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르너이 팔의 감독직 및 기타 직책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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헝가리의 前 축구감독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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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0f0f0,#222222><colcolor=black,white> 이름 | 체르너이 팔 Csernai Pál | |
출생 | 1932년 10월 21일 | |
헝가리 왕국 필리시 | ||
사망 | 2013년 9월 1일 (향년 80세) | |
헝가리 부다페스트 | ||
국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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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 | 축구 선수 (미드필더 / 은퇴) 축구 감독 은퇴 | |
소속 | <colbgcolor=#f0f0f0,#222222><colcolor=black,white> 선수 | 부다페스티 포시타시 SE (1952~1953) 버서시 체펠 부다페스트 (1954~1955) 카를스루어 SC (1956~1958) FC 라쇼드퐁 (1958~1959) 슈투트가르트 키커스 (1959~1965) |
감독 | LASK (1960~1961) 바커 04 베를린 (1969~1970) SSV 로이틀링겐 05 (1970~1971) 로열 앤트워프 FC (1971~1972) 아인트라흐트 프랑크푸르트 (1977 / 코치) FC 바이에른 뮌헨 (1977~1978 / 코치) FC 바이에른 뮌헨 (1978~1983) PAOK FC (1983~1984) SL 벤피카 (1984~1985) 보루시아 도르트문트 (1985~1986) 페네르바흐체 SK (1987~1988) 아인트라흐트 프랑크푸르트 (1988) BSC 영 보이즈 (1989~1990) 헤르타 BSC (1990~1991) 북한 대표팀 (1991~1993 / 테크니컬 디렉터) 북한 대표팀 (1993) FC 쇼프론 (1994~1995) | |
국가대표 | 2경기 (헝가리 / 1955) |
1. 개요
헝가리의 축구 선수 출신 감독.바이에른 뮌헨의 감독을 맡아 뮌헨의 전성기를 이끈 명장으로 이름을 날렸다. 바이에른 뮌헨에서 1980년과 1981년에 분데스리가 우승, 1982년 DFB-포칼 우승을 이끌었고, 같은 해 유러피언컵 결승까지 진출시켰다. 또한 1985년 SL 벤피카와 함께 포르투갈 컵 대회 우승을 차지했다.
독일 축구에서 현재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공간 수비(Raumdeckung) 전술의 선구자로서 축구 역사에 의미 있는 인물이다. 그의 동생 체르너이 티보르(Tibor Csernai) 역시 축구 선수였다.
말년에는 외국인 최초 북한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을 맡기도 했다.
2. 선수 경력
현역 시절 포지션은 미드필더였고, 당시 유럽의 강호였던 헝가리 축구 국가대표팀에 2회 선발된 적이 있을 만큼 역량이 있는 선수였다. 체르너이는 바사스 체펠 부다페스트(Vasas Csepel Budapest) 유스 출신으로, 1948년에 1군으로 승격하여 1955년까지 체펠 SC에서 활약했다.1956년 헝가리 혁명 당시 많은 헝가리 선수들처럼 그도 고국을 떠났다. 스위스를 경유해 독일로 이주한 그는 1956-57 시즌 후반기부터 당시 독일 DFB-포칼 우승팀이자 준우승 팀이었던 카를스루어에 합류했다. 오버리가 쥐트에서 28경기 6골을 기록한 후 1958년 남부 독일 챔피언십 우승과 함께 팀을 떠났다.
1958-59 시즌에는 스위스의 FC 라쇼드퐁에서 뛰었고, 1959년부터 1965년까지는 슈투트가르트 키커스에서 활약하며 113경기에 출전해 11골을 기록했다. 슈투트가르트에서 활동하는 동안 '푸스타(Puszta)'라는 고급 레스토랑을 열고 차고까지 임대하여 사업가로서도 활동했다.
1965-66 시즌에는 스위스 하위 리그 팀인 블라우바이스 취리히에 잠시 몸담았다. 이 시기에 그는 주로 스위스 마글링겐에 있는 스포츠 연방대학에서 코치 자격증을 취득하기 위해 스위스에 머물렀다.
