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4-23 01:29:13

장민석/선수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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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아마추어 시절2. 현대 유니콘스 시절3. 우리-서울-넥센 히어로즈 시절
3.1. 2010 시즌3.2. 2011 시즌3.3. 2012 시즌3.4. 2013 시즌
4. 두산 베어스 시절
4.1. 2014 시즌4.2. 2015 시즌
5. 한화 이글스 시절6. 은퇴

1. 아마추어 시절

경남고 시절에는 이대호와 함께 투수 좌우원투펀치경남고를 이끌었다. 고3이던 2000년에는 부산 화랑대기 전국고교야구대회에서 채태인의 부산상고에 패배해 준우승에 그쳤다.[1]

2. 현대 유니콘스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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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2차 전체 9순위의 괜찮은 지명순위로 1억의 계약금을 받으며 투수로 입단하였으나, 이렇다 할 성적이나 출장기회를 잡지 못한 채 3년간 1군 4경기 출장한 것이 전부였다. 2004년 시즌 중 현역 일반병으로 군대를 다녀왔지만 여전히 2군일 뿐이었다. 중간계투로라도 기회를 얻어 보려고 하면, 꼭 쓸만한 좌완투수들이 팀에 합류했다.

은퇴 후 인터넷 방송에서 밝힌 일화로, 현대 2군의 군기가 강했으며 막내급 선수들이 선배 선수들의 짐과 야구장비를 다 옮겨야하자 이게 무슨 프로냐고 한탄했다고 한다. 조용준박명환야구TV에서 밝히길 장민석이 대선배 포수 장광호와 호흡을 맞출 때 장광호의 사인에 고개를 가로젓는 모습을 보이자 공수교대 시간에 박경완에게 싸대기 세례(...)를 받았다고 한다. 어디서 감히 선배 사인에 No를 하냐, 목에 기브스하게 해줄까? 말까지 들었다.

3. 우리-서울-넥센 히어로즈 시절

그러다 2007년 시즌 중 2군 경기에서 타자 부족으로 인해 우연히 타자로 출장하게 됐고, 이 때 타석에서 안타와 타점을 뽑아낸 바 있는데, 이 모습을 본 김응국 타격코치로부터 타자로 전향해보지 않겠냐는 권유를 받았다. 2008년 현대 유니콘스가 해체되고 선수단이 신규창단한 우리 히어로즈로 이관되면서 타자로 전향하기로 마음먹는다.[2]

당시 구단이 재창단되는 과정에서 원래는 방출 대상이었으나 '일단 현대 선수들과 모두 계약을 맺고 팀을 꾸려가겠다'는 히어로즈의 방침으로 간신히 잔류했다. 언제 짤릴 지도 모르는 절박한 상황에서 심재학 2군 타격코치에게 가르침을 받으며 타격 실력이 일취월장하여 퓨처스리그에서 좋은 성적을 기록했다.

3.1. 2010 시즌

이택근의 트레이드 등으로 야수진이 부족해진 2010년 1군 주전으로 전격 픽업되어 프로생활 10년만에 1군 풀시즌을 보내게 된다. 주로 중견수로 많이 출장하였다.

2010년 성적은 타율 0.283 출루율 0.343 OPS 0.715 홈런 1 도루 41 타점 47. 1번 타자로 뛰면서 팀 내 타율 4위에 타점 5위의 좋은 성적을 기록했다.

1군에서 처음 맞는 시즌임에도 나쁘지 않은 타격과[3] 도루 3위를 기록하는 준족을 자랑하면서 다음 시즌의 활약을 기대하게 했지만...[4]

3.2. 2011 시즌

연습경기 때 무한도전 타인의 삶에서 정준하에게 교체된 선수가 이 선수다.

초반 극도의 부진을 보여 고종욱과 함께 잠시 2군으로 내려갔다가 5월 즈음에서야 1군에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여전히 성적은 안 좋은 편...인데 5월 5일 2회에 서재응의 공을 받아쳐 홈런을 만들었다.

이후 타격감이 살아날거라는 기대감을 받았으나, 다시 타격감이 급격히 하락(…). 2011년 5월 22일자 기준으로 현재 타율은 0.135.

타율도 사망 출루도 사망인 상태에서 보내기 번트를 대거나 대주자로 시즌을 보내다가 7월부터 갑자기 폭풍 하락을 하는 김민우를 받치기 위해 다시 상위타자로 출장 중인데...

8월 들어 0.318의 타율, 5타점, 9득점, 2도루를 기록하면서 좋은 타격감을 보였다.

8월 19일 생애 첫 끝내기 안타를 만들며 KIA전에서 승리하는 데 일조했다.

하지만 9월에 0.170이란 타율로 8월의 타격감을 다 까먹으면서 결국 타율 0.242로 시즌을 마감했다.

