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3-23 15:04:03

최동원 90만원 사건

1. 개요2. 과정
2.1. 최동원의 연봉과 옵션 문제2.2. 1988시즌 연봉 동결 결정2.3. 90만원 연봉 인상 요구2.4. 박종환 "병신 육갑하고 있네" 발언2.5. 박종환 반성문 사건2.6. 최동원 현역 은퇴 및 미국 유학 선언2.7. 어우홍 감독의 분노2.8. 롯데 팬들의 울분과 분노2.9. 진행과 결렬이 반복되는 연봉 협상
3. 결말
3.1. KBO 중재3.2. 어우홍의 꾀

1. 개요

롯데 에이스 최동원이 구단과의 자존심 대결로 연봉 재계약이 이루어지지 않아 개막전 등판이 불투명하다. 오는 4월2일의 프로야구 개막을 9일 앞둔 24일까지 최동원는 90만원때문에 구단과 양보없는 연봉 줄다리기를 계속하고있다. 최동원의 작년 연봉는 8천9백10만원.작년 연봉에 90만원을 인상해 9천만원을 채워 팀 에이스의 자존심을 세워 달라는 것이 최동원의 주장이다.

그러나 롯데구단은 해마다 연봉 협상때 골머리를 앓고있는 최동원에 대해 이면계약(옵션)을 내세워 『한푼도 더 줄수 없다.』고 맞서고 있다. 롯데 박종환 전무는『작년에 이미 올해의 연봉8천9백10만원을 주기로 합의된 것인데 또다시 90만원의 인상을 요구하는 것은 받아들일 수 없다』며 『최동원의 자존심보다는 구단의 자존심이 더욱 중요하다』고 잘라 말한다.
1988년 3월 24일 동아일보
최동원은 마운드에서 보여주던 책임감있는 스타의 면모를 잃고 있다. 특권의식과 아버지의 그늘에 가려 상식을 벗어난 예외적 규정의 적용을 요구하는가 하면 자신의 주장을 떳떳이 내놓지 못하고 있다. .... 그릇된 스타의식을 조장한 책임은 구단에게도 없지 않다. 롯데 구단은 지난 84년 한국시리즈 우승을 하자 최동원의 연봉을 무려 4천7백50만원이나 올리는 등 '칙사대접'을 했던 것이다. .... 이런 점에서 프로야구구단이 연봉의 상한선을 정해야 한다는 주장도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 이와 함께 구단의 뜻을 따르지 않으면 은퇴를 택할 수밖에 없는 최동원 측에서 "현재의 규약은 선수에게 일방적으로 불리하게 돼있다. 일부 선수들이 선수회, 선수노조 등으로 권익을 찾아야 한다"는 주장을 펴는 것도 직접적인 명분은 없지만 선수가 한번 구단과 계약을 맺으면 구단이 풀어주기 전까지 벗어날 수 없는 현재의 규정을 볼 때 흘려버릴 말만은 아닌 것 같다.
최동원 계약파동 - 스타와 구단 콧대 싸움, 1988년 5월 18일 한겨레 신문

1988시즌 최동원롯데 프런트의 연봉 협상 과정에서 발생한 갈등 사건.

선수와 구단간의 협상이 진행될수록 최악의 감정 싸움으로 심화되어 결국 1988년 전반기 폐막 직전인 1988년 6월 29일에야 계약이 체결되었다. 아래 내용을 읽어보면 알겠지만 이게 정말 실화냐 싶을 정도로 어처구니가 없는 사건이다.

이 사건은 사소한 오해가 들불처럼 번져나가는 바람에 롯데 프런트와 최동원 양측 모두 지나칠 정도로 감정을 앞세운 결과 벌어진, 양측 모두에게 책임이 있는 사건이다. 또한 1988시즌의 절반 이상을 에이스가 부재한 상황에서 롯데 자이언츠가 포스트시즌 진출을 위한 순위 싸움을 하는 것을 지켜보던 부산 롯데팬들을 복장 터지게 했던 사건이었다. 이 사건은 당시에는 여러 언론 등을 통해 비교적 공정하게 보도되었다. 물론 완전히 공정한 것은 아니었다. 당시 기준으로 이면계약에서 구단에게 불리하고 선수에게 유리한 경우에 지켜진 경우가 거의 없었고, 선수에게 불리한 경우에 수정을 요구한 사실상 첫 사례가 최동원 90만원 인상 요구였기 때문이다. 공공연히 선수에게 불리했던 당시 상황에 비추어 공정한, 즉, 상황논리에 따른 공정한 보도였을 뿐이다.

부산팬들은 롯데 구단 못지 않게, 최동원의 실질적인 매니저/에이전트 역할을 했던 부친 최윤식에 대해 상당히 원성을 쏟아내었다. 당시 부산팬들은 차마 최동원을 직접 비난하지는 못했고 주로 최동원의 부친 최윤식을 비난했다.

사건 당시로부터 오랜 시간이 지났고 최동원 본인도 이미 고인이 된 시점에서 이 사건은 박동희 기자 등에 의해 윤색되어 알려지는 경향이 있는데, 실상 박동희가 쓴 컬럼은 거의 전적으로 최동원 측의 인터뷰에 의존한 채로 감정이 이입된 채 작성되어 있고 당시 기사 등과 비교해 볼 때 맞지 않는 내용들도 있다. 사실 최동원 본인의 훗날 인터뷰들은 과거 실제 기사 내용들과 불일치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1] 박동희 컬럼 때문에 이 사건은 현재 롯데 프런트의 일방적인 횡포의 사례로 널리 알려지고 있으나 이 사건은 분명히 양측 모두에게 책임이 있는 사건이다.

