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03 19:01:56

진필중/선수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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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진필중의 선수 경력을 서술한 문서.

2. OB/두산 베어스 시절

파일:/image/264/2012/04/26/c0a8ca3d000001207b8392870001d960_p2.jpg 파일:external/dimg.donga.com/6849453.1.jpg 파일:external/sports.chosun.com/81874110.jpg
풋풋했던 OB 베어스
신인 선발투수 시절
전성기였던 두산 베어스
특급 마무리 시절
2001년 한국시리즈에서
우승을 확정지은 후
포수 홍성흔과 함께.

중앙대학교 시절에는 무명에 가까웠던 선수였다. 4년 간 거둔 승리가 고작 4승. 하지만 1995년 2차 지명에서 예상을 깨고 OB 베어스가 2차 2순위로 지명하여 계약금 6,000만 원에 입단했다. 사실 여기에는 비화가 있는데, 삼성 라이온즈에서 진필중을 관찰한 후 '2라운드에 뽑을 테니 실력을 숨기고 있으라'고 요청했다고 한다. 그러나 진필중이 이를 거절하고 그 해 마지막 경기에 등판하면서 타 구단 스카우터들의 주목을 받게 되었고 마침 진필중을 매의 눈으로 지켜보고 있던 OB 베어스가 기습적으로 2라운드에서 지명했다. 한편, 삼성이 진필중의 2라운드 이전에 1라운드에서 뽑은 선수는 동국대 포수 김영진.[1] 그 이후에 대해서는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OB 베어스에 입단한 후 김인식 체제에서 선발, 마무리 가리지 않고 등판하며 활약했다. 특히 마무리 자리에서 묵직한 구위로 그 위력을 발휘했다. 특히 신인 시절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1995년 한국시리즈로, 3차전의 6이닝 1실점과 2승 3패로 뒤진 6차전 선발로 나와 완투승을 거두면서 한국시리즈 우승의 주역이 되었던 것이다.

촉망받는 선발 유망주가 된 진필중은 이듬해인 1996년에는 191이닝, 13승을 거두며 선발 투수로 자리매김했고, 1997년에도 7승을 올렸다.

그런데 원래 OB 베어스의 마무리였던 김경원이 부상과 혹사로 1997년을 끝으로 내리막을 타자, 1998년 이후로 마무리 투수로 뛰게 되었다.

1998년 158⅓이닝을 던지며[2] 8승 19세이브, 평균자책점 2.33(4위)를 기록하며 OB의 극적인 4강 진출에 한몫했다.

1999년에도 114이닝, 16승, 36세이브를 적립하며 구원왕에 올랐고, 두산이 드림 리그 1위를 차지하는 데 공을 세웠다. 이 때 임창용을 1포인트 차[3]로 따돌리고 52세이브 포인트를 기록해 구원왕을 차지했는데, 이 당시 기록한 52세이브 포인트는 역대 1위이다.[4] 그리고 그해 9월 서울 아시아야구선수권대회에 국가대표로 출전해서 한국의 2000 시드니 올림픽/야구 본선티켓 획득에도 공헌했다.

2000년에는 현대 유니콘스마무리 투수 위재영과 치열한 경쟁 끝에 5승, 42세이브를 올려 위재영을 3세이브 차로 따돌리고 2년 연속 구원왕을 거머쥐었다. 당시 42세이브는 1994년 정명원의 40세이브를 넘는 한 시즌 최다 세이브 기록이었으며(최다 세이브 갱신), 이 기록은 2006년 오승환의 47세이브 이전까지 유지되었다. 또한 2000 시드니 올림픽/야구에도 출전해서 동메달을 획득했다. 다만, 올림픽과 포스트시즌에서는 모두 부진했는데, 특히 포스트시즌에서는 LG와의 플레이오프 1차전에서 두산의 2:1 리드를 날리고 끝내기 폭투로 패하는 바람에 부상에서 돌아온 박명환에게 마무리 자리를 뺏기고 말았다. 한국시리즈에서는 선발투수로 3,6차전에 나섰다.

2001년에는 이전보다 다소 떨어지는 성적인 9승 23세이브 평균자책점 3.22를 기록했으나, 당시 약했던 두산 투수진에서 선발과 마무리 가리지 않고 등판하여 큰 힘이 되었고, 결국 2001년 한국시리즈 우승을 차지했다. 한국시리즈 우승을 확정지을 당시의 투수도 그였다.

하지만 이 시기를 마지막으로 진필중은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했다.

