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2-17 18:54:02

접부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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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무형문화재 128호 다산 김동식 선생이 제작한 합죽선. 우리나라 접부채의 대표 격이다.
1. 개요2. 기원 및 역사
2.1. 한국내에서의 역사
3. 종류4. 무형문화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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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접부채는 접고 펼 수 있는 부채를 통칭한다. 깃털이 달린 부채나 태극선 등은 접을 수가 없어 접부채가 아니다. 접선() 혹은 첩선()이라고도 하며 선풍기나 에어컨이 없던 시절에 동아시아에서 널리 유행하였고 서양에도 전파되었다.

칠접선이나 합죽선도 접부채의 일종이다.

2. 기원 및 역사

조선 헌종 시기 쓰여진 재물보에 따르면 접부채는 고려 시기 발명됐다고 적혀있고[1], 1123년 송나라 사신 서긍(徐兢)이 지은 선화봉사고려도경(宣和奉使高麗圖經)에는 "고려인들은 한겨울에도 부채를 들고 다니는데 접었다 폈다 하는 신기한 것이다."라는 기록이 있다.# 또한 고려 시기에 만들어진 대나무 속살을 얇게 깎아 부채살을 만들고 그 위에 헝겊이나 종이를 올려 만든 현대 접부채의 기원이 되는 유물이라고 볼 수 있는 접부채가 국내에서 출토된 바 있다. 청곡박물관이 소장 중이며 고려 칠접선이라고 불린다. 겉대를 통 은으로 만들었고 속살에는 옻칠을 하였다.

일본의 헤이안 시대 유물을 근거로 일본 기원이라고 주장하는 사람(학자는 아님)도 있으나#, 정설이라고는 볼 수 없다. 헤이안 시대의 유물은 현대의 접부채라기보다는 얇은 나무판을 이어 엮은 회선(檜扇)에 가깝다. 즉 나무 편이나 껍질을 엮어 만든 것에 불과하다. 오히려 현대의 접부채처럼 정교하게 깎은 겉대와 속살이 있고 속살 위에 종이를 발라 만든 모습은 고려 시기의 유물에서 확인할 수 있다.[2] 일본전통부채 사이트에 따르면 양쪽에 종이를 붙인 부채는 일본 카마쿠라 시대(1185년~1333년)에 등장했으며 중국으로부터 수입한 부채 상품이라고 말한다. 즉 이러한 부채 유형은 고려가 중국으로 부채를 수출한 시기 이후에 등장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다만 그 기원이 고려든 일본이든 동아시아에서 접부채가 최초로 발명된 것은 자명하며, 한국에서 중국으로 전해진 접부채가 중국에서 유럽으로 전해져 유럽의 문화에 큰 영향을 끼쳤다. 유럽은 접부채를 바람을 일으키는 용도로 쓰기보다는 부채를 들고 특정 몸짓을 하는 것으로 사교계의 비밀 언어를 만들어내기도 했다.

원래 중국에는 접부채가 없었는데, 고려로부터 전해진 접부채가 큰 인기를 끌면서 그것을 모방하여 접부채가 일반화되었다고 한다. 청나라의 기록에도 접부채는 고려로부터 왔다고 적혀있으며, 최남선의 고사통에는 북송 때 고려로부터 접부채가 처음 전해졌다고 적혀있다.#

동아시아에서 접부채 자체의 제작기법은 한국 조선 후기에 가장 발달했었는데, 이는 일본이나 중국과는 달리 대나무의 자생지가 북방한계선에 위치하여 대나무가 무르지 않고 단단한 덕분이다. 조선 후기 학자 이규경이 쓴 백과사전인 오주연문장전산고라는 책에서는 전주와 나주에서 만든 부채가 질이 좋다는 기록이 있다.

영문 위키피디아 부채(Hand Fan) 항목에는 이러한 자세한 내용은 나와있지 않고 접부채는 일본에서 발명되어 중국으로 전해졌다는 내용만 적혀있다.#

현대로 들어서면서 선풍기 및 에어컨이 부채의 실용성을 빼앗아가 부채는 점점 작품의 영역으로 들어섰다.[3] 일부 무형문화재 명인들은 작품의 고급화를 시도하여 현재로 이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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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한국내에서의 역사

