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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동원/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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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야구 관련3. 야구 외

1. 개요

최동원의 여담을 설명하는 문서이다.

2. 야구 관련

  • 흔히 최동원이 기록한 한국시리즈 4승을 "다신 나올 수 없고, 다신 나와서도 안 되는 기록."이라고 부른다.
  • 롯데의 계약금 미지급으로 시작된 최동원과 롯데의 갈등 역사는 연봉 협상 및 지급을 둘러싼 갈등, 선수협 창설 과정에서 보복성 트레이드 단행 등으로 뿌리가 깊다. 최동원의 팬들이 도저히 롯데를 좋아할 수 없게 만든 사건들이 많았는데 상세 내용은 롯데 자이언츠/논란 및 사건사고/구단 관련 문서 참조.
  • 이선희, 장효조와 더불어 프로야구가 5년만 일찍 생겼더라면의 단골 떡밥 중 하나다.
  • 차가워보이는 이미지의 선수였지만 팬 서비스가 매우 좋았던 선수였다. 팬들의 열화와 같은 싸인 요청에도 절대 찡그리지 않고 싸인을 다 해줬고 자신의 앞으로 온 팬레터에는 한 장도 빼놓지 않고 사비를 털어서 만든 싸인 엽서에 감사 인사와 싸인을 해서 답장을 전했다고 한다. 선수협 파동으로 인해 삼성으로 보복성 트레이드를 당한 후에도 자신에게 싸인을 요청하는 롯데 팬들에게 변함없이 친절하게 싸인을 해줬다고 한다.[1] 안타까운 것은 삼성 유니폼을 입고 롯데 팬에게 싸인을 해주던 최동원과 그에게 싸인을 받은 롯데 팬이 모두 뒤돌아서서 눈물을 흘렸다는 점이다. 팬들을 위한 최동원의 마음은 그의 사망 직후 방영된 MBC 스페셜에도 나오는데 프로그램 막바지에 모친 김정자 여사가 자택에 보관하던 싸인 엽서 뭉치를 보여주는 장면이다. 최동원이 삼성으로 이적한 후는 물론 은퇴 후에도 팬레터에 대한 답장으로 써줬다는 그 싸인 엽서에는 롯데 자이언츠 11번 최동원이라는 글씨가 너무도 선명히 적혀 있었다. 자신을 매몰차게 버렸던 구단이었지만 끝까지 롯데를 잊지 않았던 최동원의 생전 모습에 많은 롯데 팬들이 눈물을 흘렸고 롯데 구단에 분노했다.
  • 본인이 패전투수가 되면, 귀가 후 집에서 몰래 나와 술을 엄청 먹었다고 하며, 그럼에도 다음 날 운동을 그렇게 열심히 했다고 한다.
  • 최동원이 쓰던 금테안경은 그의 상징과도 같은 물건이다. 그래서 안경 에이스라고도 불린다.
  • 1984년 한국시리즈의 임팩트가 매우 크고 프로 데뷔 이전이라 잘 알려져 있진 않으나, 이전에도 최동원은 시리즈를 홀로 책임지고 우승으로 이끈 적이 있다. 바로 1981년 코리안시리즈. 당시 실업 롯데 자이언트 소속이었던 최동원은 6경기 중 6경기에 전부 등판해 42⅓이닝 2승 1패 1세이브 방어율 2.32를 기록하는 괴력투를 선보였다.
    • 당시 최동원의 괴물같은 실력과 연투능력을 같은 팀에서 두 눈으로 직접 본 박영길 당시 롯데 자이언트 감독은 삼성이 한국시리즈 상대로 롯데를 고르고 져주기 게임을 할 때 팀에서 유일하게 반대했다고 한다.[2][3] 그리고 결과는...
  • NC 다이노스 창단 당시 초대 감독 후보로 물망에 오른 사람들 중 1인이었다. 특히 NC의 김택진 구단주가 어린 시절부터 최동원의 오랜 팬이었기 때문에 영입이 강력하게 추진됐다. 당시에는 암 투병 중이었기 때문에 무산되고 그 대신 건강이 회복된 뒤에 프런트나 코칭스태프로 모셔올 계획이었다. 그러나 끝내 최동원이 병마를 이기지 못하고 사망하면서 이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김택진 구단주는 김경문 감독과 함께 최동원의 빈소를 찾았는데 조문 후 인터뷰에서 "최동원 선수는 제 마음 속에 영원한 별이십니다"라며 눈물을 쏟았다.
    • 결국 NC 다이노스가 2020년 한국시리즈에서 우승을 차지하자 김택진 구단주가 한국시리즈 우승 트로피를 가지고 고인의 봉안당[4] 찾았다. 이에 최동원의 모친 김정자 여사가 김택진 구단주에게 감사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 2012년 9월 11일 사직 야구장 두산 베어스 vs 롯데 자이언츠전에서 그의 아들인 최기호 군의 시구가 화제가 되기도 했다. 피는 못 속이는지 특유의 역동적인 투구폼과 묵직한 구위를 선보이며 팬들을 아련하게 만들었다.[5] 타석에 있었던 이종욱이 놀랐을 정도.
  • 2012년 10월 25일, 매니지먼트 게임인 프로야구매니저는 원년시즌까지의 선수카드를 업데이트 했으며 최동원이 활약했던 시즌의 카드를 업데이트했다. 특히 한국시리즈 4승의 역투로 기억되는 1984년 카드는 EX카드로 나와 최동원을 모르는 어린 야구팬들도 최동원의 위대함을 간접적으로 알게 되었다.
파일:attachment/영원우표/Korea_stamp.jpg
* 영원우표가 발매되었다.
  • 2015년 3월 28일, 최동원 모친 김정자 여사가 2015 한국 프로야구 kt wiz롯데 자이언츠의 개막전 경기에 앞서 시구를 했다. 최동원의 현역시절 투구폼을 그대로 재현한다고 해서 많은 롯데팬들의 기대를 받았는데, 아니나 다를까 여든이 넘은 나이에도 비슷하게 투구폼을 소화해냈다. 투구폼 뿐만 아니라 생전 공을 던지기전에 버릇[6]까지 똑같이 보여주면서 뭇 야구팬들의 눈시울을 붉혔다.
  • 최동원과 롯데에 대해 유명한 글이 있다.
제목: 우리아버지한테 기아는 왜 우승을 많이했어요? 라고 물었거든


