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0-31 19:24:50

김현철(1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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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국대학교 언론정보대학원 석좌교수
김현철
金賢哲|Kim Hyun-chu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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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E61E2B><colcolor=#fff> 출생 1959년 3월 8일[1] ([age(1959-03-08)]세)
서울특별시 성북구 안암동[2]
본관 김녕 김씨[3]
현직 동국대학교 언론정보대학원 석좌교수
재단법인 김영삼대통령기념재단 이사장
사단법인 김영삼민주센터 상임이사
문화체육관광부 자문위원
링크 파일:페이스북 아이콘.svg | 파일:X Corp 아이콘(블랙).sv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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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E61E2B><colcolor=#fff> 부모 아버지 김영삼, 어머니 손명순
형제자매 큰누나 김혜영, 작은누나 김혜경
김은철
여동생 김혜숙
배우자 김정현[4]
자녀 장남 김인덕, 차남 김인규, 장녀 김인영
학력 중앙대학교사범대학부속초등학교 (졸업)
중앙대학교사범대학부속중학교 (졸업)
경복고등학교 (졸업)
한성대학[5] (사학 / 중퇴)
고려대학교 문과대학 (사학 / 학사)[편입]
서던 캘리포니아 대학교 (경영학 / 석사)
고려대학교 대학원 (경영학 / 박사[7])
병역 대한민국 해군 일병 만기전역
종교 기독교 (개신교, 예장통합)[8]
소속 정당

파일:국민의힘 흰색 로고타입.svg
경력 중앙여론조사연구소 소장
유엔한국청년협회(UNYA) 회장
미국 텍사스오스틴대학 초빙교수
경남대학교 극동문제연구소 연구위원
경남대학교 정치외교학과 특임강사
한나라당 여의도연구소 부소장
한양대학교 공공정책대학원 특임교수
더불어민주당 문재인 대통령 후보 공동선거대책위원장
고려대학교 지속발전연구소 연구교수
국민대학교 정치대학원 특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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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
2.1. 문민정부의 ‘소통령’2.2. 몰락2.3. 이후 행적
3. 논란4. 여담5. 저서6. 소속 정당7. 선거 이력

[clearfix]

1. 개요

대한민국정치인 가문 출신 정치인.

1959년 3월 8일 출생. 제14대 김영삼 전 대통령의 차남이다. 아버지 김영삼의 민주화 운동과 선거의 핵심 참모였으며, 아버지가 대통령에 당선된 이후에 ‘문민 황태자’, ’소(小)통령’ 소리를 들으며 막후에서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는 실세였다.[9]

2. 생애

중앙대학교사범대학부속초등학교, 중앙대학교사범대학부속중학교[10], 경복고등학교(53회)[11]를 졸업하고, 한성대학 사학과에 입학하였다가 고려대학교 문과대학 사학과로 편입해 졸업했다. 미국 USC에 유학하여 MBA 과정을 밟았고, 1984년 귀국하여 쌍용투자증권에 취직했다.

1987년 제13대 대통령 선거에 아버지가 출마하자, 퇴사하고 자체 여론조사 팀인 동숭동팀을 꾸려 김영삼의 선거 전략을 짜는 등 김영삼 진영의 브레인으로서 활약했다. 당시까지의 여론조사나 선거정세 분석 등은 주먹구구식에 머물러 있었으나, 김현철과 동숭동팀의 분석은 당시 수준을 훨씬 뛰어넘는 것이어서 아버지 김영삼이 크게 신뢰했다고 한다. 1988년 중앙여론조사연구소를 설립해 초대 소장이 됐고, 1990년에는 '민주사회연구소'로 확대 개편시켰다.[12]

2.1. 문민정부의 ‘소통령’

1992년 제14대 대통령 선거에서 아버지가 대통령에 당선된 후 공식적으로 맡은 직책은 없었으나, 기존의 동숭동팀을 정권의 싱크탱크처럼 활용해 비선 실세로 정권의 한 축을 맡으며 문민정부의 최고 실세로 군림했다. 1996년에는 유엔한국청년협회 회장으로 피선됐다.

당시 김현철의 위세는 대단해서 국정 운영과 인사권에 개입한 것은 물론, 차기 정권 창출을 위해 막후에서 영향력을 행사했다는 의혹이 제기될 정도였다. 심지어 그가 방송사 인사뿐 아니라 지역민방 허가에도 관여한 의혹이 있다는 보도가 나왔으며, 여권 핵심 관계자는 ‘정부여당, 군, 검찰, 국영기업 등 요직에는 그의 입김이 미치지 않는 곳이 없었다’는 주장을 할 정도였다. 권영해 전 안기부장, 오정소 제1차장, 김기섭 운영차장 등 '문민시대 안기부 3인방'이 김현철 대표 인맥으로 손꼽혔다.