2. 과정

2.1. 최동원의 연봉과 옵션 문제

당시 최동원은 KBO 리그에서 독보적인 연봉 1위에 있었다. 그런데 이 연봉의 상당 부분은 이면계약에서 옵션 형태로 지급되고 있었다. 사실 이는 불가피한 일이기도 했는데, 당시 KBO 규정에는 신인 연봉 제한 규정, 연간 연봉 상승률 25% 상한 규정 등이 있었다. 즉 전년도에 아무리 잘했어도 연봉 인상률은 최대 25% 이내로 고정된다는 뜻인데, 이 규정에 따른다면 최동원이 원하는 수준의 연봉에는 턱없는 수준으로 밖에 지급할 수 밖에 없었다.[2] 롯데가 비롯 짠돌이 구단이긴 했지만, 최동원이 혹시라도 마음을 돌려 다시 해외로 진출할까봐 롯데도 매년 최동원에게 국내 최고 대우를 확실하게 해주었다. KBO가 제한하는 것 이상의 연봉을 지급하기 위해 롯데와 최동원은 이면 옵션 계약을 할 수 밖에 없었다.

86시즌까지 최동원은 놀라운 활약을 보였고 당연히 옵션을 풀로 충족하고 다음해에도 최대한의 연봉 상승을 이끌어 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크고 작은 앙금들은 계속 누적되어가고 있었다. 최동원은 비록 연봉 1위이긴 했지만 메이저리그 진출을 접고 잔류한 자신에게는 여전히 턱 없이 부족한 액수라고 여겼고, 무엇보다도 롯데에 그리 좋은 인식이 별로 없었다. 최동원은 실업시절 롯데에 계약금의 60%를 떼먹혀 프로야구에 들어갈 때부터 다시는 돈을 떼먹히지 않겠다는 다짐을 해 협상때마다 강경한 태도를 유지했다. 롯데 구단 역시 최동원이 꼭 필요한 존재이고 그가 뛰어난 활약을 보이는 만큼 최고의 대우를 해주었지만, 매년 반복되는 연봉 협상에서의 마찰에 피로감을 느끼고 있었다. 당시 그룹으로부터 많은 지원을 받지 못했던 롯데로서는 매년 예산에서 최동원의 연봉이 차지하는 비중이 컸고, 다른 주전 선수들의 쌓여가는 불만 또한 무시할 수 없었다.

2.2. 1988시즌 연봉 동결 결정

1987시즌이 끝나고 88시즌을 위한 연봉 협상 시즌이 시작되었다.

1987시즌 최동원이 거둔 성적은 ERA 공동 12위, 다승 공동 4위, 승률 23위였다. 1987시즌 최동원은 여전히 좋은 활약을 보였으나, 84~86 세 시즌에 비해서 성적의 하락세가 완연히 나타나기 시작했다. 최동원의 구위가 이전보다 많이 떨어지면서 당장 평균자책점이 치솟았고, 그 결과 승률이 매우 떨어져 14승 12패로 패전 비율이 크게 높아졌다. 이 시점에서 최동원은 더 이상 국내 최고의 투수가 아니었다. 2년 연속 0점대 방어율을 기록한 선동열은 둘째치고, 팀내에서도 신인 윤학길이 최동원보다 평균자책점과 승률에서 더 좋은 성적을 거두었다. 일반 야구팬들도 최동원의 하락세를 체감했고 1988년에는 최동원의 연봉이 소폭 삭감될 것이라고 예측하고 있던 상황이었다.

1988년 연봉은 1987시즌의 성적에 따라 결정하는 것으로 이미 이면 계약에 명시된 상태였다. 최동원의 이면계약서 내용에 따르면 87시즌 14승 2세이브를 거둔 최동원은 14승에 의해 연봉이 2%가 삭감되지만, 2세이브는 1승으로 친다는 조항에 따라, 1988시즌 최동원의 연봉은 8천9백10만원으로 동결되는 것으로 결정났다. 연봉이 동결되더라도 여전히 최동원의 연봉은 독보적인 국내 1위였다.

최동원의 연봉 동결 사실은 1988년 1월 말부터 여러 언론을 통해 연이어 발표되었다.
롯데는 정구선(3천만원), 김용희(2천6백60만원), 김용운(2천2백만원), 김민호(1천8백만원) 등 35명 중 21명의 선수와 계약을 마쳤으며 최고연봉선수인 최동원은 작년 수준(8천9백10만원)에서 동결될 전망이다.
1988년 1월 26일 매일경제
롯데는 최동원 및 현재 일본에 있는 재일동포 홍문종, 김정행과는 현상유지선에서 타결키로 구두합의함으로써 사실상 연봉협상을 끝마쳤다. 최동원은 지난해 8천9백만원, 홍문종과 김정행은 5천만원선의 연봉을 받았다.
1988년 2월 1일 동아일보
현재 최고연봉선수는 롯데 최동원으로 연봉은 작년 수준과 같은 8천9백만원으로 알려졌다.
1988년 2월 2일 매일경제
프로야구단과 선수들간의 연봉싸움이 거의 마무리 됐다. .... 최고연봉선수는 롯데의 최동원으로 지난해와 같은 수준인 8천9백만원.
1988년 2월 4일 동아일보
이렇게 평화롭게 연봉 협상이 끝나는 듯 했다.

