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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순형/일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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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은 셀프
가족 조부 조인원 · 아버지 조병옥 · 형 조윤형 · 아내 김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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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출생 및 성장2. 정치 활동
2.1. 1979년 ~ 1980년까지2.2. 정치 입문 이후2.3. 민주당 시절2.4. 꼬마민주당 시절2.5. 새정치국민회의새천년민주당 시절2.6. 민주당(2005년)및 탈당2.7. 자유선진당 시절
3. 여생

1. 출생 및 성장

1935년 3월 10일 충청남도 천안군 직산면(현 충청남도 천안시 서북구 직산읍)에서 내무부장관을 지낸 아버지 조병옥과 어머니 광주 노씨 노정면(盧禎冕)[1] 사이의 3남 2녀 중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서울고등학교,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을 졸업했으며 미국에서 이민을 하고 그는 조지타운 대학교를 다니던 중 조병옥을 사망을 하고 귀국하여 다시 미국으로 다시 대학교를 들어가서 1년 만에 졸업을 했다. 삼성물산에 입사했고 부장까지 맡았다.

2. 정치 활동

2.1. 1979년 ~ 1980년까지

당시 12.12 군사반란으로 집권한 전두환대한민국 국회를 해산시키고 제1야당 신민당의 중진이었던 그의 형 조윤형을 정치 활동 규제자로 묶었다. 신군부에 의해 금배지를 억울하게 뺏긴 조윤형은 동생인 그에게 국회의원 출마를 권유했고, 그는 서울특별시 성북구에서 무소속으로 출마해 서울 지역 무소속으로는 유일하게 1위로 당선된다.

2.2. 정치 입문 이후

파일:200931468.gif
역대 선거 벽보
1981년 형 조윤형이 정치 규제를 당하자 제11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무소속으로 서울특별시 성북구 선거구에 출마하여 민주정의당 김정례 후보와 동반 당선되었다.[2]
파일:박찬종의원 조순형의원 고대 앞 사건.jpg
△ 신한민주당 당사의 모습
이 후 황명수, 권노갑 등과 함께 민주화추진협의회신한민주당의 발기인으로 참여했으며, 정치 규제에서 해금된 둘째 형 조윤형이 민주한국당 후보로 서울특별시 성북구 선거구에 출마하려 하자 1985년 제1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신한민주당 후보로 서울특별시 도봉구 지역구에 출마하여 민주정의당 홍성우 후보와 동반 당선되었다. 그러나 같은 해 고려대학교 앞 시위 선동 혐의로 박찬종 등과 기소되었다.

2.3. 민주당 시절

1987년 신한민주당을 탈당하여 통일민주당에 입당하였다. 그러나 김영삼김대중이 분열하여 따로 출마하자, 제13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박찬종, 이철, 홍사덕, 장기욱, 허경구 등과 양김 단일화를 촉구하였다. 당시 통일민주당사에서 삭발 농성을 펼친다. 하지만 이 삭발 농성도 무색하게 야권은 분열되었고 민주정의당 노태우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된다.

이후 13대 총선을 앞두고 무소속이 되어 1988년 예춘호 등과 한겨레민주당을 창당하였다. 그리고 제1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서울특별시 도봉구 갑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신민주공화당 신오철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3]

2.4. 꼬마민주당 시절

1990년 3당 합당을 거부한 이기택, 노무현, 장석화 등이 민주당을 창당했고, 그는 유인태, 홍사덕, 박찬종, 이철과 함께 꼬마민주당에 합류하여 야권 통합에 노력하였다. 1991년 민주당 최고위원이 되었다. 이 후 꼬마민주당은 김대중의 신민주연합당과 합당해 민주당(통합민주당)으로 이름을 바꾼다.[4]

1992년 민주당 후보로 서울특별시 도봉구 병 지역구에 출마하여 현역 전국구 국회의원민주자유당 양경자 후보를 꺾고 당선되었다.[5] 같은 해 민주당 사무총장을 역임하였다가 다시 대한민국 국회 교육청소년위원장이 되어 1994년까지 일하였다.

1995년에 조순형은 다른 꼬마민주당 출신과는 달리 동교동계를 따라 새정치국민회의에 합류하게 된다.

