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3-22 14:33:29

찰스 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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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Right Reverend
찰스 고어
Charles Gore
파일:찰스고어.png
<colbgcolor=#b094bc,#b094bc><colcolor=#110c73,#110c73> 출생 1853년 1월 22일
그레이트브리튼 아일랜드 연합왕국 잉글랜드 런던 윔블던
사망 1932년 1월 17일 (향년 78세)
영국 잉글랜드 런던 켄싱턴
국적
[[영국|]][[틀:국기|]][[틀:국기|]]
직업 성직자, 신학자, 작가
종교 성공회
소속 부활의 공동체[1]
학력 해로우 스쿨 (졸업)
옥스퍼드 대학교 베일리얼 컬리지
(고전학 / 학사) (1871년1875년)
옥스퍼드 대학교 트리니티 컬리지
(연구원, 강사) (1876년188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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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찰스 알렉산더 고어 (아버지)
오거스타 라비니아 프리실라 고어[2] (어머니)
스펜서 윌리엄 고어[3] (형)
서품 1876년 12월(부제직)
1878년 12월(사제직)
1902년 2월 23일(주교직)
재임 기간 에드워드 7세 왕실 사제
1901년 7월1902년 1월
제106대 우스터교구
1902년 2월 23일1905년 1월
초대 버밍엄교구장
1905년 1월 27일1911년
제35대 옥스퍼드교구장
1911년 10월 17일1919년 7월 1일
설립 기독교인 사회 연합 (1889년 11월 6일)
부활의 공동체 (1892년 7월 25일)
축일 1월 16일(미국 성공회)
1월 17일(잉글랜드 국교회)

1. 개요2. 생애
2.1. 유년과 청년2.2. 퓨지 하우스2.3. 성령과 영감2.4. 부활의 공동체
3. 의의

[clearfix]

1. 개요

영국성공회 주교이자 신학자.

고어는 옥스퍼드 운동에 참여한 고교회파 인물 중 하나로 가톨릭의 전통적 신앙을 밑바탕으로 자유로운 사고와 탐구, 그리고 역사적인 검증을 거쳐 보다 정통적이고 확고한 신앙적 핵심을 구축해야 한다고 보았다. 이에 따라 그는 누구에게나 성경을 비평할 수 있는 자유가 있으며, 과학적 발견 및 사실을 받아들이고 이를 교회와 조화시켜야 한다고 주창했다. 그야말로 종교 내의 보수와 진보를 떠나 현실적이고 포괄적인 입장을 취한 그는 신학계에서 가장 합리적이고 타협적인 혁신가, 19세기의 가장 영향력 있는 성공회 신학자 중 한 명으로 평가받는다.

성공회에서는 그를 성인으로 공경하고 있다. 축일은 지역별로 다른데 미국 성공회에서는 1월 16일, 잉글랜드 국교회에서는 1월 17일에 그를 기념한다.

2. 생애

2.1. 유년과 청년

찰스 고어는 1853년 1월 22일, 아일랜드계 영국인의 귀족 집안에서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아서 고어 제2대 애런 백작의 손자인 찰스 알렉산더 고어, 어머니는 존 윌리엄 폰슨비 제4대 베서버러 백작의 딸인 오거스타 라비니아 프리실라 고어이다.

고어는 성공회 중에서 가톨릭을 경멸하는 성향을 지닌 저교회파[4] 가정에서 자랐으며, 8세의 나이에 견진성사를 받았다. 고어의 부모는 행여 아들이 가톨릭에 물들까 염려되어 그가 9살이 되던 해에 가톨릭 사제였다가 개신교로 전향한 인물의 이야기를 담은 그레이스 케네디의 반(反)가톨릭 소설 《클레멘트 신부(Father Clement)》를 선물했을 정도로 강성 저교회파 신자들이었다. 그러나 고어는 오히려 소설에서 묘사되는 가톨릭의 전통적인 신앙 행위와 의식에 매료되었고, 이는 부모의 뜻과는 달리 그가 친가톨릭적 성향의 고교회파 신자로 자리잡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고어는 학창 시절 내내 소위 말하는 공부 천재의 길을 걸었다. 1866년 그는 영국의 명문 퍼블릭 스쿨인 해로우 스쿨에 입학해 학업적으로 매우 뛰어난 우수생으로 지냈고, 1871년 옥스퍼드 대학교 베일리얼 컬리지에 입학해 1875년 고대 로마, 고대 그리스, 라틴어, 고전 그리스어, 철학 등을 공부하는 고전학 전공의 수석 졸업생으로 학사 학위를 얻었다.