특히 당시 청와대 근무자들은 김현철이 대통령이 보고받는 수준의 고급정보까지도 이미 알고 있었으며 청와대 각 수석이나 안기부로부터 정보를 보고받고, 국정을 논할 정도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고 증언한다. 실제로 문민정부 출범 첫해 이미 청와대 민정수석실과 안기부 등 공조직 고위층과 네트워크를 구축해 놓았다.#

국가정보원 출신으로 퇴직 후 여러가지 증언을 남긴 김기삼에 따르면, 당시 김현철은 대한민국의 모든 주요 인사를 주무르다시피 했다고. 개각 때마다 국가안전기획부는 5배수의 추천 명단 보고서를 올리는데, 이러한 초극비 인사 보고서가 김현철에게 전달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김현철에 비판적인 자세를 보인 사람은 가차 없이 잘려나갔다. 김영삼 정부 초대 경호실장이었던 박상범도 그런 이유로 자리에서 물러났으며, 심지어 김영삼의 최측근 중 하나인 국회의원 김덕룡"현철이를 유학보내십시오"라고 김영삼 대통령에 건의했다가 권력 핵심에서 밀려났을 정도라고.[13]

다만 김영삼 정부의 중요한 치적으로 꼽히는 금융실명제 실시나 하나회 숙청에는 관여하지 않았다. 특히 하나회 숙청의 경우엔 김현철 본인이 자기도 몰랐다며 직접 부정하였다.

2.2. 몰락

1997년 한보 사태 당시 몸통으로 지목당하며 졸지에 수사 대상이 되었고, 그의 측근인 의사 박경식의 양심선언과 김현철의 전화통화 장면이 찍힌 비디오테이프가 공개되면서 YTN 사장 인선과 고속도로 휴게소 입찰에 개입했던 흔적이 밝혀져 궁지에 몰리게 된다.

이에 따라 검찰의 수사가 시작되어 그를 비롯해 박태중 (주)심우 대표, 전 안기부 운영차장 김기섭, 디즈니여행사 대표 김희찬 등도 같이 구속되었고, 수사 과정에서 대호건설 이성호 사장의 증언에 따라 권력형 비리에 개입했음이 드러났고, 1992년 대선자금 당시 쓰고 남은 나머지 120억원을 개인 비자금으로 관리하고 있음도 검찰 조사에서 같이 드러나 결국 조세포탈 혐의로 구속, 실형을 선고받았다. 한편 당시에는 김현철보다 오히려 "홍인길 전 대통령 총무수석비서관이 이 사안의 주범 아니냐?"라는 주장이 있었지만 홍인길은 이에 반박하며 “사람들이 나를 실세라 부르는데 내가 무슨 실세냐. 나는 바람이 불면 날아가는 깃털에 불과하다”고 부인했고, 사람들은 ‘그렇다면 김현철이 몸통 아니겠느냐’며 김현철을 ‘몸통’이라 말했다. 이 사건 이후로 김현철은 '몸통'이라는 별명이 생겼으며, 이 사건을 계기로 정치권에 권력형 비리 사건이 터지면 ‘몸통-깃털이 누구냐’를 따지기 시작했다.

1997년 5월 17일 구속 수감된 김현철은 감옥에 있는 동안 스스로를 ‘정치적 희생양’이라 주장하며 울화병까지 얻었다. 실제로 자신을 면회오는 이들에게 이전까지는 나한테 도움을 청하면서 어떻게든 나한테 붙으려는 놈들이 많았다. 그런데 내 곁에서 단물 빨아 먹은 놈들은 지금 다 어디갔느냐고 울화통을 터뜨렸고 심지어 면회 온 이들에게조차 "너네도 다 똑같다"'며 화도 냈었다고.

