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0-01 23:53:38

사이토 유키(19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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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하즈레 1라운더: 첫 지명에서 중복 지명된 선수의 교섭권 획득에 실패했을 때 차순위로 선택한 선수.
(2) 중복 지명 추첨 성공.
(3) 역지명, 희망 입단 범위: 1993년부터 2006년까지 존재한 제도로, 선수를 확정적으로 획득할 수 있었다.
(4) 고교생 드래프트, (5) 대학생, 사회인 드래프트: 2005년~2007년의 3년간은 고교 선수와, 대학&사회인 야구에서 뛰었던 선수의 지명이 분리되어 있었다.
(6) 지명 후 미입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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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IMG_8256.jpg
사이토 유키
斎藤佑樹 / Yuki Saito
생년월일 1988년 6월 6일 ([age(1988-06-06)]세)
출신지 군마현 오타시
국적
[[일본|
파일:일본 국기.svg
일본
]][[틀:국기|
파일: 특별행정구기.svg
행정구
]][[틀:국기|
파일: 기.svg
속령
]]
학력 와세다실업고교 - 와세다대학[1]
신체 176cm, 77kg
포지션 투수
투타 우투우타
프로입단 2010년 드래프트 1순위
소속팀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즈 (2011~2021)
등장곡 ジェイソン・ムラーズ - Have It All

1. 개요2. 선수 경력
2.1. 고교 시절2.2. 대학 시절2.3. 프로 시절
3. 은퇴4. 은퇴 후5. 평가6. 플레이 스타일7. 여담8. 연도별 주요 성적

[clearfix]

1. 개요

일본의 전 야구선수, 현 사업가 및 방송인.

2. 선수 경력

2.1. 고교 시절

파일:external/tantei-honpo.com/20061003_81697.jpg
3학년 여름 2006년 고시엔 결승전에서 당시 코마자와 대학 재단이자 토마코마이고교[2]다나카 마사히로와 맞붙어 명장면을 연출했다.

당시 다나카 마사히로가 이끄는 토마코마이 고교는 2004년, 2005년 2연속 여름 고시엔에서 우승하고[3], 2005년 가을 메이지진구야구대회에서도 우승한 당대 일본고교야구 최강팀이었다. 사이토 유키의 와세다대학부속 와세다실업고교는 2005년 여름 서도쿄 지역예선 준결승까지 출전했고, 2006년 봄 고시엔 준준결승까지 진출한 강호교[4]이긴 했으나 1996년 이후 여름 고시엔 출장경험은 없었던 학교였다.[5] 사이토 유키의 와세다실업고 우승이 더 화제가 된 것은 이런 절대 강자인 도마코마이 고교를 꺾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때 상대 다나카는 3회부터 중간계투로 등판해 15회까지 1실점으로 막는 호투를 보여줬지만 사이토 유키는 15이닝 1실점 완투를 하는 투구를 하는 바람에 37년만의 고시엔 결승 재경기가 열렸다. 다시 열린 결승전에서도 자원 선발등판하여 8회까지 1실점으로 막으며 4:1 승리를 하는가 싶었지만, 9회 2점홈런을 맞고 4:3까지 쫓기게 된다. 이때 1점차 리드상황에서 마지막 타자로 나온 선수가 바로 다나카. 드라마같은 이 경기는 사이토가 다나카를 헛스윙 삼진으로 잡아내며 와세다 실업고의 첫 여름 고시엔 우승으로 마무리된다. 이 우승으로 코마자와대학 토마코마이고교의 여름 고시엔 3연패를 저지했다. 여담으로 이 결승전의 평균시청률은 본경기가 무려 33.7%(일요일), 재경기는 29.3%(월요일 오후 1시~4시)로 1990년대 이후 고시엔 최고 시청률이었다.[6]

이 대회에서 사이토 유키는 7경기[7][8][9]에서 무려 950개가 넘는 공을 던졌고, 이른바 "손수건 왕자"라 불리며 전국 최고의 스타로 급부상한다. 호성적이긴 했지만 결과적으로는 혹사에 가까운 투구로 인해 몸에 과부화가 걸리게 된다. 이때 경기 도중 손수건으로 땀을 닦는 사이토의 모습이 중계를 탔는데 선이 가늘게 생긴 미소년이 멋지게 공을 던지면서도 지저분하게 유니폼이나 언더셔츠에 대충 문대는 것이 아니라 곱게 접은 흰 손수건을 꺼내 깔끔하게 땀을 닦는 운동선수답지 않게 예쁜 소년스러운 모습으로 여심을 사로잡았고, 그야말로 전국적인 센세이션을 일으킨 것.

당시 사이토의 활약을 통한 인기는 프로선수 그 누구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였으며 3연패까지 막은 사이토 유키의 혼신 투구는 프로리그 구단에서도 눈여겨 보기 시작했다. 역사적으로도 당시 사이토의 인기에 비견할만한 선수로는 사이토의 고등학교 선배인 아라키 다이스케[10], 위에서 나온 PL학원고등학교KK 콤비, 혼자의 힘으로 팀을 봄 - 여름 연속 우승으로 이끈 마쓰자카 다이스케 정도 밖에 없다.

가을에 있는 제61회 국민체육대회에서도 또 다시 다나카의 코마자와대학 토마코마이고교와 결승에서 맞붙어 1:0으로 승리한다. 이 대결은 2006년 일본 스포츠를 대표하는 명장면으로 꼽히기도 했다. [11]

사이토 유키의 고시엔 혹사 기록은 끔찍한 수준인데 2006년 봄 고시엔에서 3월 25일부터 3월 31일까지 6일 동안 4시합 37이닝[12]을 던졌다. 여름 고시엔은 더욱 경악스러운데 2006년 8월 6일부터 8월 21일까지 15일 동안 7경기 69이닝 던졌다.[13] 69이닝은 웬만한 프로 중간계투 투수의 1년 전체 이닝수 보다 많다.[14] 이쯤되면 학대도 이런 학대가 없다.

반면에, 다나카에게는 다행인 것이 도마코마이 고등학교 2학년 시절에 1년 선배인 마츠바시 타쿠야라는 투수가 있었다.[15] 타쿠야는 고시엔에서는 147km, 대학에서는 152km까지 던졌고, 고시엔 2연속 우승을 차지한 에이스였다. 때문에 타쿠야가 주로 선발로 등판했기에 다나카는 2학년 여름 고시엔에서도 등번호 11번으로 에이스가 아니었고, 2학년 고시엔 결승전에서는 4.1이닝만 던졌다. 그래서 2학년 되자마자 에이스를 단 사이토 유키처럼 미친듯이 굴러먹지는 않았다. 3학년때는 선발인 1년 후배 키쿠치 쇼타[16]가 이닝을 나눠 먹었다. 이 덕분에 다나카 마사히로는 사이토 유키와는 다르게 어깨 소모율이 높지 않았으며 고교 졸업하자마자 바로 프로리그를 선택해 구단의 관리를 철저하게 받은 것 또한 신의 한수가 되었다.

사이토 유키는 물론 투수로 유명하지만 고교시절엔 타격도 뛰어났는데, 고시엔 통산 타격 성적은 45타수 16안타 타율 .356 2홈런 6타점 OPS .925였다.

2.2. 대학 시절

고교 졸업이 다가오면서 사이토 유키는 행복한 고민을 하게 된다. 고시엔에서의 인지도와 활약으로 이미 여러 프로구단에서 그를 눈 여겨 봤으며 다나카 마사히로의 포텐셜도 충분했지만 사이토 유키는 그런 마사히로를 고시엔에서 이긴 전적으로 인해 더 높은 평가를 받았고 러브콜이 이어졌다. 그렇게 사이토 유키는 프로냐 대학이냐를 두고 장고끝에 와세다대학에 입학했다. 후일 뒤돌아보면 이는 사이토 야구인생 최악의 선택이 되었지만 어찌되었건 이 대학시절이 사이토 최고의 전성기였다.