2.3. 90만원 연봉 인상 요구

그런데 최동원의 연봉 동결 사실을 전하던 한 언론사가 롯데 구단의 발표를 인용하면서 "약간의 연봉 인하 요인이 있으나 에이스라는 점을 감안해 깎지 않기로 했고 동결시켜줄 계획"이라고 발표했다. 그런데 여기서 '연봉 인하 요인이 있으나'라는 표현이 문제가 되었다. 비록 최동원의 성적이 부진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동결여부는 이면 계약에 따라 결정된 것일 뿐, 적어도 이면계약상 연봉 인하 요인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이면 계약은 당시에는 외부에 알려지지 않은 내용이었고, 때문에 롯데 구단은 최동원의 성적 하락을 직설적으로 언급하기 보다 연봉 인하 요인이라고 에둘러 표현한 것일 수도 있었다.

이 기사가 나간 후 최동원의 부친 최윤식은 2월10일 오전 롯데 구단 사무실을 찾아가 최경렬 차장에게 화를 내며 "신문에 난 이게 무슨 소리냐. 도대체 어떤 놈이 이 따위 수작을 기자들에게 흘린 거냐? 엄연히 약정이 있는데 작년에 맺은 약정을 파기하자는 얘기냐. 좋다. 그렇다면 약정없이 계약하자."라고 하면서 연봉 동결이 아니라 연봉을 90만원 인상해달라고 주장하고 나섰다.

최윤식은 90만원 인상의 근거로 ① 감독이 잘못하는 바람에 세 시합을 망쳤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3] 최윤식은 "15승에서 1승만 올라가도 2% 상승인데 (감독이 세 경기를 망쳤다는 점을) 조금만 생각해 줘야겠다."고 말했다. ② 또 최윤식은 롯데 구단이 연봉 인하 요인이 있지만 동결한다고 언론에 흘림으로써 최동원의 명예가 실추되었고 동원이의 자존심이 크게 상했다고 말했다. 최윤식은 롯데에 헌신해온 최동원의 명예 회복을 위해서라도 롯데 구단은 최동원의 연봉을 인상해줘야 한다고 주장했다. ③ 게다가 최윤식은 동원이가 앞으로 결혼이라는 대사가 있는데 결혼을 위한 동원이의 이미지 때문에라도 연봉을 상승시켜줘야 한다고 말했다.[4] 만약 9천만원(기존 연봉+90만원)으로 연봉을 상승해 주지 못하면 "동원이가 다음 시즌 부진할 수 있다."라고 구단을 압박했다.

그러나 롯데 구단은 '감독의 잘못', '자존심', '결혼' 등을 이유로 연봉을 더 올려주는 것은 받아들일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 이미 계약에 따라 연봉 동결이 결정된 마당에 이를 파기하는 것은 있을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

2.4. 박종환 "병신 육갑하고 있네" 발언

당시 롯데 구단의 박종환 전무는 어느날 기자들과의 술자리에서, 최윤식의 연봉 인상 주장은 말도 안된다고 말하면서 그 자리에서 "병신 육갑하고 있네."라고 혼잣말처럼 말했다. 그런데 이 말이 그 자리에 동석했던 어느 기자의 입을 통해 최동원과 최윤식 귀에 들어갔다.

최동원 측은 이 발언을 들어 롯데 구단이 파렴치한 인신공격을 했다면서 이에 대한 사과를 요구하고 나섰다. 최동원의 아버지 최윤식은 6.25 상이용사 출신으로 전쟁에서 한쪽 다리를 잃었다. 그런데 박 전무의 병신 발언이 최동원 부친의 장애를 가지고 이를 비하했다는 것이었다. 최동원은 박종환 전무의 이 발언을 듣고 피가 거꾸로 솟는 모욕감을 느꼈다고 주장했다.

한편 롯데 구단은 이 발언 자체를 부인했다. 결국 양측의 갈등은 감정 싸움 양상으로 흘러갔다.

당시 박 전무의 발언은 모욕적인 언사라고 보기 어렵고 욕설이라기에는 오히려 너무 일상적인 언어가 아니냐는 여론이 많았다. 문디자슥 같은 표현도 욕이 아닌 친근감의 표시라고 말하는 부산의 언어습관을 고려하면 더욱 그러하다는 것이다. 병신이라는 말은 문자 그대로 진짜 장애가 있는 사람을 비하하는 말이 아니라 관용적으로 일반인들이 홧김에 두루 쓰는 표현이고, 육갑이라는 말도 꼭 부정적인 의미는 아니다. "병신 육갑하고 있네"라는 표현이 비하의 의미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게 최윤식의 장애를 비하한 인신공격이나 모욕적이라고 하는 것은 비약이라는 것이다. 게다가 본인에게 직접한 발언도 아니고 사적인 자리에서 혼잣말을 한 것인데 인격모독이 성립할 수 있느냐는 논쟁도 있었다.
앞뒤 사정을 종합해 보면 박종환 전무가 얼떨결에 그런 말을 한 것은 사실로 보인다. 다만 당사자를 맞대놓고 그런 모욕적인 말을 한 것은 아니었고 특별히 인신공격을 하려는 의도가 아니었던 것도 분명하다. #
그러나 최동원 측은 롯데가 인신공격을 했다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나중에는 롯데 구단을 인신공격 혐의로 제소했다. 이에 롯데 구단은 소명 자료를 제출해야 했다. 그러나 롯데가 인신공격을 했다는 최동원측의 주장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3월 시즌 개막이 임박하자 롯데 구단 측은 최동원과 계약을 서두르기 시작했다. 그러나 최동원은 최경렬 차장에게
"저는 이제까지 아버지 덕택에 야구인생을 살아오고 있습니다. 그리고 아버지를 존경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박 전무가 아버지의 약점을 남에게 얘기하고, 또 제게 5~10% 감액요인이 있다고 얘기했다더군요. 저도 명예를 중시하고 살아가는데 저의 팬들이 어떻게 생각하며 저를 좋아하겠습니까. 이런 것들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어떤 명분을 찾아야겠습니다."
라고 말했다. 그러나 한편으로 최동원은 아버지를 통해 협상을 계속하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최윤식이 이에 응하지 않으면서 협상은 또 결렬되고 말았다. 하지만 과거에도 그랬듯이 개막전 직전에는 어떻게 해서든 연봉 협상이 마무리될 것이라는 관측이 많았다.

