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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루키아 ಚಾಲುಕ್ಯ Cālukya | |
존속기간 | 543년 ~ 753년 |
수도 | 바다미 |
국가원수 | 마하라자 |
주요 군주 | 풀라케신 1세(543~566) 풀라케신 2세(609~642) 비자야디티야(696~733) |
언어 | 칸나다어 산스크리트어 |
종교 | 힌두교 자이나교 불교 |
종족 | 칸나다인 |
성립 이전 | 바카타카 왕조, 카담바 왕조 |
멸망 이후 | 라슈트라쿠타 왕조, 동찰루키아 왕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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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찰루키아 왕조의 역사[1] |
6세기에서 12세기[2]에 걸쳐 중부 인도의 데칸 고원에서 세력을 떨친 남인도 왕조. 후대의 서찰루키아 왕조와 구분하기 위해서 수도 이름을 따 바다미(ವಾತಾಪಿ)의 찰루키아 혹은 전찰루키아(Former Chalukya)라고도 한다.
2. 기원
바다미 동굴사원에 있는 찰루키아 왕조의 고대 칸나다어 비문 |
대부분의 중인도~남인도 왕조가 으레 그렇듯이 찰루키아 왕조도 그 기원을 명확하게 추정할 수는 없다. 다만 대부분의 역사학자들이 동의하는 것은, 찰루키아 왕조의 지배층은 오늘날의 카르나타카 지역에서 발흥했다는 것이다.[3] 동찰루키아의 기록에서는 아요디아[4]의 통치자가 데칸 고원으로 이주하여 팔라바인들을 물리치고 왕조를 세웠다고 나오며, 이는 서찰루키아의 기록에서도 등장하기 때문에 교차 검증이 가능하다. 그렇지만 정작 찰루키아 왕조 시대의 기록에서는 아요디아 기원설에 대해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 아마도 이는 거짓일 확률이 높다.[5]
역사학자 루이스는 찰루키아가 이라크의 '셀레우키아' 부족의 후손이며, 팔라바 왕조와의 갈등은 고대 셀레우키아와 '파르티아' 사이의 갈등이 이어진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또다른 역사학자인 카마트는 이를 "유사하게 들리는 부족 이름을 억지로 연결시키는 것"이라며 반박했다.
창조자 브라흐마가 황혼 의식의 수행에 참여했을 때, 인드라는 그에게 다가와 지구 상에서 증가하는 악을 종식시킬 수 있는 영웅을 창조해달라 간청했다. 그리하여 브라흐마가 계속해서 출루카-잘라(손바닥에 있는 봉헌의 물)을 들여다 보자, 찰루키아의 조상인 위대한 전사가 나왔다.
10세기 서찰루키아의 궁정 시인
10세기 서찰루키아의 궁정 시인
3. 역사
오늘날 바다미에 남아있는 찰루키아 왕조의 부타나타 사원단지 |
6세기에 굽타 왕조와 그 후계 국가들의 쇠퇴로, 빈디아산맥 남쪽의 데칸 지역과 타밀라캄 지역에는 큰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작은 소왕국들이 난립하던 시대가 막을 내리고 드디어 제국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찰루키아 왕조는 카담바 왕조가 멸망한 이후인 543년, 초대 국왕 풀라케신 1세가 마이소르의 북부 바다미 지역에 나라를 세움으로써 왕조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풀라케신 1세는 마사제를 거행하여 제왕으로서의 위엄을 강조했으며, 데칸 중남부의 바다미[6]를 수도로 명명하였다. 이후 찰루키아 왕조의 남하정책이 시작되었는데 이는 남쪽의 팔라바 왕조나 칼라브라 왕조 등의 국가들과의 충돌을 피할 수 없게 만들었으나, 대신 찰루키아 왕조는 카르나타카 전역과 데칸의 안드라프라데시 대부분에 이르는 영토를 확보할 수 있었다.
