름 대회에 아키타 현 대표로 출전한 가나아시 농고는 아키타 내에서도 시골 변방에 위치한 공립 학교로 봄 3회, 여름 6회의 진출로 아키타현에서는 강호에 속했지만, 이 중 최고 성적이 1984년 여름에 거둔 4강 1회가 유일했을[63] 정도로 고시엔 본선에서는 별다른 두각을 드러내지 못하던, 그야말로 아무도 기대하지 않던 깡촌의 농업 고등학교에 불과했다. 그러나 대회가 시작되자 가나아시 농고는 이변에 이변을 연출해내며 대회의 주인공으로 급부상한다.8월 8일 1회전을 5대 1로 승리한 것을 시작으로, 14일 32강에서 오가키 니혼대부속 고교(시즈오카)을 6:3으로 잡고, 17일 16강에서 요코하마 고교(남 가나가와)[64]를 8회말에 터진 중월 역전 쓰리런포에 힘입어 5:4로 잡아내고 8강에 진출, 이변의 주인공으로 떠올랐다. 에이스 요시다 고세이는 이 3경기를 모두 완투승으로 장식했고, 각각 14K, 13K, 14K라는 초인적인 괴력투를 선보였으며,[65] 요코하마전에서는 4실점하긴 했으나 3회말 타석에서 직접 중월 동점 투런포까지 쏘아올리고 8회말에도 중전 안타로 역전의 발판을 놓은 것은 덤.
8강에서는 시가 현의 오미 고교에게 9회까지 2대 1로 끌려가다 9회말 무사 만루에서 9번타자 사이토가 스퀴즈 번트를 시전했다. 타구가 1루로 송구되는 사이 3루 주자에 이어 2루 주자까지 홈으로 들어와 세이프 판정을 받아냈다. 그렇게 가나아시 농고는 기습번트로 2점을 뽑아내는 진풍경을 만들어내며 끝내기 역전승으로 4강에 진출했다. 하루 쉬고 열린 4강, 요시다는 134구 1실점 완투승으로 니치다이산[66]을 2:1로 꺾으며 고교야구 팬들에게 그야말로 충격과 공포의 업셋을 보여주고 가나아시 농고를 여름의 가장 높은 무대로 이끌었다.
이로써 가나아시 농고는 개교 이래 최초로 결승전에 진출하며 최고성적을 경신함과 동시에 여러 기록들을 써내려갔다. 먼저 아키타 현이 결승에 진출한 것은 무려 103년만이었다.
8월 21일의 결승전, 이전까지 5경기를 완투하며 도합 749구를 던진 요시다는 힘이 다한 탓인지 토인의 핵타선에 난타당하며 5이닝 12실점으로 완전 붕괴되었다. 그렇게 오사카 토인 고교는 13-2 압승으로 2018년 여름 대회까지 우승, 고교 야구 사상 최초 봄-여름 동시 우승을 2회나 이루는 대위업을 달성하였다.
비록 우승을 하지 못했으나 가나아시 농고의 파란은 고교야구 팬들의 뇌리에 깊은 인상을 남겼다. 대회 이전까지 주목받지 못했던 에이스 요시다 고세이는 대회 이후 순식간에 거물 유망주로 각광받게 되었고, 2019년 신인드래프트 1라운드에서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즈의 단독 지명을 받고 프로에 입단하였다.[69]
이 때 오사카 토인의 카키기 렌도 같이 입단했는데, 카키기 렌은 2022년 닛폰햄 구단 측으로부터 전력외 판정을 받게 된다. 아마 육성선수로 다시 계약하려는 듯.
22. 도호쿠의 비원, 그리고 성불
도호쿠 지방은 1915년 역사상 첫 고시엔 개최 이래 일본의 8개 지방 중 유일하게 고시엔 우승이 없는 것으로 유명했다. 특히 2021년까지 봄, 여름 대회 도합 총 12번 결승에 올랐지만 모두 패배하여 고시엔 우승은 고교야구 팬들 사이에서 일명 ‘도호쿠의 비원’이라고 불렸다.도호쿠 지방 학교들의 우승 도전은 그야말로 좌절과 눈물의 역사였는데, 아래는 도호쿠의 우승 도전 기록이다.
