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5-02-27 21:12:23

정민철/지도자 경력

파일:상위 문서 아이콘.svg   상위 문서: 정민철
{{{#!wiki style="margin: -10px -10px"<tablebordercolor=#fc4e00>파일:정민철 영결.png관련 문서
정민철
Jung Min-chul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calc(1.5em + 5px); word-break: keep-all"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5px -1px -11px"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이전 선수 경력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word-break: keep-all"
<tablewidth=100%> 아마추어 경력
대전고등학교 야구부
프로 경력
파일:KBO 리그 로고(1982~2012).svg
파일:빙그레 이글스 엠블럼.svg 빙그레 이글스
Binggrae Eagles
1992년 · 1993년
파일:한화 이글스 화이트 엠블럼(1994~2006).svg 한화 이글스 1기
Hanwha Eagles
1994년 · 1995년 · 1996년 · 1997년 ·
1998년 · 1999년
파일:NPB 로고.svg
파일:요미우리 자이언츠 엠블럼(1992~2005).svg 요미우리 자이언츠
Yomiuri Giants
2000년 · 2001년
}}}}}}}}} ||
파일:한화 이글스 화이트 엠블럼(1994~2006).svg파일:한화 이글스 엠블럼(2007~2024).svg
한화 이글스 2기
Hanwha Eagles
2002년 · 2003년 · 2004년 · 2005년 ·
2006년 · 2007년 · 2008년 · 2009년
국가대표 경력
파일: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 모자 로고.svg 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
Korea Republic National Baseball Team
1999년 아시아 야구 선수권 대회
기록
연도별 성적 · 수상 경력 · 보유 기록
평가
평가 · 플레이 스타일 · 팬 서비스
기타
지도자 경력 · 해설자 경력 · 여담 · 분류 ·
프런트 경력(2020년 · 2021년 · 2022년)
}}}}}}}}} ||
1. 개요2. 한화 이글스 시절
2.1. 2010 ~ 2011년2.2. 2012년2.3. 2013년2.4. 2014년

[clearfix]

1. 개요

정민철의 지도자 경력을 다룬 문서.

2. 한화 이글스 시절

2.1. 2010 ~ 2011년

파일:external/file.osen.co.kr/201401271532772219_52e5fdd34ab35.jpg
한화 이글스 코치 시절
은퇴 이후 2010년 한대화 감독 체제에서 바로 코치진으로 이동했으며 코치로서 한화 이글스 마운드를 볼 때마다 속이 타들어갔을 것이다.

2010년 당시엔 불펜코치인 데다가 별다른 언급도 없어서 그냥 평범한 투코로 1년을 보냈으나, 특이한 투구폼으로 10여 년간 코치들에게 투구폼을 변경해야 한다는 강요와 투구폼을 변경하면 오는 어깨의 통증 때문에 투구폼을 바꿔야 하나 하는 고뇌와 자괴감에 빠져있던 박정진에게 네가 정말 던지고 싶은 투구폼으로 던져라라는 조언과 신뢰를 보내줘서 2010년 그의 각성을 이끌어내 한화 이글스 불펜의 핵심으로 만들었다.

2011년 1군 서브코치로 코치 생활을 시작하여 한용덕 코치와 함께 장민재, 안승민을 성장시키고 양훈을 부활시켰다! 2011년 5월 2군으로 내려간 한용덕 코치 대신 1군 메인코치가 되었다.

한화 이글스 투수들에게 자신이 현역시절 즐겨 던졌던 슬로커브[1]를 전수했으며 실제로 2010 시즌에 유원상이 슬로커브를 장착하면서 꽤나 재미를 봤다.

