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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브 생 로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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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000><colcolor=#ffffff> 이브 생 로랑
Yves Saint Laurent
파일:fashiondesigner_yves.jpg
본명 이브 앙리 도나 마티외생로랑
Yves Henri Donat Mathieu-Saint-Laurent
출생 1936년 8월 1일
프랑스령 알제리 오랑
사망 2008년 6월 1일 (향년 71세)
프랑스 파리
국적
[[프랑스|]][[틀:국기|]][[틀:국기|]]
직업 패션 디자이너
학력 파리 의상조합학교
종교 가톨릭
연인 피에르 베르제 (1958~1976)

1. 개요2. 생애
2.1. 유년기2.2. 디올 시절2.3. 군 복무2.4. YSL 창립2.5. 말년2.6. 사망
3. 디자인 특징4. 브랜드5. 기타

[clearfix]

1. 개요

S’habiller est un mode de vie.
옷을 입는 것은 삶의 방식이다.
프랑스패션 디자이너. 자신의 이름을 딴 명품 패션 브랜드 생 로랑의 공동 설립자이며, 20세기 최고의 디자이너 중 한명으로 평가받고 있다. 한국에서는 ‘입생로랑’으로도 줄여서 부른다. 하지만, 프랑스어 발음은 ‘이브생로항’에 가깝다.

젊은 나이로 데뷔해 혁신적인 디자인으로 당대 사람들을 놀라게 했고, 최초의 프레타포르테 컬렉션, 최초로 여자에게 남자 수트를 입힌 디자이너(당시에 논란이 많았다고 한다.), 오뜨꾸뛰르에 최초로 스페인의 짚신이었던 에스파드류를 활용, 계속해서 군복을 여성 오뜨꾸뛰르로 해석, 최초로 오뜨꾸뛰르에 레오파드 패턴을 쓰기도 하고, 패션사에서 길이 남을 이벤트였던 음악과 퍼포먼스를 반영한 최초의 패션쇼[1]를 시도하는 등등 패션사에 큰 혁신을 불러일으켰다.

2. 생애

2.1. 유년기

생 로랑은 1936년 8월 1일, 프랑스 알제리오랑에서 프랑스인 부모 '루시엔 안드레 마티외 생 로랑'과 '샤를르'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는 지중해의 한 별장에서 미켈레와 브리지트라는 두 여동생과 함께 자랐다. 생 로랑은 복잡한 종이 인형을 만드는 것을 좋아했다고 한다. 특히 10대 초반까지는 어머니와 누이들을 위한 드레스를 디자인하기도 하며 어린 시절부터 남다른 재능을 보이며 성장했다.

2.2. 디올 시절

1953년, 생 로랑은 국제 울 사무국이 주관하는 ‘젊은 패션 디자이너 공모전’에 3개의 스케치를 제출했고, 생 로랑은 이 공모전에서 3등을 차지했다. 이 시기에 생 로랑은 파리에서 머무는 동안 당시 프랑스 보그의 편집장이었던 미셸 브루노프를 만나게 된다. 재능있는 새로운 디자이너들을 발굴하고 잘 지원해주는 인물로 알려졌던 미셸 브루노프는 생 로랑이 가지고 온 스케치에 깊은 감명을 받게되고 '제대로 패션 디자이너가 돼보는 것이 어떻겠냐'고 제안하게 된다. 생 로랑은 결국 그의 충고를 따르기로 하고 파리 의상 조합 학교에 입학하게 된다. 그곳에서부터 그의 디자인은 여러 사람들에게 금방 주목받게 되었으나, 몇 달 만에 그만두었다. 1954년, 다시 국제 울 사무국 주관 콘테스트에 참가해 친구였던 페르난도 산체스와 당시 독일 출신의 젊은 유학생이었던 칼 라거펠트를 제치고 1등을 차지한다.[2] 생 로랑은 우승 직후 몇 장의 스케치들을 미셸 브루노프에게 가져다주었는데, 브루노프는 크리스챤 디올이 그날 아침 자신에게 보여준 스케치와 생 로랑의 스케치 사이에 밀접한 유사성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그는 곧바로 생 로랑을 디올과 만나게 했으며 디올은 그 자리에서 즉시 생 로랑을 고용하기에 이른다.