2.5. 박종환 반성문 사건

『프로야구 롯데 자이언츠 최동원 투수의 88 연봉 재계약 협상과정에서 그의 부친 최윤식씨가 박종환 구단전무에게 '반성문'을 요구했다는 사실이 화제가 되고 있다. 이에 대한 시민들의 반응은 "도대체 박 전무가 뭘 얼마나 잘못했길래 그러느냐"에서부터 "어린애 장난하는 거냐"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①경기중에 선수들을 비방하지 말 것 ②선수들에게 강압적인 태도를 취하지 말 것 ③자신에게 인신공격을 한데 대해 사과할 것 등이 최씨가 요구했다는 내용이다.
1988년 3월 30일 부산일보
그런데 시즌 개막 직전인 3월 29일과 30일 부산일보에 "박종환 반성문 사건"과 관련된 기사가 연이틀 보도되면서 사태는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최동원의 아버지 최윤식이 박종환 전무에게 반성문 작성을 요구했다는 것이다. 최씨가 요구한 반성문 내용에는 본인에게 인신공격을 한 것에 대한 사과 외에도 선수단 관리와 관련된 내용이 포함되어 있어 더욱 파장이 컸다.

물론 롯데 구단은 이러한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당시 최윤식이 반성문을 요구하자 롯데 프런트 직원들이 이것은 구단에 대한 모욕이라고 분노하면서 박 전무에게 반성문을 쓰지 말아달라고 요청했다고 한다. 결국 롯데 구단은 최윤식의 반성문 요구를 거절했지만, 최윤식이 박 전무에게 반성문 쓰기를 요구했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박종환 전무에게는 충분히 굴욕적인 상황이었다.

이러한 사실이 부산일보를 통해 만천하에 공개되는 개망신을 겪은 박종환 전무는 "최동원의 계약 건은 내 손을 떠났다."고 말하며 뒷전으로 물러섰고, 부산 여론도 "도대체 구단이 뭘 잘못했길래 선수 부모가 구단 대표에게 반성문을 요구하느냐"고 말하며 최동원 부자에게서 등을 돌리기 시작했다.

최동원의 연봉 협상은 과거의 전례처럼 프로야구 개막일에 맞추어 극적으로 타결될 것으로 예측되었다. 그러나 반성문 사건이 터지면서 사태는 돌이킬 수 없는 양상으로 치닫고 말았다. 개막 엔트리 제출 시한인 3월 28일도 지나가고 말았다. 결국 최동원은 개막전 선수로 등록되지 못했다.

반성문 사건이 부산일보에 공개된 3월 29일 이후 최동원은 팀훈련에서 제외되었다.
연봉재계약이 결렬된 최동원이 롯데의 팀합동훈련에서 제외됐다. 롯데는 지난달 29일부터 최(崔)를 훈련에 합류시키지 않았는데 이는 최(崔)와 재계약이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 구단측은 "그동안은 재계약이 원만히 타결될 것으로 보고 합동훈련을 시켰었다"고 밝혔다.

최동원은 "29일 상오 10시 30분 미팅 후 돌아가라는 통보를 팀으로부터 받았다"며 "이제와서 합동훈련을 못하게 하는 것은 감정적인 처사라고 밖에 볼 수 없다"고 불쾌감을 표시했다.
1988년 4월 1일 경향신문
반성문 사건 이후 양측의 연봉 협상 테이블은 약 한 달하고도 보름 후인 5월 10일에야 재개되었다.

2.6. 최동원 현역 은퇴 및 미국 유학 선언

3월 29일과 30일 부산일보를 통해 공개된 반성문 사건의 파문은 엄청났다. 부산 여론은 벌집 쑤신 듯 난리가 났다. 그동안 최동원에게 우호적이었던 부산 여론은 반성문 사건을 기점으로 돌아서기 시작했다. 롯데 구단 조동래 사장은 여론을 진정시키기 위해 4월 2일 개막전 즈음 구단 입장을 해명하는 유인물을 돌리기도 했다.

반성문 사건이 일파만파로 퍼지자 개막전 직후 최동원 측은 현역 은퇴라는 초강수를 던진다.
최동원 "은퇴도 불사하겠다"

최동원은 4일 "신준호 구단주와 만나 현 상황에선 더 이상 야구를 계속하지 못하겠다고 전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중략) 한편 최윤식씨는 "박종환의 퇴진인가 동원이의 은퇴인가 택일하는 길만 남았을 뿐''이라고 말했다.
1988년 4월 4일 동아일보
연봉 줄다리기-파국으로 치닫는 끝없는 "감정싸움"
롯데구단과의 대립은 언제까지

최동원(30)은 언제쯤 마운드에 다시 나타날 것인가. 국내에서의 선수생활을 포기하고 미국 유학을 간다는 얘기는 과연 사실인가, 엄포인가. 프로야구 최고의 스타 최동원이 개막전에 빠진 채 롯데 팀이 홈에서 2연패하자 팬들의 이목은 최동원의 거취와 구단의 태도에 모아지고 있다. 롯데 입단 때부터 끈질긴 연봉 줄다리기로 시끄러웠고, 한때 미국 프로 진출 교섭으로 화제를 뿌렸던 최동원이기에 이번에는 또 어떤 속셈, 어떤 결심인지, 또 이번 감정싸움이 어떻게 끝날지가 궁금하다.