그 손자 풀라케신 2세 대에 이르러 찰루키아 왕조는 본격적인 전성기에 돌입한다. 데칸의 서 ·북부 일대를 통합하고, 나르마다 강둑에서 당시 북인도의 패자였던 바르다나 왕조의 군주 하르샤 바르다나의 남진을 저지함으로써 남인도의 방파제가 되어주었으며, 팔라바 왕조와 비슈누쿤디나 왕조를 각각 격파하여 남쪽 국경을 남인도 방면으로 크게 밀어내었다. 또한 그는 제국의 행정 구역을 대대적으로 재편하여 더욱 효율적으로 만드는 등 내치에도 힘을 쏟았다. 당시 풀라케신 2세의 궁정을 방문한 당나라 승려 현장은 찰루키아 제국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고 기록했으며, 동시기의 페르시아 황제 호스로 2세는 풀라케신 2세와 사신을 주고받기도 하였다.
마하랄타국(摩訶剌侘國)[7]의 둘레는 6천여 리에 달하며, 나라의 큰 도성은 서쪽으로는 대하(大河)에 접해 있는데 둘레는 30여 리에 달한다. 토지는 비옥하며 농사는 풍성하다. 기후는 무덥고 풍속은 순하고 질박하다...(중략) 나라에서는 수백 명에 달하는 용사들을 양성하는데, 언제나 결전에 임할 때가 되면 크게 취할 정도로 술을 마신다. 그리하여 한 사람이 상대의 선봉을 꺾으면 수많은 사람들이 뒤이어 그 정예부대를 꺾는다. 사람을 만나서 멋대로 상해를 입혀도 나라에서는 형벌을 가하지 않는다. 임금이 출타를 할 때마다 북을 두드리며 앞서서 길을 인도한다. 또한 난폭한 코끼리 수백 마리를 사육하고 있다. 그래서 전쟁을 벌이려고 할 때 먼저 코끼리 떼에게 술을 먹인 뒤에 풀어놓아 마구 짓밟게 한다. 그러면 이들 앞에는 아무리 강한 적이더라도 무릎을 꿇고 만다. 이 나라의 왕은 이 같은 병사와 코끼리의 힘을 믿고서 이웃 나라를 쉽게 능욕하곤 한다. 왕은 찰제리종인데, 이름은 보라계사(補羅稽舍)[8]라고 한다. 지략이 뛰어나고 성품이 어질며, 그 자애로움이 먼 곳에까지 미치고 있다.
현장, 대당서역기 11권에서
현장, 대당서역기 11권에서
풀라케신 2세는 610년에 크리슈나 강과 고다바리 강 사이의 벵기 지역을 정복했다.[9] 풀라케신 2세는 이곳에 동찰루키아 왕국의 원형을 세웠다.[10] 그러나 642년, 팔라바 왕조의 나라심하 바르만 왕과 실론 왕국의 연합군에 패배해 풀라케신 2세가 전사하고, 수도 바다미가 함락되어 찰루키아 왕조는 분열되면서 힘을 잃게 되었다.
하지만 이 전쟁에서 양측 모두 커다란 손실을 입었으며 팔라바 왕조는 계속해서 실론과 연합하여 국력을 키우는데 주력했다. 한편 찰루키아 왕조는 분열된 왕국을 통일시키려고 각 방면으로 노력했으며, 속국들의 힘을 약화시키려 시도했다. 그 결과 풀라케신 2세의 아들 비크라마디트야 1세는 바다미에서 팔라바족을 밀어내고 제국의 국력을 규합하는데 성공했고, 재차 팔라바 왕조에 대한 복수를 단행했다. 이 전쟁에서 팔라바의 수도 칸치를 점령했으며 많은 훌륭한 건축가들을 포로로 잡아왔다. 그 뒤를 이은 비자야디티야 1세(696~733)는 37년 동안 왕조를 통치하였으며 건축가들로 하여금 제국 전역에 여러 사원들을 건설하도록 했다.
