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적국의 재산
敵産 / Enemy Property적국이 국내 또는 점령지에 남긴 재산. 여기에서 말하는 재산은 현금성 자산과 현물성 자산(기업, 공장, 기타 시설, 각종 도구 및 식량 등)은 물론이며 토지까지 포함된다. 자국의 영토만이 아니라 점령지에도 해당하는 만큼 만약 적국의 영토를 점령했다면 그 영토 안에 있던 적국 국적의 모든 재산이 적산의 대상이 된다. 다만 한국에서 적산이라고 하면 해방 후 일본인들이 남기고 떠난 재산을 뜻한다. 대표적으로 적산가옥이 있다.
1.1. 상세
1945년 8.15 해방 이후 미군정은 재조선 일본인들을 쫓아냈고 그들의 조선 내 자산의 반출도 불허했다. 일본인 사업가와 관리자들이 자기네 나라로 철수하자 노동자나 지역 인민위원회가 공장과 사업체를 관리하였으나(공장 자주관리운동)[1] 그해 12월 6일에 미군정은 군정법령 33호를 공포해 일본인 재산을 귀속시킨 뒤 노동자 관리위원회를 와해시키고 자본가들을 관리인으로 임명해 관리토록 했다. 이 과정에서 무력으로 진압하기도 했다.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한국전쟁을 거쳐 이승만 정권은 귀속재산처리법을 제정해서 대부분의 적산을 사기업에 귀속재산 불하하였는데 이 과정이 상당히 불투명했고 불하방법은 일반 경매나 비공개 입찰 방식이었다. 이때 남한에만 불하된 적산 기업은 2,700여개였으며[2] 1인당 1개 사업체 이상을 불하받을 수 없도록 했다.[3] 특히 대부분의 토지와 공장이 헐값에 인수해갔다. 현재 대한민국 재벌들의 상당수는 미군정기와 이승만 정권 시대 혼란한 상황 속에서 주먹구구로 진행된 적산불하로 한몫 잡아서 기반을 다진 곳들이다.[4] 당시 귀속사업체의 불하에는 불하대상인 적산의 이해당사자를 우선으로 하고 적산매각대금의 약 20%에 해당하는 계약금을 선납입해야 하는 등의 기본조건이 달려 있었지만 정치인과 커넥션이 있던 기업들은 정치인과 정권의 관료들에게 뇌물을 먹여 해당 적산의 매각대금규모를 대폭 낮추는식으로 속여 터무니 없는 헐값에 불하받거나 이해당사자가 전혀 아님에도 불하받는 일이 상당히 많았다. 물론 식민지 체제에 협력했던 재산가나 관련자가 정경유착으로 들러붙어 한 몫 챙긴 경우도 허다했다. 관련 영상 이러한 사례로 가장 유명했던곳이 백낙승의 태창그룹이었다.
6.25 전쟁이 끝난 후 38선 이북 지역을 일부 수복하면서 국토면적이 증가했는데 이때 구 일본계 적산 + 공산 치하에 건설, 개간된 협동농장의 토지, 공장, 사업체, 부동산, 광산, 어항 시설 등의 자산도 정부로 귀속되었다.
일본인들은 별 수 없이 돌아갔던 것일 뿐이지 소유권 자체를 포기하려고 했던 건 아니었기 때문에 일본의 상황이 어느 정도 안정되고 한일수교 얘기가 나왔을 때 말 그대로 기를 쓰고 찾으려고 했다. 한일수교 이전에는 일본 정부에서 종종 "한국 정부가 몰수한 일본인 자산에 대한 청구권을 행사해야 한다"는 말[5]도 나왔었는데 이런 말이 나올 때마다 한국 여론의 분노를 일으켰음은 물론이고 샌프란시스코 조약 위반이라 논란이 있었다.[6] 결국 한일기본조약을 맺으면서 일본 정부가 일본인들이 한반도에 남긴 이른바 '적산'에 대한 청구권을 완전히 포기함을 명시해 이 문제는 끝났다.