야구계에 잘 알려진 최동원의 아버지 최윤식씨는 계약 협상 과정에서 일어난 구단 측의 모욕적 언사에 대해 『구단이 사과하지 않는 한 계약에 응할 수 없다』는 강경한 자세를 고수하고 있다. 최윤식씨는『동원이도 은퇴를 굳히고 있다』며 『박종환 전무가 물러나지 않는 한 다시는 마운드에 서지 않을 것』이라는 폭탄선언을 했다. 최동원도『마음의 결심은 섰다. 롯데를 떠나더라도 결코 다른 팀의 유니폼은 입지 않을 것』이라며 각오가 단단하다. 최동원은 지난3일 부산의 롯데1번가 지하상가2개(17·5평)를 1억1천만 원에 팔았는데 이는 롯데와 인연을 끊겠다는 것. 최동원은 오는 20일 잔금을 받는 대로 기자회견을 통해 자신의 입장을 밝히고 은퇴도 불사하겠다는 강경한 자세로 선회했다.

이에 대해 박종환 롯데전무는 『모욕적인 언사는 물론 개인적인 감정은 있을 수도 없다. 사과해야 할 곳은 오히려 최동원 측』이라며 『작년의 이면계약(옵션)에 따라 8천9백10만원으로 재계약하면 된다』고 말했다. 롯데구단은 옵션에 따른 계약여부는 최동원 자신이 결정해야 한다며 더 이상 양보는 있을 수도 없는 일이라고 주장한다.
1988년 4월 5일 중앙일보
며칠 후 최동원 측은 돌연 미국으로 유학가겠다고 말했다. 4월 중순에 이르자 최윤식은 동원이가 한국에서 야구생활을 접고 미국 유타 대학교로 유학을 준비 중이라며 구체적으로 대학 이름까지 언급했다. 그러나 1988년 5월 7일 경향신문에도 나와 있듯이 대다수의 롯데 팬들은 최동원의 은퇴, 유학 선언을 전혀 믿지 않았다. 이미 입단 계약 때부터 매년 연봉 협상 때마다 레퍼토리로 반복되었던 내용들이었기 때문이었다. 위에 나온 부동산 매각 역시 연봉 협상 때 최동원의 레퍼토리 중 하나로 나중에 삼성과 연봉 협상 때도 대구의 아파트를 팔고 부산으로 내려간 적이 있었다.

신문에 보도된 바와 같이 최동원 측은 4월 20일 은퇴 및 유학 등 향후 거취에 관해 기자회견을 하겠다고 언론에 말했으나, 실제로 20일에 기자회견이 열리지는 않았다.

2.7. 어우홍 감독의 분노

윤학길 '거인의 자부심'

윤학길은 지난해의 에이스 최동원이 계약을 하지 않고 있음으로써, 올해엔 팀의 실질적인 에이스 위치를 굳히고 있다. 지난해 윤학길은 13승으로 최동원(14승)보다 1승이 적었다.
1988년 4월 19일 동아일보
계약이 지지부진해지면서 답답해진 이들 가운데 하나는 현장의 롯데 코칭스태프였다. 최동원의 부재로 인해 입단 3년차 윤학길이 상당히 많이 출전하며 고생하고 있었다. 어우홍 감독은 윤학길을 최동원이 소화할 몫까지 맡겨가면서 자주 기용했지만, 그 결과는 그다지 좋지 않았다. 선수는 선수대로 쓰고 팀은 패하는 이중의 타격을 입는 경우가 많았던 것. 그해 윤학길은 18승을 거두며 다승왕에 올랐고, 투구 이닝 역시 234이닝에 달해 1위에 올랐다.[5] 덕분에 윤학길은 '고독한 황태자'라는 별명을 얻으며 롯데에서 최동원의 뒤를 이을 새 에이스로 부각되었다.

5월이 되도록 최동원의 연봉 계약은 체결되지 않았고, 팀은 큰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5월초 롯데는 1승 9패의 어려운 상황에 빠지게 되었다. 결국 5월초 어우홍 감독은 선수단 앞에서 최동원에 대한 극도의 분노와 배신감을 표출했다. "내가 다시 감독으로 유니폼을 입은 것은 출세하겠다는 욕심이 있기 때문이 아니라 야구인으로서 만년을 보람있게 보내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나이많은 내가 그렇게 사정했는데도 최동원이가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것은 이제는 나도 용납할 수 없다. 최동원이 제 발로 들어오더라도 쓰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어우홍 감독의 발언을 전해들은 최윤식은 어우홍을 직접 찾아가 따졌다. 두 사람은 고함을 질러가며 언쟁을 벌였다. 두사람은 동갑으로 평소 허물없이 말을 놓고 지내는 사이였지만 결국 이런 사단이 나고 말았다. 사실 최윤식이 어우홍을 찾아가 싸운 내막에는 숨겨진 이유가 있었는데, 그것은 후술된 바와 같이 박종환 전무에게 반성문을 쓰게 하자는 아이디어를 어우홍 감독이 생각해 낸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2.8. 롯데 팬들의 울분과 분노