찰루키아 왕조는 비그라마디트야 2세의 치세(733~744)에 다시 전성기로 돌입하였는데, 그는 톤다이만달람[11]를 정복하고 팔라바 왕국의 난디바르만 2세를 철저히 격파하여 자신의 이름을 인도 전역에 떨치게 하였다. 또한 그가 정복자임에도 팔라바 왕국의 주민들과 수도 칸치에 자비를 베풀었기 때문에 더욱 존경을 받게 되었다. 이로써 찰루키아 왕조는 팔라바 왕조에게 바다미를 점령당했던 이전의 굴욕을 되돌려 주었다. 이 승전을 기념하기 위해 카날라사나타 차원에 칸나다어로 새겨진 거대한 승전비가 세워졌다. 이후 비크라마디트야 2세는 칼라브라 왕조를 정복하고 판디아, 촐라, 체라 등 남인도 왕조들을 모두 속국으로 만들어 데칸과 남인도 전역에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특기할만할 점으로는 그의 치세에 이슬람 세력의 공격이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우마이야 왕조의 아랍 침입자들은 찰루키아 통치 하에 있던 구자라트 남부를 침공했으나, 당시 찰루키아 총독에게 패배하여 얼마 못 있어 쫒겨났다.
740년에 이르러 찰루키아 왕조는 팔라바 왕조로부터 최후의 승리를 거두게 되었다. 그러나 그후 아랍 세력이 내분으로 철수하자 속국의 제후왕 중에 하나였던 단티 두르가(Danti Durga)가 독립을 선언했다. 그는 곧 데칸 북부를 장악하고 라슈트라쿠타라는 새로운 왕조를 세웠다. 당시 찰루키아의 군주였던 키르티바르만 2세(746~753)는 단티두르가에 대항하려고 시도해보았으나, 라슈트라쿠타가 팔라바 왕조와 손잡고 남북에서 동시에 쳐들어오자[12] 열세에 처하게 되었고, 결국 753년에 라슈트라쿠타 군대가 바다미를 함락시키면서 찰루키아 왕조의 역사는 막을 내리게 된다.[13]
4. 군대
찰루키아 왕조의 군대는 보병, 기병, 전투 코끼리, 그리고 강력한 해군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현장의 기록에서도 보이듯이 아마도 주력은 전투 코끼리였던 듯 하다. 한편 해군도 이에 뒤지지는 않아서 인도 동해안의 고아와 푸리 등을 정복하기도 했다. 찰루키아 왕조를 대체한 라슈트라쿠타의 비문에서는 찰루키아 군대를 두고 '위대하고 강력한 카르타나카군(카르나타카발라)'이라고 불렀다.5. 행정
일부 사료에 따르면, 찰루키아 왕조는 이전 마가다와 사타바하나 왕조의 행정 구역을 모델로 삼았다고 한다.우선 99,000개의 촌락으로 구성된 가장 큰 행정단위인 '마하라슈트라카(도)'가 있고, 그 아래에는 더 소규모의 '라슈트라카(만달라)'[14], '비샤야(구)'[15], '보가(면)'[16] 등으로 세밀하게 구분되었다. 일부 사람들은 이러한 행정체계가 카담바 왕조의 영향을 받았다고도 하는데, 실제로 일부 행정 단위에서는 카담바 왕조의 것이 드러나기도 하는 등의 모습이 보인다. 한편 얄루파, 강가, 바나, 산드라카와 같은 일부 지역들은 봉건 제후들의 준자치 지역으로 편성되었다.
찰루키아 왕조는 이들 구역에 도로세, 종속세[17], 운송비, 소매비, 토지세 등을 세금으로서 걷어들여 국가 재정에 사용하였다. 쓰고 남은 세금은 브라만 공동체에게 헌납하기도 했고 지역 대학 및 교육시설에 후원하기도 했다.
