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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lding [ 펼치기 · 접기 ] | 장영균의 수상 경력 / 역대 등번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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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 |
1998 방콕 아시안게임 야구 종목 금메달 |
1998 |
삼성 라이온즈 등번호 59번 | ||||
최부락 (1998) | → | 장영균 (1999~2003) | → | 이장희 (2004~2005) |
A대표팀 참가 경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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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영균 張永均 | Jang Yeong-Kyun | |
출생 | 1976년 5월 20일 ([age(1976-05-20)]세) |
서울특별시 | |
국적 | [[대한민국| ]][[틀:국기| ]][[틀:국기| ]] |
학력 | 청원중 - 동대문상고 - 인하대 |
신체 | 176cm, 84kg |
포지션 | 외야수 |
투타 | 좌투좌타 |
프로 입단 | 1999년 2차 3라운드 (전체 22번, 삼성) |
소속팀 | 삼성 라이온즈 (1999~2003) |
병역 | 예술체육요원 (1998 방콕 아시안 게임 야구 부문 금메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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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前 삼성 라이온즈의 좌투좌타 외야수.2. 선수 경력
2.1. 아마추어 시절
동대문상고 시절 모교의 1993년 대통령배 4강 진출에 일조했다.그 뒤 인하대학교 야구부에서 뛰던 중 1997년 아시아선수권 대회와 1998년 이탈리아에서 열린 야구 월드컵 대표팀에 승선했다.
이후 1998년 방콕 아시안 게임에도 출장해 일본전에서 홈런을 기록하는 등 대표팀의 6승 무패의 선전에 일조하며 병역 특례를 획득했다.[1][2] 다만 당시 국가대표 사령탑이 장영균의 소속 학교였던 인하대의 주성노 감독이었기 때문에, 은사 잘 둔 혜택 아니냐는 뒷말이 좀 있었다.
2.2. 삼성 라이온즈
국가대표에서의 활약을 바탕으로 1999년 신인드래프트 2차 3라운드에서 삼성 라이온즈에 지명되었다. 당시 언론들은 아시안 게임 금메달+병역특례 버프로 억대 계약금을 예상했으나, 예상과 달리 계약금은 이름값에 비해 저렴(?)한 7천만원이었다.기사[3]1999년 8월 5일 KBO 퓨처스리그 쌍방울 레이더스와의 더블헤더 1차전에서 사이클링 히트를 기록했다. 이는 KBO 퓨처스리그 사상 6번째로 나온 기록이다.
그러나 국가대표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1군에서는 별 활약을 보이지 못했다.[4]
2001 시즌에 2할 2푼대의 저조한 타율에도 불구하고 2001년 한국시리즈 엔트리에 들었으나 그 해 팀은 우승에 실패했다.
2002 시즌에는 5경기만 출장했지만 외야 백업으로 2002년 한국시리즈 엔트리에 들었고, 소속팀 삼성 라이온즈가 LG 트윈스를 상대로 극적인 백투백 홈런과 함께 4승 2패로 우승하면서 우승반지를 획득했다.
2003 시즌이 끝난 후 심성보, 이준[5]과 함께 방출되었다. 이후 새 팀을 찾지 못하고 은퇴했다.
3. 연도별 성적
역대 기록 | |||||||||||||||
연도 | 소속팀 | 출장 경기수 | 타수 | 타율 | 안타 | 2루타 | 3루타 | 홈런 | 타점 | 득점 | 도루 | 4사구 | 출루율 | 장타율 | OPS |
1999 | 삼성 | 9 | 4 | .000 | 0 | 0 | 0 | 0 | 0 | 2 | 0 | 4 | .500 | .000 | .500 |
2000 | 6 | 4 | .000 | 0 | 0 | 0 | 0 | 0 | 0 | 0 | 0 | .000 | .000 | .000 | |
2001 | 35 | 31 | .226 | 7 | 3 | 0 | 0 | 3 | 4 | 0 | 2 | .265 | .323 | .587 | |
2002 | 5 | 4 | .250 | 1 | 1 | 0 | 0 | 0 | 1 | 0 | 2 | .500 | .500 | 1.000 | |
2003 | 1 | 1 | .000 | 0 | 0 | 0 | 0 | 0 | 0 | 0 | 0 | .000 | .000 | .000 | |
KBO 통산 (5시즌) | 56 | 44 | .182 | 8 | 4 | 0 | 0 | 3 | 7 | 0 | 8 | .308 | .273 | .580 |
4. 관련 문서
[1] 이 때 대표팀에서 대학 출신 외야수를 2명 뽑았는데 임재철 등을 제치고 박한이와 함께 뽑혔다.[2] 당시 7타수 2안타 1홈런 2타점을 기록하였다.[3] 당시 입단 동기로는 권오준, 임동규 등이 있다.[4] 2000년 당시에는 김주찬과 더불어 팀 내 최고의 유망주로 평가받았다.[5] 프로야구 초창기에 활약한 대도였던 이해창의 아들로 1996년 LG 트윈스의 2차지명을 받았으나, 대학 졸업반 때 지명포기를 당한 뒤 삼성에 신고선수로 입단했다. 1군에서는 2003년 이승엽이 56호 홈런을 친 경기에 등판해 1.2이닝동안 1실점을 한 기록이 유일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