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05 17:12:14

정추


1. 개요2. 생애
2.1. 망명2.2. 음악가로서의 삶2.3. 사망


파일:정추.jpg
정추 (鄭樞)
1923년 ~ 2013년 6월 13일 (향년 90세), 광주광역시 남구 양림동 출생이며 , 본관은 하동

1. 개요

한국계 카자흐스탄인 음악가.

작곡가 정근의 둘째 형으로, 월북소련망명하여 활동했다.

2. 생애

일제강점기였던 1923년, 식민지 조선전라남도 광주부 양림정(현 광주광역시 남구 양림동)에서 출생하였다. 1938년 광주서중 재학 중 조선어 사용 문제로 일본인 교관과 다퉈 퇴학당했고, 우여곡절 끝에 양정고보에 편입해 졸업하였다. (양정 26회) 1942년 니혼대학 음악학과에 입학해 음악을 공부하다가, 1944년 일본군에 강제 징집됐다. 친구들과 탈영을 도모하고 있을 때 일본 제국이 패망하여 다시 조국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그가 돌아왔던 조국은 바로 6.25 전쟁이라는 동족상잔의 비극을 맞이하였으며, 이때 정추는 북한으로 넘어가 음악가로서 활동하게 되었다.

2.1. 망명

정추는 북한에서 생활하다가 그 당시 소련 모스크바 대학교유학을 갈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었다. 그리하여 정추는 1952년, 소련으로 유학을 가게 되었다. 그리고 유학 도중 김일성 숭배를 비판하는 학생시위를 조직하였고, 1956년 북한에서 소환 명령을 받고도 되돌아가지 않고, 소련 정부에 망명을 신청하여 자발적 망명자가 되었다. 그 이유는 김일성의 독재에 대한 거부감 때문이었다. 북한은 당시 정추를 북송하라고 요구했지만 소련 당국은 이를 수용하는 대신 카자흐 공화국알마티로 정추를 추방하였다. 이후 소련이 붕괴되고 여러 나라로 분리되면서 정추는 카자흐스탄의 시민권자가 되었다.

간혹 '카자흐스탄의 윤이상'으로 불리기도 했지만, 이에 대해서 정추 본인은 큰 불쾌감을 표하며 "저는 북한 체제를 반대한 망명자고, 윤이상은 사이비 사회주의 독재국가를 찬양한 사람입니다. 나를 그와 비교하지 말아주십시오. 나는 윤이상 같은 변절자가 아니에요."라면서 윤이상에 대해 부정적인 견해를 피력했다.

2.2. 음악가로서의 삶

우선 외가가 호남의 만석꾼 집안이였기에 당시 기준으로는 대단한 부자집 출신이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예술에 관심이 깊었던 외할아버지와 독일에서 베를린 음악대학을 다닌 외삼촌 정석호[1]의 영향으로 어릴 때부터 음악에 조예가 깊었다. 일본 유학 이후 북한에 가서[2] 음악활동도 꾸준히 하였으며, 소련 망명 및 카자흐스탄 거주에서도 열성적인 음악활동을 하였다.

그의 대표적인 작품은 그의 교향곡 ‘조국’과 ‘1937년 9월 11일 스탈린’, 그리고 그가 통일조국의 애국가가 되기를 바라면서 작곡한 ‘내 조국’등이 존재한다.

2.3. 사망

그가 바래왔던 조국의 통일을 결국 두 눈으로 보지 못한 채 2013년 6월 13일에 90세라는 나이로 타지 카자흐스탄 알마티에서 사망하였다. 2년 뒤에는 동생이 그를 따라 세상을 떠났다.

그나마 최승희와는 다르게 카자흐스탄에서는 위대한 음악가로 이름을 영원히 남기고 가서 다행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관련 기사
[1] 베를린 유학 당시 같은 학교에 벌교 출신 음악가 채동선이 있었다.[2] 당시 친형인 정준채 영화감독의 권유에 의해 평양으로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