3. 메이저리그 포스팅 신청

진필중은 위의 성과에 힘입어 메이저리그 진출을 노리고 2002년포스팅을 신청했다. 그러나 "저 선수는 3가지 구질을 던진다. 직구와 느린 직구, 더 느린 직구"[5] 예? 결국 스카우트들에게 50달러 등 반 장난에 가까운 평가를 받았다.

실제로 2002년 2월 처음으로 포스팅을 신청했을 때는 어느 팀도 그의 포스팅에 참여하지 않은 무응찰이라는 굴욕적인 결과가 나왔고, 2002년 시즌 후 다시 포스팅을 신청했을 때는 겨우 25,000 달러(당시 KRW 3,000만 원)라는 충격적인 입찰 결과를 받으며 두산이 포스팅 수용을 거절하는 바람에[6] 빅리그 도전이라는 꿈을 접고 말았다.

이는 현격했던 한국프로야구메이저리그의 수준 차이 때문이기도 했지만, 당시 진필중은 이미 전성기를 지나 하향세로 접어들 조짐을 보였던 게 가장 큰 이유였다. 153km/h까지 던진다던 진필중의 강속구는 사라진 지 오래였고, 마무리 투수임에도 평균자책점은 3점대를 훌쩍 넘어갔다. 실제로 포스팅 시스템을 신청하기 직전인 2002년 시즌 성적을 보면 4승 5패 31세이브로 겉으로 보기엔 많은 세이브 갯수에 가려져 있었지만, 실제로 평균자책점은 마무리 투수였음에도 3.47로 높았고, 구속과 구위가 감소하면서 자주 맞아 나가던 불안불안한 마무리 투수였다.

4. KIA 타이거즈 시절

파일:기아진필중.jpg
KIA 타이거즈 시절

결국 메이저리그 진출을 포기한 그는 2003년 1월 손혁, 김창희에 현금 8억 원을 얹어 당시 적극적으로 유명 선수들을 영입하던 KIA 타이거즈로 현금 트레이드되었다. 이 트레이드 이후 진필중은 몰락하기 시작했고, 김창희는 새로운 인생이 꽃피는 계기가 되었다.[7]

KIA로 가서는 전성기의 구위를 찾지 못하고 4승 19세이브, 평균자책점 3.08로 이름값과 연봉에 미치지 못하는 성적을 냈고,[8] 서울 연고 팀에서 뛰어야 한다는 이유로 태업에 가까운 모습을 보여 많은 이들에게 먹튀로 까이게 된다. 가장 임팩트가 컸던 경기는 2003년 5월 27일, 1위 싸움 중이던 현대에 10:7로 앞선 9회말에 등판해 아웃카운트 딱 하나밖에 못 잡고 5실점하며 10:12로 진 경기였다.[9] KIA는 이 경기에서 당시 '최다 점수차 역전패 허용' 기록을 세우고 말았다(기존 기록은 8점차).[10] 이 기록을 내주면서 미끄러지는 바람에 KIA는 결국 반 게임 차로 1위를 놓치게 되었다. 그리고 반 게임 차로 1위를 차지한 팀은 현대 유니콘스였다.[11] '진필패'라는 불명예스러운 별명도 이 시기에 생겼다. 그러나 이 KIA 시기는 뒤를 이은 LG 시기에 비하면 선녀나 다름없었다.

5. LG 트윈스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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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G 트윈스 시절

2003 시즌 후 FA가 되어 우선협상기간 동안 원소속팀 KIA 타이거즈와 협상을 거부하고 FA 시장으로 나왔고[12], 해외 진출을 선언한 이승엽을 제외하면 정수근, 마해영과 함께 FA 최대어로 떠오르게 되었다. 이후 투수 보강을 원하던 LG 트윈스와 4년 30억(계약금 10억, 연봉 4억, 옵션 4억[13])에 계약, 투수 FA 최고액 기록을 세웠으며[14] 타자까지 쳐도 롯데와 6년 계약한 정수근을 제외하면 사실상 당해 FA 최고대우를 받았다.

진필중의 영입을 강력하게 원하던 이순철 감독은 당초 이상훈과 진필중을 더블 스토퍼로 기용하려는 계획을 세웠으나, 이상훈이 덕아웃에서 기타를 치는 등의 문제로 충돌한 끝에 이상훈을 양현석, 오승준을 상대로 SK 와이번스에 트레이드하고, 이에 진필중이 단독으로 마무리를 맡게 된다.