2011 시즌이 지나가면서, 투수 교체가 서툰 한대화 감독을 대신해 투수교체 전권을 잡았다.[2] 그래서 생긴 별명이 바람돌이, 정간신. 선발 투수를 한계 투구수까지 던지게 하면서 최대한 긴 이닝을 먹게 했다. 이런 방향성에서 가장 극적인 변화를 보인 투수가 양훈. 조금 투구수를 많이 가져가게 하면서 완봉승을 하게 된 뒤로 급격히 변화하기 시작했으며, 10이닝 연장전에서 선두 타자에게 2루타를 맞으면서 무사 2루의 위기를 처하게 되었음에도 한대화 감독을 설득해 양훈 스스로 이닝을 끝내게 하였고, 이후 양훈은 기복이 심했지만 2경기에 한 경기 꼴로 류현진에 버금가는 성적을 내주게 되었다.

다만 부정적인 측면도 있었는데, 이렇게 어지간한 상황은 선발 투수에게 맡긴 탓에 투수 교체가 계속 한 타이밍씩 늦어져 결국 상황을 수습하지 못하고 날려먹은 경우가 있었다. 이 때문에 정민철의 투수 교체에 반감을 가지고 있는 팬들도 다수.

그래도 이 때까지는 박정진, 양훈, 김혁민,[3] 안승민을 키워낸 명코치라고 찬양받았다.

2.2. 2012년

2012년 들어 이해할 수 없는 투수 교체로 이길 수 있는 경기를 줄줄이 말아먹으며 돌민철이라는 불명예스러운 별명이 붙었고, 선수 시절 그를 사랑하던 팬들도 한대화와 세트로 물러나기를 바라는 게 현실이 되었다.

5월이 되자 2년 동안 팀을 위해 몸이 부서져라 던졌던 박정진을 5월 25일에 2군 가기 전까지 21경기 중 14경기에 올리는 백정질을 하였다. 박정진이 정상이 아닌 상태로 콜업되었기 때문에 당연히 나올 때마다 두들겨 맞으며 몸과 멘탈이 함께 붕괴되었고 결국 다시 2군으로 내려갔다.

6월 7일 류현진 선발 경기에서는 7:3으로 이기고 있는 상황에 불펜 정민혁이 흔들려 연속 안타를 맞았는데도 바꾸지 않고 기어이 무사 만루를 만들어 3점을 내주고 볼넷머신으로 전락한 바티스타를 9회에 올려 결국 경기를 내지고 에이스의 승리까지 날려먹는 최악의 투수교체를 보여주었다.

2012년의 정민철의 투수 기용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무원칙이라 할 수 있으며, 필승조 역할을 하는 선수를 대패하는 경기에 무조건 연투시켜 정작 이기고 있는 경기에 내보낼 필승조가 없거나 지친 상태로 내보내게 하여 망친 사례가 끝도 없다.

또한 김인식 감독 밑에서 배웠는지 불펜투수를 무조건 혹사시키는 것에 재미를 들려 박정진, 정민혁, 안승민, 마일영한화 이글스에서 얼마 남지 않은 쓸만한 불펜들이 모두 맛이 갔다.

결국 7월 6일 자로 2군으로 내려가 2군 투수코치를 맡게 되었다. 반대급부로 1군 투수코치를 맡은 이는 다름아닌 송진우.

2.3. 2013년

전반적으로 투수 육성에는 일가견이 있지만 실전에서 굴리는 데에는 서투른 듯. 2013년 조지훈, 송창현, 이태양 등의 신인투수들이 2군을 다녀온 후 괜찮은 모습을 보이면서 육성능력을 다시금 주목받았다.

전반기가 종료된 7월 18일 자로 1군 투수 코치로 승격되었다. 팀의 전면 리빌딩, 그리고 분위기 쇄신 차원에서 1군과 2군 코치간의 보직이 맞바뀐 것. 이로서 1년 전 보직을 맞바꿨던 송진우 코치와 다시 한 번 보직을 맞바꾸게 되었다.

2.4. 2014년

1군 투수코치직을 맡게 되긴 했지만 경기 중 잠깐잠깐 보여지는 덕아웃 광경으로는 실제 실권은 거의 없는 것으로 보인다. 예를 들어 5이닝 63구밖에 안 던진 앤드류 앨버스를 강판시킨 경기만 봐도 알 수 있다. 정민철은 퀵후크를 좋아하는 투수코치가 아니다. 선발투수를 조금이라도 더 믿고 조금이라도 더 지켜보는 스타일. 팬들은 투수 교체는 김응용 감독이 실질적으로 다 하고 있으며 정민철은 불펜에 전화거는 셔틀에 불과하다고 대체로 생각하고 있다.