한편 이성호 전 사장은 김현철을 ‘형’이라 부를 정도로 가깝게 지내던 인물이지만 검찰 수사 과정에서 김현철을 구속시키는데 결정적 증언을 한다. 이후 둘의 관계는 완전히 틀어졌고 이 사건 직후 이성호 사장은 김현철에 대해 이렇게 평가했다.
“현철이 형과 친하게 지내면서 피해본 것도 참 많지만 한가지 크게 배운 건 하나 있다. 권력을 휘두를 때의 쾌감이 뭔지, 또 권력이란 게 얼마나 비정한 것인지도 뼈저리게 느꼈다”

1999년 김현철은 당시 대통령이었던 김대중광복절 특별사면으로 석방됐고, 2004년 제1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아버지의 고향인 거제시 지역구에서 한나라당 공천을 받지 못하자 탈당해 무소속으로 출마했다가 음해와 모략이 판치는 선거판에 환멸을 느낀다는 이유로[14] 후보 등록 4일 만에 사퇴하였다. 같은 해에 불법정치자금을 받은 혐의로 재판을 받았으며, 최종적으로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 추징금 5억 원을 선고받았다.[15] 여담으로 이때 변호사가 20대 국회에서 법사위원장을 맡은 여상규.

2.3. 이후 행적

2007년 한나라당 대통령 후보 경선과 17대 대선에서는 상도동계 인사들 대부분과 더불어 이명박 후보를 지지하였고, 2008년 말부터 2012년 초까지 한나라당 산하 정책연구소인 여의도연구소[16] 부소장을 맡았다. [17]

2008년 9월 30일, 김홍조가 별세하면서 조부상을 당했다.

2012년 총선을 앞두고 새누리당 공천을 신청했다가 탈락하자 탈당했으며, 같은 해 대선에서는 공식적으로 아무도 지지선언을 하지 않은 아버지 김영삼과는 달리[18] 강삼재, 김덕룡, 문정수, 심완구 등 일부 상도동계 정치인들과 함께 민주통합당 문재인 후보를 지지했다.[19]

2014년 이후 거제미래포럼 대표, 고려대학교 지속발전연구소 교수, 국민대학교 특임교수 등으로 재직했다.

2015년 11월 22일, 김영삼이 별세하면서 부친상을 당했다.

제19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문재인 후보가 직접 지지 요청을 한 것에 화답하여 김덕룡 김영삼민주센터 이사장과 함께 문재인 후보 지지를 선언하고, 김대중 전 대통령의 셋째 아들인 김홍걸과 함께 문재인 후보 지지 유세를 다녔다. 19대 대선 직후 더불어민주당에 공식 입당하였다. 기사 사실 자유한국당은 친박세력이 생겨나 주류를 차지한 이후 김영삼계와는 거리가 멀어졌고,[20] 오히려 친노/친문 진영은 PK 연고라는 공통점도 있어서 이질적이지 않은 것이다. 다만 네티즌들의 평은 아버지의 명성에 비리로 먹칠을 한 불효자가 정계에 발을 들인다며 반발하거나 비난하는 중.

2019년 1월 14일 더불어민주당을 탈당하였다. 더불어민주당이 김대중, 노무현 정신만 강조하고 김영삼 정신은 언급하지 않는다고 비판했는데 정작 김영삼 초상화는 현재 자유한국당사에 걸려있으니 더 고민이 컸을지도. 부울경 지역 국회의원들과도 교류가 전혀 없었다고. 페이스북에는 자신이 문재인 정부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며 개혁이 성공리에 끝나길 바란다는 말을 남겼다.

2021년 8월 3일, 국민의힘 윤석열 20대 대선 예비 후보 지지를 선언했다. 이에 따라 한때 친윤으로 분류되기도 했었다.

파일:조선총독부 관저 복원.png
YS가 철거한 조선총독관저 복원 추진?…"누가 무슨 생각으로 이걸 추진하나"
정부, '조선총독 관저' 복원 추진…누리꾼들 "제정신인가"
옛 조선총독 관저 모형 복원 추진에…민주 “청와대 망치려 하나

대선 때는 윤석열을 지지했지만, 윤석열 정부윤석열 정부 대통령 집무실 용산 이전으로 개방된 청와대에 1993년 김영삼 정부역사바로세우기로 철거된 청와대 옛 본관(조선총독관저) 모형 복원 계획을 밝히자 “지금 이 시점에서 굳이 해체된 총독부 관저를 모형으로 만든다는 것은 절대 용납할 수 없다”는 의견을 밝혔다. YS가 부순 조선총독관저를 모형으로…차남 "절대 용납 불가"

2024년 3월 7일, 손명순이 별세하면서 모친상을 당했다.#[21] 모친상 이후 정확히 5개월이 지난 8월 7일에는 친형 김은철이 세상을 떠나면서 형님상을 당했다.#

3. 논란

3.1. 이상용 공금횡령 누명 사건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이상용 공금횡령 누명 사건 문서
번 문단을
부분을
참고하십시오.
(동아일보) 이상용씨 "심장병기금유용 보도는 김현철 측 보복극" 주장
(한겨레) "성금유용 보도 현철씨 보복극" 뽀빠이 이상용 주장

이 사건에 대해 이상용은 김현철의 정치보복이었다고 주장했고 논란이 됐다. 구체적 내용은 해당 문서 참조.