1875년 고어는 옥스퍼드 대학교 트리니티 컬리지의 연구원이 되어 1876년부터 1880년까지 그곳에서 강의를 했다. 그 사이 1876년 12월에는 부제로 서품되었고, 1878년 12월에는 사제로 서품되었다. 1880년부터 1883년까지 그는 커데스던 신학 대학의 부총장으로 지냈고, 모교인 옥스퍼드 대학교를 포함한 아테네 대학교, 버밍엄 대학교, 더럼 대학교, 에든버러 대학교 등 여러 대학에서 명예 신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2.2. 퓨지 하우스

1882년 성공회 가톨릭주의[5]를 표방하는 옥스퍼드 운동의 주도자 중 사실상 마지막 인물이었던 영국신학자 에드워드 부버리 퓨지[6]가 세상을 뜨자, 명석한 두뇌와 예리한 지성, 그리고 경건한 신앙심으로 이미 주변으로부터 신임을 받고 있던 고어가 성공회 가톨릭주의 운동의 차세대 지도자로 부상했다. 이에 따라 1884년, 옥스퍼드에 에드워드 부버리 퓨지의 이름을 딴 성공회 신학 교육원 및 도서관인 퓨지 하우스가 건립되었을 때 고어는 그곳의 초대교육원장으로 임명되어 1893년까지 재직하게 되었다. 퓨지 하우스의 원장으로서 그는 옥스퍼드 대학교 학부생들과 젊은 성직자들에게 광범위한 영향을 끼쳤다.

여기서 당시의 종교적 시대 배경을 잠시 언급해 본다. 19세기 중후반, 찰스 다윈의 저서 《종의 기원》을 시작으로 그동안의 인류 역사를 바라보는 시각이 뒤집어져 성경창조 이야기는 문자적인 사실이 아니라는 의견들이 나왔고, 유럽의 다양한 학자들이 문학, 역사, 물리학, 심리학 등 다양한 학문적 도구들을 이용해 성경에 쓰인 인간 및 자연관, 그것을 쓴 저자, 그리고 그 정확성에 의문을 던지게 되는 새로운 흐름이 일어났다. 이러한 패러다임 속에서 기독교 모더니즘이 등장했는데, 이는 그 시류에 맞춰 신앙을 새롭게 이해해 보려 한 사상이었다. 종교적인 근간이 뒤흔들릴 수도 있다는 위기를 느낀 가톨릭 진영은 1907년 교황회칙을 통해 모더니즘을 정죄한다는 선언을 했고, 1910년에는 신자들에게 모더니즘을 반대하는 맹세를 의무적으로 하게끔 했다. 개신교 진영에서도 마찬가지로 비슷한 대응이 이루어졌는데, 미국에서는 1910년과 1915년 사이에 근본주의를 제창하는 책자인 《근본(Fundamental)》을 통해 성경에는 오류가 없다는 주장을 내세웠다.

성공회 가톨릭주의 진영도 마찬가지였다. 권위와 전통에 기반을 두고 비판적이고 자유주의적인 정신인 모더니즘과의 타협을 온전히 거부하는 최고 수준의 보수적 종교 사상이었고, 성공회 가톨릭주의자들은 당연히 고어도 이러한 사상을 가졌으리라 믿고 있었다. 그러나 고어는 그렇지 않았다. 고어는 교육원장으로 지내면서 젊은 세대의 자유로운 사고와 현실적이고 비평적인 태도를 상대하는 데에 어려워 했었던 경험들을 떠올렸고, 이대로 사회적으로 변화하고 과학적으로 발전하고 있는 흐름과 타협하지 않는 입장만을 고수하다간 교회는 시대에 뒤처져 오히려 기독교 전체에 해가 될 수 있음을 깨달았다. 그는 신학은 물론 문학, 역사, 수학, 과학 등 다양한 학문들을 접함으로써 종교적 권위의 원칙과 과학적 권위의 원칙을 조화하는 과제를 설정했다.