- 1915년, 역사 상 첫 고시엔에서 아키타 현의 아키타 중학교[70]이 결승에 올랐으나, 교토부의 교토 중학교[71]를 상대로 연장 13회까지의 접전을 펼친 끝에 1:2로 패배하였다.
- 1969년, 아오모리 현의 미사와 고교가 도호쿠 역사 상으로 두번째, 54년만에 고시엔 결승에 진출하지만 에히메 현의 마츠야마 상고를 상대로 연장 18회 혈투끝에 무승부를 거두나 재시합 끝에 2:4로 패배하였다. 특히 이 1969년 결승은 고시엔 역대 경기들 중에서도 손꼽히는 명경기로 유명한데, 마츠야마 상고가 연장 15, 16회에 2번씩이나 1사만루의 위기를 맞았음에도 극적으로 이를 막아내며 경기를 무승부로 이끌었기 때문.
- 1979년, 후쿠시마 현의 이와키 고교가 팀의 특급 에이스 타무라 타키토시의 무실점 활약으로 여름 고시엔 결승에 진출, 타무라가 상대 팀인 가나가와 현의 토인 가쿠엔의 타선을 1실점으로 틀어막았음에도 팀타선이 점수를 내지 못하며 1:0 패배.
- 1989년, 미야기 현의 센다이 이쿠에이 고교가 여름 고시엔 결승에 진출. 도쿄의 강호 테이쿄 고교와 맞붙었다. 센다이 에쿠에이는 에이스 오오코시 모토이가 정규이닝을 무실점으로 막아내지만 타선 역시 무득점에 그쳐 연장행, 연장 10회 초에 오오코시가 테이쿄 타선에 무너지며 2:0으로 패배한다.
- 2001년, 센다이 이쿠에이 고교가 도호쿠 역사 상 최초로 봄 고시엔 결승에 진출, 이바라키 현의 조소가쿠인 고교와 맞붙었다. 그러나 3회, 5회에 도합 5실점으로 경기 분위기를 넘겨주었고, 이후 추격하나 결국 동점까지 단 1점만을 남겨두고 6:7로 패배하였다.
- 2003년, 미야기 현의 도호쿠 고교가 초고교급 투수 다르빗슈 유를 앞세워 여름 고시엔 결승에 진출, 도호쿠 지방 역사 상 처음으로 결승에서 선취점을 내며 리드를 얻어내지만, 정작 이번엔 다르빗슈가 4실점으로 무너지며 2:4 패배. 상대는 2년 전 센바츠에서 센다이 이쿠에이의 우승을 가로막았던 조소가쿠인.
- 2009년 봄, 이와테 현의 하나마키히가시 고교가 역시나 초고교급 투수 기쿠치 유세이를 이끌고 결승에 진출. 기쿠치는 나가사키 현의 세이호 고교의 공격을 1실점으로 막아내나
이제껏 도호쿠 지방 학교들 에이스들이 그랬듯타선의 도움을 받지 못한 채 준우승에 만족해야만 했다.
- 2011년 여름, 아오모리의 코세이가쿠인이 4경기를 단 7실점으로 막아낸 탄탄한 투수진과 대회에서 3홈런을 친 주포 카와무라 류헤이를 앞세워 결승에 진출하나 당시 대회에서 연일 맹타를 휘두르던 도쿄의 니치다이산 고교의 타선에 맥을 못 추고 11:0으로 대패.
- 2012년, 코세이가쿠인이 작년 여름 고시엔 결승의 설움을 뒤로한 채 카와무라 류헤이와 호죠 후미야를 필두로 한 강타선을 이끌고 봄, 여름 고시엔에 연속으로 결승에 진출. 그러나 2012년 봄, 여름 고시엔을 말 그대로 씹어먹은 후지나미 신타로의 오사카토인 고교에게 각각 3:7, 0:3으로 패배. 특히 여름 결승에서는 후지나미의 14삼진 완봉의 원맨쇼에 속절없이 당하며 오사카토인의 춘하연패의 조연으로 남았다.