본인 커리어 최고구속인 150km을 던진것도 이 시기였으며, 1학년부터 압도적인 실력으로 춘계, 추계리그 다승왕을 2연패했고, 추계리그는 0점대 방어율을 기록하며 방어율왕까지 2관왕을 차지하고 와세다의 6대학리그 우승을 캐리하며 기대치에 맞는 모습을 보여주는 듯했다. 그러나 3학년 때부터 성적이 급격히 하락하기 시작했는데, 나중에 뒤돌아보면 고시엔 시절의 혹사와 1학년 때부터 에이스로서 굴려진 혹사와 프로구단과 달리 관리를 제대로 해줄수 없던 대학리그에서도 구른게 누적된 것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라는 것이 중평.

방어율이 0점, 1점대이던 것이 2~3점대까지 하락하였고, 특히 3년 춘계리그에선 60K를 잡아내며 탈삼진왕까지 차지했던 시절에 비해 30K도 못 넘길 정도로 스터프가 추락해, 명백히 무언가 이상이 생겼음이 확연히 보였다. 당시에는 데드암 증상이라는 의견이 중론이었으나, 은퇴 후 본인이 당시 고관절 부상을 당한 이후로 스터프가 추락했다는 사실을 밝혔다.

실제로 고관절을 다쳐서 하체를 충분히 사용하지 못하게 되었고, 이로 인해 상체 위주로 던지는 버릇이 굳어졌으며 이 폼 때문에 관절와순 부상이 왔으니 이 부상이 불러온 나비효과가 사이토의 야구 인생을 끝장내버린 셈.

그러나 4학년 춘기리그엔 방어율을 다시 1점대로 끌어내리면서 불안을 불식시켰는데, 후일 돌아보면 이 당시 도쿄대학전에 이례적으로 2시합에나 등판한, 프로 진출을 대비해 떨어지는 스터프를 가리기 위한 방어율 관리였다. 학생야구는 표본이 적다보니 한두시합만 잘던져도 방어율을 확 끌어내리는 것이 가능하기 때문에 취했던 전략.

여담으로 그럼에도 도쿄대 야구부에 한게임 패전투수가 되는 바람에 개망신[17]을 당하기도 했다.

어찌되었건 1~2학년때 벌어둔 스탯이 워낙 압도적이었고, 대학 후반기 성적은 그보다 떨어지긴 했어도 충분히 좋은 성적이었다 보니 6대학리그 통산 61시합 371.1이닝 방어율 1.77 31승15패 323K로, 역대 6대학리그 통산 다승 13위, 통산 탈삼진 9위에 마크되어 있을 정도로 좋은 성적으로 대학을 졸업했다.

어찌 되었건 훌륭한 성적으로 대학리그를 마쳐 고교때의 명성을 이어갔고, 3학년 이후로 떨어진 스터프와 작은 체구에 대한 불안감은 있었지만 훌륭한 통산성적은 그것을 가리는 데 부족함이 없었고, 그 해 대학 드래프트 최대어로 꼽혀[18]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즈, 치바 롯데 마린즈,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즈 4개 구단 동시 1위 지명을 받았고 경합 끝에 닛폰햄이 교섭권을 획득해 계약금 1억엔에 연봉 1500만엔, 인센티브 5천만엔에 등번호 18번이라는 어마어마한 대우로 닛폰햄에 입단했으나, 닛폰햄은 곧 그 결정을 후회하게 된다. 그리고 2년 뒤 독하게 뽑은 선수로 초대박을 쳤다.

정말 여담으로 대학시절 당시 그야말로 대학리그를 초토화시키는, 고시엔 슈퍼스타 출신 명문 와세다의 에이스, 운동선수답게 슬림하고 단단한 체격에 잘생긴 외모로 아직 프로 데뷔도 안 했는데 후카다 쿄코, 키타가와 케이코 등 전국민이 다 아는 톱여배우들과 연달아 염문을 뿌리고 다니는 바람둥이로도 유명했다. 프로 데뷔 이후에도 방송인 코바야시 마야[19] 등 여러 여성과 스캔들이 끊이지 않았다.

프로야구팀을 만들자ds에선 이 무렵의 사이토를 모티브로 한 카이도우 유우키라는 대졸신인이 등장한다. 별명은 선글라스 왕자.[20]

2.3. 프로 시절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즈에 입단했다.

프로 입단 이후엔 고교 졸업 후 바로 프로에 뛰어든 라이벌 다나카와 자주 비교되지만, 냉정한 스카우터들의 눈에는 프로에서 뛰기엔 구위가 떨어진다라는 평가를 받았고, 평가 그대로 성적은 인상적이지 않았다. 커리어하이는 데뷔시즌의 6승 6패 ERA 2.69. 어느정도 기대를 가지게 할 만한 성적이었지만 이후 분석을 당하고 또한 부상 등으로 인해 재활과 2군에서의 조정을 거치면서 부진하다보니 1군에는 거의 올라오지 못할 정도였다. 하지만 고시엔 아이돌이라 그의 근황이 종종 언론에 나오는 등 실력에 비해서는 여전히 상당한 관심이 집중되기도 했다.

다만, 그렇다고 일본 언론들이 그냥 무작정 띄워주기만 한 것은 아니었는데, 고시엔 통산성적 12게임 출장 8승 1패 방어율 1.87(완투 10회)로 엄청난 성적을 올린 것은 사실이다. 참고로 다나카의 경우는 12게임 출장 8승 0패 방어율 2.07(완투 3회)[21]로 사이토 유키와 거의 비슷한 성적을 기록했다. 하지만, 고시엔의 성적과는 별개로 구위 자체가 다나카처럼 위력적이지 않아서 프로구단 스카우터들의 평가는 박했고, 결국 그 평가가 들어맞았다. 한마디로 낮은 수준의 상대에겐 무쌍이 가능한 구위였지만 체격이나 구위가 완성형이어서 프로선수 상대로는 힘들다고 본 것. 이래서 스카우터들이 고시엔 성적을 잘 안 믿는 편이다.

또한 사이토가 프로에서 부진한 이유는 일본 아마야구계의 고질적 문제인 혹사와도 연관이 있는데, 고교를 졸업하고 바로 프로에 입단해 체계적인 관리를 받으며 실력을 갈고 닦은 다나카에 비해 고교시절 저 거의 1000개에 육박하는 연투에 이어 와세다 대학으로 진학 후에도 에이스로서 미친듯이 굴려졌고, 국가대표까지 뛰면서 살인적인 혹사를 당했다. 본인도 고교시절 혹사로 몸이 정상이 아님을 느끼고 대학리그에서 경기감각을 유지하며 몸을 추스리고 요양을 할 생각이었던 듯 하지만 역효과.

그리고 어쩔 수 없는 체격 문제도 컸다. 사이토 유키는 고시엔 최고 구속 148km[22]의 속구를 자랑했지만, 키가 고작 176cm에 불과했다. 물론 고시엔에서는 140km대의 공을 마구 던지니 고딩 타자들로서는 속수무책으로 당할밖에 없었지만, 체격 문제로 그 이상 구속을 늘리기가 힘들었고 작은 체구로 속구를 뿌리다 보니 몸에 부담이 안갈 수가 없었다. 여기에 대학 시절 혹사까지 겹치니 몸이 버틸 수가 없었을 것이다. 비교되는 다나카의 경우 고시엔 최고 구속은 150km로 사이토 유키보다 조금 빠른 정도 였지만, 키는 190cm로 14cm나 컸고, 당연히 잠재력도 높아서 프로에서는 최고 156km까지 던졌다. 때문에 다나카 쪽이 스카우트 평가가 높았던 것도 당연할 듯.