6. 사회
찰루키아 왕조의 주요 종교가 힌두교였던 만큼 그에 따른 카스트 제도가 존재했으며, 왕실도 이를 공식적으로 인정했다. 그렇지만 사티와 같은 악습들은 용인되지 않았고 일부다처제도 어느정도 허용되었다.[18] 남인도에서 고전 무용이 도입되면서 춤이 인기를 끌기도 했다.특이하게 일부 여성의 권리가 동시대의 다른 인도 왕조들보다도 다소 높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비자야마디티야 2세 이전에 잠시 통치했던 비자얀카는 유명한 산스크리트어 시인으로서 선망받았으며, 비자야디티야 1세의 여동생인 쿠쿠마데비는 힌두교 사원과 궁정에서 일하는 시인들에게 전폭적인 후원을 해주어 여러 사람들의 존경을 받기도 했다는 기록이 있다. 같은 사료에서는 왕실의 여인들은 사원에 봉헌을 자주 하였다는 내용도 있다.
6.1. 건축
찰루키아 시대에 남인도 건축은 급격한 발전을 이루게 된다. 찰루키아의 왕들은 웅장하고 위대한 건축물을 통해서 자신의 권위와 위엄을 강조하고자 하였는데[19], 이를 위해 그들이 정복한 여러 지역에서 건축가들을 데려다가 사원이나 궁정을 짓도록 했기 때문이었다. 이는 결과적으로 수많은 지역들이 건축 양식이 혼합되면서 새로운 건축 양식, 이른바 '찰루키아 건축'이 탄생하는 계기가 되었다. 다만 건축물들은 주로 제국의 심장부였던 카르나타카에만 집중적으로 건설되었다.찰루키아 건축은 총 3단계로 구분이 가능하다.
- 1단계(6세기 말~): 이 시기에는 동굴 사원이 자주 건축되었는데, 특히 아이홀에 있는 베다(힌두), 자이나, 불교 사원 외에도 수도 바다미의 동굴 사원 4채는 단순한 외관을 가지고 있지만 기둥이 있는 베란다, 대형 홀과 같이 숭배를 위한 내부 공간이 매우 잘 조성되어 있어 학자들이 주목하고 있다. 다른 특징으로는 573년경에 건설된 것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조각 기술이 매우 정교하다는 것이다.
- 2단계(7세기): '인도 사원 건축의 요람'이라고도 불리는 시기이며, 이 시기가 찰루키아 왕조의 전성기였던 만큼 건축물들이 더욱 화려해지고 규모가 커치는 모습을 보여준다. 또한 타 지역의 건축 양식을 본격적으로 받아들인 시기이기도 한데, 일부 사원에서는 북인도의 석탑이나 사원 설계, 혹은 불교의 건축양식을 힌두교 사원에 접목시키는 실험적인 모습을 보여주기도 하였다. 이 시기는 찰루키아 왕조 원형의 건축양식과 이후의 성숙한 건축양식의 과도기적 모습이 잘 드러나며, 이후 데칸 지역에서 일어난 왕조들에게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치기도 했다.
- 3단계(~8세기): 찰루키아 건축의 정점이자 성숙기. 위에서 보았던 부타나타 사원단지도 이 시기에 지어진 것이다. 2단계에서 이루어진 타 지역 건축양식과의 혼합이 완성되면서 그들만의 독특하고 독자적인 건축물들이 여럿 등장하였다. 특히 파타다칼에 있는 드라비다 양식의 사원들은 팔라바 왕조를 위시한 남인도 왕조들로부터 받아들인 건축법이 적절하게 섞여 있어 화려함을 뽐내고 있다.