- 2015년, 센다이 이쿠에이가 특급 에이스 사토 세나를 앞세워 여름 결승전에 진출. 사토 세나는 상대인 가나가와의 도카이다이사가미 고교를 상대로 무려 139구를 던지는 투혼을 보여주나 접전 끝에 9회초에 내리 4실점으로 무너지며 6:10 패배. 센다이 이쿠에이는 다시한번 준우승에 그친다.
- 2018년, 상술한 아키타의 가나아시 농고가 에이스 요시다 고세이의 맹활약으로 요코하마, 니치다이산, 오미 고교 등 내로라하는 강호를 꺾는 돌풍을 일으키며 결승에 진출하지만 체력이 다한 요시다가 결승에서 무너지며 2:13으로 대패, 오사카토인의 춘하연패를 지켜볼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2022년 여름 대회, 도호쿠 지방은 하치노헤가쿠인코세이, 이치노세키가쿠인, 센다이이쿠에이, 노시로소요, 츠루오카히가시, 세이코가쿠인 고교가 대표로 출전하였다. 이중 후쿠시마 대표 세이코가쿠인과 센다이이쿠에이가 4강까지 진출하였으나 운명의 장난처럼 4강에서 맞붙게 되었는데, 여기서 센다이이쿠에이가 타선의 대폭발에 힘입어 18:4로 승리, 결승에 진출하였고, 시가 현의 전통강호 오미고교를 꺾고 올라온 야마구치 현의 신흥강호 시모노세키국제고와 맞붙게 되었다.
결승전은 센다이이쿠에이가 3회말 선취득점을 시작으로 5회말에 2점을 내며 3:0으로 리드를 잡았다. 이후 센다이이쿠에이는 이어진 6회초 1점을 내주며 분위기를 잃을 뻔 하였으나, 7회말 만루홈런에 힘입어 7회에만 5득점, 이후 리드를 유지한 채 8:1로 경기를 마무리, 107년간의 도호쿠의 비원을 이루는 데에 성공했다.
센다이이쿠에이의 우승까지의 경기를 모은 하이라이트.
쓰리 아웃!!! 시합이 끝났습니다!!! 여름의 시작으로부터 107년! 드디어, 도호쿠의 꿈이 이루어졌다! 미야기 대표, 센다이이쿠에이고교, 처음으로 전국제패!
- 우승 순간, 캐스터의 우승콜
- 우승 순간, 캐스터의 우승콜
이로써 일본 전국의 8개 지방 모두 고시엔 우승을 이루는 데 성공하였다. 특히 도호쿠가 우승까지 걸린 107년의 기간에 비견될만한 것은 팀스포츠 종목 전체로 넓혀도 염소의 저주로 인해 두번째 우승 이후 세번째 우승(2016년 월드시리즈)까지 108년이 걸린 시카고 컵스가 사실상 유일하다.
이 우승으로 센다이를 비롯한 도호쿠 지방은 난리가 나서, 센다이 시내 음식점과 상점, 대형 상업시설도 파격적인 세일을 실시할 정도였다. 물론 고교야구연맹에서는 우승세일을 자제할 것을 당부하고 있지만 107년만에 우승했고 중소상인들이 자발적으로 하는 세일까지 금지시키면 코로나19로 죽어버린 상권이 힘들어질 게 뻔하니 제재까지는 가지 않았다. 심지어 엉뚱한 데에서 세일을 하기도 했는데, 센다이이쿠에이고교 재학생들은 2000엔 하던 반삭발이 무료가 되어 취재진도 아예 반삭발을 받고 왔다(...).