어쨌든 프로에 입단하여 첫해, 둘째 해는 의외로 괜찮은 성적을 올렸다. 분명 구위는 그리 좋지는 않았지만, 어쨌든 구속은 그럭저럭 나와주는 속구와 다양한 변화구들, 어린애다운 겁없는 피칭으로 데뷔시즌은 19경기 등판 107이닝 62탈삼진 35볼넷 방어율 2.69 6승6패로 괜찮은 아이큐피쳐로서, 4~5선발로서는 충분히 합격점이고 1년차가 이정도면 훌륭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성적이었다. 2년차는 104이닝 3.98로 조금 떨어진 성적을 기록했지만 대졸투수로서 소포모어 징크스라고 치고 그럭저럭 괜찮은 선발자원으로 성장할 가능성을 보였지만,[23] 2013년 초 시즌 시작 전 어깨 관절와순[24] 부분파열 이 발견되었고, 결국 그 해는 1경기 등판해서 털리고 한 해를 통째로 공쳐버렸다. 이후 2군급 투수로 굴러떨어져 전성기 시절의 기량을 회복하지 못하였다.

국내에서는 사이토의 부진을 흔히 생각하는 혹사로 인한 데드암이라고 보는 경우가 많은데, 사실 이 관절와순 부상이 사이토가 나락으로 굴러떨어지게 된 가장 큰 원인. 물론 베테랑도 아닌 한창 젊은 만 24세 투수가 관절와순 파열[25] 진단을 받았다는 것은 진단명이 다를 뿐 혹사가 원인이라는 것 자체는 맞다.

분명 구위는 그리 좋지 않았지만 그래도 드래프트에서 3개 구단이 경합할 정도로 성장 포텐셜이 있는 유망주였음에도, 고교에 이은 대학 시절의 혹사로 어깨가 망가져 2군을 오락가락하는 수준의 선수가 되어버렸다. 프로데뷔 후 고교시절 라이벌이던 다나카와의 몇 번의 맞대결마다 완패를 기록했고 결국 다나카는 24승 무패의 NPB 역사에 남을 시즌을 보내고 메이져리그로 진출해 더이상 라이벌이라고 부를 수 없는 수준이 되었다.

그래서 다르빗슈 유 등으로 대표되는 일본 고교, 대학야구계의 혹사를 비판하는 측에서 자주 꺼내는 사례가 바로 사이토의 사례이기도 하다.

긍정적인 것은 본인이 과거의 영광에 취해있지 않고 현재 자신이 예전같은 정통파 파이어볼러가 아니라는 것을 인정하고 변화구를 익히는 등 절차부심하는 중이라는 것이 그나마 위안거리인 상태이다.

2014년 7월 31일 긴 재활을 끝내고 1군에 올라와 지바 롯데 마린스와의 원정경기에서 6이닝 6피안타 7탈삼진 1실점으로 758일만의 승리를 거머쥐었다. 사이토는 "이제 제2의 야구인생이 시작되었다." 라고 다짐했다. 그리고 동해 9월 29일 선발등판해 5이닝 2피안타 1실점 호투로 845일만에 홈 선발승을 거뒀다. 이 경기에서의 승리로 닛폰햄은 포스트시즌 진출을 확정지은 것은 덤. 이것이 이 해의 마지막 등판으로 2014년은 1군 6경기 등판 2승1패 평균자책점 4.85로 마무리했다. 오래간만에 그럭저럭 희망을 보인 시즌. 또한 구속도 최고 144까지 올라오는 등 어느 정도 부활의 조짐을 보였다.

2015년에는 본인은 선발을 원하고 있지만 쿠리야마 히데키 감독은 불펜으로 돌릴 의향을 내비치고 있다. 일단 2015년 목표는 두자릿수 승수라고 한다. 아직 젊은 28세인 만큼 보여줄 것이 많은 선수. 8월 6일 현재, 7경기 출장 14이닝 ERA 9.00으로 부진한 성적을 보이고 있다. 6월 27일 이후 출장 기록이 없는 것으로 보아 2군으로 내려가서 올라오지 못하는 듯하다. 8월 8일, 라쿠텐전에서 선발투수로 복귀, 5이닝 2실점을 기록하며 좋은 모습을 보여줬지만 승리를 거두지는 못했다. 8월 15일, 라쿠텐전에서 5와 2/3이닝 2자책점으로 호투했지만 승리를 거두지는 못했다. 하지만, 탈삼진을 7개를 잡아내며 선발로써 좋은 모습을 보여줬다는 것은 긍정적인 요소.

시즌 성적은 12시합 등판 1승 3패, 42.1이닝 방어율 5.73으로 최종적으로는 올해도 부진하였다.

2016시즌에는 부진이 더욱 심화. 1군 11시합에 등판하였고 총 23.1이닝, 3회 선발등판하여 무승 1패 ERA 4.56에 그쳤다. 만 28세로 전성기 한복판에 있을 나이이지만 이제 그에게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것은 분명하다. 시즌 후 등번호 18번을 반납하고 양다이강이 FA로 교진으로 이적하여 비게 된 1번으로 바꾸었다. 일본 프로야구에서 18번은 에이스에게 주로 주는 번호인데, 그간 부진한 성적에도 18번을 달고 있었던 것을 감안하면 이제 구단에서도 사이토에게 걸었던 기대를 어느 정도 접기 시작했다는 뜻. 일단 형식상으로는 본인이 성적부진의 책임을 지고 요청한 자진반납이라고는 하지만...바뀐 번호인 1번은 고시엔 에이스의 번호로 본인은 자신의 전성기였던 고시엔 시절의 영광을 되찾겠다는 뜻으로 1번을 택했다는 각오를 밝혔다. 2017년에도 기존처럼 6선발 자리를 두고 경합할 것으로 보이는데 그나마 긍정적인 것은 국내파 1선발인 오타니 쇼헤이가 17년에는 타격에 집중할 것[26]을 밝혀 선발 한 자리가 비게 된 것과 사이토가 잘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딱히 팀 내에 사이토보다 잘하는 후보도 없다는 것이다.

여담으로 시즌 후 11월 팀 동료와 차를 타고 가다가 전복사고 현장과 맞닥뜨려 운전자의 목숨을 구해, 선행으로 오랜만에 신문에 좋은 기사가 실렸다.

2017 시즌에도 여전히 부진한 모습. 시즌 초부터 팀의 선발 로테이션이 붕괴되어 이따금 선발로 기용되었다. 5월 31일 요코하마 DeNA 베이스타즈를 상대로 6회 1실점의 좋은 투구로 선수 개인으로서는 623일만의 승리를 따내며 반등의 기미를 보여주는가 했으나, 아니나 다를까 이후에 선발로 등판한 경기에서 족족 조기 강판되는 등 여전한 실력을 보여주었다.

여담으로 2017년에는 연인으로 보이는 일반인 여성과 슈퍼에서 장을 보는 모습이 찍히기도 했는데, 프로데뷔도 안한 주제에 후카다 쿄코 등 인기 여배우와 염문을 뿌리던 화려한 과거를 생각하면 이젠 거의 잊혀진 이름이 되어 일반인과 만나는 걸 보면 참 격세지감이라 아니할 수 없다.