아버지가 해태는 선동렬을 데리고 우승을 많이했다고해서 왜 롯데는 최동원데리고 1번입니까? 라고 물으니까 롯데가 최동원을 데리고 우승한게아니라 최동원이 롯데를 데리고우승했다.......라고 하심 개꼴데
원년팬의 평가
  • 롯데 자이언츠에 입단하는 과정에서는 당시 감독이었던 박영길의 인맥이 작용했었는데, 박영길은 최동원의 조부가 부산 충무초등학교 교장으로 있었을 때 만든 야구부에서 야구를 배웠다고 한다. 이로 인해 박영길 감독이 최동원을 롯데로 데려올 때 조부의 도움을 받았었다고.
  • 조종규 전 심판위원장은 대한민국 최고의 투수 5명을 뽑아 달라는 질문에 그 첫 번째로 서슴없이 최동원을 꼽았다. 카리스마 있는 피칭, 연투능력, 그리고 승리에 대해 투철했던 집념을 이유로 들었다. 나머지 4인은 선동열, 김시진, 송진우, 류현진 순으로 꼽았다.
  • 마이 리틀 텔레비전에 출연한 허구연은 자신이 경험한 우리나라에서 빈볼을 가장 잘 던지는 투수로 최동원을 꼽았다. 최동원은 때리겠다고 하면 진짜로 때렸다고...최동원이 빈볼을 때릴 것 같은 조짐이 보이면 타석의 타자들이 멀찍이 물러서서 볼을 치지 않겠다는 의사표현을 할 정도였다고.
  • 전설의 타이거즈에서 김성한이 술회하기를 김성한이 유독 상대하기 힘들었던 투수가 최동원이었고 실제로 최동원의 투구에 손목을 맞아 골절상을 입고 한동안 경기에 출전하지 못했다고 한다. 그러나 상대전적은 김성한이 괜찮았다고 한다. 같은 프로그램에서 이건열은 정해진 포지션 없이 땜빵으로 떠돌기만 하다가 김성한의 부상 당시 주전 1루수로 계속 출전기회를 얻으면서 괜찮은 타격성적을 기록했으나 김성한이 무려 2주만에 복귀하자 혀를 내둘렀다고 했다.
파일:레전드40최동원.png
  • 컴투스 프로야구 V22의 초대 광고모델로 선정되었다. 컴투스 측에서 CG로 최동원의 생전 선수시절 모습을 만들어내고 음성은 AI음성복원을 사용해 상당히 높은 퀄리티의 광고를 만들어내며 야구팬들의 호평을 받았다.[7] 2022년 올스타전에서 레전드 40 선정 선수들의 특별 시구가 있을 때 광고 영상이 활용될 정도.
  • 워낙 한국 야구계에서 전설적인 선수이기에 KBO에 온 외국인 선수들이나 외국인 감독들에게 최동원의 투구영상을 보여준 뒤 평가를 묻는 이벤트도 종종 진행한다.

