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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안시/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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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관

연대 연혁
원삼국시대 목지국
삼국시대 ~ 757 대목악군
757 ~ 남북국시대 대록군
후삼국시대 목주/대목군[1] 동·서도솔[2]
930 ~ 995 천안도독부(도독)
995 ~ 1005 환주(도단련사)
1005 ~ 1018 환주(지주사)
1018 ~ 1310 천안부(지부사)
1310 ~ 1362 영주(지주사)
1362 ~ 1413 천안부(지부사)
1413 ~ 1416 영산군(지군사)
1416 ~ 1466 천안군(지군사)
1466 ~ 1963 천안군(군수)
1963 ~ 1991 천안시(시장) 천원군(군수)
1991 ~ 1995 천안시(시장) 천안군(군수)
1995 ~ 2008 천안시(시장)
2008 ~ 현재 천안시(시장) 서북구 • 동남구(구청장)

오늘날 천안(天安)이라는 지명은 하늘 아래 가장 편안한 곳이라는 의미 그대로 받아들여지고 있지만, 실제로는 정반대의 의미로 지어진 곳이라는 설이 있다. 즉 왕건이 여기에 지명을 붙일 때 이곳이 편안하면 천하가 편안할 것이라는 뜻에서 이름이 붙여졌다는 것. 후삼국시대 왕건견훤 사이에 전선이 형성된 지역이었고, 그만큼 교통의 요지이기에 이런 말이 생겨났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천안으로 개칭되기 전의 이름이 '도솔'인 것으로 미루어 이보다도 불교 용어인 '도솔천'에서 유래되었을 가능성도 있으니 유념하자. 천안의 다른 고호(古號)인 '영주(寧州)', '환주(歡州)' 등도 '편안하다(寧)', '기쁘다(歡)' 등의 의미를 담고 있어 천안과 뜻이 통한다.

2. 고대

고조선과 일맥상통하는 토광묘제 집단이 진작부터 자리하고 있었으며, 기원전 2세기에는 현 전라북도 익산시 일대에 자리잡은 건마국이 주도하는 마한연합에 속해 있었다. 그런 후 AD 1세기 후반 ~ 2세기 초반에 서북한에서 내려온 집단이 동남구 청당동 일대에 자리잡게 되어 번영하며, 이 집단이 이후 어떤 과정을 거쳤는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기원후 3세기 시점에서는 건마국을 제치고 마한의 새로운 수장국인 목지국이 되어 있었다.

삼국시대에 들어선 뒤인 246년에 신분활국이 주축이 된 기리영 전투에서 한사군 세력인 낙랑군, 대방군에 양패구상에 가까운 패배를 당한 후 위상이 크게 실추됐고, 이후 약 20~30년이 지난 3세기 중후반 경 휘하 거수국으로 거느리던 백제국에게 하극상을 당한 시점부터는 마한의 맹주 자리를 빼앗기고 백제국 휘하의 거수국으로 전락하고 만다. 자세한 내용은 목지국, 청당동, 성남면 문서 참조.

이후 고구려가 백제의 수도인 한성을 함락해서 오늘날의 충청북도 청주시괴산군, 세종특별자치시, 대전광역시 일대를 석권하고 백제는 피난수도인 웅진성으로 천도했을 무렵에는 현재의 천안 일대는 백제-고구려 국경에서 북쪽으로 다소 돌출한 국경도시가 되어버렸고, 이 당시 백제에게 마지막 남은 자치력을 모조리 해체당한 뒤 백제 왕실이 직할하는 요새지가 되어 오늘날의 시가지를 기준으로 남쪽의 대목악군(大木岳郡, 현 동남구 목천읍)과 그에 소속된 감매현(甘買縣, 현 동남구 풍세면)과 구지현(仇知縣, 현 세종특별자치시 전의면), 그리고 나혜홀(奈兮忽, 현 경기도 안성시)에 속한 사산현(蛇山縣, 현 서북구 직산읍)으로 구획된다.

남북국시대에 들어서는 통일신라에 속하였으며 대목악군과 감매현, 구지현은 웅천주(熊川州)에, 사산현만 나혜홀의 휘하라 한산주(漢山州)에 속해있었는데, 신라 경덕왕이 지명을 대대적으로 개칭하면서 대목악군은 대록군(大麓郡)으로, 감매현은 순치현(馴雉縣)으로, 구지현은 금지현(金地縣)으로, 상위 행정구역인 웅천주는 웅주(熊州)로 고친다. 사산현은 개칭되지 않고 그대로였는데, 그 상위 행정구역인 나혜홀은 백성군(白城郡)으로, 한산주는 한주(漢州)로 고친다.