23. 코로나19로 인한 2020년 대회 취소, 그리고 <그 여름을 돌려줘> 프로젝트
2020년 여름 대회가 취소된 직후, 고시엔에 참가하지 못한 고교야구 선수들은 대학생과 사회인이 되어서 2023년 겨울에 다시 그 대회를 개최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래서 당시 고3이었던 오오타케 유토(大武優斗)[72]의 제안으로 2020년 참가 예정이었던 49개 팀 선수들이 기획한 게 바로 <그 여름을 돌려줘(あの夏を取り出せ)> 프로젝트로, 전국 전직 고교야구 선수 야구대회.2023년 11월 29일부터 12월 1일까지 크라우드펀딩과 기업, 학교의 협찬을 통하여 목표인 7천만엔이 모인 후 대회가 개최되었다. 다만, 고시엔 대관료가 워낙 비싼 나머지 개막식만 개최되고, 실제 경기는 효고현 내 구장에서 교류전 형태로 분산 개최되었다.
후루타 아츠야, 타카기 유타카, 미야모토 신야 등 프로야구 OB들도 적극적으로 응원하였으며, 전일본공수, 아사히신문, KDDI, 닛산 등 기업은 물론 효고현, 스포츠청, 일본프로야구선수회에서도 협찬을 해 주어 정상적으로 대회가 개최될 수 있었다.
[1] 아이치 현의 추쿄고등학교가 2차대전 이전에 여름대회를 3연속 제패한 적은 있지만(역대 유일. 추쿄고등학교는 현재 추쿄대학부속 추쿄 고교로 개명했으며, 2009년 여름에 전국을 제패했다), 보통 역대 최강팀은 83-85의 PL학원을 꼽는다.[2] 더 놀라운 건 재학 중이던 3년 내내 여름 대회 진출을 성공했는데, 이들이 속해 있던 지구는 전국 최고 격전구 오사카다. 전국 최고의 선수들이 모여있는 오사카의 200여개 이상 학교 중에서 매년 단 한팀만 여름 고시엔에 출전할 수 있는데, 이들은 3년 내내 저 경쟁을 뚫고 올라왔다는 것이다.[3] 일본의 야구부에서 갓 입학한 1학년이 주전은 고사하고 18인의 벤치멤버 안에 포함되는 것조차 거의 기적으로 여겨진다.[4] 특별대회를 제외하면 약 900만이 거주하는 오사카부에서 단 한 개의 고등학교만 고시엔 본선에 진출할 수 있다.[5] 이 경기 2회말, 구와타는 좌월 투런포를 쏘아올려 리드를 3-0으로 벌려놓기까지 했다.[6] 1초부터 중견수의 에러로 주지 않아도 될 그라운드 투런 홈런이 터지면서 시작했고, 1말에는 2사 만루를 놓쳤다. 6말에야 1점을 따라갔지만 다음 타자가 단타에 욕심을 부리다 2루에서 객사, 2사 3루에서 도리데 2고교 유격수의 호수비가 나오면서 흐름이 끊어졌고, 구와타는 바로 다음의 7초 2사에서 투런포를 얻어맞아 4-1까지 벌어졌다. PL 학원은 이에 굴하지 않고 8말에 2점을 내서 4-3까지 추격하더니, 9말에 선두타자가 좌월 동점 솔로포를 날려 기어이 동점을 만들었지만 거기까지였다. 경기 내내 기요하라의 방망이가 침묵했던 것이 컸고, 끝내기 찬스를 놓진 것은 부메랑이 되어 돌아왔다. 구와타는 10초 1사 1,2루에서 좌월 쓰리런포를 얻어맞은데 이어, 2사 2루에서 좌전 적시타까지 얻어맞고 4실점하며 KO를 당하고 말았다. 결국 8-4로 종료. 이는 KK 콤비가 3년간 출전한 여름 3개 본선에서 기록한 유일한 패배다.[7] 맞자마자 홈런을 직감하고 투수가 좌절한 가운데, 타구는 좌측 담장을 아득히 넘어갔다.[8] 구와타는 1학년때 2홈런을 기록하기도 했다. 