"구단의 처신이 어른스럽지 못했다. 하지만 최동원은 야구선수일 때 비로소 빛을 발하는 것이므로 싸울 일이 있어도 던지면서 싸워야 한다. 사실 최동원이 지난해 올린 14승 12패 2세이브의 성적은 '억대팔'의 값어치는 못한 것이다. 그가 정말로 자존심과 명예를 존중한다면 앞장서서 연봉을 깎아달라고 구단에 부탁한 후 올해 이름값에 걸맞는 투구를 해야할 것이다. 최동원이 아무도 믿지 않는 '은퇴'와 '유학'을 공공연히 내뱉는 것도 잘못이다."
- 침체에 빠진 롯데의 이날 경기를 지켜보던 한 팬의 푸념 1988년 5월 7일 경향신문

한편 최동원 측과 구단 간에 끝모르는 갈등이 이어지자 롯데 팬들 역시 분노가 폭발했다. 팬들은 최동원 부자와 구단 양측은 물론 에이스의 부재로 허덕이며 연패에 빠진 선수단과 코칭스태프 모두에게 분노를 토해냈다. 1988시즌 사직구장에서 유독 오물 투척 사건이 많이 일어났는데, 롯데 팬 관련 사고 중 최악의 사건으로 꼽히는 관중 쇼크사망 사건이 발생한 것도 바로 이해 5월 31일이었다. # 또한 OB 구단 버스 유리창 파손 사건이 벌어지기도 했다. 88시즌 롯데 관중의 거듭된 소요 사태는 언론에도 여러 차례 보도되면서 올림픽을 앞둔 시민의식을 우려하는 언론 보도가 나오기까지 했다. 이러한 롯데 팬들의 거듭된 난동 사건의 밑바탕에는 에이스가 개점휴업 상태에 팀은 추락을 거듭하고 있는 현실에 대한 팬들의 분노와 울분이 깔려 있었다.

2.9. 진행과 결렬이 반복되는 연봉 협상

반성문 사건으로 3월말 협상이 결렬된 이후 4월초 최동원 측이 현역 은퇴 및 미국 유학을 연이어 선언했고, 롯데와 최동원 측은 4월 한달간 전혀 접촉이 없는 냉각기가 지속되었다. 최동원은 팀에 합류하지 않고 개인 훈련을 지속하고 있었다. 그러는 동안 부산 시민들의 여론은 악화되고 있었고, 롯데 구단 박종환 전무가 협상 의지를 상실한 채 한발짝 물러선 상황에서 최동원 부자도 롯데 프런트 실무진들도 답답해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롯데 구단은 최동원과의 연봉 계약 타결을 위한 유화책을 던지기도 했다. 4월 30일 롯데 구단이 개인 훈련 중인 최동원에게 보류수당 명목으로 2백22만원을 지급한 것이었다. # 이 액수는 협상 결렬의 원인인 90만원보다 훨씬 큰 액수였다. 그러나 이 액수는 나중에 최동원의 연봉협상이 타결되면 거기에서 공제되도록 되어 있는 돈이어서 별 효과는 없었다. 그래도 최소한 롯데 구단이 연봉 협상을 진척시키고자하는 의지를 보인 것이었다. 한편 일부 언론은 롯데가 최동원에게 보류수당을 지급한 것에 대해서 일반인들에게는 연봉에 해당하는 거액을 '놀고 있는' 보류선수에게 지불한다고 비판하기도 했다.[6]

이어 5월초 부산야구의 대부 김근준씨가 중재에 나서 타결의 실마리를 찾아가고 있었다. 그런데 그때 최동원이 KBS TV와의 전화인터뷰에서 "박종환 씨가 팬들과 나를 우롱했습니다"고 말해버려 분위기는 다시 급냉각되고 말았다. 롯데 박종환 전무는 야구선수 출신으로 최동원에게는 경남고 야구부의 까마득한 대선배였다. 그런 선배를 '박종환 씨'라고 호칭한 것부터가 결례라는 것이었다.

지속적으로 여론이 악화되자 최동원 측은 출전하지 못한 날짜 만큼 감봉조치를 수용하겠다며 전향적인 자세로 협상을 재개하고자 하는 의지를 나타냈다.[7]
롯데구단과의 감정대립으로 40여일 째 마운드에 서지 않고 있는 최동원이 구단에 계약의사를 밝혀 해결의 실마리를 찾게 됐다. 최동원의 아버지 최윤식씨는 지난 9일 어우홍 감독과 구단 측의 신길송 부장, 최경렬 차장 등과 만나 계약의사를 통고했다. 최동원의 아버지 최윤식씨는 『박종환 전무와의 관계는 제쳐두고 작년과 같은 8천9백10만원으로 계약을 하겠다』며 『그 동안 경기에 출전하지 못한데 대해서는 감봉조치도 감수하겠다』고 말했다.
1988년 5월 12일 중앙일보
5월 10일~12일 다시 협상이 재개되었으나 서로 쌍방의 선사과를 요구하면서 진전이 없었다. 5월 17일 양측이 다시 만났으나 결국 협상은 결렬되었다. #

5월말이 되자 전기리그에서 롯데가 플레이오프에 진출할 가능성이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롯데 구단은 최동원이 전기리그에는 더 이상 출장할 필요가 없기 때문에 한달 후 후기리그에 임박해서 다시 최동원측과 협상이 재개되길 희망한다고 말했다.