후삼국시대에 들어서는 태봉 영역에 들어가게 되어 내내 태봉을 이은 고려의 판도에 있었다. 전백제가 천안 일대는 끝까지 붙잡고 그 동쪽 및 동남쪽 일대는 거의 잃었던 것과 달리 이번에는 천안 일대는 고려가 계속 붙잡고 주변의 충청남도 공주시홍성군, 세종, 청주 일대는 후백제와 고려 사이에서 왔다갔다 하게 된다. 이 시기에는 경덕왕의 한화지명이 잘 자리잡지 않아 개칭 전의 명칭에서 유래한 목주(木州) 혹은 대목군(大木郡)이라 불린다. 한편 그보다 북서쪽으로 흑성산 너머에 있는 지금의 시가지 근처가 새로이 도솔(兜率)이라 불리게 된 것으로 보이는데, 이는 불교 용어인 도솔천()에서 유래한 것으로 이를 법명으로 삼은 고려 초기의 승려도 있었다.

930년 8월에 고려 태조 왕건이 현 목천읍 일대에 해당하는 목주/대목군에 행차하면서 도솔 근처를 지나는 길에 술사 예방(藝方)이 "삼국의 중심에 오룡이 구슬을 다투는 형상이니 만약 이곳에 대관(大官)을 두면 백제가 스스로 투항할 것입니다."라 하자, 태조는 동·서 도솔을 묶은 천안도독부(天安都督府)를 설치하여 대승 제궁(弟弓)을 도독부사(都督府使)로, 원보 엄식(嚴式)을 도독부부사(都督府副使)로 각각 배치하였다.[3] 현 목천읍 일대는 목주군(木州郡)이라는 행정구역으로 따로 자리잡게 된다.[4] 이후 936년에 태조가 천안에서 남진하여 현 경상북도 선산군인 일선군에서 후백제와 결전을 벌이는데 이것이 바로 일리천 전투이다. 이 전투로 후삼국은 통일되었다.

3. 고려 시대

성종대에 10도제가 실시되며 천안도독부는 공주목(公州牧)에 속하였으며, 이후 도호부제가 축소, 폐지되며 환주(歡州)라는 이름으로 개칭된다. 목주군은 청주목(淸州牧)에 속하게 되며, 별칭으로 신정(新定)이라 불리기도 했다.

현종대에 5도 양계제가 실시되며 1018년, 환주는 다시 천안부(天安府)로 개칭되고 수령으로 도독 대신 지부사가 파견된다.[5] 그리고 목주군과 함께 양광도에 속하게 된다. 이때 속군현으로 온수군(溫水郡, 현 충청남도 아산시), 인주현(仁州縣, 현 충청남도 아산시 인주면), 신창현(新昌縣, 현 충청남도 아산시 신창면), 평택현(平澤縣, 경기도 평택시 팽성읍)을 새로 두게 되며 지역행정의 중심으로 성장한다. 온수군은 명종대인 1172년에 온수현(溫水縣)으로 격하되고, 인주현은 아주현(牙州縣)으로 개칭된다.

고려 초에 순치현은 풍세현(豊歲縣)으로, 금지현은 전의현(全義縣)으로, 사산현은 직산현(稷山縣)으로 개칭되었으며, 전의현은 청주목의 속현이 되고, 풍세현과 직산현은 상기한 천안부가 1018년에 다시 설치됨과 동시에 천안부의 속현이 된다. 풍세현은 별칭으로 자천(秭川)이라 불리기도 했다. 결과적으로 이 시기 천안부는 속현으로 풍세현, 직산현, 온수현, 아주현, 신창현, 평택현을 거느린 거대한 행정구역으로 발전하게 된다.

충선왕대인 1310년에는 전국의 부목이 폐지되면서 천안부도 영주(寧州)가 되었으나, 1362년 한창 홍건적이 활개치는 가운데 공민왕에 의해 다시 천안부로 복귀하였다.

4. 조선 시대

조선의 건국과 함께 행정구역이 대대적으로 재편되면서 태종대인 1413년에 천안부는 옛 이름인 영주(寧州)에서 딴 영산군(寧山郡)을 거쳐 1416년 천안군(天安郡)으로 격하되며,[6] 목주군도 1413년에 목천현(木川縣)으로 격하되고, 아주현은 아산현(牙山縣)으로 개칭된다.[7] 그리고 격하와 함께 원래 천안부의 속현이었던 직산현, 온수현, 아산현, 신창현, 평택현이 한꺼번에 천안에서 독립하게 되며, 천안군, 목천현과 함께 모두 청주목에 속하게 되어 원래 천안부가 도맡았던 지역중심적 기능은 모두 청주목으로 이관된다. 그리고 모두 충청도에 속하게 된다. 이에 당시 오늘날 천안시의 경내에는 천안군의 직할지와 목천현, 직산현, 그리고 마지막으로 천안군의 속현으로 남은 풍세현이 분립하게 된다.

직산현은 태조대인 1393년에 직산현 출신의 환관 최연(崔淵)[8]명나라에 들어가 황제를 모시다가 사신으로 조선에 귀국하자 그의 요청으로 직산군으로 승격되었다가 태종대인 1401년에 다시 직산현으로 돌아간다. 연산군대인 1505년에는 경기도에 이속되었다가 중종대인 1507년에 다시 충청도로 환원되기도 했다.