2018년에는 드디어 30세. 6월 12일 교류전에서 첫 선발등판을 했는데 홈런 2방에 4이닝 102개 8피안타 5볼넷 7실점으로 제대로 무너졌다. 결국 시즌 막바지까지 딱 2경기 등판하고 올해가 끝날 예정. 2군에서는 80이닝이나 던졌고 성적은 ERA 3점 초반대로 최근 몇년간 2군성적에 비하면 나은편이라 이거만 보면 좀 가망성이 있어보이기는 하나 까놓고 보면 WHIP이 1.48이나 되는등, 30대라는 나이까지 감안하면 1군에서 경쟁력이 있는 성적이 결코 아니다.

2019년에는 연초 연봉협상부터 삭감 소식이 전해지며 한 해를 시작했다. 6년 연속 삭감으로 1600만엔. 신인 시절과 거의 같은 연봉을 받게 되었다. 스프링캠프에서 좋은 모습으로 모처럼 개막전 엔트리에 드는 데 성공. 개막전에서 1이닝 무실점을 기록했다.

그 후 4월 4일 경기에 오프너 개념으로 선발등판해서 1.2이닝 3실점으로 무너졌다. 역시 1군 선발은 무리인 듯. 이후로는 5월까지 자리를 유지하다가 교류전 시점에 대타용 타자 콜업을 위해 엔트리에서 빠졌고, 교류전이 끝나고 다시 1군으로 올라왔다. 주로 패전처리 투수로 쓰이는 중. 패전처리용 멀티이닝 릴리프로 쓰이고 있으며 사실 이 롤에 이만한 투수도 없긴 하다. 어찌됐건 다이닝 연투가 가능하니 여름 정도까지 패전처리로 쓰였고 이후 2군으로 내려갔다. 결국 올해도 1군 안착은 실패. 31세까지 1군 안착에 실패해 슬슬 진지하게 방출을 고려해볼 때가 되었다.

2019 시즌 종료후 방출자 리스트를 발표했으나 사이토의 이름은 없었다. 아직 전성기가 다 지나진 않은 만큼 기회를 더 줄 생각인 듯. 팀 입장에서도 굳이 버릴 필요가 없는게, 아무리 폼이 나락으로 떨어져서 1군에서 공헌도가 없는 수준이라고는 하지만 아직 나름 인기가 있는지라 2군전 관객 유치에도 공헌하고 있고 유니폼도 그럭저럭 팔리는 편인데다가 2군에서는 그럭저럭 던지는 편이라 2군 뎁스용으로는 괜찮은 선수다. 결정적으로 연봉이 1500만엔으로 별로 부담도 없는 편이다. 참고로 1500만엔이면 NPB기준으로 1, 2군을 오락가락하는 2-3년차 신인 수준으로 저렴한 편.

2019년 마지막 날 결혼을 발표했다. 상대는 이전에 장 보다가 같이 찍힌 일반인 여성. 대학 시절부터 알고 지내던 사이라고 한다. 뉴스에 크게 소개가 되었는데 2군 선수가 일반인이랑 결혼한다는 소식이 이렇게 뉴스에 대대적으로 보도될 정도니 왕년의 스타성 하나만큼은 정말 대단한 선수였던 것을 새삼 느끼게 해 주었다.

2020년 시즌은 2군에서 시작하였다. 팀 차원에서 이제 선발은 포기했는지 2군전에서도 릴리프로만 등판중이다. 2020년 코로나 때문에 관람객을 받을 수 없어 한미일 할 것 없이 구단 수익이 안 줄어든 곳이 없는데 반등할 수 있다는 확신이 없으면 정리될 수 있다. 닛폰햄은 햄과 소시지에서 일본 업계 선두의 위치에 있는 대기업이긴 하지만 그 와중에 주간문춘에서 처음 입단계약이 10년계약이어서 올해가 끝나면 은퇴한다는 보도를 내서 소소히 화제가 되었는데, 본인은 내년에도 야구 할거라고 즉시 부정했다. 여담으로 올해는 방어율 8점대로 2군에서도 폐급이다.

그 와중에 10월 16일 교진 2군전에서 2/3이닝 5실점으로 1이닝도 못버티고 강판, 덕아웃에서 충격에 정신을 놓고 망연자실한 모습이 찍혀서 안타까움을 자아냈다. 2020년에는 직구가 140이 안 나오고 있어서 2020년에는 1군 등판은 없었고 2군 19경기 등판 1승 3패, 방어율 9.31. 누가봐도 시즌 후 당장 방출자 명단에 이름을 올릴만한 성적이다.

놀랍게도 2021년에 고작 350만엔 깎인 1250만엔에 싸인하며 현역을 이어가게 되었다. 일본 야구계의 루머로 사이토는 데뷔후 몇 년간 어마어마한 인기로 입장권과 상품 판매로 구단에 10억엔이 넘는 큰 돈과 많은 팬을 벌어다 준, 당시 홋카이도 연고이전후 10년이 채 안되어 기반이 잡히지 않아서 구단 경영이 여러모로 어려웠던 상황에 여러모로 큰 도움이 된 선수라 특별 공로자 취급으로 비록 연봉은 못 올려줄지언정 사이토가 본인이 원해서 그만두고 싶을 때까지 절대 짜르지 않을 것이라는 루머가 있는데, 이 루머가 역시 사실이라는 분위기. 그렇지 않고서야 저 나이 저 성적에 방출을 안 할수가...

루머와는 별개로 2020년 성적이 좋지 않았던 이유는 1년내내 팔꿈치 염증을 달고 있어서 치료를 병행하느라 성적이 좋지 않았다고 한다. 어느정도 재활이 끝나가니 내년에는 정상 컨디션으로 던질 수 있을 것이라고 한다. 기대는 안되지만.

그러다가 팔꿈치 인대 파열을 진단받게 되어 토미존 수술을 받아 또 이탈할 것이 유력했으나, 본인이 토미 존 수술을 거절하고 재활만 이어가겠다고 말하며 내년 시즌을 위한 준비에 들어갔다. 뭐 사실 88년생으로 나이가 서른넷이라 수술하든 안하든 던질 날은 얼마 안 남았으니 이해가 안 가는 선택은 아니다.[27] 어차피 원래 2군급 선수여서 수술한다고 해서 기량을 되찾아 오래오래 던질 수 있다는 보장도 없는지라...일단 매일 200개를 던질 정도로 실전 등판까지 회복된 것은 맞지만, 구속이 최대 130km/h 초반이 나오기에 아직은 갈 길이 먼 듯. 선수 생활의 모든 것을 걸고 던진 승부수가 어떻게 작용할지는 추후 시즌을 봐야 알 듯.

2021년 9월 16일 2군 경기에 선발등판했는데 플레이 스타일을 바꾼 것인지 거의 포심을 던지지 않고 투심만 던졌다. 평균 구속은 125km/h 수준이었고 최고구속은 127km/h. 이 정도면 포심으로 던져도 잘해야 135 수준이기 때문에 스타일을 바꾼 듯. 이날 니시카와 료스케에게 홈런을 맞긴 했지만 2이닝 1실점으로 끝냈다. 사실 이 경기가 재활 후 첫 경기는 아니고, 올 시즌 2군에서는 10경기(2선발) 15이닝이라는 기록을 남기고 있었다. 근데 그마저도 ERA 5점대라 1군 기록은 1경기도 없으며 팀 순위가 곤두박질쳐서 가을야구는 끝났음에도 불구하고도 1군에 못 올라가는 중.

3. 은퇴

2군에서도 부진하던 와중 10월 1일자로 현역 은퇴를 선언. 11년간의 선수생활을 마무리하게 되었다. 결국 혹사로 인해 그 좋은 재능을 다 펴지도 못한 채 일찍 은퇴하게 되었다.