2.1. 한국프로야구선수협회의 창시자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한국프로야구선수협회/역사 문서
1번 문단을
부분을
참고하십시오.
  • 동료 선수들의 기본생계권을 보장하기 위해 선수협을 창단했던 것을 보면 야구 실력뿐만 아니라 인간적인 정의감과 소명감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실력뿐 아니라 인성까지 갖추었던 진정한 1인자.

3. 야구 외

  • 최동원의 부친 최윤식 씨는 6.25 전쟁에 참전했다가 한쪽 다리에 부상을 입은 상이용사였고 모친 김정자 여사는 초등학교 교사로 일했으며, 교감으로 정년퇴직하였다. 특히 최윤식 씨는 생전 최동원의 실질적 에이전트를 자처하며[9] 연봉 협상 때도 롯데 프런트와 만나 협상에 나섰다고 알려져 있다. 특히 1988년 초 연봉 협상 과정에서는 박종환 당시 롯데 전무와 갈등을 일으킨 적도 있다. 최동원 90만원 사건 참조.
  • 김정자 여사는 교사 경력을 살려 어르신들을 대상으로 하는 한글 강좌 등에도 나선다고 전해진다. 어머니 김정자씨가 자주 사직구장 광장에 있는 아들의 동상을 보러 가시는게 포착되어 팬들의 가슴을 먹먹하게 했다.
  • 평소 생활도 소탈했다고 한다. 오로지 야구밖에 몰랐던 그는 경기장 밖에서는 대부분 추리닝 차림새에 , 담배는 물론이거니와 심지어 고기조차 거의 안 먹었다고 한다. 가장 좋아했던 음식은 모친 김정자 여사가 해주던 김치쌈이었는데, 실제로 1980년대 모 잡지에서 프로야구 선수들의 여름 보양식에 대해 인터뷰를 할 적에 다른 선수들은 보약, 장어, 홍삼 등 오만 보양식을 논했지만, 최동원은 찬 물에 밥 말아서 김치 싸먹으면 그게 보양식이라는 대답을 했다고... 물론 고기나 보약 같은 선물들이 들어올 때가 있긴 했지만 항상 지인들에게 나눠줬고, 특히 1958년 개띠라서 에 대해 애착을 보였던지라 누군가 개소주를 보내주면 진심으로 화냈다는 일화가 있다. 유일하게 보양식으로 먹었던 것이 인삼대추를 달인 물. 그런데 정작 서구화된 식습관이 주 원인으로 지목받는 대장암으로 세상을 떠난 게 참으로 아이러니하지 않을 수 없다.
    • 최동원이 대장암으로 사망한 것을 놓고 자존심이 강한 최동원이 롯데에서 트레이드된 후 겪었던 엄청난 스트레스가 원인이 된 게 아니냐는 추측이 있기도 하다.[10] 야구를 그만두고 평생 입에 대 본 적이 없는 술을 마셨을 때, 주변 사람들 입을 모아 최동원이 술을 마시는 장면을 그동안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다고 말했을 정도였다.
  • 그라운드에서의 자신만만하고 오만하기까지한 이미지와는 달리 사적으로 만나면 겸손하고 수수했다고... 1990년대 모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한 모습을 보면 구수한 말투에 주위 사람들과 어울리려고 노력하는 태도를 볼 수 있다. 보기보다 입담도 상당해서 한창 TV에 나올 적에 예능 게스트로 자주 얼굴을 비춘 적이 많았다. 요즘 야구 선수들이 은퇴하고 예능에 자주 진출하는 등 스포테이너 행보를 보이는 경우가 많은데, 그 시초가 되시겠다.
  • 정치적 이유로 각종 데모와 시위가 많던 1980년대, 시위에 참여하는 군중 속에 끼어있던 최동원 선수에게 놀란 행인들이 혹시 야구선수 최동원 아니냐고 묻자, "예, 저 최동원 맞심더."라고 답하고 태연하게 시위를 계속하더라는 일화가 있다.(2011년 9월 방영된 KBS 스페셜 참조)
  • 1980년대 말 노사분규가 극심했던 시기, 부산지역 언론노조에서 총파업을 했을 때 무기명 후원금을 기탁했다고 한다.(MBC 다큐스페셜 '불멸의 투수, 최동원' 참조)
  • 2015년 2월 5일, 불법 소금물 관장 시술을 하던 목사 부부가 체포되었는데 이들이 진행한 9박 10일 캠프에 암 투병 중이던 최동원도 사기를 당했던 사실이 확인되었다.[11]
  • 롯데 구단은 2016년 11월 1일자로 최동원의 아들 최기호 군을 육성팀 직원으로 채용하기로 결정했다. 2022년 올스타전에 참석할 때에는 일본에서 직장을 다닌다는 소식이 들리며 현재는 구단에서 직장을 옮긴 듯 보인다.
  • 2017년 부산KBS의 '부네스코 위원회'라는 프로그램에서 부산을 상징하는 인물로 최동원을 다뤘다.
  • 2019년 5월 14일 부산대학교 총학생회에서 최동원 동상을 발로 밟고 인증사진까지 찍어서 논란이 됐다. 이곳은 최동원의 노모가 자주 들리는 곳이기에 그야말로 고인은 물론 유족의 가슴에 피멍을 만드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나마 최근들어 팬들이 직접 쓰레기를 치우는 등 관리를 하고 있지만 일부 시민들의 행동이 롯데 팬들에게는 씁쓸한 역사로 남았다.
  • 롯데 구단의 최동원 생전 푸대접이 심각했다. 삼성으로의 트레이드는 아무래도 최동원이 선수협을 만든 것부터 하여 정부에서 미운털이 박혀 압박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기에 구단 입장에선 어쩔수 없었다고 이해해보려 노력은 할 수 있지만, 롯데와 부산 야구팬들을 위해 말 그대로 자신의 수명과 건강을 대가로 이 악물고 강속구를 던진 전설이자 상징 그 자체인 투수의 장례식 비용을 타 구단 모기업인 한화에서 대줬다는 것은 문제가 있다.
  • 문재인 전 대통령과 인연이 있다. 부산광역시 지역의 명문인 경남고등학교 동문[12]이기도 하고 최동원이 선수협을 창단할 당시 변호사였던 문재인이 관련 법률 상담을 해주었다고.
  • 최동원 추모사업회가 존재한다. 이곳에서 최동원 상을 만들었으며 시상 또한 주관한다. 영화 1984 최동원 또한 이곳에서 주관해 만들었다.