2.3. 성령과 영감

일단 그는 1889년에 두 권의 저서를 출판했는데, 하나는 《교회와 사역(The Church and the Ministry)》으로 장로회 등 다른 개혁 교회 단체들을 비판함으로써 주교직을 계승한다는 전통적 원칙을 학문적으로 정당화하는 내용이고, 나머지 하나는 《로마 가톨릭의 주장들(Roman Catholic Claims)》로 로마 가톨릭 진영의 성공회를 향한 비판들을 반박하며 성공회를 옹호하는 내용이다.

여기까지 보았을 땐 고어의 저서들은 기존의 성공회 가톨릭주의자들의 견해와 크게 다를 바 없었지만, 그것들은 단순한 빌드업에 불과했다. 같은 해, 고어가 직접 편찬한 에세이 모음집 《세상의 빛(Lux Mundi)》이 출판되면서 성공회 가톨릭주의 진영은 발칵 뒤집어졌다. 책의 내용에는 기독교의 신조를 현대의 새로운 지식, 과학, 비평학, 역사학, 윤리학, 정치학 등 종교 외적인 분야와 조화롭게 하려는 여러 작가들의 글들이 담겨 있었고, 그중에서 가장 논란을 불러일으킨 글이 바로 찰스 고어가 쓴 글이었다.

《성령과 영감(The Holy Spirit and Inspiration)》이라는 제목의 이 글에서 고어는 성령이 교회에서 네 가지 표징을 띠고 있는데, 바로 개인주의적이지 않은 것, 그러면서도 각자의 고유한 개성을 길러 준다는 것, 인간 본성의 신체적 • 영적 • 지적 차원을 모두 포함한다는 것, 그리고 갑작스럽기보다 점진적으로 일어난다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글 말미에 소위 성서영감설[7]을 언급하면서 성경이 영감을 받아 쓰였다는 것은 성령 혹은 그것을 믿는 신앙적 토대를 바탕으로만 쓰였다는 말이 아니라, 신앙과 더불어 당대의 사회, 정치 등 다양한 요소들로부터 영향을 받아 쓰인 문헌들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므로 고어에게 실질적으로 중요한 것은 성경을 기록한 저자가 제공하는 의미와 교훈은 과연 무엇인가였다. 성경이 무엇으로부터 영감을 받았는지, 그 성경 속 내용이 절대적인지 아닌지 등 피상적인 문제는 불필요한 것이었다. 따라서 자유롭게 사고를 해서 성경을 비평하는 것은 영감 받은 저자가 드러내고자 했던 영적 진리를 찾는 데에 오히려 도움이 된다고 보았다.

고어의 파격적인 글은 당시 성공회 가톨릭주의자들에게는 거의 배신에 가까웠을 정도로 충격적인 사건이었으나, 종국에는 이들에게 깊은 영향을 주었다. 그때부터 성공회 가톨릭주의 운동은 고어의 주도하에 모더니즘 노선으로 발전하기 시작했다. 한편 고어는 1893년 자신이 집필한 글의 여파로 퓨지 하우스의 원장직을 사퇴할 수밖에 없었고, 대신 잠시 일 보 후퇴하는 식으로 옥스퍼드 근교 작은 시골 마을인 래들리에서의 사제직을 받아들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어의 이름은 이미 유명해질 대로 유명해져 그를 찾는 성공회 신자 유력가들이 늘어났다. 래들리교구의 사제로 지낸 지 1년이 되는 1894년 그는 웨스트민스터 사원의 사제로 발탁되었고, 그곳에서 그는 탁월한 말솜씨로 뛰어난 설교자로서의 면모를 드러냈다. 그렇게 자신의 유능함을 선보인 그는 1901년 7월 당시 국왕 에드워드 7세의 왕실 사제로 임명되었다.