고종대인 1895년에 지방관제 개정으로 목천현은 목천군(木川郡)으로 다시 승격되며 청주목에서 공주목 관할로 옮겨지고, 이듬해 다시 충청남도 소속이 되었다. 1906년 전국적인 월경지, 위요지 정리 때 청주군에 속했던 현 동남구 수신면 지역이 목천군에 편입된다.

5. 일제강점기

이후 1914년에 천안군, 목천군, 직산군 3개 군이 천안군으로 통합되면서 현재의 시계가 형성되었다.
같은 해 1914년 경기도 안성군 입장면이 천안군에 편입 되었다.
이 때 읍내(오늘날의 시내) 지역은 천안의 옛 이름인 영주(寧州)와 환주(歡州)에서 따와 '영성면(寧城面)'과 '환성면(歡城面)'의 2개 면으로 편제됐다.

1917년 영성면이 천안면으로, 성산면(城山面)이 직산면으로 개칭되고, 천안면은 1931년 천안읍으로 승격됐다. 1942년 갈전면(葛田面)이 병천면으로 개칭됐다.

6. 대한민국

파일:천안시 휘장(1963-2000).svg
천안시 승격 당시 제정된 휘장.

1963년 천안읍과 환성면[9]이 천안시로 승격되어 천안군에서 분리되었고, 나머지 천안군 지역은 천안의 '천'에 지명의 접미사로 흔히 쓰이는 '원(原)'을 합성해 '천원군(天原郡)'으로 개칭되었다.[10]

1973년에는 성환면이 성환읍으로 승격되었다. 1982년에 천원군청이 오룡동(중앙초등학교 근처)에서 성거면(현 서북구청)으로 이전하면서, 3년 뒤인 1985년 성거면이 성거읍으로 승격되었다. 1991년에 천원군은 다시 천안군으로 명칭이 환원되었다.

1995년 도농통합으로 천안군이 천안시에 병합되었다. 2002년 직산면과 목천면이 직산읍과 목천읍으로 승격되었다. 2005년에 인구 50만 돌파와 수도권 전철 1호선 개통이 이루어졌고, 천안시청이 불당동으로 이전했다.

2004년에는 행정수도 후보지 4곳 중 하나였으나 [11] 탈락했다. #

2008년에 국회의원 선거구를 기준으로 동남구서북구로 분구되었다.[12] 2013년 인구 60만을 돌파하였다.#


[1] 목주군으로 이어짐.[2] 천안도독부로 이어짐.[3] 도독부나 그냥 부나 행정구역상으론 부인 건 같으나 수령이 도독인 경우에는 군정이 실시된다는 차이가 있다.[4] 이보다 앞선 1월에 고창 전투가 있었다. 이후 932년에는 태조가 지금의 충청북도 청원군 문의면인 일모산성을 공격하고, 견훤은 이에 맞서 평안도 지방의 해안을 휩쓸었다. 다시 934년에 태조가 지금의 충남 홍성인 운주에서 후백제왕 견훤을 꺾자 금강 이북의 성들이 태조에게 항복해 들어온다. 그리고 견훤은 바로 이듬해 아들 신검에게 배신크리를 맞고 태조에게 항복한다.[5] 도독부도 마찬가지로 그냥 행정구역상으론 그냥 부로 쓰였기 때문에 도독부와 그냥 부의 구분은 수령이 도독인가 아닌가에 의해 달라지게 된다.[6] 그래도 군이면 낮다고만 할 순 없다. 세종실록지리지에 기록된 청주목의 관할의 19개 군현 가운데 군 단위는 오직 천안군과 옥천군만 있고 나머지 17개는 모두 현이다.[7] 이때 원래는 중요한 지명에만 쓰여야 할 주(州)가 들어가는 지명이 너무 많다고 하여 대대적으로 산(山) 혹은 천(川)으로 개칭되었다.[8] 김연(金淵)으로 표기된 자료도 있는데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을 보아 오기로 보인다.[9] 이 두 지역이 현재 천안시 동지역이다(1983년 풍세면에서 편입된 구룡동 제외). 천안읍은 구도심 일대(중앙동, 문성동, 신부동, 원성동, 구성동, 청수동, 다가동, 봉명동, 성정동), 환성면은 구도심을 제외한 외곽 일대(부성동, 백석동, 불당동, 쌍용동, 용곡동, 신방동, 청당동, 삼룡동)로 천안읍을 거의 완전히 둘러싸고 있었다. 단, 부성동(차암동 제외), 안서동, 유량동은 원래 천안읍이었다가 1938년 환성면으로 이관된 곳으로, 그때까지는 현 천안 시가지의 동북부가 천안읍, 서남부가 환성면이었다.[10] 하필이면 바로 옆에 충청북도 청원군(현 청주시 읍면지역)과 접하는데다가 이름까지 비슷해 헷갈리기 쉬웠다.[11] 정확히는 충남 천안시 목천읍과 성남면·북면·수신면 일원[12] 공교롭게도 동남구는 구 목천군, 서북구는 구 직산군을 정확하게 떼어서 포함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