이들 중 대다수는 오늘날에도 남아있으며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
6.2. 문학
이전 바카타카 왕조 시기에만 해도 산스크리트어나 프라크리트어 등이 주로 사용되었지만, 찰루키아 시기에 이르러선 칸나다어와 텔루구어가 주요 공용어로서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당장 찰루키아 왕조의 지배층만 해도 상술했듯이 카르나타카 지역에서 기원한 것으로 추정되고, 피지배층들도 칸나다인과 텔루구인들이 대부분이었던 것을 감안하면, 어찌본다면 당연한 것일수도 있지만 말이다. 어찌됐던 이 시기에 칸나다어와 텔루구어 문학은 점차 발전하기 시작한다. 찰루키아 궁정에서 일했던 여러 학자들은 여러 문헌과 기록, 힌두교 경전, 백과사전 등을 저술했으며 수많은 서사시들을 남겼다. 덕분에 7~8세기 사이에 칸나다어와 텔루구어는 찰루키아 통치 하에서 데칸 지역에 확고히 자리잡게 된다.6.3. 종교
힌두교는 찰루키아 시대에 매우 번성했다. 파타다칼, 아이홀, 마하쿠타와 같은 주요 건축단지들에는 힌두교 사원 및 대학들이 건설됐으며, 북인도에서 초청한 사제들이 와서 강연과 수업을 하였다. 또한 찰루키아 군주들은 시조 풀라케신 1세의 선례를 본받아 힌두 신들에게 바치는 마사제를 거행하였는데, 주로 시바, 비슈누, 카르티케야, 가나파티, 샤크티, 수리야, 마트리카와 같은 주신들이 언급되었다.자이나교도 이 시대에 들어 크게 발전하였다. 바다미 동굴사원 가운데 일부 지역은 자이나교에 헌정되어 있었고, 아이홀 사원단지에도 자이나교를 위한 구역이 따로 배정되어 있었으며, 심지어 풀라케신 2세의 궁정에서 일하던 시인 라비키르티는 자이나교도이기도 할 정도였다. 찰루키아 왕조는 종교적 관용정책을 실시하였으므로 이들에 대해서는 별다른 차별을 두지 않고 기타 힌두교도들과 동등하게 대해주었다.
당시 인도 아대륙에서 쇠퇴하고 있던 불교 역시 찰루키아 왕조 치하에서는 오랫동안 번영을 누렸다. 바다미, 아이홀, 쿠르투코티, 풀리게레에는 주요 불교 사원과 대학들이 세워져 수많은 불교도들을 끌어들였다. 또한 앞서 설명했듯이 찰루키아 왕조는 종교적 관용정책을 실시하였기 때문에 많은 불교도들이 찰루키아 궁정에서 일하면서 기록을 남기기도 했다.
7. 의의
찰루키아 왕조의 통치는 남인도 역사에서 중요한 이정표이자 카르나타카 역사에서 제국의 황금시대를 의미한다. 남인도의 정체(政體)들이 찰루키아를 기점으로 군소 왕국들에서 점차 제국으로 발전했기 때문이다.[20] 이들의 통치와 함께 효율적인 행정 체제가 구축되었고 대외 무역과 상업은 날로 번성했다. 또한 '찰루키아 건축'이라는 독특한 새로운 건축 양식이 발달하기도 했으며 칸나다, 텔루구어 문학과 자이나교가 왕실의 후원을 받아 크게 성장하였다. 한편 힌두교는 이전 바카타카 시대에 확고히 데칸 지역에 정착하였으나 찰루키아 시대에 와서 화려한 꽃을 피우기 시작한다. 북인도와 남인도의 문화가 혼합되기 시작한 것도 찰루키아 왕조 시대에 이루어졌다.참고로 찰루키아인들도 고원 지대에서 농사를 지었으나, 타밀나두 지역처럼 땅이 기름지지 않았다. 그 대신 서부 해안을 따라 발달한 항구 도시를 통해서 서아시아 및 동남아시아의 여러 나라와 활발하게 교역했다. 서아시아의 이슬람 상인들의 왕래가 잦았으며, 찰루키아 상인들은 동남아시아에 무역 근거지를 만들기도 했다. 찰루키아의 왕들도 농민과 상인들로부터 거둔 세금과 전쟁을 통한 이익으로 관료 조직과 군대를 유지했다. 또한 이들은 브라흐마와 마누의 후손이라고 주장했다. 힌두 학문과 예술의 발달을 적극적으로 지원하였는데, 특히 아잔타와 엘로라 석굴에 많은 사원이 더해졌다.[21]