그 중 하나가 바로 상술한 4강 이케다전. 1학년생의 고시엔 홈런 기록은 2015년 와세다 실업고교의 키요미야 코타로(現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즈)가 2홈런으로 타이를 이뤘을 뿐 여전히 깨어지지 않는 기록이다. (기요하라는 1학년 때 1홈런. 근데 그게 결승전 홈런이었다)[9] 경신이 사실상 불가능한 기록이다. 우선 고교 3년 재학중에 열리는 5회의 고시엔에 모두 출전하는것부터가 사실상 불가능하며, 기요하라의 재학 시절엔 고시엔 구장에 럭키존이 있기도 했다. 고시엔의 럭키존은 1947년 처음 설치되어 1949년부터 상설화되었다가 1991년 시즌을 마지막으로 철거되었으며 운용당시 구장 크기는 좌·우익 91m, 가운데 120m였다.[10] 구와타의 6홈런 중 하나는 2학년이던 84년 여름 4강이었다. 이 때의 상대는 아키타 현 대표로 올라온 가나아시 농업 고교. 이 홈런은 2-1로 뒤지던 8말에 나온 좌월 역전 결승 투런포였고, PL 학원은 결승전까지 진출했다. 34년이 지난 2018년 여름에 구와타는 4강 제1경기의 시구를 맡았는데, 운명의 장난인지 이 경기의 대진은 니혼대-제3고(서도쿄) vs 가나아시 농고(아키타). 이 때의 가나아시 농고는 100회 대회의 주인공이었고, 그 중심에는 요시다 고세이가 있었다.[11] 이시카와현[12] 고치현의 명문교로 고시엔 단골 출전학교다.[13] 이 쓰레기를 치우러 달려간 것은 세이료 고교 야구부 학생들이었다.[14] 상대 학교에 대한 예의를 그 무엇보다도 중시하는 일본 고교야구에서는 상상조차 못 할 일이다. 그만큼 이들에 대한 비난여론이 엄청났다는 의미.[15] 코노는 고시엔 대회 종료 후 센슈대학에 진학하여 사회인야구단 <치바열혈 MAKING> 감독을 2016년까지 맡았으며, 2015년 주간포스트와의 인터뷰에서 관중보다 감독이 더 무서웠다고 술회했다. 당시 상황이 상당히 살벌했는데 투구연습을 하고 있는데 온갖 야유와 욕설이 들렸으며, 그 때 야유(ブーイング)라는 단어의 뜻을 처음으로 알았다고 한다. 2017년에는 아들이 마쓰이가 뛰었던 뉴욕에서 세계 최대의 학생 무용대회인 <유스 아메리카 그랑프리> 결승전에 참가한다고...[16] 이 사건으로 마부치 감독도 책임을 지고 퇴임했다가 2006년 여름에 복귀했다.[17] 사실 아사히신문은 여름 고시엔 대회 주관사다. 주관사 입장에선 역대급 홈런 타자가 고의사구로 인하여 조기 탈락하는 것은 대회 흥행에 엄청난 악재로 다가오기 때문에 대차게 까버릴 수 밖에 없는 상황[18] 가나가와 현 대표 요코하마 고교[19] 위에서 언급된, 구와타와 기요하라의 출신교이기도 하다.[20] 이 경기 후 방송 인터뷰에서 "팔이 아파서 내일은 절대 못 던져요!"라고까지 했다. 하지만 결국 거짓말이었음이 다음날 밝혀졌다.[21] 중요한 게 이거다. 마운드에 올라오지만 않았을 뿐이지, 여전히 야수로서 전 이닝 출전중이었다(!)[22] 당시 요코하마고교의 감독에 의하면 전날의 혈전 때문에 경기 시작 전부터 4강전은 거의 포기한 상태였고, 6점차로 뒤진 8회말까지만 해도 경기가 물건너갔다고 보고 마쓰자카를 등판시킬 생각은 거의 없었다고 한다. 다만 그 경기에서 패한다면 그 경기가 마쓰자카의 고교 최후의 경기가 될 것이기 때문에 투수 대신에 야수로 출전시켰다고 한다. 그러나 8회말에 추격을 하여 역전의 가능성이 생기자 생각을 바꿔서 9회초에 등판시켰다고 한다.[23] 결승전 노히트 노런은 1939년 시마 세이이치 이후 59년만의 기록으로 여름 고시엔 사상 2번째 기록이며 2013년 현재까지 여름 고시엔 최후의 노히트 노런이다.