디올은 생 로랑의 천부적인 재능을 금방 알아보긴 했으나 생 로랑은 디올 하우스에서 직접적인 디자인보다는 스튜디오를 장식하고 액세서리를 디자인하는 등 일상적인 작업을 하며 디올의 밑에서 조수로서 1년을 보내게 된다. 하지만 생 로랑은 곧 크리스챤 디올오트쿠튀르 컬렉션에 대한 스케치를 본격적으로 제출할 수 있게 되었고, 매 시즌이 지날 때마다, 디올은 이전보다 더 많은 생 로랑의 스케치들을 수용했다. 1957년 8월, 디올은 생 로랑의 어머니를 직접 만나 ‘나의 뒤를 이을 디자이너로 생 로랑을 선택했다’고 그녀에게 말했다. 이 말을 듣게 된 생 로랑의 어머니는 당시 디올이 52세에 불과했던 터라 ‘벌써 후계자를 선정한다고?’라며 의아해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 해 10월, 디올이 이탈리아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했을 때 생 로랑과 그의 어머니는 충격을 금치못하게 된다.

크리스챤 디올이 사망하자 생 로랑은 21세의 젊은 나이에 디올 하우스의 수석 디자이너 자리를 맡게 된다. 생 로랑의 1958년 봄 컬렉션은 크리스챤 디올이 재정적인 위험으로부터 달아날 수 있었던 계기가 된다. 생 로랑은 이 컬렉션에서 디올의 '뉴룩'의 소프트한 버전인 "트라페즈 드레스"라는 창작물을 발표하게되고, 이 드레스는 생 로랑을 국제적인 스타덤에 올라가는 데에 중요한 역할을 해주었다. 이 컬렉션에 포함된 다른 드레스들은 거의 모두 어깨가 좁고 아래쪽에서 부드럽게 펄럭이는 형태의 디자인이었다. 이 시기에 그는 그의 이름을 '생 로랑'으로 줄였다. 왜냐하면 국제 언론들이 자신의 이름을 철자하기 어려울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이후 1958년 가을 컬렉션에서는 호블 스커트와 비트닉(Beatnik) 패션이 돋보이는 쇼를 선보였으나, 그의 첫 컬렉션과 같은 수준의 찬사를 받지는 못했으며 오히려 혹평을 받게 된다. 이 컬렉션은 의도치 않게 생 로랑에게 디올에서의 마지막 컬렉션으로 남는다.

2.3. 군 복무

1960년에 생 로랑은 알제리 전쟁으로 인한 군복무 때문에 프랑스군에 징집되고 만다. 크리스챤 디올 하우스의 오너이자 막강한 언론계 남작이었던 마르셀 부사크가 1958년과 1959년에 생 로랑의 징집을 막기위해 프랑스 정부에 압력을 가했을 것이라는 추측이 있으나, 생 로랑에게 비참했던 1958년 시즌 컬렉션이 끝마친 뒤 마르셀 부사크가 입대하라고 권유했다는 것이 사실로 전해진다.

생 로랑은 동료 병사들과의 트러블과 군생활의 스트레스로 인해 군병원에 입원하기까지 한다. 그곳에서 그는 디올로부터 해고되었다는 통보를 받게 되는데, 이러한 사실은 생 로랑의 정신적 상태를 더욱 악화시켰고 발드그라스 군병원으로 이송되어 그곳에서 다량의 진정제와 정신작용제를 투여받게 된다. 이 사건을 계기로 생 로랑은 약물중독에 빠지게 되었고 한 평생 알코올에 의존하며 살아가게 된다.

1960년 11월, 군병원에서 퇴원한 생 로랑은 디올 하우스를 계약 위반 혐의로 고소하고 이후 승소해 10만 불을 보상받았다.