롯데가 6월말까지 더 이상 협상 테이블을 차릴 필요가 없다고 말하자, 최윤식은 사태의 해결을 위해 당시 구단주를 맡고 있던 롯데그룹 신준호 부회장에게 편지까지 썼으나[8] 신준호 구단주는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3. 결말

3.1. KBO 중재

재계약 문제로 구단과 마찰을 빚어온 롯데 최동원이 마침내 14일 한국야구위원회(KBO)에 중재신청을 했다. 최동원의 아버지 최윤식씨는 "재계약 문제로 더 이상 시간을 끌 수 없다. KBO에서 조사를 해 조속한 시일 내에 시비를 가려주기 바란다"고 말했다.
1988년 6월 15일 동아일보
롯데가 전기리그가 끝날 때까지 아예 협상을 포기할 기색을 보이자, 최동원 측은 답답했는지 6월초 KBO측에 중재 요청을 타진하기 시작했다. 마침내 6월 14일 KBO 이웅희 총재에게 공식적으로 중재신청서를 제출했다. 연봉 문제로 KBO에 중재를 요청한 것은 최동원이 사상 첫 사례였다. #

그러나 KBO 이용일 사무총장은 "개인의 연봉싸움을 총재가 어떻게 중재에 나서느냐"며 중재 신청 접수 자체를 거부했다. 그러나 최동원 측이 KBO에 중재를 요청해왔다는 사실이 야구계에 알려지자 여러 야구인들이 최동원 사태의 해결을 위해 나서 이용일 총장을 설득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결국 KBO가 이를 접수하고 직접 중재에 나서게 된다.

6월 27일 이용일 KBO 총장이 직접 중재에 나서 양측의 구두 사과를 제안했다. 롯데 구단이 이에 응했으나, 최동원이 이를 거부하며 또다시 협상은 결렬되고 말았다.
최동원 재계약 난망

롯데 최동원(30)의 연봉 재계약 교섭이 계속 난항이다. 한국야구위원회 (KBO)는 27일 최동원과 롯데구단간의 재계약을 위한 중재에 나섰으나 실패했다. 이날 양측의 대면은 이용일 KBO 총장과 최동원의 아버지 최윤식(58)씨의 합의로 이루어졌다. 그러나 부산에서 비행기로 상경한 최동원은 『구단에 사과해야할 아무런 이유가 없다』는 태도를 고수했다.

이용일 총장은 『양측에 대한 중재 노력을 계속하겠다』며 『현재로서는 극적인 타결이 이루어지지 않는 한 합의가 어려운 상황』이라고 말했다.
1988년 6월 28일 중앙일보
이후 사태는 답이 없는 것으로 보였다. KBO 이용일 사무총장은 연봉 문제에 직접 나서길 꺼렸다. 그러던 상황에서 주간야구 김창웅 사장이 중재자로 나섰다. 김창웅의 중재로 양측이 만난 자리에서 롯데의 박종환 전무가 먼저 "동원이 아버지. 그동안 나때문에 심기가 불편했다면 미안하오"라고 말하면서 극적으로 연봉 계약이 타결되었다.
롯데 최동원(30)이 구단측과 극적으로 연봉재계약에 합의, 29일 오전 한국야구위원회 (KBO)에서 계약을 했다. 최(崔)의 계약조건은 작년과 같은 연봉 8천9백10만원이나 5개월간 보류선수로 묶여있어 올시즌 연봉은 4천4백55만원이 된다.

부산에서 상경한 최동원은 이제까지의 태도를 바꾸어 KBO 이웅희 총재 앞에서 롯데구단측에 사과했으며 이에 앞서 롯데 박종환 전무가 최동원의 아버지 최윤식씨에게 사과의 뜻을 전했다.
1988년 6월 29일 중앙일보
롯데 최동원이 한국시리즈 출전자격 시한을 하루 앞둔 29일 88시즌 연봉 재계약을 체결했다. 최동원과 그의 부친 최윤식씨는 29일 한국프로야구위원회(KBO) 사무실에서 이웅희 KBO 총재가 참석한 자리에서 롯데구단에 그동안 물의를 빚은데 대해 사과하고 연봉 8천9백10만원에 재계약했다. 그러나 최(崔)는 2월말부터 6월까지의 5개월분 연봉을 뺀 4천5백만원만을 받게 된다.

구단은 이면계약에 따라 지난해와 같은 8천9백10만원을 제시한 반면 최동원측은 9천만원을 요구하면서 뒤틀리기 시작한 최(崔)의 연봉 협상은 상호비방과 인신공격의 추한 양상을 띠어왔다.
1988년 6월 29일 경향신문
결국 한국시리즈 출전 자격 시한을 하루 앞둔 6월 29일 KBO의 중재로 가까스로 계약이 체결되었다. # 결국 이날 전년도와 동일한 8910만원으로 동결되는 것으로 계약이 체결되었다. 비록 동결되었지만 최동원은 여전히 연봉 1위라는 자존심을 지켰다. 그러나 2월1일부터 6월28일까지 149일분의 사고감액 4425만3천원에다 이미 지급한 보류수당 898만4,250원을 제한 실수령액은 3586만2,750원에 지나지 않았다.

3.2. 어우홍의 꾀

나중에 하나의 반전이 밝혀지게 되는데 그것은 계약 지연의 결정적인 원인이 된 '박종환 반성문'의 아이디어가 어우홍 감독에게서 나온 것이라는 점이었다. 당시 롯데 감독이었던 어우홍과 최동원의 아버지 최윤식은 절친한 사이였다.

어우홍은 롯데 감독이 되고 나서 프런트의 박종환 전무와 껄끄러운 관계였다. 어우홍과 박종환은 모두 부산에서 잔뼈가 굵은 야구인이었는데 어우홍이 6살 연상으로 훨씬 선배였다. 롯데 구단에서 당시 단장 지위에 있었던 박종환 아래서 감독을 하려다보니 어우홍으로서는 당연히 마음에 내키지 않는 부분이 생겼을 터.

