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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호강

파일:장호강.jpg
<colcolor=#fff><colbgcolor=#0047a0> 본관 인동 장씨[1]
출생 1916년 4월 30일
평안북도 철산군 고성면 동부동 208번지
(現 평안북도 철산군 철산읍)
사망 2009년 10월 17일 (향년 93세)
서울특별시
묘소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4묘역-154호
학력 봉천사범학교 (졸업)
국방대학교
임관 중국육군군관학교 (졸업)
육군사관학교 (8기 특별반)
복무 화평건국군
1940년 3월 30일 ~ 1944년 3월
한국광복군
1945년 2월 ~ 1946년 2월 4일
대한민국 육군
1948년 ~ 1969년 8월 16일
최종 계급 준장 (대한민국 육군)
상훈 을지무공훈장
건국훈장 애족장
자유시인협회 문화상

1. 개요2. 생애3. 여담4. 상훈5. 참고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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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독립유공자, 군인이자 1950~1960년대 진중문학을 대표하던 시인. 한국광복군에서 활동한 공적을 인정받아 1992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훈했다.

2. 생애

1916년 4월 30일 평안북도 철산군 고성면 동부동 208번지(現 평안북도 철산군 철산읍)에서 아버지 장관선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1919년 아버지를 따라 중화민국 봉천성 동변도(東邊道) 통화현(通化縣)[2]으로 이주했으며, 봉천사범학교(奉天師範學校)를 졸업해 교원으로 근무하다가 1937년 중국군관학교[3]을 졸업해 장교로 임관했다. 중일전쟁 당시 왕징웨이 정권 소속 화평건국군(和平建國軍) 제24집단군 사령부 및 제29군 사령부의 정보처 장교로 복무하면서도 일본 제국 육군 및 화평건국군의 정보를 국민혁명군연합군에 제공했다. 1943년부터는 하남성 개봉시(開封市) 지구에 조직망을 구축해, 강홍모 등 10여 명을 한국광복군에 보냈으며, 한국광복군 특파공작대원 조동린(趙東麟)을 통해 문상명, 박용운, 유익배, 정희섭, 이건국, 최세득 등을 포섭해 한국광복군 제3지대 구축에 기여했다.

1944년 3월 개봉시 지구의 조직망이 발각되자 체포 직전 탈출하였으며, 1945년 2월 안휘성 부양현(阜陽縣)에 있던 한국광복군 제3지대에 입대하였다. 입대 후에는 제3지대 본부 부관실 부관주임으로 근무하며 '제3지대가'를 작사, 작곡 및 보급하여 대원들의 사기 진작에 기여하였다.

8.15 광복 후에는 지난시·칭다오시산둥성 지구 특파단 단장으로서 박재곤, 박용운, 오동기(吳東起)[4]와 함께 산둥성 지역 교포들을 보호하고, 귀국을 주선하였다. 그리고 1945년 12월 광복군 귀국단 부단장으로서 지난시를 떠나 칭다오시에 머물렀고, 1946년 1월 29일 칭다오시를 떠나 2월 4일 오동기 귀국단장을 비롯해 박용운·강필주(姜弼周)·이장식(李張植)·유태균(劉泰均)·박호림(朴虎林) 등의 귀국단원들과 함께 조선으로 귀국했다.

이후 경찰공무원으로 입직해 운수경찰 특별경비대 대장(계급 정위)으로 근무했다. 1948년 육군사관학교 8기 특별반을 졸업하고 영남지구에서 공비 소탕에 앞장서 1949년 12월 국방부장관 표창을 받았다. 1950년 6.25 전쟁에 참전해 제21연대장등을 맡으며 전공을 세웠다. 이 때의 공으로 을지무공훈장을 수훈했고, 이후 1954년 미국 동성훈장, 1955년 그리스 무공훈장 등 20여 개의 훈장을 수훈했다. 1956년 경북병사구사령관[5]을 역임하였고, 1958년 국방대학교에 입학했다. 1961년 5.16 군사정변 이후 준장으로 진급하였다. 1963년 박임항, 박창암, 김동하 등의 반혁명사건 군사재판에 심판관을 맡았다. 1962년 육군 특전감[6]을 역임했고, 1965년 베트남전쟁 파병을 위한 파군단으로 전선을 시찰하였다. 1965년 제38보병사단 사단장, 1966년 제25보병사단 사단장, 1967년 12월 군수기지사령부 부사령관을 역임하고 1969년 8월 16일 준장으로 예편했다.