2.5. 새정치국민회의새천년민주당 시절

1996년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새정치국민회의 후보로 서울특별시 강북구 을 지역구[6] 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2000년 제1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새천년민주당 후보로 같은 지역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2002년 제16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당 내 대통령 후보 선출 전당대회에서 노무현을 지지하였다.[7]이후 새천년민주당 제16대 대통령 선거 중앙선거대책위원회 공동위원장을 맡았다. 그러나 2003년 열린우리당 창당에 대해서는 반대하였고, 새천년민주당 분당 당시에도 열린우리당에 합류하지 않고 새천년민주당에 잔류했다.

이후 2003년 11월에 열린 전당대회에 출마하여 새천년민주당의 신임 대표로 선출되었다.

2004년 노무현 대통령 탄핵 사태 때 새천년민주당 대표로서 탄핵을 주도하였다.[8] 2004년 제1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탄핵 정국의 책임을 지고, 지역주의도 타파한다는 명분 하에 기존 자신의 지역구인 강북구 을 불출마를 선언하고 느닷없이 아무런 연고 없는 대구광역시 수성구 갑으로 지역구로 옮겨 출마하였으나[9] 당연히 한나라당 이한구 후보에게 밀려 득표율 12.21%에 그쳤고 3위로 낙선하였다.[10]

2.6. 민주당(2005년)및 탈당

70살의 나이로 낙선한 조순형은 원외 인사로 전락하며 정계에서 은퇴할 것으로 예상되었으나 2006년 재보궐선거에서 서울 성북구 을 지역구에 민주당 후보로 출마하여 당선되었다.[11]

이후 2007년 제17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민주당 대통령 후보 선출 전당대회에 출마하였으나 국민중심당에서 넘어온 이인제에게 밀리자 금권 선거라는 명분으로 항의하였고[12], 끝내 2007년 11월 23일에 탈당한다. 이 때 조순형을 지지하던 구민주계 인사들인 유용태, 안동선, 이윤수, 장전형 등 원외 인사들이 줄줄이 민주당을 탈당하고 이회창 캠프와 이명박 캠프로 가는 해프닝이 일어났다. 이 때 조순형은 공식적으로 이회창 지지를 표명하진 않았으나 이회창 후보에게 우호적인 견해를 보였다.

2.7. 자유선진당 시절

파일:조순형 의원 이회창 대표 인사 모습.jpg
△ 자유선진당 당사의 모습

대선 즈음부터 무소속으로 활동하며 독자 행보를 보였고, 이 때문에 한나라당 입당설이 잠시 돌기도 했다. 그러나 2008년 2월 11일 이회창이 자유선진당을 창당하자, 대선 당시 그와의 교감을 바탕으로 이회창과 손을 잡고 자유선진당에 입당해 상임고문을 맡았다. 민주당계 정당에서 보수정당으로 넘어간 셈이다. 선친인 조병옥 박사부터 민주당계 정당에서 30여년 가까이 몸담았던 인물이지라 의외였다는 평이 많았다.

같은 해 치러진 제1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자유선진당비례대표 국회의원(2번)으로 당선되었다. 18대 국회에서 최고령 상임위 간사(72세) 라는 진기록을 세우기도 했다.[13] 그렇게 법제사법위원회 간사로 활동했으나, 자유선진당이 원내교섭단체 지위를 잃자 간사직도 상실했다.

2012년 제1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자유선진당 후보로 서울특별시 중구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중도 사퇴 후 정계를 은퇴했다. 해당 선거에서는 새누리당 정진석 후보[14]민주통합당 정호준 후보[15]가 대결했는데, 이 때문에 정치인 2세들의 대결이라는 평이 많았다.[16] 결국 조순형은 왕년의 동지였던 정대철의 아들인 정호준을 지지했다.

자유선진당이 선진통일당으로 당명을 변경하며 이인제 대표를 선임할 때 탈당하였다. 그를 데려온 이회창 총재도 새누리당에 5년 만에 평당원으로 복당하면서 없었고, 이인제와는 17대 대선 당시의 일로 악연이었기 때문이다.