5월 8일에는 선발투수 송창현이 7이닝 2실점 호투를 이어가고 있던 터라 8회에도 올릴 준비를 하고 있었으나, 감독 쪽을 한 번 바라보고 나서 마운드에 오를 준비를 하던 송창현을 돌려보내고 어깨를 툭툭 쳐 주는 장면이 중계 카메라를 탔다. 이로써 투수교체에 관해 투수 코치가 전혀 권한이 없음을 인증했다. 사실상 투수교체에 있어 전권을 쥔 한대화 시절과는 상황이 다르기에 현재 본인에게 향하는 비판이 억울할 수도 있는 셈.

그리고 밑에 나오는, 그의 선수시절 등번호인 55번을 달 정도로 그를 존경하는 이태양윤규진. 속칭 "정민철 키즈"가 이번 시즌 각성해 각자 팀의 에이스와 마무리로 자리잡음에 따라. 정민철의 대한 평가와 기대치가 올라갔다. 송창현유창식의 볼질까지 잡는 데 성공한다면 투수코치로의 역량을 스스로 증명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시즌이 흘러감에 따라 정민철 역시 팬들의 질타를 피할 수 없었다. 특히 한화의 투수진이 리그 최악인 관계로 투수코치인 정민철이 집중포화를 받게 되었다. 특히 투수교체 절대 만능론을 펼치는 대다수의 팬들은 2014년도의 투수교체의 책임자가 정민철이라는 논리로 극렬 비판하고 있다.

그나마 일부 코어팬들에게선 "그래도 엉망징찬 수준의 한화 코치진 중에서 정민철만은 그럭저럭 쓸만하지는 않냐?"라는 이야기를 듣긴 하였다. 그래도 성실함과 선수들과의 인간 관계, 선수 관리 측면에서 정민철은 어느 정도 성과를 내고 있다고 볼 수 있기 때문.
프런트도 비슷하게 평가하고 있었던 것인지, 신생 김성근 체제 출범 하에서 수많은 코치들이 옷을 벗게 된 와중에도 이상군, 장종훈과 함께 살아남은 몇 안 되는 레전드 출신 코치가 되었고, 29일 마무리 훈련 명단에도 포함되었다.

그러나, 본인 스스로가 부담스러웠던 것인지 10월 30일 결국 자진사퇴하였다. 팀에서 물러나 좀 더 경험을 쌓을 계획이라고. 정민철의 코치 사퇴 소식이 전해지자 절친한 박찬호가 직접 해외에 자리를 알아봐주고 있다는 기사가 흘러나오는 등 해외연수를 가능성이 타진되었으나.

11월 6일 MBC SPORTS+ 해설위원 확정. 같은 팀 주루코치였던 이종범 코치와 함께 가게 되었다.

솔직담백한 인터뷰로 코치로서의 실패와는 별개로 훈훈한 반응을 얻고 있다.


파일:CC-white.sv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문서의 r1438에서 가져왔습니다. 이전 역사 보러 가기
파일:CC-white.sv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다른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
[ 펼치기 · 접기 ]
문서의 r1438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1] 현역시절 정민철의 커브는 '백팔번뇌 커브'라고 할 정도로 위력이 좋았다. 150Km/h에 육박하는 직구를 던진 후 낙차폭이 큰 100km/h대의 슬로커브를 던져서 타자들을 많이 고뇌시켰다. 이 슬로커브 말고도 12시에서 6시로 낙차 크게 떨어지는 파워커브도 보유했다.[2] 표면상으로만 한대화 감독이 투수 교체 타이밍을 정민철 코치에게 물어보고, 대게 그의 의견을 거의 따랐다.[3] 김혁민은 2군에서 갑자기 달라져서 돌아와서 당시 2군 코치였던 송진우의 공이라는 말이 많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