[24] 니혼대-제3고, 서도쿄[25] 2005~2007년 일본프로야구 드래프트는 고등학생 대상/대학생+사회인야구 선수 대상 드래프트가 따로 있었다.[26] 결승에서 재시합이 나온 것은 1969년 이후 37년만이다. 1969년의 챔피언은 기적의 백홈으로도 유명한 마츠야마 상업고교였다.[27] 전 야쿠르트 스왈로즈 투수. 마쓰자카 다이스케의 어머니가 자신의 아들에게 다이스케라는 이름을 지어주게 된 장본인이다. 현재는 사이토 유키 소속팀인 니혼햄 2군감독으로 재임중이다.[28] 저 둘이 화제를 몰고 있을때 선수말년으로 접어들고 있었고 KK콤비 중 쿠와타는 이승엽과 같은 소속팀이었다.[29] 메이지진구 야구장과 가까우며 진구 구장은 와세다 실업고가 출전한 고시엔 서도쿄 예선의 개최지다. 이 곳에서 와세다 실업고는 서도쿄예선에서 일본대학제3부속고교에 힘겹게 승리를 거두고 고시엔행 티켓을 손에 쥐었다.[30] 다나카 마사히로는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에 입단해 NPB를 말그대로 씹어 먹는 괴물 같은 활약을 했고, MLB로 건너가 뉴욕 양키스 선발 투수로서 그럭저럭 좋은 모습을 보여줬다가 2021년 친정팀으로 복귀한 상태. 즉, 야구선수로서는 누가봐도 대성공을 거뒀다. 그에 반해 사이토 유키는 대학시절 좋은 활약을 해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즈에 입단, 데뷔초기엔 그럭저럭 성적을 냈으나 만성적인 부상에 계속 시달려 유의미한 성적을 못내고 끝내 2021시즌을 끝으로 은퇴했다. 관중 동원력이나 상품판매는 상당한 수준이나, 프로 커리어적인 측면에선 다나카와 비교하기도 미안한 수준으로 딸린다는 평.[31] 죠스이칸 고교도 학교 이름을 알리려는 재단의 전폭적 지원으로 단시일에 전력을 급성장시킨 신흥강호이다. 전통적으로 히로시마는 히로시마 상고와 코료 고교의 양강체제였으나 이 양강체제의 구도를 깬 것이 죠스이칸 고교이다. 최근에는 공립학교의 한계를 가지고 있는 히로시마상고가 침체기를 겪고있고 죠스이칸과 코료고교가 양강체제를 형성하고 있다.[32] 사키타는 이후 릿쇼대학으로 진학했으나 프로에는 가지 못했다.[33] 타구치는 이후 자신을 응원하던 학교 2년 후배와 결혼한다.[34] 실제로 2018년 센바츠대회 기준 1회당 평균 투구수가 15.2구, 9회당 계산시 136.8구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막대한 이닝수를 소화하는 투수들에게는 이것도 어깨와 회전근에 부담이 될 수밖에 없다. 고시엔 등 아마추어 대회 투구수가 버두치 리스트에는 포함되지 않지만 어깨를 갈아먹는 데 일조한 셈. 차라리 투수입장에서는 고의4구를 내든가 데드볼을 던지는게 더 낫지 않나[35] 그리고 덕아웃에서 통곡했다.[36] 이 사건은 이례적으로 2013년 8월 22일 스포츠호치에 1면으로 대서특필되기도 했다.[37] 고3때보다 1cm 더 자란 듯. 대학이나 사회인야구 시절 프로필에서는 157로 나온다. 근데 156이든 157이든 한국에서 사회복무요원 판정을 받을 만큼 작은 키인 건 똑같다. 진짜 사지가 어지간히 망가진 사람들도 현역으로 끌고가는 한국 병무청에서도 공익으로 빼주는 키면 말 다한 셈.[38] 현재 MLB 최단신 선수인 휴스턴 애스트로스의 호세 알투베와 KBO 리그 최단신 삼성 라이온즈의 김성윤 선수도 160cm를 넘는다. 