2.4. YSL 창립

파일:생 로랑 구 로고.svg파일:생 로랑 구 로고 화이트.svg
입 생 로랑의 풀 네임 로고

생 로랑은 정신적인 회복기를 거친 후, 그의 파트너이자 기업인이었던 피에르 베르제와 함께 미국의 백만장자 ‘마크 로빈슨’으로부터 자금을 받아 그들만의 패션 하우스 이브 생 로랑(YSL)을 시작한다.[3]

1960년대와 1970년대에 입 생 로랑은 비트닉룩, 남녀를 위한 사파리 재킷, 꽉 끼는 바지, 기다란 허벅지 높이 부츠, 그리고 1966년, 가장 유명한 여성용 턱시도 슈트인 르 스모킹(Le Smoking)과 같은 패션 트렌드를 대중화시켰다. 또한, 신조형주의 화가였던 피트 몬드리안의 유명한 회화 작품 <빨강, 파랑, 노랑의 구성>에서 영감받아 제작해 1965년에 발표한 몬드리안 드레스는 특히나 유명하다. 이처럼 생 로랑은 60년대와 70년대에 패션 산업에 새로운 변화를 가져오게 된다.

1967년에 생 로랑은 자신의 프레타포르테 하우스인 리브 고쉬(Rive Gauche) 라인을 오픈하게 되는데, 이때부터 그는 오트쿠튀르에서 기성복으로 초점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 이유 중 하나는 패셔너블한 스타일을 더 많은 고객들에게 패션시장에서 좀 더 저렴하고 알맞은 가격에 제공하는 것이 목표였기 때문이었다. 또한 생 로랑이 전면적인 프레타포르테 라인을 내놓은 첫 번째 프랑스 쿠튀리에라고 알려져 있다.

프레타포르테 라인을 판매한 YSL의 리브 고쉬 매장 중 첫 번째 매장은 1966년 9월 26일, 파리 6구에 문을 열었다. 이 매장의 첫 번째 고객은 바로 카트린 드뇌브였으며, 생 로랑은 영화에 출연하는 그녀를 위해 많은 의상들을 제작해주었다.

르 스모킹 맞춤형 턱시도 정장을 선보인 1965년 가을 컬렉션 등 그의 컬렉션 중 상당수는 팬들과 언론으로부터 호평을 받았지만, 1940년대 패션에 영감을 받은 1971년 봄 컬렉션 등 일부 컬렉션들은 논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어떤 이는 그가 경험하지 못한 제2차 세계 대전독일프랑스 점령기를 낭만화시켰다고 비평했고, 또 어떤 이는 당시의 매력적이지 못했던 공리주의를 되살렸다고 평가하기도 했다. 또한 당시 프랑스 신문 회사였던 'Soir'는 생로랑의 1971년 봄 컬렉션에 대해 비웃는듯한 기사 제목을 남기기도 했다.

프레타포르테 라인은 비평가들 보다는 대중들에게 엄청난 인기를 끌게 되었고 이는 곧 생 로랑과 피에르 베르제에게 오트쿠튀르 라인보다 몇 배는 더 많은 수입을 벌여들어 주었다. 그러나 몇 년 동안 건강이 위태로웠던 생 로랑은 매년 두 개의 오트쿠튀르와 두 개의 프레타포르테 컬렉션을 디자인해야 하는 중압감에 따라 성격이 변덕스러워졌으며, 점점 마약에 의존하게 되었다. 일부 쇼에서는 쇼가 끝날 무렵 간신히 런웨이 무대를 걸을 수 있었고, 모델들의 부축을 받아야만 했다.

2.5. 말년

1983년 생 로랑은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서 단독 전시회를 개최한 최초의 살아있는 패션 디자이너라는 영예를 얻게 되었다. 2001년에는 자크 시라크 프랑스 대통령으로부터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수여받았다. 생 로랑은 2002년에 은퇴하여 점점 더 은둔 생활을 하게 되었고, 애완동물인 불독 무지크와 함께 노르망디모로코에 위치해있던 그의 집에서 머물렀다. 또한 그는 파리에서 피에르 베르제와 함께 이브 생 로랑 하우스의 역사를 기념하기 위해 재단을 설립하기도 했다.