그러나 2004 시즌 초반 똥줄 세이브를 몇 개 하다가 탈탈 털리고[15] 마무리에 염증을 느낀 나머지, 본인의 요구에 따라 2005년에 선발로 전환했지만 선발로도 그다지 신통치 않았으며 결국 몸이 망가질대로 망가져 드러누웠다. 그 후에도 전혀 뛸 의욕을 보이지 않으며 구단과의 연봉 싸움만 일삼아서 LG 팬들의 비난을 한몸에 받았다. 그래도 2006 시즌에는 간만에 3점대 후반 방어율을 찍었지만, 출장 경기수와 이닝도 적었고, 중요보직이 아닌 승패와 관계없는 추격조 보직으로 활약해서 특별한 평가를 내리긴 어려운 수준이었다.[16] 게다가 2006 시즌이 프로야구 역사상 최악의 투고타저 시즌인 건 감안해야 한다. 이해 리그 평균자책점은 무려 3.58이었는데 진필중은 3.95를 기록하며 리그 평균보다 못했다. 그리고 LG는 2006년에 최하위를 하고 말았다..

결국 2006년 이후에는 1군에 올라오지 못했고, 2007년 시즌이 끝나고 마해영, 김우석 등과 함께 팀에서 방출당했다. FA 기간 동안 총 WAR이 1이 되지 않는 투수 FA 사상 두 번째 먹튀. 심지어 보상선수로 간 손지환이 KIA에서 4년 간 WAR 5정도 찍은 것 때문에 사상 최초의 보상선수가 FA 선수보다 잘한 케이스가 되었다.

LG 시절 때에 화끈한 방화질과 함께 진필중만이 아닌 다른 선수들마저 같이 불놀이를 하는 덕분에, 타 팀 팬들은 이들을 묶어서 엘지의 방화신기라고 조롱했다. 멤버로는,

등이 있다. 물론 이후에 멤버들의 방출과 은퇴, 그리고 결정적으로 더 화끈하게 불질러 주는 유명 작가가 등장하고 난 이후로는 묻힌 별명이 되었다.[17]

6. 우리 히어로즈 시절

파일:external/pds.joins.com/htm_2008051502584760006100-001.jpg
우리 히어로즈 시절.

LG에서 방출된 뒤 재기를 노리던 중 2008년 5월 우리 히어로즈신고선수로 계약했다. 하지만 정작 1군에는 한 번도 올라오지 못하고 2군에서도 탈탈탈 털리다가[18] 한 달만에 신고선수 계약이 해지되어 다시 방출당했다.

히어로즈에서 방출당한 뒤에도 꾸준히 개인 훈련을 해오며 현역 연장을 노렸으나 그를 찾는 팀은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개인 훈련 중이던 2008년 말 교통사고까지 당하는 바람에 그나마 재기할 수 있는 희망마저 완전히 끝나 버렸고, 결국 2009년 1월 은퇴를 선언한다.