4. 여담


* 인세인 디지[22]가 그와 그의 아버지를 까는 곡인 Damn Ex-presidents[23]에서 전두환, 노태우와 함께 실명까지 거론해 가며 디스하였다.
  • 2023년 2월 16일에 전직 대통령의 아들들인 박지만, 김홍업, 노재헌과 함께 사석에서 만남을 가졌다.[24] 이 자리에서 이들은 최근 극단화된 정치 지형에 대한 우려와 함께 통합과 화합의 필요성에 공감했으며, 아버지들 간에는 정치적인 아픔들이 있었으나 아들들끼리는 싸우지 말고, 앞으로 모임을 자주 가지자고 하였다.(관련 기사 1, 관련 기사 2)
  • 김무성홍준표를 싫어한다. 아이러니하게도 김무성은 김영삼이 민주화운동을 하던 시절부터 김영삼의 비서 역할을 했던 상도동계 직계 출신이고 홍준표는 아버지인 김영삼을 통해 정치에 입문한 YS키즈의 일원이었다. 아무래도 이 두사람이 2000년대 이후 보수 정당의 유력 정치인임에도 아버지와 자신을 찬밥 취급했다는 억하심정이 남아있는 모양이다.
  • 친할머니 박부련은 1살 때 사망[25], 외할머니 김근이는 그가 태어나기 25년 전에 사망[26]했지만 친할아버지 김홍조와 외할아버지 손상호 모두 사별 후 재혼하여 새 친할머니 최남순[27] ,이수남[28]과 새 외할머니 감덕순[29]이 모두 있었다.

5. 저서

  • 하고싶은 이야기 듣고싶은 이야기 (1995, 고려원)
  • 너무 늦지 않은 출발이기를 (2002, 중앙M&B)
  • 세계화와 21세기 국가경영 (2002, 중앙M&B)

6. 소속 정당

소속 기간 비고


[[신한국당|
파일:신한국당 흰색 로고타입.svg
]]
1995 - 1997 정계 입문

파일:한나라당 흰색 로고타입(1997~2004).svg
1997 - 2004 합당[30]


[[무소속(정치)|
무소속
]]
2004 - 2007 탈당[31]


파일:한나라당 흰색 로고타입.svg
2007 - 2012 복당[32]


[[새누리당|
파일:새누리당 흰색 로고타입.svg
]]
2012 당명 변경


[[무소속(정치)|
무소속
]]
2012 - 2017 탈당[33]

파일:더불어민주당 흰색 로고타입.svg
2017 - 2019 입당[34]


[[무소속(정치)|
무소속
]]
2019 - 2021 탈당[35]


파일:국민의힘 흰색 로고타입.svg
2021 - 현재 입당[36]