10월 17일 은퇴경기를 치른다고 한다. 7회초 두 번째 투수로 등판하여 오릭스의 후쿠다 슈헤이를 상대로 투구수 7개, 결국 볼넷을 주고 내려왔다. 다행히도 뒤이어 등판한 호리 미즈키가 무실점으로 막으면서 실점하지는 않았다. 경기가 끝나고 은퇴식이 진행, 11년간의 선수 생활을 끝마쳤다.


영상을 보면 알겠지만 만원관중 앞에서 와세다 실업고교 동문인 레전드 오 사다하루 회장을 비롯한 구계 선배들의 영상편지, 헌정영상, 헹가레와 기념 스피치, 기념사진 등 2군급 커리어를 가진 선수임에도 은퇴식 수준은 영구결번급 선수 못지않게 진행되었다. 새삼 고시엔 시절 손수건 왕자가 얼마나 대단한 스타였는지 일깨워주는 은퇴식.

이후 사이토의 등번호 1번은 감독자리에 오른 신조 츠요시가 가져갔다.

은퇴 후에는 '주식회사 사이토 유키' 라는 회사를 세웠다. 홈페이지도 있는데 아직 사진이랑 업무의뢰 페이지만 덜렁 있어 정확히 뭘 하는 회사인지는 불명이지만 이후 TBS의 연말 방송 출연을 시작으로 방송활동을 시작한 것으로 보아, 사이토 개인의 매니지먼트 회사가 될 가능성이 높다. 은퇴 이후에는 방송활동을 할 것으로 점쳐진다.

4. 은퇴 후

은퇴 후로는 역시 예상대로 방송인으로 전업했다. 주로 야구 및 각종 스포츠 방송을 중심으로 예능에도 나오고, 케이블TV에서 자기 이름 건 레귤러 방송도 하나 맡으며 잘나가고 있다. 거기에 2023년은 은퇴후 처음으로 맞는 고시엔인지라 방송사들이 고시엔 전설 손수건왕자를 놓칠 리가 없어 여름이 되자 각종 고시엔 특집방송과 해설까지 나가며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지내고 있는데 고교시절부터 스타여서 방송에 자주 나갔던지라 신인 방송인답지 않게 방송에도 능숙하고, 얼굴이 잘생겨서 카메라빨도 잘 받아 평가도 좋다. 추정치이지만 방송 하는 게 워낙 많아서 선수시절 말년보다 연봉은 더 많이 벌며 잘 살고 있다. 일본에서 스포츠 관련 방송을 즐겨본다면 자주 볼 수 있는 얼굴.

5. 평가

2006년 와세다 실업고등학교 3학년 때 고시엔에서 7경기 68이닝동안 948개의 공을 던지며 팀을 우승으로 이끌었다. 경기 도중 마운드에서 손수건으로 얼굴에 땀을 닦는 행동 때문에 '손수건 왕자(ハンカチ王子)'[28]라는 별명을 얻었다.

한편으로는 혹사 여파로 인해 프로 리그에서는 성공하지 못했으며, 일본 내에서 마쓰자카 다이스케와 함께 꼽히는 대표적인 고시엔 최악의 혹사 피해자이기도 하다.[29] 아이러니하게도 고교 시절 라이벌 다나카는 NPB를 평정한 것은 물론이요 MLB에서도 훌륭한 족적을 남겼다.

6. 플레이 스타일

기본적으로 최고구속 "150km/h, 평속 140km/h"정도의 포심을 가지고 있으며 일본 투수라면 거의 누구나 다 던지는 포크볼을 비롯해 슬라이더, 투심, 드물게 커터까지 실전용으로 사용하며 체인지업과 커브도 던질 줄 아는 팔색조. 제구력도 좋은 편이며 체력도 좋아 고등학교 땐 저 살인적인 스케쥴을 고등학생 몸으로 견뎠을 정도이고 프로에 와서도 많게는 150개씩 던져도 평속이 140밑으로 잘 내려가지 않는 이닝이팅 능력도 있다. 고3때는 도대회 결승전에서 200개를 넘게 던지고도 149km/h를 찍었을 정도. 또한 수싸움에 능한편이라 상황에 맞춰서 구질등을 능수능란하게 조절하는 등, 심리전에 강한 것이 고교와 대학시절의 높은 탈삼진 및 좋은 성적의 비밀이었다.

여기까지만 쓰면 왜 부진한지 알 수 없을 정도지만 사이토의 문제는 구위에 있다. 체격이 작은 편이고 호리호리한 인상에서 알 수 있듯이 몸무게도 적다. 여기에 런닝도 잘 하지 않는 편이라, 공이 깃털같다. 찍히면 바로 홈런. 게다가 공 끝이 깨끗해 가볍고 작대기같은 포심을 던지며 변화구도 종류는 많지만 변화량이 적어 던질 줄만 알았지 위력은 대단하지 않다. 선발등판시 140km/h초반인 포심도 150km/h은 물론이고 160km/h도 종종 나오는 프로리그에선 엄청 빠른 편이 아니다. 그렇다보니 2012년에는 포심 헛스윙률이 1군에서 가장 낮은 수준인 2퍼센트였다.

결국 포심이 작대기라 타자를 현혹시킬 수 없다 보니 스트라이크를 잡기 어려워 탈삼진이 어렵고, 그렇다보니 잡아내는 아웃카운트는 커터나 슬라이더를 이용한 땅볼아웃이 대부분으로 대학때까지만 해도 탈삼진형 투수였으나 프로에서는 의도치 않게 땅볼 투수가 되었다. 대학과 프로의 수준차를 여실히 보여주는 부분.

변화구는 좋은가 하면 그런 것도 아니다. 그나마 슬라이더는 좀 긁히는 날에는 긁혀서 뜬금없이 1년에 한번정도 선발승을 거두는지라 구단과 팬들을 희망고문하지만, 피장타율을 보면 알듯이 안 긁히는 날이 더 많다. 나머지 변화구는 말할 가치가 없는 수준.

프로 초창기엔 그러든 말든 어린 패기로 겁없이 던져서 어쨌든 구속만은 빠른 속구와 다양한 변화구, 그리고 신인답지 않은 수싸움에 능한 점이 시너지를 일으켜 그럭저럭 신인치고 뛰어난 성적을 냈지만 관절와순 부상 이후로는 본인도 자기 공이 예전같지 않다는 것을 아는지 피장타를 겁내 바깥쪽으로 도망치는 식의 투구를 하다 보니 제구력이 좋아도 결과적으론 볼넷이 많아져 볼삼비는 현기증나는 수준. 바깥쪽으로 도망다니다가 피장타 아니면 볼넷의 패턴이라 그나마 사이토가 땜빵선발로 1년에 몇 번 1군에서 얼굴을 볼 수 있게 해 주는 원동력인 이닝소화능력도 떨어져가는 판이다. 매년 퇴화한다는 말이 알맞을 듯.

워크에식도 별로 좋지 않은 편으로 일본 내에서도 태만하고 놀기 좋아하는 선수로 한때 유명했다. 여자랑 스캔들이 끊이지 않았던 것도 반대로 생각해보면 그만큼 허비하는 시간이 많았다는 이야기. 사이토처럼 구위가 문제일 경우 웨이트 트레이닝이나 런닝으로 구위를 어느정도 증강시킬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웨이트나 런닝을 잘 하지 않는 선수로 알려져 있다. 웨이트야 일본 전통적인 투수관에 의해 안하는 투수도 많다지만 런닝은 변명의 여지가 없다.