[1] 심지어 타 팀이자 라이벌 팀이었던 해태 팬들한테도 마찬가지였다고 한다.[2] 1984년 당시 삼성 타격코치로 재직 중이었다.[3] 당시 삼성은 전후반기 통합 우승을 노렸으나 상황이 여의치 않게 되자 상대를 OB와 롯데 중 골라야 하는 상황이었다.[4] 경기도 고양시 청아공원.[5] 야구를 배우긴 했지만, 너무 늦게 시작한 탓인지 제대로 자리를 잡지 못하고 그만뒀다고 한다. 그 후 일본 도쿄의 데이쿄 대학교(帝京大学) 경영학과에서 스포츠 경영과 마케팅을 공부하고 있는 중이라고[6] 투구 전 송진가루, 신발끈, 겉양말, 안경, 모자챙을 차례로 만지고 공을 던지는 버릇[7] 옥의 티라면, 라이온즈 파크에서 촬영한 것이다. 물론 롯데가 대구에서 우승을 했지만 대구 시민운동장 야구장에서 한 것이기 때문에, 라팍이 아닌 시민운동장 야구장에서 했다면 더 만족스러운 광고가 됐을 것이다.[8] #[9] 이 당시만 해도 한국프로야구 선수에 대한 에이전트 활동은 허가가 나지 않았던 시절이었다.[10] 대장암의 주요 발병 원인 중 하나가 극심한 스트레스이다.[11] 최동원이 불법 시술에 동조한 것이 아니라, 암 투병 중인 상태에서 시술을 받기 위해 캠프에 참여한 것. 캠프에 참여하면 9박 10일 동안 매일같이 소금물 관장만 한다. SBS에서 방영된 궁금한 이야기 Y에서도 이 소금물 관장에 관한 내용을 다루며 최동원의 자료를 인용하였다. 피해자 대부분이 병세가 심각해 병원에서 손쓸 도리가 없어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캠프에 참가하였다. 실제로 방영된 영상의 최동원을 보면 야구팬들 입장에서는 씁쓸함이 절로 밀려올 정도다.[12] 문재인은 1968년, 최동원은 1974년 입학했다. 김영삼 전 대통령도 경남고등학교 동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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