2.4. 부활의 공동체

1892년 퓨지 하우스의 원장으로 한창 역임하고 있던 고어는 수도회적 성향을 띠는 남성 사제 단체를 결성했다. 그는 이 단체를 부활의 공동체라고 명명했고, 자신이 초대 수장으로 선발되었다. 고어는 수장직을 1902년 우스터교구의 주교로 선출될 때까지 유지했다. 부활의 공동체 소속 인물들은 모두 성공회 사제들로 베네딕토회의 규율을 기반으로 한 금욕적인 생활을 이행하는 것이 최우선 소명이었다.

1893년 고어가 퓨지 하우스의 원장직을 내려놓고 일반 사제직을 수행하러 래들리로 떠났을 때 공동체 일원들도 동행했고, 1894년 고어가 웨스트민스터 사원의 사제로 발탁되어 런던으로 향했을 때는 대부분의 일원은 그의 권고로 래들리에 남았다. 1898년 부활의 공동체 본부가 허더즈필드 근교의 머필드에 세워졌고, 남성 사제뿐만 아니라 남성 평신도도 일원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비록 부활의 공동체가 가톨릭 수도회에서의 전통적이고 폐쇄적인 생활 방식을 표방했지만 고어는 일원들에게 사회적인 활동도 소홀히 하지 않기를 원했다. 이에 1903년 본부가 소재해 있는 머필드에서 성공회 사제를 양성하는 부활의 대학이라는 교명의 교육 기관이 개교했고, 같은 해 일부 공동체 일원들이 남아프리카 공화국 요하네스버그로 떠나 그곳에서 선교 활동을 펼쳤다.

3. 의의

고어는 언뜻 보면 그는 급진주의자로 비칠 수 있지만 오히려 실상은 전통주의자에 더 가까웠다. 그는 친가톨릭적인 고교회파로서 성공회가 사도적 뿌리를 가지고 있는 교회임을 자랑스럽게 여겼고, 교회 분열 전 가톨릭으로부터 전해져 오는 인습을 무조건 타파하는 건 지양했던 인물이었다. 다만 그가 얘기하고자 하는 것은 과거의 오랜 것들과 현대의 새로운 것들을 모두 들여다보고 이 둘을 적절히 통합하여 사도로부터 이어지는 전통적 교회의 가르침을 현대에서도 적용할 수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고어의 영향력은 오늘날까지도 이어진다. 그는 신학, 문학, 역사, 철학 등 여러가지 분야에서의 시각들을 통해 이루어지는 성서비평학과 더불어, 성경을 근간으로 둔 종교적인 자세를 유지하되 과학적으로 자명한 사실은 받아들이는 현재 기독교의 시류를 형성하는 데에 큰 역할을 했다.


[1] Community of the Resurrection. 수도회의 성격을 띠는 성공회 산하 단체.[2] 혼전 성씨는 '폰슨비'.[3] 테니스 선수로 윔블던 대회의 초대 챔피언이다.[4] 반대로 친가톨릭 성향을 지닌 성공회 신자들은 고교회파라고 부른다.[5] 초기 교회의 명맥을 계승하고 있는 가톨릭처럼 사도 때부터 존재했던 오래된 기독교 전통 신앙 및 의식 등을 복원해 이를 성공회 전례와 신학에 포함해야 한다는 종교 사상.[6] 옥스퍼드 운동의 대표적인 주도자였던 존 헨리 뉴먼이 성공회에 한계를 느끼고 가톨릭으로 개종함으로써 남은 주도자들 중에 운동을 이끌 핵심 인물로서는 퓨지가 유일했다.[7] 성경은 신으로부터 영감을 받아 쓰였다는 주장. 성경의 저자들이 성령의 영향에 의해 글을 써 그것이 궁극적으로는 신의 말씀이 된다는 것이다. 기독교 중에서 특히 개신교 신학에서 중요시 여기는 주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