사이토의 태만함은 일본 내에서도 명성이 자자했는데, 대학시절 이치로와 함께 훈련을 할 기회가 있었다. 오프시즌 이치로가 하는 개인훈련에 초대받게 된 것. 프로도 아닌 대학생이 초대받은 건 처음이었는데, 이치로는 사이토에게 다른 학생들과는 싹수가 달라 보인다는 칭찬을 할 정도로 상당히 기대가 컸던 모양이지만, 같이 훈련을 해보고는 말만 잘하고 노력하려는 자세가 보이지 않고 거만하다고 언론에 대고 직접적으로 비난하며 손절을 쳐버렸다.

거기에 그 태만함으로 다르빗슈에게도 손절을 당해버렸다. 프로 입단 당시 인터뷰에서 같은 팀의 선배 다르빗슈 같은 투수가 되고 싶다고 인터뷰를 했기에 이를 기특하게 여긴 다르빗슈가 데리고 다니며 많이 챙겨주었다. 신인이 건방지게 코칭스탭의 폼 지도를 거부하려 들 때도 다르빗슈가 감싸고 돌았을 정도로 아끼는 후배였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입단하자마자 사고를 쳤다. 선발등판했다가 옆구리 통증을 호소하며 1회에 조기강판을 했는데, 아프다고 내려가놓고 라커룸에서 핸드폰을 만지다가 다르빗슈에게 걸린 것. 너 때문에 중계투수들이 고생하는데 나와서 응원은 안하고 핸드폰이나 만지고 있냐고 크게 혼냈으며, 설상가상으로 이 부상 조정차 2군에 가게 되었는데 2군에서 후배와 차를 타고 기숙사를 빠져나가 여자와 놀다가 걸려버렸다. 이게 무려 루키시즌인 2011년에 일어난 일로 1년차 신인이 이런 사고를 친 것. 결국 다르빗슈도 크게 실망해 손절을 쳐버린, 대단한 워크에씩의 소유자였다.

그 외에도 당시 투수코치이던 요시이 마사토 코치에게 '저렇게 연습 안하는 신인은 처음 봤다' 라며 직접적으로 디스를 당하는 등 신인 시절에는 파도파도 괴담만 나오던 선수.

이게 단순히 게을렀다 정도가 아니라 선수 본인을 나락으로 떨어트리는 데에도 일조했는데, 바로 관절와순 부상. 신인시절 코칭스탭이 상체 위주의 폼을 지적하며 폼을 고치지 않으면 어깨 부상이 올 수 있다며 지적했음에도, 그 거만함으로 지도를 거절하고 자기 폼을 고수했다. 결국 예언대로 3년만에 어깨부상이 와버렸으니 단순히 혹사만이 원인은 아니고 본인의 나쁜 태도로 부상을 자초한 부분도 있던 셈이다.

20대 후반에 등번호까지 반납한 현재는 이대로라면 밥숫갈 놔야겠다는 위기의식이 좀 생겼는지 자비로 전지훈련을 가는 정도까지 노력하는 모양이지만 2017년 TV의 훈련과정 취재에서도 웨이트는 안 하고 애꿎은 투구폼만 계속 만지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본인이 무엇이 문제인지 아는 건지 모르는 건지 답답할 지경. [30]

정확히는 투구폼이 문제이긴 하다. 이는 프로 지명 받기 전부터 지적받던 문제로, 특히 노무라 카츠야 전 라쿠텐 감독이 대놓고 깐거긴 한데 공던질때 하반신을 안쓰고 상채 위주인 어깨로만 던진다[31]는 것. 이게 문제가 뭐냐면 위에 언급된대로 사이토는 체격이 왜소한편[32]즉 하반신을 이용해서 체중을 확실하게 실어주지 않으면 구위가 안나올 수 밖에 없는 체격이라는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폼이 문제라는걸 뒤늦게 깨달은 건 좋은데 하반신 강화 없이 폼만 만져봐야 큰 효과를 얻을 수 없다. 결국 고칠게 두가지인데 하나만 고치고 나머지 문제점은 눈 감아버리는 상황.

즉 이미 고교시절 아마야구 수준은 뛰어넘었기에 자기 수준에 맞는 높은 무대로 올라가 배워야 할 타이밍에 대학에서 4년을 놀며 성장이 정체+일본 아마야구 특유의 혹사+본인의 태만이 합쳐져 완벽히 망가져버린 유망주.

다만 사이토가 혹사 및 부상이 없었다고 해도 에이스급 투수로 성장했을까 라는 의견에 대해서는 대부분 회의적이다. 애초에 고등학생 시절에도 평가는 라이벌이라 불리던 타나카가 훨씬 높았다. 이유는 사이토는 그 시점에서 이미 완성형, 즉 본인의 포텐셜이 이미 만개한 상태였다는 것이 일반적인 평가였다. 그러니 프로에 입단했어도 아마 현상유지는 가능하겠지만 더 성장할 가능성은 적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위에도 언급 되어 있지만 노무라 카츠야 감독의 경우 사이토 인기가 절정이었던 대학 시절에도 '문제가 많아서 이대로라면 프로에서 통하지 않을 투수'라고 신랄하게 비판했었다.

그리고 그 해 드래프트에서도 사실 지명도에 비해서 꽤 박한 평가를 받았는데, 사이토가 4구단 경합이라는 사실에 가려지는 사실이지만 실은 당 해 드래프트 최대어는 사이토가 아니라 같은 와세다 대학 동기이자 고교시절에는 완전 무명이었던 오이시 타츠야였다. 인기와 지명도에서 한참 밀리던 오이시가 오히려 6개 구단이 지명경합을 벌이면서 사이토는 실제보다 고평가받고 있다는 것이 냉정한 야구전문가들의 평가였다.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즈가 뽑으니가 최대어처럼 보였던 느낌도 있다.[33][34]

밑에 언급되듯이 당시 사이토 유키는 평범하게 야구만 잘하는 아마추어 대학생이 아니라 어떤 프로선수보다 상품성이 높은, 다시말해 드래프트에서 뽑기만 하면 돈보따리가 보장되는 선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4구단 경합이라는 건 인기에 비하면 생각보다 선수로서 평가는 박했다는 뜻이다. 특히 오이시 타츠야말고도 2010 드래프트에서 투수로서 스카우트 평가는 대학에서 최고구속 157km를 기록하고 최우수투수상을 받은 사와무라 히로카즈가 사이토 유키보다 훨씬 더 높았다. 단지 사와무라는 메이저리그의 여러 구단에서도 오퍼가 왔기 때문에 요미우리 자이언츠에 지명 안되면 계약안하고 메이저간다고 엄포를 놓아서 요미우리만 지명한 것 뿐이다. 선배 초노랑은 1년 차이이지만 둘 다 거인의 우승을 시켰고 신인상[35]을 받았다.

물론 좋게 보는 측도 한계가 명확해 애초에 프런트라인 에이스급으로 성장할 것까지는 기대 안 했다. 기본적으로 BQ가 뛰어난 선수라서 좋게 보는 측은 대략 하위선발 정도까지의 실링을 기대했었고, 그만큼 못 크더라도 불펜이라도 좋으니 어쨌든 1군 한자리 먹고 꾸준히 TV에 얼굴 비춰줄 급만 되면 그 엄청난 스타성으로 상품과 입장권 판매로 구단에 막대한 돈을 벌어다 줄 것이 뻔히 보였기 때문에 그렇게 많은 구단들이 달려들었던 것.

그리고 이는 절대 무리한 기대는 아니었던 것이, 실제로 입단 1~2년차까지는 하위선발로서 그럭저럭 가능성을 보였고 아무리 보수적으로 봐도 1군 불펜 한자리 정도는 먹을 수 있는 정도의 실링은 지닌 선수였다. 3년차의 관절와순 부상이 모든 것을 망쳐놓았을 뿐.