7. 선거 이력

<rowcolor=#fff> 연도 선거 종류 선거구 소속 정당 득표수 (득표율) 당선 여부 비고
2004 제17대 국회의원 선거 경남 거제

[[무소속(정치)|
무소속
]]
후보 사퇴


[1] 족보상 1960년 5월 21일[2] 동작구 상도동 자택 이전에 살던 주소지에서 태어났다.[3] 충정공파(忠貞公派) 29세손.()[4] 선산 김씨 김웅세(金雄世)의 고명딸이다.[5]한성대학교.[편입] [7] 박사 학위 논문 : 初期 組織社會化過程에서의 組織社會化戰略의 役割에 관한 硏究 (1997)[8] 예능교회 안수집사[9]김은철은 일찍이 미국으로 가서 평범한 회사원 생활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차남인 김현철이 아버지와 가장 가까이 있었다.[10] 이 두 학교는 상도동과 가까운 흑석동에 있다.[11] 노태우 전 대통령의 아들 노재헌은 58회다.[12] 이후 민주사회연구소는 신한국당과 한나라당을 거치며 한나라당의 선거전략기관으로 개편되었는데 이게 바로 국민의힘의 싱크탱크인 여의도연구원이다.[13] 출처 : http://niswhistleblower.tistory.com/53[14] 실제 선관위 사퇴 사유에 그렇게 적혀 있다. 다만 전후 사정을 고려하면 문민정부 시절 소통령 소리 듣다 구속까지 당하는 등 여론이 좋지 않았기에 포기한 것으로 보인다.[15] 검찰 수사를 받는 과정에서 거짓말이 탄로나자 송곳으로 자해 소동을 일으켰다. 하지만 상처의 깊이가 1cm에서 0.3cm 정도로, "상처 경미 본인도 민망"이라는 이름으로 기사가 날 정도였다. 이에 아버지인 김영삼은 이 소식을 전해듣고 극히 한심해 했다는 후문.[16] 1987년 대선에서 초반 우위를 유지하지 못하고 패한 김영삼 진영에서 정확한 정치관련 자료를 보유할 필요성을 절감, 김현철의 주도로 업계의 실력자, 유명 학자들을 데려온 곳이다. 이 후 2010년 지선을 기점으로 신뢰도가 떨어지기 전까진 정확한 정계 설문조사 자료를 보유한 것으로 유명한 곳이었다.[17] 부친 YS가 선친 김홍조 옹의 장례식에 조문 온 여권 인사들을 한 사람, 한 사람 바라보며, 과거 인연(예, 공천)을 언급하는 일이 있었다고 한다. 이 여권 인사들이 주축이 되어 "당의 원로[37]이신 김영삼 전 대통령을 존경하는 뜻"을 당 인사에게 설파, 김현철이 "친정" 여의도 연구소로 복귀했다는 후문. 이 때 부산 사상구에서 내리 3선을 했고 YS 퇴임 이후 대변인 역할을 하던 상도동계 박종웅 전 의원도 YS가 잘 챙겨달라는 부탁을 했고 박종웅 전 의원이 한국야구위원회 총재로 간다는 떡밥이 돌기는 했으나 이뤄지지 않았다. 대신 야구계는 정치권 낙하산을 막는다는 명분으로 유영구 명지학원 이사장을 새 총재로 추대한다.[18] 박근혜가 김영삼을 직접 찾아 오긴 했으나, 지지 선언은 하지 않았다.[19] 김현철이 직접 언급하기를, 문재인씨가 직접 부친을 찾아 왔더라면 아버지가 흔쾌히 문재인 지지선언을 했을 것이라고 아쉬움이 남는다는 뉘앙스로 언급하기도 했다.[20] 박정희와 김영삼은 김영삼 질산 테러 사건만 봐도 알 수 있듯 평생 앙숙이었다. 박정희의 후계자격인 박근혜도 당연히 김영삼계와 절대 좋다고 할 수 있는 관계는 아니었다.[21] 모친 손명순의 장례식에선 누나들과 여동생도 사진에 찍혔다. 왼쪽부터 김혜영(배우 이덕화의 초등학교 동창), 김혜숙, 김혜경.[22] 2008년 제1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강남구 갑 지역구에 '김원종'이라는 본명으로 무소속 출마하기도 했다.[23] 직역하면 '망할 전직 대통령들'이라는 뜻이다.[24] 전직 대통령 자녀들 중 논란이 있는 이들을 제외하고 모일 수 있는 사실상 모두 모인 것이나 다름없다. 이승만의 양자 이인수는 초고령에 건강도 매우 나빴으며 윤보선, 최규하의 자녀들은 언론 노출을 피하고 일반인으로 살아가고 있고 전두환 일가는 일가 전체가 재산 논란이 있고 사법리스크가 있는 이명박 역시 마찬가지다. 노무현 일가도 노건평과 권양숙과 관련된 논란이 있고 박근혜, 윤석열은 무자녀, 문재인의 자녀들은 해외에서 거주하고 있다.[25] 1907년 ~ 1960년 (향년 53세).[26] 1908년 ~ 1935년 (향년 27세).[27] 1925년 ~ 1971년 (향년 46세).[28] 1924년 ~ 2012년 (향년 88세).[29] 1910년 ~ 2009년 이후 (향년 99세 이후).[30] 민주당과 신설 합당[31] 총선 공천 불복으로 인한 탈당.[32] 이명박 대통령 후보 지지 선언.[33] 총선 공천 불복으로 인한 탈당.[34] 문재인 대통령 후보 지지 선언.[35] 당내 노선 차이로 인한 탈당.[36] 윤석열 대통령 후보 지지 선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