3.3. 2012 시즌

중견수 밖에 못하는 이택근[5]의 컴백으로 코너 외야수, 주로 좌익수로 나오고 있다. 팀의 테이블 세터를 맡고 있지만 4월 성적은 다소 부진한 편. 그러나 유한준송지만이 전반기 출전이 불가능한 상황이라서 주전 자리는 계속 지킬 것으로 보인다.

4월 24일 경기에서 경기를 연장으로 몰고 가는 9회말 호수비를 선보이면서 인상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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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기영이 경기를 끝내지 못하게 합니다!

그러나 이틀 후인 4월 26일에 곧바로 암을 유발하는 타구판단을 선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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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년도에 기습번트로 톡톡히 본 재미 때문인지 수시로 번트를 대서 출루하려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5월 들어서 정수성의 합류 이후, 혼자 테이블 세터를 책임지던 부담에서 벗어났는지 살아났다.

5월12일 문학 SK-넥센전에서 2:2로 맞선 4회초 2사 1, 3루. 송은범의 공이 바운드되어 3루 측 덕아웃 방향으로 흘렀고 3루 주자 서건창이 이 틈을 타 홈을 밟았는데, 장기영이 폭투가 아니라 몸에 맞는 공이었다고 고백하여 득점은 취소되고 넥센은 2:3으로 패했다. 이후 '장페어'라는 별명을 얻었다. 동영상

5월 15일부터 5월 17일까지 열린 롯데와의 사직 원정 경기에서 맹활약하면서 정수성과 함께 팀의 테이블세터를 책임졌다. 특히 5월 15일에 4타수 2안타 1홈런을 기록하면서 맹활약했는데, 이 때 친 홈런이 시즌 4호 홈런이다. 참고로 장기영이 2011년까지 친 통산 홈런의 개수가 4개다. 한 마디로 통산 홈런을 한 시즌에 다 쳤다는 뜻이다. 참고로 2012 시즌 장기영의 홈런 개수는 8개.

시즌 초 테이블 세터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하며 팀의 상승세에 보탬이 되다가 옆구리 근섬유 파열로 잠시 엔트리에서 제외되었다.

7월엔 4할대의 타율을 기록하다 8월엔 1할대의 타율을 기록하는 등 들쭉날쭉한 컨디션을 보이다가 8월 26일 목동 SK전에서 손가락 부상을 당하기도 했다.

12시즌 성적은 타율 .246 64득점 35타점 32도루 40볼넷 67삼진.

3.4. 2013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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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두산 베어스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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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2014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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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4월 내내 죽을 쑤고 있다(…).

4월 29일 기준 타율 1할 1푼으로 매우 부진한 모습을 보였다. 결국 4월 30일자로 같이 삽질하던 최영진과 함께 엔트리에서 제외되었다.

이후 퓨처스리그서 4할대를 치며 타격감을 조율했고, 5월 10일에 1군에 승격될 예정이라고 한다. 박건우가 부상을 입으면서 1군에 외야수가 4명뿐이기 때문. 본인이 좋아지지 않는다면 팀의 선두권 도약이 힘들 것이다.

상대적으로 빈약한 두산 외야에 나름 도움을 주고 있는 중이다. 빠른 발 덕분에 대주자 요원으로 쏠쏠하고 접전이었던 5월 17일 NC전에서 준족으로 결승 득점을 올리는 등 활약하고 있다.

5월 27일, KIA 타이거즈전에서 경기 후반 대타로 나와서 첫타석에서 2루타, 두번째 타석에선 3루타를 치며 2타수 2안타 1타점으로 활약하였다.

6월 4일, 민병헌의 갑작스런 부상으로 인해 대수비로 나왔다. 이재원의 펜스 옆 강한 파울타구를 호수비로 잘 처리했고, 타격에서는 4타수 1안타 1삼진을 기록하였다. 요즘 넥센 히어로즈에서 한창 삽을 푸고 있는 윤석민과 비교하면 굉장히 양호한 타격페이스를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6월 다시 죽을 쑤며 멘도사라인 타율로 복귀했다. 출루율은 더 심각. 선구안에 문제가 있는 윤석민이 공갈포질 중인데도 6월 25일 기준 윤석민 타율이 장민석 출루율보다 높다. 사실 문제는 타격이 넥센 시절 평년 정도로 리바운딩한다 가정해도 공수주에서 좋은 외야수를 많이 봐 온 두산 팬들 성에 차지 않는다는 것이다. 결국 부진한 성적 때문에 7월 1일에 다시 1군에서 말소되었다.