예편 후에는 1971년 화교언론인 한중일보 주필, 1975년 한국현대시인협회 이사를 역임했고 1977년에는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받아 건국포장을 수훈했다. 1978년 한국참전시인협회를 창립해 초대 회장을 맡았으며, 원호장학회 이사장에 취임하였다. 독립유공자 관련 활동에도 참여하여 1976년 광복군 동지인 박노일이 만든 독립군가보존회 회장을 맡아 독립군가 테이프를 제작하는 등 독립군가의 수집 및 보급에 앞장섰고, 1977년 광복회 사무국장, 1988년 윤봉길의사기념사업회 이사, 1989년 독립유공자협회 부회장 등에 임명되어 독립유공자들의 업적을 알리고 독립유공자 및 그 유족들을 예우하는데 힘썼다.

1949년 시 '또 한번 다름박질할꺼나'로 등단해 1952년 6.25 전쟁 참전 경험을 바탕으로 쓴 진중시를 모은 시집 총검부를 시작으로 쌍룡고지, 호강전진시선 등의 시집을 여럿 발표했다. 준장으로 진급한 1961년 강원도 문화상을 받았고, 전역 후인 1986년 한국 자유문인상을 받았다. 5,60년대 대표적인 진중시인이었으며, 한국현대시인협회 이사, 참전시인협회 회장을 역임할만큼 문단에서 영향력을 발휘하기도 했다.

2009년 10월 17일 오후 6시 40분 서울특별시에서 노환으로 별세했다. 그의 유해는 2009년 10월 19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4묘역에 안장되었다.

3. 여담

  • 생전 시인 박인환과 친분이 있었다. 1955년 박인환 시인의 선시집 출판기념회에서 김용환이 그린 시인의 캐리커쳐와 장호강의 이름과 함께 남긴 박인환의 사인, 행사에 참여한 송지영, 김광주 등 당대 문인들의 서평들이 있는 시집 초판본을 받았다. 해당 칼럼를 남긴 박대헌씨에 따르면 초판본 발매 직전 화재로 해당 시집의 초판본이 대부분 소실되었다고 하며, 유일한 초판본으로 알려져있다.
  • 경북병사구사령관으로 있으면서 대구광역시 중구 향촌동에서 지역 문인들과 교류하였다. 1958년 매일신문에 시 '향촌동'을 발표했는데 실제로 시에 당시 향촌동에 있던 술집, 맛집들의 이름을 넣어 향촌동에서 느꼈던 인상을 표현하였다.
  • 1976년 광복군 동지이자 국군에서 함께 복무했던 박노일 사후 그가 설립한 '독립군가 보존협회' 회장을 맡아 박노일의 부인 곽영숙[7]과 독립군가 수집 및 보급에 힘썼다. 그 결과 1982년 '독립의 메아리'라는 독립군가 엘범을 발매하였다. 현재 독립군 군가들이 음악교과서 및 유튜브 등에 개제되어 있는데 큰 기여를 하였다.
  • 1971년 제7대 대통령 선거 당시 김대중 신민당 대통령 후보가 향토예비군 폐지를 공약으로 내세우자 박창암이 발간한 잡지 '자유'에 '예비군방위의 절대치'라는 글을 발표해 예비군 폐지가 불가하다는 것을 주장했다. 해당 잡지의 발간인 박창암이 반혁명 재판을 받을 당시 장호강이 심판관으로 있었다.
  • 속초시에 있는 수복기념탑[8]에 시 '모자상부'가 새겨져있다. 원래 '모자상부'는 운율이 있는 이야기 형태로 수록되었으나, 1983년 강풍으로 기념탑이 파손된 이후 다시 복원하는 과정에서 시의 형태로 바뀌었다. 시 '모자상부'는 수복기념탑 위에 있는 모자 동상의 내용을 담은 시로 어머니의 손을 잡고 고향을 그리며 통일을 염원하는 아들의 마음을 표현하였다.
  • 1967년 25사단장 역임 당시 무장공비 12명을 사살, 소탕하였다. 해당 부대는 무장공비 침투가 잦은 당시 '간첩잡는 부대'라는 별명이 붙을 만큼 명성이 자자했다고 한다.
  • 1968년 군수기지사령부 부사령관으로 있던 당시 부하 장교의 결혼식에 신랑이 대간첩작전에 투입되어 결혼식날 귀가하지 못하게 되자 백년가약을 맺겠다는 내용의 전보를 보내 신부만 있는 결혼식을 치루었는데, 해당 결혼식의 주례를 섰다고 한다.
  • 1978년 광복군 동지인 문상명, 이용상과 함께 6.25 전쟁과 베트남전쟁에 참전한 시인들의 모임인 한국참전시인협회를 만들어 초대 회장을 맡았다. 해당 협회는 시를 통해서 전쟁사를 남기자는 취지에서 설립되었다. 1988년 전사편찬위원회 편찬위원을 역임할 만큼 전쟁사에 대한 증언을 활발히 남겼다.
  • 아버지인 장관선 목사는 평안북도 철산군에서 교회 목사로 지내다 1919년 중화민국 봉천성 동변도 통화현에 망명해 교회와 학교를 세웠다. 당시 김학규 장군의 아내이자 독립운동가인 오광심 여사가 장관선 목사의 신세를 졌으며, 당시 인연으로 광복군 복무 시에도 오광심 여사와 인연이 닿았다한다.
  • 1920년 경신참변 당시 일본군이 온다는 소식을 접하고 산으로 피신해 희생을 피할 수 있었다한다. 다만 산에서 아버지 장관선 목사가 세운 교회와 학교가 불에 타는 것을 보고 발을 동동 구를 수 밖에 없었다고 증언한다.