일본인들이 미처 챙기지 못하고 남았던 것 중에는 재산뿐 아니라 금전적 가치가 별로 없는 것도 많았고 이런 시설들은 방치되거나 6.25 전쟁통에 대부분 훼손되었다. 예를 들면 부산광역시의 아미동 비석마을은 바로 일본인 공동묘지 자리 위에 6.25 전쟁 피난민촌이 형성되어 일본 무덤의 비석을 마을 계단, 건물 부재 등으로 사용하였다. 지금도 비석마을에 가면 쇼와 몇 년에 누가 죽었다 같은 일본어가 새겨진 비석이 계단으로 쓰이는 것을 조금만 걸어다녀보면 수십개씩 찾아볼 수 있다.
일본 제국의 식민지 중 하나인 대만에서도 일제의 패전 이후 국민혁명군이 진주하여 일본인들을 쫓아내고 자산을 몰수했다. 이러한 자산들은 중국국민당이 접수하여 자신들과 연줄이 있는 중국 대륙의 외성인들에게 불하되었으며 본성인들이 소외되어 본성인과 외성인의 갈등이 심화되었다. 그리고 결국...
1.1.1. 예시
공기업은 (★)표시, 공기업이었던 것은 (☆) 표시.- 대구텍의 전신인 대한중석은 해방 후 귀속재산이 되어 한동안 공기업이었다가 1994년 거평그룹에 인수되어 민영화되었으나 1998년 거평 부도 이후 1999년 이스라엘 IMC그룹이 인수하였다가 2006년에 버크셔 해서웨이가 인수했다.
- 세아베스틸의 전신인 대한중기공업은 김연규 전 회장이 자신의 직장인 관동기계제작소를 인수하여 창업하였다.
- 대웅제약은 경남위생시험소에서 일하던 지달삼(1922~1983)이 1945년 해방 후 일본인 소유 제약업체 '가와이제약소'를 인수하여 시작하였다.
- 아사노시멘트 용산공장은 해방 후 귀속재산이 되어 1958년 임주빈이 인수하여 '한국스레트공업'을 설립했으나 1962년에 영화업자인 김인득(1915~1997) 동양물산 사장에게 넘어가 지금의 벽산그룹의 형성으로 만들었다.
- 미쓰코시백화점 경성점은 해방 뒤 미군정을 거쳐 1954년 귀속재산이 되었다가 3년 뒤 조선방직, 1962년부터 동방생명에 인수되었다. 이후 삼성그룹의 이병철이 인수하여 현 신세계백화점으로 출발하였다.
- 북삼화학공사는 1955년 민만식이 불하되어 1964년 삼척산업이 됐다가 현재의 DB메탈이 되었다.
- 한국타이어앤테크놀로지는 1955년에 강경옥이 조선다이야[9]를 인수하여 만들었다.
- 넥센타이어의 전신 중 하나는 1942년에 일본인이 세운 흥아고무공업이었다.
- LS니꼬동제련의 전신 중 하나는 1936년에 일본인이 세운 조선제련(☆)이었다. 1943년 삼성광업주식회사[10]가 인수했으며 1946년에 미군정 삼성광업회사가 되었으며 공기업을 거치고 1978년 금성전선과 대한전선이 인수했다.
- 섬유업체 전방과 일신방직의 모태인 전남방직은 김용주, 김형남 창업주가 1951년 옛 가네가후치방적(현 가네보) 광주공장을 인수하여 세웠으며 1961년 김용주는 전방, 김형남은 일신방직으로 각각 분할하여 독립하였다.
- 샘표식품은 박규회 창업주가 일본인 소유였던 미쓰야장유 양조장을 인수하여 창업하였다.
- 간장 메이커인 몽고식품은 김홍구 창업주가 일본인 소유였던 야마다장유를 인수하여 창업하였다.
- 대선제분의 뿌리인 닛신제분 영등포공장은 1953년 윤석준 창업주가 세운 조선제분(현 사조동아원)에 불하됐으나, 1958년에 홍종문, 함형준, 박세정 등 5명이 이끄는 계동산업에 넘겨졌다.
- 1945년 조선삼공조는 동온재단이 인수되어 불하됐으나, 1963년 화정 한광호 백수의약[14] 사장이 조선삼공의 농약 제조 허가권을 인수하고 1968년에 현 사명으로 재출범하여 현재의 한국삼공의 토대로 만들었다.
- 현대제철 인천제철소(☆)는 일제 시기 세워진 조선이연금속 인천공장이 해방 뒤 가동 중단 상태로 1953년에 정부에 불하되어 재가동시켰으며 1968년 민영화 뒤 1978년에 현대그룹이 인수했다.