일본프로야구 역대 최단신 선수인 하마사키 타다하루(1947년 주니치 드래곤스 입단)와 키가 같지만 고령으로 선수생활을 일찍 마감했다.[허나] 해당 수술을 최대 한도로 실행하여 키를 억지로 키워봤자 12cm(종아리 6cm, 허벅지 6cm)로 169cm로 그리 큰 체격은 못 되는 데다가 수술 및 재활과정에서 근육과 인대, 신경에 어쩔 수 없는 손상이 가기 때문에 일반인은 몰라도 운동선수는 원래의 운동능력을 보존하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 비용만 해도 종아리 허벅지 다 한다면 1억 가까운 금전과 2~3년 가까운 시간이 드는데 운동선수가 되기 위한 목적이라면 무리수가 크다. 단, 운동능력이 상대적으로 덜 중요한 연예인이나 연극배우가 되기 위해서 (비급여더라도) 시행하는 경우는 종종 있다.[40] 도쿄는 동,서 홋카이도는 남,북을 나눠 2팀이 올라온다.[41] 한국은 TV 중계 편의 및 KBO 리그 경기와의 시간대 중복을 피하기 위해 결승전을 월요일 저녁에 잡는 경우가 많다.[42] 그나마 이것도 시간이 지나 선수를 비난하는 목소리는 줄어들었다.[43] 일본프로야구를 보는 사람이라면 알겠지만, 2019년부터 롯데의 선발진으로 꾸준히 출전하고 있는 그 이와시타 맞다![44] 키무라 쿄시로는 고교 졸업 후 츄부학원대학에 진학한 후 프로에 가지 못하고 은퇴.[45] 松下雄也라는 선수. 마츠시타 유야로 추정되지만 후리가나가 없다. 이 선수도 고교 졸업 후 호쿠리쿠대학에 진학하였고, 이후 프로에 가지 않고 은퇴하였다.[46] 끝내기를 친 선수는 西田将大(니시다 마사히로로 추정되지만 후리가나가 나와있지 않다.)라는 3학년 선수. 이 선수는 이후 다이토분카대학으로 진학했지만 프로에 가지는 못했다.[47] 동점 적시타를 친 신입생의 이름은 세도 아스토. 고교 졸업 후 도쿄정보대학(치바 롯데 마린즈의 아리요시 유키의 모교다.)에 진학했으나 프로에는 가지 못했다.[48] 심지어 이때의 세이료 고교는 봄 고시엔 4강의 강팀이였다.[49] 등록 학교수가 200개가 넘어가면 한 지역을 둘로 나눈다. 도쿄는 동서, 홋카이도는 남북. 참고로 야구만화 H2에서는 도쿄를 남북으로 나누는 설정이 나온다..[50] 원래는 동도쿄 지역에 학교가 있었으나 학교가 신축 이전을 하면서 서도쿄 지역으로 소속지구가 바뀌었다. 서도쿄 지역 내 라이벌 학교는 일본대학제3부속고교가 있다.[51] 2006년 다나카 마사히로와의 극적인 결승전 주인공 '손수건 왕자'[52] 그런데 사실 중학생 때부터 이미 장래가 촉망받는 선수로서 학생야구 팬들 사이에선 유명했다고 한다. 광적인 고교야구 팬으로 유명한 개그콤비 안잣슈의 멤버인 와타베 켄은 2014년도에 나름 전국구로 통하는 개그맨임에도 불구하고 당시 중3이던 기요미야의 사인볼을 생일선물로 받고 엄청 기뻐했다고. 이유는 "워낙 장래가 촉망되는 중학생인지라 반드시 고교에 진학하면 고시엔의 스타가 될 것"이라는 이유로 팬이 되었는데, 와타베가 기요미야의 팬이라는 걸 안 후배게닌이 경기장 앞에서 4시간이나 기다려서 겨우 사인을 받아 냈다고 한다(...). 이게 얼마나 기뻤는지 아메토--크의 '고교야구 정말 좋아하는 게닌'편에 나와서 사인 받은걸 자랑하기도 했다. 14살 야구소년의 사인볼을 받고 기뻐서 전국방송에서 인증해 버린 당시 41세의 전국구 개그맨 그리고 이듬해인 2015년 고교에 진학한 기요미야는 보시는바 대로다[53] 바로 밑의 '친구와의 약속' 항목의 그 3회전 경기에서 중견수로 출전한 오코에는 1회초 2사 만루의 위기에서 좌중간 2루타성 타구를 러닝캐치로 잡아내며 팀을 위기에서 구해내게 된다.