4.2. 2015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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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한국시리즈 1차전, 6회초 1사 만루 상황에서 두산 김현수의 2타점 적시타 때 2루 주자 장민석이 홈을 향해 몸을 날리는 장면.
도약 아닌 '생존' 걸린 장민석의 2015년


5월 27일 마산 NC와의 원정경기에서 7회말 오재원에릭 해커의 벤치클리어링 때 공을 집어던지는 듯한 행동으로 퇴장당했다. 팬들은 다른 선수가 던졌는데 오해받은 것이라는 의견과 던진 게 맞다는 의견으로 나누어지고 있다. 결국 공을 던진 것은 자신이라고 민병헌이 고백했다. 덤으로 장민석 본인이 자진하여 던졌다는 거짓말을 했다는 것이 드러났다. 하지만 장민석은 스톡킹에 출연해서 모 코치가 시켜 자신에게 총대를 메개 했다는 것을 스스로 밝혔다.[6]

결국 민병헌이 3경기 출장정지를 받으면서 생긴 공백을 메우기 위해 5월 29일 kt전에 선발 출장하였다. 이 날 멀티히트에 타점과 득점을 기록했으며, 주루 플레이에서도 괜찮은 모습을 보여주며 제 몫을 다 해 팬들의 기대감을 높였다.

이후 다시 백업신세로 밀려났지만, 그래도 처음으로 KS 우승을 경험하며 해피엔딩으로 끝나게 됐다.

KBO 리그 2차 드래프트에서 한화 이글스에 1라운드 지명을 받았다. 때마침 제이크 폭스와 재계약을 하지 않음에 따라 62번을 그대로 쓰게 되었다.

5. 한화 이글스 시절

5.1. 2016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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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시즌 양아들로 엄청난 욕을 먹던 송주호에 비해서는 나았으나, 결국은 비슷한 처지. 송주호에 비해서는 강한 송구능력과 주루, 또 후반기에는 출장할 때마다 간간히 1안타, 2안타는 치며 1할대에 머물던 타율도 2할 3푼까지는 끌어올렸다. 사실 별로 기대한 것은 없지만 그러나 대주자치고는 너무 많이 출장하며 아쉬움이 남는 시즌.

고무적인 것은 8월 타율 0.276과 9월 타율 0.270으로 시즌 후반에 백업치고는 어느 정도 괜찮은 활약을 했다는 것이다.

5.2. 2017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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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즌 초반 이용규의 이탈로 하주석과 일명 띠동갑 테이블세터를 이루며 맹활약했으나 계속 주전으로 나가기에는 부족했던 시즌.[7] 이용규의 장기 이탈로 주전이 될 수 있었으나 결국 백업 선수가 맞는 선수로 결론이 났다.

5.3. 2018 시즌

1월 31일 1천만원 인상된 1억 1천만원의 연봉을 받게 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일단 누구와 달리 꾸준히 2군 경기에서 코너 외야수로 나오며 생존 신고 중이다. 4월 29일 상무와의 경기에서 16구 승부 끝에 홈런을 때려 내며 재기의 가능성을 보이는가 했지만...

5월 3일, 1군에 오르지 못하고 결국 웨이버 공시됐다. #나이와 능력을 고려해 봐서는 더 이상 뛰기 힘들 듯. 이틀 후 한화는 육성선수로 이적한 외야수 김민하를 1군에 올렸다.

6. 은퇴

결국 1주일 안에 그를 원하는 팀이 없어 2018 시즌은 더 이상 뛸 수 없게 되었고, 이후 조용히 현역에서 은퇴했다. 은퇴 후에는 따로 야구코칭 사업을 하고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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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동갑내기 프로야구선수들이 부산에 많았다. 추신수, 김백만, 정근우(이상 부산고), 이대호, 장민석(이상 경남고), 채태인, 이우민, 차정민(이상 부산상고), 김덕윤, 백승룡, 송산, 김경언(이상 경남상고).[2] 공교롭게도 당시 타격코치였던 김응국도 원래 투수였다가 야수로 전향해 대박을 터트린 케이스이다. 물론 선구안이나 주루, 타격면에서 장기영보다 상위호환이었지만.[3] 실제로 6월 중반까지 3할 2푼까지 쳤을 정도로 타격감이 좋았으나, 첫 풀타임의 체력적인 문제로 인해 시즌 말미에 높던 타율을 많이 깎아먹었다.[4] 이후 이 시즌보다 더 좋은성적을 내지 못하며 1군 데뷔 시즌이 커리어하이가 되고 말았다.[5] LG 트윈스에서 주로 1루수로 나왔지만, 이 시절 1루 수비는 재앙에 가까웠다. 본인도 중견수 복귀를 강력히 원하고 있고...[6] 사실 당시 벤치클리어링 영상을 쭉 보면 나오지만, 심판이 두산 덕아웃으로 갈때 민병헌이 손을 들고 저요 라고 하는 장면이 나왔다. 이로 인해 민병헌은 선발 출장 중이었고 장민석은 비선발이었기에 팀을 위해 민병헌이 아닌 본인이 던진게 맞다고 어필했다는 중론의 이야기도 나오고 있다.[7] 타율은 2할 후반대로 선방했지만 특유의 좋지 않은 BB/K 수치와 그로 인해 3할 초반의 낮은 출루율을 기록하여 OPS가 6할 언저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