- 조선기계제작소(☆)는 해방 뒤 귀속재산이 되어 한국기계공업으로 개칭되었다가 1968년 신진그룹이 인수하여 민영화되었고 1976년 대우그룹이 인수했다가 1999년 대우그룹 해체 이후 2000년 대우종합기계로 물적분할되어 2005년에 두산그룹이 인수하여 두산인프라코어가 되었다가 2021년 현대중공업그룹에 인수되어 HD현대인프라코어로 사명을 바꿨다. HD현대인프라코어의 전신 중 하나라 할 수 있다.
- 조선중공업은 미군정청 귀속 이후 정부가 인수하여 1950년에 국영기업인 대한조선공사(☆)가 되었다. 1968년 극동해운이 인수했다가 1989년에 한진그룹이 인수하여 한진중공업이 되었다.
- 한국토지주택공사(★)의 전신 중 하나가 1941년에 세워진 조선주택영단이었다. 이 회사는 1962년부터 대한주택공사가 되었다.
- 한국전력공사(★)의 전신은 일제 때 세워진 조선전업, 경성전기, 남선전기였다.
2. 견적의 다른 말
積算일반적으로 주어진 조건과 설계도서로부터 공사비를 산출하는 일을 적산 또는 견적이라고 한다. 공사를 하기 전에 대략적인 가격이 정해져야, 발주자는 발주를 낼 수 있고 수급자는 이에 응할 수 있다. 발주자, 수급자 모두 나름대로 적산을 해서 둘의 가격이 맞으면 계약이 이루어지게 된다.
2.1. 발주자업무용 적산(기계설비)
공공기관의 기계직 담당자 A가 있다고 하자. 기계실 보일러가 고장나 교체해야 할 경우, 이는 대략 천만원이 넘는 공사이기 때문에 입찰을 내야 한다. '국가를 상대로 하는 계약' 규정에 의해 기준가격을 설정하고, 이를 기준으로 수급자들이 응찰하게 된다. 너무 높은 가격을 설정하면 기관에 손해가 될 수 있고, 너무 낮은 가격을 설정하면 아무도 응찰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A는 품셈과 물가정보지를 활용해서 실제 공사에 필요한 비용에 근접하게 적산을 하게 된다.[1] 부산역사문화대전과 한국현대사회운동도 참고해 볼 것.[2] 현재 이 적산기업들은 폐업한 곳도 있고 인수합병을 거쳐서 여전히 50개 내외가 존재한다.[3] 다른 사람이 적산 받은 기업을 인수해서 받는 방식으로 기업을 여러채 소유할 수 있었다.[4] 심지어 당시 정치깡패로 유명했던 임화수도 적산으로 풀린 극장을 헐값에 인수해서 자신의 세력을 키운 인물이다. 이 시대의 부자들은 대부분 이 루트를 통해서 재산을 모았다고 보면 된다.[5] 이 발언은 당시 한국에서 종종 나오던 '식민지 지배에 대한 배상' 여론에 대한 카운터이기도 했다.[6]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원문 '제2장 영토' 부분 참조.[7] 일제 말기 마사키 야마토 연필 주도로 톰보연필, 일본연필 3사가 합작해서 설립했다. 완공을 앞두고라고 했는데 일본 웹사이트에는 대동아연필이 생산한 제품들이 검색된다.[8] 선만주단(鮮滿綢緞)과 경도직물(京都織物)의 합작사.[9] 브리지스톤 조선법인[10] 미쓰이 그룹 계열의 산세이광업(三成鑛業)이다.[11] 히로시마에 있으며 현재는 전투식량을 생산하는 기업이다.[12] 이 회사는 1998년 닛폰시멘트와 합쳐서 태평양시멘트가 되었다.[13] 1906년부터 삿포로와 함께 일본맥주(에비스), 오사카맥주(아사히) 3사가 통합한 독점맥주업체로, 1945년 패전 후 1949년 독점금지법에 따라 서일본의 아사히맥주와 동일본의 일본맥주(삿포로맥주)로 재분할되었다.[14] 현 한국베링거인겔하임, 피임약 오소노붐과 천식약 아루펜트로 유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