[54] 구와타는 투수로서 기록이 엄청난데다 (20승으로 역대 2위)기요하라가 13홈런을 때리면서 고시엔 역대 최다 홈런 기록을 가지고 있어서 잘 언급이 안되기는 하지만 구와타 역시 6홈런으로 공동 2위다. 83년 우승 당시 기요하라는 홈런을 하나밖에 기록하지 못했는데 그게 결승전 홈런..[55] 실제 2016년 여름 서도쿄예선에서 와세다실업고는 한번도 고시엔에 진출해보지 못한 하치오지고교에게 준결승에서 무릎을 꿇으며 여름대회 진출에 실패했다.[56] 한국과의 경기에서 4타수 2안타를 쳤다.[57] 이 경기에서 바로 위 항목의 '오코에 루이'(現 라쿠텐 골든이글스)가 중견수로 뛰고 있었다.[58] 고시엔이 끝난 후 세계 청소년 야구대회에 일본 대표로 뽑혔고 슈퍼라운드 한국전에서 선발로 등판, 7회 무실점으로 콜드게임의 선봉장에 섰다.[59] 라쿠텐의 스즈키 다이치와는 한자가 다르다.[60] 오사카 체육대 출신으로 우에하라 코지 2년 후배로, 사회인야구 까지 했던 사람이다.부임 이전에도 다른 지역의 C급 학교 감독을 맡아 B급으로 키워내는 등 호평을 받던 사람이다.[61] 당시 야구부원 중 아버지가 소규모 건설회사를 운영하는 사람이 있어 이 사람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62] 9명 중 실제 하쿠산고교 학생은 한 명밖에 없었다.[63] 당시 4강 상대는 기요하라 가즈히로-구와타 마스미의 KK 콤비가 빛나던, 최전성기의 PL 학원이었다. 가나아시 농고는 2:1로 앞서던 8말, 5번 타자로 나온 구와타에게 좌월 역전 결승 투런포를 맞는 바람에 결승 일보직전에서 여름을 마쳐야 했다. 운명의 장난인지, 구와타는 2018년 여름, 가나아시 농고의 4강 경기에서 시구자로 지정되었다.[64] '헤이세이의 괴물' 마쓰자카 다이스케의 모교. 100회 대회를 맞아 가나가와현은 남과 북으로 분할하여 1개교씩 뽑았다.[65] 아키타현 예선에서는 더했는데, 43이닝동안 무려 57탈삼진을 뺏어내기까지 했다(...)[66] 日大三, 니혼대-제3고, 서도쿄, 봄 1회(1971) 여름 2회 우승(2001, 2011)[67] 참고로 103년 전 아키타 대표가 결승에 진출한 대회는 "제1회" 전국 "중등"야구 선수권 대회로, 아키타 현은 여름 고시엔 첫 대회에서 결승전에 올라간 이후로 결승전에 돌아오는데 무려 100회가 될 때까지 기다려야만 했다. 제1회 대회 결승전에 올라갔던 아키타 대표는 구제 아키타중학교(현재의 아키타고등학교)로 결승전에서 교토 대표인 교토 제2중학(현재의 도바고교)에게 패하에 준우승에 머물렀었다.[68] 1931년 대만 대표 자이농림학교가 준우승을 거둔 이후 최초의 농업고교가 결승에 진출한 사례이다.[69] 당초 파이터스의 첫 지명은 오사카 토인 고교의 유격수인 네오 아키라였으나 3구단이 경합했고, 추첨 끝에 주니치가 가져가버렸다. 그 직후에 요시다를 단독으로 지명하여 교셥권을 가져온 것.[70] 현 아키타 고교[71] 현 토바 고교[72] 2023년 당시 무사시노대학 3학년생이 되었으며, 대학 진학 이후 합동회사 VEL을 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