8. 기타
오늘날 카르나타카 주에서는 찰루키아 왕조를 기리는 '찰루키아 우차바'라는 축제가 3일동안 열린다.9. 역대 국왕
- 1대 풀라케신 1세 (543년 ~ 566년)
- 2대 키르티바르만 1세 (566년 ~ 597년)
- 3대 만가레샤 (597년 ~ 609년)
- 4대 풀라케신 2세 (609년 ~ 642년) - 642년 수도 바다미 함락으로 한동안 공위상태
- 5대 비크라마디트야 1세 (655년 ~ 680년)
- 6대 비나야디트야 (680년 ~ 696년)
- 7대 비자야디트야 (696년 ~ 733년)
- 8대 비크라마디트야 2세 (733년 ~ 746년)
- 9대 키르티바르만 2세 (746년 ~ 753년)
[1] Anwoo Mapping History의 영상.[2] 동찰루키아, 서찰루키아도 포함한 것이다[3] 다른 설로는 카담바 왕조의 분파라거나 2세기의 고대 왕국이었던 안드라 익슈바쿠의 후손이었다는 주장이 있지만 이것 역시 그다지 신빙성이 있지는 않다.[4] 인도 우타르프라데시 지역의 갠지스 강변에 있는 도시.[5] 사실 남인도 왕조들이 자신들의 기원을 북인도의 고대 씨족이나 왕조 등에서 찾는 것은 전통적인(?) 관행이었다.[6] 오늘날 카르나타카주 바갈코트구에 있다. 바타피(Batapi)가 본래 명칭이나 오늘날에는 바다미로 부른다.[7] 아마도 마하라슈트라주의 과거 지명을 음차한 듯 하다.[8] 풀라케신 2세의 음차.[9] 벵기 지역은 지리적 조건상 수많은 왕국들의 점령 대상이었기 때문에 수세기 동안 이곳을 차지하기 위해 치열한 전쟁이 계속되고 있었다.[10] 당시는 독자적인 왕국이라기보다는 다른 지파 정도의 수준이었다.[11] 안드라프라데시 남부와 타밀나두 북부에 위치해 있는 역사적인 지역. 남인도 세력의 주요 요충지 가운데 하나였다.[12] 또한 단티두르가는 독립 선언 이전에 텔루구, 칼링가, 코살라 등을 정복하여 찰루키아 왕조에 대한 포위망을 구축하는 등 치밀한 모습을 보였다.[13] 키르티바르만 2세의 아들인 비자야디티야 2세는 동찰루키아로 도망쳐 겨우 살아남을 수 있었다. 나중에 그의 직계 후손인 타일라파 2세가 220년만에 데칸 지역으로 귀환하여 라슈트라쿠타를 멸망시키고 찰루키아 왕조를 재건하게 된다. I'll be back[14] 준독립적인 도시 공동체를 이르는 용어일수도 있고, 오늘날 인도 행정체계의 만달(Mandal)과 유사한 의미의 용어였을수도 있다.[15] 오늘날 인도 행정체계의 구와 동일했던 것으로 추정된다.[16] 10개의 촌락으로 구성되었다.[17] 종속되어 있는 지역에서 별도로 세금을 또 걷었던 것으로 추정된다(...)[18] 다만 악습이 완전히 없었던 것은 아니어서, '데바다시'(여성들을 평생토록 사원에서 일하게 만드는 풍습)와 같은 일부 악습들은 남아 있었다.[19] 물론 이러한 목적만 있는 것은 아니었고 종교적으로는 힌두교의 시바 신에게 봉양하려는 목적도 있었다.[20] 데칸 고원과 남인도에 기반을 둔 왕조 가운데 인도의 패권을 놓고 영향력을 행사했던 왕조 역시 이전 사타바하나를 제외하고는 찰루키아 왕조가 최초였다.[21] 엘로라 석굴은 굽타 왕조 시대에 만들어지기 시작해서 이후 여러 왕조들에 의해 보완되었다. 찰루키아 왕조도 그중 하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