[1] 물론 삼성 입장에서는 이만수가 지명타자/1루수로 나오면서 공격형 포수 김성현 - 수비형 포수 박선일이 플레툰으로 나오던 상황이었으나 둘 다 만족스러운 성적을 거두는 선수는 아니었다. 그래서 대학리그에서 무난한 모습을 보이던 김영진을 세대교체 차원에서 먼저 뽑는 것이 이상하지 않았다. 뽑아보니 프로리그에서 적응을 못 해서 1할대 타율과 최악의 수비만 보여주던 선수였던 것이 문제. 진필중이 OB에게 지명되자 차선책으로 김영진 다음 순위로 뽑은 김재걸도 아마시절의 기대과 달리 프로에서는 타격이 시원찮아서 수비만 잘 하던 내야수로 남았다.[2] 이해 구원왕이었던 임창용보다도 많은 이닝을 던졌다. 분명 시즌을 불펜으로 시작했는데 5~6월에 땜빵으로 2경기, 7월에 로테이션으로 3경기를 선발로 나와 1완봉을 거뒀고, 심지어는 구원으로 등판해 완봉을 한 경기[19]가 있었다(...)[3] 당시 임창용의 기록은 13승 4패 38세이브로, 순수 세이브 개수로는 2개 더 많았지만 세이브 포인트 제도로 구원왕을 뽑고 있었던 시절이라 딱 1포인트 차로 밀린 것이다.[4] 참고로 일본프로야구 시즌 최다 세이브 포인트가 1998년 사사키 카즈히로의 46SP다. 이건 정말 엄청나다고밖에 할 수 없다.. 마찬가지로 고작 1개 차로 구원왕에서 밀린 임창용도...[5] 원래 1950~1960년대에 뛰었던 투수 Stu Miller에 대해 동료 투수 Milt Pappas가 한 얘기이다.[6] 여담으로 이 당시 두산은 진필중의 이적료로 최소 300만~500만 달러는 받아야 보낼 수 있다며 설레발(...)을 쳤다.[7] 참고로 이 시절 KIA 단장이 정재공이었는데, 그가 영입한 유명 선수만 봐도 이강철(트레이드), 박재홍(트레이드), 진필중(트레이드), 최향남(FA), 조규제(FA), 마해영(FA), 심재학(트레이드)인데 이 선수들 중 이강철을 빼면 하나같이 폭망했다. 이 선수들을 데려오겠다고 유망주인 정성훈을 날리고, 외야 수비 하나는 최고였던 김창희, 중심 타자로 가치가 있는 신동주, 쓸 만한 중간계투 박진철을 날렸고, 이 선수들에게 FA, 고액 연봉, 트레이드 머니로 쓴 돈만해도 상당하다. 여러모로 돈이 아까웠다.[8] 겉으로는 준수해보일지 몰라도 숱한 분식회계와 전반기에만 8블론세이브이라는 불쇼를 펼치면서 후반기 KIA는 사실상 이강철-신용운에 의존하는 게임을 해야만 했다.[9] 이 경기에서 끝내기 홈런을 친 선수는 바로 두산에서 한솥밥을 먹던 후배인 심정수였다.[10] 그리고 이 기록이 깨진 것은 10년이 지난 뒤인 2013년 508 대첩이 등장하면서였다.[11] 여담으로 이날 상대 팀 선발이었던 정민태는 패전을 면하면서 연승을 이어갈 수 있었다.[12] KIA가 진필중을 데려온다고 두산에게 외야수 1명과 투수 1명에 8억원을 보냈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진필중이 떠날 당시에는 큰 손해였다. 하지만 진필중이 LG로 떠나면서 손지환과 보상금 8억 4천만원이 KIA로 넘어오는데 결과적으로 KIA는 진필중이 LG에서 먹튀가 된데다가 보상선수로 온 손지환이 무난한 성적을 거두고, 진필중을 데려오는 과정에서 두산으로 넘어간 손혁이 얼마 못 가서 은퇴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큰 손해를 본 것은 아니다. 하지만 타선 강화를 한다고 같은 해 마해영을 영입하는데 이건 빼도 박도 못 한 KIA의 호구딜에 가깝다. 그러나 이후 마해영도 LG에 짬처리 된 걸 보면...[13] 조건 달성시 1억 지급, 미달성시 1억 삭감. 당연히 진필중이 거둔 성적에서 볼 수 있듯이 진필중은 FA 조건을 하나도 못 채우면서 실제로 05~07년에 받은 연봉은 1억이 삭감된 3억윈에 그쳤다.[14] 이후 박명환이 2006년 LG와 4년 40억 원에 계약하며 투수 FA 최고액 기록은 내줬으나, 불펜투수로 한정할 경우 2011년 정대현이 롯데와 4년 36억에 계약하기 전까지 역대 불펜투수 FA 최고액 기록을 8년동안 유지하고 있었다.[15] 그 해 6월 4일 잠실 KIA전 9회초 1:2로 앞선 상황에서는 당시 1년차 신인이던 김주형에게 데뷔 첫 홈런이자 동점홈런을 허용하기도 했다.[16] 우규민이 1점대 방어율을 찍고 김민기와 경헌호까지 3점대 방어율을 찍었다. 심수창의 10승은 덤.[17] 그 작가 마저도 꿈을 던진 패전투수가 나오면서 묻힌다.[18] 2군 6경기 6⅔이닝 평균자책점 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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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1998년 4월 29일 한화전에서 선발 김상진이 1회 첫 타자 강석천에게 안타를 허용한 후 부상으로 강판하자 뒤이어 진필중이 등판해 9이닝 동안 78구를 던져 3피안타 무실점으로 승리를 거둔 경기. 즉 실질적으로는 무실점으로 27아웃을 잡아냈으니 완봉인데, 선발 투수가 아니었던 바람에 완봉으로 인정받지 못한 것. 선발투수 예고제 시행 이후 선발 투수가 첫 타자만을 상대하고 내려간 경기는 이 경기가 최초였으며 때문에 위장오더 논란이 불거지기도 했는데, 당시 진필중은 불과 며칠 전인 4월 26~27일 2연투를 한 상황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