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청송군 출신 독립운동가
<colcolor=#fff><colbgcolor=#0047a0> 출생 | 1860년 10월 1일 |
경상도 청송도호부 현동면 손달동 (현 경상북도 청송군 현동면 인지리 손달마을)[1] | |
사망 | 1917년 9월 18일 (향년 56세) |
본관 | 함안 조씨[2] |
상훈 | 건국훈장 애족장 |
조성길(趙性吉)은 1860년 10월 1일 경상도 청송도호부 현동면 손달동(현 경상북도 청송군 현동면 인지리 손달마을)에서 태어났다.
1895년 을미사변으로 명성황후가 일본 낭인들에 의해 시해되자 그의 고향 청송에서도 김상종(金象鍾)을 중심으로 청송 의진이 구성되었고, 이에 조성길은 청송 의진에 들어가 안동부 청송군·영덕군, 동래부 흥해군 등지에서 적과 격전을 벌이며 많은 전과를 거두었다.
이후 중과부적으로 고전하던 중 고종의 의병 해산 조칙을 받들어 1896년 10월 의병을 해산하고 은거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된 후 영천군 출신 의병장 정용기를 중심으로 산남의진(山南義陣)이 조직되고, 조선 내 팔도에 모병활동이 전개되자 그는 산남 의진에 들어가고자 하였다. 그러나 당시 상중(喪中)이어서 의병진에 들어가지는 못하고, 대신 청조문[3]을 각지에 발송하여 의병을 소집하는 등 간접적으로 의병활동에 협조하였다.
1907년 9월 청하군 죽남면 입암(立岩)[4]의 전투에서 적의 기습을 받아 의병장 정용기가 순국하고, 11월 정용기에 이어 의병장이 된 정환직까지 적과 접전 중에 체포되어 순국하는 등 불행을 겪는 동안에도 끝까지 의진과 함께 활약하였다.
이후 고향으로 돌아가 조용히 지내다가 1917년 9월 18일 별세하였다.
1983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대통령표창에 추서되었으며, 이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2. 前 북한 외교관
<colbgcolor=#000><colcolor=#fff> 조성길 Jo Song-gil | |
출생 | 1975년 ([age(1975-01-01)]세)[5] |
가족 | 배우자[6], 딸[7] |
학력 | 평양외국어대학 (프랑스어과 / 졸업) |
경력 | 주 이탈리아 북한 대사관 1등서기관 (대사대리) |
북한의 前 외교관.
2019년 초까지 이탈리아 주재 북한대사관 대사대리를 지냈다. 북한의 핵개발로 이탈리아가 북한 대사를 추방하면서 1등서기관임에도 이탈리아 북한대사관의 대사대리 직무를 맡았다. 이는 이탈리아 주재 북한대사관의 근무 인원이 다섯 명뿐인데다가 다른 외교관들이 이탈리아 대사직을 맡기에는 유엔세계식량계획(WFP), 유엔식량농업기구(FAO), 국제농업개발기금(IFAD)의 식량 관련 3대 기구 업무와 외화벌이 및 김정은의 사치품 구입으로 바빴기 때문이다.
이탈리아 대사관은 북한 외교에서 매우 중요하다고 한다. 같은 북한 외교관 출신 태영호에 따르면, 북한은 매해 식량 필요량의 3분의 1 정도가 부족하여 이탈리아 대사관이 담당하는 식량 관련 유엔 산하 3대 기구에서의 구걸 외교가 매우 중요하기 때문이다. 탈북자 출신인 주성하 기자에 의하면, 북한 외교관의 실질적으로 제일 중요한 임무인 김정은의 외화벌이[8]가 이탈리아에서 돈세탁 과정을 많이 거친다는 점도 큰 이유이다.
조성길은 외무성에 입부하기 전 평양외국어대학 프랑스어과를 졸업했다.# 2019년 1월, 부인과 함께 북한대사관을 탈출하였으며 이탈리아 정보 당국의 보호를 받았다. 고등학생인 딸은 북한으로 압송되었다고 한다.# 주성하 기자는 북한 외교관이 자녀 전부를 해외 근무지로 데리고 나가는 게 허용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에 애초에 딸이 외조부모와 함께 있었을 것으로 추정했지만 정확한 것은 아니다.
그의 탈북 과정에 자유조선의 리더 에이드리언 홍 창이 개입했다는 말이 있다.# 그러나 이는 주성하 기자 등이 반박하기도 했다. 마치 ISIS가 테러만 발생하면 자신들의 소행이라고 주장했던 것처럼, 이 사건 또한 현실적으로 경위를 밝히기 어려운 상황에서 자신의 가치를 높이기 위해 블러핑했다는 것.
2020년 10월 6일자 뉴스에서 그가 원래 제3국에 망명을 시도하려 했으나 모종의 사유로 2019년 7월에 대한민국으로 귀순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김정은 시대의 최초 대사급 외교관 망명이라는 오보가 났지만, 어디까지나 1등서기관 신분으로 대사 직무를 대행한 것이기에 공사였던 태영호보다 직급이 낮다.
원래는 서방 국가 중 이탈리아와 프랑스를 고려했는데, 북한대사관이 없는 어떤 동유럽 국가에서 한국행을 선택하였다고 한다. 위를 제보한 사람이 조성길의 아내이며, 원래는 아내와 딸이 북한으로 갈 생각이었는데 일이 꼬이면서 한국에 입국했다.#
아버지가 조선로동당 검열위원장인 조연준이라고 알려졌으나 이는 사실이 아니다.# 2019년 1월 3일, 태영호가 인터뷰에서 조성길의 아버지와 장인어른이 외무성 출신으로 대사를 지냈다고 밝혔다.해당 부분[9]
[1] 인근의 창양리와 함께 함안 조씨 집성촌이다.[2] 26세 성(性) 항렬[3] 請助文: 민중들에 도움을 요청하는 글[4] 지금의 포항시 북구 죽장면 입암리[5] 대한민국 헌법 제3조의 영토 조항과 국적법을 바탕으로 북한의 주민들은 해외 국적을 따로 취득하지 않은 이상 태어날 때부터 한국 국적을 보유한다고 간주한다. 따라서 국적 표기를 하지 않는다.#[6] 같이 한국으로 망명했다.[7] 북한에 있다.[8] 특히 중동에서 무기수출로 벌어들인 돈[9] 태영호는 조성길과 같은 유럽 파견 외교관 사이였기 때문에 당시 주이탈리아 북한 대사관의 인사이동을 알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