시즌 개막을 앞두고 최동원과의 계약이 지연되자 박종환 전무는 조급해졌고 계약 성사를 위해서라면 "최윤식 앞에서 무릎꿇고 빌 용의도 있다"고 말했는데 이를 들은 어우홍 감독은 꾀를 내었다. 어우홍 감독은 박종환 전무의 기를 꺾어놓기 위한 절호의 찬스라고 여기며 반성문 아이디어를 냈다. 어우홍은 쉽게 반성문을 얻어낼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최윤식을 꼬셨던 것이다. 반성문 내용에 선수단 운영과 관련된 내용까지 들어가게 된 것도 어우홍이 반성문의 초안을 잡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막상 최윤식이 박종환에게 반성문을 요구하자 롯데 프런트 직원들이 모두 들고 일어났다. 박 전무가 반성문을 쓰는 것은 구단 전체의 입장에서 반성문을 쓰게 되는 것이고 이는 있을 수가 없는 일이라며 프런트 직원들이 박 전무를 만류했다. 결국 롯데 구단은 반성문 작성을 거부했다. 그런데 이 사건이 외부에 알려지면서 부산 민심은 걷잡을 수 없게 되었고 시즌이 시작되기 직전에는 타결될 것이라고 예측되었던 최동원의 연봉문제는 장기화되고 말았던 것이다.

박종환이 반성문 작성이 어우홍이 주도한 일임을 알게 된 것은 우연한 계기였다. 1989년 6월 27일[9] 성적 부진 및 관중 소요에 책임을 지고 구단을 떠난 박종환은 미국으로 가서 2년 정도 머물러 있다가 귀국 후 집안을 정리하던 중 위에서 언급한 최윤식이 신준호 구단주 앞으로 쓴 편지를 발견했고 거기에 반성문 사건의 진상이 담겨 있음을 알게 되었던 것.

사실 결과만 보면, 어우홍 감독은 반성문 사건으로 가장 큰 피해를 본 사람 중 한명이다. 최동원 계약 파문이 반성문 사태로 장기화되면서 어우홍은 최동원을 반시즌도 쓰지 못했고 결국 1989시즌 롯데가 최하위로 떨어지면서 경질되었다.[10]


[1] 대표적인 예로 은퇴 과정을 들 수 있다. 최동원은 훗날 인터뷰에서 깔끔하게 은퇴를 결심한 것처럼 말했지만 당시 신문 기사들을 보면 삼성이 연봉을 깎으려 하자 이에 반발하며 은퇴 선언, 롯데로 재트레이드 요청, 롯데 구단측에 직접 트레이드 타진, 해외 이적 타진, 유학 선언 등을 반복하며 거의 반년간이나 실랑이를 벌이다가 부산시의원 선거에 출마하면서 자연스레 은퇴하게 되었다. 사실 당시 최동원은 지방선거에 출마하면서도 정계 활동과 함께 선수 생활을 병행하겠다고 인터뷰했었다. 선수협 결성에 관해서도 최동원 본인의 인터뷰 증언과 과거 기사가 일치하지 않는다.[2] 이 규정은 1990년 시즌 후 폐지됐다.#[3] 1987시즌 롯데 자이언츠의 감독은 성기영이었다. 성기영 감독은 1987시즌 한국시리즈 진출에는 아쉽게 실패했지만 3위라는 나쁘지 않은 성적을 기록했다.[4] 최동원은 이듬해인 1989년 5월, 서울대 음대 출신의 신현주 씨와 비공개로 결혼식을 올렸다.[5] 윤학길의 1988~1989시즌의 활약과 혹사는 전성기 때의 최동원 못지 않았다. 다만 승수에 있어서 최동원에게 밀리는데 최동원은 구원승이 많았던 것이 한 요인이었다. 반면 윤학길은 KBO 역대 투수 가운데 최다 완투를 기록한 선수로 그의 117승 중에서 무려 75승이 완투승이었다. 이처럼 윤학길 역시 최동원의 혹사에 비견될 정도의 많은 이닝을 던졌지만, 선수 시절의 정점을 달리던 90년대 중반에도 최동원의 전성기 때 연봉보다 낮은 연봉을 받았다. 당시 엄청나게 오른 물가를 감안하면 더욱 차이가 난다.[6] 88년 당시 대기업 대졸 초임이 30만원, 공무원 1호봉이 15만원 정도였다.[7] KBO 규정상으로나 법률상으로나 출전하지 않은 기간에 대해서 감봉을 피할 수는 없었다. 최윤식은 친적 중 이택규 변호사에게 법률적인 자문을 수시로 구했었다.[8] 이 편지는 후술하는 것처럼 반성문 사건의 진상이 담겨 있던 편지였다.[9] 공교롭게도 3일 전 최동원이 삼성에 정식으로 합류한 상황이었다.[10] 어우홍 감독의 경우 결국 최동원이 트레이드되면서 롯데 마운드의 원천적인 붕괴를 막지 못했다. 그나마 윤학길과 신인이었던 김청수, 서호진을 등용하며 어떻게든 마운드의 공백을 메워보려고 했지만 결국 실패했고, 팀도 트레이드 여파로 인해 후유증이 상당했기 때문. 최동원이 88년 후기리그에서 그나마 이닝을 많이 먹으며 윤학길의 부담을 어느정도 지워준것을 감안한다면 굉장히 아쉬운 대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