4. 상훈

  • 을지무공훈장
  • 미국 동성훈장(1954)
  • 그리스 무공훈장
  • 보국훈장 천수장
  • 강원도 문화상(1961)
  • 참전시인협회 문화상
  • 자유시인협회 문화상(1986)
  • 한국전쟁문학상
  • 건국훈장 애족장(1992)

5. 참고자료


[1] #[2]중화인민공화국 지린성 퉁화시.[3] 독립유공자 공훈록에는 중국중앙군관학교로 되어 있는데, 장호강은 왕징웨이 정권 소속 화평건국군(和平建國軍)에서 복무한 경력이 있어 이 '중국군관학교'가 중화민국 국민정부 소속인지가 의심이 된다. 일단 남경시에 있던 중화민국 국민정부 소속 중앙육군군관학교는 1937년 8월 강서성 구강현(九江縣)[10]·호북성 무한시(武漢市)[11]·사천성 퉁량현(銅梁縣)[12] 등지로 옮겨 갔고, 1938년 12월 3일 중화민국 유신정부 소속 유신수정군(維新綏靖軍)의 군관학교인 수정군관학교(綏靖軍官學校)가 설립되었다. 이후 1940년 1월 29일 중화민국 유신정부가 해산을 선포하고 3월 30일 왕징웨이 정권이 정식으로 수립된 뒤 1941년 9월 28일 왕징웨이 정권 소속 화평건국군의 '중앙육군군관학교'가 정식으로 개교했다. 그러므로 일단 장호강이 1937년에 중국군관학교를 졸업한 것이 맞다면 중화민국 국민정부 소속의 중앙육군군관학교일 가능성이 좀 더 높겠으며, 중화민국 유신정부 소속의 유신수정군과 왕징웨이 정권 소속의 화평건국군 소속 장교들의 대부분이 국민혁명군에 있다가 배신하고 친일로 돌아선 자들이므로 장호강 또한 초급장교로서 여기에 가담했을 수도 있다. 이런 것이 아니라면 1937년이 아니라 적어도 1938년 이후에 군관학교를 졸업한 것이 돼야 사실에 부합한다.[4] 당시 산둥지역 교민회장으로 광복군 지난시, 칭다오시 지구 특파단을 도왔고, 광복군 귀국단장으로 앞장서 귀국했으며 육군사관학교 3기를 졸업하고 14연대 연대장으로 복무 중 여순 반란에 관련되어 예편하였다. 그 후 빨치산활동을 했다는 설이 있으나 1977년 사망했다는 설 외에는 뚜렷한 행적이 없다. 여순 반란과 무관하며 독립운동 경력으로 인해 최능진과 함께 혁명의용군 사건에 무고로 엮였다는 주장이 있으나, 한국전쟁사 등 1차적 사료집에 따르면 여순 반란의 주력부대인 14연대장 부임 직후부터 장병들에게 공산주의 사상을 주입시키고 반란을 계획했다고 한다.[5] 현 대구경북지방병무청장[6]육군특수전사령관[7] 현 독립군가 보존협회 회장[8] 1954년 속초시가 휴전 후 북한에서 수복되었음을 기념해 속초읍 주민들과 1군단 장병들이 만든 기념탑[9] 후에 소설 광복군을 집필해 박정희 전 대통령의 광복군 설을 퍼트렸다. 이후 독립운동사 편찬을 주도하는 등 광복군 활동 증언에 앞장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