2.6. 사망

생 로랑은 2008년 6월 1일, 파리에 위치한 그의 집에서 뇌종양으로 인해 사망했다.[4]생 로랑이 살 날이 1, 2주밖에 남지 않은 상태에서 말기 판정을 받자, 피에르 베르제와 의사는 생로랑에게 그의 임박한 죽음을 알지 못하게 하는 것이 좋겠다고 상호 결정했다고 한다. 피에르 베르제는 이후에 "나는 생 로랑이 그러한 사실을 받아들일 만큼 강하지 않은 사람인 것을 잘 알고있다"고 언급했다.

파리의 Église Saint-Roch에서 생 로랑의 가톨릭 장례식이 치러졌다. 그의 장례식에는 이란의 전 왕비였던 파라 팔라비와 자크 시라크의 영부인 베르나데트 시라크, 카트린 드뇌브, 니콜라 사르코지와 그의 부인이었던 카를라 브루니 등이 참석했었다.[5]

그의 시신은 화장되었고 그의 유골은 1980년부터 피에르 베르제와 함께 소유했던 거주지이자 식물원이었던 모로코 마라케시에 위치한 마조렐레 정원에 뿌려졌다. 이후에 피에르 베르제는 영감과 휴식이 필요할 때면 언제나 그곳을 방문한다고 언급하기도 했다.

피에르 베르제는 먼저 떠난 평생의 연인 생 로랑에게 보내는 편지인 <Lettres a Yves>를 썼다. 피에르 베르제는 이 책을 두고 '나의 방식으로 쓴 이브 생 로랑의 전기'라고 표현했다. 한국판은 <나의 이브 생 로랑에게>라는 제목으로 프란츠 출판사에서 출간되었다.

3. 디자인 특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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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디자인 철학

예로부터 패션을 여성인권과 연결시켜 디자인에 반영하는 브랜드로 유명했다. 미니스커트라든가, 노브라로 맨가슴을 드러내는 시스루 룩 등, 매우 파격적이고 노출도 높은 여성 패션을 선보이는 브랜드.

또한 남성의 전유물로 여겨지던 패션을 여성용으로 재해석하는 것도 특기다. 예를 들어 최초의 여성용 정장 수트, 최초의 여성용 턱시도, 최초의 여성용 트렌치 코트 등을 선보여왔다. 그정도로 옷에 ‘최초의 여성용’이라는 수식어가 붙어있다면 대체로 이 곳에서 나온 것들.

4. 브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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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기타

  • 게이였다. 어린 시절 엄격한 가톨릭 커뮤니티에서 받은 괴롭힘과 내성적 성격이 겹쳐 알제리에서 몰래 다른 동성애자 소년들과 교제했다고 한다.
  • 최초로 여성을 위한 바지 정장을 만들고, 세계 최초로 흑인 모델을 패션쇼에 세웠다.


[1] 그전까지만 해도 패션쇼라는 개념이 없고 컬렉션 프레젠테이션이라 음악 없이 모델들이 번호표를 들고 다녔다. 이것이 에디 슬리먼의 생로랑에서의 마지막 패션쇼에서 음악이 없었던 이유.[2] 참고로 칼 라거펠트는 ‘드레스’ 부문에서 2위, ‘코트’ 부문에서 1위를 차지했다.[3] 이후 생 로랑과 피에르 베르제는 1976년에 연인 사이로는 헤어졌지만 비즈니스 파트너로서의 관계는 평생 지속되었다.[4] 72세 생일을 딱 두 달 앞두고 사망[5] 참석한 여성들 대부분 그에 대한 존경심을 표하는 의미에서 바지정장을 입고 참석했다.[6] 이때 흘러나온 BGM은 모리스 라벨이 작곡한 볼레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