고려시대에 접부채는 평민들이 쉽게 쓸 용도로 소매에 넣고 다니도록 만든 것이었다. 이 때는 금광죽[4]이니 섭첩선이니 송선이니 하는 이름으로 불렀다. 그러던 것이 조선시대에 들어오면서 양반들이 자신을 뽐내는 도구로 활용하였다. 언제부터 귀족들이 접부채를 애용하였는지 알 수는 없지만, 세종실록 등에서 접부채를 황금으로 교환하였다는 기록이 있어 조선 건국 이전에 이미 고급화가 진행되었으리라 유추해 볼 수 있다.[5] 이 조선의 접부채는 중국에서 특히 좋아했는데 명나라에서 조선 접부채를 모방하여 만들게 한 기록이 여럿 존재한다. 이를 고려선이라고 불렀으며, 일본 도쿠가와 시대에도 조선의 접부채를 모방한 조선골선이 등장하였다.

이 양반들의 애장품인 접부채가 어느 위상을 가지느냐 하면, 접부채를 들고 외출하지 않으면 주변에서 가짜 양반이라고 수군덕댔다고 한다. 따라서 접부채는 양반들의 화룡점정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 하여 서민들이 접부채를 쓰지 않는 건 아니고 주로 민선이나 딱선 등을 사용하였다.

이 중 유물로 유추할 수 있는 바 고급 접부채는 단언컨대 칠접선합죽선이라 할 수 있다.

칠접선은 고려 때부터 존재해 왔으며, 옻칠은 중요한 국가 자원인데 부채에 옻칠을 하는 것은 낭비라 생각했는지 조선왕조실록 여러 곳에 칠한 부채를 금하는 내용이 등장한다.[6][7]

합죽선은 전북 남원 수령인 오재문이 부골을 구부러뜨려 만들었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이는 손이 많이 가고 장인들의 원성이 자자하여, 오가놈의 뼈라는 뜻인 오골선(吳骨扇)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린다. 합죽선의 부골이 구부러진 탓에 이 오골선이 합죽선일 가능성이 상당히 높으며, 이를 골선이라고 불렀고 도쿠가와 시대에 모방한 조선골선 역시 합죽선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8][9]

조선은 사치를 막고자 하여 접부채에 사치스러운 치장을 하는 것을 계속 금지하였으나 잘 지켜지지 않았다. 오히려 조선 후기, 영정조 시대에는 40cm급의 거대한 부채가 등장하거나 겉대를 매부리바다거북의 등껍질로 말아싼 부채가 등장한다거나 살 수를 50개로 채워넣는 백접선[10][11], 겉대에 뿔을 대는 외각선, 대나무 껍질을 얇게 켜서 겉대에 말아붙인 죽피선 등이 나왔다. 이렇게 화려한 치장을 자랑하는 부채들은 모두 칠접선이었고 국가의 재정 낭비가 말도 안되게 심했다. 단 합죽선은 분죽으로 치장한 정갈한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가, 조선 말기로 들어서며 칠접선 치장을 따라하기 시작했다.

일제강점기 때는 뜬금없이 칠접선이 사라졌다. 일본 부채도 속살에 옻칠한 접부채가 있었는데 칠접선보다 훨씬 저렴했다. 이 부채가 조선에 대량으로 유입되며 칠접선은 시장의 선택을 받지 못했고, 합죽선은 일본에 없는 부채라 일제 자본이 투입돼 대량으로 생산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대량생산된 합죽선은 그 이전의 것과 비교하면 초라할 정도로 품질이 낮아졌고, 시대상을 반영해서인지 그 크기도 왜소해졌다.

해방 이후 부채 제작자들은 전주에 모여 제작하기 시작했고 예전에 하던 대로 합죽선 대량생산을 하였다. 이 때는 아직 에어컨이나 선풍기가 널리 보급되기 전이라 매우 잘 팔렸으나, 현대에 이르러서는 그 수요가 급감했다. 이에 장인들은 활로를 찾기 시작했는데 그 방법 중 하나는 단가를 낮추는 것이었다. 겉대를 마디 많은 맹종죽으로 치장해 화려함을 더했고, 선두를 소뼈나 나무 등에서 플라스틱으로 대체하였다. 몸통 곡선을 일자로 뻗어 제작 시간을 단축시켰고 고리를 황동 일색으로 통일하였으며 속살 낙죽을 수작업에서 전기도장으로 대신하였다.

그럼에도 부채 수요는 늘어나지 않고 부채 제작자는 점점 줄어들고 있어 몇 무형문화재는 발상의 전환을 시도하였다. 작품의 영역으로 부채의 성격을 더하자는 것이다. 사실 이는 새로운 것은 아니었다. 이미 조선시대 합죽선은 최고급 부채로, 단오선에도 등장하는 물건이다. 일제강점기 때 대량생산을 하여 그 품질이 낮아진 것일 뿐 이러한 시도는 합죽선 본연의 성질대로 돌아가는 것이다.