3. 지도자 경력
은퇴 이후 여러 아마추어 및 프로팀 감독으로 생활하며 경험을 쌓았다. 쾰른 스포츠 대학에서 공부하는 동안 1967-68 시즌에는 미텔라인 지역 리그의 TuS 린들라르를 지도했다. 1968년부터 1970년까지는 2부 리그의 바커 04 베를린의 감독을 맡았고, 이후 SSV 로이틀링겐 05, 벨기에의 로열 앤트워프 FC에서 짧은 기간 감독직을 수행했다.1973년부터 1977년까지는 바덴 축구협회 코치로 활동하며 첫 번째 중요한 성공을 거두었다. DFB의 아마추어 지역 컵에서 노르트바덴 선발팀을 이끌고 니더라인 축구협회 선발팀과의 결승에서 1-1 무승부를 기록했으나, 상대팀이 재경기에 충분한 선수를 소집하지 못해 노르트바덴 팀이 트로피를 차지했다.
1977년 7월 1일, 그는 아인트라흐트 프랑크푸르트에서 귤라 로란트의 수석 코치가 되었다. 같은 해 11월 26일, 프랑크푸르트가 바이에른 뮌헨을 4-0으로 이긴 후, 두 클럽은 감독 교체라는 특이한 방식을 택했다. 바이에른 뮌헨의 감독이었던 데트마어 크라머가 프랑크푸르트로 가고, 로란트와 그의 조수 체르너이는 뮌헨으로 왔다.
그렇게 바이에른 뮌헨의 수석코치가 된 그는 1978년에 감독으로 승격해 1983년까지 뮌헨을 이끌었다. 로란트 하에서 바이에른은 맨투맨 마킹에서 공간 수비(Raumdeckung)로 전환하기 시작했는데, 이는 프랑크푸르트에 이어 이 전술을 도입한 두 번째 분데스리가 팀이었다. 시즌 전반기가 끝난 후 로란트가 해임되자 체르너이는 임시로 감독직을 맡았다. 처음에는 클럽 회장 빌헬름 노이데커가 맥스 메르켈을 새 감독으로 선임하려 했으나, 선수들의 반대로 체르너이가 전임 감독의 조수였음에도 정식 감독으로 임명되었다.
체르너이는 뮌헨 감독직을 역임하며 1회의 DFB-포칼 우승(1982)과 2회의 분데스리가 우승[1]을 이끌며 명장으로 손꼽혔다. 그는 '팔 시스템'이라 불리는 정교한 공간 수비 전술로 바이에른의 경기력을 크게 향상시켰다. 또한 1982년에는 팀을 유러피언컵 결승까지 이끌었으나, 아스톤 빌라 FC에게 패했다.
1983년 뮌헨을 떠난 후 PAOK 살로니키, SL 벤피카, 보루시아 도르트문트, 페네르바흐체 SK, 아인트라흐트 프랑크푸르트, BSC 영 보이즈, 헤르타 BSC 등 여러 팀을 지도했지만 뮌헨에서만큼 큰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다.
1991년 북한 축구 국가대표팀에 약 50만 달러라는 파격적인 연봉으로 스카우트되어 초기에는 미국을 상대로 2-1 승리를 거두는 등 돌풍을 일으켰으나 1994년 월드컵 본선 진출 실패에 책임을 물어 1993년 월드컵 최종 예선 직후 지휘봉을 조용히 놓았다.
마지막으로 1994년 10월부터 1995년 4월까지 헝가리 1부 리그의 FC 쇼프론을 지도했으나, 팀은 리그 최하위로 강등되었다.
4. 은퇴 이후
1996년 감독직에서 아예 은퇴한 뒤, 야인 생활을 지내다 2013년에 세상을 떠났다.5. 둘러보기
[1] 1980, 1981
분류
- 1932년 출생
- 1952년 데뷔
- 1965년 은퇴
- 2013년 사망
- 페슈트 주 출신 인물
- 헝가리의 남자 축구 선수
- 헝가리의 남자 축구 감독
- 카를스루어 SC/은퇴, 이적
- FC 라쇼드퐁/은퇴, 이적
- 슈투트가르트 키커스/은퇴, 이적
- LASK/역대 감독
- SSV 로이틀링겐 05/역대 감독
- 로열 앤트워프 FC/은퇴, 이적
- FC 바이에른 뮌헨/은퇴, 이적
- PAOK FC/은퇴, 이적
- SL 벤피카/은퇴, 이적
- 보루시아 도르트문트/역대 감독
- 페네르바흐체 SK/역대 감독
- 아인트라흐트 프랑크푸르트/역대 감독
- BSC 영 보이즈/역대 감독
- 헤르타 BSC/역대 감독
- 북한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
- UEFA 챔피언스 리그 준우승 감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