실제로 2020년 8월자 기사에 따르면 입단 3~4년째까지는 사이토 선발경기는 거의 전경기 만원에 상품도 대량으로 팔려 여태까지 사이토가 벌어온 돈이 10억엔 이상이라고 하니 닛폰햄으로서는 그야말로 대박 친 셈. 닛폰햄이 사이토에 투자한 연봉과 계약금은 은퇴 때까지 총액 3억엔 정도니 300퍼센트가 넘는 투자대박을 낸 셈이다.

실제로 선수 말년에는 평속이 140이 안 나오고 볼넷도 많은, 나이 많은 2군 붙박이 선수임에도 방출은 커녕 1년에 몇 번이라도 1군 기회를 얻는것은 이런 구단 경영에 대공헌을 한 선수인데다 10년이 지난 현재도 2군전에 사이토를 보러 오는 아줌마들이 있고 물건이 소소히 팔리기 때문. 닛폰햄은 구단 차원에서 2군 마케팅에도 힘을 실어주는 구단이기 때문에 이런 2군 얼굴마담이 있으면 사업에 도움이 된다. 이렇듯 야구 외적으로 확실히 1차지명 값을 톡톡히 하긴 했다.

7. 여담

  • 그외 여담으로 팬서비스와 언론을 대하는 태도가 좋은 선수였다. 훈련 태도가 불성실하다며 사이토를 손절한 다르빗슈마저도 나중에 유튜브에서 그 프로선수로서의 태도는 대단했다고 인정했을 정도. 수많은 언론의 스포트라이트와 끊임없는 관심에도 항상 여유로움을 잃지 않고 친절하고 젠틀했으며, 성적이 추락한 이후에는 다나카와 비교되며 비웃음거리가 되었고 비난도 많이 받았음에도 전혀 주눅든 기색도 없었고, 그렇게 오랫동안 성적이 안나오면 포기하고 조기 은퇴해 버릴 법도 한데 몇년이나 포기도 하지 않고 과거의 영광에 매달리지도 않고 묵묵히 2군에서 도전을 이어나가는 모습은 훌륭했다며 유튜브에서 사이토에 대해 칭찬했다. 여러모로 그 관절와순 부상이 사이토를 선수로서는 망가트렸지만, 인간적으로는 성숙하게 만든 계기가 되었다고 할 수 있겠다.
  • 야구를 시작한 계기는 여자에게 인기있고 싶어서. 실제로 실력은 몰라도 인기 하나만큼은 엄청났으니 어쨌든 꿈을 이루긴 했다.
  • 말빨도 상당히 유창한 편이었는데, 입단 기자회견에서 프로에 오면 어떤 타자와 상대하고 싶냐는 질문에 가능한 한 타율이 낮은 타자라는 개드립으로 좌중을 빵 터트리기도 했고, 그 외에도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부담스러워하지 않고 오히려 즐기는 여유로운 모습으로 인기가 많았다. 덕분에 오히려 은퇴후에 연예인으로서 잘나가고 있으니 여러모로 야구선수보다는 연예인에 어울리는 성격이었던 듯.

8. 연도별 주요 성적

NPB 통산 성적
년도 승-패 이닝 방어율 탈삼진
2011 6-6 107 2.69 62
2012 5-8 104 3.98 59
2013 0-1 4 13.50 1
2014 2-1 26 4.85 20
2015 1-3 42.1 5.74 24
2016 0-1 23.2 4.56 14
2017 1-3 28 6.75 14
2018 0-1 8.2 7.27 3
2019 0-2 21 4.71 12
2020 1군 기록 없음
15-26 364.2 4.24 209