다행이 최근 무형문화재들은 과거 대량생산체제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작품 세계를 구축하고 있다.

3. 종류

  • 칠접선 : 대나무 속살을 깎아 부채살을 만들고 그 위에 옻칠한 부채. 항목 참조.
  • 합죽선 : 대나무 껍질 두 겹을 맞붙여 살 하나를 만든 부채. 항목 참조.
  • 민선, 딱선 : 큰 기교를 부리지 않고 대나무 살을 직선으로 깎아 엮어 만든 부채. 조선시대에서는 서민들이 주로 사용하였다.
  • 민합죽선 : 민선과 비슷하나 속살에 합죽선의 낙죽 그림을 흉내낸 부채. 당연히 합죽선은 아니다.
  • 오죽선 : 까만 대나무(오죽)로 만든 부채. 크기는 합죽선과 비슷하나 만듦새는 민선과 가깝다.
  • 철선 : 부채살을 쇠로 만들어 무기로 사용할 수 있도록 만든 부채.
  • 하리센 : 일본식 만담에서 츳코미를 넣을 때 사용하기 위해 부채살 없이 종이만 접어서 만든 부채. 당연히 지지대가 없는 만큼 바람을 일으킨다는 부채 본래의 용도로 사용하기에는 부적합하다.

4. 무형문화재

합죽선 같은 고급접부채 및 태극선 등의 단선 같은 부채를 제작하는 장인을 선자장이라고 한다. 현대에는 칠접선이나 합죽선이 아닌 일반 접선 기능보유자에게도 무형문화재를 지정하고 있다. 각 부분의 기능보유자[12]는 다음과 같다.

중요무형문화재 제128호 선자장 김동식[13]#
전라북도 무형문화재 제10호 선자장 엄재수#
전라북도 무형문화재 제10호 선자장 박계호#
전라남도 무형문화재 48호 접선장 김대석 [14]
[1] 한국의 부채, 임동권, 1983[2] 종이와 대나무를 사용한 현재 모습의 접부채 중 세계에서 가장 오래 된 유물은 청곡박물관이 소장중인, 겉대를 은으로 장식하고 속살은 옻칠을 한 고려시대 칠접선이다.[3] 조선시대 말기까지만 해도 칠접선이나 합죽선 등의 고급 부채는 원래 전통공예 예술작품 분야였다. 일제강점기 때 칠접선은 명맥이 끊어졌고, 합죽선은 일제 자본이 대량으로 흘러 들어와 합죽선의 대량화가 이루어지며 품질이 급격히 낮아진 것이었다.[4] 반죽(斑竹)을 지칭하는 듯하다.[5] 청곡박물관에 있는 고려시대 유물도 사치스럽기 그지없어 접부채가 평민의 전유물이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6] 태종 10년 4월 26일 "전칠(全漆)은 이어대기 어려운 물건인데, 각전(各殿)에 해마다 바치는 접선(摺扇)에 모두 칠(漆)을 써서 국가의 용도를 허비하니, 금후로는 진상(進上) 이외에는 모두 백질(白質)을 사용하여 국가의 용도를 절약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7] 정조 4년 5월 5일 공조(工曹)에서 칠선(漆扇)을 바치는 것을 멈추라고 명하였다.[8] 조선시대 칠접선은 합죽선과는 달리 부골이 없는 경우가 많다.[9] 엄재수. "한국 전통 부채의 역사적 고찰 및 디자인 접근에 관한 연구." 국내석사학위논문 전주대학교, 2019. 전라북도[10] 본래 왕과 그 직계만이 사용할 수 있었으나 어찌된 일인지 유물에서 가끔 보이는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세도가 혹은 돈 많은 양반들도 사용했으리라 추정한다.[11] 게다가 이 백접선은 칠접선이다. 살 50개에 전부 그 비싼 옻칠을 했단 이야기다.[12] 중요무형문화재 및 지방무형문화재에서 그 보유자 - 속칭 인간문화재 - 에 대해서, 공예 분야의 겨우 '기능보유자'로, 공연분야의 경우 '예능보유자'로 칭한다.[13] 2015년 선자장이 중요 무형문화재 128호로 등록된 이후 김동식씨가 처음으로 중요 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14] 합죽선이 아닌 일반 접선의 기능보유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