3. 여생

정계 은퇴 후에는 간간히 방송에 출연하며 시사 평론을 하고 있다. 방송에서 뉴콘이나 시사평론 방송에 자주 나왔다.#



이후 2012년 제19대 국회의원 선거가 끝난 후에 조선일보 독자권익보호위원장에 임명되었다.#
파일:조순형 독자보호권익위원장.jpg

2015년 11월 24일 김영삼 전 대통령 서거 당시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 빈소를 찾아 조문을 하고 상주 김현철씨와 대화를 나누고 갔다.#

2016~7년 박근혜 대통령 탄핵 당시 TV조선에 주로 출연했고, 자유한국당의 비상대책위원장 후보로 거론되기도 했지만, 이미 팔순을 넘긴 고령에 정계를 완전히 떠난 상태라 사실상 임명 가능성은 없었다. 결국 인명진이 비대위원장으로 취임했다. #

2022년에 조선일보 독자권익보호위원장에서 퇴임했다. 이후 교육과학기술부 장관출신 김도연이 후임으로 내정되었다.


[1] 노병선(盧炳善)의 딸이다.[2] 이때 형 조윤형이 정치규제를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별다른 압박 없이 당선되었는데, 이는 당시 안기부장이었던 유학성이 선친이었던 조병옥과 개인적인 친분이 있어 선거 활동에 제약을 주지 않은 것이다.[3] 당시 한겨레민주당은 전남 신안군에 박형오 의원 1명만 당선되었는데 사실 이것도 평화민주당 소속 한화갑이 피선거권이 없어 선거에 못 나오자 어부지리로 당선된 것에 가까웠다.[4] 하지만 이 야권 통합도 무색하게 14대 대통령 선거에서 김대중은 낙마하면서 정계를 은퇴했다가 1995년 지방선거의 승리를 계기로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해 정계에 복귀한다.[5] 이 때 형인 조윤형(전국구)도 같이 당선되어 형제 의원이라는 기록을 세운다. 여당인 민주자유당도 형제 의원이 탄생하는데, 이상득(경북 영일군)과 이명박(전국구) 형제가 당선되었다.[6] 1995년 도봉구에서 강북구가 분구되었고, 이에 따라 기존 도봉구 갑/을/병 선거구가 도봉구 갑/을, 강북구 갑/을로 분리되면서 선거구가 1개 늘어났다.[7] 당내 비주류 중진들이 대체로 노무현을 지지했는데 정대철, 김상현 등도 비슷한 루트를 탔다.[8] 이 당시 당 부대변인인 장전형야당 대표가 오셨는데 물 한 잔도 안 준다.라고 KBS를 비난하는 바람에 물은 셀프라고 하는 유행어와 관련한 일화가 생기기도 했다.[9] 그 과정에서 전남 순천시를 지역구로 하던 김경재 의원이 조순형의 지역구였던 강북구 을에 공천됐고, 16대 총선에서 강동구 갑에 출마했던 노관규 변호사가 순천시에 새롭게 공천받았다. 결과는 셋 다 탄핵의 역풍을 맞아 낙선.[10] 헌데 선거 자금 보전 마지노선이 15%임을 감안하면 선거비용 절반은 건졌다.[11] 친노계 인사인 신계륜이 정치자금법 위반으로 국회의원직을 잃으면서 지역구가 비었기 때문이다. 공교롭게도 형인 조윤형의 지역구이기도 했다.[12] 그 만큼 민주당 조직이 지리멸렬한 수준이기는 했다. 일부 인사들은 대통합민주신당 창당 과정에서 이탈했고 구민주계 인사들끼리도 자기들끼리 지분을 주장하는 바람에 서로 통합하지 못하면서 외부에서 자신의 조직을 끌고 온 이인제에게 대선 후보를 빼앗기고 만 것.[13] 이 후 20대 국회에서 민주평화당 박지원 의원이 만 75세로 법사위 간사를 맡으면서 깨졌다. 공교롭게도 두 사람은 같은 동교동계 출신이다.[14] 정석모의 아들이다.[15] 정대철의 아들이다.[16] 사실 말이 정치인 2세지, 정진석이나 정호준 둘 다 조순형의 자식 뻘이나 다름이 없는 사람들이다. 조순형은 정진석의 부친인 정석모보다 9살 연하고, 정호준의 부친인 정대철보다 9살이 더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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