[1] 사회과학부.[2] 홋카이도에 소재한 고등학교로서 엘리트 체육 전문인 학교. 고시엔 단골손님이며 쟁쟁한 프로야구선수를 배출했으며 아이스하키부가 전국구 최강팀으로 군림하고 있다. 전국고등학교 아이스하키 선수권대회 최다 우승교(31회)로 '94~'02 9연패, '04~'08 5연패를 달성했으며 2011년도에는 무실점으로 전국대회를 제패했다. 축구부도 유명하고 엘리트 스포츠 분야에서 명성을 떨치는 학교다.[3] 당시까지 고시엔 역사상 2연속으로 여름 고시엔에서 우승한 고등학교는 토마코마이 고교를 포함해 6학교뿐이었다.[4] 8강전에서 요코하마고등학교에 패배했다. 요코하마고는 그러나 같은 해 열린 여름 고시엔에서는 1회전에서 나카타 쇼의 오사카토인고교에게 패했다.[5] 와세다 실업고의 우승 경력으로는 봄 고시엔 우승 1회가 있다. 1957년(제29회) 대회였으며, 2학년이던 오 사다하루가 4경기 연속 완투승을 거두며 맹활약했다.[6] 관동시청률로 NHK와 TV 아사히 시청률의 합산. 순간 최고 시청률은 37.1%[7] 여름 고시엔 1회전은 부전승으로 통과, 2회전 vs 오사카토인고교, 3회전 vs후쿠이상업고교, 8강전 vs니혼대학야마가타고교, 준결승은 가고시마공고, 결승전은 고마자와대학 도마코마이고교와 2경기[8] 2회전 오사카토인고교의 2학년 강타자 나카타 쇼와 대결해 4타수 무안타 3삼진을 거두었다. 나카타와는 훗날 프로에서 같은팀으로 만나게 된다. 물론 나카타 쪽이 선배다. 나이로는 연하이지만 프로에서는 3년 선배.[9] 준결승에서 상대한 가고시마공고는 여름 고시엔 첫 출전교였는데, 이 학교 출신인 가와사키 무네노리와 와세다실업고 동문이자 가와사키의 호크스 감독이었던 오 사다하루간의 즐거운(?)설전도 있었다.[10] 와세다 실업고 1학년이던 1980년, 제62회 여름 고시엔 대회 예선 경기인 도쿄 동부 대회에서는 내야수의 대기 선수로서 엔트리에 들어갔고 팀내 에이스 투수가 갑작스런 부진에 의해 등판하면서 호투했다. 1980년 제62회 여름 고시엔 대회 본선에서도 5경기에 등판해 네 차례의 완봉승, 44와 1/3이닝 연속 무실점의 호투로 팀은 결승에 진출했지만 요코하마 고등학교한테 4대 6으로 패배했다. 당시에, 이 같은 활약에 더불어 단정한 얼굴형을 가진 외모로 여성 팬들로부터 절대적인 인기를 얻었다. 경기 종료 후 선수들을 태운 버스에서 여성 팬들이 대거 몰려와 버스 주변을 에워싸며 한바탕 소동이 일어날 정도로 유명하다. 이 기간에 와세다 실업고등학교의 성적은, 아라키를 에이스 투수로 봄과 여름에 걸쳐 5시즌 연속으로 고시엔에 출전했다. ‘다이스케’(大輔)가 신생아의 이름 랭킹 1위에 오르는 등 일명 다이짱 열기(大ちゃんフィーバー)라는 사회적 현상이 일어나기도 했다. 1980년 9월에 태어난 마쓰자카 다이스케의 어머니도 아라키 다이스케의 열성팬으로 알려져 있어 그의 아들을 ‘다이스케’라고 명명했다는 에피소드가 있다. 프로에서는 14시즌동안 180경기 116선발 39승 49패로 평범한 성적밖에 내지 못했다.[11] 그리고 대회가 열린 타카사고시에서는 이 경기장에 손수건 기념 구장(ハンカチ・メモリアル・スタジアム)이라는 애칭을 붙여서 PR 소재로 써먹었다. 이 당시 사이토 유키의 절정에 이른 인기를 증명하는 사례 중 하나지만, 프로에서 활약을 이어가지 못하는 상황에서 2013년에 태풍으로 애칭이 쓰여진 입간판이 부서져버리기까지 하자 지자체에서는 간판을 재설치하지 않았고, 그런 이름이 있었다는 사실 자체가 슬그머니 잊혀지고 있다는 모양.[12] 시합 평균 9.25이닝.[13] 7경기를 정규 이닝으로만 계산해봐도 63이닝이다. 7경기 정규이닝 완투+6이닝인 셈. 즉 연장경기까지 혼자 소화했다는 말이다.[14] 참고로 비교하자면 2015년 송은범은 선발투수로 주로 나와서 1년 동안 70.1이닝 던졌다.[15] 이 투수는 나중에 메이지 대학에 진학했다가 사회인 야구 기업팀인 일본생명 야구부에 취업했다.[16] 사회인야구 기업팀인 JR 큐슈 야구부에서 8년간 뛰면서 드래프트에도 몇 번 지원했으나 매번 물먹고 2017년에 26세로 야구를 그만두었다.[17] 즉, 한국으로 따지면 서울대학교 야구부에게 패배를 했다는것과 비슷하다. 서울대 야구부도 대학 전국대회에서 만년 패배를 당했다가 2004년 처음으로 창단 승리를 따냈다.[18] 라고 하는데 드래프트 결과는 대학 동기 오이시 타츠야가 6구단 동시 1위 지명을 받으면서 역전당했다. 근데 웃긴건 그 오이시는 대학교 때 가장 잘 던졌다는 사이토보다도 프로에서 못했고 2019년을 끝으로 방출당해 은퇴까지 하면서 결국 사이토의 승리. 사실 이 해 드래프트는 와세다 천하라서 와세다의 3선발 역할을 하던 재수생 출신 동기 후쿠이 유야와 사회인야구에서 뛰던 와세다 선배 스다 코타도 1라운드 지명을 받았다. 근데 이 선수들 다 망했고 그나마 가장 잘 된 게 2022년까지 12년간 현역으로 뛰었으며 유일하게 30승을 넘긴 후쿠이 유야다.[19] 미녀이며 가부키 배우 13대 이치카와 단쥬로(당시 11대 이치카와 에비조)의 아내 코바야시 마오(2017년에 유방암으로 사망.)의 언니다.[20] 혹사 부분을 반영한건지 다른 선수들은 보통 30대 초중반부터 기량이 하략할 조짐이 보이지만 여긴 무려 20대 후반부터 기량이 뚝 떨어진다.[21] 사이토 유키 고시엔 통산 106이닝 1502구, 다나카 마사히로 통산 91.1 이닝 1324구. 문제는 사이토 유키의 고시엔 기록은 전부 2006년 봄고시엔 4경기와 여름고시엔 7경기의 기록이라는 점이다. 11경기 동안 무려 106이닝 던졌다.(봄 여름 각각 한번씩 15회 연장으로 던진적이 있어서 그렇다) 반면에 다나카의 2006년 고시엔 이닝수는 52.2 이닝으로 나머지는 1,2학년 때의 기록이다.[22] 대학 최고 구속은 150km, 프로 입단뒤 최고 구속은 147km.[23] 단 간과해서는 안될것이 2011~2012년은 통일구의 낮은 반발력으로 인한 극도의 투고타저 시즌으로 사이토가 2년간 기록한 성적은 투고타저의 환경과 함께 투수친화적인 삿포로 돔의 영향까지 맞물려서 어느정도의 수혜를 받았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그나마 2011년은 준수했다고 봐 줄만 하지만 2012년은 냉정하게 말해 리그 평균보다도 평균자책점이 저조했다.[24] 류현진이 2015년에 수술 했던 바로 그 쪽이다. 류현진은 성공적으로 재기해서 간과하기 쉬운 부분이지만 재기 확률이 낮은 부상.[25] 한국에서는 조용준이 다친것과 비슷한 증상. 미국에서는 류현진이 다친 증상과 비슷[26] 그러나 오타니는 부상으로 시즌을 일찍 접었다. 또는 입단 계약 당시 입단 후 5년간 팀에 있으면 해외진출을 돕기로 하여 자기 스케쥴 관리를 해야하기 때문에 소속팀은 오타니에게 어떠한 요구를 하지 않았다.[27] 참고로 88년생 동갑내기고 사이토처럼 기대치의 반도 못 해준 망한 1라운더 취급을 받는 오미네 유타는 2019년에 수술을 선택하여 1년을 날린 후 2020년에 33살로 복귀해서 성적은 별로지만 1군에 간간히 나오고 있다. 일단 구속은 평균 140대 후반으로 오히려 더 좋아졌다. 그래서 사이토도 차라리 수술하는게 낫지 않겠냐는 인식도 있는데 본인이 안 한댔으니 가정은 무의미.[28] TV애니메이션 다이아몬드 에이스의 등장인물 나루미야 메이의 모델이 되기도 했다.[29] 대충 대한민국에서 한기주가 갖는 위상이랑 비슷하다. 사이토 앞에 1년 빠른 스지우치 다카노부도 이런 위상 이였고 둘이 엮인 기사도 있었다.[30] 다만 매년 오프시즌마다 훈련 현황 공개하는걸 보면 웨이트는 꾸준히 한건지 몸은 확실히 좋아졌다. 문제는 그게 구위 상승으로까지 이어지지 않아서 투구폼에 문제가 있는건 맞는듯 하다.[31] 이는 2000년대의 한국의 김시진 감독이 투수코치 시절에 리그에 뛰는 국내외선수 막론하고 깠던것과 비슷.[32] 176.7cm로 투수로 뛰기에는 아쉬운 신체 사이즈이다.[33] 이 팀은 앞뒤안보고 그 해 최대어만 뽑는다. 닛폰햄에서 자기 뽑으면 입단을 거부하겠다고 미리 공언해둔 선수라도 뽑는다. 이 덕분에 최근 몇 년 간 두 번이나 입단거부를 당했다. 그중 하나가 강제로 지명해놓고 나가리된 Only 요미우리를 외친 초노 히사요시인데 당시엔 전체 1라운더가 아니라 중간 4라운더라 닛폰햄 구단 스카우터들도 될때로 해봐라 하는 형식으로 여기고 지명을 했다고 한다.[34] 근데 그 오이시는 2019년을 끝으로 방출당해 은퇴. 통산 기록을 보면 사이토보다도 안 좋았다 결론적으로는 그나마 사이토가 조금 더 프로에서 길게 살아남았다는 것. 이 해의 1라운더 잔혹사가 유독 심했다. 스다 코타, 이시미네 쇼타, 고토 슌타, 야마시타 아야츠구 등 1라운더들이 줄줄이 망해버렸으니. 그 외에도 시오미 타카히로, 후쿠이 유야(사이토, 오이시와 와세다 동기였으나 재수해서 들어와서 1살 많았다. 즉 와세다 선발 트리오가 모두 1라운드 지명을 받았다는 것이다.)등도 완전히 망하지는 않았지만 기대치보다 못한 모습을 보였다. 이 해의 1라운더는 기복이 심해서 몇 년 정도만 잘하고 나머지는 망한 에노키다 다이키 정도만 해도 괜찮은 결과였다. 물론 오노 유다이, 사와무라 히로카즈, 야마다 테츠토처럼 성공한 픽도 있지만. 한국에서 2010년 드래프트랑 가장 비슷하다. 그해에 입단한 신인들 대부분이 저조했고 이마저도 전년도 맹활약 하던 고교야구 선수들이 메이저리그 스카우터들과 빠르게 계약하는 일도 있었다.[35] 초노는 2010년, 사와무라는 201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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